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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의 얼굴 - 어린이 문학에 나타난 남성 어린이 자아에 대하여
1. 소년의 탄생
발레구나.
발레가 어때서요?
발레가 어떠냐고?
지극히 정상적이에요.
지극히 정상적? 그래. 여자들에겐 정상적이지만, 남자는 아냐. 빌리. 남자들은 축구나, 권투나, 레슬링을 하는 거야. 발레는 남자가 하는 게 아니야.
무슨 남자가 레슬링을 하죠?
시비 걸지 마.
난 잘못된 건 없다고 봐요.
- 영화 ‘빌리 엘리어트’ 중에서 아버지와 빌리의 대화
지나간 시절의 얘기다. 영화 ‘빌리 엘리어트’에 나오는 아버지는 발레하는 빌리보다는 축구하는 빌리로 키우고 싶었다. 그게 더 남자답기 때문이다. 우리 부모들도 비슷한 생각을 갖고 아들을 키웠다. 이웃집 아이의 까까머리를 쓰다듬으면서 “고놈 참, 사내답게도 생겼다.”라고 하는 건 큰 칭찬이었다. ‘사나이 중의 진짜 사나이’와 결혼하는 것이 꿈이었던 우리네 어머니들은 아들을 낳아서 ‘사내다운 사내’로 키우는 것이 큰 애국이라도 되는 양 아들 키우기에 지성을 다하였다. 행여 누가 금쪽같은 아들의 기를 죽일까봐 그것이 늘 걱정이었다. 아들이 부엌 문간만 넘어도 질색을 하고, 계집애들 놀이판을 기웃거리면 당장 손을 끌고 나왔다.
요즘은 달라졌다. 양성적 가치가 존중받는 시대다. 남자답다, 여자답다는 말의 경계가 많이 허물어졌다. 학교 운동장에서 열리는 방과 후 축구교실에는 여자 어린이들이 넘친다. 사내아이가 발레를 좋아해서 배운다는데 그걸 두고 비정상적이라고 말하는 사람은 없다. 하지만 아직도 발레 학원에 다니는 사내아이를 찾아보기는 쉽지 않다. 적어도 여자 어린이들이 축구를 즐기게 된 만큼 남자 어린이들이 발레를 즐기고 있는 것 같지는 않다. 남자 어린이들의 변화는 시작되었으나 그 변화가 선명하지 않다. 천방지축 뛰어다니는 이웃집 남자 아이를 대견하게 바라보기보다는 “사내아이 키우시기 만만치 않으시죠?”라고 인사를 건네는 사람이 늘어났다는 게 변화라면 변화랄까.
어떻든 어린이들이 남자답게 혹은 여자답게 행동하게 되는 배경에는 그들을 키우는 부모와 사회의 심리적 태도가 깊게 자리 잡고 있다. 심리학자인 낸시 초도로우는 남녀 어린이들의 성격 차이가 어릴 적 부모와 맺은 관계와 사회의 기대치에 의해 결정된다고 주장했다.1) 특히 주된 양육자인 엄마가 어떤 태도를 취하느냐가 중요하다. 그에 따르면 남자 어린이들이 툭하면 엄마의 손을 뿌리치고 뛰어다니는 까닭은 엄마들의 양육방식과 관련이 깊다. 엄마들은 자신과 다른 신체적 특성을 지닌 아들을 키우는 일이 낯설다. 아들에게는 어서 엄마에게서 벗어나 아버지처럼 될 것을 요구한다. 하지만 딸들에게는 다른 태도를 보인다. 젖먹이 딸과 엄마는 비슷한 경험을 하면서 성장하고 엄마는 딸과 지속적인 공생 결속 관계를 맺는다. 이 덕분에 딸들은 세상에 대한 관계지향적 태도, 연결적 자아상을 갖게 되는 반면, 남자 어린이들은 일찍부터 자신을 독립적인 개체로 인식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런 견해는 태어날 때부터 남자답거나 여자다운 성질이 유전적으로 정해져있다는 진화 심리학자들의 입장을 반박하는 것이다. ‘아들은 원래 남자다워!’가 아니라 ‘아들로 키워서 남자다워!’가 되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남자다움’이라는 특성은 사회 정치적 필요 때문에 형성된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서양의 경우 중세와 근대 초기까지 대부분의 남성들은 육체가 무기력해야 살아있는 영혼이 깃든다고 믿었다.2) 근육질의 씩씩한 남성에 대한 사회적 기대가 없었던 셈이다.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는 남성성과 여성성의 조화는 육체와 정신을 연결된 것으로 보려고 했던 계몽주의의 등장과 관련이 깊다. 게다가 근대 국가의 발생 전후로 현저하게 잦아지고 규모가 커진 전쟁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야만적인 남성 전사가 필요했다. 남자 어린이를 씩씩하게 기르기 위해『소년을 위한 체조』라는 책을 지었던 구츠무트는 ‘남자다운 용기란 무모함과 비겁함 사이에서 중간적인 길을 찾는 것’이라고 강조하면서 ‘남자는 약자를 보호하고 화재 또는 사고에서 희생자들을 구해야 한다’고 했다.3) 당시 사회가 원하는 ‘남자다움’이란 ‘고귀한 야만인’이라는 모순된 존재였다. 계몽주의와 전사 양성 요구가 빚어낸 기묘한 결합이었던 셈이다.
남자다움이 애국주의와 결합하면서 소년들은 더 남자다워져야만 했다. 식민지 쟁탈전이 가속화되고 전장에서는 더 많은 남자가 필요했다. 전쟁터에 나가기에 아직 어린 소년에게는 전쟁과 모험 이야기를 안겨 주었다. 너도 이 책에 나오는 사람들처럼 위대한 모험을 통해 너의 사내다움을 시험해보아야 할 텐데 그렇지 못해서 아쉽다고 부추겼다. 모험심은 남자다움과 동일시되기 시작했다.
중산층 소년들의 관심이었던 ‘남자다워지기’는 이후 산업화 과정에서 모든 계급의 관심으로 확장되었다. 기업가들은 소년들의 육체 단련을 강조했다. 노동 계급이 규범적인 남자다움을 갖추게 되면 생산성이 한결 높아지기 때문이다. 소년들은 생산적인 성년이 될 준비를 해야 했다.
물론 소년들의 남자다움에 대한 독려가 모두 호전적이거나 산업 생산의 논리를 따른 것만은 아니었다. 19세기말부터 독일 소년들에게 인기가 높았던 칼 마이의 소년 소설은 북미 인디언들의 남자다운 모험에 대한 얘기였다. 남성적이지만 가능하면 싸움을 피하는 인디언 올드 셰터핸드의 이야기를 다룬 칼 마이의 책들은 평화주의를 강하게 내포하고 있었다. 올드 셰터핸드는 어쩔 수 없이 싸워서 악인을 무찌르게 되면 반드시 그를 죽이지 않고 판사에게 데려오곤 했다.4)
이렇게 성장한 전통적인 소년들은 각기 다른 편에 서서 남자다움을 발휘하게 된다. 파시스트와 그에 맞서는 민족, 자본가와 자본가에 저항하는 사회주의자 양쪽은 모두 든든한 ‘사내’가 필요했다. 길고 큰 전쟁들이 허망하고 비참하게 끝나고, 여권운동진영이 자신의 목표를 차근차근 달성해나가고, 여러모로 ‘사내답지 않은’ 소수자들이 비판의 목소리를 내기 전까지, 소년들의 질주에는 거칠 것이 없었다.
영화 『빌리 엘리어트』는 그런 점에서 아직도 ‘소년’을 키워야한다고 믿는 아버지의 마지막 몸부림과 소년에서 벗어나려는 빌리의 저항을 다룬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탄광촌 파업 노동자인 근육질 아버지가 가족을 먹여 살려온 힘은 그의 ‘남자다움’이었다. 그는 자신이 빌리에게 물려줄 것도 오직 몸뚱이 하나에 깃든 ‘남자다움’ 밖에는 없다고 믿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 어린이 문학에서 ‘소년’들은 어떻게 나타났는가? 1990년대 이전까지는 여자 어린이가 주인공인 동화를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우리 어린이 문학은 소년들의 독무대였다. 이른바 근대적 소년들은 일제 강점기부터 민주화 과정에 이르기까지 우리 어린이 문학을 이끌어온 중요한 주인공들이었다. 그 겁 없고 당찬 소년 주인공들이 빌리처럼 자신의 ‘소년다움’에 대한 갈등을 겪기 시작한 것은 아주 최근의 일이다. 그런데 이들은 아주 빠르게 그 갈등을 마무리한 모양이다. 사내다움을 거부하는 문제로 부모와 다투는 어린이들을 찾아보기 어렵다. 동화 속에는 온유하고 섬세하고 자상한 꽃미남계열 소년들이 속속 등장했다. 사내냄새 풀풀 나는 녀석들은 놀라운 속도로 자취를 감추어버렸다. 이런 현상은 어디에서 온 것일까? 이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어린이 문학 속의 몇몇 소년 주인공을 뒤따르며 이 문제를 살펴보기로 한다.
2. 창남이, 수남이, 석남이
위에서 서구의 근대 국가 발생 과정에서 소년의 역할에 대해 얘기했지만, 우리 어린이 문학에서도 소년들은 비슷한 길을 걷는다. 육당 최남선은 1908년「소년」지를 창간하고 ‘해에게서 소년에게’라는 시를 써서 ‘담 크고 순정한 소년배들’을 찬양한다. 그는 ‘자유대한의 소년들’에게 ‘바위 틈 산골 중 나무 끝까지 자유의 큰 소리가 부르짖도록’ 소년들이 힘을 모아야 한다고 역설한다. 일제 강점기와 해방 전후 우리 소년들은 누가 보아도 참으로 탐나는 존재였다. 일제는 소년들을 잘 키워 징용에 데려가려 했겠고 소년 독립군들은 만주를 누비며 작아도 한 몫을 단단히 했겠다. 불과 50년도 안 되는 동안 식민지와 동족상잔의 혼란을 거치며 어린 나이에 아버지며 오빠며 구국 용사 노릇을 홀로 담당해야 했던 것이 당시 우리의 소년들이다. 어찌 보면 겉늙고 어찌 보면 안타까울 만큼 순진하나 끝까지 국가와 민족을 위해 최선을 다하는 씩씩한 소년들을 어린이 문학작품 곳곳에서 만날 수 있다.
1927년 「어린이」지에 실린 방정환의 ‘만년샤쓰’에는 근사한 소년 창남이가 나온다. 성격은 ‘태평’이며 행동가짐은 ‘병정같이 우뚝’하고 추운 날 떨어진 신발을 신고도 ‘시키지 않는 뜀’을 뛸 만큼 활동적이다. 앞 못 보는 어머니를 위해 옷을 벗어드리고 겨울날 맨몸 맨발로 집을 나서면서도 ‘네, 샤쓰도 잘 입고 버선도 잘 신었으니까 춥지는 않습니다’하고 외치는 마음씀씀이가 넓고 당당한 소년이다. 창남이 같은 아이들이 있으면 조국의 미래에는 희망이 있겠다는 말이 절로 나올 만큼 매력적인 주인공이다.
같은 해 10월 어린이지에 실린 연성흠의 ‘눈물의 은메달’에는 수남이라는 정 많고 씩씩한 소년이 등장한다. 수남이에게는 명길이라는 아픈 친구가 있다. 명길이는 병상에 누워있기 때문에 소년답게 뛰놀지 못한다. 한창 뛰놀아야 또래의 소년들과 어울릴 수 있으련만 그렇지 못해 친구도 없다. 이런 명길이에게는 소년 중의 진짜 소년인 친구가 한 명 있으니 그가 바로 수남이다. 수남이는 아픈 명길이를 찾아오면 언제나 손목을 ‘힘있게 잡고’ 격려를 건넨다. ‘몸은 튼튼하지만은 집안 살림이 말이 아니’기에 큰아버지댁으로 양잠을 도우러 다닌다. ‘찌는 듯이 더운 여름날 온종일 누에 똥 냄새 나는 양잠실 속에서 일을 하고도’ 투덜거림이 없다. 작가가 병들어 죽어가는 명길이와 대비시켜 수남이의 건강함과 사내다움을 강조한 것은 일제 강점 통치의 암울한 현실 속에서도 소년을 통해 희망을 보려는 의지를 표현한 것이었을 테다.
1938년 《조선아동문학집》에 실린 송영의 ‘새로 들어온 야학생’에 나오는 만득이는 겉늙어버린 소년이다. 물론 그도 어리광이 있고 투정부려서라도 하고픈 일이 있다. 하지만 공장에서 쫓겨나 공사장에서 고된 지게질을 하는 아버지를 목격하고서는 단번에 철이 들어버린다. 중학교 진학을 깨끗이 단념하고 야학생이 되어 낮에는 어느 회사의 급사 노릇을 하고 밤을 밝혀 공부하겠다고 다짐한다. 만득이는 “뭐 6학년만 졸업 맡아도 좋아요. 나도 내일부터는 벌이하러 다닐 테예요. 아버지. 노들 가시지 마세요.”라고 말하여 부모를 울린다. 집안의 일꾼이 되기를 자청한 것이다.
이같은 소년들의 당당함, 건강함, 시원스러움, 믿음직함이 절정을 이룬 주인공은 이원수의 『해와 같이 달과 같이』에 나오는 석남이다. 석남이는 “내가 무슨 죄를 졌나? 가난한 집안에 태어났다고 내게 잘못은 없다.”고 스스로 외치는 자신감 넘치는 소년이다. 일찌감치 일을 해서 내 손으로 돈을 벌자고 결심하고 열 세 살 나이에 집을 나선다. ‘언젠가 빛나는 얼굴로 어두운 데서 솟아오를 때가 있을 것’이라고 믿는다. 하지만 ‘무어든 시키면 열심히 하겠다’는 석남의 패기어린 각오는 팍팍한 서울살이에서 잘 통하지 않는다. 철공소에 견습 자리조차 얻지 못하고 구두닦이를 시작하고 여러 시련이 닥쳐오지만 석남은 뭐든 신나게 해치운다. 솔질을 할 때도 그냥 하지 않고 ‘쓱쓱쓱쓱’하고 구두닦이 통을 내려놓을 때도 ‘번개같이 재빠르게’ 내려놓는다. 여자 어린이가 몇 등장하기는 하지만 이 작품의 주인공은 완벽하게 석남이와 주호, 두 구두닦이 소년이다. 이들은 힘든 일이 있어도 결코 길게 울지 않는다. 정직하고 건강하고 그야말로 완벽하게 사내다워서 미래를 믿고 맡길 만하겠다는 강한 신뢰감을 준다.
해방 전후 우리 아동문학 속의 소년들은 이중의 고통을 견뎌야 했다. 가족을 살려야 했고 국가와 민족을 살려야했다. 작가들은 그들의 무거운 어깨에 ‘소년다움’이라는 날개를 달아 조금이라도 가볍게 해보려고 노력했다. 아니다. 그들에게 감당하기 어려운 무거운 짐을 지워놓고 ‘소년다움’이라는 말로 그 짐을 기꺼이 짊어지도록 독려하려는 속셈은 아니었을까. 그런 점에서 『해와 같이 달과 같이』에 나오는 ‘직업 소년 원유회’ 장면은 쓴 웃음을 자아낸다. 경찰에서 일하는 소년들을 격려하기 위해 창경원에서 원유회를 여는 부분이다. 공부해야 할 어린 소년을 위로하고 지도한다는 이날 모임에 석남이를 보내면서 대장은 이렇게 말한다.
“꼬마가 가는 걸 (경찰) 아저씨들도 더 좋아하실 거다.”
원유회장에서 경찰이 행사의 취지를 설명하는 대목은 당시 소년에 대한 사회의 기대치를 보여준다.
“여러분은 일찍부터 직업을 가지고 나라의 발전에 이바지하는 젊은 용사들입니다. 괴로움을 괴로움으로 생각지 않고 불행을 불행으로 여기지 않으면서 용감하게 일하는 여러분, 오늘 하루만이라도 재미있게 놀며 뜻있게 쉬어 주기를 바랍니다.” (『해와 같이 달과 같이』 122면)
공교롭게도 위에서 인용한 사내아이들의 이름은 대개 ‘男남’자 돌림이다. 시대가 얼마나 사내다운 아이들을 원했으면 동화의 주인공들도 ‘사내 남’자가 붙은 이름을 지닌 걸까. 이 대목에서 파시스트들의 저작에 ‘사내다움 virility'이라는 말이 자주 등장한다는 것이 엇갈려 떠오른다. 우리 어린이들도 전후 국가와 민족의 재건 과정에서 의문 없는 희생과 충성을 강요받았고, 사회는 그것을 사내라면 당연히 해야 하는 일이라는 말로 감추어 다독여 온 것일 수도 있다.
3. 봉식이, 장기와 상태
지금 우리 사회에는 공개적으로 구두닦이 석남이가 존재할 수 없다. 물론 보이지 않는 곳에서 각종 불법 변칙 노동에 시달리는 아이들이 남아있다고 하더라도 일단 법적으로는 어린이에게 노동을 시키면 안 된다. 가족 부양도 마찬가지다. 아직 대단히 못 미치는 수준이지만 소년소녀 가장은 사회가 지원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어린 어깨에 부양의 짐을 짊어져야 했던 시대는 아니지만 여전히 사회는 사내다운 소년들로 넘쳐난다. 나라와 집안을 일으킨 사내를 키워야 했기에 과도하게 ‘사내답기’를 강조해야 했던 양육 분위기는 사회가 변한다고 해서 쉽사리 변하는 것은 아닌 모양이다. 딸이 호주가 될 수 있도록 법과 제도가 변했지만 ‘장남’인데 기를 살려야 한다고 생각하고 ‘사내자식이 어디 가서 한 대 맞고 오면 계집애가 맞고 오는 것보다 훨씬 더 열불이 난다’고 말하는 엄마들이 많다.
최근에 미디어에서 화제가 되고 있는 ‘알파걸’ 현상이란 이같은 아들 엄마의 양육 태도에 일침을 가하는 분석이다. 오늘날 딸 아이 엄마들은 양성성을 다 갖춘 아이가 되도록 양육하는데 비해 아들 아이 엄마들은 여전히 남성성을 강조한 방식으로 양육을 한다는 것이다. 그러다보니 양성적 가치가 각광받는 후기 산업 사회에서 딸 아이들의 경쟁력이 점점 월등해 진다는 것이 ‘알파걸’ 현상을 진단한 댄 킨들런의 주장이다.5)
엄마의 양육방식이 자녀의 성 정체성에 큰 영향을 미친다는, 앞에서 언급한 낸시 초도로우의 말을 빌지 않더라도, 아이들은 엄마의 눈짓과 손짓을 보며 자란다. 침대에서 방방 뛰어도 ‘사내 녀석’이니까 괜찮다는 엄마의 눈짓이 떨어지면 그제서야 맘껏 뛰는 것이 아이들이다. 딸 엄마들이 딸 아이를 축구장에 등 밀어 보내는 만큼 아들 엄마들은 열심히 발레 학원에 보내지 않는다. 오히려 딸들과 싸워 밀리지 말라고 더 부지런히 태권도 학원에 보낸다. 그러면서 아들에게 다른 집 딸들처럼 ‘글씨가 꼼꼼하지 않다’거나 ‘덤벙거리며 숙제 놓친다’고 야단을 친다. 막 태권도를 마치고 돌아온 우리의 기운 찬 사내 아이들에게 책상 앞에서 급격히 차분한 태도로 변신한 다음 공부에 몰두하라고 요구하는 셈이다. 요즘 사내 아이들은 이렇게 모순된 요구를 감당해야 한다.
뿐만 아니다. 사회는 공격적이고 경쟁적인 시스템을 상시적으로 갖추어가고 있다. 세계대전이 일어나고 당장 전장에 나가야 하는 건 아니지만, 무혈전쟁이라 불릴 만큼 치열한 국가 간 경쟁 체제는 일상적으로 온 국민에게 살벌한 긴장감을 불어넣는다. 근대화 과정에서 우방과 적이 있었다면, 이제는 모두가 적이다. 물불 가리지 말고 짓밟으라고, 더 세차게 나아가라고, 절대로 단 하루라도 아프면 안 된다고, 그러면 뒤처진다고 외친다. 그런 점에서 ‘알파걸’ 현상은 여자 어린이들이 양성성을 갖추어나간다는 성별 균형의 측면 뿐 아니라 모든 성이 ‘남성화’되고 있다는 각도에서 볼 필요가 있다. 누구나 자랑스런 소년이, 국제적 전장의 전사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보이지 않는 경쟁은 가속화되고 건강한 자신감을 발산할 길이 없는 아이들은 컴퓨터 게임 속의 가상전쟁으로 모여든다. 그 곳에는 마음껏 사내다움을 발산할 수 있는 통로가 있다. 가뜩이나 ‘사내다운’ 우리의 아이들의 행동양식은 가상의 전쟁을 경험하면서 더욱 사내다워진다. 그러면서 양성적인 사회에서 자꾸만 충돌을 빚는다. 동화에서도 사내의 기질을 감추지 못해 야단을 달고 사는 소년들이 등장한다.
김리리의 ‘왕봉식, 똥파리와 친구야’에 나오는 봉식이는 전형적인 ‘사내녀석’ 이다. 툭 하면 일기장은 안 가져가고 텔레비전을 켜도 거실 소파 위에 뛰어올라가 켜야 직성이 풀린다. ‘요정 고양이 까미’가 시작되면 저절로 엉덩이가 들썩들썩 한다. 씩씩하고 몸을 잽싸게 움직이는 건 영낙없이 소년인데 수남이나 석남이처럼 부지런하고 책임감이 투철하지는 않다. 시대가 달라졌기 때문이다. 어느 누구도 귀여운 봉식이에게 집안을 먹여 살리라고 하지는 않는다. 따라서 뭔가 막중한 책임감을 느끼고 성실히 살아야 할 의무도 없다. 그렇게 하여 얻는 별명은 ‘왕땅콩 갈비 게으름이 욕심쟁이’이다. 봉희누나는 전형적인 알파걸이다. 엄마의 지원 속에 열심히 공부하고 사내아이들에게 뒤지지 않으려고 악착같이 공부한다. 하지만 봉식이는 늘 뭔가를 ‘저지르면서’ 산다.
봉식이가 어린이들의 사랑을 받는 건 오늘날 많은 남자 어린이들이 처한 딜레마를 잘 대변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내니까 기죽지 말고 맘껏 뛰고 놀라고 할 때는 언제이고, 조심조심 물을 엎지르지 말고 마시라니, 말이 되는가. 뭘 좀 꼼꼼하게 해보려고 하면 남자 애가 저렇게 쫀쫀하고 통이 작아서 어디에 쓰겠느냐고 하다가 실컷 일을 벌려보려고 하면 사고 친다고 막고 달려드니 무슨 일인들 맘껏 할 수가 있겠느냐 말이다. 이런 봉식이가 칭찬받고 자신을 펼칠 수 있는 공간은 똥파리들의 세계 밖에 없었던 것이다.
조은이의『소년왕』은 왜곡된 남성다움이 넘칠 때 사람들의 충돌과 갈등이 얼마나 커질 수 있는가를 보여주는 동화다. 주인공 경표의 담임은 걸핏하면 ‘정신봉’이라는 몽둥이로 아이들을 다스린다. 얄밉도록 제 몫을 챙기는 여학생 미진이를 편애하며 온갖 물리적 언어적 폭력을 동원해 사내아이들이 발산하는 남성성을 통제하려 든다. “강한 사람에게 약하고 약한 사람에게 강한 놈들, 세상에서 제일 치사한 새끼들이지.”라고 말하지만 자기 자신도 아이들에게 강자의 폭력을 과시한다. 또한 욱 하면 못 참는 성격의 주인공 경표는 부모의 불화로 인한 자신의 고통을 약한 아이 경서를 괴롭히는 일로 해소하려 든다. 감당하기 힘든 일방적 경쟁에 지친 아이들과 교사는 작품 내내 격렬하게 달아올라 있다. 게임 속에서 만나 치고받고, 교실에서 또 치고받는다. 이 과도한 남성호르몬으로부터 탈출할 곳은 꿈밖에 없기에 경표는 꿈으로 건너간다. 몽유병을 앓는다. 폭격을 맞은 듯 스산하게 주저앉은 우리들의 학교 교실 현장을 그대로 들여다보는 것 같아 마음이 불편해진다. 경표의 과도한 남성성을 가라앉혀 줄 사람은 결국 가족과 학교여야 한다. 가족과 학교는 경표의 줄달음질에 어떤 영향을 주고 있는가. 결국 경표는 모든 것을 스스로 해결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한편 「창비어린이」 2007년 봄호에 실린 김송이의 ‘장기와 상태, 그리고 축구’는 근대 동화에서 매력적으로 그려졌던 남자 아이들의 건강한 사내다움이 계승되는 동화다. 주인공 상태에게서는 요즘 보기 드문 사내애 냄새가 난다. 열쩍은 감정을 달래고 싶으면 공연히 ‘바보새꺄!’하고 내깔겨 보기도 하고 일이 뜻대로 안 되면 ‘빌어먹을 원숭이 새끼’라고 욕을 쏟아붓기도 하지만 축구장에 서면 ‘날아오는 공을 필사로 받아 슛’하는 멋진 선수다. 장기는 그런 상태가 좋다.
남의 밥에 든 콩이 굵어 보이는 식이라고 할까, 사내다워서 같이 있으면 자신도 멋있게 느껴지니 그게 무턱대고 좋단 말이다. (‘장기와 상태, 그리고 축구’, 「창비어린이」 2007 봄호, 141면)
선생님도 부모도 이들의 사내다움을 격려한다. ‘마음씀씀이를 깜냥대로 생각해 봐’라고 통이 큰 사람이 되기를 권하고 감독은 아이들에게 기운을 불어넣어 주기 위해서 ‘두 주먹을 꽉 잡고 배에다 힘을 들인 다음 매섭게 선수들을 노려’ 본다. 이 어린이 주인공들이 사내다움을 갈고 닦는 것은 무한경쟁에서 승리하기 위해서이거나 전장에서 장렬하게 전사하기 위함이 아니다. 최소한 작품 속에서는 그렇게 보인다. 그들이 땀을 흘리는 것은 자기 자신과 싸워서 이기기 위한 것이고 우정을 지키기 위한 것이다. 마치 인디언 올드 셰터핸드가 평화를 위해 가능하면 싸움을 피하지만 싸우게 되면 용감하게 싸운다고 했던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4. 센힘이와 영모, 지후
김선희의 『나, 전갈자리 B형 소년』에 등장하는 박센힘은 참 남자다운 이름을 가졌다. 그러나 센힘이는 그다지 힘이 세지 않다. 시원시원한 성격도 아니다. 아주 예민하고 비밀이 많고 눈으로 직접 보기 전에는 믿지도 않는 의심 많고 쫀쫀한 소년이다. 어쩌다 반 아이 한 명에게 잘못 주먹을 날리는 바람에 왕따가 되었지만, 원래 주먹질과 친한 것도 아니다. 아빠가 사고로 돌아가셔서 엄마와 둘이 산다. 예전 같으면 집안의 가장 소리를 들을 법도 하건만 센힘이는 엄마에게 별다른 위안이 못 된다. 그저 함께 장이나 보러 가주는 정도다. 엄마를 위해 생일상을 차리겠다고 당면을 물에 불리기도 하는 걸 보면 전통적인 사내아이와는 거리가 멀다. 센힘이 보다 더 남자다움이 두드러지는 것은 오히려 같은 학교 이슬이다. 이슬이는 친구를 대신해서 벌을 받기도 하고 수퍼마켓에서 대게를 차지하기 위해 훌쩍 몸을 날리기도 한다. 센힘이와 함께 힘차게 인라인 스케이트를 타고 축구도 엄청나게 잘 하지만 센힘이를 위해서 슬쩍 포지션을 양보하는 배포도 지녔다.
최근 우리 동화에는 센힘이 같은 남자 주인공과 이슬이 같은 여자 주인공이 늘어났다. 이를 두고 그동안 양성평등을 위해 노력해온 결과라고 간결하게 분석하는 것은 무척 조심스럽다. 동화 속 어린이 주인공들은 대립적인 성별 이분법을 넘어선 뭔가 다른 성적 정체성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 그런 과정에서 상대적으로 여성 어린이 주인공이 늘어났다. 여성 동화작가가 많은 현실에서 여성 어린이 주인공들의 증가는 자연스런 일로 볼 수도 있다. 하지만 동화 속 여성 어린이 주인공들이 적극적이고 건강하게 자신의 관점과 가치관을 성숙시켜 나가고 있는 사이에 남성 어린이 주인공들은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신중한 타진을 계속하고 있다.
공지희의 『영모가 사라졌다』는 조각을 좋아하는 영모가 주인공이다. ‘외로울 때마다 내 말을 들어주는 조각과 이야기를 나누는’ 영모는 이전의 주인공들과 여러모로 달랐다. 작가는 ‘뜨거워지고 있는 폭탄’이라는 말로 영모의 숨겨진 남성성을 얘기했지만 영모는 전세대를 풍미해온 남자다움의 가치를 정면으로 거부하는 남자 어린이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아버지 앞에서는 절대로 울면 안 됐'던 기억은 영모를 씩씩하고 대찬 소년으로 키운 것이 아니라 뭐든 꾹 참는 조용한 아이로 만들어버렸다. 아버지가 바라는 것은 모두 전세대가 소년들에게 바라던 것이다. 죽어라 공부하여 훌륭한 사람이 되어 가족과 나라를 구하는 판사나 대통령이 되는 것, 영모는 그 말만 들으면 숨이 막혔기에 그를 거부하고 라온제나로 떠난다. 영모는 아버지 같이 되는 것이 남자가 되는 것이라면 자신이 남자가 될 수 있을까 의심한다.
하지만 영모를 찾아 라온제나로 들어온 아버지가 자신의 어린 시절을 고백하는 장면은 의미심장하다.
“어머니는 무능한 아버지를 만나 죽도록 고생만 했어요....굶는 날이 더 많았어요....나는 넋이 나간 어머니 얼굴을 뒤로하고 집을 떠나왔어요....나는 결혼하면서 결심했어요. 내 아이만큼은 고생시키지 않으리라, 그리고 남부럽지 않은 훌륭한 사람이 되도록 모든 힘을 다해 뒷받침해줘야겠다.” (『영모가 사라졌다』, 136, 137면)
영모의 아버지는 석남이였고 수남이였고 창남이였던 것이다. 근대적 소년이었던 아버지는 현대의 영모를 이해하지 못했다. 소년다워짐으로써 영모의 모든 어려움이 해결된다고 믿었다. 그러나 영모는 새로운 시대, 다른 사내아이됨의 길을 걷고 있었다.
김양미의 『털뭉치』(창비어린이 2007년 봄호)에는 두 명의 지후가 나온다. 김지후는 여자(일 것으로 짐작한다), 이지후는 남자다. 둘은 참 비슷한데 조용하고 말이 없는 성격에다 같은 흙공방에 다니고 고양이를 좋아한다. 작품 초반부터 이지후는 줄곧 ‘남자 아이’라는 이름으로 지칭되고 있지만 김지후가 여자라는 단서는 딱히 나오지 않는다. 지후와 지후가 친구가 되었다는 것이 중요할 뿐 이 작품을 이해하는데는 성별이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남자아이가 들어오면서 공방의 공기가 확 줄어든 것 같았다’는 표현이나 이지후의 땀냄새, 김지후가 수다떨기를 좋아한다는 단서 정도로 성별의 차이가 드러나고 있기는 하지만, 그건 남자든 여자든 사실 상관없는 문제다. 작품 속에서 성별을 잘 느낄 수 없는 이유는 작가가 동작과 말씨에서 남녀 차이를 거의 두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작품을 읽으면서 끝까지 김지후를 남자라고 생각하고 읽어보았다. 큰 문제가 없었다. 성별 특성이 두드러지지 않는데도 두 명의 지후는 각기 선명한 개성을 지닌 인물로 그려진다. 사실 남자와 여자의 차이란 그런 것일 수도 있다. 굳이 따지려고 들지 않으면 남녀 이전에 그냥 한 사람으로 보인다. 또는 그 사람다움이 더 크게 보이면서 남녀를 잊게 된다. 작가는 전작 『찐찐군과 두빵두』에서도 남자아이들끼리의 사랑스러운 우정을 그려낸 바 있다. 사내다운 아이와 여자다운 아이가 나와야 흥미진진한 얘기가 전개된다고 믿는 사람들이 많다면, 김양미 작가는 분명 이 구도에 딴죽을 걸고 싶어하는 것 같다.
5. 남자가 된다는 것
『수학의 저주』, 『늑대가 들려주는 아기 돼지 삼형제 이야기』등을 썼던 작가 존 셰스카는 남자 어린이들에게 책을 읽혀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그래서 ‘남자다운 책읽기(http://guysread.com)’라는 웹사이트를 개설하여 비영리 교양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그는 많은 남자 작가들이 자신의 ‘사내다운 어린시절’에 대해서 쓴 글을 모아 『남자가 된다는 것(뜨인 돌. 2007)』이라는 책을 펴내기도 했다. 그가 왜 이런 책을 펴냈는지, 왜 남자 어린이 책읽기 운동을 펼치고 있는지 뚜렷하게 밝힌 자료를 찾지는 못했다. 그저 책 서문에서 늘 그가 말하는 투로 ‘이건 무슨 필독서도 아니고요. 그냥 남자가 된다는 것에 대한 우스꽝스럽고 어이없고 감동적인 내용들이에요. 심심하면 읽어보세요.’하는 식의 안내만을 찾아냈을 따름이었다. 웹사이트에도 ‘남자 어린이들이 책을 잘 읽게 되면 좋겠어요’ 같은 간단한 메시지만이 들어 있다.
하지만 셰스카가 왜 그런 운동을 펼치고 있는지 짐작 가는 바는 있다. 아마도 그는 근대의 소년이 사라진 자리에 어떤 ‘사내아이들’이 서 있을까 궁금하게 생각했을 것 같다. 그리고 사내인 자신이 그 아이들을 위해 무언가 해주고 싶다고 여겼던 것이리라. 실제 이 책을 보면 데이빗 섀논이 ‘안돼, 데이빗!’이 다섯 살 때 그가 그린 그림 아이디어를 그대로 옮긴 것이라든가, 크리스 반 알스버그가 아홉 살 때 자동차를 몰고 거리로 나갔던 사건이 그의 꿈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가 등에 대한 유쾌한 일화가 실려있다. 미래의 사내아이들은 근대의 소년들보다 더 유쾌하고 밝게 자신의 인생을 설계하게 되리라는 것은 틀림없는 것 같다. 다만 그들의 사내다움이 타자의 권력에 의해 폭력적으로 유용되지 않는 방식으로 자율적으로 건강하게 작용할 수 있도록 어떤 길을 함께 모색해주는 것이 동화를 쓰는 작가들의 역할이라고 생각한다.
1) Nancy Chodorow, 『모성의 재생산 : 정신분석과 젠더의 사회학 The Reproduction of Mothering : Psychoanalysis and Sociology of Gender』(1978)
2) George L. Mosse, 『The Image of Man』 (1996)
3) J.F.C. Guts Muths. 『Gymastiks für die Jugend』(1793)
4) See George L Mosse, "What Germans Really Read", Masses and Man, pp. 62-65
5) 댄 킨들런 지음. 최정숙 옮김. 『알파걸』, 미래의 창, 2006
첫댓글 첨부로 똑같은 파일을 붙였습니다. 월례토론회 당일에는 발제문을 드리지 않으니 출력해서 가지고 오시거나 읽어오시길 부탁드리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