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분이 되면 낮과 밤의 길이가 같아진다.
아직은 낮이 조금 길다.
승지님 일찌기 뜻한바 있어 해가 길 때에 3 T Trail을 완성하려 하신다.
지난번 전초전으로Telegraph를 쉽게 다녀오려 생각하고 출발했는데 웬 걸 예상치 못한 일로 흐지부지 끝났다.
하루 하루의 일이 밥 먹고 숭늉 마시듯 일도 잘 풀리고 안 풀리는 것은 언제나 있는 것으로 다반사라 하지 않는가.
아무 일 없었던 듯 3 T로 가기로 결정하셨다.
아직 해가 조금은 더 길게 남아 있다.
이번이 아니면 내년에 다녀와야 한다.
지난 번 산행에서 무엇이 부족했는지 곰곰이 생각해 본다.
체력이 달리는 것 외에 그리 탓할 일은 없어 보인다.
하루도 거르지 않고 공원 호수변을 2바퀴씩 더 돌았다.
출발 전날 밤에는 보신하라고 집 사람이 없는 돈에 고기를 사다 구어 먹인다.
아침도 간단한 채소는 안된다 하며 햄버거 고기로만 안긴다.
마지막 2마일을 남겨두고 허덕이던 그 모양은 없으리라.
이번은 이제껏 가보지 못했던 가장 긴 코스다.
13마일이나 된다.
걱정이 있는 사람이 또 있다.
연경님은 잠을 한 잠도 못 잤단다.
뭐 좋아서 사랑으로 하는데 그런 것을 누구를 탓하랴.
요즘 아이들 김치 깍두기 안 먹어도 별 불편 없는데 아들 딸들 김치를 좋아한다고 하루 종일 김치 담가 먹이고 재 두고 나니 막상 밤에 한 잠도 자지 못했단다.
뜬 눈으로 새고 아침에 걱정이 돼서 Sunny님께 피곤하고 힘들어 못 간다고 연락을 했단다.
천천히 움직이다 보면 몸이 풀리고 그렇게 피로를 푸는 것이 더 낫다며 어려운 것은 도와줄 테니 가자고 해서 따라왔단다.
애고 그 우정이라는 게 뭔지.
친구 따라 강남 간다는 이야기는 있어도 친구 따라 3 T간다는 말은 오늘부터 새로 생긴 말이다.
걱정이 앞서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회심의 미소를 짖는 사람도 있다.
산사람님 지난 번 Telegraph 봉우리 아래 쌔들에서 밥만 먹고 내려올 때 허전하고 서운함이 많았다.
3 T trail 이라 해서 몸 좀 풀어 볼까 하고 왔는데 발가락에 땀 방울 맺을 시간도 없이 내려 왔으니 말이다.
전화를 걸어서 올 거냐고 물어보고 싶었으나 참고 안 했다.
산사람님은 올 거라고 생각하고 내가 나와 내기를 하고 파두아에 도착했다.
차창에는 몇 방울의 빗물이 덜어지고 날은 흐려 비가 올듯하다.
제법 날씨가 차갑다.
차 트렁크에 여벌로 갖고 다니던 털옷을 챙겨 배낭에 넣었다.
너무 일찍 도착해서 인지 아직도 우리 대원들은 도착하지 않는다.
내 차 서너 칸 옆으로 웬 중국사람이 차를 댄다.
요즘 들어 볼디산에는 중국사람들이 판을 친단다.
우리는 그래도 목요산행이라 주차장도 넉넉하고, 산행길도 한산한데 주말이나 휴일에는 주차하기가 힘들 정도란다.
한국이나 중국 일본 사람들 언뜻 보아 누가 누 군지 구분이 안 가게 모습이 비슷하다.
모습은 비슷하지만 알맹이는 아주 많이 차이가 난다.
내가 한국 사람이라서가 아니고 알맹이는 한국 사람이 제일이다.
전에는 이런 말을 할 자격이 없었는데 송화에서 산행을 하다 보니 하게 되나 보다.
저만치 떨어져 차를 댄 저 분은 중국사람답지 않게 점잖고 교양미가 넘쳐난다.
말 한마디 인사를 나누지 않았지만 척 보면 안다는 말이 있지 않은가.
산사람치고 나쁜 사람 있겠나.
사람을 칼로 두부 자르듯 재단할 수는 없구나.
어느 사람은 셋이서 등산 갔다가 둘만 돌아오고 남은 한 사람은 죽었다는 자랑할 수 없는 한국 사람도 있었으니 말이다.
예상대로 산사람님이 도착한다.
내심 그를 내가 알고 그가 나를 알기에 마음이 흡족하다.
웬걸 산사람과 그분 잘 아는 사이다.
아주 반갑게 인사를 한다.
다른 산악회 사람인가 보다.
산에서 자주 만났겠지
연이어 승지님이 도착하신다.
승지님과 이 분이 또 친하다.
지난번 산행이야기도 나눈다.
두분 사이가 아주 막역하다.
이분 QE대장님과도 잘 아는 사이다.
그러고 보니 나만 모르는 사이네.
전에 송화에서 함께 산행하시던 분이다.
잠시 쉬다가 요즘 시간이 되어 앞으로 매주 목요팀에서 함께 하시겠다고 하신다.
정선생님 한눈에 보아도 인품이 중국 사람은 아니었는데 역시 송화의 전 멤버였으니 그럴 수 밖에
아이스 하우스 주차장에 승지님 차를 놔두고 나머지는 맹커 주차장까지 차를 타고 올라가 거기서부터 산행을 시작한다.
귀가 멍멍하다.
침을 꼴깍 삼키면 귓 속에서 딸까닥하고 귓밥이 굴러 떨어지는 소리가 들린다.
여기 고도가 7,000 피트다.
볼디가 10,064피트니 2/3는 잡고 들어가니 꽤 높이 올라와서 시작하는 셈이다.
그러니 출발하기도 전에 고소증을 느끼는가 보다.
대장님은 카운트에서 빼란다.
송화에서 방을 빼는게 아니고 오늘 산행은 가는 만큼 가고 오는 만큼 오고 신선한 바람과 함께 구름과 함께 노니실 작정이시다.
두둔이 손목 꼭 잡고 술래 잡기도 하고 까꿍도 하며 즐거운 시간 갖겠다는데 내가 굳이 함께 하자고 심술부릴 철부지는 아니지 않는가.
릭키는 아이스 하우스 캐년으로 해서 가파르게 해야 성에 차지 않겠냐며 그 코스를 권하신다.
그냥 함께 우리와 같은 방향에서 산행을 하겠단다.
산사람님 내가 둘째 주는 산행을 못하고 3째주에 산행을 하겠다는 글을 보았단다.
내가 보고 싶어서 굳이 또 나왔단다.
코스가 길어서 충분하다며.
이번에는 제대로 몸을 풀 것 같은 기분이 든단다.
자 출발이다.
승지님 이번 산행은 12마일이다.
7시까지 주차장에 내려 와야 하기 때문에 중간 중간 휴식은 15분 이내로 주겠단다.
1마일에 1시간씩 잡으면 빠듯하다.
내려오는 길은 올라갈 때 보다 쉬우니 잘 하면 무리 없을 것 같다.
7천 피트에서 시작하니 첫발 내 디디면서부터 숨이 가빠온다.
소방도로에 다다른다.
선두가 휴식을 취하고 있다.
나는 휴식을 할 시간이 없다.
황소 걸음으로 천천히 나간다.
걸으면서 쉬어야 한다.
앞서가는 듯해도 곧 뒤에서 따라잡고 조금 더 가면 쉬고 있다,
나도 결정을 해야 할 것 같다.
로프트가 꼭대기에 닿으면 Thunder 봉이다.
그 너머 Telegraph를 지나면 이곳으로 되돌아 내려 오지도 못한다.
그러니 매점이 있는 곳 까지는 힘을 잘 안배해서 올라가고 안되겠다 싶으면 로프트 밑에 난 길을 따라 내려가면 된다.
그리고 내려가면 미지 언니와 합류 할 수도 있으니 외톨이가 되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게 힘을 안배하고 시간을 절약해서 무난히 매점까지 올라 왔다.
스키 대여점이 있고 화장실이 있고 군데 군데 캐빈이 있어 스키장 기분이 제법 든다.
스키 리프튼 방향을 꺾어 Thunder 봉으로 올라가 되돌아 내려온다.
스키 시즌을 준비해서 여기 저기서 보수 공사가 한창 진행중이다.
잠시 휴식을 취하는 동안에도 나는 계속 걷는다.
쉴 것 다 쉬고 함께 보조를 맞출 수 없다.
앞서서 Thunder 도착 했다.
내가 일등으로 도착했는가 했는데 정선생님은 훨씬 앞서 도착해서 전망대에서 앞에 펼펴지는 운해의 흐름을 지시하고 있다.
지시하는 대로 구름이 이리로 모였다, 저리로 펼쳐지고 꿈틀거리기도 하고 출렁이기도 한다.
모처럼 나도 배낭을 벋어 던지고 리프트가 휘돌아 내려가는 곳까지 달려가 본다.
정선생이 섰던 전망대도 올라본다.
그 뒤 저 편에는 푸르디 푸른 인공 호수가 보인다.
에머랄드 인듯 샤파이어 인듯 조용히 자리 잡은 호수가 하늘에 떠있는 흰 구름과 친구가 되어 장관을 선사하고 있다.
조금만 있으면 10월 말 쯤되면 저들은 또 하얀 인공설이 되어 이 스키장 곳곳을 채우고 많은 사람들을 즐겁게 해 주겠지.
뒤가 제법 늦다.
대신 나는 충분히 쉬었다.
기운도 솟는다.
잘 올라왔다고 승지님 칭찬도 아끼지 않는다.
기념으로 사진도 찍으라며 이리 저리 포즈 잡는 것도 지시 하신다.
연경님이 다리에 쥐가 나서 늦어졌단다.
어느새 산사람 연경님의 배랑을 빼앗아 메고 올라온다.
그 어깨가 대단하다.
멋있다.
연경님은 맨 몸으로 체력을 안배하면서 올라온다.
장하다.
이제Thunder에서 Telegraph로 이동한다.
산사람 따라 붙으며 산세를 설명해 준다.
저 건너 보이는 큰 봉우리가 쿠카몽가, 그리고 그 아래 작은 산이 팀버, 오른 쪽으로 빅혼 그리고 저 멀리로 온타리오가 보인다며 말해준다.
산은 멀리서 볼 때에 그 위치를 알 수 있다.
산속에서는 산의 위치를 알 수가 없다.
삶도 마찬가지다.
지금 이 순간 나의 가치는 알지 못한다.
멀리 지나온 그 옛날을 보니 아름답다.
가야 할 저 먼 곳을 보니 역시 아름답게 보이는구나.
봉우리 사이는 지척인데 지그재그 스위치 백이 많다.
그 만큼 가파르다는 뜻이겠다.
드디어 우리 모두가 텔레그라프에 올랐다.
8,901 피트.
정선생님도 산행에는 도사다.
고등학교 때부터 산을 탄 베테랑이다.
이런 분도 이 봉우리는 처음이란다.
내가 생각해도 내가 대단하다.
감격에 젖어 있을 때 또 승지님 머그샷을 찍어야 된다며 이리 저리 연출을 하신다.
소연님은 머그샷 안 찍으신단다.
프럼프나 머그샷 찍지.
대신 발 아래로 펼쳐지는 저 구름 바다를 사랑하니 그와 함께 추억으로 남고 싶단다.
너 구름 오늘 횡재했다.
소연님이 아니었다면 너는 그저 이리 떴다 저리 흩어지는 의미 없는 구름이었어.
그런데 소연님과 함께 하니 한 폭 그림이 되지 않니.
멋은 멋쟁이가 안다.
고기도 먹어 본 사람이 그 맛을 안다.
아침부터 찌푸리며 모여든 구름들도 이제 제 역할을 다하고 흩어져 사라진다.
팀버에 도착했을 때는 구름은 간 곳 없고 아주 파랗고 파란 하늘이 반긴다.
드디어 3 T를 찍었다.
그러나 늘 하는 말이 있다.
끝나야 끝나는 것이다.
주차장에 도착해야 끝난다.
처음 팀버에 오를 때는 삼거리에서 정상까지 쿼러 마일, 400미터가 마의 구간이었지.
진사님은 팀버를 하도 많이 올라서 그냥 삼거리에서 쉰다고 하시더니 어느새 따라오셨다.
아까 맹크로 인증샷을 찍는 사명이 있어서 왔단다.
봉사 정신도 이 정도면 도가 지나치다.
그저 거기서 조금 쉬면 누가 뭐 라 하나 참.
챠프만 트레일 3거리를 지나 콜럼바인 샘터를 지나니 이제는 놀던 마당이다.
이 길을 지난 것이 한 손으로 만을 셀 수가 없지.
두 손 열 손가락은 동원해야 셀 수 있지.
그 정도면 놀던 마당도 맞다.
그렇다면 전사님은 구두 벗고 발가락까지 동원해도 셈이 되지 않겠네.
주름 좀 잡아 보려 하다. 이내 겸손 해진다.
어깨에 힘주다 보니 다리가 떨리기 시작한다.
마의 구간 2마일 전방이 눈에 들어온다.
다리가 무거워지기 시작한다.
종아리가 딱딱하게 굳어 온다.
오금이 굽어지지 않는다.
몸은 점점 장작개비가 되어 뒤뚱거린다.
왼편으론 아이스 하우스 냇가의 물소리가 들린다.
기록을 갱신했다는 흡족감에 미리 취해서인가 물소리의 흥에 겨워서 일까
취객의 발걸음이 되어 비틀거리며 걷는다.
보는 이들 애간장이 탄다.
결국 주저 앉는다.
그래도 꼴에 아무렇지 않다는 듯 일어나 걸으려 한다.
그러면 무엇 하나 또 털썩 주저 앉는다.
보다 못한 정 쎄컨, 링안으로 흰 수건을 던진다.
제 코너로 찾아가지도 못하면서 더 싸워서 상대를 KO시키겠다고 대드는 복서가 되어 허우적거린다.
정선생님 배낭은 벗겨 메고는 앞서 걷는다.
해는 지려 하네
어둠은 한발 만 더 다가 서면 제일을 시작할 채비가 다 되어있네
2마일이 왜 이리도 멀단 말인가?
나는 그때 까지만 해도2마일이 11말일 보다 길다는 사실을 몰랐다.
내 인생의 어느 편린에서도 그런 부분이 있었지.
분명 그런 점이 있었겠지.
대장님이 마중을 나오셨다.
뭐, 누구를 어린 애로 아시나 보지.
그래도 그 분을 뵈니 힘이 솟는다.
그 분 보다 앞서 주차장에 도착했다.
보란듯이.
그러자 여태 나를 기다리고 있던 해가 그제서 발디산 뒤로 떨어지는 것이 보인다.
해만이 나를 기다려 준 것이 아니다.
미지 언니가 또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래도 내가 형편이 나았을 텐데.
기다리느라고 얼마나 힘들었을까.
그 모습을 보는 대장님은 또 얼마나 힘드셨을까.
피자 한쪽으로 어찌 대신 해 볼 수 있을까
이 말로는 대신 할 수 있을 것 같다.
지난번 2마일 남기고 길 때는 50점, 오늘 2마일 남기고 헤맨 것은 110점.
나 아직은 아니지만 그래도 오늘은 걸작이었다고.
첫댓글 최고의 명필 기장 님의 멋진 글 읽을 때 마다
나도 그 속에 빠져서 갈이 웃고 같이 즐겁고 인내 하고 ㅎㅎ
오늘도 기막힌 표현으로 마무리 하네요
정 선생 님의 지휘 데로 구름은 따르고...
어쩌요?
3 T의 기분이 맘 속에 꼭 들죠?
수고하고 힘든 걸음의 끝은 역시 나의 만족입니다
대단하십니다
요근래 몇번을 두고 한번 해야지 생각은 하면서도 아직까지 엄두를 못내고있던 그 3T !!
와우 해내셨습니다
산우님들 화이팅!
산행후의 후유증들이
시간이 길어갑니다.
늘 산뜻한 몸신으로
또 뵙기를 바라오며 수고 정말 많이많이
하셨습니다.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