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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일 기자가 찾은 명성황후 시해 장소인 경복궁 건청궁(乾淸宮) 터는 내년 6월까지 계획된 복원공사를 위해 일반인의 출입이 통제된 상태였다. 1929년 일제에 의해 철거된 건청궁 터에는 공사를 위한 잡석이 수북이 쌓여 있었을 뿐 을미사변의 비극적인 흔적은 어디서도 찾을 수 없었다. 복원현장 사무소측은 “발굴 결과 을미사변 당시 이곳 마당은 박석(薄石)을 깔지 않은 흙바닥이었던 것으로 나타났다”고 말했다. 우치다의 보고서를 토대로 1895년 10월 8일 새벽에 여기서 일어났던 비극을 재구성해 본다.
◆폭도들, 경회루 서쪽을 통해 난입
새벽 5시, 60여명의 일본인 폭도들이 광화문 앞에 나타났다. 일본은 1894년 청일전쟁 이후 ‘삼국간섭’으로 조선에서의 영향력이 축소되자, 러시아와 손을 잡으면서 일본 견제에 나선 명성황후를 제거할 계획을 세웠다. 9월에 조선공사에 부임한 미우라 고로(三浦梧樓) 등은 일본인 검객과 낭인패들을 불러모아 경복궁 난입 작전을 세웠다. 폭도들은 광화문 안쪽에서 기다리던 일본 수비대의 협조로 광화문을 열었다. 일본 수비대와 폭도들의 진격로는 지금까지 명확히 밝혀지지 않았으나, 이번 보고서에선 광화문을 통과한 일본인들이 흥례문(興禮門) 서쪽의 용성문(用成門)을 통해 침입한 뒤 경회루 서쪽으로 나 있던 도랑을 따라 들어가 신무문(神武門) 앞을 지나 건청궁까지 이른 것으로 표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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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인 사바틴(Sabatin)과 시위대 교관이던 미국인 다이(Dye) 장군 등의 증언을 종합하면, 건청궁에 난입한 폭도들은 궁녀들의 머리채를 잡고 “황후가 어디 있느냐”며 윽박질렀다. 일본인들은 황후가 누구인지 알지 못했기 때문에 황후와 용모가 비슷하다고 생각되는 궁녀 3명도 살해했다. 일본인들은 건천궁의 한 지점에서 황후를 찾아내 내동댕이친 후 구둣발로 짓밟고 여러 명이 함께 칼로 찔렀다. 지금까지는 ‘방안에서 황후를 보았다’는 증언이 많았기 때문에 살해 장소가 곤령합의 일부인 옥호루(玉壺樓)일 것이라고 여겼지만, 이번 보고서는 이 장소가 침전 밖 흙바닥이었다고 명시하고 있다. 명성황후가 시해된 지점은 그때 고종이 머무르고 있던 장안당(長安堂)의 뒷마당이었고, 장안당에서 시해 지점까지는 불과 10m 정도였다. 그럼에도 고종이 명성황후가 죽는 모습을 봤다는 기록이나 증언은 찾아볼 수 없다.
◆시신을 불태운 곳은 녹산
폭도들은 죽은 네 여인 중에서 명성황후의 시신을 확인하고 증거 인멸을 시도했다. 이번 보고서는 그동안 피살 장소로 알려졌던 옥호루가 임시로 시신을 안치한 장소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얼마 뒤 궁에 들어온 미우라는 이곳에서 시신을 확인하고 화장을 지시했다. 그동안 폭도들이 시신을 문짝 위에 얹어 이불을 덮고 건청궁 동쪽의 인공산인 녹산(鹿山)숲속으로 옮겨 장작더미 위에서 불태웠다는 것은 알려졌지만 보고서는 그 정확한 위치를 남쪽 지점에 표시했다. 우치다는 “타고 남은 땔나무들이 아직도 녹산 남쪽에 흩어져 있었고, 그 곁엔 무엇인가 파묻은 자리가 보였다”고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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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간 왜 '실내 시해'로 알려졌나
명성황후 시해에 가담했던 일본어 신문 ‘한성신보’ 편집장 고바야카와 히데오(小早川秀雄)는 후에 발간한 ‘민후(閔后) 시해사건의 진상’에서 “(고종이 있던 방의) 오른쪽 방은 민(閔) 왕비(=명성황후)의 거실로서 (난입 당시) 여러 명의 부인이 당황했고, 민후는 이 방 안에서 칼에 찔려 죽었다”고 썼다. 수기는 “양복을 입은 조선인이 섞여 들어와 시해한 것이라는 풍문이 있다”는 등 시해의 주범이 자신들이었다는 사실을 철저히 숨기고 있다. 이 밖의 많은 일본측 기록에서도 ‘실내 시해설’을 뒷받침하는 주장을 싣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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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태진(李泰鎭) 서울대 국사학과 교수는 “왕이 기거하던 장안당의 뒷마당에서 여러 사람이 지켜보는 가운데 황후를 시해할 정도의 상황이라면 궁궐은 그야말로 아수라장이 됐을 것”이라며 “이와 같은 사실은 가해자인 일본측에 매우 불리한 것이기 때문에 ‘방 안에서 암살했다’며 은폐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한편 1896년 법무협판 권재형(權在衡)이 작성한 보고서에는 “자객이 깊은 방으로 피하던 왕후(황후) 폐하를 찾아 끌어내 칼로 내리쳤다”며 시해 장소에 대해 다소 애매하게 기술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