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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 강해(93)
‘겸손한 존재’가 되십시오
(2022. 05. 06. 화)
본문 : 누가복음14:7-11
<바리새인 지도자의 집에서>
예수님을 죽이려는 바리새인들의 음모는
날이 갈수록 교묘해졌습니다.
하루는 예수님을 함정에 빠뜨리기 위해 바리새인 지도자가
예수님을 ‘안식일’에 자신의 집으로 초대하였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앉으신 자리 바로 앞에
‘수종병 든 사람’을 데려다 놓았습니다.
- 예수님이 안식일에 병자를 고치는지를...
- 즉 안식일 율법을 어기는 확실한 증거를
잡기 위한 함정을 판 것입니다.
그들의 음모를 꿰뚫어 보신 예수님은
먼저 선수를 치셨습니다.
“...안식일에 병 고쳐 주는 것이 합당하냐
아니하냐”(3절)고 물으셨습니다.
그들이 대답을 하지 못할 질문을 던지신 것입니다.
- 만일 ‘안 된다’고 단정해 버리면
공들여 파놓은 함정이 무산될 것이고,...
- ‘된다’라고 말하면 예수님이 그 사람을 고쳐 주더라도
책을 잡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결국 답을 하지 못하고 잠잠했습니다.
그들이 분명한 대답을 하지 못하자
예수님은 ‘수종병 든 사람’을 고쳐 주셨습니다.
그리고는 “너희 중에 누가 그 아들이나 소가 우물에 빠졌으면
안식일에라도 곧 끌어내지 않겠느냐”(5절)고 가르쳐 주셨습니다.
이렇게 예수님은 그들이 파놓은 함정을
보기 좋게 무력화시켰습니다.
<높은 자리 택함을 보시고>.......
그런데 예수님은 그 바리새인 지도자의 집에서,
초청받은 사람들의 행동을 보셨습니다.
7절 “청함을 받은 사람들이 높은 자리 택함을 보시고
그들에게 비유로 말씀하여 이르시되.”
바리새인 지도자는 예수님을 초대해 놓고,
다른 바리새인 지도자급 되는 사람들을 초청하였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서로 상석에 앉으려고 시비하는 것을 보신 것입니다.
일종의 서열 싸움이지요.
사실 이것은
바리새인만 그렇게 행동하는 것은 아닙니다.
모든 인간 사회에서 일어나는 일입니다.
이것은 인간의 본질적 성품입니다.
자연스럽게 일어나는 욕구입니다.
이것이 타락의 근본적 원인입니다.
창 3장에 보면 인간이 타락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뱀이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열매’를 먹으라고
하와를 유혹할 때,.... 했던 말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게 될 것이라”(5)는 말이었습니다.
핵심적인 말은 ‘하나님과 같이 된다’는 말입니다.
그 말을 들은 하와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로 보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 열매를 따 먹고 자기와 함께 있는
남편에게도 준 것입니다.
이것이 인간의 타락의 근본 원인입니다.
이러한 인간의 심리는 바벨탑 사건에서도
잘 드러납니다(창11장).
사람들이 시날 평지에 바벨탑을 건설하였습니다.
그런데 건설 목표를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4절 “...자, 성읍과 탑을 건설하여 그 탑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
이것은 단순한 탑을 쌓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자신들의 도시를 짓고(5절, 8절),
지배권(통치권)을 얻기 위함이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 없이 인간들만으로
살아갈 수 있다는 교만의 표현이었습니다.
결국 하나님은 그들의 언어를 혼잡하게 하여....,
서로 알아듣지 못하게 하시고,....
그들을 온 지면에 흩으셨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높아지려는 마음은 누가 가르쳐주지 않아도......
모든 인간의 마음속에서 자연스럽게
일어나는 욕구입니다.
그래서 “교만하라”는 가르침은 없어도
저절로 교만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일종의 권력까지 생기면
갑질을 일삼는 것입니다.
여자배구 학교폭력 논란
– 흥국생명의 쌍둥이 선수가 선배 선수와의 갈등 국면에서.....
피해자 행세를 하다가 과거 학교폭력의 가해자임이 드러나.....
무기한 출전정지와 국가대회
자격 박탈이라는 징계를 받았습니다.
솔로몬은 잠언에서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잠16:18)라고 했는데,
그 본보기가 되어 버렸습니다.
이후 우리 사회 곳곳에 내재되어 있던 폭력이
공개되는 상황이 전개되고 있습니다.
우리 사회에서 폭력이 사라지도록 문화와 제도를
바꾸어나가는 기회로 삼아야 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시대를 불문하고 소위 권력 있고,
영향력 있는 인사들 사이에서는 종종 일어나는 일입니다.
서로 눈치 보면서 “내가 저 사람보다는
높은 자리에 앉아야 된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심지어는 예수님의 제자 공동체 사이에서도
“누가 높으냐”하는 문제로 논쟁이 벌어지곤 하였습니다(치맛바람까지).
예수님의 반복적인 가르침에도 변화되지 않았습니다
(마18:1-5, 막9:33-37, 눅9:46-48, 22:24-27).
오죽했으면 예수님께서 마지막 만찬에서
가르치신 내용이 무엇입니까?
식탁에서 일어나셔서 겉옷을 벗고
수건을 허리에 동이고는 대야에 물을 떠다.....
제자들의 발을 씻기고 허리에 둘렀던 수건으로
그들의 발을 닦아 주셨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요13:14-15>
14절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었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 주는 것이 옳으니라
15절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 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하여 본을 보였노라.”
마지막 순간까지도 예수님은 겸손과 섬김을
가르치시고, 본을 보여주셨습니다.
본문으로 돌아와서, 바리새인 지도자의 집으로
초대받아 가신 예수님은 그 자리에서,
초청받아 온 바리새인들이 서로 상석에 앉으려고
자리다툼을 벌이는 한심한 모습을 보시고 ‘비유’를 말씀하십니다.
<8-9절>
8절 “네가 누구에게나 혼인 잔치에 청함을 받았을
때에 높은 자리에 앉지 말라
그렇지 않으면 너보다 더 높은 사람이 청함을 받은 경우에
9절 너와 그를 청한 자가 와서 너더러
이 사람에게 자리를 내주라 하리니
그 때에 네가 부끄러워 끝자리로 가게 되리라.”
혼인 잔치에 청함을 받아 갔으면,
높은 자리에 먼저 앉지 말라는 것입니다.
나중에 자신보다 더 높은 사람이 오면
그 자리를 내어주게 되어있다는 것입니다.
그럼 부끄러워진다는 것입니다.
<끝자리에 앉으라>....
그럼 어떻게 하라고 가르치십니까?
10절 “청함을 받았을 때에 차라리 가서 끝자리에 앉으라
그러면 너를 청한 자가 와서 너더러
벗이여 올라앉으라 하리니
그때에야 함께 앉은 모든 사람 앞에서 영광이 있으리라.”
청함을 받았는데 어떤 자리에 앉아야 할지 잘 모르겠다면
“차라리 가서 끝자리에 앉으라”는 겁니다.
그러면 ‘청한 자’가 와서 적절한 자리에 안내하여
올라앉으라고 할 것입니다.
그러면 모든 사람이 우러러보지 않겠느냐는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말씀만이 아닙니다.
이미 솔로몬 왕이 잠언에서 언급한 내용입니다.
<잠25:6-7>
6절 “왕 앞에서 스스로 높은 체하지 말며
대인들의 자리에 서지 말라
7절 이는 사람이 네게 이리로 올라오라고 말하는 것이
네 눈에 보이는 귀인 앞에서 저리로
내려가라고 말하는 것보다 나음이니라.”
그러니까 이 솔로몬의 말씀은 예수님 뿐 아니라
당시의 율법 학자들이나 바리새인들도 다 알고 있는 말씀입니다.
문제는 그냥 아는 것으로 끝난다는 데 있습니다.
아무도 행하지 않고 있습니다.
행하지 않는 믿음이 죽은 믿음이듯이 실천하지 않는 지식은
죽은 지식입니다. 아무 쓸모없는 지식입니다.
<겸손한 존재>
그럼 이런 현상이 벌어지는 것일까요?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지 못하는 이유는
내재되어 있는 탐욕과 교만을 내려놓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은 형식적으로 순종하는 척합니다.
그런데 진심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일종의
처세술 정도로 격하시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낮은 자리에 앉았다고
가정해봅시다.
그는 겉으로는 예수님의 말씀에
딱 순종하는 사람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낮은 자리에 앉은 후,
이렇게 생각을 할 수도 있습니다.
“내가 지금 이런 자리에 앉을 사람이 아닌데,
주인이 빨리 내게 와서 상석으로 자리를 옮기라고
말해줘야 하는 거 아닌가.
지금 저기 저 상석에 앉아 있는 사람은 나보다 서열이 훨씬 낮고,
인격적으로도 형편없는 사람이야.
나는 지금 제대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어.’
이 사람은 낮은 자리에 앉긴 했지만,
실제로는 높은 자리에 버티고 있는 사람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이 사람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세련된 처세술 정도로 격하시킨 것입니다.
높아지려는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수단으로 격하시키는 것입니다.
내재되어 있는 탐욕과 교만을
내려놓지 못한 것입니다.
예수님이 가르치시고자 하는 것은
‘겸손한 행동’이 아닙니다.
‘겸손한 존재’가 되라는 것입니다.
어떻게 가능할까요?
두 가지만 생각해보려고 합니다.
첫째, 하나님 앞에서 자신에 대해서
바르게 인식할 때 가능합니다.
하나님을 알고 자신을 바르게 알 때
하나님 앞에서 나오는 태도가 겸손입니다.
즉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었다면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였음을 깊이 깨닫고 있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님을 만나기 전 자신이 굉장히 의로운 존재고,
자랑스러운 존재로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만난 뒤 그의 생각이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전에 그렇게 자랑스럽게 여기던 모든 것이
더 이상 중요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빌3:4-9>
4절 “그러나 나도 육체를 신뢰할 만하며
만일 누구든지 다른 이가 육체를 신뢰할 것이 있는 줄로
생각하면 나는 더욱 그러하리니
5절 나는 팔일 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 족속이요
베냐민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6절 열심으로는 교회를 박해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라
7절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8절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9절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라.”
바울은 자신이 이 세상에서 자랑스럽게 생각했던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겼습니다.
그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고
그 안에서 발견되는 것만이 가장 가치 있기 때문입니다(십자가만 자랑).
오늘 우리가 누리고 있는 것 중
주께로부터 오지 않은 것이 있습니까?
본래부터 성도님들이 가지고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건강, 재물, 재능, 지식, 인격…,
그리고 구원에 이르기까지
은혜로 받지 않은 것이 무엇입니까?
우리는 모두 다 빚진 자입니다.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용납된 자’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알고
자신을 바르게 아는 자는 교만할 수 없습니다.
둘째, 우리의 관심이 전환될 때 가능합니다.
지금 청함을 받은 율법 교사들과 바리새인들은
‘높은 자리’, ‘명예의 자리’에만 관심이 있었습니다.
마태복음에 보면 예수님이 바리새인을 책망하시면서
그들이 ‘모세의 자리’에 앉았다고 비판하셨습니다.
<마23:1-3>
1절 “이에 예수께서 무리와
제자들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2절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모세의 자리에 앉았으니
3절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그들이 말하는 바는
행하고 지키되 그들이 하는 행위는 본받지 말라
그들은 말만 하고 행하지 아니하며.”
그들이 ‘모세의 자리’에 앉았다고 비판하신 것은
그들의 교만한 태도를 비유적으로 표현하신 것입니다.
이와 같이 그들의 관심은 오로지 ‘자리’를 차지하는데 있었습니다.
그렇기에 보기에도 부끄러운 모습을 연출한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자리’에 대한 관심을 접어야 합니다.
우리가 정말 깊은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은
“내게 주어진 사명이 무엇인가”하는 것입니다.
지금 이 세상에서 어떤 자리에 올라가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지금 내게 주어진 사명을
어떻게 하면 완수할 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롬14:8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
사명이 생기니 ‘자리’는 중요한 것이 아니게 되었습니다.
심지어 죽고 사는 것도 중요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어디까지 올라갔느냐에
관심을 두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얼마나 사명을 완수했느냐에
관심을 가지십니다.
세상에서 명예로운 자리,
높은 자리가 우리를 구원의 길로 이끌지 못합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믿음으로, 사명으로 산 삶’만이 우리를 영생의 길로 인도하는 것입니다.
<대역전의 때>
예수님은 오늘 말씀의 결론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11절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중요한 두 가지 교훈을 얻어야 합니다.
첫째, 상석과 말석, 곧 높아지고 낮아지는 것을
결정하실 분은 하나님 한 분뿐이라는 사실입니다.
세상은 스스로를 높이라고 하지만,
주님은 하나님이 높여주시는 것이 진짜라고 말씀하십니다.
한나의 기도 <삼상2:6-7>
6절 “여호와는 죽이기도 하시고 살리기도 하시며
스올에 내리게도 하시고 거기에서 올리기도 하시는도다
7절 여호와는 가난하게도 하시고 부하게도 하시며
낮추기도 하시고 높이기도 하시는도다.”
하나님은 겸손한 사람을 높여주십니다.
진짜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라면
예수님의 말씀을 진리로 믿고 따를 것입니다.
둘째, 진정으로 높은 자와 낮은 자가 결정되는 때는
마지막 때라는 사실입니다.
세상에서의 질서가 천국에서의 질서로 유지되지 않습니다.
대역전의 때가 옵니다.
‘부자와 나사로’의 신세가 뒤바뀌는 것입니다(눅16장).
예수님은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쉽다”
(눅18:25)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이렇게 교훈하셨습니다.
<벧전5:5-6>
5절 “젊은 자들아 이와 같이 장로들에게 순종하고
다 서로 겸손으로 허리를 동이라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되
겸손한 자들에게는 은혜를 주시느니라
6절 그러므로 하나님의 능하신 손 아래에서 겸손하라
때가 되면 너희를 높이시리라.”
<맺는 말씀>
사랑하는 성도님들 !
하나님 앞에서 자신에 대해서
바르게 인식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었다면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였음을
깊이 깨닫고 늘 겸손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단지 ‘겸손한 행동’으로 머무는 것이 아니라,
‘겸손한 존재’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자리’에 대한 관심을 접고,
“내게 주어진 사명이 무엇인가”하는
관심으로 전환되기를 바랍니다.
저와 성도님들이 !
항상 겸손히 주님의 은혜에 감사하며.......,
겸손히 나보다 남을 높이며 더욱 낮은 데 처하며,
끝내 하나님께로부터 높임을 받는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금산교회 김화준 목사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