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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해랑길 아산 84코스 역방향 제1부
평택시 팽성읍 노양리 쉼터정자-둔포천 구룡교-
둔포천 둑방길-신남방수제-쌀조개섬 입구-
창룡방수제-갯땅들-신언천교-구성리 새별들-
아산취수장-안성천 준설공사장-백석포배수장-
백석포2리 경로당-아산호로 주천교-아산천-
아산로1312번길-모원리 안논들-쉼터 전망루
20240424
1.아산호와 백석포, 청일전쟁의 현장
두루누비에서 서해랑길 84코스를, 근대 산업의 발전으로 생성된 아산만방조제와 간척지 위에 생성된 조용한 농촌 풍경을 마주할 수 있는 코스라고 소개하며, 1922년에 지어진 성당으로 수백년 된 느티나무와 어우러진 풍경이 아름다운 '공세리성당', 아산만방조제가 건설되면서 생겨 난 '쌀조개섬', 주변 마을을 활기 넘치던 어촌에서 농촌으로의 변화를 생기게 한 '아산만방조제' 등 세 곳을관광 포인트라고 안내하고 있다. 서해랑길 84코스의 주요 경로는, 인주공단교차로 3.7Km 공세리성당 입구 2.8Km 백석포2리마을회관 8.4Km 쌀조개섬 입구 2.8Km 노양마을회관정류장으로, 거리 17.7km, 소요시간 6시간, 난도 쉬움이다. 시점은 충남 아산시 인주면 걸매리 문방2교 인주공단교차로 버스정류소, 종점은 경기도 평택시 팽성읍 노양리 구룡교 북단 아래 쉼터정자 옆이다.
이렇게 소개된 서해랑길 84코스를, 85코스 시작점에서 역방향으로 출발하여 84코스 시작점에서 종료하였다. 서해랑길 84코스는 충남 아산시 인주면 걸매리에서 출발하여 북진한 뒤 지금까지 오랜 시간 동안 걸어온 충청남도 지역과 작별하고 경기도 평택시 팽성읍 노양리로 진입하는 감격적인 탐방 코스이다. 지난해 2023년 6월 28일 서해랑길 55코스 탐방 때 전라북도 군산에서 충남 서천으로 넘어와서 10개월 동안 충청남도 지역의 28개 코스 서해랑길을 탐방하며 여름에서 봄까지 세 계절의 풍경 변화를 누렸다. 그리고 84코스에서 충청남도 지역과의 오랜 만남을 아쉽게 작별하고 경기도 지역으로 들어가 새로운 만남의 기쁨을 누리게 된다. 서해랑길 84코스 역방향 탐방은 이 모든 벅찬 감정을 빼앗아 버렸다. 그렇지만 어찌하랴. 안내트레킹팀에서 진행하는 과정을 따를 수밖에. 섭섭함과 아쉬움, 슬픔을 날려 버리고 출발한다. 서해랑길 84코스 역방향 탐방을 2부로 나누어 기록한다.
제1부 : 침실 창문 앞 오동꽃이 보랏빛 등불을 밝혀 준다. 보랏빛 오동꽃은 달빛에 더 아름답지만 아침의 오동꽃은 활기차다. 오동꽃이 화사하게 보랏빛 등불을 비추는데 봄비가 곰살맞게 내린다. 봄비에 젖는 침실 창문 앞 오동꽃과 헤어져 서해랑길 탐방을 떠나 평택시 팽성읍 노양리로 내려갔다. 내려가는 도중에 차창에 부딪는 4월 중순의 봄비가 조금 세차진다. 봄비는 얼마쯤이나 내리고 그칠까? 서해랑길 85코스 시작점에 도착하여 버스에서 내리니 줄기찼던 봄비는 가늘어지고 멎는 듯 살며시 내린다. 고정희 시인의 '봄비'를 읊듯이 토닥토닥 속삭였다. "가슴 속 눈물이 하늘로 올라가 황토 벌판에 떨어진다. 버드나무 가지에 물안개 피어올리고 보리밭 보리잎에 입맞춤하며 봄비는 내린다. 봄비 그치면 봄비 찰랑대는 가슴의 문을 열고 꿈꾸는 들판으로 달려나가자. 아득히 흘러가 수평선 위에 해와 달과 별의 빛으로 떠오르자. 이 세상은 새로운 빛의 자연으로 빛나리."
가슴 밑으로 흘려보낸 눈물이/ 하늘에서 떨어지는 모습은 이뻐라/ 순하고 따스한 황토 벌판에/ 봄비 내리는 모습은 이뻐라/ 언 강물 풀리는 소리를 내며/ 버드나무 가지에 물안개를 만들고/ 보리밭 잎사귀에 입맞춤하면서/ 산천초목 호명하는 봄비는 이뻐라/ 거친 마음 적시는 봄비는 이뻐라/ 실개천 부풀리는 봄비는 이뻐라// 오 그리운 이여/ 저 비 그치고 보름달 떠오르면/ 우리들 가슴속의 수문을 열자/ 봄비 찰랑대는 수문을 쏴 열고/ 꿈꾸는 들판으로 달려나가자/ 들에서 얼싸안고 아득히 흘러가자/ 그때 우리에게 무엇이 필요하리/ 다만 둥그런 수평선 위에서/ 일월성신 숨결 같은 빛으로 떠오르자 - 고정희(1948~1991)의 '땅의 사람들6 - 봄비' 전문
고결한 사람의 인품을 기리는 '山高水長(산고수장)', 신의의 중요성과 융통성을 생각해 볼 수 있는 '미생지신(尾生之信)', 의미 있는 2개의 현판이 붙어 있는 쉼터정자 기둥에 서해랑길 85코스 시작점 표지판이 붙어 있다. 쉼터정자 앞에서 우산을 펼치고 출발한다. 둔포천의 구룡교를 건너 충남 아산시 둔포면 신남리로 넘어가 둔포천을 따라 내려가니 곧바로 둔포천은 안성천에 몸을 푼다. 이제부터는 아산시 안성천 아산호를 따라가는데, 84코스는 안성천 아산호를 서쪽에 두고 맞은편 평택시 현덕면을 마주보며 영인면 백석포리까지 이어지며 이후는 아산호 안쪽 내륙으로 들어간다. 이번 역방향 탐방은, 경기도 평택시 팽성읍 노양리에서 충남 아산시로 넘어가 둔포면 신남리, 영인면 창용리, 구성리, 백석포리, 인주면 모원리, 공세리, 신성리, 밀두리, 걸매리 지역을 통과한다. 경기도 평택시 팽성읍 노양리 지역과 충남 아산시의 세 개 면(面) 지역, 9개 리(里) 지역을 통과하는 탐방로이다.
봄비는 살그머니 뿌려지고 안개가 피어오른다. 둔포면 신남리 일대의 간척농지는 드넓게 펼쳐져 있고 북동쪽에는 국도 제43호선 평택세종로가 들녘을 가로지른다. 북쪽 안성천 상류에는 지방도 제313호선 광덕계양로의 평택국제대교가 안성천을 가로지르고 있다. 안성천 하류 아산만방조제 위쪽의 서해선 복선전철 아산고가교가 아산호를 가로지르는 풍경은 광활한 사막의 신기루처럼 아른거린다. 이 풍경들을 살피니, 탐방길 시작 지점에서 이번 탐방의 모든 핵심을 다 보았다는 느낌이 든다. 드넓은 들, 들녘을 흐르는 하천, 방조제에 의해 조성된 담수호, 하천과 호수를 가로지르는 아름다운 교량 - 이 풍경은 서해랑길 84코스의 핵심이면서, 자연 속에서 문명을 일구며 살아가는 사람살이의 모습이다. 이 풍경 속을 길동무와 함께 사람살이 이야기를 나누며 걷는다. 먼 곳에 대한 그리움이 아니라 지금 이곳의 행복감에 가슴이 활짝 열린다.
비가 멎는 듯하여 우산을 접었다. 비구름 흐르는 하늘을 가리는 우산을 접으니, 몸 위쪽 하늘과 단절된 감각이 열리며 천지사방의 자연이 몸으로 들어온다. 몸의 수문을 열고 들길을 온전히 걷는다는 해방감이 물밀려온다. 이렇게 들길을 흘러가자. 탐방길은 방수제 제방길을 굽이 돌며 아산호 호안(湖岸)길을 따라 남진한다. 방수제(防水堤)는 '방조제 내부에 육지를 만들기 위해 쌓은 제방'을 이르는데, 이번 탐방길에서 신남방수제와 창룡방수제를 거쳐간다. 아산호 호안 전체를 방수제 제방길이라 이르는 것인지, 아산호에서 안쪽으로 수로를 따라 깊숙하게 들어온 방수제의 제방길만을 방수제 제방길이라 이르는 것인지 불확실하다. 이 불확실함은 아산호 호안을 두르는 제방을 모두 방수제라고 이른다면 명칭에 문제는 없을 것 같다. 둔포면 신남리에서 신남방수제를 돌아 호안길로 나가면 영인면(靈仁面) 창용리(蒼龍里) 지역이다. 이번 탐방길에서 가장 길게 걷는 영인면 지역으로 넘어왔다. 이제부터는 영인면 창용리 지역의 긴 호안길을 따라간다.
안성천 아산호에는 쌀조개섬이 길게 누워 있다. 쌀조개 모양을 닮아 쌀조개섬이라는 지명을 얻게 된 이 섬은 예전에 섬이 아닌 갯벌이었다. 아산만방조제에 의해 조성된 아산호로 인해 갯벌 대부분은 영구히 수면 아래로 사라졌는데, 수면 위로 드러난 갯벌을 농경지로 개간한 땅이 쌀조개섬이라고 한다. 갯벌의 핏줄을 잃고 섬으로 살아가는 운명의 쌀조개섬의 슬픔이 아산호 드넓은 호면에 어려 있다. 쌀조개섬은 호수 바닥의 갯벌 핏줄에 대한 그리움으로 끝없이 하강하고자 길게 누워 있다는 생각이 든다. 눈을 호안 안쪽으로 돌리면 메타세콰이어가 조성된 들이 있고, 그 남쪽에 창용3리와 4리 마을이 동서로 펼쳐져 있으며, 그 사이에 삼양사와 대선제분 아산공장이 나란히 솟아 있다. 이 모습은 복잡하고 어수선한 공장 지대의 모습이 아니라 마을과 조화를 이루며 단정하고 깔끔해 보인다. 마을 뒤에는 나즈막한 산들이 운무에 쌓여 있다. 이 수묵화는 삶의 고요한 평화를 이야기한다.
호안(湖岸)길에 창용2방수제가 아산호 안쪽으로 깊이 들어와 있다. 호안길에서 벗어나 창용2방수제를 동쪽으로 돌아서 창용2방수제 제방길을 따라 아산호 방향으로 길게 내려간다. 아산호 호안길로 나오니, 둔포천~아산만방조제 13km 구간의 '안성천 환경정비사업' 공사가 한창이어서 호안길은 파헤쳐진 흙과 고여 있는 빗물에 어수선하다. 길게 이어지는 창용리 호안길을 따라가는데 멎었던 봄비가 내리고 바람이 함께 불어닥친다. 다시 우산을 펼치고 아득해지는 풍경 속을 걷는다. 호안 안쪽에 창용2리 드넓은 간척농지 '갯땅들'이 펼쳐진다. 갯땅들에는 '당개' 마을이 자리잡고 있는데, 이 마을은 아산만방조제가 생기기 전에는 ‘사월 당개’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숭어, 강다리 등의 어획량이 많았던 어촌마을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간척되어 어촌의 흔적은 사라지고 간척농지는 '갯땅들'이라는 지명으로 불리고 있다. 갯땅들에는 황토색 지붕의 축사인 듯한 건물들이 즐비하게 자리하고 있으며, 갯땅들 오른쪽 안개 피어오르는 나즈막한 구릉 뒤에 마을이 자리하고 있는 듯하다.
신언천이 안성천 아산호에 유입되는곳에 이른다. 합수지에 다리가 놓여 있으면 곧바로 맞은편 호안길로 건너갈 수 있는데 다리가 없으니 신언천 위쪽의 다리가 있는 곳까지 올라갔다가 다시 안성천 아산호 호안으로 내려와야 한다. 신언천을 따라 창용리와 구성리의 경계를 이루는 신언천 다리까지 올라간다. 앞쪽에는 고용산이 운무 속에서 잿빛 춤을 추고, 신언천을 경계로 창용1리와 구성2리가 마주하고 있다. 신언천 긴 제방길을 따라와 신언천 다리로 올라가서 운무에 쌓여 잿빛 풍경 속을 길게 걸어온 길을 뒤돌아본다. 풍경을 무화시킨 잿빛 운무는 사라지고 비는 멎는 듯 날이 맑아진다. 이제서야 갯땅들이 드넓은 투명함으로 환하게 빛난다. 수묵화가 밝은 수채화로 변하였다. 운무에 덮여 비 내리는 수묵화 풍경, 맑음이 찾아와 밝은 수채화 풍경, 자연이 선택한 이 두풍경을 모두 볼 수 있음에 감사한다. 뒤돌아서서 신언천 상류 방향을 바라보았다. 운무에 덮인 무화(無化)의 풍경 속에서 잿빛 실루엣으로 모습을 보여준 고용산이 검푸른 빛으로 제 모습을 나타내고 흰구름이 날고 있다. 그 아래 신언천 동쪽에 호지들이 펼쳐져 있고 영인면 창용1리 마을이 자리하고, 신언천 서쪽에는 구성1리, 2리 마을이 마주하고 있다. 마을들은 어깨동무를 하고 이어져 다정하다. 자연은 순간순간 변화한다. 봄비와 운무, 그들이 아쉬운 듯 길을 떠나고 맑은 빛이 자리를 찾아 들어왔다. 그 변화의 풍경은 제 독특한 모습의 아름다움으로 각각 가슴을 적셨다. 가슴을 열고 꿈꾸는 들길을 흘러왔다.
영인면 창용리에서 신언천 다리를 건너 구성리로 넘어갔다. 봄비는 완전히 멎고 해가 솟았다. 문정희 시인의 '봄비 온 후' 감각이 꼭 맞는 것 같다. 봄비 내린 뒤 산이 생기고 목련이 생기고 목련 속에 햇살이 앉아 있는 풍경, 봄비는 만물을 창조하여 세상의 참(眞)을 보여준다. "봄비 오신 뒤 산이 생기고/ 산속에/ 목련 생기고/ 목련속엔 아침햇살이 정갈하게 앉아있다/ 이상하지 오늘은 세상이 더 참해 보여" - 문정희(1947~)의 '봄비 온 후' 전문. 비가 내린 뒤 영인면 구성리 드넓은 간척농지는 더 참해 보이는 것인지 맑게 반짝인다. 이 간척농지는 새별이 반짝이는 농지인지 '새별'들이라 불리며, 윗새별과 아랫새별 지역이 있다고 한다. 구성리 지역은 예전에는 새벌포구를 중심으로 어업이 발달한 마을이었으나 지금은 간척농지에서 농사를 짓는 것이 주업이 되었다고 한다. 이 드넓은 간척농지를 아산호 방향으로 돌아가며 지난 시절 이곳의 풍경을 상상해 본다. 새벌포구, 고용산과 원랑산(월앙산), 귀산(歸山), 오교대(五敎臺) 등이 지난 시절의 영화를 자아낸다.
이 지역의 인물에 조선 초의 문신 김구(金鉤, 1381~1462)가 있다. 그는 단종 때에 일시적으로 관직을 놓고 아산시 영인면 구성1리 귀산(歸山)에 내려와 오교대(五敎臺)를 짓고 인재를 양성하였다. 그는 이곳에서 8절로 된 「오교대 팔경(五敎臺八景)」을 지었는데, 시제는 '고용산 명월(高聳山明月), 월앙산 청풍(月仰山淸風), 영인산 귀운(靈仁山歸雲), 구산촌 반석(龜山村盤石), 영해안 낙조(泳海岸落照), 공세지 모연(貢稅地暮烟), 백석포 귀범(白石浦歸帆), 신성포 조석(新星浦潮汐)' 등이다. 이 중 제4경인 '구산촌 반석(龜山村盤石)'은 구성1리 마을에 있는 '오교대(五敎臺) 반석(盤石)'을 이르는데, 현재 오교대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지만 그 반석(盤石)은 남아 있다.(디지털아산문화대전 참조) 구성리 지역의 아름다운 인물이 구성리를 더욱 아름답게 한다. 구성리에는 김구의 묘소가 이장되어 있으며, 을사오적의 주역인 이완용의 조부와 부친 묘소가 있다고 한다.
아산취수장을 돌아나가면 안성천 아산호를 가까이서 만나게 된다. 안성천 아산호의 아름다움을 따라서 호안길은 직선으로 아산방조제까지 이어지는데, 서해랑길은 이 호안길을 따라 구성리 지역을 통과하여 백석포리로 넘어간다. 서해선 홍성~송산 복선전철 구간 중 경기 평택과 충남 아산을 연결하는 5.9km 아산고가교가 안성천 아산호(牙山湖)를 건너서 백석포리 간석지들 위를 가로지른다. 서해랑길은 그 아래를 지나서 지금까지 동행한 안성천 아산호와 작별하고 제방 안쪽 백석포리 간석지들로 나아간다. 영인면(靈仁面)의 지명을 유래한 영인산(靈仁山)과 채석장 상처가 남아 있는 입암산(笠岩山)이 남쪽에서 동서(東西) 양쪽에 솟아 있다. 그리고 입암산 서쪽 나즈막한 대내산 위에 공세리 성당이 아산만에 접해 있는 것이 가늠된다.
백석포리 간석지들을 지나며 백석포구가 어디쯤일까 추정해 보지만 가늠할 수 없다. ‘백석포리’라는 지명은 마을에 흰돌이 많아 ‘백석포(白石浦)’라 불리던 것에서 유래하였다고 한다. 그렇다면 백석포구는 현재 백석포리 마을과 그리 멀지는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백석포 마을은 동학농민군을 진압하기 위해 조선 정부가 출병을 요청한 청나라 군대 2천 8백여 명이 1894년 6월 9일부터 44일간 머물렀던 곳이다. 일본군은 청일전쟁이 발발한 풍도해전과 성환전투에서 승리한 뒤 청군 상륙지인 백석포에서 승전행사를 치르고 마을 들녘에 승전비를 세웠다고 하는데 해방 직후에 파괴되었다고 한다. 이 역사적인 장소 백석포리를 지난다.
백석포리를 빛나게 하는 것은 조선 인조 때의 문신 이민구(李敏求, 1589~1670)가 백석포를 노래한 '백석어촌(白石漁村)'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는 병자호란 때 왕을 모시는 소임을 다하지 못한 죄로 아산에 유배되었을 때 백석포 사람들의 삶의 모습을 5언 40구의 '백석어촌(白石漁村)'에 담아냈다. 백석포에서 남자는 고기 잡으러 바다에 나가고 여자는 시장에서 장사하며, 어린 아이들도 갯벌에서 새우를 잡아 생업에 보태는 등 곤궁한 백성의 삶을 그리고 있다.(디지털아산문화대전 참조)
平湖控西海。地迥洲渚長。평온한 호수는 서해로 이어지고, 저 멀리 모래톱이 길게 뻗어 있네 瀰漫斥鹵場。自古耕鑿妨。아득히 펼쳐진 소금 땅, 예부터 농사에 방해되었지 有山蟠浦口。隱若龜尾藏。산이 포구에 서려 있으니, 마치 거북이 꼬리 감춘 듯 숨어 있네 漁屋類蜂戶。櫛櫛枕連岡。어부의 집들이 벌집처럼, 이어진 등성이에 빽빽하게 늘어섰네 巷陌分向背。門戶異陰陽。길 따라 향배 나뉘어, 남향집도 있고 북향집도 있구나 晝夜再上潮。舴艋隨風揚。낮과 밤에 두 번 밀물 들어와, 배들이 바람 따라 드나드니 牙檣竝茅棟。綁編繫籬傍。상아 돛대와 띠풀 뜸이, 울타리 옆에 밧줄로 매여 있네 朝晡煙在川。酒熟篷底香。아침과 저녁으로 시내에 안개 자욱하고, 술 익어 뜸 아래 향기롭다 生涯寄波濤。巨聲為倉箱。생계를 파도에 맡겼으니, 바다가 곧 창고라네 丈夫半浮居。婦女實行商。사내들 반생을 배 위에서 지내고, 아낙들 행상에 나서니 魚腥走遠市。頂戴日奔忙。비린 생선을 먼 저자에 내다 파느라, 머리에 이고 날마다 바삐 돌아다니지 赤身五歲兒。不知室處涼。벌거벗은 다섯 살 꼬마는, 집안이 추워도 아랑곳하지 않고 觸熱拾蝦蟹。泥水猶康莊。땡볕 아래 새우와 게 잡느라, 갯벌을 큰 길처럼 누비네 操舟復幾時。大小俱肯堂。배 저어볼 날 다시 언제일까, 크든 작든 모두 가업 계승이네 山林跡獸蹄。列肆謹裝囊。숲에서는 짐승 발자국 뒤쫓고, 늘어선 가게에서는 행장 보따리 삼가네 四民各劬勞。萬貨通農桑。백성들 저마다 수고롭게 일하며, 온갖 재화가 농상과 유통되네 物理麻可齊。貴在事天常。사물의 이치 거의 비슷하니, 상도를 지키는 게 중요하지 吾衰苦漂泊。拙分甘秕糠。노쇠한 이 몸 괴롭게 떠도나니, 못난 분수에 거친 음식도 달기만 한데 臨盤愧訂飯。素餐中黯傷。소반 마주하니 잘 차린 음식에 부끄럽고, 밥만 축내니 마음 아프다 嗟嗟將奚適。終老蛟蜃鄉。아아 장차 어디로 갈까, 끝내 바닷가에서 늙으리라. - 이민구의 '백석 어촌에서(白石漁村)'
그리고 근래에 들어 백석포를 칭송한 '백석포 노래'가 있어 백석포는 더욱 사랑스러운 곳이다. "월랑산 한 줄기 서쪽으로 뻗어내려/ 아산만 포구에 이르러 머문 이 곳/ 하얀 돌이 자리잡이 흰돌이라 불리더니/ 호호(皓皓)한 뜻 이어받아 백석포가 되었네// 방죽 안팍 고잔 샘골 드넓은 들녘에/ 메마른 가뭄에 흉년이 들던 때에도/ 서해안 물굽이에 어선(漁船)들이 드나들어/ 풍요로운 삶의 터진 백석포는 활기찼네// 아산만 방조제에 민물이 질펀하고/ 문전옥답 가로질러 차도가 뻗어 있네/ 발전하는 주위 환경 나날이 달라져도/ 해맑은 그 기상(氣像) 백석포가 완연하네." - 정홍실 지음
백석포2리 경로당 앞을 거쳐 아산천변으로 나와 '아산호로'로 올라간다. 영인면 백석포리에서 아산호로의 주천교를 건너 지금까지 걸어온 영인면 지역과 헤어져 인주면 모원리로 넘어간다. ‘모원(牟元)’은 벌판에 새로 둑을 막고 마을을 이루었으므로 ‘발언’이라 부르던 것이 변하여 ‘보리원’(보련) 또는 ‘모원’이 되었다고 한다. 모원리 들녘에서 영인산은 더욱 가까워졌고 입암산은 코앞이며 대내산의 공세리 성당의 십자탑이 시야에 들어온다. 모원리 안논들로 나갔다. 맞은편은 월선리 지역이고 그 오른쪽 입암산 자락에는 피나클랜드 수목원이 있을 것이다. 모원리 안논들 농로를 따라 공세리 방향으로 가는데 전망루가 나온다. 전망루에 올라가서 아산시 영인면과 인주면 지역을 조망해 보기로 한다. 일행들은 앞서가고 혼자 전망루로 올라간다. 문정희 시인의 '살아 있다는 것은'처럼 파도처럼 끝없이 몸을 뒤채고, 뒤채며 리듬을 일으키고 싶다. 암각화를 새기듯 쉬지 않고 바위에 흰 물결로 철썩이고 싶다. 그리하여 순간마다 환상하고 싶다.
살아 있다는 것은/ 파도처럼 끝없이 몸을 뒤집는 것이다/ 내가 나를 사랑하기 위해 몸을 뒤집을 때마다/ 악기처럼 리듬이 태어나는 것이다// 살아 있다는 것은 암각화를 새기는 것이다/ 그것이 대단한 창조인 양 눈이 머는 것이다/ 바람에 온몸을 부딪치며/ 쉬지 않고 바위에게 흰 손을 내미는 것이다/ 할랑이는 지느러미가 되는 것이다// 살아 있다는 것은/ 순간마다 착각의 비늘이 돋는 것이다 - 문정희(1947~)의 '살아 있다는 것은' 전문
2.탐방 과정
전체 탐방 거리 : 18.3km 중 12.7km
전체 소요 시간 : 4시간 45분 중 3시간 16분
경기도 평택시 팽성읍 노양리 구룡교 북단 아래의 정자 옆에 서해랑길 85코스 안내판과 자전거 거치대가 설치되어 있다. 정자에 '山高水長' 현판이 붙어 있다. 이곳에서 서해랑길 84코스 탐방을 역방향으로 출발하여 북쪽의 구룡교 방향으로 올라간다.
'山高水長(산고수장)'은 송나라의 범중엄이 후한(後漢) 때의 은사(隱士)인 엄광(嚴光)을 기리며 한 말로, 산처럼 높고 물처럼 장구하다는 뜻으로 고결한 사람의 인품이 오래도록 존경받는다는 뜻이라고 한다. "구름 낀 산이 푸르고 강물은 깊고 넓도다. 선생의 유풍은 산처럼 높고 저 물처럼 장구하리라.(雲山蒼蒼 江水泱泱 先生之風 山高水長 운산창창 강수앙앙 선생지풍 산고수장)
서해랑길 84코스 역방향은 '노양리마을회관 버스정류장 - 구룡교(0.3km) - 쌀조개섬(2.8km) - 아산호(10.3km) - 공세정미소(13.8km) - 공세리성당 입구(14.3km) - 신성리마을회관(15.8km) - 84코스 시점(17.7km), 소요시간 6시간, 난도 쉬움이다.
서해랑길 85코스 안내도와 함께 서해랑길 84코스 탐방을 역방향으로 출발하며 기념한다.
서해랑길 85코스 시작 지점 쉼터정자에 '미생지신(尾生之信)' 현판이 걸려 있고 기둥에 서해랑길 시작점 표지판이 붙어 있다.
'미생지신(尾生之信)'은 신의가 두터운 것을 뜻하거나, 우직하여 융통성이 없음을 뜻하는 말로 각각 상반된 뜻을 보여 준다. 춘추시대(春秋時代) 노(魯)나라 사람 미생(尾生)이 여인과 다리 밑에서 만나기로 한 약속을 지키기 위해 장대비가 쏟아져 개울물이 넘쳐도 다리 기둥을 부둥켜안고 여인을 기다리다가 물에 떠내려가 죽었다고 한다. 미생은 신의 있는 사람의 본보기일까? 약속만을 굳게 지키는 융통성이 없는 사람일까? 믿음을 우직하게 지켜야 하느냐, 상황에 따라 융통성 있게 대처하느냐는 사람의 가치관에 따라 달라질 수 있겠지만, 믿음과 신뢰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둔포천의 구룡교로 올라가다가 출발지점을 뒤돌아본다. 다음 번에는 이곳에서 85코스 탐방길을 따라 북쪽으로 올라갈 것이다.
경기도 평택시(平澤市) 팽성읍(彭城邑) 노양리(老陽里)는 고려시대에 경양현(慶陽縣) 지역으로 하양창이 있던 마을이다. 노양이라는 지명은 1914년 행정구역을 개편하면서 노하의 ‘노’와 경양의 ‘양’이 통합되면서 유래되었다. 계양은 경양의 별칭으로 근대 이전에는 경양포 앞 해구(海口)를 계양해구로 불렀다. - 평택시청
둔포천변의 계양로를 따라오르다가 오른쪽 둔포천의 구룡교를 건넌다.
팽성읍(彭城邑)은 원래 고구려 때 팽성군 지역이며 조선 초기에 평택의 치소였다. 1914년 3월 1일 부령 제111호에 의한 부군면 통폐합시 평택군 읍내면 동면·서면을 병합하여 부용면이라 하고 평택군 서면·남면·경양면·동면 일부를 병합하여 서면이라 하였으나 1937년 행정구역 개편시 팽성면이라 불렀다. 1972년 9월 1일 평택군 조례 제330호로 평택군 안정출장소가 설치되었고 1979년 5월 1일 대통령령 제9409호로 팽성면이 팽성읍으로 승격되었으며 1980년 2월 5일 평택군 안정출장소는 팽성읍 안정출장소로 변경되었다. 명칭 유래는 옛날 팽성군 지역임을 따라 이 고장의 전통성과 역사성을 전승하고자 팽성이라 하였다. - 평택시청
경기도 평택시 팽성읍 노양리에서 둔포천의 구룡교를 건너 충남 아산시 둔포면 신남리로 넘어간다.
구룡교 위에서 둔포천이 안성천에 합류하는 곳을 내려본다. 서해랑길은 왼쪽 둑방길을 따라가서 안성천변길을 따라간다.
‘둔포천(屯浦川)’ 명칭은 둔포(屯浦)에서 유래하였다. 여러 고지도에 이 명칭이 보인다. 『1872년 지방지도』 아산현의 삼북면에는 ‘둔포장동북거삼십리(屯浦場東北距三十里)’라는 기록이 있다. 이 기록에서도 볼 수 있듯이 둔포리는 아산현 삼북면에 속해 있었는데, 예전에 소금을 매매하던 곳으로 소금배들이 많이 드나들었던 데서 ‘둔포’, ‘둔포장’이라는 이름이 생겼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둔포면이 되었다. 『조선지형도』에 둔포천 명칭이 보인다. 둔포천은 충청남도 아산시 음봉면 남쪽의 연암산[294m] 북사면 골짜기에서 발원한다. 둔포천은 구불구불 북쪽으로 흐르면서 산전천, 관대천, 군계천을 받아들인다. 수지상(樹枝狀)[여러 가닥으로 벋어 나뭇가지와 같이 된 형상]을 이루었던 중상류의 지류 하천이 모두 이곳에서 합쳐지면서 하천의 유량도 훨씬 많아진다. 본류를 이루게 된 둔포천은 서쪽으로 드넓은 꽹가리들과 중심리들을 가로질러 경기도 안성천으로 유입한다. 둔포천은 유로 연장 13.4㎞, 유역 면적 86.2㎢의 지방하천으로, 수지상(樹枝狀)으로 이루어져 있어 그 유역이 매우 넓다. 그 규모가 아산시에서는 곡교천과 안양천에 이어 세 번째다. 의식천·산전천·관대천·군계천·면포천이 대표적인 지류 하천이다. 유역에 농경지가 많고, 둔포면 운용리·둔포리, 음봉면 신휴리에 걸쳐 대규모 아산테크노밸리가 입지하고 있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구룡교를 건너 충남 아산시 둔포면 신남리로 넘어가 오른쪽으로 꺾어 둑방길을 따라간다.
구룡교에서 걸어온 길을 뒤돌아본다. 왼쪽 쉼터정자에서 출발하여 계양로를 따라오다가 구룡교를 건너오고 있다.
구룡교 위쪽에 국도 제43호선 세종평택로의 신둔포천교가 지나고, 둔포천 위 왼쪽에 팽성읍 노양1리 마을이 보인다.
둔포천 둑방길을 따라 내려간다. 오른쪽에서 둔포천이 안성천에 합류한다. 왼쪽의 들은 보리원들이며 비료공장이 있다.
둔포천이 오른쪽에서 안성천에 합류한다. 서해랑길 84코스 역방향 출발지는 둔포천 오른쪽 위에 있다. 지방도 제313호선 광덕계양로의 평택국제대교가 안성천을 가로지르고 있다.
평택국제대교는 경기도 평택시 현덕면과 팽성읍을 잇는 길이 1.35km, 왕복 4차선 다리다. 2013년 6월에 착공하였고 2017년 8월 26일에 붕괴사고가 발생했다. 2018년 3월 재공사에 들어가 2020년 1월 22일 개통하였다. - 위키백과
안성천 둑방길을 따라 비료 생산 업체인 '에코그린영농조합법인' 공장 앞을 거쳐 왔다.
둔포면 신남리 보리원들을 지나간다. 오른쪽은 아산호, 앞에는 농약과 비료를 생산하는 '천년바이오농업회사법인' 공장이 있다.
충남 아산시 둔포면 신남리(新南里)는 신남1리, 신남2리, 신남3리, 신남4리, 신남5리의 5개 행정리로 이루어졌으며 둔포면에서 서북쪽 끝에 있는 마을로 명품 쌀인 아산맑은쌀의 주산지 중 한 곳이다. 신남리는 1914년 신흥포, 남창리, 명포리, 신흥리, 냉정리, 신리를 병합할 때 신리와 남창리의 이름을 따서 ‘신남리’라 이름 붙였다. 신남리는 최근 청동기시대 유적과 유물이 발견되어 선사시대부터 사람이 살았음이 확인된다. 본래 아산군 삼북면 지역인데,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신흥포, 남창리, 명포리, 신흥리, 냉정리, 신리를 병합하여 신남리라 하고 아산군 둔포면에 편입되었다. 1995년 1월 1일 행정구역 조정으로 아산군과 온양시를 통합하여 아산시로 개편되면서 아산시 둔포면 신남리가 되었다. 신남리의 북동쪽은 명포천과 용당산 남서쪽 산줄기를 경계로 신법리와 길에 맞닿아 있으며, 동남쪽은 대략 용당산 남쪽 산줄기 위의 윤보선로를 기준으로 신항리와 구분된다. 남서쪽은 낮은 산줄기가 영인면 창용리, 영인면 신봉리와 경계를 이루며, 서쪽 일부는 들 가운데에서 영인면 창용리와 닿아 있다. 북서쪽은 아산호이고 북쪽은 명포천의 둔포천 합류 지점부터 하구까지의 둔포천을 경계로 평택시 팽성읍 노양리와 마주본다. 둔포천의 지천인 명포천은 신남리 마을 동남부에서 시작되어 북쪽으로 흘러 둔포천에 합류한다. 예전에는 커다란 갯고랑[갯골]으로 갯물[조수]을 이용해서 배가 드나들었다고 한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안성천 하구를 가로막은 아산만방조제에 의해 아산호가 드넓게 조성되었다. 멀리 서해선의 아산고가교가 아산호를 가로지른다.
아산만방조제는 서해 아산만으로 흘러들며 충남 아산과 경기 평택의 경계를 이루는 안성천 하구에 1974년에 축조된 방조제이다. 본래 축조 목적은 간척 사업을 통해 농경지를 늘리고 홍수 및 염해 피해를 줄이는 것이었지만, 경관이 아름다워 1977년 국민관광지로 지정되었다. 이 방조제는 서쪽에 서해 바다, 동쪽에 아산호가 위치하여 방조제 위에 건설된 국도 39호선을 따라 바다와 호수를 동시에 볼 수 있는 드라이브의 낭만을 즐길 수 있다. 1980~90년대에는 수학여행 단골 코스로 각광받기도 했으며 일몰 때 노을이 특히 아름답고 바다낚시와 민물낚시가 모두 가능하여 많은 관광객이 찾아오고 있다. 또한 조수간만의 차가 최대 9.6m로 세계적인 수준이라 썰물 때 드러나는 넓은 갯벌도 장관이다. 최근에는 배수갑문에 대형 수조창을 설치해 통선문을 가동할 때 어류가 이동하는 모습을 관찰할 수 있게 되었다. 이 외에도 배수갑문 관리동에는 공원, 전망대, 전시관 등의 시설이 있다. 이곳을 둘러보기 위해서는 주차장, 배수갑문, 숙박시설, 음식점, 편의점 등이 있는 북쪽의 경기 평택호관광단지를 이용하는 것이 편리하다. 주변에는 아산호의 쌀조개섬, 공세리성당, 삽교천방조제, 평택호예술공원 등이 있어 연계하여 관광하기 좋다. - 두루누비
서해랑길은 남창원장들을 왼쪽으로 돌아서 둔포면 신남리에서 건너편의 영인면 창용리로 넘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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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택국제대교와 걸어온 둑방길이 한눈에 들어온다. 바로 앞의 들은 둔포면 신남리 '남창원장들'이라 이르는 것 같다.
신남리에는 남창, 새남창, 청석골, 양지말, 신흥포, 명개, 장터, 냉정 등의 자연마을이 있다. 둔포면의 15개 법정리 중에서 가장 면적이 넓으며, 가운데에 있는 신남1리와 신남2리의 마을 중심 지역을 기준으로 북서쪽은 대부분 들판이고, 동남쪽은 야산 구릉지와 골에 마을과 논밭, 공장 등이 섞여 있다. 신남리를 대략 3등분할 때 남쪽 1/3 정도 위치에서 남서-북동 방향으로 신설된 국도 34호선[장영실로]이 통과하고 북쪽 1/3쯤의 위치에서 아산호로가 역시 남서-북동 방향으로 지나고 있다. 길 북쪽에 남창초등학교와 신남보건진료소가 있다. 신남리 지역의 논은 경지 정리가 잘 되어 있고, 1973년 아산만방조제 준공 이후 가뭄 걱정 없이 벼농사가 이루어지고 있다. 아산의 명품 쌀인 아산맑은쌀의 주산지 중 한 곳이다. 마을의 도로 주변에도 공장이 있지만, 특히 신남5리에는 구릉[야산]마다 공장이 들어섰을 만큼 곳곳에 다양한 공장이 자리 잡고 있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남창원장들 앞에서 북동쪽으로 둔포면 신남3리, 4리 일대를 바라본다. 왼쪽 뒤에 국도 제43호선 세종평택로가 지나고 있다.
아산시 둔포면(屯浦面)은 아산시 북동쪽 끝에 있으며, 예부터 아산시 북동부의 관문 역할을 담당하고 있어 조선시대에도 충청수영로가 통과하였다. 오늘날에도 국도 34호선과 국도 43호선, 국도 45호선이 교차하고 경부고속철도가 지나는 등 교통이 매우 편리하여 아산시 지역 북동부의 관문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둔포면’은 18세기 경 포구가 형성된 뒤 개항 이후 근대 시기에 크게 번성하여 서해안 해운의 중심이 된 둔포(屯浦)에서 비롯된 이름이다. 조선 후기 둔포천 중하류 포구 위치 일대에 둔전리 마을이 있었는데 이곳에 생긴 포구여서 둔포(屯浦)라 하였고 둔포리와 둔포면 명칭의 유래가 되었다. ‘둔포’의 ‘둔(屯)’은 우리말의 듬, 둠, 뜸을 나타내는 경우가 많으므로 ‘둔포’는 ‘둠개-갯말’의 의미로 풀이할 수 있다. 둔포면은 조선 시대 아산현에 속하였고 1895년(고종 32) 지방관제 개정 후 아산군 삼북면(三北面) 지역에 편입되었다.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일북면(一北面)의 백양면(白楊面)과 아산군 영역 내 월경지였던 천안군(天安郡) 모산면의 18개 리를 병합하여 둔포면이라 하여 아산군에 편입되었다. 1995년 1월 1일 행정구역 조정으로 아산군과 온양시를 통합하여 아산시로 개편되면서 아산시 둔포면이 되었다. 둔포면은 아산시 북동쪽에 있다. 면 전체에 차령산맥의 여맥에 속하는 낮은 구릉성 산지와 평야가 펼쳐져 있다. 지질은 암반층도 거의 나타나지 않고 황토흙이 널리 펼쳐져 있다. 둔포면은 농업을 하기에 강수량이 적당하며 1944년 준공된 봉재저수지와 아산만방조제의 건설로 아산호 수자원을 이용할 수 있어 편리하다. 둔포리 서쪽 경계에서 둔포천이 북쪽으로 흐르고, 북쪽 경계에서는 군계천이 서쪽으로 흘러 둔포천에 합류한다. 1973년의 아산만방조제 축조 전까지는 둔포천을 따라 갯물[조수]이 드나들었으며, 둔포천 중류에 있는 둔포리 주변은 대부분 갯벌이었고 곳곳에 갯고랑이 형성되어 있었다. 둔포리 남부 지역에는 용남산이 있으며 북동쪽으로 연결된 나지막한 산들이 구릉을 이루고 있다. 해발고도는 높지 않지만 주변이 갯벌이나 들판 등 저지대여서 상대적으로 높게 느껴지며 마을이 형성되기 좋은 지형을 갖추었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신남2방수제 제방길을 따라 수로를 오른쪽으로 돌아가며, 오른쪽부터 왼쪽으로 둔포면 신남2리, 3리 일대를 바라본다.
둔포면은 한반도의 중앙부 및 충청남도의 최북단에 위치하여, 수도권에 인접해 있고 동쪽은 천안시 성환읍, 남쪽은 음봉면, 서쪽은 영인면, 북쪽은 경기도 평택시 팽성읍과 맞닿아 있다. 아산 북동부의 관문 역할을 담당하였으며 국도 34호선과 국도 43호선, 국도 45호선, 경부고속철도가 통과하고 있다. 행정구역으로는 둔포리, 송용리, 시포리, 신법리, 신남리, 신항리, 관대리, 산전리, 신양리, 봉재리, 운교리, 석곡리, 운용리, 신왕리, 염작리 등 15개 법정리와 40개 행정리로 구성되어 있다. 고려·조선 시대의 시포, 18세기 이후의 둔포를 중심으로 아산만방조제 축조[1973년] 이전까지는 배를 이용한 해상 유통의 주요 거점으로 쌀, 소금, 새우젓, 생선과 각종 물자 교역이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안성천의 지천으로 갯물[조수]과 배가 드나들었던 둔포천의 하류 일대는 간척사업을 통해 넓은 들이 조성되어 있다. 평야 및 구릉지대에는 미곡을 중심으로 과수, 낙농이 발달하였다. 농촌 지역이었던 둔포면은 1990년대부터 수도권의 공장이 이전하거나 새로운 공장이 신설되면서 점차 소규모 공단이 형성되기 시작하였다. 현재는 둔포면 동부의 석곡리 지역을 중심으로 2006년부터 둔포리, 운용리, 석곡리를 중심으로 아산테크노밸리 조성사업을 진행하였으며, 석곡리, 염작리, 음봉면 신휴리 일대에 아산제2테크노밸리가 조성되어 첨단산업과 농업이 공존하는 활기찬 변화가 이루어지는 지역이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건너편 왼쪽은 둔포면 신남리 일대, 그 오른쪽은 영인면 창용리 일대 지역이다. 수로를 왼쪽으로 돌아 아산호 방향으로 나간다.
오른쪽 신남2방수제 제방길에서 오른쪽으로 돌아 왼쪽 신남1방수제 제방길로 이어가 아산호로 나간다. 맞은편 평택시 현덕면 지역 왼쪽에 마안산, 오른쪽에 고등산이 보인다.
신남2방수제 제방길을 돌아서 신남1방수제 제방길을 따라 아산호로 나가서 왼쪽으로 이어지는 아산호 제방길을 따라 남쪽으로 내려간다. 맞은편에 평택시 고등산, 오른쪽에 평택국제대교가 보인다.
신남1방수제 제방길에서 왼쪽으로 돌아 아산호 제방길을 따라 남쪽으로 내려간다. 건너편에 마안산과 아산고가교가 보인다.
신남1수방제 끝에서 안성천 상류를 올려본다. 안성천 아산호를 가로지르는 평택국제대교, 둔포천, 걸어온 둑방길과 바로 앞 신남2방수제가 한눈에 들어온다. 안성천은 아산만방조제에 의해 갇혀서 아산호가 형성되었다.
경기도 안성시 고삼면·보개면 일대에서 발원하여 평택시를 지나 아산만으로 흘러드는 안성천(安城川)은 길이 76㎞, 유역면적 1,722㎢. 옛날에는 안성남천(安城南川)이라 하였다. 하구 근처는 우리 나라에서 조차가 가장 큰 곳 중의 하나로 대조시 평균조차 8.5m에 달한다. 중요한 지류는 진위천(振威川)·입장천(笠場川)·한천(漢川)·청룡천(靑龍川)·오산천(烏山川)·도대천(道垈川)·황구지천(黃口只川) 등이다. 안성천의 본류와 지류가 합류하는 곳 근처에는 넓은 충적평야가 형성되어 있다. 이 하성퇴적평야(河成堆積平野)를 안성평야라 한다. 안성평야는 대부분 충적토로 이루어진 평야로 예로부터 토질이 비옥하여 김포평야와 함께 경기미(京畿米)의 주산지를 이루고 있다. 안성천 하구에 아산만방조제가 들어설 때까지는 하구로부터 16.5㎞ 떨어진 평택시 팽성읍 신호리까지 조류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나타난다. 아산만방조제가 완공된 뒤 많은 간석지가 간척되어 농경지가 확대되었다. 안성천 상류인 안성시 금광면과 고삼면에는1956년에 금광저수지가, 1958년에 고삼저수지가 축조되었다.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아산호가 조성되면서 생겨난 쌀조개섬이 앞에 길게 누워 있고 건너편 맨 왼쪽에 마안산, 오른쪽에 고등산이 솟아 있다.
경기도 평택시 현덕면 신왕리의 마안산은 아산호에 인접한 낮은 산이다. 정상 높이는 해발 126m이고, 등산로는 3.4km로, 왕복 1시간 정도 걷는 코스이다. 가는 길이 가파르지 않아 쉽게 산을 오르내릴 수 있어서 편한 마음으로 갈 수 있다. 가는 길에 운동기구가 있으며, 종종 넓게 펼쳐진 아산호를 살짝살짝 볼 수 있다. 정상에 올라서면 남쪽으로 아산호의 멋진 풍광을 볼 수 있다. 인근에 카페가 있어 차 한잔하면서 쉬어가도 좋다. - 두루누비
쌀조개섬이 앞쪽에 길게 누워 있고, 맨 오른쪽에 마안산, 중앙 맨 뒤에 서해선의 아산고가교가 보인다.
충남 아산시 영인면 창용리 쌀조개섬은 안성천 아산호에 형성된 섬이다. 원래는 갯벌이었으나 1973년에 아산만방조제가 건설되면서 민물 환경으로 바뀌면서 섬으로 변화하였는데, 그 모양이 쌀조개를 닮았다 하여 쌀조개섬이라 부르고 있다. 이러한 환경 변화에 따라 원래 어업이 이루어지던 이곳은 농업 위주로 바뀌었으며, 하천환경 정비사업과 쌀조개섬 관광지 조성을 위한 수변 생태공원 조성사업이 예정되어 있다. 또한 지금은 아산호에서 낚시를 즐기려는 사람들과 아산호를 따라 자전거를 타는 사람들이 찾고 있다. 인근 관광지로는 아산만방조제, 삽교호방조제, 아산스파비스 등이 있다. - 두루누비
아산시 영인면 창용리로 넘어와 아산호 제방길을 따라간다. 오른쪽 쌀조개섬을 잇는 도로가 중앙 뒤에 보인다.
영인면(靈仁面) 창용리(蒼龍里)는 창용1리~4리로 이루어졌으며 영인면소재지에서 북쪽으로 8~9㎞ 떨어져 있는 전통적인 농촌마을로 마을 앞에 아산만 갯벌 60여만 평의 간척지가 펼쳐져 있다. ‘창용리’라는 명칭은 1914년 창정리와 용동리를 병합할 때 두 마을의 이름을 하나씩 따서 붙인 것이다. 창용리는 조선시대 아산현 이북면 지역이었는데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창정리, 용동리[당개], 용서리[구렁말]를 병합하여 창용리라 하고 아산군 영인면에 편입되었다. 1995년 1월 1일 행정구역 조정으로 아산군과 온양시가 통합되어 아산시 영인면 창용리가 되었다. 창용리는 마을 동서로 길게 아산호로가 지나고 아산호로에서 이어져 남북으로 뻗은 토정로가 국도 34호선과 이어지는 교통이 편리한 마을로서 낮은 구릉지와 농경지로 이루어져 있다. 또한 간척사업으로 확보된 너른 농지가 북쪽으로 아산호까지 펼쳐져 있다. 마을 동쪽으로 둔포면 신남리, 남으로 영인면 신봉리, 서쪽으로 구성리, 북쪽은 아산호를 사이로 경기도 평택시와 접해 있는 충남 북부 도계 마을이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아산호 제방길을 따라가며 창용3리와 4리 일대를 살핀다. 왼쪽 뒤에 삼양사 건물, 오른쪽 뒤에 대선제분 건물이 보인다.
창용리(蒼龍里)는 1리~4리의 4개 행정리로 이루어졌으며 창정리, 오룡골, 구룡말, 당개, 용골[개척단], 아랫뜸, 윗뜸, 매땅[마산]의 자연마을이 있다. 창정리는 현재의 창용1리이고, 창용2리는 오룡골, 구룡말[용서리], 당개[용동리] 등 3개 자연마을로 구성되어 있으며 창용3리는 용골[개척단]이라고 하며, 창용4리는 아랫뜸, 윗뜸, 매땅[마산]이라고도 한다. 당개는 아산만방조제가 생기기 전에는 ‘사월 당개’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숭어, 강다리 등의 어획량이 많았던 어촌마을이었다. 조선시대 진상용 숭어를 기르던 약 2,000여 평[6,611m²]의 양어장을 아산현감 토정 이지함이 메워서 농지로 전용하여 어민들에게 나누어 주었다고 한다. 또한 보부상들이 끌배를 이용하여 인천 등지로 실어나를 쌀을 쌓아두었던 창고가 있었다. 용골은 1956년 12월 난민 250여 가구를 정착시켜 마을이 형성되었고, 이들로 하여금 개척단을 구성하여 아산만의 갯벌 60여만 평[1,983,471m²]을 간척하여 분양하였다. 이러한 연유로 마을을 ‘개척단’이라고도 부른다. 또한 마산은 개척단 소속 난민 50여 가구가 이주하여 생활하면서 원주민 13세대와 통합하여 1970년에 신봉4리로 하였다가 1994년 7월에 창용4리로 개편되었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쌀조개섬이 앞에 누워 있고 맨 오른쪽에 쌀조개섬과 이어지는 도로가 있다. 건너편 중앙에 평택시 고등산이 솟아 있다.
‘쌀조개섬’이란 명칭은 쌀조개에서 유래하였다. 쌀조개섬의 윤곽이 쌀조개와 닮았기 때문이다. 보통 우리나라의 지명은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거의 한자화하였는데, 쌀조개섬이 지금까지 한글 이름으로 존속하는 것은 생성의 역사가 짧기 때문이다. 충청남도 아산시 영인면 일대의 안성천에는 한때 갯벌이 광범위하게 형성되어 있었다. 우리나라에서 갯벌은 보통 큰 하천이 바다로 흘러드는 서해안에 잘 발달한다. 토사의 유입이 많고 조수 간만의 차가 큰 지역이기 때문이다. 아산시 아산만과 안성천이 만나는 지역도 이런 조건이 잘 갖추어져 있다. 갯벌은 만조 시에는 물에 잠겼다가 간조 시에는 육지가 되는 것이 특징이다. 일제강점기 때 제작된 『조선지형도』는 수면 밖으로 드러난 안성천 하류의 갯벌 모습을 잘 보여 준다. 그런데 1973년에 안성천 하류에 아산만방조제가 건설되면서 방조제 안쪽은 항시 물이 저수되어 있는 호수로 변했고 ‘아산호(牙山湖)’라는 새로운 이름이 붙여졌다. 그리고 아산호로 인해 그동안 있던 갯벌 대부분은 영구히 수면 아래로 사라지고 일부만 수면 위로 드러나게 되었다. 수면 위로 드러나 갯벌이 농경지로 개간된 땅이 바로 쌀조개섬이다. 충청남도 아산시 영인면 창용리 주민들의 일상은 아산만방조제 건설로 인해 포구에서의 활기 넘치는 어업 활동 대신 전업농으로 바뀌는 등의 변화가 생겼다. 섬의 규모는 24만㎡[7만 2600평]로, 섬 전체가 경지화되어 논으로 이용되고 있다. 육지와 연결되는 자동차 도로가 놓여 있다. 아산시에는 하천환경 정비사업과 쌀조개섬 관광지 조성을 위한 수변 생태공원 조성사업이 예정되어 있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둔포면 신남리의 신남방수제 제방길을 따라 영인면 창용리로 넘어와 쌀조개섬 앞을 지나며 뒤돌아본다. 맨 왼쪽 뒤에 평택국제대교, 그 오른쪽 앞의 둔포천 구룡교가 가늠된다. 왼쪽 바로 앞에 쌀조개섬으로들어가는 도로가 있다.
아산시 영인면 창용리 구동들을 지난다. 중앙에 삼양사 아산공장, 오른쪽 뒤에 대선제분 아산공장이 있다. 서해랑길은 창룡방수제 제방길을 수로를 오른쪽으로 돌아 아산호 방향으로 이어간다.
창용리 구동들을 지나 창룡방수제 제방길을 따라 수로를 오른쪽으로 돌아왔다.
창룡방수제 제방길을 따라 수로를 오른쪽으로 돌아왔다. 맨 오른쪽 길가에 창룡2방수제 표석이 있다.
창룡방수제 제방길을 따라 아산호 방향으로 이어간다. 맨 오른쪽 뒤에 평택국제대교와 고등산, 맨 왼쪽 뒤에 마안산이 보인다.
오른쪽 제방길을 따라 아산호로 나간다. 왼쪽의 창용리 갯땅들 입구에 신백지구 수리시설 개보수 사업 공사 안내판이 있다.
아산호 제방으로 나왔다. 둔포천~아산만방조제 13km 구간의 안성천 하천의 환경정비사업 공사를 알리는 안내판이 세워져 있다. 앞에는 쌀조개섬, 왼쪽 뒤에 평택의 고등산, 그 오른쪽에 평택국제대교가 아산호를 가른다.
아산호(牙山湖)의 저수 용량은 225만 톤으로, 저수된 물을 평택에서는 농업용수로, 아산에서는 공업용수로 이용하고 있다. 충청남도는 서북부 지역의 항구적 가뭄을 해소하기 위해 2018년 상반기에 ‘아산호-삽교호-대호호 농촌용수이용체계 재편사업’을 착공하였다. 아산호-삽교호-대호호의 연결은 도내 서북부 지역 가뭄에 대한 항구적 대책의 일환으로, 정부 지원으로 한국농어촌공사의 지속적인 건의를 수용, 추진되고 있다. 2017년 7월 정부 추가 경정 예산에 기본조사 및 설계비 25억 원이 반영되면서 사업 추진이 확정되었고, 2018년 2월 27일에는 농림축산식품부에서 기본계획 수립을 완료했다. 기본계획은 담수호를 잇는 연결수로 13.6㎞, 수문 3개소와 물관리자동화시스템 구축에 총 898억 원의 사업비를 투입하여 2020년에 완료할 예정이다. 사업이 완료되면 아산호에서 삽교호로는 하루 최대 33만 톤, 삽교호에서 대호호로는 42만 톤의 용수를 공급할 수 있게 된다. 충청남도는 2018년 현재 160억 원의 사업비를 확보한 상태로, 사업 시행 예정자인 한국농어촌공사 충남지역본부에서 사업 시행계획 수립에 착수할 예정이다. 담수호나 저수지를 연결하는 수자원 사이 네트워크 구축은 효율적인 용수의 배분·공급을 통해 기후 변화에 대응하는 매우 효과적인 가뭄 대책이 될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이곳이 창용2리 당개 마을인 것 같다. 아산만방조제가 생기기 전에는 ‘사월 당개’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숭어, 강다리 등의 어획량이 많았던 어촌마을이었다고 하는데, 간척되어 갯땅들이라고 불리는 것 같다.
걸어온 창용리 지역을 뒤돌아본다. 앞의 갯땅들 지역은 창용2리, 왼쪽은 창용3리, 그 뒤쪽은 창용4리 지역인 것 같다.
창용리(蒼龍里)는 1리~4리의 4개 행정리로 이루어졌으며 창정리, 오룡골, 구룡말, 당개, 용골[개척단], 아랫뜸, 윗뜸, 매땅[마산]의 자연마을이 있다. 창정리는 현재의 창용1리이고, 창용2리는 오룡골, 구룡말[용서리], 당개[용동리] 등 3개 자연마을로 구성되어 있으며 창용3리는 용골[개척단]이라고 하며, 창용4리는 아랫뜸, 윗뜸, 매땅[마산]이라고도 한다. 당개는 아산만방조제가 생기기 전에는 ‘사월 당개’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숭어, 강다리 등의 어획량이 많았던 어촌마을이었다. 조선시대 진상용 숭어를 기르던 약 2,000여 평[6,611m²]의 양어장을 아산현감 토정 이지함이 메워서 농지로 전용하여 어민들에게 나누어 주었다고 한다. 또한 보부상들이 끌배를 이용하여 인천 등지로 실어나를 쌀을 쌓아두었던 창고가 있었다. 용골은 1956년 12월 난민 250여 가구를 정착시켜 마을이 형성되었고, 이들로 하여금 개척단을 구성하여 아산만의 갯벌 60여만 평[1,983,471m²]을 간척하여 분양하였다. 이러한 연유로 마을을 ‘개척단’이라고도 부른다. 또한 마산은 개척단 소속 난민 50여 가구가 이주하여 생활하면서 원주민 13세대와 통합하여 1970년에 신봉4리로 하였다가 1994년 7월에 창용4리로 개편되었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신남1방수제 제방길에서 아산호 제방길로 나와 제방길을 따라 맨 왼쪽 쌀조개섬 입구를 거쳐 맨 오른쪽 창룡방수제 제방길을 오른쪽으로 돌아 아산호 제방길로 나와 갯땅들 앞으로 이어왔다.
서해랑길은 오른쪽의 아산호 제방길을 따라 남쪽으로 내려간다. 앞의 넓은 간척농지는 창용2리 갯땅들이며 왼쪽 뒤에 구룡말과 그 뒤에 오룡골이 있을 것이다.
창용리 드넓은 간척농지 옆 아산호 호안길을 따라 왼쪽 뒤에 보이는 영인면 신화리 고용산 방향으로 이어간다.
안성천의 환경정비사업 공사가 진행 중이다. 아산호 호안(湖岸)길을 따라 영인면 구성리 지역으로 이어간다. 중앙 뒤에 서해선 복선전철 아산고가교가 아산호를 가로지르고 있다.
아산호 호안에서 아산호, 그리고 아산호를 가로지르는 서해선의 아산고가교를 살핀다. 왼쪽에 아산취수장 건물이 보인다.
충청남도 아산시 인주면 공세리와 경기도 평택시 현덕면 권관리 사이에 아산만과 안성천 하구를 가로지르는 아산만방조제가 건설되어 형성된 인공 담수호인 아산호(牙山湖)는 농업진흥공사[현재 한국농어촌공사]가 농업용수원을 조성하고 조수의 역류로 인한 염전의 피해를 줄이기 위해 충청남도 아산시와 경기도 평택시 사이의 아산만으로 흘러드는 안성천 하구에 건설한 방조제이다. 1973년 방조제 완공 이후 호수의 명칭은 ‘아산호’였으며 방조제 입구에 세워진 기념비에도 ‘아산호’라는 명칭이 새겨져 있다. 그러나 1990년 이후 아산호 관리를 한국농어촌공사 평택지사가 맡으면서부터 ‘평택호’를 임의로 사용하였고, 1994년 교통부 고시[1994-25호]로 관광지 명칭이 ‘아산호’에서 ‘평택호’로 고시된 이후 충청남도와 경기도에서 각각 다르게 불려 명칭 사용에 대한 지역적 논란이 있었다. 이에 따라 2010년 이명수 국회의원이 ‘아산호’와 관련하여 한국농어촌공사에 질의한 결과 "아산만에 방조제를 축조했기 때문에 사업계획 수립 당시부터 ‘아산호’, ‘아산방조제’라는 공식적인 명칭을 사용하게 됐고, 지금도 모든 업무에서 시설물 등록 명칭인 ‘아산호’로 사용하고 있다"는 답변을 받았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신언천이 아산호로 흘러들고 건너편 왼쪽에 아산취수장 건물, 중앙 뒤에 서해선의 아산고가교가 보인다.
서해랑길은 창용방수제 제방길을 따라 올라갔다가 신언천의 다리를 건너 신언천 건너편 농로를 따라 내려온다.
왼쪽 뒤에 영인면 신화리의 고용산, 오른쪽에 신언천이 아산호로 흘러간다. 창용방수제 제방길을 따라 올라간다.
영인면은 아산리, 상성리, 신현리, 월선리, 신운리, 백석포리, 와우리, 구성리, 창용리, 신봉리, 성내리, 신화리, 역리의 13개 법정리를 관할하고 있다. 교육기관으로 영인중학교와 영인초등학교, 신화초등학교가 있으며, 사회단체로는 아산종합사회복지관, 성모복지원, 피나클랜드 등이 있다. 영인면에는 대표적인 문화유산으로는 지방교육기관인 아산향교와 아산현 문루인 여민루, 개화기의 정치가 김옥균 선생의 유허 등 충청남도 지정 문화재 8점이 있으며 토정이지함 인화영모비와 조만영 영세불망비 등 비석이 26기, 열녀비각이 2개소, 임욱 영정각 등이 있다. 조선시대 아산현의 중심지였기 때문에 오랜 전통과 문화유산이 남아 있고, 1980년대 초까지 오일장이 형성되어 성시를 이루었던 지역이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왼쪽은 영인면 창용1리 지역, 신언천 건너편은 영인면 구성2리 지역이다. 왼쪽에 영인면 신화리 고용산이 솟아 있다.
고용산(高聳山)은 충남 아산시 영인면 신화리에 자리 잡고 있다. 초목은 없고 큰 돌만 많이 쌓여 있는 산봉우리가 들 가운데 솟아 있다고 하여 고용산이라 불린다. 해발 296m로 아산시 북부에서는 영인산 다음으로 높은 산이다. 평야 지대에 높이 솟아 있어 산 정상에서 주변의 아산호는 물론 인근 충청남도 천안, 경기도 평택 시가지까지 한눈에 보인다. - 두루누비
신언천 옆 창용방수제 제방길을 따라 신언천의 다리로 올라왔다. 건너편 중앙에 평택의 마안산이 솟아 있다.
다리 위에서 신언천 상류 방향과 고용산을 조망한다. 왼쪽의 들녘은 창용리 호지들, 그 뒤는 창용1리 지역, 그 뒤쪽은 신봉1리 지역이다. 신언천 건너편 앞쪽은 구성2리, 그 뒤쪽은 구성3리, 맨 오른쪽 지역은 구성1리 지역인 듯.
아산시 영인면 성내리와 신봉리의 경계에 있는 고용산은 초목은 없고 큰 돌만 많이 쌓여 있는 산봉우리가 들 가운데 솟아 있다고 하여 ‘고용산(高聳山)’이라 불리며,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 "고용산(高勇山)은 현 북쪽 12리에 있다."는 기록이 있다. 『1872년 지방지도(1872年地方地圖)』「아산」에 이북면 동쪽에 ‘고용산’이 표기되어 있으며, 『조선지형도(朝鮮地形圖)』에는 영인면 신봉리와 금성리 사이에 ‘고용산(高聳山)’처럼 한자를 달리하여 기록되어 있다. 고용산의 ‘용’의 한자 표기는 문헌에 따라 勇, 聳 혹은 龍으로 달리 표기하고 있다. 돌성이 있어서 쇠성 또는 금성이란 다른 이름이 생겼다. 또 고령산은 고름산이나 고용산의 방언이다. 고용산은 높이 296m로 아산시 북부에서는 영인산 다음으로 높은 산이다. 평야 지대에서 높이 솟아 있어 주변의 아산호는 물론 인근 충청남도 천안, 경기도 평택 시가지까지 한눈에 보이는 조망이 좋은 산이다. 능선이 동서 방향으로 발달해 있어 산세는 대체로 동서 방향이 장축인 타원형에 가깝다. 고용산은 암석돔이 나타나고 수직의 단애, 토어(tor, 암석이 풍화작용에 의해 기반암과 분리되어 지표에 노출된 암괴 지형), 판상절리, 핵석 등의 다양한 풍화 지형이 나타난다. 아산시 고용산의 봄철 능선부를 중심으로 진달래 군락이 형성되어 있다. 토정 이지함의 전설이 전해지는 산으로, 최근 많은 사람이 즐겨 찾는 산이다. 돌이 많아 악산(岳山)의 모습을 보이며, 1970년대와 1980년대 이후 석산으로 개발되면서 상당 부분 훼손되자, 아산시는 고용산의 훼손을 방지하고 시민을 위한 휴식 공간 제공을 위해 고용산 산림욕장을 조성하였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신언천의 다리를 건너와 제방길에서 신언천 다리와 고용산을 올려본다. 서해랑길은 제방길이 아닌 들녘의 도로를 따라간다.
신언천 방수제 제방길은 오른쪽에 있으며 서해랑길은 구성리 간척농지의 도로를 따라 아산호 방향으로 내려간다.
아산시 영인면 구성리 간척농지가 드넓다. 중앙 뒤에는 서해선 아산고가교가 아산호를 횡단하고 있다. 서해랑길은 구성리 간척농지를 오른쪽으로 돌아 아산호 호안(湖岸)길을 따라 서해선 아산고가교 아래로 이어간다.
농지도로에서 고용산을 뒤돌아본다. 그 앞 왼쪽은 영인면(靈仁面) 창용1리, 오른쪽은 구성리(九星里) 지역이다.
영인면(靈仁面) 구성리(九星里)는 구성1리, 구성2리, 구성3리로 이루어지며 영인면소재지에서 북쪽으로 5~6㎞ 지점에 있는데, 넓은 평야에서 생산되는 쌀은 우수한 청결미로 이름이 높다. ‘구성리’라는 명칭은 1914년 구산리(龜山里)와 신성리(新星里)을 병합할 때 두 마을의 이름을 하나씩 따서 붙인 것이다. 이때 일제가 구산리의 ‘구산(龜山)’을 강제로 ‘구산(九山)’으로 바꿈으로써 ‘구성(九星)’이 되었다. 구성리는 본래 아산군 이북면의 지역인데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구산리, 신언리, 신성리와 신흥면의 신성리를 병합하여 구산과 신성의 이름을 따서 구성리라 하여 아산군 영인면에 편입되었다. 1995년 1월 1일 행정구역 조정으로 아산군과 온양시를 통합하여 아산시로 개편되면서 아산시 영인면 구성리가 되었다. 구성리는 원랑산(월앙산) 자락 동쪽 기슭에서 이어진 마을로 낮은 평야지대를 이루어 아산호까지 너른 농경지를 지니고 있다. 물길은 신언천을 따라 아산호로 이어진다. 새벌포구를 중심으로 어업이 발달한 마을이었으나 지금은 주로 농사를 짓고 있는데, 넓은 평야에서 생산되는 쌀은 우수한 청결미로 이름이 높다. 남쪽으로는 와우리와 신화리, 동쪽으로 창용리, 서쪽으로 백석포리, 북쪽으로는 아산호를 사이에 두고 경기도 평택시와 접한 충청남도 북부 도계마을이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서해랑길은 구성리 농지도로를 따라 돌아가 왼쪽 뒤의 아산취수장 앞으로 이어간다. 맞은편에 평택의 마안산이 솟아 있다.
구성리 농지도로를 따라오다가 뒤돌아본다. 오른쪽 농로를 따라 질러가도 무방하다. 오른쪽 구성1리 지역에 자동차 부품 생산 공장인 '명신회사'가 보이며 그 뒤쪽에 영인면 백석포리의 해발 108.5m 원랑산(월랑산)이 구름에 가려 있다.
구성리(九星里)는 1리~3리의 3개 행정리로 구성된다. 자연마을로는 구산, 새구산, 능안말, 아래새별[新星], 윗새별[新堰] 등이 있으며, 구산에는 경주김씨와 김해김씨, 새별에는 단양장씨가 많이 살고 있다. 구성1리인 구산은 월앙산 동북쪽에 있는 마을로 뒷산이 거북이처럼 생겼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며, 구성2리인 새별은 구산 북쪽 갯가의 큰 벌판에 있는 마을이다. 아래새별은 새별의 아래쪽에 있는 마을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고, 능안말은 구성3리로서 능터 안쪽에 있는 마을이라 하여 ‘능안말’이라 불린다. 능안말은 6·25전쟁 때 이북에서 온 피난민들을 위해 1958년 180세대의 집을 지어 거주하게 한 마을로서 백석포의 갯벌을 막아 170여만 평을 간척하고 분양하여 정착하게 되었다. ‘개척단’이라고도 부른다. 구산마을은 조선 초기 경학삼김(經學三金) 중 한 사람인 문장공 귀산(歸山) 김구(金鉤)의 오교대 등의 흔적이 있는 마을이다. 귀산 선생은 세조 때 아산현이 혁파되었을 당시 아산현 복구를 위해 노력하다 고신(告身)[조정에서 내리는 벼슬아치의 임명장]이 삭탈당하였으며 사후에 아산현이 복구되고 관직과 과전도 돌려받았다. 한편 마을에는 을사오적의 주역인 이완용의 조부와 부친 묘소가 있다. 현대 인물로는 간척사업을 주도한 이석곤 씨가 있다. 현재 마을 주변으로는 자동차 부품을 공급하는 명신 등 많은 공장이 들어서 있고, 새별마을에는 한국수자원공사 집수장이 설치되어 당진 산업단지 공업용수 공급을 담당하고 있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구성리 농지도로에서 오른쪽 농로를 따르지 않고 농지도로를 계속하여 따라왔다. 간척되기 이전에는 이곳에 새벌포구가 있었던 것 같다. 중앙 뒤에 고용산(高聳山)이 듬직하다.
아산호 구성리 제방에 차를 세워두고 낚시를 즐기는 사람들이 많다. 오른쪽에 마안산, 중앙에 서해선 아산고가교가 보인다.
구성리 간척농지 뒤쪽에 서해선 아산고가교가 영인면 백석포리 간석지들을 가로지르고, 왼쪽 맨 뒤에 인주면 냉정리의 입암산이 고개를 들고 있다. 왼쪽의 질러오는 농로는 오른쪽 앞에서 농지도로와 만나 오른쪽 끝에 보이는 아산취수장 앞으로 이어진다.
앞쪽에 한국수자원공사 아산취수장 취수펌프동 건물이 있다. 농지도로는 아산취수장 앞을 지나 호안(湖岸)길로 이어진다.
농지도로를 따라 한국수자원공사 아산취수장 취수펌프동 건물 앞을 돌아왔다.
농지도로는 아산호 호안(湖岸)길을 따라 아산만방조제 방향으로 이어간다. 서해선 홍성~송산 복선전철 구간 중 경기 평택과 충남 아산을 연결하는 5.9km 아산고가교가 앞에 보인다. 아산고가 수상철도 교량은 국내 최장·최대 아치교다. 중앙에 국내 최대 단일경간인 155m 대형아치와 양쪽에 중형 아치와 소형 아치 각 2개씩을 설치한 5련 아치교는 연장 625m, 높이 44m로 국내 최장·최대 규모를 자랑하며 아산과 평택의 화합을 형상화한 비대칭 구조로 지역의 새로운 랜드마크로 자리잡을 전망이다. (2021. 7.19. 유의주 기자 연합뉴스 참조)
이 들녘을 아랫새별이라 이르는 듯. 왼쪽 뒤에 구성1리 마을, 중앙에 자동차 부품 생산 공장인 '명신회사'가 보이며 그 뒤쪽에 영인면 백석포리의 해발 108.5m 원랑산(월랑산)이 야트막하게 엎드려 있고, 맨 뒤에 영인산이 살짝 모습을 드러낸다. 명신회사 왼쪽에 '오교대(五敎臺) 반석(盤石)'이 있으며, 김구(金鉤, 1381~1461)가 읊은 '오교대 팔경' 중에 제4경인 '구산촌 반석(龜山村盤石)'이 이곳일 것이라 한다. 현재 오교대의 흔적은 찾아볼 수 없고 유일하게 반석만 남아 있다고 한다.
오교대(五敎臺) 반석(盤石)은 조선시대 초기의 문신 김구(金鉤)와 연관된다. 김구의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직지(直之), 호는 송정(松亭)·귀산(歸山), 시호는 문장(文長)이다. ‘귀산’은 지금의 아산시 영인면 구성1리를 의미한다. 김구는 경사(經史)에 정통하였으며, 성리학에 조예가 깊었다. 김구는 당대의 대표적 학자로서 성균관대사성(成均館大司成)으로 재임하면서 많은 후학을 길러내었고 훗날 대제학(大提學)에 이르렀다. 그러나 단종이 즉위한 후 나라의 어지러움을 한탄하며 충청남도 아산 지역의 귀산에 은거하였다. 세조는 대제학에 제수하여 조정에 나설 것을 명하였으나 무려 아홉 번에 걸쳐 사양을 하고, 말년에 오교대를 축조하여 인재 양성에 몰두하였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고용산에 흰구름이 날고 있다. 드넓은 구성리 간석지들 왼쪽은 윗새별들, 오른쪽은 아랫새별들이라고 불리는 듯.
영인면(靈仁面)은 지리적으로 아산시의 북부에 있으며 남으로는 아산시의 염치읍, 서쪽은 인주면, 동쪽은 음봉면과 둔포면, 북으로는 아산호를 사이에 두고 경기도 평택시와 마주하며 충청남도 북단의 도계를 이루는 면이다. 13개 법정리를 관할하며 영인산을 주산으로 하여 너른 농경지와 북쪽으로 아산호를 끼고 있어 수려하고 깨끗한 자연경관을 지닌다. ‘영인(靈仁)’은 고려 성종 때 당시 인주(仁州)의 별호(別號), 즉 별도의 이름으로 정하였던 ‘영인(寧仁)’에서 유래하였다. ‘영인(寧仁)’은 『고려사』의 지리지 외에 『세종실록지리지』에도 ‘영인(寧仁)’이라는 별호가 등장하며 "순화(淳化) 때 정한 것이다."라고 하였는데, 이것은 지금 쓰고 있는 ‘영인(靈仁)’과는 한자 표기만 다른 것이다. 지명은 오랜 시간이 지나면서 바뀌어가는 과정을 거치는 경우가 많지만 ‘영인’이란 지명으로도 천 년이 넘는 역사를 가진 지역이다. 영인면은 조선시대 아산현의 관아가 있던 중심 지역으로 1914년 일제가 행한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현내면과 일북면, 이북면의 일부를 병합하여 아산군 영인면이 되었다. 1922년 아산군청이 온양읍으로 이전하기 전까지 아산군청이 있었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맨 오른쪽 뒤에서 농지도로를 따라 왼쪽 아산취수장 앞을 거쳐 왔다. 중앙 뒤쪽은 영인면 창용1리 지역인 듯.
중앙 뒤쪽에 평택국제대교가 보인다. 그 오른쪽 둔포천의 구룡교를 건너 아산호 호안길을 따라 이곳까지 내려왔다.
구성리(九星里) 지역의 아산호 호안도로(湖岸道路)를 따라 왼쪽의 배수장 시설인 듯한 건물 앞을 거쳐, 아산호 준설사업 현장 앞으로 이어간다. 서해선 아산고가교가 아산호를 가로질러 백석포리 간석지들을 지나간다.
아산호 준설사업 공사 안내판이 세워져 있다. 한국농어촌공사 평택지사장에서 시행하는 농어촌 용수 확보와 재해 예방, 수질 개선을 위한 준설사업을 (주)진성개발이 사업한다는 내용이 적혀 있다.
충남 아산시 영인면 구성리와 창용리 일원, 경기도 평택시 현덕면 권관리와 기산리 일원에 걸쳐 준설 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아산호 호안도로를 따라 구성리에서 백석포리로 넘어와 이곳에서 왼쪽으로 꺾어 간석지들 농로를 따라간다. 중앙 앞쪽에 인주면 모원리 세일철강 아산공장, 뒤쪽에 인주면 냉정리의 입암산이 솟아 있다. 입암산 줄기 오른쪽 끝에 대내산의 공세리 성당이 가늠된다. 호안도로 끝에 아산만방조제 입구가 있을 것이다.
영인면 백석포리 간석지들 위를 서해선이 달린다. 영인면(靈仁面)의 지명을 유래한 영인산(靈仁山)이 중앙 뒤에 솟아 있다.
영인면은 곡교천 북부에 솟은 영인산을 주산으로 하여 너른 농경지와 북쪽으로 아산호를 끼고 있어 수려하고 깨끗한 자연경관을 지니고 있다. 영인면의 진산인 영인산[363.5m]이 남쪽에 자리하며 주변은 산악지를 이루고 면소재지 및 마을은 선상지, 나머지는 완만한 구릉지로 형성되어 있다. 또한 북쪽은 아산호가 자리하여 지역의 물이 모여 아산만으로 흘러가는데, 아산만은 조선 말기 청일전쟁의 시발점인 풍도해전으로 유명한 곳이다. 벼농사를 위해 조성된 영인상성저수지, 성내저수지, 신봉저수지가 있으며 아산만방조제 축조 전에는 강다리, 새우잡이 등의 어업이 발달한 지역으로 갯벌이 잘 조성되어 있었다. 또한 국도 39호선과 국도 34호선이 교차하고 지방도 628호선이 영인면 소재지를 관통하는 교통 요충지로 수도권과 인근 지방 도시와의 접근성이 양호하다. 주변에 영인산자연휴양림, 아산온천 등의 유명 관광지가 있어 마을을 지나가는 유동인구가 많다. 영인면은 아산리, 상성리, 신현리, 월선리, 신운리, 백석포리, 와우리, 구성리, 창용리, 신봉리, 성내리, 신화리, 역리의 13개 법정리를 관할하고 있다. 영인면에는 대표적인 문화유산으로 지방교육기관인 아산향교와 아산현 문루인 여민루, 개화기의 정치가 김옥균 선생의 유허 등 충청남도 지정 문화재 8점이 있으며 토정이지함 인화영모비와 조만영 영세불망비 등 비석이 26기, 열녀비각이 2개소, 임욱 영정각 등이 있다. 조선시대 아산현의 중심지였기 때문에 오랜 전통과 문화유산이 남아 있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아산호 중앙 뒤에 아산만방조제와 오른쪽에 배수갑문이 보인다. 그 뒤쪽에 아산만 내해(內海)가 펼쳐져 있을 것이다.
충청남도 아산시 인주면 공세리와 경기도 평택시 현덕면 권관리 일대로 흘러드는 안성천 하구를 가로막은 아산만방조제는 아산만 일대의 홍수 피해를 줄이고 그 주변을 관광지로 이용하기 위하여 건설한 방조제이다. 1971년 착공하여 1974년 5월 22일 준공하였으며, 총 377억 원의 공사비가 투입되었다. 아산만방조제는 안성천과 진위천의 홍수 피해를 줄이고, 평택 지역의 대단위 농업지역의 농업용수를 공급함과 동시에 아산시 일대 임해공업단지의 공업용수 공급 등을 위해 건립되었다. 동시에 아산만 일대를 관광단지로 개발하는 데 일익을 담당하고 있다. ‘아산만방조제 배수갑문 확장사업’은 전국 최초의 하구둑 구조개선사업으로 2006년 기본 계획 후 2007년 실시 설계를 거쳐 2008년 10월 착공하여 2014년에 완료되었다. 총사업비 1,077억 원이 투자된 아산만방조제 배수갑문은 기존 배수갑문 수문 120m에 배수갑문 176m를 추가 확장해 전체 폭 296m 규모를 갖추게 되었으며, 배수갑문 배제량이 초당 2,460㎥에서 7,530㎥까지 늘어나 홍수 배제 능력이 약 3배로 확대되었다. 통선문 겸용 어도도 설치하였다. 이를 통해 선박 30톤급과 회유성 어류의 이동이 가능해졌다. 배수갑문 최초로 통선문 내에 대형 수조창도 설치해 통선문 가동 때 어류가 이동하는 모습을 관찰할 수 있다. 이 밖에도 배수갑문 관리동에는 공원, 전망대, 전시관 등의 시설을 설치해 관광자원으로도 활용이 가능하다. 아산만방조제는 건설 당시 아산군과 평택군을 연결하며 길이 2,564m, 평균 높이 8.5m이고 최고 높이 17m이다. 윗넓이 16m, 밑넓이 168m이며, 12연의 배수갑문이 설치되어 있고, 그 길이는 150m에 이른다. 총 사업비 377억 원을 들여 1971년에 시작되어 1974년 5월 22일 완공되었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서해선 경기 송산~충남 홍성 복선전철 구간 중 경기도 평택시 현덕면과 충남 아산시 영인면을 연결하는 5.9km 길이의 아산고가교가 아산호를 가로지르고 있다.
아산호 호안도로를 따라 아산호 준설공사 현장 앞을 거쳐 영인면 구성리에서 백석포리로 넘어와 갈림길로 왔다.
아산호 호안도로 갈림길에서 왼쪽으로 꺾어 영인면(靈仁面) 백석포리(白石浦里) 간석지들 농로를 따라간다. 서해선 아산고가교가 간석지들 위를 달리고 뒤쪽에 영인면의 진산인 영인산(靈仁山)이 솟아 있다. 왼쪽 뒤에 백석포리 마을이 보인다. 이 마을은 동학농민군을 진압하기 위해 조선 정부가 요청한 청나라 군대 2천 8백여 명이 1894년 6월 9일부터 44일간 머물렀던 곳이며, 풍도해전과 성환전투에서 승리한 일본군이 이 마을에 개선문을 세웠던 곳이라고 한다.
영인산은 아산시 북부에 솟은 해발고도 363.5m의 산으로 북쪽에는 아산만방조제, 서쪽에는 삽교천방조제가 위치해 있다. 이 산은 높지는 않지만 매우 가파르고 영험한 산으로 정상에는 우물이 있어서 큰 가뭄이 있을 때 기우제를 지내던 산이다. 그만큼 예로부터 산이 영험하다 하여 영인산(靈仁山)이라 부르고 있다. 산 정상 일대에는 남북으로 펼쳐진 백제 초기의 석성으로 추정되는 영인산성이 있는데, 이는 백제가 서해와 통하는 아산 지역을 중요시한 것을 보여준다. 또한 정상에는 2마리의 학을 형상화한 두 개의 탑으로 구성된 '민족의 시련과 영광의 탑'이 있다. 이 탑은 민족의 역사 및 문화적 가치를 재조명하고 등산객의 휴식 공간을 마련해 세워진 탑이다. 산 정상에서는 멀리 서해 바다와 평택, 삽교천 및 아산만방조제와 아산 시가지를 한눈에 볼 수 있다. 그리고 영인산 동쪽 자락에는 영인산자연휴양림 및 수목원이 있어 볼거리, 즐길거리가 다양하며 편의시설을 이용할 수 있다. 인근에는 영인산자연휴양림, 영인산수목원, 세심사 외에도 아산향교, 김옥균선생유허지, 여민루, 영인저수지, 온양온천 등이 있다. - 두루누비
농업용수 공급을 위한 백석포 배수장과 그 옆 백석포 수문을 거쳐 백석포2리 경로당으로 이어간다.
서해랑길은 영인면 백석포2리 경로당 앞을 거쳐 오른쪽으로 돌아간다. 영인면(靈仁面)의 지명을 유래하고 영인면의 진산인 영인산(靈仁山)이 왼쪽 뒤에 솟아 있다.
백석포리는 백석포1리, 백석포2리의 2개 행정리로 이루어졌으며 백석포1리의 안말과 백석포2리의 샛말을 중심으로 등말, 배터, 점촌 등 5개의 자연마을이 있다. 김해김씨가 10대 이상 세거해 왔으며 전주이씨와 경주김씨 등이 차례로 많은 세대를 이루고 있다. 지금도 음력 섣달 그믐에는 마을회관 뒷산에 있는 산제당에서 산제를 지내고 있으며, 과거 어업이 한창일 때는 음력 정월 열나흗날에 용신제를 올렸다. 1970년대 초에 아산만방조제를 막음으로써 바다가 옥토로 변하여 현재 ‘속펄’이라는 들로 불리며, 간척지 쌀을 생산하면서 어촌에서 농촌으로 바뀌었다. 『영인향토지』에 의하면 정조 때 수원에 화성을 쌓는 일에 동원되는 것을 피해 많은 사람들이 이곳으로 이주해 오기도 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고려시대 몽골군과 왜구가 아산만으로 침입하여 고난이 많았고, 조선 말에는 청일전쟁의 시발지이기도 했다. 당시 청나라 군대가 1894년 6월 9일부터 44일간 주둔하여 마을 주민과 아산현민들의 많은 고난이 있었던 기억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곳이다. 그때의 일을 기록한 「아산현청국군병주찰시전용하성책」과 「아산현청국대군찰주시태용하성책」이 있다. 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이 개선문을 세웠던 곳이며, 일제강점기에는 어업조합을 만들어 운영하여 오다 1970년경 당진군의 한진어업조합과 합병되어 지금은 창고만 남아 있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영인면 백석포2리 경로당 앞에 백석포2리 설명안내판이 세워져 있다.
우리 마을은 동산과 월랑산이 어우러진 샘골들, 고잔들, 새앙골, 간사지들(속펄)이 있고, 해방 후 백석포 초등학교와 지서가 있었으며, 청일전쟁의 발상지이기도 합니다. 현재는 국도 34호선이 지나는 교통요충지이며, 이토정과 옹기장수의 전설이 살아 있는 전통마을로 아산 맑은 쌀의 주산지인 살기 좋은 부농의 마을입니다.
백석포2리 경로당 앞을 거쳐 서해선의 아산고가교 아래를 통과하여 뒤돌아보았다. 중앙 뒤쪽은 백석포1리 지역이다.
영인면(靈仁面) 백석포리(白石浦里)는 백석포1리, 백석포2리로 이루어지며 영인면 소재지에서 북쪽으로 4㎞ 정도에 있는 전형적인 농어촌마을이다. 예전에는 아산만과 접하여 배가 드나드는 포구마을로서 어업과 상업이 발달하였으나, 현재는 아산만댐 조성과 간척사업으로 많은 농경지가 조성되어 자연스럽게 농촌마을로 변하였다. ‘백석포리’라는 명칭은 마을에 흰돌이 많아 ‘백석포(白石浦)’라 불리던 것에서 유래하였다. 백석포리는 원래 조선시대 아산현 이북면 지역이었는데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어촌(漁村)인 상리와 하리를 병합하여 백석포리라 하고 아산군 영인면에 편입되었다. 백석포리는 당진에서 충주로 이어지는 국도 34호선이 마을 앞을 지나는 교통이 편리한 마을이다. 마을 뒤로는 아산호가 있고 마을 동쪽으로 월랑산[원랑산]이 있어 전체적으로 마을 동쪽에서 서쪽으로 낮은 지형을 이루고 있으며, 남쪽으로는 너른 농경지가 조성되어 있다. 부제학, 대사성 등을 지낸 조선 중기의 문신 동주(東州) 이민구(李敏求)가 아산으로 귀양살이를 와서 지은 「백석어촌(白石漁村)」이란 시가 있으며, 조선 초의 문신 귀산(歸山) 김구(金鉤)의 『귀산실기』에는 「백석포귀범(白石浦歸帆)」이란 시를 지어서 오교대 팔경 중 하나로 꼽을 정도로 백석포리는 아름다운 풍광을 뽐냈던 마을이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영인면 백석포리에서 '아산호로' 주천교를 건너 인주면 모원리로 넘어간다. 맨 왼쪽 다리는 국도 34호선의 신안교이다.
'아산호로' 동쪽의 백석포리 방향을 바라본다. 중앙 뒤에 고용산이 가늠되고 바로 앞 위에는 서해로 아산고가교가 지난다.
주천교 동단 왼쪽 아래 아산천변에서 '아산호로'로 올라와 아산천의 주천교를 건넌다. 아산고가교가 공장지대 위로 지나간다.
서해랑길은 '아산호로' 주천교 서단에서 왼쪽으로 꺾어 아산천변으로 내려간다. '아산호로'는 서쪽으로 인주면 모원리를 거쳐 공세리 아산만방조제 입구로 이어진다.
영인면 백석포리에서 아산천 위의 주천교를 건너 인주면 모원리로 넘어왔다. 아산천은 안성천 아산호로 유입된다.
국도 제34호선 '장영실로'의 신안교 아래 아산천 둑방으로 내려가서 다리 아래를 통과하여 곧바로 오른쪽으로 꺾어간다.
충청남도 아산시 영인면 아산리에서 발원하여 백석포리에서 안성천으로 흘러드는 ‘아산천(牙山川)’은 조선시대의 아산현 읍내면 지역이었던 아산리에서 유래하였다. 아산천이 읍내면을 지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후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온양·아산·신창이 합쳐져 아산군이 되었고, 읍내면 아산리는 영인면 영산리로 바뀌었다. 1922년 아산군청이 온양읍으로 옮겨가면서 영인면 영산리가 아산리로 다시 바뀌었다. 1919년에 제작된 『조선지형도』에서 아산천이 기록된 것을 볼 수 있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국도 제34호선 신안교 아래를 통과하여 아산천 둑방으로 내려왔다. 모원리 둑방길을 따라가다가 모원리마을회관을 거쳐 오른쪽으로 꺾어가도 무방하다. 서해랑길은 국도 제34호선 '장영실로' 아래의 농로를 따라간다. 뒤쪽에 영인산이 솟아 있다.
인주면 모원리는 인주면소재지에서 북동 방향으로 4㎞ 거리에 있는 농촌마을로 북쪽으로는 산업단지가 형성되어 있고, 남으로는 벼농사를 짓는 넓은 안논들이 있다. 모원리의 ‘모원(牟元)’은 벌판에 새로 둑을 막고 마을을 이루었으므로 ‘발언’이라 부르던 것이 변하여 ‘보리원’[보련] 또는 ‘모원’이 되었다고 한다. 모원리는 본래 아산군 신흥면 지역이었는데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동강리 일부를 병합하여 모원리라 하고 아산군 인주면에 편입되었다. 1995년 1월 1일 행정구역 조정으로 아산군과 온양시를 통합하여 아산시로 개편되면서 아산시 인주면 모원리가 되었다. 모원리는 국도 34호선 변에 있으며 북으로 아산호와 연결된 마을이어서 대부분의 지역이 낮고 넓은 평지로 이루어져 있으며 경지정리가 잘 되어 있다. 서쪽으로는 공세리가 있으며, 동쪽으로는 영인면 백석포리가, 남으로는 영인면 월선리와 맞닿고, 북쪽으로는 아산호가 있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아산천 위로 국도 제34호선 '장영실로'의 신안교가 지난다. 그 뒤쪽에 '아산호로'의 주천교가 아산천을 지난다.
충청남도 아산시 영인면 아산리와 상성리 일대는 영인산[364m]에서 뒷아산고개, 금산[251m]으로 이어지는 산줄기로 인해 남동북 삼면이 둘러싸여 있다. 지형은 동쪽이 높고 서북쪽이 낮으며, 마을은 서북쪽으로 열려 있다. 아산천은 아산리 북동쪽에 있는 금산의 서사면에서 발원한다. 이 하천은 좁은 골짜기를 남서쪽으로 흐르면서 영인산과 뒷아산고개를 잇는 산줄기 북사면에서 흘러온 여러 계류를 합친 뒤 상성리에서 영인저수지를 이룬다. 저수지 일대에서는 고도가 20m 내외로 낮아진다. 저수지를 나선 아산천은 북쪽으로 흐르다가 영인산 북서사면에서 발원하여 신현리를 흘러온 신현천(新峴川)을 받아들인 뒤 구릉지 사이로 펼쳐진 농경지를 적시며 계속해서 앞으로 나아가 백석포리의 백석교 아래에 이른다. 여기서 아산천은 성내리에서 발원하여 먼 길을 흘러온 주천(注川)을 다시 받아들인다. 유량이 더 불어난 아산천은 모원리와 백석포리에 펼쳐진 드넓은 농경지 사이를 굽이치며 아산만을 향해 흘러간다. 아산천은 신현천과 주천의 두 지류 하천으로 이루어져 있다. 하천 연장 4.7㎞, 유로 연장 8.9㎞, 유역 면적 31.9㎢의 지방하천이다. 아산리는 본래 아산현 현내면 자리이다. 아산향교와 김옥균 유허가 있다. 금산에는 동심사가 있고, 영인산에는 관음사, 영인오층석탑[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239호], 영인산자연휴양림이 있다. 하류의 영인면 백석포리는 1894년 청나라 군대가 주둔하여 청일전쟁의 발판이 되었던 곳이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국도 제34호선 '장영실로'의 신안교 아래를 통과하여 곧바로 오른쪽으로 꺾어 '장영실로' 아래 '아산로1312번길'을 따라간다.
아산로1312번길은 오른쪽 위 '장영실로' 아래를 따라간다. 서해랑길은 바로 앞에서 왼쪽으로 꺾어 안논들로 나간다.
모원리 안논들이 펼쳐져 있다. 맨 오른쪽에 공세리 성당이 있는 대내산, 중앙 뒤에 입암산이 솟아 있다.
모원리 안논들 왼쪽에 모원리마을회관이 있고, 그 왼쪽 뒤로 서해선이 지나간다. 서해선 터널 오른쪽 거문이들에서 맨 오른쪽 인주면 냉정리의 입암산 아래쪽까지는 영인면 월선리 지역이다. 왼쪽 뒤에 영인산이 솟아 있다.
인주면(仁州面) 모원리는 자연마을로 모원[벌언, 보리원]이 있다. 예로부터 아산만으로 이어지는 물길이 좋아 어업과 소금을 굽는 염전이 발달한 마을이었다. 영인면 백석포리로 이어지는 물길은 조수 간만의 차가 심한 아산만의 특성으로 새우젖 배 등이 정박하는 나루터가 있었으며 1950년대까지 소금을 생산하였으나, 아산만방조제 조성 후 경지정리를 하며 농업이 주업이 되었다. 그 후 아산만 간척사업으로 산업단지가 형성되어 '세일철강' 아산공장을 비롯한 여러 공장이 들어서 있으며, 서해안복선전철과 제2서해안 고속도로가 마을 인근을 경유하며 지나는 공사를 진행하고 있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서해랑길은 '아산로1312번길' 끝에서 왼쪽으로 꺾어 모원리 안논들 농로를 따라간다. 영인산과 입암산이 왼쪽과 오른쪽에 솟아 있고, 입암산에 채석장 상처가 보인다. 그 왼쪽에 영인면 월선리 '파니클랜드' 수목원이 자리하고 있는 것 같다.
피나클랜드 수목원은 충청남도 아산시 영인면 월선리에 위치한 관광농원이다. 피나클랜드 수목원은 아산만 방조제 매립을 위해 채석장으로 사용된 곳으로 이창호 선생(거제 외도 보타니아 설립)이 자녀들과 함께 손수 가꿔 만든 곳으로 2006년 7월에 개관하였다. 현재 피나클랜드는 ㈜피나클랜드농업회사법인을 새로 출범하여 식물원의 재배적 기능과 공원적, 전시적 기능을 수행함으로 자연이 주는 쉼과 치유를 제공한다. 107,300㎡(약 3.2만 평) 대지에 13개의 테마공간과 함께 어우러진 특색 있는 산책길들에 계절마다 다른 옷들을 입혀준다. 봄에는 수선화, 튤립을, 여름에는 수국을, 가을에는 국화를, 겨울에는 별빛, 레이저 불빛으로 자연의 아름다움을 더한다. 피나클 최정상에는 채석장의 모습이 남아 있는 달빛폭포와 서해대교와 평택 캠프험프리스 조망이 가능한 전망대가 있다. 유산양과 비단잉어에 동물먹이 주기 체험도 가능하며, 아이들이 신나게 뛰어놀 수 있는 넓은 잔디광장까지 만나볼 수 있다. 해바라기, 목화와 메밀이 군락을 이루고 있는 산들정원과 은행나무, 자작나무가 길게 뻗어 있는 수풀누리와 주차장부터 매표소까지 300m 길이로 늘어선 메타세쿼이아길 등이 가족 단위 관람객들에게 큰 인기를 끌고 있다. 곳곳마다 사진으로 추억을 남기기에 좋은 장소들이 있어 남녀노소 누구나 사랑할 수밖에 없는 곳이다. - 두루누비
'아산호로'의 주천교를 건너 국도 제34호선 '장영실로'의 신안교 아래를 통과하여 아산천 둑방에서 오른쪽으로 꺾어 '장영실로' 아래의 '아산로1312번길'을 따라와서 안논들 농로로 들어왔다. 서해선 아산고가교가 모원리 지역을 지나간다.
인주면 모원리 안논들에서 오른쪽으로 꺾어 농로를 따라 이어간다. 건너편 서해선 오른쪽 거문이들 오른쪽으로 영인면 월선리 지역이 펼쳐져 있다. 맨 뒤에 영인산, 맨 오른쪽에 입암산이 솟아 있고, 입암산 아래쪽의 '피나클랜드' 수목원도 가늠된다.
영인면(靈仁面) 월선리(月船里)는 월선 1리~3리로 이루어지며, 영인면 소재지에서 서북쪽으로 3~4㎞ 거리에 있는 마을로 농업이 주요 소득원이다. 마을 중앙에 다목적 테마파크인 피나클랜드가 있어 관광객이 많이 찾는다. ‘월선리(月船里)’라는 명칭은 1914년 월견리(月見里)와 선교리(船橋里)를 병합할 때 두 마을의 이름을 하나씩 따서 붙인 것이다. 월선리는 본래 아산군 현내면 지역이었는데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월견리와 선교리를 병합하여 월선리라 하고 아산군 영인면에 편입되었다. 월선리는 면소재지에서 북서쪽으로 5㎞ 지점에 있으며 마을 앞으로는 너른 농경지가 조성되어 주로 벼농사를 짓는다. 남쪽으로 영인면 신현리, 서쪽으로 인주면 공세리, 북쪽으로 인주면 모원리, 동쪽으로 영인면 신운리와 접하고 있는 마을로 아산만으로 물길이 이어져 배가 드나들던 마을이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왼쪽 뒤에 입암산이 솟아 있고, 그 왼쪽에 영인면 월선리 피나클랜드 수목원이 있다. 입암산 오른쪽 지역은 인주면(仁州面) 공세리(貢稅里) 지역으로 오른쪽 전봇대 뒤에 대내산 공세곶창 자리에 위치한 공세리 성당이 보인다.
인주면(仁州面)의 ‘인주(仁州)’라는 이름은 아산현(牙山縣)의 옛 명칭으로 백제 때 아술현(牙述縣)이었다가 757년(신라 경덕왕 16)에 음봉현(陰峯縣)으로 바뀌었고 고려 초에 인주라 하였던 것에서 유래하였다. ‘인주’라는 이름은 동쪽의 영인산(靈仁山)과 관련되어 붙여진 이름으로 보기도 한다. 또는 이곳 공세창에 40여 개 고을의 조세를 받아 쌓았는데, 그 공물이 축나지 않고 잘 관리된 것이 어질고 착한 사람이 많았기 때문에 어질 ‘인(仁)’ 자를 써서 ‘인주’라 하였다고 전한다. 인주면은 영인산을 배산으로 바다와 하천이 3면을 에워싸고 있어 사람들이 정착하여 살기 좋은 지형적 조건을 가지고 있는데, 실제로 청동기시대의 유물이 발견되어 선사시대 이전부터 사람들이 살았을 가능성을 보여 주고 있다. 이를 뒷받침하듯 옛 부여와 고구려 땅에서 조수를 따라 내려오다 접근하기 좋은 물길을 갖추고 있어 비류백제가 정착한 미추홀[밀머리]로 추정되는 밀두리[密頭]를 중심으로 면이 형성되어 있다. 따라서 조선시대에는 『경국대전』에 수록된 조선 전기 전국 9개 조창 중 한 곳인 '공세곶창[공진창]'을 만들어 충청도 청주와 천안 등지의 세곡(稅穀)을 수납하여 한성의 경창(京倉)으로 운송하는 기능을 담당케 하였다. 공세곶창은 15세기 후반 이래 아산만 일대의 유일한 조창으로서 조선시대 충청도 서부 권역의 세곡을 수납하여 한성의 경창으로 운송하는 데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는데, 이 공세곶창 자리 위에 1895년 설립된 공세리성당이 있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입암산 자락과 영인산을 자꾸 살피게 된다. 인주면 모원리 안논들 농로에서 안논들 너머 맞은편 월선리 지역과 영인산과 입암산 그리고 피나클랜드 수목원을 가늠한다. 영인산 너머는 아산시 염치읍 지역일 것이며 그 뒤쪽에 아산시청이 있을 것이다.
월선리(月船里)는 3개 행정리로 이루어졌으며 배다리, 달보기, 짐골, 새배다리, 도숫골 등의 자연마을이 있다. 배다리는 마을 입구까지 조수(潮水)가 드나들었으나 일제 때 배다리 하천에 보를 만들어 조수가 차단되고, 배다리는 월선1리로, 달보기, 진골은 월선2리로, 도숫골, 새배다리는 월선3리로 분구되었다. 마을 앞으로는 국도 39호선이 좌우로 지나고 있으며 한국수자원공사 아산권지사 정수장으로 통하는 길이 마을 남북으로 이어져 있어 교통 접근성이 좋다. 서해선 고속전철이 마을 뒷산을 터널로 관통하고 거문이들 앞으로 교각이 지나간다. 달보기마을 뒤편 짐골에는 자연을 주제로 피나클랜드가 조성되어 있어 많은 관람객들이 찾고 있으며, 도숫골 지역에는 채석장과 태성콘크리트, 피나클랜드 위에는 신성테크 공장이 가동 중이다. 전라좌수사를 지낸 충의공 임욱의 영정을 모신 영정각이 있어 매년 음력 7월 25일에 제향을 지내고 있고 임희철 효자비가 있다. 또한 길옆 비석거리에 있던 순국충의비 등은 국도 39호선을 확장하며 짐골 위 산으로 이전하였다. 순국충의비에는 독립운동가인 이규풍과 어머니 박안라, 부인 오세라, 이심숙, 아들 이민호 등의 행적이 기록되어 있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인주면 모원리 안논들 농로를 따라간다. 쉼터전망루 뒤에 서부내륙고속도로 건축 공사가 진행 중인 듯. 도로 축대 뒤에 공세리 성당이 보인다. 앞의 쉼터 전망루에 올라가 주변을 조망하고 서해랑길을 이어가기로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