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먹구름이 뒤덮인 ‘호반의 도시’ 춘천,
바람 한 점 없는 후덥지근한 날씨다.
하루하루를 불안에 떨며 초조하게 지내던
내 마음은 날씨가 흐려져 더 침울해 진다.
오늘은 어머니가 가족 ‘울타리’를 벗어나
연화마을요양원에 입소하는 날이다.
나는 며칠 전부터 ‘어머니가 그곳에 가서 적응하며 생활 할 수 있을까.
자식으로서 부모를 그곳에 보내는 것이 올바른 행동 인가. 등’
온갖 생각을 다하며 몸을 뒤척이다가 잠이 오지 않았다.
어제는 그런 생각을 하다가 긴장이 되기 시작하여 하얗게 밤을 지새웠다.
아침밥을 먹는 둥, 마는 둥 하고서 줄담배만 피워 댔다.
긴장감 속에 시간은 흘러 어머니가 떠나는 시각이 점점 다가오고 있었다.
어머니는 아무 영문도 모른 채, “우리 집에 간다.”고 말하면서
밖으로 나가려고 몇 번이고 현관문을 열려고 발버둥 쳤다.
그러다가 내 아내가 다른 날 보다 조금 일찍 점심 식사를 차려,
우리 가족들은 묵묵히 식사를 하기 시작했다.
나는 어머니와 마주 보며 앉아 첫 밥숟가락을 떠서 밥을 씹는 순간,
‘이제 집에서 어머니와 얼굴을 맞대며 식사하는 것이 이게 마지막이구나.’
라는 생각이 불현듯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나는 그만 울컥해져 밥을 씹어 넘길 수가 없었다.
씹은 밥을 넘기려고 목을 아래위로 움직이며 억지로 넘기려고 했으나,
도저히 넘어가지 안했다.
가슴이 답답해지며, 목으로 무엇이 치밀어 오르는 느낌이 들었다.
밥을 입에 넣은 채 의자에서 일어나, 앞 베란다로 나가 잠시 쉼 호흡을
고른 뒤, 밥을 넘긴 후 다시 식사를 하려고 의자에 앉았다.
그러나 조금 전과 같이 울컥한 현상이 일어나기 시작하더니,
얼굴이 화끈거리며 눈앞이 침침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내 옆에서 식사를 하던 아내가
“그렇게 마음 아프면 요양원 입소 취소해요?”라는 말이 내 귓전을 때렸다.
나는 식사를 할 수 없어 집 밖으로 나가,
우리 아파트 동 옆 어린이 놀이터 의자에 앉아 어머니의 ‘요양원 입소 취소’에 대하여
한참 동안 고민에 빠지기 시작했다.
마음을 안정시키기 위해 담배 한 대를 피우고 있었는데,
어머니에 대한 지난 날 들의 기억들이 주마등처럼 눈앞을 스쳐 지나갔다.
어머니는 치매를 앓고 있으며, 가족을 전혀 알아보지 못한다.
우리 가족들이 어머니의 치매 병을 인지한 사연은 약6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어머니는 내 동생이 부부 직장인인 관계로 조카들을 키우고,
보살피기 위해 약25여년을 서울 강남에서 그들과 함께 살았다.
어머니는 60대 중반부터 그곳에서 가까운 거리의 경로당에 나가
동네할머니들과 어울리며 즐겁게 지내곤 했다.
그래서 나는 평소 어머니에 대한 걱정은 별로 하지 않았고,
두 달에 한 번 정도 어머니를 찾아뵙고 용돈도 드리며 지내왔다.
그러던 2005년 가을 어느 날, 나는 직장에서 근무를 하고 있었는데,
느닷없이 경찰관으로부터 한통의 전화를 받았다.
그 경찰관은 어머니의 이름을 말하며 “관계가 어떻게 되느냐.”고 물었다.
깜짝 놀라, 저의 어머니라고 말하니까,
그는 “여기 파출소에 보호 중” 이라고 말했다.
수화기 너머로 어머니가 경남 창원이 집이라고, 그곳으로 가야 된다고
떠들고 있는 소리가 들려 왔다.
나는 급히 동생에게 연락해 어머니의 사태를 마무리 했다.
그런 일이 있고 난 후 부터 어머니는 횡설수설 하며 며칠을 지내다가
병원에가 진단을 받았다. 진단결과는 치매였다.
그로부터 1개월 마다 병원에가 진료를 받고 약을 복용했다.
그러다가 어머니는 집에 있는 돈 일백 만원을 가지고 경로당에 가서
노인들에게 그냥 나눠 주기도 하며, 그곳의 여러 노인들을 데리고
식당으로 가서 밥도 사주고, 제과점에 가서 빵이나 과자도 사 주었다.
그런 일이 있고 난 후 하루만 지나면, 동생 집으로 노인들의 시비 전화가
빗발친다. 경로당 노인들로 부터 “왜 나는 돈 안주나.
누구는 밥이나 빵도 사 주면서, 사람 차별하나”라고 전화가 걸려온다.
어머니는 그만 경로당 노인들로부터 ‘왕따’ 취급을 당하여,
경로당에 안 갈려고 했다. 어머니는 집에서 2-3개월가량 지내며,
병은 점점 악화되어 ××주간보호센타에 다니게 되었다.
그곳에 약 2년간을 다니다가 치매가 악화되어 동생이 돌 볼 수 없게 되었다.
우리 형제들은 함께 모여 의논한 끝에
어머니를 요양원에 보내기로 결정 했다.
그리고는 어머니를 춘천 근교 ××요양원에 보내기 위해
저의 집에서 약1개월을 지냈다.
어머니의 그 ××요양원 입소 날짜가 가까이 다가오자,
나는 어머니가 그곳에 가면 ‘건강이 더 악화될 것 같고,
자식으로서 엄청난 불효 짓을 하는 것’ 같았다.
그런 생각을 하다가 마음이
불안해지기 시작해서 밤에 잠을 잘 수 없었다.
나는 그 요양원 입소 날짜 일주일을 앞두고,
어머니 요양원 입소를 취소했다.
그러자 형제들은 나에게 원망의 ‘화살’을 쏘아 댔다.
나는 형제들에게 앞으로 ‘어머니 삶에 대한 모든 책임은 내가 질 테니
간섭하지 말라.’고 딱 잘라버렸다.
그리고서 어머니는 우리 집 부근의 ××주간보호센타에 다녔다.
어머니는 그런대로 약6개월을 그 주간보호센타에 다니며,
다른 노인네들과 잘 어울리면서 지냈다.
그리고 주말이나 일·공휴일에는 어머니를 모시고 야산이나 공원 등으로
가서 산책을 하고, 외식을 했다.
어머니는 밖으로 나가면 기분이 좋아 어쩔 줄을 몰라 했다.
그러다가 어머니는 일주일에 한두 번 정도 소량으로
옷에 변실을 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대변을 본 후 뒤처리를 제대로 하지 아니하여 그런 줄 알고
대수롭게 여겼다. 그러나 그것은 뒤처리 불량이 아니고 변실 이었다.
내 아내가 어머니를 목욕시키고 난 후,
어머니는 화장실에 가지 안했는데도 옷에 똥이 있었다.
그러한 현상의 횟수가 날이 갈수록 점점 잦아지고,
변실의 양이 많아지기 시작했다. 우리 가족들은 불안해 지기 시작했다.
어머니는 약8개월간 ××종합병원 외과에 진료 받으며, 약을 복용했다.
그 의사는 항문 괄약근과 근육의 힘이 약해 졌기 때문에
변실 한다고 진단했다. 그러나 약8개월이 지나도 변실의 차도는
조금도 없었다. 그래서 어머니의 병원 진료와 변실금 약의 복용을
중지해 버렸다. 어머니의 치매 병은 날이 갈수록 악화되어 갔고,
옷에 변실 횟수도 잦아지기 시작했다. 그에 따라 안하려고 하는 행동의
거부증이 심해지기 시작해 가족들과 싸우기도 했다.
그리고 화장실 출입도 1시간에 3-5회 이상으로 들락거렸다.
어머니와 같이 생활하는 것이 하루하루가 불안하고, 초조하고,
스트레스가 쌓여, 나는 정신적, 육체적으로 힘이 들어
세상만사가 귀찮아 졌다.
앞으로 어머니와 같이 살아갈 자신이 없어졌다.
그래서 어머니를 요양원에 보내기로 결심 했다.
이번에는 아내와 형제들 모르게 어머니를 요양원에 입소시킨 후,
그들에게 그 사실을 알리려고 했다.
전번에 어머니의 요양원 입소 취소를 나 혼자 결정해 버렸기 때문이며,
그리고 만약에 ‘입소 결정을 해 놓고 또 전번처럼 내 마음이 바뀌어
입소를 취소해 버리면 어쩌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요양원 직원과 타협하여 입소 요일을 토요일로 정했다.
토·일·공휴일은 어머니가 주간보호센타에 가지 않는 날이라
어머니와 외출한다는 핑계를 대고 요양원에 가면,
아내 모르게 갈 수 있었다.
나는 입소하기 전날 밤을 꼬박 뜬눈으로 새웠다.
잠을 자려고 술을 조금 먹어 보았으나 소용이 없었다.
오히려 온갖 생각들만 떠오르고 있었다.
나는 어머니와 같이 집으로 나오기 1시간 전
가족들 모르게 요양원 입소 준비물을 가방에 챙겨
아파트 경비실에 맡겨 놓고, 가족들이 눈치 채지 않게
아침부터 늘 하든대로 행동했다.
나는 아내에게 “오늘 점심은 밖에서 하고 온다.”고 말하고,
어머니와 함께 집을 나왔다.
그리고서 경비실에 맡겨 놓은 가방을 들고, 어머니와 함께 택시를 탔다.
차를 타고 가는 동안 나는 아무 말도하지 않고,
고개를 돌려 차창 밖으로만 바라보고 있었다.
차가 춘천 시내를 막 빠져나갈 즘,
어머니가 “지금 어디 간다고 가노. 뭘 하려고 가는데.” 라고 물었다.
나는 거의 “다 왔어요. 곧 내릴 거요. 집에 있으면 답답하니
바람이나 쏘여야 지요.”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어머니가 “야, 너 날 버리지 마라!
전에도 날 놓아두고 너 도망갔지!
나는 다 안다. 모를 줄 아나. 네가 그렇게 해도, 집에 찾아간다.”
라고 말했다. 그 말을 듣고 보니,
나는 ‘어머니를 요양원에 보낸다.’라는 것은
‘어머니를 버린다’라는 의미의 감정으로 느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어머니가 ‘요양원에 가는 사실을 알고 있는 것이 아니냐.’라는
생각이 번뜩 튀어 올랐다.
그로 인하여, 갑자기 누군가가 방망이로 내 뒤통수를
후려치는 것 같아서, 나는 그만 정신이 몽롱해져 버렸다.
택시 기사는 어머니를 정상적인 사람으로 착각하고,
그 말이 진실인 줄 알고, 고개를 뒤로 돌려 의심의 눈초리로
나를 힐끗 쳐다보았다.
아마 기사는 ‘내가 어머니를 어디에 놓아두고 도망 갈 것’으로
알고 있는 듯 했다. 어머니와 나는 ××요양원 앞에 내렸다.
걸어서 그 요양원으로 가고 있었는데,
어머니는 그 요양원 이름의 큰 간판을 보더니
“여기 요양원 아이가. 이런데 왜 오나.
가만히 보니 네가 요양원에 들어가려고,
아이 구, 자슥아 참 안 됐다. 쯧.............”라고 혀를 차고 있었다.
나는 조금 전 정신이 몽롱해진데다가, 그 소리를 듣고서
다리가 후들거리기 시작 했다. 그리고 가슴이 쿵쿵 뛰기 시작하며,
뭔가에 홀린 듯, 이마에 식은땀이 나기 시작 했다.
나는 걸음을 멈추고, 등이 활처럼 굽어 오리걸음처럼
뒤뚱뒤뚱 거리며 앞으로 넘어 질 듯이 걸어가는
어머니를 한참 쳐다보았다.
어머니를 보면 볼수록 쓸쓸해 보였고, 한없이 가엾어 보였다.
발걸음을 앞으로 옮길 수가 없었다.
발길을 돌려야만 했다. 어머니와 나는 시내로 돌아와 점심 식사를 하고
집으로 왔다. 마침 아내는 외출 중 이었다. 휴대폰 번호를 꾹꾹 눌러,
그 요양원에 어머니 입소를 취소한다고 전화했다.
날이 갈수록 어머니의 기억력은 떨어져 가고, 행동이 거칠어지며,
거부증이 심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옷도 남의 도움 없이는 갈아입지 못했다.
옷에 변실 횟수도 잦아져 주간보호센타에서 속옷을 갈아입고
집으로 오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그러다가 어느 날, 저녁을 먹은 후 8시 30분경 어머니는
현관문의 잠금 장치를 열고 밖으로 나가버렸다.
평소 어머니는 낮에는 집 밖으로 나가려고 발버둥 치다가
날이 어두컴컴해지면 밖으로 나가지 않았다.
그래서 밤이 되면 우리 가족들은 어머니 감시를
낮 보다 소홀히 했다.
나는 30분가량 우리 아파트 주변의 길을 헤매다가
그 주차장에서 어머니를 찾았다. 우리 아파트는 산을 깎아 지은 관계로
주차장이 급경사로 이루어져 있다.
그 주차장의 한 곳에는 어른 키 높이의 축대를 쌓아 만든 곳이 있는 데,
낭떠러지로 되어 있다. 어머니는 주차장을 헤매다 그 낭떠러지에서
떨어져 팔을 크게 다쳤다. 다행히 다른 대는 다치지는 안했다.
급히 병원에가 진단해 보니 왼쪽 손목 위 뼈가 골절 되었다.
약70일간을 왼쪽 팔에 붕대를 감고 힘든 생활을 했으나,
다행히 움직이는 데 전혀 지장 없이 완전히 완쾌 되었다.
어머니는 50일 마다 ××병원 정신과에 진료를 받는 데,
어느 날 그 병원 정신과 의사가 진료 상담 중
“어머니를 집에서 돌보지 말고, 요양원에 보내는 것이 좋겠다.”고 말했다.
나는 “자식 된 도리로서, 양심상 부모를 그런 곳에는 못 보내겠다.”고
말했다. 그러자 그 의사는 “잘 못 생각하고 있다며, 할머니는
가정에서 돌보는 것은 한계점을 넘었습니다.
현재의 할머니 행동 거부증으로 보호자들까지 병에 걸릴 수 있습니다.
그러면 가정이 파탄 납니다. 집에 가셔서 할머니를 속히 전문기관에
보내도록 가족들과 의논하십시오.”라고 힘주어 말했다.
나는 집에 돌아와 곰곰이 생각했다.
그 의사의 말이 타당한 말 이었다.
어머니의 거부증이 심해짐에 따라
나는 못 먹는 술을 입에 대기 시작 했다.
술을 먹지 않고서는 스트레스를 풀 수가 없었고,
지친 심신을 달랠 수가 없었다.
내 아내도 성격이 부쩍 예민해지기 시작했다.
특히 어머니가 옷에 변실을 했을 때 옷을 안 벗 어려고 거부하면,
내 아내와 어머니는 약30분간 실랑이를 벌인다.
“옷에 똥이 있으니 옷을 벗 어라고 하면,”
어머니는 “우리 집에 가서 벗 는다. 남의 집에서 몸을 왜 씻나.”라고 ,
거부해 버린다. 어머니를 달래고, 사정하다 보면 그만 지친다.
최후의 수단으로 아내와 나는 어머니를 화장실에 끌고 가서
샤워기로 어머니 몸에 물을 뿌린다.
그래도 어머니는 옷을 벗지 않는다. 정말 미칠 지경이다.
반 강제로 상의를 벗기고, 몸 위를 비누칠 하면
그때야 하의를 벗는다.
그러한 생활이 하루 이틀이지, 정말 힘이 들었다.
힘들다는 것을 말로서는 표현할 수 없다.
그러한 상황을 겪어보지 아니한 사람들은 아마 모를 것이다.
나도 이제 60대 중반에 접어든 나이다.
그리고 아내와 나는 약6년 전부터 고혈압 약을 복용하고 있다.
나는 어머니에 대하여 골똘히 생각한 끝에 정신과 의사의 말을 따르기로
결정 했다. 나는 어머니가 치매나 기타 질병으로 인하여
집에서 부양하기 곤란할 경우를 대비,
요양원에 신속히 입소하기 위해서 평소에 서울, 인천, 춘천 근교에 있는,
‘어르신들을 잘 못 신다.’고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요양원을 두루 보려 다녔다. 서울은 내 동생이 거주하고 있고,
인천은 내가 25년간을 살았으며,
춘천은 현재 내가 살고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나는 그 요양원들의 자연환경, 시설, 직원들의 근무상태 등을 파악하고,
어머니의 조건에 맞는 그들의 장·단점 분석을 해 보았다.
그 결과, ‘춘천시 신동면 연화마을’이 어머니가 편안하게
생활할 수 있는 곳 이었다.
그 곳의 부지 전경 아래로 자연하천의 물이 사시사철 흐르며,
산의 나무와 숲들이 건물을 감싸고 있었고,
산새들이 지저귀는 소리를 들으며, 맑은 공기로 숨 쉬고,
자연과 함께 생활 할 수 있는 곳으로
건강관리에는 최적이라고 생각 되었다.
건물 내의 시설도 어르신들의
안전과 편리·편의를 도모하게 설비 되어 있었다.
그리고 직원들의 근무 동태도 적극적이고,
능동적으로 스스로 일을 찾아서 하고 있었고,
생기발랄하게 활동하는 모습들이 역동적이었다.
그러다가 어머니는 정기적으로 진료 받는 ××병원 정신과에 가서
진료를 받았다.
그 병원 정신과 의사는 “할머니, 요양원에 속히 보내십시오.
전번에도 말했지만 그리로 가는 게, 할머니에게 오히려 이롭습니다.
그리고 우선 아드님이 마음 아프겠지만,
얼마 지나고 보면 할머니를 요양원에 보낸 것이
잘 한 일이 구나를 느낄 것 입니다.” 라고 말했다.
그러자 나는 그 의사에게 “곧 요양원에 보내겠습니다.
어머니가 가실 요양원을 며칠 내 방문하려고 합니다.”라고 말했다.
그러다가 나는 아내와 함께 어머니를 모시고
연화마을요양원에 가서 입소 상담을 했다.
그리고는 일주일 후 어머니를 그 곳에 입소하기로 했다.
몇 분간을 어린이 놀이터에 앉아 있은 나는 보름 전,
××병원 정신과 의사가 “.............요양원으로 가는 게,
할머니에게 오히려 이롭습니다.”라고 한말을 생각했다.
그러자 불안한 내 마음은 안정이 되었다.
나는 집으로 들어와 요양원 입소 준비물을 챙기고,
아내와 함께 어머니를 모시고 연화마을요양원에 갔다.
우리는 반갑게 맞이하는 직원들의 안내를 받으며,
상담실로 들어갔다. 약 1시간 동안 담당직원들과 격의 없이
어머니에 대한 의견을 나누고서 입소 절차를 끝냈다.
나는 저 깊은 가슴 한 곳에 오늘 날짜를 새겼다.
아픈 가슴을 쓸어내리고, 내리며......................
‘5. 16(오일육)’이라고 뚜렷이 새겼다.
그리고서 나는 아픈 가슴 속에 어머니에 대한
‘사랑과 애정의 실’을 65년간 고이고이 감아 놓은
‘실타래’를 풀었다.
그 ‘실타래’에서 뽑아낸 ‘실’을 속울음을 한없이 삼키고, 삼키며.............
어머니 몸에 칭칭 감았다.
내 쓰라린 가슴 속의 ‘사랑과 애정의 실’은
쉴 사이 없이 풀려나가기 시작했다.
나는 아내와 함께 연화마을요양원에서 나오려고 할 때,
어머니의 얼굴에는 초조한 그림자가 드리워지기 시작했다.
어머니는 우리와 떨어지지 않으려고,
뒤뚱뒤뚱 출입문 앞 까지 따라오면서.................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어머니는 애절한 목소리로 “어디 가노! 나도 같이 가자!”라고 말하며,
몸 부리 치듯, 따라 오려고 했다.
그러자 내 아내가 어머니를 안심시키기 위해
“다른 데 갔다가 곧 와요. 잠깐 기다리세요.”라고 말하고,
애타게 기다리며, 쓸쓸하게 서 있는 어머니를 뒤로 한 채..........
나오려는 눈물을 머금고, 나는 떨어지지 않는 발길을 돌려야만 했다.
어쩔 수가 없었다. 어머니 치매의 거부증을 감당해 낼 수가 없었다.
특히, 어머니가 옷에 변실(대변)하고, 안 벗 어려고 발버둥 치는데
당해 낼 수가 없었다.
나는 어머니와 함께 살아갈 자신감을 잃어 버렸다.
나는 아내와 함께 재빨리 그 곳을 빠져나왔지만,
어머니의 그 소리가 예리한 송곳으로 내 심장을 찌르는 듯,
가슴을 심하게 요동치게 했다.
나오는 속울음을 삼키고, 참아내며............
나는 산을 휘감고 도는 발밋개울을 따라 걷고, 걸으며,
애타게 기다리는 어머니의 모습이 자꾸만, 자꾸만 선하게 떠올라
가다가 멈추고, 또 가다 멈추며, 몰려오는 먹구름을 한참 바라보았다.
먹구름과 함께 의암호에서 간간히 불어오는 바람은
산의 나무와 숲을 가볍게 흔 들고서 계곡으로 빠져나갔다.
나는 그 바람을 안고서 아픈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리고서, 두 줄기 따스한 것이 얼굴을 타고 흘러내렸다.
말없이, 소리 없이.............................
‘사랑과 애정의 실’을 풀어냈다.
산을 끼고, 푸르른 강물을 따라 한없이 눈물을 뿌리며.....
그 ‘실’을 풀어냈다.
집까지 끝없이, 끝없이 그 ‘실’을 풀어냈다.
내가 지구촌 어디에 가도 어머니와 연결된 채,
‘사랑과 애정의 실’은 가슴 속에서 풀려 나갈 것이다.
그 ‘실’은 어느 누구도 끊을 수 없을 것이다.
어떠한 화학적이나, 물리적인 충격을 가해도
그 ‘실’은 끊어지지 않을 것이다.
내 이 한 몸, 이 땅에 살아있을 때 까지
‘사랑과 애정의 실’은 보이지 않게,
어머니와 연결된 채 움직이고 있을 것이다.
영원히, 영원히..............
어머니가 집을 떠 난지 어느 듯 1년이 지났다.
어머니는 치매가 악화되어 이제 걷지도 못하고, 의사표현도 못하며,
밥도 잘 먹지 못한다. 이런 어머니를 생각하면, 생각 할수록
나는 그만 가슴이 미어진다.
오늘은 식사를 잘 했는지. 잠은 편하게 자는 지. 등 걱정이 되어
어머니가 보고파진다.
어머니가 더 이상 치매가 악화되지 않고, 편안한 삶을 영위하기를
나는 하루에도 몇 번씩 기도하고, 또 기도하며.........
어머니가 사무치게 그리워진다.
이 글을 더 쓰려고 해도 어머니의 모습이 떠오르고 올라,
그만 무엇이 앞을 가려서................. 곧 흘러내릴 것만 같다.
‘내 가족처럼 따뜻하게 보살펴 주시고, 돌보아 주시’는
연화마을요양원 직원들에게 깊은 감사를 드리며,
그리고 연화마을요양원의 무궁한 발전이 있기를 기대한다.
2011. 5. 16.
오 일 육
첫댓글 어르신께서는 잘 지내고 계십니다. 언제나 걱정되시고 마음이 아프시지요? 저희들 모두가 열심히 노력하고 있읍니다만 늘 부족함을 느낍니다. 그렇게 고심하시고 어르신을 모신지 벌써 1년이 되었네요.. 저희들이 좀 더 최선을 다해 잘 모실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언제나 건강하세요~ !
구절초님, 저의 어머님에 대하여 항상 각별한 신경을 써주시는데 대하여 감사를 드립니다.
긴 글...좋은 글...아픈...글...감사합니다....보호자분과 어르신의 마음이 그대로 느껴지면서 맘이 찡한게...눈이 촉촉해집니다. 어르신을 모심에 부족함이 죄송하고, 늘 건강한 모습으로 지켜드리지 못해 죄송합니다....최선을 다해 열심히 하지만..오늘도 또 죄송합니다...더욱 최선을 다해 어르신의 평안함을 위해 노력하겠습니다...늘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어르신들을 위해 심혈을 기울이시는 허니님, 감사합니다. 저의 가족이 돌 보듯이 어머니를 보살펴 주셔서 제가 죄송할 따름 입니다.
글을 보면서 어르신을 좀더 이해하게 되고 저희가 미처 몰랐던 부분까지도 사랑할수 있도록 글 올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언제나 최선을 다해 모시겠습니다.
달래님, 바쁘신 와중에 글을 읽어 보시고, 댓글을 달아 주셔서 감사! 저의 어머니를 아무 거리낌없이 잘 보살펴 주셔서 송구스러운 마음 금치 못하겠습니다.
어르신께서 연화마을에 오신지 어느덧 1년이 되셨네요..
오일육님의 닉네임에 담긴 뜻을 보면서 어르신을 사랑하는 마음이 느껴졌어요.
저희도 오일육님처럼 어르신을 생각하고 사랑하고 존경하는 마음을 항상 간직하겠습니다.
쥔장님, 바쁘신데 글을 읽어 보시고 댓글을 달아 주셔서 감사! 어르신들을 내 가족처럼 생각하고 돌 보아 주셔서 고맙습니다.
사진앨범에 가보시면 우리 어르신께서 활짝 웃고계십니다...^^* 사진보시고 행복한 하루 되세요~
구절초님, 감사합니다. 이 댓글을 보고 저의 어머니 사진 속의 활짝 웃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너무 고마워 절로 고개가 숙여지네요.
염려하시는마음.어머님에대한그리움이그만죄스럽고.어르신들을되돌아볼수있는좋은마음감사드립니다.늘머리조아리시며. 미안해하시는모습뵐때마다~저에어머니를잠시생각하곤하죠.늘어르신과함께하고있 음니다.또가족이고요.최선을다해어르신과함께하겠읍니다. 글감사드려요
경애쌤님, 저의 어머니를 가족처럼 돌 보아 주시는 데 대하여 항상 고맙고, 감사합니다. 그리고 늘 있는 힘을 다해 묵묵히, 그저 묵묵히.... 여러 어르신들을 보살펴시느라 노고가 너무 많습니다. 경애쌤님의 가내에 평온이 깃들며, 화기애애한 나날이 계속되기를 빌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