늙은 아해와 사는 노마님의 하루
이어령 선생께서 소천하신 날이다. 현존하는 이 땅의 최고의 지성이라고 그분을 존경하고 있던 마나님은 그런 분과 동시대를 지냈던 것이 자기 생의 축복이라고까지 여겼던 차라, 애석지심을 금할 수 없었다. 작가ㆍ교수ㆍ장관등 직함이 여러 가지인데 마나님은 늘 ‘선생’이란 명칭을 써 왔다. 세상을 뜨시자 선생의 글들이 인터넷에 우후죽순처럼 올라온다. 그중에 <나에게 이야기하기>라는 시가 소개되었는데 마님의 감동이 컸다.
너무 잘하려 하지 말라 하네/ 이미 살고 있음이 이긴 것이므로 너무 슬퍼하지 말라 하네/ 삶은 슬픔도 아름다운 기억으로 돌려주므로 너무 고집부리지 말라 하네/ 사람의 마음과 생각은 늘 변하는 것이므로 너무 욕심 부리지 말라 하네 / 사람이 살아가는 데 그다지 많은 것이 필요치 않으므로 너무 연연해하지 말라 하네/ 죽을 것 같던 사람이 간 자리에 또 소중한 사람이 오므로 너무 미안해하지 말라 하네/ 우리 모두는 누구나 실수하는 불완전한 존재이므로 너무 뒤돌아보지 말라 하네/ 지나간 날보다 앞으로 살 날이 더 의미 있으므로 너무 받으려 하지 말라 하네/ 살다 보면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기쁘므로 너무 조급해 하지 말라 하네/ 천천히 가도 얼마든지 먼저 도착할 수 있으므로 죽도록 온 존재로 사랑하라 하네/ 우리가 세상에 온 이유는 사랑하기 위함이므로….
아, 이렇게 자기를 다스리며 살아가셨구나. 모두에게 일러 주시는 말이구나 라는 생각이 들어 읽기도 편해서 아해 같은 노부(老夫)에게 읽어 주었다. “여보, 이분은 천재야. 아까운 분 가셨네!” 말하니 듣고 있던 양반이 느닷없이 묻는다. “양주동 교수하고 누가 더 천재야?”
노인 양반 입에서 양주동이라는 단어가 나오자 마나님은 놀라고 만다. 그도 그럴 것이 마나님은 이 양반의 머리가 단단히 고장 났다고 생각하며 산 지 칠 년이 넘는다. 날짜를 모른다, 요일도 모른다, 하루 18시간 가까이 잠을 자는데 잠잘 동안 꿈에서 있던 일들이 현실이 되어 행동을 이어 가야 한다. “건축사들이 제주도에 가려고 모여 있는데 내가 늦어서 못 떠나고 있어. 빨리 가야 돼.” 의관을 수습하고 막무가내로 집을 나서거나 “아버지가 담을 고치고 계신데 내가 가서 도와 드려야 해.”라며 연장을 챙겨 들고 나가는 등등. 가장 두드러진 인지 장애는 대문만 나서면 방향 감각을 잃는 것이다. 그래서 마나님은 노인이 깨어 있을 때는 물론 잠자는 것도 지키고 있다. 언제 깨어나 어디로 갈지 모르기 때문이다. 이런 증상이 아니면 멀쩡할 때가 더 많다. 그래서 마나님은 헷갈린다.
노처인 마나님의 성품은 대책 없는 긍정주의자다. 성숙한 철학을 가져서가 아니다. 매사를 좋은 쪽으로 생각하는 것이 제 마음에 편하기 때문이다. 어찌 보면 이기주의의 극치다. 홀연히 집에서 나가서 가출 신고를 해야만 하는 일을 빼면 그런 대로 양호한 노인 양반이다. 아픈 데 없고, 잠 잘 자고, 잘 자신다. 이게 어디랴. 노마님은 고맙기만 하다.
사내아이 넷을 기를 때보다 훨씬 수월하다. 하루 스무 시간 가까이 잠을 자니 그 시간에 무엇이나 할 수 있다. 다만 마나님 자신이 바깥출입을 못하는 게 답답하지만 코비드 시절이니 그마저 감사하다. 노인 양반이 집에서 빠져 나가서 걸을 수 있는 것도 고맙다. 화장실 출입을 가능케 하는 다리 힘이 되니까.
마나님은 자기 늙은 남편을 세 살 아해라고 여긴다. 네 살만 되도 미운 짓을 한다. 세 살까지는 예쁘다. 밥 잘 먹고, 잘 싸고, 잠 잘 자면 예쁜 것이 아해다. 그래서 노부에게 하는 말도 자연히 세 살 아기에게 하는 말투가 된다.
아이들 기를 때였다. 젊은 엄마는 자기가 낼 수 있는 가장 고운 소리로 아이들에게 말을 했다. 아기들은 자기들이 듣는 말로 세상을 알아가기 때문이다. 그러는 사이 젊은 엄마의 말투가 다정해지고 목소리도 고와졌다. 그러다가 아이들이 어른이 되고 젊은 엄마도 세파에 부대끼며 사는 사이 거칠어져 갔는데 나이 팔십에 세 살 노인을 수발하게 되니 다시 고운 말투의 마님이 되었다.
오늘 아침 반찬은 시래기 된장국에 장조림과 김이다. 계란 반숙도 있다. 마나님은 반찬 시중을 들면서 묻는다. “어제 저녁에 당신이 양주동 박사 얘기 했지?” “응.” “어떻게 그 이름이 떠올랐수?” “당신이 이어령이 천재라고 하는 말에….” “양주동 박사, 그 양반 천재야?” “모르지. 자기가 늘 천재라고 했으니까.” “그런 말 하는 것을 들은 적 있수?” “그건, 언젠가 강의를 들었는데 영어의 3인층 동사에 S자를 붙이는 설명을 하면서 3인층이란 너, 나, 뺀 것은 다 3인층이라며 이런 설명을 할 수 있는 사람은 천재 양주동이밖에 없다라고 했어.” “당신이 다니던 학교와 양 교수가 가르치던 학교가 다르잖아?” “응, 어느 방학 때 YMCA에서 그분 특강이 있었거든.”
맙소사! 마나님의 입이 다물어지지 않는데 물을 마시다 말고 노인 양반이 묻는다. “오늘 무슨 요일이지?” 좀 전에 묻기에 가르쳐 주었던 것을 다시 묻는다.
점심을 먹을 때 우리의 세 살 아해는 또 어떤 말을 하려나? 여든 일곱 살 마나님인 나는 아직 방영되지 않은 매일연속극을 상상하듯 아흔두 살 늙은 아해를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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