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동숭동연가 = 東崇洞戀歌》
는 극단 맥토가 제작해 1993년 4월 12일~4월 25일에 문예회관 대극장에서 공연한 대한민국 뮤지컬이다. 2004년에는 속편인 <동숭동연가2>가 공연되었다. 줄거리[ 귀에 익은 노래들과 음악들로 소란한 동숭동의 밤거리. 초상화를 그리는 사람들, 관상을 보는 사람들, 연극인, 그리고 내일의 스타를 꿈꾸는 무명가수, 연인들, 노점상들, 경찰관, 취객들의 다양한 모습들이 어우러지며 동숭동의 새벽은 밝아온다. 희뿌연 아침안개 사이로 청소부 이씨와 그의 아내 양씨가 어질러진 거리를 쓸고 지나가면 이 거리의 터줏대감인 생맥주집 성주 아저씨가 하품을 하면서 빈 맥주상자를 들고 나온다. “오늘도 기막힌 날씬데”하는 성주아저씨의 혼잣말 위로 “오늘도 연극쟁이한테 외상주면 이혼이유!”하는 안성주의 밉살스런 소리가 들린다.
삼수생 유하영은 출산으로 입원한 고모를 대신해서 고모 꽃가게 일을 거들기위해 아침 일찍 꽃시장에 가서 꽃을 잔뜩 사들고 오다가 자전거를 타고 오는 진수와 부딪친다. 진수는 생계 때문에 대학로에서 테이프 노점을 하며 노래연습을 하는 가수지망생이다. 한눈에 하영에게 반한 진수는 하영의 꽃들을 가게까지 운반해주며 관심을 보이고 그런 호의가 싫지만은 않은 하영. 자신의 노점은 관상보는 정도령에게 맡기고 매일 꽃가게 앞에서 사랑의 세레나데를 부르는 진수. 거리의 화가인 환섭은 뮤지컬 단역배우인 명희에게 반해서 사랑을 고백하지만 스타를 꿈꾸는 명희는 그런 환섭의 태도에 쌀쌀맞게 대하며 취재온 피디에게 접근을 한다. 자신의 진심을 외면당한 환섭이 실망하여 거리로 돌아오는데 예전에 함께 일했던 일당 중에 한 명이 환섭에게 모사하는 일을 하라며 돈으로 꼬드기지만 예술혼을 돈에 팔지 않겠다며 그런 그를 쫓아버리는 환섭. 밤거리와는 다른 활기없고 조용하기만 한 동승동의 낮거리. 그러나 그런 곳에 활기를 넣는 것은 바로 진수들이다. 그들은 사람들의 시선에 구애됨 없이 춤도 추고 노래도 하고 때로는 방황하는 10대들의 상담자역도 하면서 하루를 보낸다. 그런 진수의 모습에서 더욱 진실함을 느끼는 하영. 하영의 꽃집에선 두 사람의 사랑이 무르익는다. 어느날 명희에게 가수매니저란 인물이 스타를 만들어 주겠다며 명희에게 접근해 온다. 명희는 단역으로 출연하던 연극을 중도에서 그만둔 채 매니저에게 가지만 매니저는 명희를 유흥업소로 팔아넘겨 버린다. 명희로 인해 방황하고 괴로워하는 환섭은 술에 취해 밤거리를 헤매고 그런 그를 말리다가 청소부 이씨가 교통사고를 당한다.
병원비가 막연한 이씨를 위해 거리 식구들이 모두 나서서 묘안을 생각해 보지만 뾰족한 수가 생각나지 않는다. 그 모습을 숨어서 지켜보던 환섭은 슬그머니 사라진다. 유흥업소에 팔려간 명희는 간신히 탈출을 하여 연극무대로 돌아오지만 연출가는 명희를 받아주지 않는다. 절망하는 명희를 다독이는 배우들, 그리고 꽃배달을 왔던 하영이 명희를 위로하면서 참사랑은 항상 옆에 있는 것이라고 말해주며 환섭의 진실된 맘을 깨닫게 해준다. 병원비를 위해 학교를 그만두고 술집에서 일을 하겠다는 이씨의 아들을 나무라며 현실적으로 도와주지 못하는 것이 안타까운 거리식구들에게 하영이 자선공연을 제안한다. 모두가 만장일치로 자선공연을 찬성하는데 환섭이 나타나 거액의 돈을 거리식구들 앞에 내놓는다. 그림을 모사해 주기로 하고 받은 돈이라는 것을 직감한 진수는 환섭을 비난하며 돈을 받지 않고 하영은 그런 진수에게 좀 더 넓은 포용력으로 환섭의 아픔까지도 안으라고 충고하며 꽃집으로 사라진다. 자선공연은 생각만큼 쉽지 않아 지리멸렬하게 되어 거리식구들이 뿔뿔이 흩어지고 성주아저씨는 뭔가 골똘히 생각하다 어딜 간다며 사라진다. 정도령과 단둘이 남게 된 진수. 그러나 모사일을 하지 않고 무대 그림을 그리겠다며 다시 나타난 환섭을 힘껏 껴안는 두 사람. 세 사람이 힘들게 세트를 만들고 있는데 하영에게 환섭의 소식을 들은 명희가 온다. 자리를 비켜주는 정도령과 진수. 묵묵히 세트를 세우고 있는 환섭에게 명희가 다가온다. 사랑의 이중창이 무대를 수놓으면 서로의 시선이 마주 치면서 서로 포옹을 하는데 세트가 와장창 무너지며 숨어서 보고있던 정도령이 엉덩방아를 찧으며 겸연쩍어 한다. 드디어 자선공연의 막이 오르는데 성주 아저씨가 고설봉을 비롯하여 많은 배우들을 데리고 나타난다. “이런 좋은 일에 우리가 빠져서 되나. 우리 공연보다 더 잘해 보자구!” 고설봉씨의 격려에 모두 환호하는 거리식구들. 목발을 짚고 아내의 손에 이끌려 공연장에 온 이씨, 그 모습에 새삼 눈시울이 붉어진다. 거리 식구들의 ‘거리사랑’의 노래소리가 사람들 사이로 퍼져 나가면서 서서히 막이 내린다.
동숭동[Dongsung-dong, 東崇洞]
1894년(고종 31) 갑오개혁 당시 행정구역 개편 때 쌍계동(雙溪洞), 하백동(下栢洞), 신대동(新垈洞), 상백동 등이 동숭동에 해당하는 지역이었다.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신대동, 하백동, 상백동, 쌍계동 등의 각 일부를 통합하여 동숭동이 되었으며, 같은 해 9월 경성부 동부출장소 동숭동이 되었다가 1915년 6월 출장소 제도가 폐지되어 경성부 동숭동이 되었다. 1936년 4월 동명이 일본식 지명으로 변경됨에 따라 동숭정이 되었으며, 1943년 4월 구제(區制) 실시로 신설된 종로구 동숭정이 되었다. 1946년 일제 잔재 청산의 일환으로 정(町)이 동(洞)으로 바뀔 때 동숭동이 되었다. 법정동인 동숭동은 행정동인 이화동(梨花洞) 관할하에 있다. 동숭이란 지명은 숭교방(崇敎坊) 동쪽에 있다는 데 연유한다.
남상문, 쌍계동, 웃잣골, 아랫잣골, 신댓골 등의 자연마을, 신대우물, 백동우물, 큰우물,어수물 등의 우물이 있었다. 남상문은 조선 선조 때 군수를 역임한 남상문의 이름에서, 웃잣골은 잣나무가 있다는 데, 신댓골은 중종 때의 학자 신광한(申光漢)이 마을의 풍치가 아름다워 '신대명승(申臺名勝)'이라고 명명한 데 명칭이 연유하며, 129번지는 신광한이 살던 곳이다. 교육·공공기관으로는 한국방송통신대학교,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부속초등학교, 국제교육진흥원, 한국문화예술진흥원 등이 있다. 문화재로는 구 서울대학교 본관(사적 278), 구 공업전습소 본관(사적 279) 등이 있다. 문화·휴식공간으로는 한국문화예술진흥원 문예회관, 코메디아트홀, 학전블루, 마로니에극장, 문예회관소극장, 동숭공원(일명 마로니에공원) 등이 있는데 연면적은 각각 1512평, 60평, 122평, 57평, 138평이다.
출처:(두산백과 두피디아, 두산백과)
홍덕이밭 [弘德田]
종로구 동숭동 낙산 아래에 있던 밭으로서, 병자호란 때 봉림대군(효종)이 청군에게 볼모가 되어 심양에 있을 때, 나인 홍덕(弘德)이 또한 포로가 되어 심양에 있으면서 김치를 잘 담가서 날마다 드리고, 또한 본국에 돌아와서도 다시 김치를 담가서 나인을 시켜 효종께 바치니, 효종이 감탄하여 후히 상을 주고자 하나 홍덕이 끝내 사양하므로, 특명으로 낙산 아래에 있는 밭을 주었다고 전하는 데서 유래된 이름이다. 홍덕전이라고도 하였다.
출처:(서울지명사전, 2009. 2. 13., 서울역사편찬원)
서울성곽길 - 문향 서린 길을 걷다
한양도성 이화장~혜화문 구간 걷기 좋은 성곽길
걷기여행의 출발지점은 이화장이다. 이화장은 이승만 대통령의 사저이다. 이승만 대통령 내외가 1947년 10월부터 이 집에 살았다. 이화동사무소 표지석 앞 사거리에서 예림음악학원 건물 왼쪽 도로로 올라가다 보면 오르막 계단이 앞에 보인다.(이화장 대문은 왼쪽에 있다.) 그 계단으로 계속 올라간다. 계단길 좌우로 좁은 골목길이 나 있다. 계단이 끝나고 좁은 도로를 건너면 또 계단이 이어진다.(계단 앞에 낙산공원 이정표가 있는데 그 이정표를 무시하고 계단으로 계속 올라가야 한다.) 계단으로 또 올라간다. 그림이 그려진 계단길을 올라서면 작은 공터가 나오고 공터 오른쪽 앞으로 작은 철계단이 있다. 계단을 올라가서 좌회전 하면 본격적으로 성곽길을 걷게 된다.
길 오른 쪽에 성곽이 있다. 성곽 가까이서 보면 전망이 좋다. 길 왼쪽에는 낡은 집들이 오래된 추억처럼 남아 있다.
오르막길을 올라가다가 뒤를 돌아본다. 성곽이 구불거리며 길게 이어지고 저 멀리 동대문 쇼핑타운의 빌딩들이 한 눈에 보인다. 빌딩과 산비탈 집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전망을 감상하고 다시 돌아서서 낙산공원으로 올라간다. 낙산공원은 간단한 운동기구 등이 있는 마을 쉼터다. 낙산공원 안으로 들어가서 조금만 가다 보면 오른쪽에 성곽 밖으로 나가는 작은 통로가 하나 나 있다.(문은 없고 그냥 통로다.) 그 통로로 나가서 성곽을 따라 이어지는 길로 내려간다. 길은 마을로 한 가닥 나 있고 하나는 성벽 바로 아래로 이어진다. 성벽 바로 아랫길로 가야 한다.
웅장한 성벽이 구불거리며 이어지고 그 아래 산비탈 마을이 평온하게 자리잡고 있다. 마을 골목길 벽에는 그림이 그려져 있다. 추억 같은 골목길과 벽에 그린 그림을 구경하고 싶으면 마을 골목길로 갔다가 성곽이 있는 곳으로 나오면 된다. 성벽길을 따라 걷다 보면 성벽 앞에 의자도 있어 쉬어갈 수 있게 했다. 봄이면 신록도 피고 벚꽃도 피어나겠지. 그 성벽길은 혜화로터리에서 한성대입구 전철역으로 넘어가는 고갯길에서 끊어진다. 성곽이 끊어지는 곳에 도로로 내려가는 나무계단이 있다. 계단을 내려가서 우회전, 한성대입구전철역 4번 출구로 들어가서 5번 출구로 나와 뒤로 돌아서 인도를 따라 가다 보면 혜화문이 나온다. 문으로 오르는 계단을 끝까지 올라 문 앞에 선다.
서울성곽 아래 성북동 마을에서 만난 만해 한용운의 심우장
대학로부터 혜화문까지 약 2km의 성곽길은 성곽을 바로 옆에 두고서 걷는 걷기 좋은 길이다. 혜화문까지 왔다면 이 번 걷기 여행에서 반 정도 걸은 셈이다. 혜화문은 조선 태조가 서울성곽을 지을 때 함께 건설한 문이다. 서울성곽에는 4대문과 4소문이 있었는데 혜화문은 북동쪽에 있는 작은 문이었다. 처음에는 홍화문이라고 했는데 창경궁의 동쪽 문인 홍화문과 이름이 같아서 1511년에 혜화문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혜화문 오른쪽으로 난 성벽 바로 아랫길을 따라 걷는다. 얼마 못 가 성벽이 끝나고 도로가 나온다. 도로를 건너서 성벽은 다시 이어진다. 성벽을 왼쪽에 두고 걷는다. 이제부터 주택가 골목길인데 다른 골목으로 꺾지 말고 걷는 길로 계속 걷다 보면 경신중고등학교가 나온다. 학교 담을 왼쪽 옆에 두고 골목길을 계속 걷는다. 골목길이 끝나고 큰 도로가 나오는데 오른쪽에 돈가스 집이 몇 곳 있다. 돈가스 집 앞 도로를 건너 오른쪽으로 조금 내려가다 보면 왼쪽에 서울성곽을 따라 올라가는 길이 나온다. 성곽길을 따라 오르막길을 걷는다. 중간에 계단도 나온다. 점점 올라가기 때문에 전망도 좋아진다. 담장 가까이 서면 산비탈에 다닥다닥 붙은 집들이 만든 풍경이 보인다. 계속 길을 따라 올라가다 보면 가파른 계단이 나오고 계단 바로 오른쪽 옆에 작은 통로(성곽 밖으로 나가는 통로)가 보인다. 그 쪽을 나가면 오래된 마을 전경이 바로 눈 아래 보인다. 골목길로 내려가서 도로가 나오면 좌회전 한 뒤 조금만 올라가서 갈림길에서 우회전. 길 모퉁이 벽에 새 한 마리가 그려졌다. 이 마을에 행운을 전해주는 파랑새 같다. 그곳을 지나 조금만 더 올라가면 거주자우선주차장이 길 오른쪽에 있고 전봇대와 의류수거함이 함께 있는 곳 바로 옆에 오른쪽으로 내려가는 계단이 있다. 계단을 따라 내려가서 왼쪽으로 난 골목길로 접어든다. 삼거리 골목길에서 우회전, 이후 사거리 골목길에서 우회전 후 길 왼쪽 첫 집이 심우장이다. 심우장은 독립운동가이자 시인인 만해 한용운선생이 1933년부터 1944년까지 살았던 곳이다. 마당 한쪽에는 만해가 직접 심었다고 전하는 향나무가 있다.
일제강점기 때 소설가 상허 이태준의 수연산방
심우장에서 나오면서 왼쪽 골목길로 걷는다. 내리막 골목길을 다 내려가면 큰 도로가 나오는데 거기서 우회전 해서 걷는다. 길 왼쪽에 성북구립미술관 건물이 보인다. 이번 걷기 코스의 종착지점인 수연산방은 성북구립미술관 건물을 바라보며 왼쪽에 있는 한옥 건물이다. 수연산방은 일제강점기 때 소설가 상허 이태준선생이 살던 집이다. 이 집은 상허가 1933년부터 1946년까지 살던 집이다. 상허는 이 집에 ‘수연산방’이라는 이름을 지어 붙였다. 본채 건물 안방과 건넌방 모두 햇살이 잘 든다. 유리창으로 드는 햇살이 따듯하다. 건넌방에는 한지를 발랐다. 햇볕이 한지를 통과하면서 고운 가루가 되어 방바닥에 쌓이는 느낌이다. 아주 포근한 느낌으로 쌓이는 햇볕이 파스텔톤으로 빛난다. 상허는 이곳에서 많은 문학작품을 집필했다. 해방 이후 상허는 가족을 데리고 월북했다. 그리고 1988년 월북작가의 작품이 해금 되기 이전까지 대한민국에서 그의 작품을 볼 수 없었던 것이다. 1988년 월북작가의 작품이 해금 되면서 소설가 이태준, 홍명희 등 수 많은 월북 문인들의 작품이 빛을 보게 된 것이다. 대청마루 한 쪽에 옛날 사진이 보인다. 상허와 가족들이 찍은 사진이다. 상허의 집에 별채 형식으로 지은 상심루 앞에서 찍은 사진이다. 상심루는 없어지고 지금은 그 자리에 전혀 다른 모양의 건물을 만들었다. 본채에 손님이 꽉 차면 옛날 상심루가 있던 자리에 지은 건물에 손님을 안내하고 있다. 1990년대 말부터 이곳 수연산방은 햇살 좋은 오래된 한옥에서 차 한 잔의 여유를 즐길 수 있는 찻집으로 다시 태어난 것이다. 서울성곽과 성곽 아래 오래된 마을, 만해 한용운의 심우장 등을 걷고 나서 차 한자의 여유와 함께 여행 뒷 이야기를 풀어 놓아도 좋을 것 같다.
수연산방은 일제강점기 때 소설가 상허 이태준선생이 살던 집이다. 이 집은 상허가 1933년부터 1946년까지 살던 집이다. 상허는 이 집에 ‘수연산방’이라는 이름을 지어 붙였다. 본채 건물 안방과 건넌방 모두 햇살이 잘 든다. 유리창으로 드는 햇살이 따듯하다. 건넌방에는 한지를 발랐다. 햇볕이 한지를 통과하면서 고운 가루가 되어 방바닥에 쌓이는 느낌이다. 아주 포근한 느낌으로 쌓이는 햇볕이 파스텔톤으로 빛난다. 상허는 이곳에서 많은 문학작품을 집필했다. 해방 이후 상허는 가족을 데리고 월북했다. 그리고 1988년 월북작가의 작품이 해금 되기 이전까지 대한민국에서 그의 작품을 볼 수 없었던 것이다. 1988년 월북작가의 작품이 해금 되면서 소설가 이태준, 홍명희 등 수 많은 월북 문인들의 작품이 빛을 보게 된 것이다. 대청마루 한 쪽에 옛날 사진이 보인다. 상허와 가족들이 찍은 사진이다. 상허의 집에 별채 형식으로 지은 상심루 앞에서 찍은 사진이다. 상심루는 없어지고 지금은 그 자리에 전혀 다른 모양의 건물을 만들었다. 본채에 손님이 꽉 차면 옛날 상심루가 있던 자리에 지은 건물에 손님을 안내하고 있다. 1990년대 말부터 이곳 수연산방은 햇살 좋은 오래된 한옥에서 차 한 잔의 여유를 즐길 수 있는 찻집으로 다시 태어난 것이다. 서울성곽과 성곽 아래 오래된 마을, 만해 한용운의 심우장 등을 걷고 나서 차 한자의 여유와 함께 여행 뒷 이야기를 풀어 놓아도 좋을 것 같다.... 출처: (길숲섬, 장태동)
2023-01-20 작성자 명사십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