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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주교 칭다오 한인 공동체 10년사 (제1편-제2편) )
제1편 개 황
명칭 : 천주교 칭다오 한인 공동체(이하 ‘칭다오 본당’으로 명명)
소속 교구 : 대구대교구
설립연원일 :
소재지 : 青岛市 市南区 浙江路15号, 천주교당
수호성인 :
칭다오시 개황
1990년도 초 칭다오시 정부는 중앙 정부의 대외 개방정책에 따라 문호를 개방하고 적극적으로 외자 유치 준비를 하고 있었다. 첫 번째 대상 국가를 한국으로 설정하였으며 한국 기업인들도 한국과 지리적으로 가깝고 기후 풍토가 비슷하며 노동력이 풍부한 청도를 투자 적격지로 판단하였다. 92년부터 93년 사이에 100여 개의 한국 기업이 진출함에 따라 이곳에 거주하는 한국인들이 서서히 증가하기 시작하였다. 94년도 9월12일 주 칭다오 대한민국 총 영사관이 설립되면서 한국인들의 위상이 높아지기 시작하였다. 2007년 6월말 기준하여 청도에 투자 설립된 한국 기업은 6,000개, 장기 거주자는 공식 통계로는 약8만 명이라 하지만 15만 명 정도가 되지 않느냐는 것이 일반인들의 인식이다. 칭다오시는 산동 성 서남단에 위치하며, 동남 면은 황해, 서북 면은 내륙에 연접해있다. 행정구역은 5개 시(교주, 교남, 지무, 평도, 래서) 7개 구(시남, 시북, 사방, 이창, 황도, 노산, 성양)관할로 되어있다. 면적은 경기도 크기와 유사하다. 인구는 721만(시구 250만) 명이고, 한족 외 50개의 소수 민족이 거주하고 있다.
중국 칭다오 천주교 애국회 개황
가톨릭을 비롯하여 불교, 개신교, 도교, 회교 등이 주류를 이루며 가톨릭은 1897년 독일이 청도를 조차지로 점령하면서, 1898년에 독일인
1900년 -1902년에
1901년에 천주교 인쇄소를 설치하여 청도 관보 인쇄. 후에 천주교 인쇄소가 되어 천주교 서적을 출판하였다.
1905년 박산로(博山路)에 병상 40개의 천주당 의원을 개원하였다. 1925년 로마 교황청으로부터 정식 청도 교구로 승인되고 독일인
1932년 -34년에 구 건물을 헐고
1949년 사목 활동이 활성화되고 성언회(聖言會), 성모문학회(聖母文學會), 방지거 마리아 전교 수녀회(方濟各瑪利亞傳敎修女會), 신애회 (信愛會), 성신부녀회 (聖神婦女會), 성신 기도회(聖神 祈禱會), 등의 단체들이 활동을 하였다. 시구 10개소에 천주교당이 설치되고, 수녀원이 11개소, 외적신수인원(外籍神修人員), 36명, 화적신수인원(華籍神修人員) 158명이 활동하였으며 신자는 5000여명이 되었다. 그러나 50년대 종교개혁으로 중국 자주 독립 교회로 변화하였다. 1956년에 칭다오시 천주교 애국회가 성립하였다.
10년간(1966~76) 종교 활동정지, 문화 대혁명 기간을 보냈다.
1981년 애국회 중심으로 종교 활동이 재개되었다.
1987년 중국 천주교 교우회에서 한석량을 靑島 교구 주교로 선출하였다.
(상기 내용은
2007년 현재 청도 주교좌 당의 중국인 신자는 4000여명에 이르렀다. 1990년대 초의 중국인 신자들은 대부분이 노년층이었는데 지금은 젊은 층도 미사에 참석하고 있으며 가끔 혼례 미사가 이루어지고 있다.
제 2편 前 史 : 사목구 주임 파견 이전의 공동체
천주교 칭다오 한인회 결성
1992년 8월 한중 수교 후 현진 아우스딩은 그 해 12월부터 중산로 성당에서 미사에 참여하기 시작하였다. 그때에 한국인 교우 한 두 명을 교회에서 만날 수 있었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한국인 신자들이 8,9명에 이르렀다. 중국인 신자들 틈에 끼어 미사에 참여하다가 한국인 신자 모임을 갖기로 협의하고
1)월 회비는 발기인 6명은 각 200원, 특별 회원 200원, 일반 회원 100원
2)회칙 제정
3)중산로 성당 화단에 성모상 봉헌(몇 가지 원인으로 봉헌 불가)
4)한국 성당과 자매결연 추진
5)7월23일 토요일, 중국 신부님들과 상견례 추진
칭다오 천주교 애국회와 상견례
중국 측 : 칭다오 주교좌당의 이명술 요셉신부 ,토마스신부. 소주임, 장주임,지난(제남)남의 요셉신부. 허베이성(하북성)의 베드 로 신부,
한국 측 : 현진 아우스딩 회장,
모임은 화기애애하게 진행되었으며 중국 천주교 과거사와 제남의 이명술 요셉 주임 신부(現 성미카엘 주교좌당 주교)께서 문화 혁명 당시 겪었던 갖가지 체험담과 현재 중국 인민들의 종교 활동 그리고 한국 천주교회의 현황, 한인 교우회가 추후 지역사회에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가에 관하여 환담이 이루어졌으며 이주임 신부는 “천하(天下)의 신자는 한 집안 식구다.”라는 함축된 한마디로 한중 천주교인의 유대 강화를 강조하였다.
이 후 중국 성당 측에서는 한인 교우회 신자를 위하여 미사 시간에 맨 앞 좌석을 배정해주었으며 교리 공부 교실을 사무실로 사용하도록 허락해 주었다. 현진 아우스딩 회장과 회원들은 주일은 물론이고 평일에도 시간이 있을 때면 이곳에 모여 전교 활동, 숨은 교우 찾기, 중국 내 한인 천주교 모임과의 상호 협조, 본국 성당과의 연결, 기타 한인회를 활성화하는 방법에 대해 여러 가지로 논의하였다.
당시 베이징(北京)을 비롯한 티엔진(天津), 광조우(廣州), 따리엔(大連), 장촌(長春) 등에는 이미 한국인 신부가 상주해 있었고, 수녀들도 동북 지방에 진출하여 활동하고 있었다. 한국인 신자들로 이루어진 공소가 속속 들어서고 있었다. 중국 각 지방에 진출한 한국 천주교 기업인들과 가족들은 척박한 중국 현실에서 어려움을 극복하고 굳센 의지로 신앙의 주춧돌을 심기 시작했다. 칭다오에 산재해 있는 한국인들을 찾아서 전교를 하고, 성당의 존재를 모르는 숨어있는 신자들을 찾는 것이 무엇보다 시급한 문제였다.
언론 매체를 통하여 본국에 알려진 中國靑島天主敎韓人會
1994년 12월
그 당시 중국 청도에는 7백여 개의 한국 기업이 진출해 있었는데 교우회는 각 지역에 흩어져 있는 한국인 기업들을 방문, 회원을 늘리기 위해 다양한 노력을 기울였다.
그 당시 중산로 성당에는 지금 주교로 계신 이명술 요셉 주교가 주임 신부로 있었다. 그는 평소
이명술 주임 신부는 여러 나라 언어에 능통해서 대단히 유능한 신부로 칭송 받았다고 한인 교우회 공소 회장인 현진 아우스딩이 전했다.
또 서울 역촌동 본당에 적을 둔 신자가 칭다오에 여행을 왔다가 한인교우회의 활동에 놀라고 감격하여 성물을 기증 후 귀국하여 한국 일보에 한인 교우회의 활약상을 보도하였다.
친교활동
한국 신자들은 초기에 성미카엘 주교좌당에서 미사를 봉헌하면서 몇 가지 다른 점을 볼 수 있었다. 성당에 들어서면서 한국 신자들은 성수를 이마에 바른 후
중국 신부가 집전하는 미사를 봉헌하면서도 그들은 참으로 행복했다. 내 나라 내 땅이 아닌 이국 땅에서 비록 말도 못 알아듣고, 성가도 몰라 따라 하지 못했지만 미사를 드릴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감격스러웠다. 중국인 신자들이 처음에는 서먹서먹하고 일정한 거리를 두고 있었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서로 눈인사를 나누고 밝은 미소를 보내주곤 하였다. 비서장은 중국 생활에 어려움이 없느냐 만일 어려움이 있다면 정부에 이야기를 해주마 하고 많은 관심을 가져 주었으며 성탄절이나 부활절 같은 특별 미사가 있는 날은 성당 후편 2층 좌석에 앉아서 미사를 볼 수 있도록 배려해 주었다. 귀국하는 한국인 신자에게는 중국 특산물을 소개하여 주기도 하였다. 비서장인 석 선생은 이명술 요셉 주임 신부와 신학교 동창으로 신앙심이 깊었으며 한국 신자들의 신앙 생활에 많은 도움을 주었고 봉사에도 앞장섰던 진정한 신앙인이었다.
당시 한국인 신자들은
한국 신부의 靑島 방문
중산로 성당에 첫 줄을 차지하던 한국인 교우들이 점차 늘어나 두 줄에서 세 줄로 되어갔다. 청도에 거주하는 교민들이 증가한 이유도 있었지만 모든 교우들이 시간이 있을 때마다 동분서주 노력한 결과였다. 그 시절만 해도 한국인들이 중국에 도착해서도 두려운 마음에 일이 없을 때면 집 밖으로 나가기를 꺼려했던 시대였다.
교우들이 늘어가면서 우리말로 성가를 부르고 우리말로 기도하는 우리 한국 신부님이 집전하는 미사를 원하는 분위기가 높아갔다. 이곳 저곳 연락을 하였으나 쉽게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런데 주님의 은총으로 대구 대교구 포항 성당의 김두신 요한 신부가 한인 교우회의 초청을 받고 칭다오를 방문하였다. 그냥 방문이 아니라 공소 예절 책자를 가지고 왔다. 그리고 공소 예절 절차를 지도해 주었다. 이날을 계기로 한국 신자들끼리 공소 예절을 시작하게 되었다. 장소는 은도 화원의 안 헨리코 자택, 다행스럽게도 대한항공 칭다오 지점장이었던 안 헨리코가 일본 동경에 근무할 때 신자들을 모아 공소 예절을 한 경험이 있어 쉽게 적응이 되었다.
10월 29일 김 두신 요한 신부와 함께하는 한인 교우회 야외 공소 미사 겸 야유회가 노산 양코우(양구)에서 개최되었다.
한국어 월례 미사 봉헌
1995년 11월 대련에 유학 중인 수원 교구 소속
한국인 신부가 집전한 첫 세례식
12월 창춘 유학중인 성가소비녀 수녀회
성모회 결성
1996년 3월 성모회가 결성되었다. 회장에 이각형 카타리나가 임명되었다. 6월 성모회에서 성서 공부를 시작하였다.
첫 공소 설립
1996년 4월 고과원 공단에 위치 한
첫 교무금 책정
1996년 6월 한인 교우회는 94년도 월 회비 200위안 받던 것을 폐지하고 교무금 책정을 하였다. 성당 기틀의 초석이 되는 교무금 납부를 시작한 것이다. 그 해에 교무금을 납부한 가구는 10여 가구였다. 1995년 12월 교우회에서 집계 한 신자 수는 21가구 42명이었다.
9월18일에는 본국 교구에서 펼치는 북한 동포 돕기 활동에 참여하여 한화 50만원의 성금을 전달하였다
부활절 전야 미사
창고 한 쪽을 치우고, 의자가 모자라 공인들이 앉는 작업 의자를 가지런히 배열하니, 웅장한 성당보다는 못하지만 그래도 신자들의 미사 열기는 어느 대성당 분위기보다 엄숙하고 열정적이었다.
이용삼 요셉 신부가 매월 칭다오를 방문해서 미사를 집전하였다.
야외 미사
97년 6월 야외 미사가 嶗山 北九水에서 거행되었다. 이용삼 요셉 신부에 의해서 이루어 졌다. 각자 도시락을 지참하여 참석하였다.
칭다오에 있는 라오산(嶗山)은 경치 좋기로 유명한 명산이다. 칭다오시 동쪽에 있는 산으로 태고 때 화강암으로 이루어져 있다. 주봉인 거봉(巨峰)의 해발은 1,133m이고 그 동쪽은 노산만이고 남쪽은 황해이다. 기암 기봉들이 바다를 이루고 산, 바다, 산림, 하늘이 함께 어우러져서 “해상명산제일”로 불린다. 저명한 도교(道敎) 성지이며 국가 중심 명승지이다. 고대인들은 ‘신선의 저택’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노산 주변의 해안선은 87km이며, 해변 주위의 섬들은 모두 18개이다. 옛말에 “태산의 구름이 아무리 높아도 동해의 라오산만 못하다”라는 말이 있다. 또 라오산은 산광해색, 도가명산이라는 말이 있듯이 송, 원나라 때 절을 많이 만들어 도교의 명산이 되었다. 지금도 상청 궁, 하청 궁, 태평 궁, 화려 궁 등이 남아있다. 치유추치, 장산풍 등 역사적으로 유명한 도인들이 이곳에서 수련했다는 말이 있다. 라오산은 광대한 면적을 차지해서 모두 다 둘러보려면 1주일은 잡아야 한다. 따라서 대부분의 관광객은 칭다오 시내에서 라오산1일 투어에 참가하면, 아침에 관광 버스가 칭다오 역에서 손님을 모으기 위해 시내 중심을 순회한다. 남부 해안 도로에서 돌계단을 20분 정도 올라간 곳에 있는 전망이 좋은 용담 폭포가 있다. 리프트가 있어서 누구나 쉽게 산과 바다의 전망을 줄길 수 있다.
97년 10월10일 대구 대교구 김철제 바오로 신부(天津상주)가 칭다오를 방문하였고, 11월 인천 교구
최초의 월보 발간
김 철제 바오로 신부가 대구 대교구에서 FAX를 받아 1면 2면 3면은 대구 대교구와 같게 하고 4면은 칭다오 신앙 공동체의 공지사항 및 소식들을 전하는 형태로 만들었다. 천주교 칭다오 한인 공동체가 주보의 명칭을 “푸른 고을”로 정하였다. 푸른 고을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