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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보내드린 김종필 전 총리의 한일수교 40주년 기념 강연회 연설에 대해 일본 나카소네 총리의 연설 내용입니다.
※이 글은 JP의 요미우리신문 강연 후 나카소네 前 일본총리가 韓日관계에 대해 이야기한 것을 정리한 것이다.
「東아시아 공동체」의 비전(韓日수교 40주년 기념 강연회 중계)
『盧武鉉 대통령에게 태평양 국가로서 함께 나아가자고 권했더니, 중심국가로서 대륙국가를 더 중시하겠다고 했다』
“일본은 왼손으로는 한국과, 오른손으로는 미국과 손잡고 태평양을 달려야 한다. 일본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나라는 한국이다.” <나카소네 야스히로(中曾根康弘) 前 일본 총리>
『40년간 묻어 두었던 이야기』
지금 金鍾泌 선생의 이야기를 듣고 대단히 감동했습니다. 저는 金선생과는 40년에 걸친 友情을 이어오고 있습니다만 오늘 하신 이야기는 저로서도 처음 듣는 솔직한 말씀이었습니다. 40년 동안 日韓 친선을 위하여 활동해 오신 한국의 훌륭한 지도자께서 그동안 가슴에 담아 놓았던 이야기를 오늘의 일본인들을 향하여 작심하고 토로하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로서는 아픈 이야기도 있었습니다만, 金선생께서 善意를 가지고 하신 말씀을 진지하게 경청하였으며 저로 하여금 생각케 하는 바가 많았습니다.
韓日수교는 그렇게 간단히 이뤄진 것이 아닙니다. 이케다 총리 시절에 金鍾泌 선생과 오히라 외상은 오랫동안, 그리고 격렬하게 교섭을 하였습니다. 저녁까지 방을 나오지 않으면서 두 분은 담판을 했고 「金-오히라 메모」의 형식으로 만들었습니다.
내각이 이것을 정식으로 논의하기 전에 하지 않으면 안 될 일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당시 자민당의 2大 실력자였던 오노 반보쿠 선생과 고노 이치로 선생의 양해를 얻는 일이었습니다. 그때 지금 요미우리 신문의 와타나베 사장이 정치부 기자였는데, 오노 선생과 친했습니다. 오노 선생의 측근 넘버원이었습니다. 물론 저의 오랜 친우이기도 합니다. 각료들을 추천할 때도 오노 선생은 와타나베를 불러 『누가 좋겠는가』 하고 묻고 추천을 받아 그대로 이름을 올리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장관이 되고 싶은 사람들은 와타나베 기자를 찾아가서 운동을 하기도 했습니다.
오노氏는 大人이었습니다. 작은 문제에 대해서는 신경을 쓰지 않았지만, 큰 문제에 대해서는 대단히 직관력이 있는 분이었습니다. 이런 분이 「金-오히라 메모」에 반대하면 韓日수교 회담은 난관에 부딪치게 되어 있었습니다.
『韓日 양국 사이에 끼여 고생했던 JP』
선배들이 와타나베 기자에게 부탁하여 오노 선생을 설득하도록 했지만 잘 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와타나베 기자가 한국에 가서 金鍾泌 정보부장을 만났습니다. 金鍾泌 정보부장은, 그렇다면 직접 오노 선생을 만나서 설득하기로 하고 와타나베 기자와 金선생이 하코네에 있던 오노 선생을 찾아가서 아침에 만났습니다.
오노 선생에게 金鍾泌 부장은 아주 짧게 이야기했는데도 오노 선생은 즉시 『협력하겠다』고 말했다고 합니다. 오노 선생은 직관력이 강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金鍾泌 선생의 얼굴과 襟度(금도)를 읽고서 금방 「이런 사람이면 신용할 수 있다」고 생각하여 그런 결정을 내린 것입니다. 이번에는 와타나베氏와 金鍾泌 부장이 오노 반보쿠 선생을 한국으로 모시고 가서 한국의 요인들을 만나게 하여 「金-오히라 메모」의 합의를 확정지었던 것입니다.
저는 그때 고노 이치로 선생의 측근이었습니다. 고노 선생도 결국은 「金-오히라 메모」를 지지하게 되어 40년 전의 韓日수교가 이뤄질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런 과정에서 金鍾泌 선생은 한국과 일본 사이에 끼여서 대단히 고생하고 고민했습니다. 특히 당시는 혁명정권이었기 때문에 더욱 그러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朴正熙 정부는 일본으로부터의 경제협력을 통해서 오늘 우리가 보는 것과 같은 한국 경제의 대발전의 기초를 만들었습니다. 그후 여러 가지 우여곡절이 있었습니다. 최근 한국에서는 당시의 노력에 대해서 親日분자라고 하여 규탄하는 풍조가 있다고 합니다만, 역사적이고 사실적이고 냉정한 눈을 가지고 판단하지 않으면 잘못을 범할 수 있습니다.
한국에서는 일본에 대해서 여러 가지 생각이 있습니다. 일본과 친한 金鍾泌씨도 그동안은 이야기하지 않았지만 오늘 말씀했듯이 일본에 대해서는 아주 비판적인 생각을 갖고 있습니다. 이러한 兩國 사이 여러 가지 일들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저, 金鍾泌, 와타나베氏의 우정은 恩讐(은수)를 넘어서 계속되고 있습니다. 국경을 넘어서 인간과 인간 사이에서 계속되는 이런 恩讐를 넘는 우정은 결국 나라를 위해서도 중요한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일본과 중국 사이에는 이런 우정이 끊어져 버렸습니다. 옛날엔 있었습니다만. 日中 사이에 이런 우정의 架橋(가교)를 어떻게 하면 복구하느냐 하는 것이 중요한 과제가 되고 있습니다.
저는 총리가 되기 1년 전쯤부터 생각했습니다. 총리가 되면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 일본에 가장 중요한 나라는 한국이다, 그렇다면 한국을 최초로 공식방문하는 총리가 되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당시 日韓 관계는 소노다 외무대신의 언동 때문에 최악의 상태였습니다.
그런데 한국 사람들은 일본에 오면 일본어로 말하는데 나도 한국에 가서는 한국어를 써야겠다, 그래서 한국어 공부를 시작했습니다. 「공식 연설을 할 때도 한국어로 해야겠다. 왜냐하면 한국의 요인들은 일본에 와서 일본어로 이야기하는데, 내가 한국어로 이야기하지 못한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 이렇게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때 마침 일본경제신문 기자가 한국 특파원 자리에서 돌아와 있었기 때문에 때때로 그분한테서 한국어를 배웠고, NHK의 한국어 강좌를 통해서도 배웠습니다. 한국어는 외우기 쉽습니다. 발음은 어려워요. 이 부분을 많이 연습했습니다.
그리고 한국을 방문하여(1983년) 만찬을 할 때의 연설문 원고를 만들었습니다. 처음 3분의 1과 마지막 3분의 1은 한국어로 하기로 했습니다. 저는 全斗煥 대통령이 초대한 만찬회 석상에서 먼저 한국어로 『대통령 각하』 하고 연설을 시작했습니다.
그러니 좌석에서 감탄하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연설을 하면서 보니까 한국의 장관 부인이 손수건으로 눈물을 닦는 모습도 보였습니다. 저의 誠意가 전달되는 것 같아 정말 고마웠습니다. 全斗煥 대통령도 매우 기뻐했습니다.
우리 두 사람이 만찬 이후 청와대의 일각에서 술자리를 벌였는데 미인 기생도 불러 놓고 가라오케를 했습니다. 제가 「노란 샤쓰 입은 사나이」를 불렀습니다. 지금 여기서도 부를 수 있어요(웃음). 全斗煥 대통령도 일본 노래를 불렀습니다. 이런 일은 양국의 대통령과 총리 사이엔 일찍이 없었던 일입니다.
큰일에는 역사적 판단이 가장 중요
저는 일본 외교의 기본전략은 왼손으로는 한국, 오른손으로는 미국을 잡고 태평양을 달리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1983년 1월11일 서울을 방문한 뒤 저는 1월18일 미국에 가서 레이건 대통령을 만났습니다. 레이건 대통령은 제가 한국에 가서 관계를 정상화시켰다고 하니까 정말로 좋아했습니다. 당시는 소련을 상대할 때였기 때문에 한국과 일본이 사이좋게 지낸다는 것은 미국으로서도 매우 중요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레이건으로부터 특별대우를 받기도 했습니다.
외교전략이란 것은 2, 3년에서 10년까지의 전망을 가지고 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이라크 전쟁이 일어났을 때 고이즈미 총리는 미국을 지지했고, 저도 고이즈미 총리를 격려했습니다.
이러한 큰일을 당했을 때는 세 가지 점을 기준으로 하여 판단해야 한다는 소신을 갖고 있습니다.
먼저 국제법입니다. 이것은 그러나 한 30%의 중요성밖에 갖지 못합니다.
두 번째는 역사적 영향입니다. 단순히 인상적인 판단을 할 것이 아니라 이라크 전쟁이 中東지역에 어떤 역사적 영향을 끼칠 것인지를 놓고 판단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봅니다. 이것이 가장 중요한 포인트일 것입니다.
세 번째는 국가이익입니다. 미국이 이라크 전쟁에서 실패하면 북한에 대한 압력이 약해지기 때문에 일본으로서는 곤란하게 된다. 그러니 미국을 도와서 성공시키도록 해야 된다. 대강 이런 관점에서 고이즈미 총리를 지지했던 것입니다.
저는 이라크 전쟁의 승부는 아직 결정되지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이라크에서 선거가 있었고, 내각이 성립되었습니다. 이 내각이 헌법을 만들어 다시 국회의원 선거를 하고 정통성 있는 정부를 출범시킨다. 이 일을 올해 안에 해치운다는 스케줄을 갖고 나가고 있습니다만, 테러는 계속되고 있습니다. 문제는 이라크 주민들이 정부를 진심으로 지지할 것인가입니다. 이라크 국민들이 지지하는 정부가 들어선다면 이 전쟁은 이긴 것이 됩니다.
이런 큰 국제사건을 다루는 데 있어서 국제법만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학자의 얕은 판단일 것이고, 정치인은 살아 있는 세계의 정치와 역사를 놓고 판단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盧대통령에게 태평양 국가론을 이야기했으나 그는 중심국가論을 말했다』
지금의 盧武鉉 정권이 출범할 때, 전에도 그랬습니다만, 저는 취임식에 참석한 다음날 아침 盧대통령과 만나서 한 시간 정도 이야기를 했습니다. 이때 제가 한 말은 이렇습니다.
『대통령께서는 어제 취임 연설에서 중심국가론을 언급하지 않았습니까. 「한국은 東北亞의 중심에 있다. 남쪽은 日本, 북쪽은 北韓·러시아, 서쪽은 中國. 그래서 중심국가로서의 외교를 펼치겠다」고 하셨습니다. 저는 역대 한국 대통령의 취임식에 참석한 뒤 대통령을 만나면 꼭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한국과 일본은 태평양 국가로서 살아갑시다. 태평양 국가라는 의미는 미국·일본·한국이 태평양을 시야에 넣고 긴밀히 협조해 가면서, 또 아세안 국가들을 바라보면서 국가의 진로를 설정하자는 것입니다」』
저의 이 말에 대해서 盧대통령은 『나는 그 생각에 동의하지 않는다. 한국은 중심국가이다. 따라서 북한·중국·러시아를 지금보다 중시하겠다』라고 말했습니다. 그 뒤 보면 盧정권이 대체로 그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저는 이웃나라의 외교정책을 비판할 입장은 아니지만, 일본으로서 무관심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저는 韓美동맹과 日美 안보조약이 태평양 지역 외교의 알맹이라고 생각합니다. 한국이 같은 민족인 북한과 친해지고, 중국과도 친하게 지낼 수는 있지만 基軸은 역시 어디에 있는가를 볼 것 같으면 역시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에 대한 국가적 확신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盧정권도) 그런 것을 생각해 두고 자유롭게 외교를 하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만, 최근 여러 정세를 보면, 일본 총리와 한국의 대통령이 만나서 진지하게 이야기하여 통치의 기본이 되는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의 가치에 대해서 합의를 해두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미국과 중국 사이 전쟁은 없다
東아시아의 정세를 이야기할 때는 日中관계를 日韓관계와 연관시켜서 볼 필요가 있습니다. 저는 되풀이 이야기합니다만 태평양전쟁이란 것은 일본이 일러전쟁에서 이긴 다음에 오만해져서 제국주의의 길로 접어들었다고 봅니다.
특히 1915년에는 일본이 중국에 대하여 「21개條」 요구를 하는데, 이는 제국주의적인 내용이었습니다. 이것이 중국의 민중을 격동시켰고, 오늘의 反日운동의 원점이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미국과 영국은 일러전쟁 때는 일본을 도와주었습니다. 미국은 그러나 일러전쟁 이후 일본의 해군이 강대해지는 것을 보고는 언젠가는 태평양에서 대결하는 날이 오지 않을까 하고 경계하기 시작했는데, 중국에 대한 일본의 「21개條」 요구를 보고 일본의 야심을 알게 되었습니다. (1921년 군비축소를 위한) 워싱턴 회의에서 일본과 영국의 동맹관계도 해체되고, 미국은 중국의 옹호에 나섰습니다. 미국은 다른 나라보다도 늦은 점이 있었습니다만, 중국에 대해서는 다른 나라처럼 영토적 야심이 없었고 중국을 옹호하게 된 것입니다.
일본은 日英동맹을 폐지한 데 이어 국제연맹에서도 탈퇴하였고, 국제적으로 고립되어 히틀러와 손을 잡지 않을 수 없게 되었던 것입니다. 1930년대의 일본 정치는 표류하였습니다. 이렇게 보면 태평양 전쟁은 일본이 중국을 침략하고, 미국이 중국을 옹호한 데서 생긴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일본·미국·중국 사이의 어떤 숙명적인 관계를 느끼게 합니다. 그런데 태평양전쟁이 끝나니 무대가 바뀝니다.
이번엔 日英동맹 대신에 日美동맹이 생기고 미국과 중국이 대립하게 됩니다. 이것이 어떤 경로를 걸어갈 것인가 하는 것은 東아시아의 미래를 전망하는 데 굉장히 중요합니다.
결론부터 먼저 말씀드린다면 미국과 중국이 전쟁을 하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大國 간의 전쟁은 일어날 수 없습니다. 총력전의 시대이니까요. 일러전쟁은 부분전쟁으로서 군인들끼리 싸웠지만 제2차 세계대전과 같은 전쟁은 민간인도 군인과 같이 싸우고 피해를 입어야 하는 총력전이므로 이런 희생을 각오해야 하는 전쟁을 국민들 앞에서 국가가 결심하기란 불가능하게 되었습니다.
대만 문제가 있습니다만 미국과 중국은 상당히 자제하고 있습니다. 중국도 평화적인 통일을 생각하고 있을 것입니다. 중국은 大洋해군을 건설하고 있습니다. 중국은 지금 富國强兵의 길을 걷고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중국은 明治維新 이후의 일본과 비슷합니다. 중국은 또 자원 확보에 아주 적극적입니다. 특히 석유자원입니다. 그래서 중국은 중앙아시아나 브라질 등 석유 등의 자원이 있는 곳에 손을 뻗치고 있습니다.
중국이 미얀마와 파키스탄에 軍港을 마련하려고 하는 것도 中東에서 오는 석유를 보호하려면 일본처럼 大洋해군을 갖고 있어야 하는데, 이것이 아직 약하니까 그러는 것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미국으로서도 이것을 지켜보고 있을 것입니다. 미국은 냉전시대에 러시아를 主敵으로 삼아 군대를 배치했는데 지금은 그런 목표가 없어졌다. 그러면 어떻게 할 것인가. 유럽은 전쟁의 위험성이 낮다. 그런데 유라시아 대륙의 부드러운 복부에 해당하는 남쪽, 즉 일본-말래카 해협-인도양-걸프에 이르는 지역을 주목하게 되었다고 봅니다.
미국은 이런 변화에 맞추어 군대를 大개혁하고 있습니다. 군대의 배치도 대대·연대 규모의 소부대를 곳곳에 주둔시키고 항공모함과 미사일로 뒷받침하는 방향, 즉 기동력을 높이는 방법으로 가고 있습니다. 중국에선 이것을 중국 포위라고 생각할지 모릅니다. 저는 미국과 중국이 결정적인 사건에 있어서는 대결하지 않고 서로 양보할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는 사이에 (중국의 경우) 국내의 민주화라든지 정치의 행태가 바뀔 것입니다. 미국에서도 공화당 정권이 영원히 계속되는 것이 아니고, 민주당 정부가 들어서면 또 발상이 바뀔 것이고 먼로주의(고립주의)로 돌아갈 수도 있을 것입니다. 상황이 이처럼 유동적이니까 우리도 탄력적인 생각을 가지고 대응하지 않으면 실수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냉전 붕괴 이후 내셔널리즘 강화
마지막으로 「東아시아 공동체」 발상에 대해서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당위론적으로는 공동체가 필요하지만 현실적으로는 매우 어려울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유럽의 경우 EC(유럽공동체)에서 EU(유럽 연합)로 전환하는 데 50년이 걸렸습니다. 최근의 프랑스 국민투표에 의해서 EU 헌법안이 부결되어 EU가 대통령이나 외무장관을 갖는 것은 당분간 불가능해졌지만 엄청난 변화였습니다.
1991년 소련 붕괴 이후 유럽에서는 내셔널리즘이 부활하게 되었습니다. 그때까지는 소련이나 미국 진영에 속하면 온실 속에서 보호를 받듯이 안주할 수 있었는데 그런 진영체제가 무너졌으니 자주방어력을 갖지 않으면 안 된다는 인식이 강해졌습니다.
아울러 민족의 정체성을 강조하는 흐름이 생겼고, 이런 흐름 속에서 러시아의 푸틴 대통령의 경우는 피터 大帝를 모델로 하고, 중국에서는 일본을 표적으로 삼아 민족주의 기운을 高揚시키려고 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미국도 마찬가지입니다. 냉전을 통해서 소련을 붕괴시켰다고 좋아했는데 9·11 테러를 당한 이후에는 미국의 안전을 지키기 위해서도 미국식 사고방식과 시스템을 세계로 확산시키는 것이 미국의 사명이란 식으로 나아가고 있습니다. 차가운 전쟁이 끝나니 뜨거운 내셔널리즘의 바람이 불고 있는 것입니다.
일본도 그런 흐름 속에 있습니다. 냉전 종식 이후 연립내각이 들어서서 1년 남짓씩밖에 지속되지 못하면서 10년간 불경기가 계속되니 국민들도 변화를 요구했습니다. 국민 여러분들도 과거의 질서를 무너뜨려야 되겠다고 생각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런 흐름을 感知한 고이즈미 총리가 자민당의 舊질서를 파괴하겠다고 약속하면서 80%의 지지를 받으면서 출범했으니 그는 시대의 흐름을 읽는 힘과 눈을 가진 정치인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는 「대통령적 총리」라고 비판을 받기도 했지만 포퓰리즘적 정치를 하는 사람이니까 「국민들의 지지가 있을 때는 밀어붙인다. 야당이 반발하면 더 좋다. 인기가 더 오른다」는 식의 정치를 하고 있습니다. 저도 총리 시절에 「대통령적 총리」란 비판을 받았고 前 총리로부터 이지메를 당했습니다. 이지메를 당할수록 지지율이 더 올랐습니다. 고이즈미는 이런 것을 겨냥하는 면이 있습니다(웃음).
이런 흐름 속에서 東아시아 공동체를 만들자고 하는 것은 무리라고 생각합니다. 공통의 종교적 기반도 약하고 나라와 나라 사이의 거리도 떨어져 있습니다. 다만 진행 중인 FTA(자유무역협정)가 하나의 네트워크를 형성할 때 이를 기반으로 하는 공동경제협력기구를 만들 수는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 다음에 정치적 공동체를 만드는 방향으로 갈 수 있을 것입니다. EC도 제대로 기능하는 데는 50년이 걸렸습니다. 프랑스의 슈만이나 벨기에의 스팍스, 그리고 서독의 아데나워 같은 선각자들이 석탄·철강동맹을 먼저 만들고 정치적 공동체로 나아가는 데 50년이 걸렸습니다.
또 하나 문제가 있습니다. 「텐 플러스 스리」, 즉 동남아시아 국가에 日·韓·中 세 나라만 합치면 되는 것인가, 미국은 어떻게 할 것인가 하는 문제가 있습니다. 미국의 방대한 자본과 시장을 생각할 때 東아시아 경제공동체 안에 포함시켜야 한다고 봅니다. 뉴질란드나 호주, 그리고 인도는 어떻게 할 것인가. 이런 나라들도 포함시키되 「텐 플러스 스리」를 일종의 「이너 서클」로 보면 어떻겠나 하는 아이디어를 갖고 있습니다. 시간이 다 되어서 저의 이야기를 끝내면서 다시 한 번 金鍾泌 선생의 솔직한 말씀에 敬意(경의)를 표합니다.
『총리의 야스쿠니 신사 참배는 중단해야』
나카소네 前 총리는 이어서 오고간 질의응답 시간에 「야스쿠니 신사 참배 문제」에 대해서 흥미로운 견해를 밝혔다.
『저는 전부터 주장해 온 것입니다만 戰犯 14인의 위패를 다른 곳으로 옮기는 分祀를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이 현실적인 해결책일 것입니다. 총리의 참배는 그만두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개인적 신념이나 영웅심도 중요하지만 총리로서는 국가이익에 도움이 되는지를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참배를 그만두는 것은 후퇴도 아니고 패배도 아니며, 더욱 용기 있는 결단일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