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오는 나의 힘
박노자 오슬로 대학교수
제가 어린 시절에 쏘련시대의 탁월한 민중적 음유시인 비소츠키의 노래를 즐겨 들었는데, 그 중의 하나를 그 당시에 전혀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증오에 대한 밸러드>라는 주제의 노래이었는데, 파쇼 침략 시절의 쏘련인들의 파쇼들에 대한 감정들을 아주 적나라하게 드러낸 작품이었습니다. 일부의 가사를 소개하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강물 속의 적색 얼룩들을 보라!
악은 이 나라 안에서의 질서를 잡아보겠다고 한다.
칼의 손잡이는 우리 손 밑에서 차가워지고
(잡힌) 새처럼 절망감이 관자놀이 안에서 진동하고
마음은 증오로 미쳐간다!
증오는 젊은이들의 얼굴들을 일그러뜨리고
증오는 강기슭을 넘어 범람하고
증오는 갈증이 나서
적들의 흑색 피를 마음낏 마시고 싶다!
그렇다, 우리는 지금 증오의 포로가 됐다
한데, 적대심으로는 이 포로 상태를 타개할 수 없다.
우리의 증오는 맹목적이지 않고 흑색의 것이 아니다.
신선한 바람이 불러 정의롭고
진정한 증오심의 우리 눈물을 닦아주겠다!
증오로 가득찬 잔에서 마셔라!
한데, 우리들의 숭고한 증오는
사랑 옆에서 깃들어 산다!
(이 노래를 감상하실 분들은 여기에서 보시면 됩니다:
http://www.youtube.com/watch?v=83Kavk046GA ).
저는 이것을 도대체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증오는 어떻게 "숭고"할 수 있을까, 싶었습니다. 증오를 어떻게 노래할 수 있고, 증오심의 눈물을 어떻게 노래할 수 있는지, 도저히 이해 못했습니다. 파쇼들이 증오스럽다는 것까지야 다 이해할 수 있었지만, 그들에게 맞선 "정의"를 노래하면 되지, 왜 "증오"라는 단어를 이렇게 핵심어로 만들어야 하는지 몰랐습니다.
그런데 생각해보니 이것은 파쇼들이나 미제의 폭탄이 터지는 것을 한 번도 실생활에서 보지 못한, 그야말로 아이의 생각일 뿐이었습니다. 침략들이 자행되고 폭탄, 포탄들이 떨어지고, 대량실업이 생기고 소수의 사치와 상당수의 빈곤이 대조되는, 그러한 상황에서는 증오심은 필연히 생깁니다.
그리고 그것은 책망할 수도 없는 증오심이죠. 이라크에서 침략과 침략의 결과로 생긴 테러, 유행병 등에 아이들을 잃은 어머니에게는 "증오를 하지 말라"고 말할 수도 없잖아요? 미제 참략의 현장들은 그렇다 치고, 청년실업이 25%에 이르는 스웨덴에서마저도 인제 "계급적 증오"는 하나의 유행담론이 돼가는 것입니다.
요한 욘슨 (Johan Jönson) 같은 우리 계급의 전투적인 시인들이 중산계급 상부에 속하는 그 고용주를 살해라도 하고 싶은 최저임금 이하의 가내피고용자 (즉, 하인, 하녀)의 심정들을 노래할 때에, 이는 더이상 이상하게 보이지도 않습니다.
세계 공황으로 파멸을 향해 질주하는 자본주의 후기의 유럽에서는, "혁명"은 1968년처럼 "소외 극복"의 문제라기보다는, 노동자의 기본적 생계마저 파괴하는 자본가들에 대한 골수에 사무친 증오의 문제가 됩니다. "골수에 사무친 증오" 같은 표현은 불편하시죠?
그런데 청년 취업의 기회가 다 말라버린 스톡홀름에서 일을 찾지 못해 고교를 졸업하자 바로 오슬로에 향해 노르웨이 사람들이 전혀 찾지 않는 가장 귀찮고 손이 많이 가는 서비스업 직종 (판매원, 바리스타 등)에서 최저임금을 상회하는 보수로 겨우겨우 생존을 하고 (노르웨이 물가는 가난뱅이에게 살인적입니다!
지하철을 한 번 타면 5천원이 깨지는 나라입니다!) 노르웨이인들의 은근한 멸시를 받고 집을 얻거나 아이를 낳아 기를 생각을 거의 하지 못하는 스웨덴 젊은이의 흉중을 생각해보면 어쩌면 이게 당연하다는 생각도 듭니다. 그는 부모 세대보다 훨씬, 가시적으로 가난하고 힘든 삶을 살잖아요.
뭐, 청년실업자들이 이미 제3세계의 환경을 체험하고 "낮은 임금"이 아닌 기아를 걱정해야 하는 희랍이나 서반아 같으면 점차 증오의 바다가 돼가는 건 순리일 뿐입니다. 자본주의의 본질이 잔혹한 만큼 그 치명적 위기도 극도로 잔혹하고, 그 잔혹함 속에서 인간의 가장 안좋은 감정들이 절로 발로됩니다.
짓밟히고 신분적 강등 당하고 멸시 당하고 모든 기회들을 박탈 당한 이의 증오심 발로는 당연합니다. 이 증오심 발로가 특히 요동치는 혁명의 상황에서 우리 상상 이상의 잔혹한 장면들을 연출시킬 수 있다는 것도, 매우 매우 아쉽지만 그저 역사의 슬픈 현실일 뿐입니다.
친불 부역자들, 즉 불란서의 군에서 복무하면서 동족에게 총부리를 돌린 이들 중에서 최소한 약 3만 명이 부역자 처단, 숙청의 희생이 된 알제리의 반식민주의 혁명의 역사를 생각해보시죠. 뭐, 반식민 투사와 일반 현지 민간인들 중에서는 적어도 150만 명이 총살과 고문, 초토화 정책, 포탄과 폭탄으로 불란서 제국주의의 희생자가 된 것까지 상기해보면, 왜 부역자들에 대한 증오심이 이렇게 드높았는지 그 맥락을 쉽게 알 수 있지만 말입니다.
"똘레랑스"의 불란서가 알제리를 킬링필드로 만들었는데, 거기에 맞선 알제리인들의 증오심도 기록적이었습니다. 착취, 탄압의 현실이 그 희생자들에게 증오를 낳고, 그다음에 그 증오는 스스로 얼마든지 확대재생산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역사의 슬픈 현실이죠.
이 상황에 대해 좌파는 어떻게 대응해야 할까요? 당연히 피억압자들의 증오심을 십분 이해해야 합니다. 스웨덴의 뛰어난 노동계급 시인 요한 욘슨이 하는 것처럼 말씀입니다. 그러면서도 피억압자들에게 자꾸 반대편에도 우리와 소통할 수 있는 인간들이 있다, 반대편도 결국 체제의 희생자다,
반대편에 선 이들에 대해 친근하게 이해하고 그들의 고뇌를 잘 살펴보고 그들에게 제대로 다가갈 줄 알아야 한다, 이런 설득을 해야 합니다. 그래야 비소츠키의 말처럼 증오심의 옆자리에서 사랑이 발견되고, 결국 투쟁 속에서 증오가 사랑으로 대체될 수 있다는 것이죠. 구쏘련 같으면 "증오심 순화", "반대편에 대한 계급적이면서도 변증법적인 접근" 같은 걸 꽤나 잘 했어요.
예컨대 반파쇼 첩보 활동에 대한 걸출한 영화 <봄의 17개의 순간들> (1973년)에서 쏘련 첩보원들의 활약과 함께 독일 공산주의자와 반전평화주의자, 양심적 종교인들의 반파쇼 활동도 보여지고, 쏘련 첩보 요원이 양심파 독일인들과 손을 같이 잡고 동지가 되어서 일하는 것은 골자입니다.
그러니까 "반파쇼 투쟁"이 "반독일 투쟁"이 아님을, 독일인도 우리와 같은, 증오하면 안되는 사람임을, 그 영화를 본 이들은 직감할 수 있었죠. 독일공산당의 위대한 지도자 에르느스트 탤만의 이름을 딴 거리들이 모스크바와 레닌그라드에 있었고, 그의 얼굴은 쏘련 우표에서도 흔히 보였습니다.
그러니까 추상명사로서의 "파시즘"에 대한 증오와 구체적인 "양심적 독일인"에 대한 사랑이 공존할 수 있었던 기반이라도 만들어진 것이었죠. 물론 동독과의 우방적 관계를 고려해서 시행한 조처이기도 했지만, 좌우간 전쟁이 빚어낸 증오를 나름대로 잘 순화시킨 셈이죠.
대한민국은 지금도 반북 도발을 일삼는 직업적인 반북주의자 김영환씨가 "나는 중국 감옥에서 고문을 당했다"라고 "말"만 한다면 그 말을 <한겨레신문>마저도 그대로 취신하여 중국을 마구 비난하는 사설을 실을 수 있는, "중국이 잘못했다"라고 이야기할 때에 객관적 증거도 재판도 필요없고 무죄추정 원칙도 작동되지 않는 나라입니다.
중국, 북조선에 대한 증오심을 보수매체들이 계속 부추기고 있는 상황에서는 중국이 "인권이 없는 무법천지", "우리에 대한 위협"이라는 생각에 거의 전사회가 암묵적으로 동의해버리는 분위기가 은근히 만들어집니다. 증거도 객관적인 분석도 물론 다 필요없고요.
이는 혁명적 증오와 정반대로, 자본주의가 치명적 위기에 봉착했을 때에 지배층이 열심히 부추기는 파쇼적, 반동적, 배타적 증오입니다. 사실 한국형 파시즘의 이데올로기적 기반 중의 하나죠. 그리고 혁명을 거치지 못한, 1987-88년의 미완의 혁명에 대한 애매한 기억만 간직하는 이 사회는, 이 반동적 증오를 순화시킬 수 있는 그 어떤 문화적 장치도 보유하지 않고 있습니다.
파쇼화하자면 언제든지 할 수 있는 거죠. 단, 거인 중국에 정면 도전하는 것보다는 반북 증오심과 외국인 노동자들에 대한 배타심이 고양되어지는 것은 가장 현실성이 있는 시나리오죠. 아, 정말 이 반동적인 증오와 배타심을 상쇄시킬 수 있는 타자들에 대한 혁명적 사랑의 패러다임을 우리 사회가 만들어내지 못한다면, 우리 미래는 아주 걱정됩니다. 아주 아주 걱정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