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형법은 중국의 대명률을 따랐기 때문에 태(笞), 장(杖), 도(徒), 유(流), 사(死)의 다섯 가지로 나뉘어져 있었습니다. 그 중에서 태와 장은 말 그대로 때리는 형벌이었고 도는 일종의 징역형이었고 사는 말 그대로 죽여버리는 형벌이었죠. 그리고 나머지 하나가 유형인데 멀리 귀향을 보내는 것 정도는 다들 알고 계실겁니다. 헌데 이 유형이 의외로 상당히 강한 형벌이었어요, TV 드라마에서는 유형 당해봤자 경치좋은 섬 같은데 초가집 지어두고 왠 냥반 하나가 나와서 한숨이나 푹 쉬는 장면이나 혹은 가끔 포졸들 하고 군관이 나타나 "사약을 받으라" 정도의 장면들이라 그렇게 엄한 형벌인가 느끼지를 못하는 경우가 많더라고요.유배형은 도형과 달리 노역에 종사하지 않아서 편하지 않는가 생각되기도 하는데 일단 언제 풀릴지 모르는 "무기형" 인데다가 거주지에서 부터 2000리, 2500리, 3000리 등의 등급으로 떨어지게 하는터라 당대 사람들이 평생 자신의 마을 밖을 나가보지 않는 경우도 많다는 것을 생각할 때 말려 죽이는 형벌일 수도 있는 것이었죠. (참고로 중국법에 따라 2000리, 2500리 등등을 정했기 때문에 좁은 한반도에서는 그렇게 멀리 보낼 방도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세종12년엔 유2000리 라고 정하면 고을로 부터 600리, 2500리는 750리, 3000리는 900리로 정했죠. 그 이전에는 2000~3000리를 지키려고 유배지를 갈때 빙~빙 돌아서 가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정해진 이후에도 정치적 상황이나 유배자의 권세에 따라 달라지기도 했지요)<방송에 나왔던 유배... 이런건 유람이고>
이 유배는 방송과 달리 천민부터 양반까지 모두 받는 형이었는데 신분에 따라 유배가는 모습도 천차만별이었습니다. 천민이나 평민은 유배 호송관이 해당 지역의 포졸이 번갈아 가며 호송했는데 이 일이 귀찮은지라 빨리 보내고 끝내려고 밤이고 낮이고를 가리지 않고 이동 시키는 경우도 있었지요, 반면 관직을 가진 관원의 경우는 당하관인 경우 나장(羅將)이 담당했고, 당상관의 경우는 서리(書吏)가 호송을 책임졌습니다. 그리고 아주 고위급 장관의 경우에는 의금부 도사가 호송을 담당했죠. 평민들과는 달리 이들의 호송은 말 그대로 규정된 시간에 규정된 길을 가는 그런 상황이었으니 신분 차별에 눈물 날뻔 한 거죠.거기다 유배가 힘든 이유중에 하나가 바로 이들 호송관의 노자까지 유배자가 책임져야 한다는 겁니다. 지금이야 감옥에 가면 밥도 주고 옷도 주고, 방도 주지만(?) 예전에는 죄다 죄인이 책임져야 하는 것이었죠. 유배가는 규정상 하루 80~90리는 가야 했고 보통 수일에서 수십일 걸리는 길이었으니 밥값만 생각해도 상당한데 신분이 높아 호송하는 인원이 많아지면 그 입을 먹여야 할 돈도 더 많고 또 질도 생각해야 했지요, 채면상 욕먹을 수는 없으니까요. 선조때 광해군 책봉을 건의했다 실각한 정철 계열의 홍성민이라는 사람은 함경도 부령에 유배를 받았는데, 자신의 문집에 이 유배를 위해 준비해야 했던 말 여섯마리와 각종 음식물 그리고 옷가지등을 장만하기 위해 가산을 몽땅 털었다는 말도 나옵니다.<차라리 태형이 좋을지도 몰라... 깔끔하잖아>
하지만 아예 신분이 높은, 그러니까 나중에 복귀할 가능성도 높고 실각해도 그 영향력이 장난 아닌 사람들은 유배는 벌이 아니라 유람이 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돈도 있고, 권력도 있으니 말이지요. 경종2년에 위리안치 명을 받은 윤양래는 18일의 여행길에서 가는 곳마다 고을 수령으로 부터 노잣돈을 너무 받아서 그 무게 때문에 물건을 싣고 가던 나귀가 무게 때문에 넘어지는 일이 발생했다고 나오며 호송관인 의금부 도사는 아예 따로 출발해서 험한 고갯길에서 자신의 가마를 타라고 내어준 경우도 있었습니다. (죄인은 말을 타야만 했으며 관직이 높을 수록 가마를 탔습니다, 조신시대 말 타고 출퇴근 하는 것은 낮은 관직의 관리였습니다) 선조22년에 함경도 길주로 유배 받은 조헌은 경유지에서 안변부사와 활쏘고 술마시고 놀다가 숙취 때문에 다음날 출발하지도 못한 경우도 있었고, 모두 잘 아시는 이항복의 경우도 북청 유배길에 함흥과 홍원에서 기생 덕선과 조생 집에 묵어 가기도 했습니다. (어디 이불깔고 잠'만' 잤을까요? 훗~)하지만 이같은 경우는 정말로 드문 경우였지요. 전국에서 이렇게 위세를 부릴만한 고위 관리가 몇이나 되겠습니까. 더더구나 육지로 유배를 받은 경우는 그나마 다행인데 제주도나 흑산도 등의 섬으로 유배를 받은 경우는 풍랑 때문에 며칠씩 발이 묶이는 경우도 많았고 아예 배타고 나갔다가 영영 실종되어 버리는 경우도 흔했습니다. 추사 김정희가 아우에게 보낸 편지에서 무사히 제주도에 도착한 것에 무척이나 안도하고 있다는 말이 나오기도 했으니 바다의 상황은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두려운 일이었던 것입니다.<장형은 쫌... 생각해 봐야 할 듯>
거기다 더 골때리는 사실은 유배지에 도착해서도 결코 상황이 좋지는 않다는 것이지요. TV에서 나오는 유배의 모습들은 대부분 위리안치의 모습인데 (뒤에 이야기 하겠지만 이마져도 사실과 다릅니다) 그 경우야 집과 먹을 것을 관에서 제공하지만 그 외에는 유배지의 고을 수령이 지정하는 거처에 살아야 했고 (그 거처는 우습게도 그 마을 사람의 집입니다) 보수주인(保授主人)을 지정해 유배인을 먹고 살수 있도록 지정했는데 양민들은 당연하게도 이런 군입을 반가워 하지 않아 적극 거부했기에 수령의 명을 거역하기 힘든 아전이나 군교, 관노가 이 역할을 담당했습니다.문제는 이렇게 군입을 붙인 보수주인들이 결코 이들을 '환대'하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건 자명하죠. 정조때 대전별감 출신으로 추자도에 유배갔던 안조환의 경우 그가 쓴 만언사(?言詞)에 유배가서 보수주인에게 받은 설움이 그대로 담아져 있는데 유배지에 도착했으나 아무도 그를 맡으려 하지 않아서 관원이 강제로 아무 집에나 집어 넣었더니만 집 주인이 그릇을 내던지며 안조환에게 쌍욕을 퍼붓고 그런 상황에 방에도 못 들어가 지붕 처마 밑에서 잠을 자고, 옷도 없어서 1년 내내 옷 한벌로 버티며 이불도 없이 자냈으며 어떻게든 살려고 주인집 마당쓸고, 쇠똥치우고, 집 지키며 밥을 빌어먹어야 했습니다. 그마저도 수월치 않아 결국에는 마을 집들을 떠돌며 구걸하며 먹고 살았다고 합니다. 한때 임금님의 명을 받들던 대전별감의 추락 치고는 너무 안습인 경우였죠.
그리고 제주도에 유배갔던 최초의 여성 유배인인 인목대비 어머니 노씨의 경우 왕비의 어머니임에도 돈이 없어 막걸리를 만들어 팔아서 먹고 살아야 했고 선조 24년에 함경도 부령에 귀양갔던 홍성민이라는 사람은 돈이 떨어지자 같이 온 종과 함께 팔 수 있는 물건들을 모아다가 장에다 내어 장사를 하면서 농부가 부럽다고 징징거리기도 했습니다. (알다시피 조선의 신분은 사농공상... 상인은 가장 바닥입니다)그리고 마지막으로 위리안치를 받은 사람들은 어떠했을까요? 사실 그냥 유배간 사람들이야 고을 경내만 벗어나지 않는다면 가족도 만나고 어디 산책이라도 할 수 있지만 위리안치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임금에게 밉보여도 아주 단단히 밉보인 사람들이 위리안치를 명 받는데 가족 동반도 금지되었고 유배지에서도 지정한 집에 주위를 탱자나무 가사등으로 올려 그 너머를 나가지도 못해게 했습니다. 열흘에 한 번 음식을 넣어주는 것 이외에는 대문은 항상 밖에서 자물쇠로 채웠고 담장 안에서 우물을 파서 생활하도록 했습니다. 그리고 방송과는 달리 이 가시나무 담은 거의 빛을 볼 수 없도록 만들었는데 그높이가 4~5길 둘래가 50자로, 과장된 것을 생각하지 않는다면 5~9미터나 되는 높이였던 거죠.당시 척이 어떤지에 따라 조금 다르고 실제 담을 설치할때도 정확하게 재어 만든 것이 아닌지라 차이가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위리안치를 받았던 사람들의 기록을 보면 가시 울타리가 처마를 가려 집 안에 빛이 들어오지 않으며 숨을 쉬려고 해도 공기가 통하지 않아 답답하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주변사람들은 위리안치된 집을 두고 산무덤이라 부르기도 했지요. 일단 이 높이가 높기는 했던건지 인조반정으로 폐세자가 되어 강화도에 위리안치된 광해군의 왕자 이지가 밖으로 도망간 사건이 있었는데 이때 탈출 방법이 울타리 밖으로 땅굴을 파서 나갔다가 나졸에게 붙잡했던 것을 생각해 보면 TV처럼 밖을 보면서 탱자탱자할 상황은 아니었던 것이 분명한 것 같습니다.<탱자나무 가시 덩쿨입니다. 위리안치된 사람은 이런것만 봤겠죠>
이런 위리안치를 기약없이 몇십년씩 있는다고 해 보세요, 왠만한 사람들은 미쳐버릴지도 모릅니다. 뭐 덕분에 그 안에 있던 사람들은 할게 생각 뿐인지라 유배지에서 걸작이나 대단한 철학서등이 나오기도 했지요. 다산 정약용의 유명한 목민심서, 경세유표, 흠흠신서 등은 죄다 유배지에서 나왔던 것을 생각하면 유배의 효과(?)가 꽤나 강렬하기는 했나 보지요. :DPS : 유배는 단순히 유배 보내라~ 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유배에도 본향안치, 절도안치, 위리안치, 중도부처, 천사, 천도 등으로 나뉩니다만... 재미 없어서 빼버렸습니다. 아~ 그리고 도형과 유형에는 항상 장형이 따라 붙었죠. 그래서 우마차에 앉아서 가는 건 뻥!! 엉덩이가 아파서 못 그렇게 갑니다, 보통은 엎드려 갔습니다. 물론 신분에 따라 다르지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