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석 연휴에 우리 가족은 강원도 여행을 계획하고 있다. 시댁은 추석을 앞두고 그 근처에 출장이 잡힌 남편이 혼자 가기로 했다. 시부모님은 흔쾌히 그러라고 하셨다. 차 막히는 명절에 올 필요 없으니 자유롭게 지내자고 늘 말씀하시고 심지어 결혼하고 처음으로 맞은 명절에도 친정에 먼저 들렀다고 오라고 하신 분들이시다. 그러나 그 소식을 들은 엄마는 “네가 시댁에 가서 일을 잘 못하니까 사돈어른이 너 안 와도 된다고 하셨나봐. 아무리 그래도 그건 며느리 도리가 아니지”라고 한 말씀 하신다. 내가 일을 못 한다는 엄마의 지적에 “며느리가 일하는 사람이야? 며느리는 손님이야. 아들과 오붓이 있으면 좋지 뭐”라고 받아쳤다. 예전 같았으면 엄마는 당신께서 자식을 잘 못 키웠다는 말씀도 덧붙이셨겠지만 이번에는 그쯤에서 대화가 마무리 되었다.
엄마는 가난한 집안 6남매의 맏딸로 태어났다. 할머니에게서 혹독하게 살림을 배웠고 새벽에 일어나서 오빠와 동생들 도시락을 싸고 풀 먹인 교복을 다려입고 학교를 다녔다. 살림 밑천이라는 역할에 충실한데다 예쁘기도 했던 엄마를 동네 어른들은 며느리 삼고 싶어 했다. 엄마는 고단했던 그 시절의 자신을 자랑스러워 하셨다. 외삼촌 세 분은 어려운 형편에도 불구하고 대학에 진학했지만 엄마는 고등학교만 마쳤고 어려운 친정을 잘 도와줄 것 같은 남자(나의 아빠)를 만나 결혼했다. 이모는 여상을 졸업하고 취직해서 막내 외삼촌의 사립대 학교 학비와 용돈을 지원했다. 지금 시대에는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다. 언젠가 내가 엄마에게 쌓였던 불만을 이야기하자 엄마는 억울해하셨다. 아마도 당신이 부모에게 받았던 것들과는 비교도 안 될 만큼 많은 것을 자식에게 주었는데 딸은 이렇게 많이 누리면서 불만이 있다는 게 받아들이기 힘드셨던 거 같다. 여동생과 나는 엄마랑은 말이 안 통한다며 우리는 엄마를 닮지 않았다는 말을 자주하곤 했다. 당연한 말이었다. 우리는 엄마보다는 그 시대에 영향을 더 많이 받기 때문이다.
엄마가 구식이라는 말을 하려는 건 아니다. 엄마가 살아온 시대는 가부장적 질서에 질문을 던지는 시대가 아니었다. 거기에 순응하여 인정받고 애쓰는, 집안 일 잘하는 맏며느리감이라는 말이 칭찬으로 통하던 시대였다. 엄마는 당신께서 중요하게 지켜온 울타리 밖으로 내가 나가버려서 혹시라도 남편, 시부모님 혹은 사회로부터 불이익을 받을까 염려하시는 거 같다. 엄마는 당신의 소중한 딸이 어디에서든 사랑받길 바라는 마음에 나를 나무라는 거라고 그렇게 엄마를 이해하고 해석하는 방식이다. 처음부터 엄마가 그랬던 건 아니다. 나와 남편이 합의한 일에 엄마가 간섭하려는 게 싫어서 짜증 났던 시절이 더 길다. 어느날 누군가 내게 지나가면서 했던 말 ‘어머니는 다르게 살아도 된다는 걸 못 봐서 그래’ 그 말을 듣고부터 조금씩 달라졌다.
남편이 빨간색이고 내가 노란색이라면 빨강과 노랑의 가운데 어디 주황쯤의 아이가 태어날 줄 알았다. 그런데 딸아이는 파랑이나 초록인 거 같다. 우리의 조합으로 나올 수 없는 전혀 다른 인간 유형이다. 자라는 환경이 다르기 때문이다. 엄마와 아빠가 나와 동생을 보면서 혀를 끌끌 차듯이 나 역시 예측 밖에 있는 딸아이를 보며 물음표를 수시로 붙인다. 걱정의 물음표이다.
우리 가족의 추석 연휴 여행을 못마땅해하는 엄마와의 짧은 통화를 마치고 아이의 마음을 떠올려 본다. 엄마가 당신의 가치관을 내게 주입하려 할 때마다 느꼈던 답답함, 엄마와의 대화를 서둘러 종료하고 싶었던 그 마음을 아이도 비슷하게 느끼지 않을까? 우리는 서로 다를 뿐이고, 내 방식도 결코 틀린 게 아니라는 걸 엄마가 알아주길 바랐다. 그러다가 그건 쉽지 않은 일이니 엄마의 인정 여부와 관계없이 내가 살고 싶은 대로 살아야겠다고 마음먹었다. “너 그러는 거 아니다. 그거 네가 잘못하는 거야”대신에 나는 이렇게 살았지만 너는 다르게 살 수 있다고 말을 듣고 싶다. 우리가 서로 다른 건 문제가 아니라 당연한 결과이다. 심지어 우리가 다른건 다행일지도 모른다.
책에서 읽었던 사람은 시대를 닮는다는 말이 선생님 글로 더 현실감 있게 다가옵니다. 뜬금 없지만 그래서 모든 것을 부모탓으로 돌리는 오은영 박사의 솔루션과 개인의 탓으로 돌리는 능력주의가 맘에 들지 않아요. ㅋ 세대가 서로의 시대를 이해할 수 있다면 좋을텐데 그러는 게 점 점 더 힘들어지는 듯 합니다.
첫댓글 미소 샘께 어머니와의 관계는 큰 화두인 거 같아요.
좀더 시간을 두고 살피시면서 계속 글로 써나가시면 좋겠어요. 두분의 관계, 그 감정의 역사를 더 읽고(알고) 싶어진달까요.
색깔에 비유하면 딸 이야기가 갑자기 나온 느낌이에요. 엄마와 나의 다름, 시대적 감수성과 가치관의 차이를 딸과의 관계예서도 동일하게 해석해내기엔 관련된 에피소드가 있어줬음 싶고요.
내일 더 많은 이야기 나누게 되겠죠?
책에서 읽었던 사람은 시대를 닮는다는 말이 선생님 글로 더 현실감 있게 다가옵니다. 뜬금 없지만 그래서 모든 것을 부모탓으로 돌리는 오은영 박사의 솔루션과 개인의 탓으로 돌리는 능력주의가 맘에 들지 않아요. ㅋ 세대가 서로의 시대를 이해할 수 있다면 좋을텐데 그러는 게 점 점 더 힘들어지는 듯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