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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세계의 이목이 우크라이나 전쟁에 온통 쏠려 있어 팔레스타인에서 벌어지고 있는 비참한 현실에 대해서는 관심이 멀어져 있다. 하지만 이곳의 비극은 훨씬 더 역사가 깊고 규모도 엄청나며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다. 우연히 도서관 서가를 훑어보다 '팔레스타인의 양치기 소녀'가 내 눈에 들어왔다. 이스라엘 군인들과 정착민들에 의해 벌어지는 엄청난 폭력으로 인해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당하는 고통과 슬픔이 한 양치기 소녀의 가족사를 통해 생생하게 그려져 있었다.
작가인 앤 로렐 카터는 캐나다의 어린이와 청소년 전문 작가로 1971년부터 이스라엘을 수 차례 방문해 키부츠에서 일하면서 히브리어를 공부했고, 이 소설의 자료 조사를 위해 라말라에서 영어를 가르치면서 팔레스타인 가정에서 머물기도 했다고 한다.
여섯 살의 아마니란 소녀는 어머니가 한사코 말리는데도 불구하고 기어코 양치기인 할아버지를 따라 올리브 과수원을 지나 작은 산언덕에 오른다. 아마니란 이름은 '여러 가지 소원'이란 뜻이라고 한다. 태어날 때 가족들이 소녀에게 소원한 바가 모두 달라 이름을 그렇게 지었다고 했다. 암양이 새끼를 낳는 것을 처음 보고, 숫양에게 받혀 넘어지기도 하면서 할아버지로부터 차근차근 양 치는 법을 배우기 시작한다. 소녀는 조부모와 백부 하니와 백모 파티마, 사촌들과 아버지 아레프, 엄마 로즈, 오빠 오마르가 함께 어우러져 살아가는 열네 명 대가족의 막내이다. 학교에 가라는 다른 가족들의 바람을 한사코 거부하고 양치기가 되기만을 원한다. 그리고 아마니의 열정과 재능을 알아본 할아버지의 지지로 양치기의 길을 갈 수 있게 된다. 대신 엄마로부터 읽고 쓰기를, 오빠에게 수학과 과학을 배우기로 했다.
그러나 이스라엘이 고속도로를 뚫고 새로운 정착촌을 건설하면서 그들의 삶의 터전이 날마다 위험에 처하고 온갖 횡포를 당하게 된다. 주변의 많은 팔레스타인 사람들과 베두인족들은 점점 터전을 빼앗기게 된다. 가족들은 그래도 몇 년 동안은 꿋꿋이 버텨내며 그런대로 행복하고 평화로운 시간들이 이어진다. 학교에도 가지 않고 70 마리 정도의 양을 보살피기에만 매달리는 아마니는 또래들의 놀이와 수다에서 따돌림을 당하지만, 개의치 않았다.
아마니가 열세 살이 되면서 세 가지 큰 변화가 찾아왔다. 맨 먼저 사춘기를 맞은 몸의 변화였다. 훨씬 더 그녀의 흥미를 끈 것은 오빠가 정부의 수의사를 찾아 이메일을 보내도록 도운 것이다. 수의사는 자기가 진행하는 새로운 좋은 품종의 양을 키우는 실험에 참여하도록 권했고, 그녀는 기대에 부풀었다. 마지막 변화는 할아버지의 몸이 점점 쇠약해져 쉬는 날이 많아진 것이다. 양치기는 이제 오롯이 그녀만의 일이 되었다.
그런 중에도 팔레스타인 전역은 이스라엘의 무단 점령과 횡포에 넌더리를 내고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폭동을 일으키거나 항의하다 그들의 총에 쓰러졌다. 텔레비전 화면에는 이스라엘에서 일어난 자살 테러의 참혹한 현장이 곧잘 비쳐졌다. 아빠가 소리 질렀다. “아무 죄도 없는 아이들이 죽었어! 도대체 무엇 때문에?” 큰아빠가 맞고함을 쳤다. “우리한테서 빼앗은 집과 땅에서 살고 있기 때문이지. 그걸 몰라서 물어? 400만이나 되는 사람을 난민으로 만들어 놓고 자기 민족의 안전이 걱정된다고? 우린 자유를 위해 투쟁했을 뿐이야!” 오마르도 말했다. “폭탄을 터뜨린 사람들은 순교자예요.” 알칼릴에 있는 오마르의 친구들 중 많은 수가 거리 투쟁에 참여하려고 저항운동에 가담했고, 잡혀가 감옥에 있다고 했다. 아빠는 어떤 일이 있어도 폭력적 복수는 안 된다고 평화적 시위를 주장하며 형제는 언쟁하는 일이 잦았다.
사흘이나 걸려 올리브를 수확한 후 마침 알칼릴의 통행금지가 하루 해제된 상황이어서 올리브 기름을 짜고, 겸하여 할아버지를 병원에 모시고 가기로 했다. 칠흑 같은 밤 가족들이 트럭에 타고 출발했다. 이스라엘 사람들의 부당한 횡포를 피해 구 도로로 가자니 차는 심하게 요동을 쳤다. 몇 개의 언덕을 넘은 뒤 군인들의 검문을 받았다. 아빠와 오빠가 초소에 잡혀 있고 남은 가족들만 올리브 기름을 짜고, 할아버지를 병원에 모시고 가 검진을 받고 돌아왔다. 일주일 후 할아버지가 심각한 폐렴 증세가 있으니 바로 병원으로 오라는 연락이 왔다. 그러나 할아버지는 이미 마음의 준비를 한듯 가지 않으셨다. 할아버지는 돌아가시기 전날 가족들 앞에서 가족의 가장을 상징하는 지팡이를 아마니에게 물려주겠다고 선언했다. 가족들은 할아버지를 마을 공동묘지에 묻었다. 아마니는 가장 든든한 지원군인 할아버지를 잃고 슬픔을 견디기 힘들었다.
포도를 다른 도시로 옮길 방법이 없어서 주렁주렁 매달린 포도송이들이 썩고 있었다. 이스라엘은 검문소를 늘리고 새로운 허가증을 요구했고, 그러려면 많은 비용을 준비해야 했다. 가족들은 심한 경제난에 시달렸다. 가족들의 살림이 어려워져 그렇게 사랑하던 양을 자꾸만 처분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20 마리까지 줄어들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올리브 과수원 위쪽에 정착촌을 만들고, 그들의 포도밭 한가운데로 고속도로를 내는 바람에 양들을 데려갈 목초지도 갈수록 줄어들었고, 물도 부족해졌다. 오빠가 준 책을 읽고 1948년의 대재앙에 대해서 알게 되었다. 이스라엘의 침략으로 60만 명의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집을 떠났던 것이다. 잠시만 버티면 돌아올 줄 알았던 사람들은 그대로 난민이 되고 말았다. 그런 일이 지금 가족들 앞에서 다시 벌어지려 하고 있었다.
캐나다에 계시는 외할머니가 암에 걸려 위독하고, 엄마를 보고 싶어 하신다는 연락을 받았다. 외삼촌들이 암만에서 토론토까지 오는 비행기표를 보내 준다고 했다. 외할머니는 1948년 대재앙 때 고아가 되었다고 했다. 예루살렘에서 자라 결혼을 했고, 마을이 몰수당하자 난민 캠프에서 잠시 살다가 가족들을 데리고 캐나다로 떠났었다. 그때 엄마는 피아노와 함께 혼자 이곳에 남겨졌다고 한다. 엄마와 헤어져야 할 것을 생각하니 절로 눈물이 흘러내렸다.
엄마가 옛날 이야기를 잘 하지 않아 처음 듣는 사실들이었다. 엄마는 결혼할 때의 일들도 얘기해 주었다. 아빠와 결혼할 때 할아버지는 이교도인 엄마를 받아들이지 않았고, 결혼식에도 참석하지 않으셨다고 했다. 당시 이교도인 엄마를 받아들이라고 할아버지를 설득한 사람이 바로 큰아빠였다고 했다. 엄마, 아빠를 위해 자기 몫의 유산을 나누어 주고 이 골짜기에 살게 하신 것도 큰아빠였다. 결국 할아버지도 앞으로 태어날 손주들을 무슬림으로 키운다는 조건으로 엄마를 받아들이게 되었다. 나중에는 할아버지도 두 아들이 모두 함께 살게 된 걸 감사히 생각하게 되셨다.
엄마와 오마르(대학에 진학하기 위해)가 떠나자 집이 텅 빈 것 같았다. 아마니는 매일 할아버지의 봉우리에 올라가 양을 쳤다. 정착촌을 건설하는 트럭과 불도저들이 북쪽 비탈로 올라와 있었다. 그들은 총까지 들고 있고, 혼자인 아마니는 불현 듯 두려움을 느꼈다. 갑자기 정착민이 쏜 총탄에 검둥이가 쓰러졌다. 어떤 소년이 자기 아버지를 말리려고 하는 듯 했다. 아마니는 재빨리 사헴과 함께 양들을 집으로 몰아갔다. 어른들은 이제 더 이상 양을 치는 일은 안 된다고 했다. 어쩔 수 없이 양떼를 다시는 산꼭대기로 데려 가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아빠는 모처럼 동지들과 함께 항의 시위에 나섰다. 온 가족이 수레를 타고 시위장을 향했다. ‘고속도로 건설 결사 반대! 이 땅은 우리 땅!’ 구호를 외쳤다. 많은 마을 사람들이 행렬에 동참했다. 일행 중에는 아빠의 동지인 사진 기자와 이스라엘 랍비도 있었다. 인부들은 공사를 중단하고 군인들을 잔뜩 실은 지프들이 시위 대열과 인부들 사이에 멈춰 섰다. 의기양양하던 아마니의 기분이 두려움으로 바뀌었다. 젊은 지휘관이 나와서 즉시 떠나지 않으면 모두, 할머니부터 먼저 감옥에 넣겠다고 엄포를 놓았다. 할머니는 용감하게 바닥에 자리잡고 앉았다. 가족들과 마을 사람들 모두 따랐다. 랍비가 나서서 장교와 무언가 대화를 나누자 장교의 분노의 표정이 조금 바뀌었지만, 돌처럼 굳은 표정은 여전했다. 기자는 이 모든 과정을 사진으로 기록했다. 인부와 군인들은 타고 온 차로 돌아가며 말했다. ‘앉아 있고 싶으면 마음껏 앉아 있으시오.건설을 방해하는 팔레스타인은 내일은 무조건 총살이오.’ 마지막 지프가 떠나자 시위대는 모두 일어서서 환호성을 질렀다. 아마니는 곰곰 생각한 끝에 정착민들로부터 양떼를 지키기 위해서는 영어를 익혀야 하고, 그러려면 학교에 가야겠다고 결심했다.
다음 날 사촌언니 와르데와 함께 학교에 갔다. 반 친구들과의 첫 만남은 그리 기분 좋은 것은 아니었다. 오후 영어 시간에 아부시 선생님은 아이들의 말을 일일이 고쳐 주면서 정확한 발음을 따라하게 했다. 아마니도 열심히 따라 했다. 아마니의 발표 차례였다. 간신히 용기를 내서 앞으로 나아갔다. 왜 학교에 오게 되었는지 묻는 선생님의 말씀에 아마니는 정착민들이 할아버지의 산을 빼앗았고, 자신은 양을 치고 있으며, 정착민의 총에 맞아 자기 양이 죽었던 사실을 얘기했다. 그런 일을 막기 위해 영어가 필요하게 되었다고. 이후 같은 슬픔과 고통을 겪고 있는 아이들은 아마니를 이해하고 가까워지게 되었다. 날이 갈수록 아마니의 영어 실력이 눈에 띄게 좋아졌다.
이후 몇 달 동안 13살의 어린 소녀가 감당하기에 너무 벅찬 재앙들이 닥쳐 왔다. 포도를 팔러 도시로 가던 중 큰아빠가 허가증이 없이 고속도로를 달렸다는 이유로 잡혀가 감옥에 갇혔고, 외할머니가 돌아가시고 나서 귀국하려는 어머니에게 입국 허가가 되지 않아 국경을 넘지 못하고 있었다. 큰아빠와 엄마가 언제나 집에 돌아올 수 있을지 막막했다. 그리고 올리브 수확을 하던 중 정착민들과 군인들이 나타나 총을 쏘며 위협하고 다시는 과수원에 출입해서는 안 된다고 경고했다. 또 안전한 풀밭을 찾아서 할아버지가 알려 주었던 비밀의 언덕에 갔지만, 정체 불명의 독을 탄 물을 먹은 양들이 떼죽음을 당했다. 남은 것은 물을 먹지 않은 새끼 두 마리뿐이었다. 그러나 비극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다음 날 학교에 갔다가 어떤 불길한 예감에 사로잡혀 집으로 내달렸다. 끔찍한 악몽이 펼쳐져 있었다. 정착민들과 군인들에 의해 그들의 삶의 터전인 할아버지, 큰아빠, 아빠의 집이 송두리째 무너지고 과수원의 나무도 모두 파헤쳐져 폐허로 변해 있었다. 그리고 돌아오던 아버지가 인부들과 군인들에게 달려들다 잡혀서 끌려가고 말았다.
동굴에서 잠을 깼을 때 엄마가 피아노를 치는 황홀한 꿈을 꾼 것 같았다. 그나마 다행히도 엄마와 오빠가 돌아온 것이다. 그들은 서로를 포옹하며 오열했다. 아마니는 아빠가 마지막으로 끌려 갔던 곳을 찾아가 아빠의 휴대폰을 발견했다. 마침내 눈에 띄는 이름을 누르자 전화번호가 나와서 통화를 시도했다. 전에 시위할 때 보았던 랍비였다. 얼마 후 랍비와 함께 여성 인권 변호사와 동지가 도착하였고, 그들의 도움으로 아빠는 바로 돌아올 수 있었다. 다른 감옥으로 이송되거나 국경 밖으로 추방되면 손쓰기 어려운데, 아마니가 신속히 조치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들은 큰아빠의 석방을 위해서도 계속 노력하고 있다고 했다. 아부시 선생님은 아마니가 내년에 라말라의 국제학교로 진학하기를 권했다.
나이 어린 소녀이지만 그녀는 누구보다도 강인하게 고통과 시련을 극복했다. 그녀를 비롯한 모든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자기들의 삶의 터전과 전통을 지켜나가고 좀더 평화로운 삶을 살 수 있게 되기를 간절히 빌어 본다. 그리고 꼭 그렇게 되리라고 믿는다. 이 소설 속에 등장하는 랍비와 인권 변호사 같은 인류 본연의 양심과 정의감에 일말의 희망을 걸어 볼 수도 있다. 그러나 종교의 탈을 쓴 집단적 광기에 비해 그들의 목소리는 너무도 외롭고 작다. 주인공과 친구가 되었던 정착민의 아들 조너선이 보여주는 행보도 관심을 끈다. 소년은 시오니즘 신봉자인 아버지를 따라 미국에서 왔는데, 이곳에서 벌어지는 동족들의 야만적 횡포에 깊은 실망과 혐오를 느끼고, 뉴욕으로 돌아가 이곳의 진실을 알리겠다고 했다. 팔레스타인의 평화에 대한 희망을 올리브 방학을 앞두고 아부시 선생님이 내준 영시 과제로 주인공 아마니가 쓴 시 속에서 찾아 본다.
내 이름은 아마니.
여러 가지 소원이란 뜻을 가졌다네.
하지만 내겐 오직 한 가지 소원뿐.
내가 태어나던 날 밤
할아버지가 엄마에게
산을 오르는 게 출산을 촉진시키는
알라의 방식이라고 하자
엄마는 그 말을 믿고
양떼가 오르던 그 길을 따라 갔다네.
할아버지 집 뒤로 산꼭대기까지.
마침내 내가 엄마의 몸에서 떨어져 나왔네.
하늘에서 내리는 비처럼 자유롭게.
내 이름은 아마니,
여러 가지 소원이라는 뜻을 가졌다네.
하지만 내겐 오직 한 가지 소원뿐.
내 피가 이 땅의 흙과 섞일 때까지
절대로 이 땅을 떠나지 않는 것뿐이라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