참봉 이공 묘표(參奉李公墓表)
율곡(栗谷) 이문성(李文成) 선생의 백형인 참봉 휘(諱) 선(璿)은 일찍 세상을 떠났으나 아들 둘을 두었는데 공이 막내이다. 공의 휘는 경항(景恒), 자는 상보(常甫)이다. 선생이 석담(石潭)에 터를 정하여 살 집을 짓고 사당(祠堂)을 세운 다음 맏형수인 곽씨(郭氏)를 모셔다가 사당을 맡게 하였다.
공은 이때부터 선생을 모시고서 《격몽요결》, 사서, 《심경》, 《근사록》 등의 책에 대해 수업을 받았는데 서울에서나 지방에서나 선생 곁을 떠난 적이 없다. 선생이 돌아가시자 공은 아버지를 잃은 듯 울부짖으며 그리워하였다. 장례를 치르고 돌아와서는 길이 멀어 제때에 성묘하지 못하였으나 매양 비바람 치고 서리 내리면 슬퍼서 눈물을 흘렸다.
공은 가정(嘉靖) 을축년(1565, 명종 20)에 태어나 6세 때 부친을 잃었고 18세에 어머니가 돌아가셨다. 상복을 벗고 나서 단양 우씨(丹陽禹氏) 감(瑊)의 딸에게 장가들어 해주의 입암(立巖)에 터를 잡고 살았다. 석담과의 거리는 7, 8리 남짓 되어 선생의 여러 제자들과 은병정사(隱屛精舍)에서 옛 학문을 연구 토론하여 깊이 자득하였다.
아울러 과거 공부를 하여 일찌감치 시를 잘한다는 명성을 떨쳤으나 여러 차례 대과에 떨어져 사람들 모두 안타깝게 여겼으나 공은 태연한 마음으로 개의치 않았다. 공은 빈한한 환경에서 성장하여 부인 집안의 재물을 계기로 비로소 가세를 일으켰지만 또한 남에게 베풀기를 좋아했다. 땅을 처분하여 빈궁한 자의 혼사나 상사를 도와주어 끝내 자신은 가난하게 되었어도 후회하지 않았으니 공이 재물을 가벼이 여기고 의리를 중요시 여긴 것이 대개 이와 같았다.
임진왜란 때 대가(大駕 선조(宣祖)가 서쪽으로 피난가자 공이 호위하여 따라갔으므로 직장(直長)에 제수되었다. 광해군이 들어서자 과거 공부를 그만두고 두문불출하였다. 병진년(1616, 광해군 8)에 참의 최기(崔沂)의 해주옥사(海州獄事)에 걸려들었는데 이이첨(李爾瞻) 등이 기필코 무거운 벌을 주려고 하였고, 공이 억울한 사연을 호소하는 글을 올리자, 광해군이 “이경항은 현명한 부형(父兄)을 두었으니 반드시 범한 죄가 없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이첨 등이 또 죄명(罪名)이 남다르니 온전히 석방해서는 안 된다고 하여 끝내 괴산(槐山)에 유배가 8년을 지냈으며 인조(仁祖)가 반정(反正)에 성공하여 왕위에 오르자 특별히 사섬시 참봉(司贍寺參奉)에 임명하였으나 공은 늙고 병들었다고 하여 나아가지 않았다. 나이 65세 때인 만력 기사년(1629, 인조 7)에 작고하여 해주 서쪽 고산(高山) 대사동(大寺洞) 계좌(癸坐) 언덕에 안장되었다.
부인 우씨는 공보다 10년 먼저 죽었으며 같은 언덕이지만 묏자리는 다르다. 선생의 도덕과 문장이 크게는 천사(天使) 황모(黃某)와 왕모(王某) 두 사신에게 경탄받은 이후로 중국 사람 또한 우리 조선에 덕수 이씨(德水李氏)가 있음을 알았으나, 공은 선생의 조카이면서도 그 가계가 드러나지 못하였다.
공의 외조는 습독(習讀) 휘 곽연성(郭連城)으로 본관은 선산(善山)이다. 공의 외아들 운(秐)은 전부(典簿)로 회덕 현감(懷德縣監)을 지낸 적이 있어 우암과 동춘당 두 분 선생에게 존중받았다. 딸 둘은 각각 사인 오달정(吳達政)과 현감 민희원(閔希遠)에게 시집갔다. 충(种), 갈(秸), 급(禾+及)은 측실 소생이다.
전부 운은 1남 5녀를 두었는데, 아들 후징(厚徵)은 선교랑(宣敎郞)이다. 선교랑 후징은 3남 2녀를 두었는데, 아들은 면(緬), 굉(紘), 횡(紭)이다. 면은 경학(經學)과 의로운 행동으로 알려졌다. 현손 이하는 다 기록하지 않는다.
아, 공의 행적을 기록한 사람은 면의 아들 화익(華翼)인데, 면에게서 들은 것을 추가로 기록하려고 하는데도 어떻게 자세히 할 수 있겠는가. 다만 동시대의 여러 선생들이 칭찬하였으니, 우계(牛溪) 성문간공(成文簡公)은 “마음이 아름다워 고인의 풍모가 있다.”라고 하였으며, 사계(沙溪) 김문원공(金文元公)은 “본성대로 살고 선행을 좋아하였다.”라고 하였으며, 중봉(重峯) 조문렬공(趙文烈公)은 “상보는 대현(大賢 율곡을 말함)의 자제로 부끄러움이 없다고 할 만하다.”라고 하였다.
이 정도면 백세 뒤라도 징험하기에 충분할 것이다. 구태여 많은 말이 필요한가. 공의 묘에 묘표를 세우고자 공의 후손 우빈(禹彬)이 조카뻘 친척 노전(魯傳)을 보내어 나에게 음기(陰記)를 지어 주기를 부탁하였다. 글재주가 없다고 사양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아 마침내 대략 이와 같이 썼으며, 이것을 가지고 돌아가서 비석에 새기도록 하였다. <끝>
[주해]
[주01] 이공 : 이경항(李景恒, 1565~1619)으로, 본관은 덕수(德水), 자는 상보(常甫)이다. 부친은 선(璿)이며, 숙부가 율곡(栗谷) 이이
(李珥)이다.
[주02] 서리 내리면 : 돌아가신 부모를 생각하는 것을 상로지감(霜露之感)이라고 한다.
[주03] 해주옥사(海州獄事) : 1616년(광해군 8)에 당시 정권의 실세이던 대북(大北)이 소북(小北)을 누르려고 일으킨 사건이다. 당시 해
주 목사였던 최기(崔沂)는 이이첨의 미움을 받아 감옥에서 고문을 받다 죽었다.
[주04] 황모(黃某)와 왕모(王某) : 명나라 사신 황홍헌(黃洪憲)과 왕경민(王慶民)을 말한다. 《선조실록》 15년 9월 7일 기사에 보인다.
강재집 제11권 / 묘표(墓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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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文]
參奉李公墓表
栗谷李文成先生伯兄參奉諱璿。早世有二子。公其季也。諱景恒。字常甫。先生旣定居于石潭。築室立祠。迎奉丘嫂郭氏。俾主之。公自是侍先生。受要訣四子心近等書。或京或鄕。未嘗離側。先生歿。公號慕如喪父。及葬而歸。以路遠。不得以時省掃。每風雨霜露。爲之愴涕焉。公生于嘉靖乙丑。六歲而孤。十八。丁內艱。制除。娶丹陽禹瑊女。家于海州之立巖。距石潭七八里。與先生諸門人。講討舊學於隱屛精舍。深有自得。兼治擧業。早擅能詩聲。累屈省試。人皆寃之。公悠然不以介意。公長於淸寒。因婦財始爲家。而亦能喜施與。斥土以濟貧竆婚喪。終致屢空。不以悔恨。其輕財重義。蓋如此。壬辰倭難。大駕西幸。公扈從授直長。當昏朝。廢科杜門。丙辰。罹崔參議沂海禍。爾瞻等必欲置重典。及原情。光海曰。李景恒有賢父兄。必無所犯。爾瞻等。又以爲罪名自別。不可全放。遂謫槐山。八載而仁廟改玉。特除司贍寺參奉。公以衰病不就。年六十五而卒于萬曆己巳。葬州西之高山大寺洞負癸原。禹氏先十載沒。同原異壙。自先生道德文章。大爲黃,王兩詔使所敬服。中國人。亦知吾東有德水之李。而公爲先生兄子。則其系不著焉。公外翁習讀諱連城。籍善山。公男秐典簿。嘗宰懷德。見推重於尤,春兩宋先生。二女婿。士人吳達政,縣監閔希遠。而曰种,秸,𥝥。側出也。典簿一男五女。男厚徵宣敎郞。宣敎三男二女。男緬,紘,紭。緬以經術行義聞。玄孫以下。不盡錄。嗚呼。述公行者。緬之男華翼。而追記所聞。其何以詳之。但以一時諸先生稱道。則牛溪成文簡公曰。休休有古人風。沙溪金文元公曰。任眞樂善。重峯趙文烈公曰。如常甫。可謂無愧爲大賢子弟。斯足以徵於百世矣。何必多乎哉。公墓將樹表。公後孫禹彬。遣其族子魯傳。謁余識其陰。以不文辭。不獲。遂略書此。俾歸刻焉。<끝>
剛齋先生集卷之十一 / 墓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