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벤자민 프랭클린 자서전] 17 작은 도서관에서 한 걸음 나아가 공공 도서관으로
앞의 편지 두 통을 받은 지는 꽤 되었지만 그동안 너무 바빠서 그들의 요청을 받아들일 여유가 없었다. 집에 있었더라면 자료들을 뒤져보며 기억을 되 살릴 수도 있고 날짜도 정확하게 알 수 있었을 테니 훨씬 좋았을 뻔했다. 하지만 언제 집으로 돌아가게 될 지 확실히 알 수 없고 마침 조금 여유가 생겨서 기억이 허락하는 데까지 써보기로 했다. 살아서 집에 돌아간다면 그때 다시 수정하고 다듬으려한다.
앞에 썼던 원고가 내게 없는 탓에 필라델피아 공립 도서관을 세우기 위해 썼던 방법들을 얘기했는지 잘 모르겠다. 그 도서관이 시작은 보잘것없었지만 지금은 굉장한 규모로 발전했다. 내가 기억하기로 도서관을 만든 즈음(1730년)까지 얘기했던 것 같으니 거기에서부터 시작하기로 하자. 나중에 봐서 이미 얘기한 내용이라면 삭제하면 될 것이다.
내가 펜실베니아에 정착했을 때만 해도 보스턴 남쪽 지역에는 괜찮은 책방이 하나도 없었다. 뉴욕과 필라델피아의 인쇄소들은 사실 문구점이나 다름없었다. 거기에서 파는 거라고는 종이, 달력, 민요집, 교과서 몇 가지 종류 등이 다였다. 그래서 읽고 싶은 책이 있으면 영국에 따로 주문해야 했다. 하지만 전토 클럽 회원들은 다들 책을 어느 정도 가지고 있었다. 우리는 처음에는 술집에서 만나다가 나중에는 방을 하나 빌렸다. 나는 회원들 모두의 책을 그 방에 가져다놓고는 토론할 때 언제든 참고도 하고 집에 가서 읽고 싶으면 자유롭게 빌려 갈 수 있게 하자고 제안했다. 그렇게 하면 모두에게 이익이 될 듯했다. 우리는 내 제안대로 책을 모아놓고 한동안은 만족스럽게 이용했다.
이 작은 도서관이 쓸모 있는 걸 보고 나는 회원제 공공도서관을 만들어 좀 더 많은 사람들이 책을 볼 수 있게 하자고 제안했다. 내가 도서관 운영에 필요한 계획과 규칙의 초안을 짰고 그 초안을 바탕으로 유능한 공증인 찰스 브록덴이 회원 가입 등의 조항을 만들었다. 이 조항에 따라서 각 회원은 처음 책을 구입할 때 일정액의 돈을 내고 그 다음부터는 매년 회비를 내야 했다.
당시 필라델피아에는 책을 읽는 사람들이 별로 없었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아주 가난했기 때문에 아무리 부지런히 돌아다녀도 50명 정도밖에는 모을 수없었다. 그중 대부분이 젊은 상인들이었는데 그들은 처음에 40실링을 내고 해마다 10실링씩 내기로 했다. 우리는 이렇게 적은 기금으로 시작했다. 책은 해외에서 사들였다. 도서관은 일주일에 한 번씩 문을 열고 회원에게 책을 빌려주었으며, 회원들은 정해진 기한 내에 책을 반납하지 않으면 책값의 두 배를 물어야 했다. 얼마 안 가 우리 도서관의 효과적인 운여잉 소문나면서 다른 지역에서도 따라하기 시작했다. 도서관에는 기증받은 책들이 점점 쌓여갔고 사람들 사이에서는 독서 열풍이 불었다. 그때만 해도 별다른 오락거리가 없었던 터라 사람들은 쉽게 책과 친해졌다. 불과 몇 년 만에 이 나라 사람들은 다른 나라의 비슷한 위치에 있는 사람들과 비교했을 때 더 높은 교양과 지성을 갖추었다는 평가를 받았다.
우리가 위에서 말한 회칙을 결정할 때였는데, 우리와 우리 후계자들이 50년 동안 회칙을 지키기로 한 것을 두고 공증인 브록덴이 말했다.
“여러분들이 지금은 젊지만 이 회칙의 유효기간이 끝날 때까지 살아 있을 사람은 별로 없을 겁니다.” 하지만 많은 사람이 아직 살아 있다. 어쨌든 그로부터 몇 년 뒤에 도서관이 법인체가 되면서 영속하게 되었기 때문에 이 조항은 무효가 되었다.
그때 회원들을 모으기 위해 많은 사람들을 만났는데 그들 대부분이 거절을 하거나 싫은 내색을 하는 걸 보면서 아무리 유익한 사업이라 해도 자신을 내세워서는 원하는 결과를 얻을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어떤 목표를 이루기 위해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야 할 때 자신을 내세우면, 상대는 우리가 자신들보다 조금이라도 더 유명해질까 봐 선뜻 도우려 하질 않는다. 그래서 가능하면 나 자신을 드러내지 않으려고 했다. 친구 몇 명이 하는 일인데 당신이 책을 좋아하니 나더러 찾아가보라고 해서 온 거라고 말했다. 이렇게 하니 일이 쉽게 풀렸다. 그 다음부터 사람을 모아야 할 일이 있을 때면 이 방법을 썼다. 열에 아홉은 성공을 거둔 방법이므로 진심으로 추천하고 싶다. 잘난 체하고 싶은 마음을 잠깐만 억누르면 나중에 더 큰 보상을 받는다. 어떤 일의 공이 누구에게 있는지 불확실할 때 허영심 많은 누군가가 나서서 자기가 했노라고 주장할지도 모른다. 그러면 우리를 시기하는 사람이라 해도 가짜를 가려내고 우리에 대해 올바른 평가를 내릴 것이다.
도서관 덕분에 나는 꾸준히 책을 읽으면서 발전할 수 있었다. 매일 한두 시간씩은 꼭 책을 읽었다. 그 옛날 아버지가 마음과는 달리 나를 학교에 많이 보내지 못한 탓에 부족했던 공부를 어느 정도는 보충했다. 독서는 내가 스스로에게 허락한 유일한 오락이었다. 술집에도 가지 않았고 노름도 안 했으며 어떤 놀이도 즐기지 않았다. 부지런하고 끈기 있게 인쇄소 일을 했다. 인쇄소 때문에 빚이 있었고 공부시켜야 할 아이들이 있었으며 나보다 먼저 자리 잡은 두 인쇄소와 경쟁도 해야 했다. 그래도 내 형편은 조금씩 나아졌다. 내가 천성적으로 검소했기 때문이다.
어릴 적에 아버지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솔로몬의 잠언을 말씀하셨다. “네가 자기 일에 능숙한 사람을 보았느냐. 이러한 사람은 왕 앞에 설 것이요, 천한 자 앞에 서지 아니하리라.” 그때부터 나는 근면만이 부와 명성에 이르는 길이라고 생각했고, 언제나 이 말을 기억하며 용기를 얻었다. 하지만 글자 그대로 왕 앞에 서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런데 그런 일이 실제로 일어났다.
나는 다섯 분의 왕 앞에 섰고, 그중 덴마크 왕과는 식사를 함께 하는 영광을 누리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