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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헌 살롱]팔자 바꾸는 6가지 방법 - 2004.09.15 18:30 03'
‘연월일시(年月日時) 기유정(旣有定)인데 부생(浮生)이 공자망(空自忙)이라!’. ‘태어난 사주팔자가 이미 정해져 있는데, 부질없는 인생들이 그것을 모르고 공연히 스스로 바쁘게 뛰어다닌다’는 말이다. 인생관에 따라 다르겠지만 팔자는 있는 것 같다. 불교식으로 이야기하면 전생업보이고, 기독교식으로 해석하면 주님의 섭리라고나 할까. 도망가 보아야 거기서 거기다. 그렇다면 팔자는 바꿀 수 없단 말인가! 팔자를 바꾸는 비방(?方)은 있는 것인가? 있기는 있다.
첫번째 방법은 적선(積善)을 많이 하는 일이다.
한국에서 500년의 역사를 지닌 명문가들을 조사해 본 결과 공통점이 바로 적선이었다. 적선을 많이 해야 팔자를 바꾸고 집안이 잘 된다는 명제는 이론이 아니라 500년 임상실험 결과(?)다. 당장에 효과가 나타나지 않더라도 후손을 통해서 반드시 나타난다.
둘째, 눈 밝은 스승(明師)을 만나야 한다.
인생의 중요 고비마다 가르침을 받아야 길이 열린다.
옛날 어른들은 훌륭한 스승을 만나게 해 달라고 100일 기도를 드리곤 하였다.
그 염원이 뼛속에 사무쳐야 대 스승을 만난다고 한다.
셋째는 명상이다.
하루에 100분 정도는 매일 빼놓지 않고 해야 한다.
문제는 시간을 내는 일이다. 먹고사는 일에 부대끼다 보면 시간을 낼 수 없다.
넷째는 명당에 음택(陰宅·묘터)이나 양택(陽宅·집터)을 잡는 일이다.
둘 중 하나만 잡아도 효과가 있다고 보았다.
하지만 국토도 좁고, 도로공사와 철도터널로 산맥이 모두 잘리고 있다.
더구나 전 국민의 60%가 아파트에 거주하는 시대에서 이 방법은 사용하기 어렵게 되었다.
다섯째, 독서이다.
책을 읽으면 자신에 대한 성찰이 생긴다.
특히 운이 좋지 않을 때에는 밖에 나가지 말아야 한다. 나갔다 하면 좋지 않은 인연을 만나서 일이 더 꼬이는 수가 많다. 그럴 때는 집 안에 틀어박혀서 어느 책이라도 무조건 읽는 것이 상책이다.
10년 이상의 감옥생활을 버티게 하는 힘도 독서하는 습관에서 길러진다.
여섯째, 자신의 명리(命理)를 알아차리는 방법이다.
팔자에 재물복이 없는 사람은 월급쟁이가 최고이다.
자신의 팔자를 대강 짐작하면 쓸데없는 과욕은 부리지 않는다.
이상 6가지 방법 중에서 어느 쪽을 택할 것인가가 문제이다.
호골영토산방(湖骨嶺土山房)
명절 때는 모든 고속도로가 심하게 정체되지만 비교적 덜 밀리는 고속도로가 영남과 호남을 잇는 ‘88고속도로’이다. 광주와 대구 사이에는 혼맥(婚脈), 학맥(學脈), 상맥(商脈)이 별로 없어서 왕래할 일이 적었다. 이렇게 삼맥(三脈)이 약할 때는 풍류맥(風流脈)을 가동시켜야 한다. 풍류는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이지 않던가!
전남 장성에 있는 세심원(洗心院)과, 경북 청도에 있는 ‘호골영토산방(湖骨嶺土山房)’ 사이에는 요즘 영·호남의 풍류가 왔다 갔다 하고 있다. 청도읍 삼신산(三神山) 자락에는 황토와 편백나무로 지은 13평 크기의 자그마한 산방(山房)이 하나 있다. 이 산방 이름을 ‘호골영토(湖骨嶺土)’로 지은 데에는 사연이 있다.
산방 주인인 박복규(60)씨는 경상도 토박이이지만 보길도를 비롯한 전라도 섬들의 고즈넉한 풍광과, 톡 쏘는 전라도 음식, 그리고 판소리를 좋아한다. 한 20년 사업 관계로 외국을 돌아다닌 끝에 비로소 조국의 산하(山河)가 좋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중에서도 전라도 지역이 눈에 들어왔다고 한다.
그러면서 알게 된 사람이 장성의 축령산 자락에 있는 세심원 주인 변동해(53)씨이다. 세심원은 광주·장성 일대의 풍류객들이 모이는 살롱인데, 이 세심원의 방바닥은 축령산의 편백(扁柏) 나무로 깔아 놓았다는 점이 특징이다. 방에 들어가면 편백 특유의 나무 향이 진하게 풍긴다. 편백의 향은 머리를 상쾌하게 만든다.
세심원의 편백 향에 매료된 박복규씨는 장성 축령산의 편백을 청도로 가져다가 통나무와 황토로 이루어진 산방을 짓게 된 것이다. 산방의 골재는 호남에서 가져온 편백나무를 사용하였으니 ‘호골(湖骨)’이요, 황토는 영남의 흙을 썼으므로 ‘영토(嶺土)’라는 이름을 붙이게 되었다. 이치에 딱 맞는 이름이 아닌가! 비록 방 한 칸과 거실 한 칸 구조의 작은 산방에 지나지 않지만, 호남과 영남이 모두 함께 녹아 들어 있다.
산방의 외형은 20년 수령의 편백 통나무를 교차시킨 귀틀집이다. 8t 트럭 두 대분의 편백이 소요되었다. 통나무 사이에는 황토와 숯가루, 볏짚을 섞어서 다져 넣었다. 그래야 단단해진다. 벽 두께는 45cm. 청도읍 삼신산 자락의 호골영토산방은 ‘자기를 방생(放生)’하고 싶은 청도의 풍류객들이 모이는 살롱이다. 엊그제 그곳에서 하룻밤 자면서 놀다 왔다.
"수저(水低) 30장이요, 지고(地高) 30장이라…"
[조용헌의 새만금 살롱] 기사입력 2009-11-10 03:57
새만금에 대한 예언
전라감사 이서구(李書九, 1754~ 1825). 그는 전라도에 40대 초반과 60대 후반에 걸쳐 관찰사로 2번이나 부임했던 인물인데, 오늘날까지도 전라도 여러 지역에는 그가 남긴 전설과 설화들이 회자되어 온다. 조선시대 500년 동안 수많은 전라감사가 다녀갔지만 이서구처럼 흥미진진한 예언을 남긴 인물은 없다.
전주에 가면 한벽루(寒碧樓)가 있다.
밑으로는 냇물이 흐르는 층암절벽에 자리 잡은 풍광 좋은 정자이다.
어느 날 이서구는 이 한벽루에 와서 경치를 감상하다가
"앞으로 는 이 한벽루 옆으로 불말(火馬)이 지나다닐 것이다"라고 예언하였다.
왜정 때에 과연 굴이 뚫리면서 기차가 지나 다니게 되었다.
남원 광한루에는 해태상이 있는데, 원래는 이 해태가 남원 삼거리에 있었다고 한다.
이서구가 감사 시절에 남원에 와 보고는 "남원에 불이 많이 나는 이유는 견두산(犬頭山)이
호랑이 형국을 하고 있어서다.
이를 견제하기 위해서는 삼거리에 해태상을 세워놓고, 산 이름을 개 견(犬)자를 써서
견두산으로 해라"는 지시를 하였다.
원래 산이름은 호두산(虎頭山)이었는데, 이서구가 현재의 견두산으로 바꾼 것이다.
전라도 지역에는 이서구와 관련된 이러한 유의 설화들이 수십 종류가 전해져 온다.
그렇다면 '새만금'과 관련하여 이서구가 남긴 예언은 어떤 것인가?
"수저(水低) 30장이요, 지고(地高) 30장이 될 것이다"라는 예언이 관련된다.
변산 앞 바다 쪽의 바닷물이 30장 밑으로 내려가고 해저의 땅이 30장 위로 올라온다는 예언이다.
30장이면 대략 90미터에 해당한다. 바닷물이 90미터 내려가고 땅이 90미터 위로 올라오면
어떻게 되는가? 이는 지각변동을 의미한다. 서해안이 결국 융기하면서 상당부분이
육지가 된다는 예언이다.
새만금이 조성된 변산 앞바다도 역시 마찬가지이다.
이 예언에 비추어 볼 것 같으면 서해안의 바다 밑에서는 지금 지각변동이 진행중인데,
그 와중에 새만금이라고 하는 간척사업이 인위적으로 이루어져 그 지각변동을 부분적으로
앞당긴 셈이 된다.
서해안 융기는 옛날부터 여러 이인(異人)들이 쭉 해왔던 말이고, 근래에는 탄허(呑虛, 1913-1983) 스님도 자주 했던 말이다.
전 지구적인 지각변동을 예언한 김일부(金一夫)의 정역(正易)에는 '수석북지(水汐北地) 수조남천(水潮南天)'이라는 대목이 있다.
'북쪽 땅에서 물이 빠지고, 물이 남쪽 하늘로 모여 든다'는 내용이다.
현재 북극의 얼음이 녹고 있다. 이 녹은 물이 어디로 가는가? 이 대목을 근거로 해서
탄허는 70년대에 '일본이 가라앉고 그 대신 서해안이 융기한다'는 예언을 한 바 있다.
'영광 앞바다에 있는 7개의 섬인 칠산도(七山島)가 육지의 산이 된다'는 예언도 서해안
융기와 같은 맥락에 속한다.
새만금의 등장을 암시하는 또 다른 예언은 정감록(鄭鑑錄)이다.
여기에 보면 '범씨 천년왕국설'이 나타난다. "앞으로 가야산의 조씨(趙氏) 다음에는
범씨(范氏) 왕국이 들어서는데, 고군산도(古群山島)가 그 범씨 천년왕국의 도읍지가 된다"는
내용이다. 고군산도는 섬이었다가 새만금으로 간척이 되면서 현재 육지가 되었다.
새만금 인근에 있는 2개의 섬인 상왕등도(上王(旺)登島)와 하왕등도(下王(旺)登島)도
그 지명이 예사롭지 않다.
이 지명에도 역시 미래의 변화에 대한 신탁이 담겨 있다는 것이다.
'왕이 올라 간다'는 것은, 이곳에서 '왕이 출현한다'는 뜻과도 같다.
새만금과 고군산일대가 도읍이 되면 이 2개의 왕등도(王登島)도 가만히 있을 수가 없지 않겠는가!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예언을 하였던 강증산 선생님도
새만금과 관련된 예언을 남겼다.
'군창만리'(群倉萬里)가 바로 그것이다. '군산 앞쪽으로 창고가 만리나 늘어 선다'로 해석된다. 새만금 간척으로 인해 군산과 부안 그리고 김제가 하나의 권역으로 묶어졌는데, 여기에 엄청난 창고가 들어선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한반도의 지도를 놓고 보면 태백산맥이 척추에, 새만금은 하복부에 해당한다.
복부에서 복안(腹案)이 나온다.
앞으로 한반도를 먹여 살릴 복안이 새만금에서 나오기를 기대하는 바이다.
[만물상]수목장(樹木葬) 입력 : 2004.09.09 18:57 23'
옛날 선승(禪僧)들은 율무 풀에서 나는 단단한 낟알 열매로 염주를 만들어 목에 걸고 다녔다고 한다. 아무 산길에서라도 쓰러져 죽으면 몸은 썩어 흙으로 돌아가고 목에 걸었던 염주에선 싹이 터 율무가 됐다. 그래서 스님들은 산길에 율무가 무성하게 자라 있는 것을 보면 꼭 걸음을 멈추고 반야심경(般若心經)을 읊고 지나가곤 했다.
▶고려대 교수를 지낸 원로 임학자 김장수(金樟洙·85) 박사의 장례가 엊그제 수목장(樹木葬)으로 치러졌다. 고인의 평소 유언대로 화장을 한 후 유골은 경기도 양평의 고려대 농업연습림의 한 참나무 아래에 묻었다. 나무에는 ‘김장수 할아버지 나무’라는 표찰을 붙였다. 자연에서 태어난 인간이 자연으로 다시 돌아갈 수 있게 하는 장례법이다. 그 나무는 김 박사의 영혼을 이어가는 영생목(永生木)이 된 것이다.
지난 6일(2004.09.06) 타계한 국내 임학계의 석학, 오제(悟齊) 김장수(金樟洙) 선생의 장례가 8일 경기도 양평군 양동면 고려대 연습림에서 수목장(樹木葬)으로 치러져 마지막까지 나무 사랑의 모범을 보여줬다.
수목장은 시신을 화장하고 난 다음 유골을 산 나무 아래 묻어 완전히 자연과 하나가 되게 하는 장묘형태이다. 국내에서는 매우 드물지만 스위스, 독일, 뉴질랜드, 일본 등에서는 보편화됐다. 이는 평소 나무곁에 묻히고 싶다는 고인의 뜻에 따른 것으로, 고인의 유골은 고인이 아끼던 50년생 참나무 아래 묻혔다. 대신 참나무에는 ‘김장수 할아버지 나무’라는 명패가 붙여졌다. 수목장은 봉분을 만들지 않으므로 매장문화로 인해 금수강산이 묘지로 변해가는 우리 현실에 하나의 대안이 될 것으로 보인다. 산림청은 앞으로 장묘문화 개선을 위해 수목장을 적극 장려할 계획이다.
고인은 고려대학교 농과대학장, 국립공원협회장, 한국 임정연구회장 등을 역임한 한국 임학계의 거목으로 임학개론, 임업경제학, 삼림과 환경 등의 책을 펴내며 임학발전에 커다란 족적을 남겼다. 향년 85세
▶영국의 마을 묘지에선 유골을 묻고 나서 그 자리에 장미를 심는다. 그 장미 가지에 고인의 신원을 새긴 작은 명패를 매어두면 그게 곧 묘지 역할을 하는 것이다. 일본에서도 몇 년 전부터 수목장이 퍼져나가고 있다고 한다. 뼈를 담은 항아리를 땅에 묻고 그 위에 꽃나무를 심는 것이다. 수목장을 희망하는 사람끼리 동호인 모임도 만들었다고 한다. 일가족의 영생목이 한 군데 모이면 가족 정원이 꾸며질 것이다.
▶독일의 헤센주(州) 호프가이스마(Hofgeismar)라는 작은 도시에는 수목장림까지 조성돼 있다. 40만평 가까운 참나무숲에서 자라는 수령(樹齡) 100년 이상의 참나무들이 영생목으로 팔린다. 그루당 가격은 3500 ~4000유로(490만~560만원). 나무 옆에 30㎝ 깊이로 화장처리한 골분을 묻게 된다. 골분은 땅속에서 쉽게 분해되는 나무상자나 종이 보자기에 담아야 한다. 묘석 등 인공물은 일절 설치하지 않으므로 그야말로 자연친화적 묘지라고 할수 있다.
▶우리나라 묘지의 넓이는 평균 19평이라고 한다. 한 사람이 차지하는 주거면적은 4.3평이라니 죽어서 차지하는 면적이 살아 있을 적의 4배를 넘는다. 다행히 최근 몇 년 사이 화장에 대한 거부감이 많이 사라졌다. 설문조사에선 화장을 하겠다는 사람이 3분의 2 정도 된다. 좁은 땅에 살다 간 흔적을 많이 만들어 놓는다고 오래 기억되는 게 아니다. 후손에게 짐만 될 뿐이다. 영생목에서 돋아나고 뻗어나는 잎새와 가지 하나하나에 죽은 이의 영혼을 의탁한다면 그게 곧 영생하는 길일 수도 있을 것이다.
반신욕(半身浴)과 수행(修行)
요즘 반신욕이 세간에 유행하고 있습니다. 예전에는 목욕을 한다는 것은 단순히 때를 벗기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탕에 온몸을 넣고 때를 불려야만 하는 것으로 인식되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목욕에도 웰빙이 도입되어 건강을 위한 방법의 하나로 인식되고 있습니다. 그 대표적인 것이 요즘 유행하고 있는 반신욕입니다.
그런데 반신욕은 특별히 고안된 것이 아니라 이미 동양의 수행과 의학의 세계에서 널리 알려진 것입니다. 즉, 반신욕은 수행이 다른 종류로 발전된 것입니다. 여러분도 이미 수행을 하고 계시는 중입니다.
두한족열(頭寒足熱), 머리는 차갑게 하고 발은 따듯하게 하라!!!
이는 의학에서 하는 말이고, 수행에서는 수승화강(水升火降, 수기운은 올리고 화기운은 내려라) 또는 환정보뇌(환정보뇌, 정을 되돌려서 뇌를 보한다)•응신취기(凝神聚氣, 신을 굳혀 기로 모은다)라고 합니다.
반신욕 할 땐 팔 담그지 마세요[중앙일보, 2004.6.10]
"목욕으로 1주일 피로를 말끔히-.
요즘 전문 욕조까지 나올 만큼 인기 높은 반신욕은 동의보감에 기술된 두한족열(頭寒足熱.머리는 차갑게 하고 발은 따듯하게 함)이 기본 원리다. 하반신이 따뜻해야 인체의 기운이 제대로 흐른다는 것이다.
반대로 두열족한(頭熱足寒)은 만병의 원인이라는 것이 한방의 시각이다. 따라서 반신욕의 핵심은 몸의 가슴(명치 부근) 아랫부분만을 욕조에 담그는 것이다. 이때 팔은 물에 넣지 않는다. 수온은 체온보다 약간 높은 37 ~ 38도가 적당하다.
경희의료원 한방재활의학과 신현대 교수는 "욕조에 들어간 지 20 ~ 30분이 지나면 몸 안쪽부터 더워져 땀이 발산된다"며 "땀을 통해 몸에 쌓인 독소와 노폐물이 빠져 나간다"고 말했다. 반신욕을 하면 수축된 혈관이 열리며 피가 부드럽게 흘러 혈압이 내려간다. 적응 질환은 생리 불순.생리통.갱년기 장애.냉증.자궁 질환.방광염.요도염.어깨 결림.무릎 신경통.관절염 등이다…. [박태균 식품의약전문기자]
삼한갑족 (三韓甲族)
삼한갑족, ‘삼한에서 가장 으뜸가는 집안’이란 뜻이다.
도대체 어떤 집안이 이처럼 최상급의 찬사를 받았단 말인가.
우당(友堂) 이회영(李會榮:1867~1932) 집안이 여기에 해당한다.
이 집안에서는 백사(백사) 이항복(李恒福:1556~1618) 이래로 10명의 재상을 배출하였다.
9명의 영의정(4명의 贈영의정 포함)과 1명의 좌의정이 바로 그들이다.
해방 이후 이승만 정권시절 우당의 동생인 성재 이시영 (李始榮: 1869 ~1953)이 부통령을
지냈으니까 성재까지 포함시키면 총 11명의 재상급 인물이 한 집안에서 쏟아져 나온 셈임.
경주 이씨 백사공파인 우당 집안에서는 ‘상신록(相臣錄)’이라고 불리는 독특한 문건이 있다.
재상을 지낸 사람들의 행장을 모아놓은 책이다. ‘상신록’이라는 이름의 책을 만들 수 있는
자격은 그 집안에서 재상을 10명 이상 배출해야만 된다. 10명 미만은 만들 수 없다고 한다.
재산은 약 3만석에 이르렀다. 요즘은로 치면 재벌급 재산이다. 이들이 살았던 집터는 서울
명례방(明禮坊) 저동(苧洞) 일대. 현재 명동성당 앞의 YWCA 자리 일대였다고 전해진다.
그 부와 귀에 있어서 조선 최고의 집안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1910년 나라가 망하자 우당을 비롯한 6형제는 전 가족을 이끌고 만주로 망명하는
결단을 내린다. 모든 기득권의 포기였다. 3만석 재산은 물론이거니와 조상 제사 지내는 위토(位土)까지도 처분하였다. 저택과 수많은 고서는 우당이 평소 아들처럼 아끼던 육당 최남선에게 헐값으로 넘겼다. 이렇게 해서 마련한 돈이 현재의 시세로 800억원이었다고 한다.
이 800억원을 가지고 만주에 가서 세운 학교가 바로 그 유명한 신흥무관 학교였다.
일본군과의 무장투쟁을 위해서 세운 우리나라 최초의 육군사관 학교가 신흥무관학교인 셈이다. 여기서 배출된 3500명의 병력이 일본군을 상대로 해서 승리한 청산리 전투에 투입됨.
독립운동사에 빛나는 청산리 전투는 삼한갑족 집안에 내려오던 800억 재산 과 생명을 모두
쏟아 부은 댓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6형제 가운데 우당을 비롯한 5형제는 중국에서 병들어 죽거나 고문으로 죽었다. 다섯째인 이시영 한 사람만이 해방 후 고국에 돌아올 수 있었다. 노블리스 오블리제의 전형이다.
[만물상]총각들의 저녁식사
오태진 논설위원 tjoh@chosun.com
입력 : 2004.10.13 18:45 31' / 수정 : 2004.10.13 19:02 14'
우직한 데릴사위 ‘나’는 3년 하고도 일곱 달을 새경 한 푼 받지 못한 채 머슴살이 한다. 마름이자 장인인 봉필이 ‘나’를 딸 점순이와 혼인시켜 준다는 말만 믿고 견딘 세월이다. 점순의 나이가 당초 약정한 16세가 됐어도 봉필은 “점순의 키가 아직 작다”며 미룬다. 결국 ‘나’는 봉필의 사타구니를 붙들고 늘어진다. 김유정의 해학 넘치는 단편 ‘봄봄’에서 주인공의 반란은 한창때 분출구를 찾지 못한 젊은 욕구의 반란이기도 했다.
▶간디는 31세에 부부관계까지 끊어버렸고 37세에 영원한 ‘순결’을 서약해 일생의 성적(性的) 절제를 확인했다. 그런 그도 성 충동과 욕구는 완전히 이겨내지 못했다고 고백했다. 네 차례나 매음굴로 나서려던 그를 하느님이 구해줬다고 자서전에 썼다. 톨스토이도 ‘성욕과의 싸움이 가장 어려운 투쟁이다. 이 욕망은 만족하는 법이 없다’고 했다.
▶며칠 전 국정감사에서 어느 국회의원이 강력한 성매매 단속과 처벌에 딴죽을 걸었다가 혼쭐이 났다. 이 의원은 “성매매특별법 때문에 18~30세 총각들이 12년 동안이나 성관계를 가질 기회가 없어져버렸다”며 “성매매 단속을 저인망식으로 하지 말고 사려깊게 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여성단체들로부터 비난이 쏟아지자 “단속에만 치중하면 성매매가 주택가나 인터넷으로 옮겨가는 ‘풍선효과’를 우려한 것”이라고 해명했다.
▶스웨덴은 성(性)문화가 분방한 나라답지 않게 1999년 성 구매 행위를 불법으로 규정하고 6개월 징역형까지 내리도록 법을 강화했다. 외국인 성매매 여성의 불법 유입과 인신매매를 막아보려는 것도 주요 목표였다. 건강복지청이 조사한 새 법의 효과는 ‘성매매를 지하로 밀어넣은 것’이었다. 성매매와 인신매매 단속이 더 어려워졌고 인터넷에 성매매 호객이 넘쳤다. 경찰서들도 자기 구역에서 거리 호객이 줄지 않았거나 잠시 줄었을 뿐이라고 보고했다.
▶송(宋) 시인 황정견(黃庭堅)은 정욕이 이는 것을 ‘산 거북이 통 빠져나오듯(生龜脫筒)’ 자연스러운 것이라고 했다. 사람이 정욕을 누르지 못함을 말과 원숭이에 비유한 ‘의마심원(意馬心猿)’이라는 말도 있다. 요즘 우리 사회의 성 풍조가 아무리 개방적이라 해도 연인에게서 사랑과 욕구를 함께 해결할 수 있는 총각은 많지 않을 것이다. 성(性)의 엇나간 분출에 대한 사회적 예방책과 대책도 함께 궁리하는 지혜가 필요한 때다.
소백산은 肉山이다. 2005/06/28 13:15
"육산(肉山)은 흙이 뒤덮여 있는 산을 가리킨다.
육산은 뱃살도 나오고 히프도 커서 먹을 것이 푸짐한 산이다.
반대로 골산(骨山)은 바위가 험하게 솟아 나온 산이다.
이름에 ‘악(嶽)’자 들어가는 산들은 골산에 해당한다.
군살은 다 빠진 산이다.
한국의 대표적인 육산이 지리산이라고 한다면, 골산은 설악산을 꼽는다.
사는 것이 외롭다고 느낄 때는 지리산의 품에 안기고,
기운이 빠져 몸이 처질 때는 설악산의 바위 맛을 보아야 한다"
<2005.6.27. 조선일보 조용헌 살롱에서>
소백산도 지리산만은 못하더라도 분명 肉山입니다.
정상을 중심으로 질펀한 丘陵은 다른 산에서 흔히 볼 수 없는 모양입니다.
분명 '뱃살도 나오고 히프도 커서 먹을 것이 푸짐'합니다.
가곡 등산로의 시발점인 어의곡리를 둘러 싼 산골 경치는
우리가 어릴적 자라던 어느 충청도의 깊은 산골 그대로입니다.
어린 시절의 鄕愁가 되살아나서 별도로 올립니다.
소백산은 海拔 1439미터입니다.
그런데 해발 1300미터 쯤에 이르면 갑자기 喬木帶가 없어지면서
사진에서와 같은 草原地帶가 나타납니다. 氣候帶의 현격한 變化지요.
서쪽으로 사람들이 몰여있는 곳이 소백산 頂上입니다.
펑퍼짐하니 肉感的이지요.
정상을 향해 한참을 오르다가 뒤를 돌아보니 이것 또한 절경이라.
정상과 흡사한 모습이 쌍둥이 봉우리같이 보이더이다.
소백산 정상에 세운 毘盧峰 기념비 앞에서 고교 동창 친구들과 기념 사진 한장 박았습니다.
정상에서 희방사 쪽으로 내려가는 등산로와 뿌연 烟霧속에 보이는 山岳 連峰들.
소백산 등산로는 단양 관광단지 쪽에서 오르는 코스와 희방사쪽에서 오르는 코스
그리고 오늘 오른 가곡면 어의곡리 코스가 대표적인 코스라지요.
정상(1439미터)에서 해발 1300미터 쯤 내려오면 선을 긋듯이 山林의 林相이 바뀝니다.
사진에서와 같이 초원지대에서 갑자기 큰 나무들이 우거진 喬木帶로 바뀌는 겁니다.
自然의 造化라 할지? 자연의 위력 앞에 人間은 謙遜해 질수 밖에 없습니다.
충북 단양군 가곡면 어의곡리. 아주 깊은 산골 마을의 風景 그대로지요?
역시 자연은 우리의 休息處임에 틀림없고 永遠한 故鄕입니다.
이번 여름에 한번 다녀오세요.
조용헌 살롱] 이판과 사판 - 2004.09.01 18:40 05'
막다른 골목에 몰렸을 때 우린 흔히 ‘에라! 이판사판이다’라고 말한다.
이처럼 흔히 쓰는 이판(理判)과 사판(事判)이라는 말은 원래 불교에서 유래하였다.
대승불교의 최고경전이라 일컬어지는 ‘화엄경’에서는 세계의 차원을 이(理)와 사(事) 2가지로 설명한다.
이판이 눈에 보이지 않는 본질의 세계에 대한 판단이라면, 사판은 눈에 보이는 현상 세계에 대한 판단이 된다.
불교에서 추구하는 모델 인격은 이판사판에 모두 통달한 인물이다.
한국의 지적 전통에서 볼 때 고려 불교의 이·사 개념은 조선시대 성리학으로 넘어오면서 이(理)와 기(氣)로 계승되었다. 세상을 살다보면 이판과 사판을 통합하기가 어렵다는 것을 절감하게 된다. 눈에 보이는 현상의 세계에 집중하다 보면 눈에 보이지 않는 정신세계를 놓치게 되고, 고준한 정신세계를 추구하다 보면 발등에 떨어진 불을 못 끄는 경우가 발생한다.
사회과학에 통달(?)한 사람을 보면 사회현상에 대한 분석은 막힘이 없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왠지 수수깡처럼 건조하다는 느낌을 받는다. 반대로 개량한복 입고 동양철학의 심오한 이치에 심취한 사람들을 보면 인간적 훈훈함은 있지만, ‘사회학적 상상력’이 부족한 경우가 많다. 문제는 양쪽을 종합하는 능력이다. 세계의 실상은 양쪽을 종합할 때 비로소 나타난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삼성의 이병철은 이판과 사판을 독특한 방식으로 넘나들었던 도사급 인물이었다. 경영이나 인재발탁에 있어서 이판과 사판을 종합할 줄 알았기 때문이다.
신입사원의 이력서에 나타난 데이터가 사판에 필요한 자료라고 한다면, 관상과 사주팔자는 이판에 활용하였다.
그 사람이 배신을 하지 않을 것인지, 타고난 복이 많은 사람인지의 여부는 눈에 보이지 않는 이판에 속한다.
그래도 순서가 있다. 선사판 후이판(先事判 後理判)! 사회과학을 일용할 양식으로 삼아온 386세대는 이판의 세계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 새가 좌우의 두 날개로 날듯이, 경륜도 이판 사판에서 나온다. 개혁이야말로 이판사판으로 할 일이다.
하회마을 북촌댁(北村宅)
풍산 류씨들의 집성촌인 하회마을에서 품격 높은 고택이 북촌댁이다. 정식 당호는 화경당(和敬堂). 대지 1700평에 72칸의 한옥으로서, 칸수로만 따진다면 하회에서 가장 규모가 큰 저택이기도 하다. 재산은 3000석. 안동을 비롯한 영남 일대에서 7대 200년간 부와 명예를 누리던 집이다. 화경당의 품격은 세 군데의 사랑채에서 나타난다. 할아버지가 거처하던 북촌유거(北村幽居), 아버지가 거처하던 화경당, 손자가 거처하던 수신와(須愼窩)가 각각 분리되어 있다. 큰사랑인 ‘북촌유거’의 누마루에 앉아서 주변을 바라보면 하회의 절경이 한눈에 들어오는 구조이다. 동쪽으로는 화산이 들어오고, 북쪽에는 부용대와 강물이 보이고, 남쪽으로는 남산이 마주친다.
이 집이 안동에서 명성을 얻게 된 계기는 1859년 여름에 발생한 홍수 때문이었다.
하회마을 강 건너 부용대 쪽에서 사람을 싣고 마을로 건너오던 배가 뒤집힌 사건이었다.
상갓집에 조문 갔다 오던 사람들 수십 명이 탄 배가 불어난 물살로 인하여 전복되었던 것.
발생 시각은 어두컴컴한 저녁 시간. 가로등이나 손전등이 없던 시절. 마침 강변에는 잘 말려진 춘양목이 몽땅 쌓여 있었다.
당시 경상도 도사를 지냈던 석호(石湖) 류도성(柳道性: 1823~1906)이 집을 짓기 위해 3년 전부터 애지중지 건조시켜 오던 귀한 나무들이었다. 하지만 사람을 살리기 위해서 구명보트 대신으로 강물에 던져 넣었다. 나머지 목재들도 불을 밝히기 위한 화목으로 사용하였다.
그렇게 해서 많은 목숨을 구할 수 있었다. 류도성은 어렵사리 춘양목을 다시 구해서 3년 동안 말린 후에야 집을 지었고, 이 소문이 주변에 퍼졌다.
뿐만 아니라 이 집안은 소작료를 싸게 받았다. 다른 부자들이 6할을 받았지만 이 집에서는 5할을 받았고, 사정이 어려운 사람들에게는 4할만 받기도 하였다. 그 적선 공덕은 난리가 났을 때 빛을 발하였다.
부자들을 공격하던 동학군이었지만, 북촌댁에 와서는 정중하게 인사만 나누고 지나갈 정도였다. ‘내셔널 트러스트’와 함께 문화유산 보존활동에 참여하고 있는 후손 류세호(53)씨.
류씨는 선대의 그 공덕이 지금까지 영향을 미친다고
방화수류정(訪花隨柳亭).
수원화성 성곽에 있는 4개의 각루중 동북각루의 이름이 꽃을 찾고 버들을 따른다는 방화수류정이다.
군사용 성곽에 용연(龍淵)이라는 멋스런 연못까지 곁들인 이런 근사한 정자를 세운것은
정조대왕의 느긋함인지 풍류인지 범인으로선 가늠조차 못하겠다.
화성의 북쪽 수문인 화홍문까지 옆에 두어 방화수류정,용연,화홍문이 서로 어울려
제법 운치있는 경관을 연출하는데, 능수버들은 의구할지라도 꽃은 옛날만 못할지 모르겠다.
원곡 김기승의 글씨는 방화수류정의 정취를 그대로 자체에 담아낸듯하다.
[조용헌 살롱]방화수류(2007.4.27)중에서
수원 화성(華城)에 가면 방화수류정(訪花隨柳亭)이라고 하는 이름의 정자가 있다.
방화수류정은 정자 자체도 건축적으로 아름다울 뿐 아니라 정자에서 아래로 내려다보는 경치도 그만이다. 더 좋은 것은 ‘방화수류’라고 하는 정자의 이름이 아닌가 싶다.
‘꽃을 찾고 버들을 따라간다’는 뜻의 정자 이름은 옛날 사람들이 춘삼월의 정취를 표현하던 말이었다. 원래 ‘방화수류’라는 문구는 북송의 유학자인 정명도의 ‘춘일우성’(春日偶成)이란 칠언절구에서 유래했다.
‘운담풍경근오천(雲淡風輕近午天)
방화수류과전천(訪花隨柳過前川)
방인불식여심락(傍人不識余心樂)
장위투한학소년(將謂偸閑學少年)’이다.
‘구름은 맑고 바람은 가벼운 한낮에 꽃을 찾고 버들을 따라 시냇물을 건너간다.
사람들은 나의 즐거운 마음을 모르고, 한가함을 탐내 소년처럼 논다고 말한다’는 뜻이다.
[조용헌 살롱]'철부지' 考 - 2004.09.23 17:18 39'
언제나 철이 들 것인가!
철이 없는 사람을 ‘철부지’라고 부른다.
철부지는 원래 ‘철不知’라고 쓴다. ‘철을 알지 못한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철이란 무엇인가? 사시사철이다.
봄, 여름, 가을, 겨울의 변화를 알아채지 못하는 사람이 철부지인 것이다. 다시 말하면 ‘때’를 모른다는 말이다.
봄이 오면 밭을 갈아 씨를 뿌리고, 여름에는 땀을 흘리면서 김을 매고, 가을에는 열매를 수확하고, 겨울에는 월동을 하기 위해서 창고에 저장해야 한다. 철을 모르는 사람은 땅이 꽁꽁 얼어붙은 엄동설한에 씨를 뿌리려고 들판에 나가는 사람이다. 눈밭에 씨를 뿌리면 싹이 나올 리 없다. 가을이 되어서 수확을 해야 하는데, 철을 모르면 수확을 할 줄 몰라서 열매가 땅에 떨어져 썩어 버린다.
이렇게 설명하면 쉽지만, 사실 자기 인생 사이클에서 철을 정확하게 짚어내기란 상당히 어려운 문제이다.
사람마다 각기 철이 다르기 때문이다. 어떤 인생은 태어나자마자 가을부터 시작하는 경우도 있다. 부잣집 아들로 태어나 부모가 물려준 빌딩의 임대료부터 받기 시작하면 과일부터 따먹는 셈이다. 흥청망청 청년기를 보내면 대개는 주색잡기(酒色雜技)로 흐르기 마련이고, 패가망신(敗家亡身)이라고 하는 엄동설한이 다음 코스로 기다리고 있다. 반대로 겨울부터 시작하는 사람은 조실부모(早失父母)하고 자장면 배달부터 시작하지만, 시간이 가면 새싹이 돋아나는 봄을 맞는다.
문제는 자기인생이 지금 어느 철(때)에 와 있는가를 객관적으로 파악하기가 어렵다는 사실이다. 진단이 정확하면 처방은 나오게 되어 있다. 봄이라는 진단이 나오면 씨를 뿌리면 되고, 여름이라는 진단이 나오면 기꺼이 땀을 흘려야 한다. 철을 알면 기다릴 줄 안다. 겨울 다음에는 반드시 봄이 온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기다린다.
철을 모르면 기다리지 못한다. 철을 알고 모르고의 차이이다. 진단만 정확하면 그 사람 인생의 절반은 이미 성공한 셈이다. 살아보니까 진단을 하기도 어렵고, 제대로 된 진단을 받아 보기도 정말 어렵다.
진단을 할 줄 아는 사람이 바로 철든 사람이고, 진단을 내려주는 사람이 스승이다. 한국사회에 스승이 없다는 것은, 그만큼 철부지가 많다는 말이기도 하다.
한국은 지금 몇 시인가?
한국의 대표적인 두집안 이야기. 2005/04/21 22:10
한국의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대표하는 두 집안이 있다.
한 집은 12대 300년 동안이나 만석군의 부(富)를 유지했던 경주 최 부자집이고, 다른 한 집은 조선 후기까지 자그마치 10명의 재상을 배출했던 경주 이씨 백사공파(白沙公派) 이시영(李始榮·1869~1953) 집안이다.
최 부잣집이 조선의 부를 대표하던 집안이었다면, 이시영 집안은 조선의 귀(貴)를 대표하던 집안이었다. 전자는 돈을 어떻게 써야 하는가를 보여준 집이라면, 후자는 일제 강점기에 명문가로서 귀를 어떻게 지켰나갔는가를 보여주는 집이다.
이시영의 형제는 모두 6형제였다. ‘삼한갑족(三韓甲族)’의 자제였던 이들 6형제는 일제 때 나라가 망하자 모두 합심하여 만주로 망명하였다. ‘대대로 명문이라는 소리를 듣는 우리 가문이 일제 치하에서 노예가 되어 생명을 이어간다면 무슨 면목이 있겠는가!’라는 통탄이었다. 백사 이항복의 10세 후손으로서 고종 때 이조판서를 지냈던 이유승(李裕承)의 여섯 아들이었다.
이들 형제는 60명의 대가족 모두를 12대의 마차에 나누어 태우고, 1910년 겨울에 서울 명동을 떠나 눈 내리는 만주로 망명하였던 것이다.
첫째는 이건영(李健榮·1853~1940), 둘째 이석영(李石榮·1855~1934), 셋째 이철영(李哲榮· 1863~1925), 넷째 이회영(李會榮· 1867~1932), 다섯째가 이시영, 여섯째 이호영(李頀榮·1875~1933)이었다.
이 망명을 주도했던 인물은 넷째였던 이회영이었다. 서울 명동을 떠나면서 처분했던 재산총액은 요즘 가치로 환산하면 약 1000억원 정도. 이 돈으로 만주에 신흥무관학교를 세웠고, 여기에서 배출된 졸업생들이 청산리 전투에서 일본 정규군을 대파할 수 있었다.
5형제를 포함한 가족 대다수는 굶주림과 병, 그리고 고문으로 모두 중국에서 죽었고, 이시영만 유일하게 광복 이후 귀국할 수 있었다. 이시영은 17세(1885년)에 과거에 급제하여 형조좌랑, 평안도 관찰사, 한성재판소장을 지내다가 벼슬을 버리고 만주로 갔다.
신흥무관학교에서 수많은 독립군 간부들을 양성하였으며, 임시정부 법무총장, 광복 후에는 부통령을 지냈다.
이시영의 52주기 추모식이 엊그제 세종문화회관에서 있었다. 한국은 이 집안에 빚을졌다.
===청자 음각 연꽃넝쿨무늬 매병(靑磁陰刻蓮唐草文梅甁)===
국보 97호 | 고려(12세기)
높이 43.9㎝의 이 대형 매병이야말로
고려청자 특유의 곡선미와 세련되고 은은한 비색(翡色)의 자태를
유감없이 보여주는 명품이다.
부드러우면서도 풍만한 어깨, 유연한 허리,
좁아지다 살짝 벌어지며 안정감을 주는 곡선은 그 자체로 시각적 쾌감을 준다.
‘음각’이란 조각칼과 같은 도구로 그릇 표면에 홈을 내어 무늬를 새기는 방식.
이 청자에선 조각칼을 옆으로 뉘어 새겨
선이 굵어지고 반쯤 양각된 것처럼 보이는 11세기 중엽 이후의 기교가 잘 드러나 있다.
대범하게 그어진 넝쿨 무늬는
연꽃을 감싸면서 병이 이루는 곡선을 거스르지 않는 기막힌 조화를 이룬다.
2차원이 아니라 3차원 위에 새긴 무늬인 것이다.
===국보78호 금동반가사유상===
깊은 생각에 잠긴 부처의 모습을 형상화 한 국보 78호 금동반가사유상.
사유상의 보관과 천의에도 신령스러운 기운의 표현이 숨어 있다.
사진 제공 강우방 교수
반신욕(半身浴)과 수행(修行)
요즘 반신욕이 세간에 유행하고 있습니다. 예전에는 목욕을 한다는 것은 단순히 때를 벗기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탕에 온몸을 넣고 때를 불려야만 하는 것으로 인식되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목욕에도 웰빙이 도입되어 건강을 위한 방법의 하나로 인식되고 있습니다. 그 대표적인 것이 요즘 유행하고 있는 반신욕입니다.
그런데 반신욕은 특별히 고안된 것이 아니라 이미 동양의 수행과 의학의 세계에서 널리 알려진 것입니다. 즉, 반신욕은 수행이 다른 종류로 발전된 것입니다. 여러분도 이미 수행을 하고 계시는 중입니다.
두한족열(頭寒足熱), 머리는 차갑게 하고 발은 따듯하게 하라!!!
이는 의학에서 하는 말이고, 수행에서는 수승화강(水升火降, 수기운은 올리고 화기운은 내려라) 또는 환정보뇌(환정보뇌, 정을 되돌려서 뇌를 보한다)•응신취기(凝神聚氣, 신을 굳혀 기로 모은다)라고 합니다.
반신욕 할 땐 팔 담그지 마세요
[중앙일보, 2004.6.10]
"목욕으로 1주일 피로를 말끔히-.
요즘 전문 욕조까지 나올 만큼 인기 높은 반신욕은 동의보감에 기술된 두한족열(頭寒足熱.머리는 차갑게 하고 발은 따듯하게 함)이 기본 원리다. 하반신이 따뜻해야 인체의 기운이 제대로 흐른다는 것이다.
반대로 두열족한(頭熱足寒)은 만병의 원인이라는 것이 한방의 시각이다. 따라서 반신욕의 핵심은 몸의 가슴(명치 부근) 아랫부분만을 욕조에 담그는 것이다. 이때 팔은 물에 넣지 않는다. 수온은 체온보다 약간 높은 37 ~ 38도가 적당하다.
경희의료원 한방재활의학과 신현대 교수는 "욕조에 들어간 지 20 ~ 30분이 지나면 몸 안쪽부터 더워져 땀이 발산된다"며 "땀을 통해 몸에 쌓인 독소와 노폐물이 빠져 나간다"고 말했다. 반신욕을 하면 수축된 혈관이 열리며 피가 부드럽게 흘러 혈압이 내려간다. 적응 질환은 생리 불순.생리통.갱년기 장애.냉증.자궁 질환.방광염.요도염.어깨 결림.무릎 신경통.관절염 등이다…. [박태균 식품의약전문기자]
[이규태 코너] 내나무 심기 입력 : 2003.05.08 19:42 13'
엊그제 서울 뚝섬 3600평 땅에 내 나무 심기가 벌어졌었다. 개인이나
가족, 모임들이 자신들의 염원이나 사연을 담은 묘목을 심어 싱싱하게
자라는 그 나무에 자신의 운명이나 희망을 의탁하는 자연회귀운동의
일환이랄 수 있다. 이를 주관하는 당국에서는 도시의 자투리 땅이나
빈터만 있으면 나무를 심어 생태계를 복구하는 그린 트러스트 운동의
첫발이라고 하지만 우리 조상들의 수목을 둔 오래 잊혀진 전통과의
접목이라는 차원에서 각광을 대보고자 한다.
딸을 낳으면 그 딸 몫으로 오동나무를 밭두렁에 심고 아들을 낳으면 그
아들 몫으로 선산에 소나무를 심었다. 이를 그 아기의 운명과
동일화시켰다 해서 「내 나무」라 했다. 아기가 자라면서 앓으면 내 나무
찾아가 왼새끼 둘러놓고 병 낫기를 빌었고 과거에 급제하면 맨 먼저 내
나무 찾아가 어사화(御賜花) 옮겨 꽂고 큰절을 했다. 딸이 시집갈 때 그
오동나무 잘라 농짝을 만들어 여생을 더불어 하고 아들이 늙어 죽으면 그
소나무 잘라 관을 만들어 후생을 더불어 영생한다. 이처럼 나무와 인생을
동일화시킨 문화가 동서고금 어떤 다른 나라에도 있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없다.
우리 조상들 나무에는 한 그루 꽃나무일지라도 수령(樹靈)이 깃들어
있다는 수목관(樹木觀)과 이 동일화는 무관하지 않다고 본다. 인조 때
문신 이덕형(李德泂)의 「죽창야화」에 이런 이야기가 나온다. 인왕산
아래 김공이 별나게 고운 노란 장미에 취해 졸고 있는데 노란 옷 입은
장부가 나타나 “주인의 아들이 더러운 물을 내 얼굴에 뿌리길 자주 하여
해코지를 하고 싶은데 주인분의 덕이 커 이도저도 못하고 있나이다”
했다. 이상한 꿈이라고 생각하고 있는데 첩 아들놈이 나타나
장미꽃나무에 오줌을 싸 꽃잎을 적셔 놓는 것을 보고 노란 장미의
수령(樹靈)임을 알았다 했다. 내 나무는 수령관(樹靈觀)이 접착제로
작용한 자연과 인간의 가장 이상적인 결합방식이랄 수 있겠다.
내 나무 무성한 것을 보고 좌절을 이겨낼 것이요, 그 나무 아래 가족과
둘러앉으면 내 집보다 안식감이 더할 것이다. 그렇게 내 나무처럼 푸르게
살다가 죽어서 뼛가루를 나무뿌리에 묻어 내 나무에 삶을 연결시키는
유럽의 수목장(樹木葬)이나 화목장(花木葬)으로도 번져나갈 수 있을 것임.
[조용헌 살롱]묘(墓) 이장(移葬) 입력 : 2004.10.04 18:59 58'
한국 사람들은 조상의 묘(墓) 자리에 특별한 관심을 가지고 있다. 유명 정치인의 묘 자리 이장은 뉴스거리로 취급될 정도이다. 몇 년 전 DJ 선친 묘를 용인으로 옮겼을 때에도 언론에 보도가 되었고, JP 선친 묘의 이장(移葬)도 역시 대중의 주목을 받았다. 며칠 전에는 전 한나라당 대통령 후보였던 이회창씨의 부친 묘 이장이 각 일간지에 보도되었다. 조상의 묘 이장이 왜 사회적인 뉴스로 취급되는 것인가.
이 독특한 현상을 이해하려면 한국인의 ‘사생관(死生觀)’을 알아야 한다. 한국인의 전통적 사생관에 의하면 사람은 육체가 죽는다고 해서 모든 것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죽음이란 혼백(魂魄)의 해체였다. 죽는 순간 혼(魂)은 하늘로 올라가지만, 백(魄)은 뼈에 남는다고 생각하였다. 죽은 후에도 영혼의 50%가 뼈에 남아 있다고 여겼던 것이다. 죽은 자의 뼈가 묻혀 있는 묘 자리는 나머지 50%의 영혼, 즉 백이 거주하는 집이 된다. 그래서 묘 자리를 음택(陰宅)이라고 불렀다. 조선시대의 주택개념에는 산 사람이 거주하는 양택(陽宅)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죽은 자의 영혼이 거주하는 음택도 역시 포함되었다는 사실을 주목한다.
이를 놓고 보면 우리 조상들은 생과 사를 양과 음의 관계로 보았음을 알 수 있다. 음과 양은 밤과 낮처럼 서로 돌고 도는 관계이다. 음이 양이 되고, 양이 음이 된다. 서로 물고 물리는 관계이기도 하다. 물고 물린다는 것은 서로에게 영향을 미친다는 뜻이다. 따라서 조상의 음택을 명당에다 쓰면 산 사람인 후손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고, 비명당(非明堂)에다 쓰면 부정적인 영향을 미친다고 여겼다.
그 연결고리의 핵심은 뼈이다. 뼈는 조상과 후손을 연결하는 휴대폰과 같은 역할을 한다. 명당에다 묘를 쓰면 반가운 전화가 오지만, 비명당에다 묘를 쓰면 골치 아픈 전화가 온다. 그러나 명당의 공급이 절대적으로 부족한 현 상황에서는 대부분 비명당에 묘를 쓸 확률이 높다. 비명당에 들어갈 바에는 차라리 휴대폰을 폭파할 수밖에 없다. 골치 아픈 전화는 안 받는 것이 좋다. 휴대폰 폭파는 화장(火葬)이다. 화장은 무해무득이다.
운조루의 쌀뒤주 2005/01/11 14:02 추천 1 스크랩 0
전남 구례군 토지면 오미리에는
금구몰니형(金龜沒泥形) 명당으로 유명한 ‘운조루’가 있다.
영조 때 삼수부사를 지낸 유이주(柳爾胄·1726~1797)가 세운 집인데,
‘구름 속의 새처럼 숨어 사는 집’이라고 해서 운조루라는 이름이 붙었다.
이 집에는 독특한 모양의 쌀뒤주 하나가 곳간채에 남아 있다.
둥그런 통나무의 속을 비워 내고 만든 원통형 뒤주이다.
이 뒤주의 하단부에는 특이한 장치가 있다.
가로 5cm, 세로 10cm 정도의 조그만 직사각형 구멍을 만들어 놓고,
그 구멍을 여닫는 마개에다가 ‘타인능해(他人能解)’라는 글씨를 새겨 놓은 것이다.
‘다른 사람도 마음대로 이 마개를 열 수 있다’는 뜻이다.
누구라도 와서 쌀을 퍼갈 수 있는 뒤주인 것이다.
유씨 집안에서 주변의 가난한 사람들을 대상으로 베풀기 위한 용도의 뒤주였다.
뿐만 아니라 지나가는 과객들도 조금씩 쌀을 가져가곤 하였다.
뒤주의 위치도 주인과 얼굴이 마주치지 않는 장소인 곳간채에 배치하였다.
퍼가는 사람의 자존심에 대한 배려였다.
이 뒤주에 들어가는 쌀의 용량은 두 가마 반.
하단부의 ‘타인능해’ 마개를 옆으로 돌리면 쌀이 나오도록 되어 있다.
한 사람이 가져가는 쌀의 양은 보통 1~2되 분량이었다고 한다.
주인이 보지 않는다고 해서 7~8되씩 몽땅 가져가는 양심불량은 드물었다.
운조루에서 지은 논농사가 2만평. 연평균 200가마를 수확하였다.
쌀뒤주에 들어간 쌀이 1년에 36가마 분량이었으니 유씨 집안은
1년 소출의 약 18%를 없는 사람들에 대한 배려로 지출한 셈이다.
이 집의 주인은 월말에 쌀뒤주를 체크했다. 만약 쌀이 남아 있으면,
“덕을 베풀어야 집안이 오래간다. 당장에 이 쌀을 주변사람들에게 나누어줘라.
항상 그믐날에는 뒤주에 쌀이 없게 하라!”는 당부를 며느리에게 하였다고 전해진다.
[조용헌 살롱] <83> 독도의 삽살개
지금 독도에는 삽살개 두 마리가 살고 있다고 한다. 경북대 유전공학과 하지홍(51) 교수가 1998년에 기증했던 삽살개의 새끼들이다.
하 교수는 ‘조만간 독도에 삽살개 10여 마리를 데리고 가 지신밟기를 할 계획’이라는 보도가 있었다. 거의 멸종되어 가던 한국의 토종개인 삽살개가 보존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헌신적인 노력 덕택이다.
하 교수가 펴낸 ‘우리 삽살개’(2001)에는 삽살개의 멸종 위기에서
부터 보존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이 상세히 밝혀져 있다. 이 책에 보면 ‘삽살개’는 원래 ‘액운을 쫓는 개’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고 한다.
삽은 ‘퍼낸다’ ‘없앤다’라는 의미이고, 살(煞)은 ‘삿된 기운’을 뜻한다. 따라서 ‘삽살’이란 삿된 기운, 즉 액운을 물리치는 개라는 뜻이 된다. 거슬러 올라가면 삼국시대부터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귀신을 쫓기 위한 용도의 개로 선호되었던 개가 바로 삽살개였던 것이다.
삽살개의 특징은 털이 길다는 점이다. 그 모습이 사자와 비슷한 면이 있다고 해서 일명 ‘사자개’라고도 불린다. 중국 구화산(九華山)에 지장보살로 모셔져 있는 신라 출신 김교각 스님이 신라를 떠날 때부터 항상 데리고 다녔던 개가 삽살개였다. 이 개는 죽어서도 구화산의 지장보살도에 같이 등장할 정도로 유명한 개가 되었다. 뿐만 아니라 조선시대에는 액운을 쫓는 그림인 문배도(門排圖)에 삽살개 그림이 자주 등장하였다.
그만큼 삽살개는 우리 민족의 사랑을 받던 개였다. 일본의 신사나
사찰 입구에도 목조 또는 석조의 동물상이 벽사(?邪)의 용도로 설치되어 있다. 이 동물을 ‘고마이누(?犬)’라고 하는데, ‘고려개’라는 의미라고 한다. 한반도에서 고려족이 데리고 왔기 때문이다. 삽살개의 일종이다.
삽살개가 멸종 위기에 몰렸던 시기는 일제 때였다. 1938년 이후로
개의 가죽이 군수품과 생활용품에 필요하다고 해서 진돗개를 제외한 나머지 토종개들을 1년에 수십만 마리씩 도살하였던 것이다. 이때
체격이 좋은 대부분의 삽살개가 도살되어, 해방 후에는 산간오지가 아니면 삽살개를 발견하기가 어려울 정도였다고 한다. 하 교수가
귀신 쫓는 삽살개들을 데리고 독도에 들어가 지신밟기를 하는 것은 여러모로 의미심장한 일이다. (조선일보)
[조용헌 살롱]와인과 차(茶) - 2004.09.10 18:38 43'
서풍이 몰아칠 때 맞받아칠 동풍은 무엇인가. 서양에는 ‘소믈리에(sommelier)’가 있다면, 동양에는 ‘품명가(品茗家)’가 있다. 소믈리에는 와인의 맛을 감별하는 전문가를 가리키는 표현이고, 품명가는 차(茶)의 맛을 감별하는 전문가를 말한다. 차와 와인은 전문 감별사가 따로 존재해야 할 만큼 매우 섬세한 기호품이라는 점에서 여러 가지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
첫째, 차와 포도는 수확하는 그 해의 기후에 영향을 받는다.
비가 많이 온 해에 수확을 했는가, 아니면 가뭄이 들던 해에 수확했는가에 따라 맛이 달라진다.
둘째, 맛·향·색깔·투명도·부드러움 등등을 따지는 기준이 양자 모두 비슷하다.
셋째, 산지가 어디냐에 따라 다르다. 와인도 프랑스 보르도산인가, 칠레산인가에 따라 맛이 다르듯이 차도 지리산인가, 전남 보성인가, 중국 무이산인가에 따라 맛이 다르다.
넷째, 어떤 잎으로(포도로), 어느 해에 만들었느냐에 따라서 빈티지(vintage:제작연대)를 결정한다. 양자 모두 빈티지가 선택의 기준이 된다. 다섯째, 차와 와인은 그 종류가 아주 다양하다. 저질에서 극상품(極上品)에 이르기까지 선택의 폭이 아주 넓다. 와인도 수백 종류가 있지만 차도 수백 종류가 넘는다. 가격도 1만~2만원대에서 수천만원대까지 걸쳐 있다.
그렇다면 차와 와인의 다른 점은 무엇인가.
와인은 한 자리에서 3~4병을 한꺼번에 먹을 수 있지만, 차는 보통 1통을 사면 6개월 내지 1년의 시간을 두고 먹는다. 차에 비해서 와인이 훨씬 소비가 빠르다.
와인은 많이 먹으면 알코올에 취하지만, 차는 맛과 향에 취한다는 점이 다르다. 차의 깊은 맛을 알려면 마음이 가라앉아 있어야 한다.
마음이 바쁘면 깊은 맛을 느끼기 어렵다. 차 맛을 깊게 느끼려면 마음이 한가한 건달이 되어야 한다. 하지만 세상사라고 하는 게 묘해서 마음이 한가한 건달은 차 맛을 알지만 돈이 없어서 못 사먹고, 바쁘게 사업하는 사람은 돈은 있지만 마음이 산란해서 차 맛의 깊은 풍류를 알 수 없다.
차를 유난히 좋아했던 다산 정약용 선생은 ‘술을 좋아하는 민족은 망하고, 차를 좋아하는 민족은 흥한다’고 말씀하셨다. 술보다는 차를 권하셨다.
[조용헌 살롱]도사들의 필수과목 '표주(漂周)' - 2004.10.01 18:24 17'
도사가 되기 위해서 거쳐야 할 필수과목이 있다. 표주(漂周)라고 하는 과정이 그것이다.
표(漂)자가 ‘떠다닌다’는 뜻이므로, 해석하면 ‘정처 없이 발길 가는 대로 세상을 돌아다니는 것’이 된다.
도교에서는 표주 과정을 대략 3년 정도 설정하고 있다.
도사가 되려면 의무적으로 3년 정도는 세상을 돌아다녀야 밑바닥 민심이 어떻게 돌아가는가를 알고, 각 지역의 특산물과 물류의 흐름, 어디에 수도하기 좋은 영지(靈地)가 있는가, 각 분야의 고수들이 어느 지역에 있는가를 살피기 위해서이다. 표주 과정은 초급단계를 마치고 중급단계에 들어가는 도교 수행자가 거쳐야 하는 과정인데, 표주를 앞둔 당사자들은 걱정을 많이 하였다고 한다.
왜냐하면 표주는 반드시 돈 없이 돌아다녀야 한다는 조건이 붙기 때문이다. 돈을 가지고 다니면 유람이 되지만 돈이 없이 다녀야 표주, 즉 진짜 공부가 된다고 여겼다. 돈 없이 주유천하를 하려면 당연히 자생력을 갖추어야 한다.
도사 지망생들의 자생력은 세 가지였다.
첫째는 아픈 사람을 고쳐주는 의술(醫術),
둘째는 앞일을 예언해줄 수 있는 점술(占術),
셋째는 아이들을 가르칠 수 있는 학술(學術)이다.
이 삼술(三術)만 갖추고 있으면 어떤 지역, 어떤 상황에 직면하더라도 절대 굶어죽지 않음.
요즘 서울시청 앞 광장에는 내셔널 지오그래픽의 사진작가인 마이클 야마시타(55)의 사진전이 열리고 있다.
700년 전 마르코폴로가 지나갔던 코스를 그대로 답사하면서 찍은 사진들이다.
출발지점인 베네치아에서부터 시작하여, 이란과 이라크의 산악지대, 아프가니스탄의 전쟁터, 파미르 고원, 중국 쑤저우(蘇州)의 운하에까지 이르는 여정이다.
야마시타의 사진을 보고 있노라니까 표주가 생각난다. 도교의 맥이 희미해지면서 표주라고 하는 낭만적인 교과과정도 사라져 버렸지만, 엉뚱하게도 내셔널 지오그래픽의 사진작가가 그 맥을 잇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의술, 점술, 학술이라고 하는 삼술 대신에 야마시타가 메고 간 것은 카메라이다.
보도에 따르면 4대의 카메라와 12개의 렌즈,수천 롤의 필름을 휴대하고 다닌 여행이라 함.
대륙을 횡단하면서 인간사의 영욕과 희로애락을 카메라에 담는 사진작가. 현대판 도사가 아닌가 싶다.
인물 낳는 법(좋은 자식을 낳으려면.... 2007/01/13 11:23)
‘맹자(孟子)’에보면 “천시불여지리(天時不如地利)요 지리불여인화(地利不如人和)”라는 대목이 나온다. “천시가 지리보다는 못라고 지리의조건을 갖추었어도 사람이 서로 화합하는 것만 같지모하다.”는 뜻이다. 천시(天時)와 지리(地利)도 최종적으로는 인간을 위해서 존재할 수밖에 없다는 선언이기도 하다. 결국은 사람이다 흩어진 민심을 화합시키는 것도 인물이 나와서 하는 일이다.
그렇다면 인물은 어떻게 만들 것 인가. 인물은 후천적인 교육을 통해서도 만들어지지만 한자문화권에서는 선천적인 요건에 더 비중을 둔감이 있다. 선천적인 요건이란 첫째 유전적인 부분이다 요즘식으로 말하자만 DNA 이다 어떤 혈통을 가진 집안에서 태여나느냐가 중요하다 . 둘째는 임신이 일우어지는 입태 (入胎)장소와 어머니 뱃속에서 나오는 출태(出胎) 장소에 좋은 기운이 뭉쳐 있어야한다. 셋째는 시간이다. 입태 되는 시간과 출태하는 그 시간이 하늘의 음양오성(陰陽五星)에너지가 조화를 이루는 시점이어야 한다. 이런 조건을 모두 갖추면 특출한 인물이 태여 날 확률이 아주 높고 두 가지만 갖추어도 인물이 태여 날 가능성이 높다. 첫번째의 조건을 갖추기 위해서 옛날 어른들은 혼사(婚事)를 중요시하였다. “왕대밭에 왕대나고 쑥대밭에 쑥대난다”는 속담이 이를 말한다. 부계(父系)의 유전자가 오기도 하지만 모계(母系)의 유전자가 오기도 한다. ‘음중양(陰中陽) 양중음(陽中陰)’의 이치서 본다면 이들은 모계를 많이 닮고 딸은 부계를 많이 담는다. 며느리가 영리하면 손자도 영리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그다음에는 모계나 부계의 조상이 어떤사람이었는가를 보아야한다. 그중에서도 특히 증조부나 고조부가 어떤 성격이었고 어떤 직업에 종사하였는가를 본다. 물론 증조모 고조모도 만찬가지이다. 이는 친가나 외가 쪽의 조상 모두 해당되는 사항이다. 평균 3-4대 건너 뛰어 인물이 나올 수 있다 고산 (孤山 윤선도(尹善道. 1587-1671)의 증손이 공재(恭齋) 윤두서(尹斗緖. 1668-1715)이고 공재의 외증손이 다산(多山) 정약용(1762-1836)이다.
성공한 남자들, 예를 들면 난국을 헤쳐 나온 장치인이나 기업을 일으킨 창업주같은 사람들을 보면 대체로 기질이 강하다. 추진력도 강하고 카리스마도 대단하다. 이런 강한 남자들을 만날 때마다 “저런 사람들의 아들들도 과연 아버지처럼 강할까? 하는 의문이 든다. 필자는 십중팔구 그 아들들이 약하리라 추측한다. 왜냐하면 강한 남자는 상대적으로 부드러운 여자를 좋아하기 마련이다. 센 여자를 좋아하지 않는다. 이런 남자들의 부인들은 확률상 감정이 섬세하고 여성적인 성격의 소유가가 대부분이다. 아들들은 어머니의 기지를 닮을 가능성이 높으므로 어머니가 섬세하면 그 아들들도 섬세하고 여린 아들이 태어난다. 섬세하고 여린 아들은 그 아버지의 기업을 유지하기가 힘들다 그래서 부자가 3대를 넘기기가 힘들다는 말이 나왔지 않았나 싶다. 부계도 중요하지만 모계도 그만큼 중요하다 조선조 선지집안에서 팔고조도(八高祖圖)를 작성해 외우게 한 이유도 따지고 보면 이런 햘통조사와
무관하지 않다고 본다. 인물을 낳을려면 합궁도 준비가 필요하고부정모혈(부정모혈)이 뭉쳐야 임신이 된다 이때 아바지의정액과 어머니의 피가 맑고 건강해야한다. 맑고 건강해야만 좋은 영혼이 탁태된다. 정혈이맑으면 거기에 비례해서 맑고 수준 높은 영혼이 탁태되고 탁하면 탁한 영혼이 탁태 된다. 관건은 정혈을 건강하게 만들고 맑히는 작업이다.
이를 위해서는 신랑신부가 합궁을 하기전에 최소한 100일 정도는 준비를 해야 한다. 술과 담배를 금하고 정갈한 음식을 섭취하고 화를 내거나 놀라는 일이 없이 담담한 마음을 갖도록 노력하여야한다. 술 담배를 많이 하고 감정의 기복이 심한 남자의 정액은 색깔이 갈이 누리끼리하고 탁하고 막걸리 색깔처럼 틉틉하다. 반대로 담백한 생활을 한사람은 물처럼 맑다. 정액의 색깔을 보면 심신의 건강을 비롯해 생활상태가 그대로 나타난다. 여자도 마찬가지이다. 좋은 아이를 기려면 적어도 100일 정도는 부부가 기도하는 마음으로 일상생활을 해야 한다. 100일간 방을 따로 쓰며 금욕생활을 해야 하는 것은 당연하다.
신랑신부가 합궁하기 전에는 음식도 주의하여야한다. 오염 되지 않은 물과 음식을 섭취하면 좋다. 특히 술은 금기이다. 조선시대 사대부집안에서는 합궁이전의 음주를 금기시켰다. 몇 년전에 울산 김씨문중의 유서 깊은 집안 어른을 만났을때 합궁비결을 질문하였던 적이 있었는데 “우리집안에서는 신혼여행가서 술 먹지않는다가 가훈이다.” 라른 답변이 인상적이엇다. 술을 먹으면 알딸딸한 자식이 나온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알딸딸한 자식이 나오면 잡안 망하는 지름길이다. 합궁하기 전에는 어느 정도의 금욕기간이 필요하다 보통 100일 이다 100일 정도는 금욕생활을 한뒤 합궁해야만 기가 응축된 자손이 태여난다. 인생을 살면서 건곤일척 (乾坤一擲)의 승부를 걸어야만 하는 상황에 직면해서는 그 사람이 타고난 기가 어느 정도인가 에 따라 결과가 좌우된다. 합궁간격이 짧으면 비례해서 기가 약한 자손이 태여난다. 이와 관련하여 전해지는 이야기가 조선조 창업을 도왔던 무학대사(無學大師)탄생설화이다 무학대사어머니가 11-12세무렵의 소녀시절에 지나가던 도사로부터 “나중에 크면 귀한 자식을낳은 관상이니 기운을 함축해야한다”는 예언을 들었다. 이말을 듣고 난 후부터 무학대사 어머니는 말을 하지 않았다. 묵언에 들어간 것이다. 묵언을 한지 9년후 에 동네 우물가에서 물을 긷다가 어떤 남자를 만났다. 이남자는 산에들어 가서 9년간 도을 닥은 뒤 하산하던 길이었다. 갈증이 난 이 남자는 물을 긷던 처녀에게 물 한 바가지 달라고 했다. 이 처녀가 그 남자를 보는 순간 자기도 모르게 말문이 터지면서 물을 건네 주고 줬고 결국임신을 하게 됐다 여기서 낳은 아들이 바로 무학대사라고 전해 진다 어머니는 9년간 묵언을 하였고 아버지는 9년간 입산수도를 한후에 낳은 아들이었던 것이다. 옛날 에는 대가족제도였고 사대부 집안은 안채와 사랑채가 분리 되어 있어서 100일정도 합궁간격을 둘 수 있었다. 요즘은 핵가족 아파트이므로 합궁간격이 급속히 짧아지는 추세이다. 그러기는 하지만 49일이라도 지키면 어떨지...
동양고전과 방중술(房中術)에 식견이 높았던 소설가 이병주는 “바람과 구름과 비(碑)”에서 인물 낳는 방법을 묘사한 바있다. 여기서 주인공인 최천중은 천하대권을 잡을 자식하나 낳기 위하여 여자를 고를 때도 신중을 기한다. 복과 지혜가 있는 여자를 고른 다음에 합궁하는 날짜도 택일(擇日)을 한다. 그러나 소설에서는 이 택일법에 대해서 자세한 설명이 나와있지 않다. 너무 전문분야였기 때문에 소설가 본인도 확실하게 몰랐을 가능성이 있고 있더라도 복잡해서 설명을 생략했을 것이다.
조선시대 사대부집안들은 좋은 자식을 얻기 위해서 신랑 신부의 합궁날짜를 계산했다. 어떤 날짜, 어떤 시간대에 해야 좋은가는 은밀하게 전해지는 은비학(隱秘學)이 있었다.
외부에 쉽게 노출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택일하는 계산방법도 상당히 복잡했다. 필자는 이 비법을 배우려고 보따리에 수업료를 넣고 전국각처 의 고수들을 찾아다니던 적이 있었는데 문파마다 그방식이 약간씩 달랐다. 공통적인 것은 음양오행의 원리이다. 먼저 신랑과 신부의 생년월일시를 파악한 뒤 만세력(萬歲曆)을 보고 이를 육십갑자(六十甲子)로 환산한다. 육십갑자로 그 사람의 생년월시를 들여다보면 그 사람이 어머니 뱃속에서 나와 탯줄을 자르는 순간에 우주의 음양오행기운이 어떤 비율로 들어왔는가를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다. 우주의 기운은 별자리의 기운을 뚯하고 이 별자리 기운은 탯줄을 자르는 순간에 들어온다. 마찬가지로 어머니뱃속에서 수태되는 시점도 중요하다. 날짜 와 시간의 출시시점을 결정하는 것이라면 합궁날짜를 계산하는 것은 입태시점을 결정하는 것이다.
신랑 신부가 태어난 시점의 육십갑자를 보고 음이 부족 한가 양이 부족한가를 살핀다. 두 사람 모두 음이 부족하면 양월(陽月)양일(陽日) 양시(陽時)로 합궁시점을 잡는다. 양이 부족하면 음월음일 음시를 잡는 식이다. 일년 중에 양월은 자(子)인(寅)진(辰)오(午)신(申)술(戌(술) 월이다. 음월은 축 (丑) 묘 (卯) 사( 巳) 미 (未) 유 (酉) 해(亥)월이다. 날짜와 사간도 마찬가지다.
[조용헌살롱]현애살수(懸崖撒手)
한국 선가(禪家)에 내려오는 3단계 공부 방법을 소개하면 이렇다. 처음 10년은 경전(經典) 공부이다. 우선 경전을 보아야만 공부의 큰 가닥을 파악한다. 그다음 10년은 여행이다. 이를 ‘만행’(萬行)이라고 표현한다. 마지막 10년은 참선(參禪) 공부이다.
30년 공부가 끝나면 50대 중반이 된다. 보통 대학 졸업할 무렵인 20대 중반부터 공부에 들어간다고 가정하면 30대 중반까지는 수많은 경전과 책을 보는 기간이다. 40대 중반까지는 주유천하(周遊天下)를 해야만 한다. 지리산 피아골에서도 살아보고, 뉴욕 맨해튼 5번가도 왔다 갔다 해보고, 파리 루브르 박물관에도 한 열흘 있어보고, 인도의 라자스탄에서 점성술 공부도 해보고, 모세의 시나이 산에도 올라가 본다. 여행 도중에 밥도 얻어먹고, 병도 걸려보고, 마구간에서 도둑잠을 자다가 두들겨 맞아보기도 해야만 인생의 깊이를 더한다. 그리고 나서 명상으로 들어간다. 밖을 둘러보아야만 안으로 침잠해 들어갈 수 있지 않겠는가.
10년 여행의 묘미는 사람을 만날 수 있다는 데 있다. 여행의 초창기에는 장엄한 경치를 구경하는 데에 정신이 팔리지만, 그다음에는 사람을 만나는 일이 더 중요해진다. 필자가 인도여행 도중에 만났던 석송(石松)이라는 인물이 있었다. 그가 이야기해주었던 ‘현애살수’(懸崖撒手·절벽에서 손을 놓아라!) 이야기가 지금도 기억에 남아 있다.
어떤 사람이 절벽에서 미끄러져 떨어지던 도중에 다행히 나무뿌리를 잡았다. 사력을 다해 두 손으로 그 나무뿌리를 잡고 있었다. 이때 어디선가 하나님의 음성이 들렸다. “두 손을 놓아라!” 이때 신앙심이 깊은 상근기(上根機)는 두 손을 놓는다. 그러나 신앙심이 약한 사람은 절대로 손을 놓지 않는다. 떨어지면 죽는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땀을 뻘뻘 흘리면서 끝까지 절벽에 매달려 있을 뿐이다. 사실은 매달려 있는 지점이 지상에서 1m밖에 안 되는 높이지만, 이 사람은 아래를 쳐다보지 못하므로 수십m 높이에 매달려 있는 줄만 안다.
하나님의 말을 듣지 않으므로 이때 자비로운 스승이 나타났다. 스승은 가죽채찍으로 사정없이 그 사람의 손등을 내리쳤다. 두들겨 맞고 나서야 비로소 손을 놓게 된다. 삶의 비밀이 ‘현애살수’ 이야기에 담겨 있다.
[조용헌 살롱] 博士 考
입력 : 2007.03.21 22:37 / 수정 : 2007.03.21 22:38
말이라고 하는 것은 후대로 내려갈수록 원래 의미에서 벗어나 인플레이션이 되는 수가 많다. 예를 들면 이렇다. ‘씨’(氏)라는 글자는 ‘성씨’(姓氏)의 뜻도 물론 있지만, 주로 왕조 또는 제후의 봉지(封地)에 붙여 쓰는 칭호나 관직에 붙여 쓰는 칭호로 사용되었다. 대단한 존칭의 의미로 사용되었던 것이다. 태고시대의 신농씨(神農氏), 복희씨(伏羲氏)라고 할 때의 ‘씨’는 존칭이다. 요즘에는 일반적으로 이름 끝에 ‘씨’를 붙이는 것이 관례가 되었다. 후대로 내려오면서 말의 인플레이션 현상이 발생한 것이다.
‘양반’(兩班)이라는 표현도 마찬가지다. 원래 문반(文班)과 무반(武班)을 통칭하는 말이었지만, 해방 이후부터는 보통사람에게도 ‘이 양반’, ‘저 양반’이라고 하는 말이 보편화되었다. 모두가 다 양반이 된 것이다. ‘선생’이라는 말도 그렇다. 요즘은 상대방을 부를 때 ‘선생’을 붙이는 것이 일반화되었다. 원래는 고급스러운 표현이었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인플레이션이 진행되어 대중화되는 현상을 세강속말(世降俗末:세대가 내려갈수록 풍속은 속되게 된다)이라고 한다. 이를 긍정적으로 보면 소수의 상류층에만 통용되던 문화가 아래로 내려가면서 대중화되는 현상으로 볼 수 있고, 부정적으로 보면 말의 인플레이션에 의한 부실화현상이라고 여겨진다.
‘박사’의 경우, 우리 역사를 소급해 올라가면 백제의 ‘오경박사’가 나타난다. 백제에서는 고급 인력을 ‘박사 제도’로 운영했던 것 같다. 대표적 인물이 일본에 문물을 전한 왕인(王仁) 박사였다. 해방 이후에는 ‘박사’ 하면 ‘이승만 박사’가 유명했다. 그는 ‘이 대통령’이란 호칭보다 ‘이 박사’라고 더 많이 불렸을 정도다. 그만큼 한국인에게 박사라는 호칭은 학문적 깊이와 인품을 상징하는 용어였다.
엊그제 한 은행에서 창구 직원을 뽑는 데에 박사 3명이 지원하였다는 신문 보도가 있었다. 은행측은 “박사 출신이 창구에 앉아 고객을 맞는 업무에는 적당치 않다고 여겨서 이들을 탈락시켰다”고 밝혔다. 그만큼 적당한 일자리를 잡지 못한 박사들의 문제가 심각한 상황이다. ‘박사’의 경우, 말의 인플레이션은 아니다. 문자 그대로 박사가 넘쳐나는 세상이 되었다.
[조용헌살롱] 민속주
술은 문화권에 따라 기호품과 음식으로 나누어진다. 기호품에 해당되는 대표적인 술을 꼽으라면 위스키다. 날씨가 추운 북유럽 문화권에서 주로 마시는 위스키는 도수가 높은 독주(毒酒)다. 기호품에 해당되는 술은 안주가 별로 없다는 점이 특징이다. 기호품은 중독성이 있다. 음식에 해당되는 술을 꼽는다면 프랑스의 포도주나 한국의 막걸리다. 포도주나 막걸리는 음식을 먹으면서 함께 먹는 술이다. 반주(飯酒)인 것이다. 취하려고 먹는 술이 아니다. 음식은 중독성이 없다는 점이 특징이다. 맥주는 기호품과 음식의 중간 선이다.
막걸리에서 드러나듯이 한국의 전통 술은 음식으로 분류되었다. “주안상을 본다”라고 할 때의 한자가 ‘주안상(酒安床)’이라는 주장도 있다. ‘술을 편안하게 마실 수 있도록 해주는 상’이라는 것이다. 술을 편안하게 마시려면 음식, 즉 안주가 반드시 곁들여져 있다는 의미이다. ‘술 이야기’를 쓴 김학민(58)씨의 주장에 의하면 우리나라의 반주 풍습은 밥을 먹기 전이나 후에 놋쇠 밥그릇 뚜껑에 술을 따라서 먹는 것이 일반적이었다고 한다. 이때 놋쇠 밥그릇 뚜껑은 따뜻하게 데워져 있기 마련이다. 차가운 술이 아니라 약간 미지근하게 데워진 술을 반주로 먹었다는 이야기다. 이처럼 술의 냉기를 제거한다는 표현을 ‘거냉(去冷)’이라고 한다.
한국은 술을 음식으로 먹어오다가 일제(日帝)가 들어오면서 이 전통이 무너졌다. 기호품으로 먹기 시작한 것이다. 그 대표적인 예가 바로 일제 때 희석식 소주가 등장하면서부터라고 한다. 그리고 고을마다, 집안마다 전해지던 고유의 민속주들이 밀주(密酒)라고 해서 법으로 금지하면서 사라지기 시작하였다. 원래 사대부 집안에서는 각기 고유의 술이 있었다. 사대부 집안의 양대 임무가 접빈객(接賓客·손님을 대접함)과 봉제사(奉祭祀·제사를 모심)였고, 여기에 빠질 수 없는 필수음식이 술이었다. 이러한 조선시대의 술 전통이 일제에 의하여 단절되지 않고 그대로 이어져 왔다면 한국은 민속주의 왕국이 되었을 것이다.
현재 맥이 이어져 오는 가양주(家釀酒)는 전국에 약 200여 종이 있고, 이 중에서 상표를 붙이고 시판되는 민속주는 30여 종에 이른다고 한다. 민속주를 되살렸으면 좋겠다.
<2006.3.20. 조선일보, 조용헌>
[조용헌 살롱] <51> 지축 변화와 ‘정역(正易)’ 입력 : 2004.12.29 18:11 28'
이번에 남아시아를 강타한 지진으로 인해서 수마트라섬의 위치가 36m나 남서쪽으로 이동되었다고 한다. 남북으로 1700km, 너비가 450km인 수마트라섬은 한반도의 2배나 되는 거대한 땅덩어리인데, 이런 덩어리가 움직일 정도였다고 하니 그 지변(地變)이 놀랍기만 하다. 더 놀라운 부분은 지축(地軸)의 변화이다. 과학자들은 호주 지각판과 유라시아 지각판의 충돌로 말미암아 지구 축의 기울어진 각도에도 변화가 일어났다고 한다. 지축의 변화는 지구 생태계에까지 영향을 미치는 큰 사건이다.
이번 사건을 보면서 조선 말기의 예언자 일부(一夫) 김항(金恒·1826 ~1898)이 생각난다. 그가 계룡산 국사봉 밑의 토굴에서 공부하며 저술한 책이 ‘정역(正易)’인데, 그 핵심은 지축이 바뀐다는 내용이다. 지축이 바뀔 수 있다는 암시는 일부가 자신의 스승인 연담(蓮潭) 이운규(李雲圭)로부터 전수받은 한시 한 구절에서 비롯되었다. ‘영동천심월(影動天心月)하니 권군심차진(勸君尋此眞)하소’라는 구절이다. ‘그림자가 하늘의 달을 움직이게 할 수 있으므로 그대는 이 이치를 깊이 탐구하게’라는 뜻이다. 김일부는 스승이 준 ‘영동천심월’이 과연 무슨 의미인가를 평생 동안 탐구한 끝에 내놓은 결론이 바로 지축 변화였고, 그 지축 변화로 말미암아 1년 365일이 360일로 바뀐다고 보았다.
그렇게 되면 지구상의 총체적인 변화가 뒤따른다. 그 변화 중의 하나가 일본이 물속으로 점점 침몰한다는 내용도 포함되어 있다. 지축이 바뀌면 북극의 빙하가 녹아서 일본이 가라앉고 동해안도 강릉 일대는 물속으로 들어간다고 한다. 반대로 서해안은 점점 융기되어 수천리의 바다가 육지로 변한다고 전망하였다. 70년대 후반 탄허 스님은 앞으로 일본이 물에 잠긴다는 예언을 여러 번 한 바 있다. 탄허 스님의 이러한 예언도 ‘정역’에 나오는 다음과 같은 문구를 풀어서 인용한 것이다. ‘수조남천수석북지(水潮南天水汐北地), 천일임수혜만절필동(天一壬水兮萬折必東)’. 북극과 남극의 바닷물이 모두 모여 동쪽으로 향한다는 것인데, 여기서 말하는 동쪽은 일본으로 해석한다. 이번 지진을 보면서 지축마저 변화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영구불변은 없다.
新 晝耕夜讀 [조선일보 2007-04-11 22:25]
주경야독(晝耕夜讀). 낮에는 밭을 갈고 밤에는 독서를 한다. 낮에 일하고 밤에 공부한다는 말이다. 옛날에는 이 말이 어려운 상황 속에서 공부한 사람을 일컫는 표현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다른 각도에서 이 의미를 되새겨볼 필요가 있다. 주변을 돌아보니까 40~50대 중년 부인들의 60~70%가 우울증이나 불면증에 시달리고 있음을 발견하였다. 그전에는 우울증 하면 소수의 사람들이나 걸리는 증상으로 알았지만, 이제는 우울증이 국민병 비슷한 증상으로 한국의 중년층에 만연해 있다. 남편은 밖에 나가서 바쁘고, 1~2명 되는 아이들은 이미 커서 부모 품을 떠났고, 젊음은 지나갔는지도 모르게 지나갔다. 돈도 없고 몸은 늙었다. 남은 생은 뻔하다고 느껴진다. 50대 초반에 조기 퇴직한 남자들의 상당수도 역시 우울증에 시달리고 있다.
한국의 중년들이 이 증상을 치료하기 위해서 선택하는 방법 가운데 하나가 등산이다. 땀 흘리며 자연 속을 걷다 보면 심신이 상쾌해진다. 전국의 산악회가 중년들로 성업 중이다. 그러나 등산 가지고는 부족하다. 어찌 보면 등산은 자동차의 공회전과 비슷하다. 육체노동이 등산보다 한 수 위라고 여겨진다. 노동은 몸도 움직이면서 생산이 따르기 때문이다. 육체노동은 보람과 의미를 준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우울증이 찾아오는 중년에는 ‘주경야독’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따지고 보면 인간은 수천 년 동안이나 낮에는 밭을 가는 생활을 계속해 왔다. 이 패턴이 유전자에 각인되어 있었다. 그러다가 최근 50년 동안 ‘주경’(晝耕)이 없어지게 된 것 아닌가. 낮에 흙을 만질 수 없게 되면서 유전자에 급격한 변화가 진행 중이다. 겪어보지 못한 낯선 환경으로 돌입하게 된 것이다. 인간은 손으로 흙을 만지고 냄새를 맡아야 근원으로 회귀한다는 느낌을 받는 동물이다. 이게 없어지면서 문제가 생겼다. 필자는 시간만 나면 시골에 가서 장작을 팬다. 살기 위해서 장작을 팬다. 이 우울증의 시대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나무를 하고 도끼로 장작을 쪼개는 것이다. 시골에도 갈 수 없고 도시의 아파트에 살아야만 하는 중년들은 ‘주경’을 대체할 수 있는 ‘신주경야독’을 강구해 볼 때이다.
물·바위·소나무 어우러진 삼합(三 合)의 절경
덕유산 맑은 물이 흐르는 원학계곡의 집터만큼 너른 너럭바위를 주춧돌 삼아 지은 정자로
정면 3칸, 측면 2칸짜리 누각입니다. 울창한 소나무 숲이 있어 완벽한 삼합지입니다.
우리나라에는 오래된 정자가 360여개나 있답니다. 자연을 사랑하고 자연과 벗하기를 즐겨하던 우리 선조들의 마음을 엿볼 수 있는 증거입니다.
구한말 조선을 다섯 차례나 방문한 영국 지리학회 회원 이사벨라 버드 비숍 여사는 조선 땅을 세계에서 가장 아름답다고 찬탄했습니다. 이런 천혜의 자연에서 살아온 우리 선조들은 이 땅과 자연을 살아있는 존재로 보았습니다.
그래서 큰 바위나 오래된 고목은 신앙의 대상이 되었으며 산맥과 지맥을 끊는 것을 금하였습니다. 집을 지을 때도 자연의 훼손을 최소화 하였습니다.
조선일보에 ‘조용헌 살롱’을 연재하는 조용헌 교수는 음식에 삼합(三合)이 있어 돼지고기와 홍어를 묵은 김치에 싸서 먹으면 제3의 맛이 나듯이 땅에도 삼합을 갖춘 곳이 있답니다. 바위와 물과 소나무가 갖추어진 곳으로 바위의 화기와 물의 수기를 소나무가 매개체로 연결시켜 영지(靈地)를 만든답니다.
거창군 위천면의 요수정(樂水亭)이 바로 삼합을 잘 갖춘 곳입니다. 덕유산 맑은 물이 흐르는 원학계곡의 집터만큼 너른 너럭바위를 주춧돌 삼아 지은 정자로 정면 3칸, 측면 2칸짜리 누각입니다. 울창한 소나무 숲이 있어 완벽한 삼합지입니다. 그냥 보더라도 기막힌 터로 풍치가 이만저만 아름다운 것이 아닙니다.
계자난간을 둘러 걸터앉게 하였고 마루 가운데 판자로 한 칸의 온돌방을 들였습니다. 굴뚝을 뒤쪽 축대로 낸 모양이 재미있어 보입니다. 지붕 용마루 바로 밑에 암키와와 숫키와 한 벌로 덧댄 눈썹이 있습니다. 용마루 아래에 비가 새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것인데 함양과 거창 지역에서 자주 볼 수 있습니다.
벼슬길을 마다하고 초야에 묻혀 학문을 닦은 요수 신권(1501~1573)이 지은 정자로 임진왜란 때 불탄 것을 1805년 후손들이 다시 세운 것입니다. 정자 옆 소나무가 정자를 가리고 있어 가지를 줄여서 그려 정자가 제대로 보이게 하였고 언덕에 설치한 목책도 빼고 그렸습니다. 펜화만의 장점이지요.
정자 앞을 흐르는 위천에 암구대라는 거북 모양의 바위가 있습니다.
암구대에는 요수정과 암구대, 수승대의 아름다움을 읊은 시와 이름들이 빼곡하게 조각되어 있습니다. 암구대 위에는 돌을 쌓고 심은 소나무들이 멋지게 자랐습니다.
요수정에서 내려다보는 암구대도 일품이지만 암구대에서 바라보는 강물과 바위, 요수정과 노송의 어울림은 보는 이의 넋을 빼앗기에 충분합니다. 이곳 모두를 수승대라 하여 거창 최고의 명승지로 손꼽습니다. 매년 ‘국제연극제’를 여는 곳이기도 합니다.
요수정에서 암구대로 건널 수 있게 계곡에 놓은 구연교가 특이한 모양이어서 눈을 끌었는데 태풍 매미 때 넘쳐흐른 물로 난간이 모두 쓸려나갔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난간이 없어진 구연교가 더 자연스럽게 보이는 점입니다. 다시 난간을 달아도 또 다른 홍수에 피해를 볼 거라면 난간이 없는 구연교는 어떨까요.
요수정 건너편, 신권이 제자를 가르치던 곳에 세운 구연서원이 있습니다.
서원 입구에 관수루라는 이층 누각이 있는데 눈여겨볼 것은 뒤쪽에 세운 누하주입니다. 자연목을 그대로 쓴 누하주는 많이 보았으나 이처럼 크게 휘어진 누하주는 처음입니다.
서원 마당에 큰 비석이 4개씩이나 있어서 서원다운 분위기가 없고 동재와 서재 등 갖추어야 할 건물이 없어 허전해 보입니다.
양반가의 표본 정온고택
수승대에서 택시 기본요금 거리에 동계(桐溪) 정온(鄭蘊)고택이 있습니다. 잘 보존된 양반가로 사랑채에 눈썹지붕이 있어 답사에 빠뜨릴 수 없는 곳입니다.
조선시대 양반 집에는 남편이 쓰는 사랑채와 부인이 쓰는 안채가 따로 있습니다. 남녀가 평등한 격식인데 재산관리는 부인이 했다니 예나 지금이나 남자들은 폼만 좋았지 실속은 안방에 있었던 게지요. 남편의 공간인 사랑채는 높은 기단 위에 지어서 권위를 돋보이게 하고 한 쪽에 누마루 방을 내달아서 선비의 풍류를 상징했습니다.
정온(1569~1641)고택의 사랑채는 정면 6칸, 좌측면 2칸 반에 두 줄로 방을 들였고, 오른쪽에 1칸 반 크기의 누마루 방을 내달아 지은 큰 건물입니다.
누마루 방은 전면과 좌우 삼면에 지붕 아래로 다시 처마를 덧대고 눈썹지붕을 달아 한껏 멋을 부렸습니다. 비가 들이치지 못하게 하는 기능보다는 멋을 더 중요시했을 것입니다.
누마루 방 좌우의 창은 네 짝 분합문으로 접어서 들어올리게 했고, 정면의 창은 좌우로 열게 돼 있어 창을 모두 열면 삼면이 탁 트인 공간이 됩니다.
정면과 좌측 창은 아래 위로 삼등분 하여 아래와 위에는 정자살로, 가운데는 완자살로 치장했습니다. 멋이 넘치는 사랑채입니다. 전국 사랑채 경연 대회에 나가면 일등은 떼어놓은 당상일 것입니다. 굵은 홍송으로 정성 들여 지어 나뭇결이 곱고 지붕 용마루 밑에 작은 눈썹을 달았습니다.
영창대군의 처형을 반대하여 10년간 귀양살이를 한 충신 정온 선생이 병자호란 때 인조 임금이 청나라에 항복하자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와 세운 집입니다. 선조 임금이 내린 정려문으로 충신가문임을 자랑하는데 14대 종부가 정갈하게 살림을 꾸려나가고 있습니다. 경주 최부잣집 맏딸로 까만 세단을 타고 신행을 올 때 거창 고을이 떠들썩했답니다.
손님을 가리지 않고 후하게 대접한다고 소문이 났는데 집안 전통솜씨인 육포가 별미랍니다. 취재를 왔다고 하니 방으로 불러서 육포며 다과로 대접을 하는데 펜화가는 채식가여서 멀거니 보기만 했고 동행한 집사람만 혼자서 별미를 즐겼습니다.
[조용헌 살롱] 官運과 大權 입력 : 2007.01.18 23:06
고건 씨의 갑작스런 중도하차를 보면서 관운(官運)과 대권(大權)과의 함수관계를 생각해 보게 됐다. 고건은 우리나라에서 관운이 좋은 대표적인 인물로 꼽혀 왔다. 30대에 벌써 전남도지사가 됐으니 그럴 만하다. 새파란 나이에 도백(道伯)이 되었던 고건에게 따라다니던 에피소드가 있었는데 ‘숙지황(熟地黃)’ 이야기였다. 생지황(生地黃)을 여러 번 솥단지에 찌다가 말리면 숙지황이 된다. 이 숙지황을 복용할 때 금기 사항이 무이다. 무를 숙지황과 같이 먹으면 머리가 희어진다는 속설이 있다. 고건은 일부러 흰머리를 만들기 위하여 숙지황을 먹고 무를 먹었다는 이야기가 많이 떠돌았었다. 고건은 장관, 총리, 서울시장, 그 뒤에 또 총리를 했으니, 하고 싶은 벼슬은 다 해본 셈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명리학(命理學)에서 볼 때 관(官)이라 하는 것은 자기를 통제하는 요소이다. 예를 들어 자기가 불(火)이라고 하면 불을 극(克)하는 물(水)이 관으로 작용한다. 물이 없고 불만 많으면 관이 없다. 누구의 통제도 받지 않는다. 여기서 말하는 통제는 소의 콧구멍을 꿰뚫어서 만든 ‘코뚜레’와 같은 기능을 가리킨다. 힘센 황소도 코뚜레를 잡아끌면 순순히 따라올 수밖에 없다. ‘코가 꿰였다’는 말은 바로 이 뜻이다. 관운이 있다는 것은 이 코뚜레가 있다는 뜻이고, 관운이 없다는 것은 이 코뚜레가 없다는 의미이다. 코뚜레가 있는 소는 논에서 쟁기를 끌 수도 있고, 우마차를 끌 수도 있다. 통제가 되므로 생활에 도움을 준다.
코뚜레가 없는 대표적인 소는 투우용 소이다. 투우(鬪牛)는 논밭을 갈거나 우마차를 끌지 않는다. 오직 싸움을 할 뿐이다. 수만 명의 관중이 둘러싼 투우장에서 칼을 든 투우사와 시뻘건 피를 흘리며 생명을 건 싸움을 할 뿐이다. 대권은 투우장이다. 대권에 도전한다는 것은 투우장에 들어가는 투우가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고건 씨의 대권도전은 농사짓던 농우(農牛)가 피 튀기는 투우장에 들어간 상황에 비유될 수 있다. 대권은 윗사람으로부터 낙점 받는 자리가 아니다. 쟁취하는 자리이다. 관운과 대권은 상관없다.
조용헌 살롱] 삼성삼대(三星三代 ) 입력 : 2007.01.21 22:36
삼성은 반도체를 생산하는 세계적인 기업이면서도 동시에 한국의 토속적인 이야깃거리를 많이 간직한 기업이다. 우리 기업 중에서도 삼성만큼 다양한 풍수설화(風水說話)를 지닌 기업도 드물 것이다. 삼성과 관련되는 대표적인 풍수설화가 ‘금섬복지’(金蟾伏地) 이야기다.
‘금섬복지’는 창업자인 이병철씨 선대의 묏자리에 관한 이야기이다. ‘섬’(蟾)은 두꺼비를 뜻한다. ‘금섬복지’는 풍수에서 말하는 명당자리이다. ‘금 두꺼비가 엎드려 있는 형상을 한 묏자리’에다가 이병철의 증조부 묘를 쓰면서 이 집안이 발복했다는 이야기가 풍수가에서 회자된다. 사연은 이렇다. 그 시대의 한국 사람들 대부분이 그랬던 것처럼 이병철의 조부도 명당 신봉자였다. 조부는 자기 아버지, 즉 이병철의 증조부 유골을 궤짝에다 짊어지고 전국을 돌아다녔다고 한다. 좋은 묏자리를 찾으면 그 자리에 쓰기 위해서였다. 10년을 돌아다녔지만 끝내 명당자리를 찾지 못하고 터덜터덜 집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집이란 경남 의령군 정곡면이다.
그러다가 우연히 동네 뒷산의 절에 놀러갔는데 스님을 만나서 선친 묏자리를 찾기 위해 10년을 돌아다녔다는 이야기를 하게 됐다. 그 정성에 감복한 스님이 자리를 하나 알려줬다. 그 자리가 바로 동네 뒷산에 있던 ‘금섬복지’였다. ‘십년구산(十年求山)에 가후장(家後葬)’이었던 것이다. 10년 동안 산을 보러 다녔지만 결국 자기 집 뒤에 묘를 썼다는 말이다. 이 자리에 묘를 쓰면 후손 가운데 국부(國富)가 나온다는 예언이 있었는데, 우연의 일치인지는 몰라도 이병철과 이건희가 나왔다.
풍수가에서는 이 집안이 선대에 쌓은 적선과 명당의 결합으로 이처럼 국부가 나왔다고 믿는다. 이번에 삼성의 이재용 전무가 최고고객담당임원(CCO)에 임명되었다는 보도를 접하면서, ‘부자 3대’라는 말이 생각난다. 부자뿐만 아니라 종교단체도 3대가 넘어가야 안정권에 들어간다. 3대가 문제이다. 그러자면 이재용에 따라다니는 ‘에버랜드 편법증여’라는 꼬리표를 떼는 일이 무엇보다 시급하다.
노궁혈관련 검색을 했더니 2007/02/28 10:18 [조용헌 살롱] 湧泉穴과 勞宮穴
어떤 사람이 도사(道士)인가? 다른 것 없다. 몸이 건강한 사람이 도사이다. 현재와 같이 경쟁이 극심한 생존투쟁 체제에서는 도사되기 정말 어렵다. 각종 스트레스에 부대끼다 보면 누구나 병들게 되어 있다. 몸이 아파 보면 안다. ‘신외무물’(身外無物·몸 외에는 아무것도 없다)의 이치를.
‘신외무물’을 알게 되면, 그 다음에는 ‘신내경혈’(身內經穴)의 단계로 진입한다. 우리 몸 안에는 수많은 경혈(經穴)이 있다. 경혈이란 몸 안의 기가 돌아다니는 통로와 구멍을 말한다. 병은 경혈이 막힌 것이요, 건강은 경혈이 뚫린 것이다. 옛날 뜻이 높은 선비들은 중년의 나이가 되면 경혈에 대한 공부를 반드시 하였다.
우리의 전통문화 속에서도 경혈을 중시했던 선인들의 지혜를 발견할 수 있다. 예를 들면 새신랑이 첫날밤을 치르기 전에 신랑 친구들이 신랑의 두 발을 묶어서 대들보에 매달아 놓고 방망이로 발바닥을 때리는 풍습이 그것이다. 왜 첫날밤을 치르기 전에 신랑의 발바닥을 두들겨 패는 고약한(?) 문화를 만들어 냈단 말인가.
발바닥에는 혈(穴)이 하나 있다. ‘湧泉穴’(용천혈)이 그것이다. ‘샘물이 솟는 구멍’이란 뜻이다. 그 위치는 발바닥을 가로로 삼등분해서 3분의 1이 되는 지점의 가운데에 자리잡고 있다. 용천혈을 자극하면 등 뒤의 신장(腎臟)을 자극하게 되고, 신장에 잠재되어 있는 선천지기(先天之氣)가 생식기 쪽으로 이동한다. 양기가 강화되는 것이다. 신랑의 첫날밤에 대비해서 양기를 강화시켜 주는 의례가 바로 발바닥에 있는 용천혈을 자극하는 것이었다. 그래야 양기가 샘처럼 솟을 것 아닌가.
발바닥의 용천혈 자극이 신장의 수기(水氣)를 강화시키는 것이라면, 손바닥에 있는 ‘노궁혈’(勞宮穴)을 자극하면 심포(心包)에 저장되어 있는 화기(火氣)를 조절할 수 있다. 스트레스를 많이 받으면 심포에 화기가 쌓인다. 쌓이면 병이 된다. 넷째 손가락을 굽혔을 때 맞닿는 지점이 노궁혈이다. 노궁혈을 자극하면 이 화기를 풀어주는 작용을 한다. 노궁혈을 자극하는 효과적인 방법은 두 손으로 박수치는 것이다. 박수를 많이 치면 자동적으로 노궁혈이 자극된다. 스트레스를 푸는 확실한 방법은 박수를 치면서 노래를 부르고 신을 찬양하는 일이다.
노궁혈은 수궐음 심포경에 속하는 혈 로서 이곳에 자침하거나 지압을하면 피로가 풀리며 무도인들은 이곳을 장심이라고 하며 기 수련을 정진하다 보면 이곳을 통하여 정기와 사기가 드나드는 곳인 매우중요시 여기는 혈
지압하는 방법은 간단합니다.
일단 손을 깨끗이 씻은 후
손가락을 노궁혈의 위치에 대고..
누르거나..돌려주시거나..편안한대로 하면 됩니다.
이 때 중요한 것은..의념을 가지고..
인체의 중요한 기가..노궁혈으로 들어가고..
사악한 기운..피로한 것이 나간다고 생각해주면 좋습니다.
더불어 사는 삶의 지혜, 생활풍수
삶의 질이 높아져 물질적인 것보다 정신적인 것을 선호하면서 생활풍수에 관심을 갖는 이들이 많아졌다. 생활풍수란 주어진 여건에서 최선의 결과를 얻는 데 목적이 있다.
예를 들어 방 구조가 풍수에 맞지 않는다면 집을 부수고 다시 짓는 것이 아니라 가구의
배치를 바꾸거나 방의 용도를 변경하는 것만으로도 효과를 얻을 수 있는 것이다. 잘못된 생활습관을 고치는 것도 기의 흐름을 좋게 하는 데 한몫 단단히 한다. 쉽게 실천할 수 있는 생활풍수에 대해 알아보자.
1 어린아이에게 곤지곤지, 잼잼 등의 동작을 많이 시킨다
곤지곤지는 손바닥 가운데를 자극하는 것으로 장풍이 나오는 노궁혈을 두드려 막힌
기를 일깨우는 것이다. 잼잼은 수지침에서 밝혀진 것처럼 손을 오므렸다 폈다 함으로써 각 장부를 튼튼하게 함과 동시에 손바닥을 두들겨줌으로써 정신통일을 유도하는 것.
도리도리는 목이 굳으면 머리로 연결되는 피 흐름이 원만하지 못해 건강에 안 좋으므로 목을 부드럽고 유연하게 하기 위한 것이다. 모두가 기의 흐름을 원활하게 해준다.
2 집 안에 어항을 놓는 것은 좋지 않다
어항의 물은 고인 물이다. 물고기의 각종 배설물과 세균이 집 안으로 퍼지면서 나쁜
기운을 발산하게 된다. 이럴 경우 호흡기 질환에 걸리기 쉽다. 이와 같은 이치로 앞마당
에 연못이 있는 것도 좋지 않다. 고여 있는 물은 썩기 때문에 병균이 번식하여 인체에 해를 주기 때문이다.
3 현관에 신발을 늘어놓지 않는다
예전에는 현관에 신발을 많이 늘어놓으면 도둑을 예방할 수 있고 그만큼 사교적인
것을 나타낸다는 말도 있었다. 그러나 아파트에서는 외부와 통하는 길이 바로 현관이다. 유일한 기의 통로를 막으면 좋지 않다. 신발은 되도록 신발장에 모두 넣고, 꼭 필요한 것만 가지런히 정리해두는 것이 좋다. 출입구인 현관을 깨끗하게 정리해야 기가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다.
4 현관에서 맑은 소리가 나면 좋다
현관에 종이나 풍경을 달아두면 좋다. 소리가 날 때마다 멈춰진 공기를 깨뜨려 나쁜
기운을 중화하는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풍경이나 종소리는 뇌를 맑게 하는 효과도 있다. 어두컴컴한 현관은 기의 흐름을 정체시켜 나쁜 기운을 고이게 하므로 좋지 않다.
5 거실 테이블 위에는 유리를 깔지 않는 것이 좋다
거실 테이블에 유리를 깔아놓는 집이 많은데 좋지 않다. 유리는 노력해서 살아가려는
의욕을 빼앗기 때문. 아이들이 있는 경우 자칫 위험할 수도 있다. 유리 테이블에 천을
씌워두는 것이 좋다.
6 소파는 ㄱ자나 ㄴ자로 놓는다
거실 소파는 손님이나 주인 모두 현관문 쪽으로 면해 앉도록 배열하는 것이 좋다.
소파는 마주 보는 형태보다 ㄱ자나 ㄴ자 형태로 놓고 동쪽이나 남쪽으로 향하도록
하는 것이 좋다. 마주 보는 형태로 배열하면 기가 충돌하여 잠재의식적으로 서로
경쟁을 하기 때문이다. 참고로 항상 충돌을 일삼는 남북 회담장의 책상 배열은 언제나
마주 보는 형태다.
7.거실 확장은 하지 않는 것이 좋다
많은 집들이 거실 베란다를 터서 확장을 한다. 그러나 거실을 확장하는 것은 주택의
내구력을 약화시키고 풍수상 흉한 기운을 불러일으킬 수 있어 좋지 않다. 이미 개조
했다면 벽을 허문 부분에 잎이 무성한 화초를 두어 기를 모으는 것이 좋다.
8 식탁에 약병을 놓지 마라
약 챙겨 먹는 것을 잊지 않기 위해 식탁에 약병을 늘어놓는 경우가 많은데 좋지 않다.
건강한 기운을 막고 병의 기운을 돋우기 때문이다. 또 누군가 집을 방문했을 때 식탁의
약병을 발견하면 ‘이 집에 환자가 있구나, 조심해야지’ 하는 생각을 갖게 된다. 가능하면
약병은 안 보이는 곳에 넣어두는 것이 좋다.
9 냉장고 문에 자석을 붙이지 않는다
냉장고 문에 다닥다닥 자석 장식을 붙여놓는 집이 많다. 간단한 스케줄이나 메모를 붙이
는 것은 괜찮지만, 음식을 넣는 음식창고에 많은 물건을 붙이면 금전운이 빠져나갈 수
있다. 자석을 붙여놓으면 전기세도 많이 나온다.
10 식칼을 보관할 때는 칼꽂이를 사용한다
주방의 칼은 자주 사용하는 만큼 조심해서 다뤄야 하는 물건. 주방의 칼을 내놓은 상태로
두면 금전과 관계된 고민이 끊이지 않는다. 어린이가 있는 경우 사고의 위험도 있으므로
칼은 반드시 보관함에 넣어 보관하는 것이 좋다.
11 현관에서 부엌이 바로 보이면 좋지 않다
현관에 들어서면서 부엌이 바로 보이면 무의식중에 먹고 싶은 생각이 들어 과식을 하게
된다. 이로 인해 소화기 질환에 걸릴 우려가 있으므로 이런 부엌 구조는 가리개 등으로
가리거나 육각형 모형을 달아 기의 흐름을 원활하게 해주는 것이 좋다.
12 침대는 벽면에서 30cm 이상 떨어진 곳에 배치한다
차가운 시멘트벽에서 좋지 않은 기가 나와 수면을 방해할 수 있다. 황토와 달리 시멘트
벽에 가구를 붙어 놓으면 습기와 곰팡이가 생긴다.
13 세워놓는 옷걸이는 침실에 두지 않는다
장롱 근처에 옷걸이를 두고 옷을 걸어두는 경우가 많다. 이럴 경우 바깥의 나쁜 기운이
묻어 들어와 침실에 머물게 된다. 바깥에서 입던 외출복은 베란다 등에 잠깐 걸어두어
바깥바람을 쐰 후 장롱에 넣고 문을 닫아두는 것이 좋다.
14 욕조에 물을 받아두는 것은 해롭다
고인 물은 썩게 마련이다. 썩은 물의 기운이 집 안에 퍼져 공기가 나빠지고 기의 흐름을
방해한다. 그때그때 사용할 적당한 양의 물만 받아두는 것이 좋다. 예전 선조들은 비가
올 때 물을 받아두면 그곳에 개구리를 넣어두었다고 한다. 개구리가 물속의 나쁜 물질들
을다 먹어치우기 때문이다. 자연과 더불어 살아가는 조상들의 지혜를 엿볼 수 있다.
15 욕실 문은 닫아두는 것이 좋다
대문 옆에 화장실이 있거나 현관문을 열자마자 곧바로 화장실이 보이는 것은 좋지 않다.
화장실을 보는 순간 무의식중에 불결하다는 생각이 들어 비위가 약한 사람은 소화기가
위축되는 증상이 나타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욕실 문은 기본적으로 닫아두는 것이 좋다.
욕실 문을 열었을 때 바로 변기가 보이면 나쁜 기운에 노출되기 쉽다. 변기 뚜껑을 잘 닫
아두는 것이 좋다. 변기에서 나오는 세균을 예방할 수 있는 방법이기도 하다.
16 베란다에 물건을 쌓아두지 않는다
현관 다음으로 바깥의 기운이 들어올 수 있는 곳이 베란다 창이다. 기가 들어오는 곳에
물건을 쌓아두면 기운이 들어오지 못하게 된다. 신문도 가급적 모아두지 말고 그때그때
버리는 것이 좋다. 수많은 사건 사고가 실려 있는 신문은 기의 흐름에도 좋지 않고,
신문을 인쇄한 잉크에서 나오는 독성은 몸에 해롭다.
17 책상에 앉을 때 문을 등지고 앉으면 안 된다
공부하는 학생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책상의 위치. 아이들 공부방 책상은 문과
대각선상에 위치하는 것이 좋다. 문을 등지고 앉도록 하면 문을 통해 들어오는 기가
아이에게 직접 영향을 미쳐 좋지 않다. 누군가 갑자기 방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서면
몸 전체를 급히 돌리다가 허리 디스크나 목 디스크가 올 수도 있다. 항상 뒤통수에 신경을
쓰다 보면 무슨 소리만 나도 놀라고 불안, 초조해지게 된다. 차분히 앉아 공부하지 못하고 밖으로 나도는 원인이 되는 것이다.
18 거울이나 피라미드 등의 소품을 활용한다
부득이 출입문과 마주 하여 책상을 배치할 수밖에 없는 경우, 책상 앞에 커다란 거울을
매달아두는 것이 좋다. 육각형 모형이나 피라미드를 책상 앞에 놓아주는 것은 뇌파를
안정시키는 효과가 있다.
19 상이나 식탁 모서리에 앉는 것은 좋지 않다
옛 어른들은 밥을 먹을 때 밥상 모서리에 앉으면 꾸중을 하셨다. 모서리는 양쪽 면에서
기가 모아져 아이의 명치 부분을 치기 때문에 소화기 계통의 질병에 걸릴 수 있다.
스트레스로 소화불량에 걸리기 쉬운 수험생들은 만사에 조심하는 것이 좋다.
20 머리는 가급적 동쪽이나 남쪽 방향에 가깝게 두고 자도록 한다
북쪽으로 머리를 두면 자기장이 뇌파를 끊임없이 자극하여 신경질적이거나 삐뚤어진
성격이 형성되기 쉽고 매사에 부정적으로 된다. 그러나 현재 머리를 서쪽이나 북쪽으로
두고 자는 학생이라 할지라도 생활에 별다른 탈이 없고 잠을 잘 잔다면 잠자리의 위치를
바꿀 필요는 없다. 때에 따라서는 서향이나 북향에서 좋은 기를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이
있기 때문이다. 머리는 차고 손발은 따뜻하게 하는 것도 기본이다.
21 책은 가로로 쌓아두지 않는다
책상 위나 책꽂이에 책을 가로로 쌓아두면 기의 흐름을 가로막는 장애물이 될 수 있다.
공부 잘하는 아이들은 정리정돈도 잘하는 법. 책꽂이에 세로로 정리정돈을 잘 해두면
책을 찾기도 쉽고 보기도 좋다.
22 방 입구에는 큰 가구를 놓지 않는다
방문에서부터 창으로 흐르는 기를 막지 않도록 방문 옆에는 옷장 등 커다란 가구를
놓지 않는다. 컴퓨터에서 나오는 전자파를 고려해 컴퓨터도 거실이나 다른 방으로
빼놓는 것이 좋다.
[조용헌 살롱] <91> 최후의 메시지(조선일보 2005.4.7)
인간은 죽을 때 마지막 유언을 남기기 마련이다. 보통사람들은 재산이나 자식 문제가 주요한 내용이겠지만, 일생 수도생활을 하면서 보낸 종교인들은 범부들의 유언과는 다르다. 전 세계 가톨릭의 정신적 지도자인 교황 요한 바오로 2세(1920~2005)가 선종하였다. 선종이란 ‘선생복종(善生福終)’이란 표현의 줄임말이라고 한다. ‘착하게 살다가 복되게 마친다’는 의미이다.
교황은 선종에 임박해서 다음과 같은 메시지를 남겼다고 전해진다. ‘나는 행복합니다. 그대들도 행복하시오. 울지 말고 함께 기쁘게 기도합시다.’ 몇 년 전에 선종한 마더 테레사 수녀는 ‘인생이란 낯선 여인숙에서의 하룻밤과 같다’는 말을 남기고 갔다. 불교의 서산대사는 자신의 모습을 그린 영정을 보면서 ‘80년 전에는 저것이 나이더니, 80년 뒤에는 내가 저것이구나!’라는 시를 남기고 열반에 들었다. 조선 후기에 ‘동사열전(東師列傳)’을 저술했던 범해(梵海·1820~1896) 선사는 최후에 이런 시를 남겼다
( ‘헛된 한 생각이 빚은 73년 생애, 창밖의 벌처럼 떠든 것도 부질없어라. 문득 저 언덕에 올라가면서, 아! 바다 위에 뜬 물거품임을 알았네.’ )
왜정 때 판사를 하다가 금강산으로 출가했던 효봉(曉峰·1888~1966)은 ‘내가 말한 모든 법, 그거 다 군더더기. 오늘 일을 묻는가, 달이 일천강(一千江)에 비치리’라는 임종게를 남겼다. 속가에서 이발사를 하다가 출가했던 송광사의 구산(九山·1909~1983)은 ‘온산의 단풍이 봄의 꽃보다 붉으니, 삼라만상이 큰 기틀을 온통 들어냈도다. 삶도 공하고, 죽음도 또한 공하니 부처의 해인삼매 중에 미소 지으며 가노라’는 임종게를 남겼다.
통도사 극락선원에 주석하였던 경봉(鏡峰·1892~1982)은 임종 무렵에 제자가 ‘스님 가시면 다시 뵙고 싶습니다. 어떻게 하면 뵐 수 있을까요?’ 하고 물으니, ‘야반삼경에 대문 빗장을 만져보아라!’라는 대답을 남기고 떠났다. 작년에 열반한 숭산(崇山)은 제자들에게 ‘걱정 말아라. 만고광명(萬古光明)이요, 청산유수(靑山流水)니라’는 메시지를 남겼다. 영국의 독설가 버나드 쇼는 자찬 묘비명에다 ‘우물쭈물 하다가 내 이럴 줄 알았다’고 새겨 놓았다고 한다. 나는 버나드 쇼의 묘비명이 자꾸 걸린다.
판사와 교수 [조선일보 2007-01-16 23:04]
드라마틱한 사건이 벌어졌다. 판사와 교수가 맞붙은 것이다. 전 성균관대 교수가 재판 결과에 불만을 품고 고등법원 부장판사의 배에 석궁(石弓)을 발사한 사건이 세인의 이목을 집중시키고 있다. 어떻게 해서 이런 사건이 일어날 수 있단 말인가. 이 사건을 보는 시각은 세 가지 차원으로 분류할 수 있겠다. 미시적(微視的)으로는 범죄행위이다.
다행히 판사의 생명에는 지장이 없다고 하지만 이는 살인까지 갈 수 있었던 테러행위였다. 중시적(中視的)으로는 ‘사자(士字)’ 돌림의 충돌로 볼 수 있다. 거시적(巨視的)으로는 권위의 총체적 해체이다. 판사와 교수라는 직업은 아무리 무어라고 해도 한국 사회의 마지막 권위였다. 이번 사건은 이 마지막 권위가 무너진 것이다.
판사와 교수는 한국 사회의 대표적인 ‘사자’ 돌림 직업에 해당한다. 판사가 되려면 그 어려운 사법고시에 합격해야 한다. 한국에서 사법고시에 합격하면 조선시대의 대과 급제에 해당하는 권위와 영광이 부여된다. 조선시대에 명문가에 들어가는 기준 가운데 하나가 바로 대과 급제였다. 대과가 몇 명 나왔느냐에 따라 집안의 가격(家格)이 정해졌다. 다른 전통은 단절됐지만 해방 후에도 이 전통은 사법고시로 이어졌다. 이번 사건은 그 대과 급제의 권위도 이제 끝물에 이르렀음을 보여주었다.
부장판사의 배에다 대고 활을 쏜 해직 교수도 엘리트 코스를 밟은 박사이다. 사람들은 이승만 대통령을 ‘이 대통령’이라 부르지 않고 보통 ‘이 박사’로 부른다. 이 박사 이래로 ‘박사’라는 호칭은 조선시대로부터 내려온 학식과 선비의 상징어(象徵語)였다. 더구나 가해자는 서울대 수학과를 졸업하고 미국의 미시간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다음 대학에 조교수로 임용됐었다. 한국 사회의 전형적인 엘리트 코스를 밟은 사람이다. 그런 사람도 교수직을 잃으니까 범죄자로 전락할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본격적인 상황이 전개되기 이전에 미리 징조가 나타나기 마련이다. 점괘(占卦)를 연구하는 필자 같은 사람이 보기에 이 석궁 테러사건은 ‘한국 사회의 구질서가 붕괴되고 새 질서가 만들어지는 조짐’으로 해석된다.
[조용헌 살롱]인물 낳는 법(1)
‘맹자(孟子)’에 보면 “천시불여지리(天時不如地利)요, 지리불여인화(地利不如人和)니라”라는 대목이 나온다. “천시(天時)가 지리(地利)보다는 못하고, 지리의 조건을 갖추었어도 사람이 서로 화합하는 것만 같지 못하다”는 뜻이다. 천시와 지리도 최종적으로는 인간을 위해서 존재할 수밖에 없다는 선언이기도 하다. 결국은 사람이다. 흩어진 민심을 화합시키는 것도 인물이 나와서 하는 일이다.
그렇다면 인물을 어떻게 만들 것인가. 인물은 후천적인 교육을 통해서도 만들어지지만, 한자문화권에서는 선천적인 요건에 더 비중을 둔 감이 있다. 선천적인 요건이란 첫째, 유전적인 부분이다. 요즘식으로 말하면 DNA이다. 어떤 혈통을 가진 집안에서 태어나느냐가 중요하다. 둘째, 임신이 이루어지는 입태(入胎) 장소와 어머니 뱃속에서 나오는 출태(出胎) 장소에 좋은 기운이 뭉쳐 있어야 한다. 셋째는 시간이다. 입태되는 시간과 출태하는 그 시간이 하늘의 음양오성(陰陽五星) 에너지가 조화를 이루는 시점이어야 한다. 이런 조건을 모두 갖추면 특출한 인물이 태어날 확률이 아주 높고, 2가지만 갖춰도 인물이 태어날 가능성이 높.
첫 번째의 조건을 갖추기 위해서 옛날 어른들은 혼사(婚事)를 중요시하였다. “왕대밭에 왕대 나고 쑥대밭에 쑥대 난다”는 속담은 이를 말한다. 부계(父系)의 유전자가 오기도 하지만, 모계(母系)의 유전자가 오기도 한다. ‘음중양(陰中陽) 양중음(陽中陰)’의 이치에서 본다면 아들은 모계를 많이 닮고, 딸은 부계를 많이 담는다. 며느리가 영리하면 손자도 영리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그 다음에는 모계나 부계의 조상이 어떤 사람이었는가를 살펴보아야 한다. 그 중에서도 특히 증조부나 고조부가 어떤 성격이었고, 어떤 직업에 종사했는가를 본다. 물론 증조모 고조모도 마찬가지이다. 이는 친가나 외가 쪽의 조상 모두에 해당되는 사항이다. 평균 3~4대 건너뛰어 인물이 나올 수 있다. 고산(孤山) 윤선도(尹善道·1587~1671)의 증손이 공재(恭齋) 윤두서(尹斗緖·1668~1715)이고, 공재의 외증손이 다산(茶山) 정약용(1762~1836)이다.
인물 낳는 법(2)
성공한 남자들, 예를 들면 난국을 헤쳐 나온 정치인이나 기업을 일으킨 창업주 같은 사람들을 보면 대체로 기질이 강하다. 추진력도 강하고 카리스마도 대단하다. 이런 강한 남자들을 만날 때마다 “저런 사람의 아들들도 과연 아버지처럼 강할까?”하는 의문이 든다. 필자는 십중팔구 그 아들들이 약하리라고 추측한다. 왜냐하면 강한 남자는 상대적으로 부드러운 여자를 좋아하기 마련이다. 센 여자를 좋아하지 않는다. 이런 남자들의 부인들은 확률상 감정이 섬세하고 여성적인 성격의 소유자가 대부분이다.
아들은 어머니의 기질을 닮을 가능성이 높으므로 어머니가 섬세하면 그 아들들도 섬세하고 여린 아들이 태어난다. 섬세하고 여린 아들은 그 아버지의 가업을 유지하기가 힘들다. 그래서 ‘부자가 3대를 넘기기가 힘들다’는 말이 나왔지 않나 싶다. 부계도 중요하지만 모계도 그만큼 중요하다. 조선조 선비집안에서 ‘팔고조도’(八高祖圖)를 작성해 외우게 한 이유도 따지고 보면 이런 혈통조사(?)와 무관하지 않다고 본다.
인물을 낳으려면 합궁(合宮)도 준비가 필요하다. 부정모혈(父精母血)이 뭉쳐야 임신이 된다. 이때 아버지의 정액과 어머니의 피가 맑고 건강해야 한다. 맑고 건강해야만 좋은 영혼이 탁태(托胎)된다. 정혈(精血)이 맑으면 거기에 비례해서 맑고 수준 높은 영혼이 탁태가 되고, 탁하면 탁한 영혼이 탁태된다. 관건은 정혈을 건강하게 만들고 맑히는 작업이다.
이를 위해서는 신랑신부가 합궁을 하기 전에 최소한 100일 정도는 준비를 해야 한다. 술과 담배를 금하고 정갈한 음식을 섭취하고 화를 내거나 놀라는 일이 없이 담담한 마음을 갖도록 노력해야 한다. 술, 담배를 많이 하고 감정의 기복이 심한 남자의 정액은 색깔이 누리끼리하게 탁하다. 막걸리 색깔처럼 틉틉하다. 반대로 담백한 생활을 한 사람은 물처럼 맑다. 정액 색깔을 보면 심신의 건강을 비롯해 생활상태가 그대로 나타난다. 여자도 마찬가지이다. 좋은 아이를 가지려면 적어도 100일 정도는 부부가 기도하는 마음으로 일상생활을 해야 한다. 100일간 방을 따로 쓰며 금욕생활을 해야 하는 것은 당연하다.
인물 낳는 법(3)
신랑 신부가 합궁(合宮)하기 전에는 음식도 주의해야 한다. 오염되지 않은 물과 음식을 섭취하면 좋다. 특히 술은 금기이다. 조선시대 사대부 집안에서는 합궁 이전의 음주를 금기시했다. 몇 년 전에 울산김씨(蔚山金氏) 문중의 유서 깊은 집안 어른을 만났을 때 합궁 비결을 질문하였던 적이 있었는데, “우리 집안에서는 ‘신혼여행 가서 술 먹지 않는다’가 가훈입니다”라는 답변이 인상적이었다. “술을 먹으면 알딸딸한 자식이 나온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알딸딸한 자식이 나오면 집안 망하는 지름길이다.
합궁하기 전에는 어느 정도의 금욕기간이 필요하다. 보통 100일이다. 100일 정도는 금욕생활을 한 뒤 합궁을 해야만 기가 응축된 자손이 태어난다. 인생을 살면서 건곤일척(乾坤一擲)의 승부를 걸어야만 하는 상황에 직면해서는 그 사람의 타고난 기가 어느 정도인가에 따라 결과가 좌우된다. 합궁 간격이 짧으면 비례해서 기가 약한 자손이 태어난다.
이와 관련하여 전해지는 이야기가 조선조 창업을 도왔던 무학대사(無學大師) 탄생 설화이다. 무학대사 어머니가 11~12세 무렵의 소녀시절에 지나가던 도사로부터 “나중에 크면 귀한 자식을 낳을 관상이니 기운을 함축해야 한다”는 예언을 들었다. 이 말을 듣고 난 후부터 무학대사 어머니는 말을 하지 않았다. 묵언에 들어간 것이다. 묵언을 한 지 9년 후에 동네 우물가에서 물을 긷다가 어떤 남자를 만났다. 이 남자는 산에 들어가서 9년간 도를 닦은 뒤 하산하던 길이었다. 갈증이 난 이 남자는 물을 긷던 처녀에게 “물 한 바가지 달라”고 했다. 이 처녀가 그 남자를 보는 순간 자기도 모르게 말문이 터지면서 물을 건네줬고 결국 임신을 하게 됐다. 여기에서 낳은 아들이 바로 무학대사라고 전해진다. 어머니는 9년 묵언을 하였고, 아버지는 9년 입산수도를 한 후에 낳은 아들이었던 것이다.
옛날에는 대가족 제도였고 사대부 집안은 안채와 사랑채가 분리되어 있어서 100일 정도의 합궁 간격을 둘 수 있었다. 요즘은 핵가족 아파트이므로 합궁간격이 급속하게 짧아지는 추세이다. 그렇기는 하지만 49일이라도 지키면 어떨지….
인물 낳는 법(4)
동양고전과 방중술(房中術)에 식견이 높았던 소설가 이병주는 ‘바람과 구름과 비(碑)’에서 인물 낳는 방법을 묘사한 바 있다. 여기서 주인공인 최천중은 천하대권을 잡을 자식 하나 낳기 위해서 여자를 고를 때도 신중을 기한다. 복과 지혜가 있는 여자를 고른 다음에, 합궁하는 날짜도 택일(擇日)을 한다. 그러나 소설에서는 이 택일법에 대해서 자세한 설명이 나와 있지 않다. 너무 전문분야였기 때문에 소설가 본인도 확실하게 몰랐을 가능성이 있고, 알았더라도 복잡해서 설명을 생략했을 것이다.
조선시대 사대부 집안들은 좋은 자식을 얻기 위해서 신랑 신부의 합궁날짜를 계산했다. 어떤 날짜, 어떤 시간대에 해야 좋은가는 은밀하게 전해지는 은비학(隱秘學)이었다. 외부에 쉽게 노출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택일하는 계산과정도 상당히 복잡했다. 필자는 이 비법을 배우려고 보따리에 수업료를 넣고 전국 각처의 고수들을 찾아다닌 적이 있는데 문파마다 그 방식이 약간씩 달랐다.
공통적인 것은 음양오행의 원리이다. 먼저 신랑과 신부의 생년월일시를 파악한 뒤 만세력(萬歲曆)을 보고 이를 육십갑자(六十甲子)로 환산한다. 육십갑자로 그 사람의 생년월일시를 들여다보면, 그 사람이 어머니 뱃속에서 나와 탯줄을 자르는 순간에 우주의 음양오행 기운이 어떤 비율로 들어왔는가를 어렴풋하게 짐작할 수 있다. 우주의 기운은 별자리의 기운을 뜻하고, 이 별자리 기운은 탯줄을 자르는 순간에 들어온다. 마찬가지로 어머니 뱃속에서 수태가 되는 시점도 중요하다. 제왕절개를 하려고 계산하는 날짜와 시간이 출태(出胎) 시점을 결정하는 것이라면, 합궁날짜를 계산하는 것은 입태(入胎) 시점을 결정하는 것이다.
신랑 신부가 태어난 시점의 육십갑자를 보고 음이 부족한가, 양이 부족한가를 살핀다. 두 사람 모두 음이 부족하면 양월(陽月), 양일(陽日), 양시(陽時)로 합궁시점을 잡는다. 양이 부족하면 음월, 음일, 음시를 잡는 식이다. 1년 중에 양월은 자(子),인(寅),진(辰),오(午),신(申),술(戌)월이다. 음월은 축(丑),묘(卯),사(巳),미(未), 유(酉),해(亥)월이다. 날짜와 시간도 마찬가지다./(07/1/12)
[조용헌 살롱]오선위기혈(五仙圍碁穴)과 폴 케네디<21> 2004.10.20 18:51 31'
1894년. 갑오동학농민혁명이 실패로 돌아간 뒤에 그 후유증은 컸다. 명분은 좋았지만 이루어진 것은 별로 없고, 수많은 민초들의 아까운 생명만 희생되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동학 실패 후 좌절감에 빠진 전라도 민심을 추스른 인물이 강증산(姜甑山:1871~1909)이라고 볼 수 있다. 그는 여러 가지 희망적인 예언을 통해서 민초들에게 비전을 제시하였는데, 그 예언 가운데 하나가 전북 순창 회문산(回文山)에 있다고 전해지는 전설적인 명당 ‘오선위기혈’에 대한 것이다.
‘다섯 신선이 둘러앉아 바둑을 두고 있는 형국’인 오선위기혈은 조선 후기 호남의 풍수가들 사이에서 가장 많이 회자되던 명당자리였다. 풍수 매니아들은 이 전설적인 명당을 찾으려고 회문산 일대를 수없이 답사하곤 하였다. 이러한 분위기에서 강증산은 오선위기의 의미를 당시 조선을 둘러싼 4대 강국으로 풀이하였다. 다섯 신선 중에 한 신선은 주인이라 가만히 있고, 나머지 네 신선이 바둑에서 이기기 위하여 골몰하고 있는 형국으로 해석하였던 것이다. 풍수에 빗대서 당시 한반도 주변의 국제정세를 설명한 셈이다. 여기서 네 신선이란 미국, 러시아, 중국, 일본을 가리키고, 바둑판은 조선 땅이요, 바둑돌은 조선백성들에 해당한다.
‘오선위기혈’은 범부가 보기에는 묏자리의 명칭에 지나지 않았지만, 국운의 흥성을 소망하였던 예언자의 안목에서 보면 한반도를 집어삼키려는 주변 강대국의 모습으로 비쳤던 것이다. 이 상황을 바둑판에 비유한 것도 의미가 깊다. 인간의 놀이 가운데 가장 지적인 놀이인 바둑은 수읽기가 중요하다. 수읽기에서 밀리지 않으려면 냉철해야 한다. 더구나 주변 4강은 오랫동안 큰 바둑을 두어본 수읽기의 고수들이지 않던가!
얼마 전에 한국을 방문한 폴 케네디 교수는 ‘강대국의 흥망’이란 저서로 유명하다. 강대국의 흥망성쇠를 전공한 그는 제국의 심리, 우리 식으로 표현하자면 제국들이 놓는 바둑을 연구한 사람이다. 그가 “한국은 네 마리의 코끼리 사이에 낀 작은 동물이므로, 한 마리의 코끼리를 위한 정책을 펴면 다른 코끼리가 화를 낸다”는 의미심장한 충고를 던졌다. 바둑 잘 두는 이창호에게 이 코끼리들을 다루는 묘수(?)가 혹시 있는지 물어보고 싶다.
[조용헌 살롱] 의기(義妓) [조선일보 2007-02-07 03:22]
‘기(妓)’자의 어원을 추적해 보면 계집 녀(女)와 초목의 가지 지(支)가 합해서 이루어진 글자이다. ‘풀이나 나뭇가지를 들고 교태를 부리는 여자’가 원래 뜻인 셈이다. 하지만 이 기생이라는 단어가 주는 어감이 좋지 않다고 느꼈는지 이능화(李能和·1869~1943)는 기생 대신에 ‘해어화(解語花)’라는 표현을 썼다. ‘말을 알아듣는 꽃’이라는 의미이다. 대단히 격조 있는 작명이다.
이능화는 우리나라 최초로 기생들의 역사를 정리한 ‘조선해어화사(朝鮮解語花史)’라는 책도 냈다. 근래에 기생에 대해 가장 잘 정리한 이는 작가 정비석(鄭飛石·1911~1991)이다. 그는 조선일보에 1976년부터 4년간 ‘명기열전(名妓列傳)’을 실었고, 이 연재내용을 다듬어 ‘미인별곡’(美人別曲·전 6권)이란 책을 펴냈다.
우리 기생 가운데 인상 깊은 인물을 꼽아 본다면 ‘시기(詩妓)’와 ‘의기(義妓)’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시기는 시(詩)를 잘 지었던 기생을 가리킨다. 서화담과의 일화를 남긴 개성의 황진이(黃眞伊)와 허균과 애절한 사랑을 나눈 부안의 매창(梅窓)이 여기에 해당한다. 황진이와 매창은 조선 여인의 지성과 예술혼을 상징하기도 한다. 의기는 의로운 일을 하고 간 기생이다. 진주성에서 왜장 게야무라를 껴안고 남강에 투신한 논개(論介)와 평양성에서 김경서(金景瑞·1564~1624) 장군과 협력해 왜장의 목을 벤 계월향(桂月香)을 꼽을 수 있다. 논개와 계월향은 조선 여인의 충절(忠節)을 상징한다.
이 4명 가운데 대중에게 가장 알려지지 않았던 인물이 바로 계월향이다. 시기로는 ‘남 매창, 북 황진이’요, 의기로는 ‘남 논개, 북 계월향’인데, 유독 계월향만 잊혀진 감이 있다. 엊그제 계월향의 초상화가 발견됐다는 보도가 있었다. 조선시대에 초상화는 아무나 그릴 수 없었다. 나라의 충신이나 퇴계나 율곡처럼 덕망이 높은 학자, 공적이 있는 대감들이나 초상화를 남길 수 있었던 것이다. 천민에 속했던 기생의 초상화가 남아 있다는 것은 대단한 일이다. 사대부들이 계월향의 충절을 그만큼 높이 평가했다는 증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