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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단들
1.1. 지금까지의 복습
‘쿼바디스’의 DVD영화 포스터집으로 되돌아온 성민은 시달리던 직장에서 받은 스트레스를 풀 겸해서 교수님이 권했던 영화 한편을 저녁에 집에서 보았다. 제목은 ‘쿼바디스’이다. 이 영화는 헨릭 지엔키비츠(Henryk Sienkiewicz, 1846~1916)가 쓴 소설을 영화화 한 것이다. 처음부터 기독교인들의 순교 장면들을 보면서, 무신론자였던 주인공 빈니키우스가 아름다운 신앙인들의 모습을, 즉 죽음의 순간에서도 담대한 모습을 보면서 기독교인으로 개종하고 사랑하는 여인 리기아와 함께 순교에 나서는 장면을 보면서 성민은 눈물을 흘릴 수밖에 없었다. 게으른 자신의 모습을 다시금 되새겨 보았던 것이다. 영화를 보면서 교수님이 추천해 주신 『위대한 여인들의 발자취』가 생각나서 책꽂이에서 끄집어내어 읽어보았다. 여인들의 장렬한 순교 장면을 읽으면서 가슴이 뭉클해졌다. 혼자 기도하고픈 마음이 들어 방에 들어가 문을 잠그고 한참이나 울면서 자신의 못난 신앙을 고백하면서 하나님의 자비를 구하기도 하고 울면서 간구와 간청을 드렸다. 그리고 앞날에 대해 불평하던 자신을 꾸짖으면서 만사를 주님께 맡기고 나가겠다고 두 손 모아 하나님께 약속드리며 찬양으로 감사를 올렸다. 자연스럽게 마음에서 이런 찬송이 흘러나왔다.
나의 갈길 다가도록 예수 인도하시니 내 주 안에 있는 긍휼 어찌 의심하리요 믿음으로 사는 자는 하늘 위로 받겠네 무슨 일을 만나든지 만사형통 하리라 무슨 일을 만나든지 만사형통 하리라 나의 갈길 다가도록 예수 인도하시니 어려운 일 당한 때도 족한 은혜 주시네. 나는 심히 고단하고 영혼 매우 갈하나 나의 앞에 반석에서 샘물 나게 하시네. 나의 앞에 반석에서 샘물 나게 하시네. 나의 갈길 다가도록 예수 인도하시니 그의 사랑 어찌 큰지 말로 할 수 없도다. 성령감화 받은 영혼 하늘나라 갈 때에 영영 부를 나의 찬송 예수 인도 하셨네. 영영 부를 나의 찬송 예수 인도 하셨네. 아멘
그리고 성민은 잠자리에 들기 전에 지금까지 배웠던 것을 복습하고 싶어서 교회사 학교 수업시간에 적었던 공책을 끄집어내어 이불을 덮고 베개를 가슴에 베고 엎드려서 한 페이지씩 읽어보았다. 먼저 초대교회사는 ‘4가지 주제들’을 기억하라고 하신 교수님의 말씀이 생각났다.
그 주제들은 “로마제국, 핍박들, 교부들, 그리고 이단들”이다. 지금까지 로마제국, 핍박들, 그리고 교부들을 배운 것이다. 1세기부터 시작된 기독교인들에 대한 로마제국의 핍박은 일반적으로 ‘10대 핍박’이라고 불린다는 것이다. 핍박이 가장 절정에 이른 때가 데시우스와 디오클레치안(284~305) 때였다는 것이다. 가장 어두울 때는 동녘에 해님이 떠오르기 직전인 것처럼 가장 심했던 ‘대 핍박’인 시기는 곧 핍박이 종결되는 때가 되었다는 것이다. 마지막 물 한 방울로 컵의 물의 표면장력이 깨어지고 물이 넘치는 것처럼 시험 당할 즈음에 주님은 언제나 피할 길을 예비하신다는 것을 잊지 말라고 하셨다.
“성경 어디더라?” 하며 성민은 덮은 이불을 걷어 제치고 찾고자 하는 구절을 보기 위해 성경 이곳저곳을 뒤적거렸다. ‘아! 고린도전서 10:13였구나!’ 그리고 자세히 알기 위해 읽어보았다.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에게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치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 그리고 뜻을 자세히 알기 위해 책상에 꽂혀있는 영어 성경, 즉 NIV (New International Version) 성경을 펴서 읽어보았다. “No temptation has seized you except what is common to man. And God is faithful; he will not let you be tempted beyond what you can bear. But when you are tempted, he will also provide a way out so that you can stand up under it.” 짧은 영어실력이지만 해석해 보았다. 뜻을 되새기기 위해 . . . ‘어떤 시험도 없다. 사람에게 평범한 것 외에는 너희들을 붙잡는 어떤 시험도 지금까지 없었다. 그리고 하나님은 신실하시다. 그분은 너희들이 감당할 수 있는 것을 넘어선 어떤 시험을 직면하도록 하지 않도록 할 것이다. 하지만 시험을 받게 되면, 그분은 너희들이 시험에서라도 떳떳하게 일어설 수 있도록 하기 위해 길을 마련하실 것이다.’ “아멘!” 하고 성민은 잠자리에 들기 전에 기도했던 내용을 생각하면서 살포시 단잠에 빠졌다.
1.2. 영지주의
금요일 오후 직장에서 집으로 되돌아오려고 하자 친구들이 주말에 여행가자고 제안한다. 성민은 갈등했다. 오랜만에 제안하는 것이고 가는 장소도 가고 싶었던 곳이었다. 그래서 한 번쯤 교회사 학교에 결석해도 되겠지 하며 친구들의 제안을 받아들이려고 하다가 문득 이런 생각이 지나갔다. “다음 시간이 새로운 주제를 가지고 시작하신다고 했는데 . . . ‘이단들’ . . .” 그러면 첫 시간의 내용을 잊어버리고 나면 계속해서 연결고리를 찾지 못하는 것이 아닌가? 라는 생각이 든 것이다. 그래서 친구들의 제안을 거부하고 다음 날 아침 학교로 향했다. 이미 지난주에 복습도 했기 때문에 무언가 기대하는 마음으로 교회사 학교 수업에 임했다. 아니나 다를까 새로운 주제였다. 교수님의 강의가 늘 교회사 강의를 시작하실 때 큰 주제를 그려주시는데 그것을 지나쳐버리면 안된다고 알고 있는 성민은 새로운 주제를 시작하는 시간에 한 말씀도 빼뜨리지 않고 받아 적기로 마음을 먹고 앞자리에 앉았다. “안녕 하세요. 날씨가 좋죠? 일주일 동안 잘 지내셨어요? 저도 바쁘게 지냈습니다. 그런데 토요일마다 여러분들을 만난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매우 기뻤습니다. 이렇게 열심히 공부에 임하니 저 역시 가르치는 자로서 열심히 많은 것을 재미있고, 흥미 있게 가르쳐야겠다고 마음먹습니다.”
1.2.1. 이단 정의
“오늘은 지난주까지의 주제와 연관된 것이지만 새로운 주제가 될 것입니다. 바로 ‘이단들’이라는 주제입니다. 이단들을 배우면서 우리는 먼저 ‘이단’이라는 단어에 대한 정의를 생각해보았으면 합니다. ‘이단’, ‘이단자’, 그리고 ‘이단성’, 등등으로 나눠볼 수 있습니다. 영어로는 각각 ‘heresy’, ‘heretic’, 그리고 ‘heretical’입니다. ‘이단성’이란 누구든 가질 수 있습니다. 바른 교리를, 성경 진리를 잘못 알고 있는 경우라든지, 아니면 바로 알고 있어도 잘못 서술할 수 있게 되면 이단성이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들 역시 예외가 아닙니다. 누구든 이단성을 가질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어려운 ‘삼위일체론’을 제대로 알지 못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바로 알고 있어도 어설프게 알고 있기 때문에 잘못 설명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이단성이 있다고들 합니다.” “그렇다면 잘못 되었다고 말한다는 것은 곧 바른 것과 절대적 기준이 되는 것이 있다는 것을 전제하는 것이죠. 그 바른 기준을 가리켜 ‘정통’(orthodox)이라고 합니다. 무엇이 정통인지는 무엇이 이단인지를 알게 되면 자연스럽게 정통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이단이 있은 후 정통이 만들어졌다고 합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가 연못에 가서 얼굴을 비쳐볼 수 있는데 비쳐지는 우리의 모습이 물결로 인해 일그러진 모습을 보실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자신의 모습이 일그러진 것은 아니죠. 그런데 비쳐진 얼굴이 먼저가 아니라 단지 비쳐진 모습으로 비로소 나를 알게 되는 것뿐이죠. 이와 같이 이단과 정통과의 관계가 이러합니다. 이단으로 정통을 비로소 보다 정확하게 알게 됩니다. 본래부터 정통이 있었습니다. 이단이 생겨나니까 구별하기 위해 정통을 규정하기에 이른 것입니다.”
“그리고 ‘이단’이라 할 때는 이단성을 가진 한 개인, 한 개인이 무리를 짓거나, 파당을 짓거나, 또는 분당하게 되면 그 무리를 가리켜 ‘이단’이라고 정죄합니다. 그 정죄는 개인이 하거나 지역교회가 하는 것이 아니라 ‘총회’가 하게 됩니다. 요즘은 여러 총회가 있으니까 혼돈스럽겠지만 원리는 그렇습니다. 자신이 속해 있는 교단 총회에서 이단성을 가진 무리들을 가리켜 이단이라고 정죄하게 됩니다. 총회에서 정죄 받은 이단에 속한 개인을 가리켜 우리는 ‘이단자’라고 합니다. 이렇게 보면, 이단성이 곧 이단이 될 수 있고, 이단에 속한 자가 곧 이단자가 될 수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총회가 무엇을 두고 이단이라고 하느냐? 그 기준을 알게 되면 우리가 바로 걸어가게 되는 정통을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사는 곧 이단의 역사인 동시에 정통의 역사라 할 수 있습니다. 동전의 양면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이단의 역사는 곧 정통의 역사입니다. 흥미 있죠?”
“교수님! 질문이 있는데요. 흔히들 이단(異端)은 한자로 표현해서 ‘모두 같은데 끝이 다르다’고 하잖아요? 어때요? 실제로 그래요?”
“예~, 그럴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꼭 끝이 다르다는 것이 아니라 또는 어느 부분만 다른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다를 수도 있고 전체가 다를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들께서 지금 구체적으로 그림을 그릴 수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단이라고 하면 한국교회의 이단들을 연상할 수 있기 때문이지요. 아무튼 초대교회에 일어났던 이단들은 지금도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무엇을 두고 이단성이 있다고 하느냐를 알기 위해서는 이단성을 갖도록 했던 영지주의에 관해 먼저 알아야 합니다. 그 이유는 이단성을 일으키는 것이 바로 영지주의이기 때문입니다. 앞에서도 영지주의에 관해 가끔씩 말씀을 드린 적이 있는데 여기서는 보다 자세하게 말씀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동시에 여담으로 말씀을 드리지만 지금의 ‘포스터 모더니즘’, ‘뉴 에이지 운동’ 은 바로 영지주의 부활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신약성경 저자들도 ‘영지주의’를 경고했을 뿐만 아니라 1~2세기 교부들, 즉 변증가들도 영지주의에 관해 신랄하게 비판하고 경고하고 그들에 반대하여 많은 글들을 남겼습니다. 영지주의를 초대교회에만 국한 시켜서는 안되고 교회사 2,000년 역사에서 언제나 홍길동처럼 본연의 모습을 바꾸어 기독교 사상에 악영향을 크게 끼쳐 이단성을 갖도록 했습니다. 영지주의 자체는 이단이라고 볼 수 없죠. . .”
1.2.2. 영지주의 정의
“‘영지주의’의 정의에 관해서는 먼저 ‘45차 한국복음주의 신학회 발표회’에서 발표된 ‘파코미안 수도원운동에 끼친 영지주의’라는 논문에서 자세하게 찾아볼 수 있을 것입니다. 다음의 글을 이상영씨가 읽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영지주의는 신비하고 비밀적인 지식을 또는 ‘영지’(gnosis)를 통해 구원이 이뤄진다는 종교적 철학적 이원론을 철저하게 표방하는 운동이라고 한다. 이 운동은 영지주의자 발렌티우스(Valentinus, c. 105~c. 165)에 의해 설립된 로마학파와 알렉산드리아학파들이 2~3세기의 그레코-로만 (Greco-Roman) 세계에 그 절정과 그 번영을 나타내면서부터 알려지게 되었고 그 이후 이 운동은 기독교에 큰 충격을 준 신비적 종교운동이 되었다. 이 운동이 번영했던 시기는 교회교부들이 ― 이레니우스(ca. 120~203), 히폴리투스(d. 235), 터툴리안(ca. 150~160~ca. 220~240) 등이 ― 활동했던 시기였다. 그래서 그들은 영지주의 위협을 느끼고 간과하지 않았던 것이다. 교부들이 초긴장을 하며 대응했던 이유는 대부분의 영지주의자들이 기독교인임을 고백한다고 가정하면서 초대교회에 정통 기독교와는 너무나도 다른 신앙을 고수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교수님! 영지주의에서 말하는 ‘영지’란 무엇인가요?”라고 글을 읽던 이상영씨가 묻는다. “글쎄요 . . . 처음에는 저도 ‘영지버섯’을 연상했거든요. 혹시 영지버섯을 연상하신 것은 아니시요? . . .” 모두들 “하하하” 하며 큰 소리로 웃는다. “계속하여 그 글에서 이렇게 설명하는데 그 다음 문단을 읽어보시면 답이 나올 것입니다. 이상영씨가 계속하여 읽어주시는 것이 좋겠네요.”위에서 언급한 ‘영지’의 의미는 일반적인 의미에서의 지식보다는, 산만하고, 분석적이고, 추상적인 지식이라기보다는, 지성적인 이해를 넘어선 실재에 대한 통찰력을 의미한다. 신비한 영역이나 알 수 없는 영역에 대한 지식이다. 신비한 영역에서 오는 신적 존재의 ‘섬광’(spark) 또는 ‘씨앗’(seed)은 전적으로 악한 물질세계에 주어졌다. 그 섬광들 또는 씨앗들은 인간의 몸에 갇혀 있다. 하지만 ‘신비한 지식,’ 즉 ‘영지’로 다시 일깨워진 신적 요소는 사람들을 초월적 영적 영역에서 적절한 보금자리를 갖도록 한다.“그래서 영지주의자라고 할 때는 영지를 소유한 자들, 즉 신비한 지식을 소유한 자들이라고 하지요. 이러한 영지를 소유하려고 노력하는 이유는 그 영지를 통해 극상의 존재이신 하나님, 최고로 거룩하시고 존귀하신 하나님과 연합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구원으로 봅니다. 완전한 상태에 이르기를 원하지요. 하지만 우리 정통신앙에서 말하는 구원은 에베소서 2:8~9에서 말씀하시는 것에서 잘 알 수 있죠.
영지주의가 말하는 구원과 우리는 다릅니다.”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 “지식, 또는 어떤 특별하고 신비한 지식, 즉 영지를 가지는 자가 영적으로 성숙했다는 것도 아니고 그것으로 구원을 받는다고 하는, 다시 말하면, 불교에서 말하는 해탈하는 것과 같은 것을 구원이라고 성경은 결코 말씀하지 않습니다.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고 분명히 말씀하고 있으십니다. 그래서 영지주의자들은 대체적으로 엘리트의식으로 가득 차있습니다. 무슨 말이라고 하면, 신비한 지식, 즉 영지를 가졌으니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하며 스스로 엘리트의식, 특권의식을 갖고 있다는 것입니다. 중세교회인 로마 카톨릭에서 가졌던 ‘교권주의’처럼 말입니다. 자신들만 무슨 특별한 것을 깨닫고 있고 소유하고 있다고 하는 특권의식을 가지면서 특권층을 형성하는 교권주의처럼 말입니다.
그래서 영지주의자들은 세 종류의 사람들이 있다고 합니다.” 첫째, ‘영적인 자들’(pneumatic)인 영지주의자들 또는 구원을 확신하는 자들이다. 그들은 영의 영향 아래 있기 때문에 구세주를 인식하고 그에게 일치한다. 둘째, 완전한 영지주의자들은 아니지만 지식으로 구원을 받을 수 있는 사람들은 ‘심령자들’(psychic)이 있다. 이들은 첫째와 둘째 부류의 사람들 사이에서 주저하지만 구세주에게 가까이 가려고 부단히 노력한다. 셋째, 구원을 받지 못하는 자들인 ‘물질인들’(hylic)은 물질의 지배를 받고 있다. 그래서 영지주의자들은 금욕을 지나치게 행하여 영의 지배를 받으려고 노력한다. 이들을 구분할 수 있는 것은 그들의 열매를 통해 알 수 있다.
『역사신학』의 겉표지“교수님! ‘영지주의 정의’를 내리시기 전에 말씀하시기를 ‘기독교 사상에 큰 영향을 끼쳤다’고 하셨잖아요?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어떤 것들에 영향을 끼쳤다는 것입니까?” “좋은 질문입니다. 이주영씨! 먼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자세한 설명을 알기 위해서 윌리엄 커닝함이 쓴 『역사신학』 상권의 4장 ‘사도적 시대의 이단들’을 읽어보시기를 권합니다. . . .”
“교수님, ‘역사신학’이라는 책이 어느 출판사에서 나온 것인지 말씀해 주시겠어요?” 이주영씨가 계속하여 물었다. “예, 바로 이 책인데요. 그리심에서 나온 것으로 무려 800페이지 이상이 되는 두꺼운 책이면서 가격도 무려 3만원에 이릅니다. 그런데 매우 어려운 책이지요.” “교수님, ‘역사신학’이란 것이 무엇을 연구하는 과목입니까?” “신학에는 기본이 성경신학입니다. 성경신학을 근거로 하여 조직신학이 세워집니다. 그런 후 사회와 역사를 바라보면서 그 신학이 어떻게 발전되었는지를 살펴보는 것이 ‘역사신학’입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교회사 + 조직신학’이라고 말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래서 영어로서는 ‘Historical Theology’ 라고도 하고 ‘History of Theology’라고도 합니다. 다시 말하면, ‘신학의 역사’ 또는 ‘신학사’라고도 하지요. 조금 쉬었다가 강의를 계속할까요?” 휴식 시간을 이용하여 성민은 도서관으로 가서 책을 빌려 읽어보도록 했기 때문에 곧장 도서관으로 찾아갔다. 그리고 교수님이 말씀하신 부분을 읽어보았다. 처음 2세기의 이단적 체제에 대하여 일반적으로 사용된 이름은 영지주의(Gnosticism)였다. 어떤 의미에서는 3세기에서도 존재했다. 3세기에 이르러서는 특별히 마니교(Manichæsm)가 매우 주요한 이단으로 떠올랐다. 영지주의는 인류 역사에 흥미를 주는 장을 형성하고 인간성을 연구하는 자와 인간성의 능력과 경향들을 철학적으로 연구하는 자에게 어떤 유용하고 교훈적인 훈계를 주기도 한다.
독신주의와 수도원제도는 영지주의 원리들이 교회에 가장 명료하고 완전하게 발전되었던 실례였다. 교리들의 과정과 관계를 추적하는 것을 흥미롭게 여기는 사람들은 초기에 퍼져있었던 다른 견해들과 개념들에서 후에 교황제로 완전히 발전되어 나갔던 것을 추적해나가기를 원했다. 이런 사람들 가운데서 영지주의 원리들은 발전되어 나갔다. 여기까지 읽던 성민은 읽어도 잘 이해되지 않았다. 그렇지만 읽는 것에 몰두하다보니 수업 시간 시작을 잊고 말았다. 급히 책을 덮고 수업이 이뤄지는 방으로 들어가 앉았다. 1.2.3. 영지주의자들“교수님! 영지주의에 관해 간략하게 설명해 주셨는데요. 그런 어처구니없는 사상을 소개한 사람들을 소개해 주실 수 있어요?”“예~ 지금 제가 그 이야기를 하려는 참입니다. 뜻이 같이 통했네요. 조금 길지만 영지주의자들에 관해 말씀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그 중에서 네 사람, 즉 마구스, 바실리데스, 마르키온, 그리고 발렌티누스 등을 주의 깊게 봐주시기 바랍니다.”
1.2.3.1. 니골라당
“먼저 니골당이란 흔히들 사도행전에 나오는 시몬이라는 자부터 시작했다고들 합니다. 보다 거슬러 올라가면 요한계시록 2:6, 15~17에 나오는 ‘니골라당’에서 유래했다고 보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이런 사실을 언급하신 분은 2~3세기 교부이며 변증가인 저스틴 마터이었습니다. 기억나시죠? 순교자였기에 저스틴 ‘마터’라 불렸던 인물이었다는 분 말입니다. 이어서 변증가 이레니우스는 자신이 쓴 유명한 『이단에 반대하여』라는 책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니골라당은 사도들에 의해 집사를 처음으로 받은 자인 니콜라스를 추종하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무절제적인 방종한 삶을 살고 있습니다. 이런 자들의 특징에 대해서 요한 계시록에 자세히 설명하고 있습니다.” 계속하여 이런 자들은 영지주의자들이라고 칭하고, 이그나티우스와 동일하게 시몬과 메난더를 근거하고 있다고 합니다.
1.2.3.2. 시몬 마구스
“사도행전 8:5~25를 권정기 씨가 우리를 위해 읽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빌립이 사마리아 성에 내려가 그리스도를 백성에게 전파하니. 무리가 빌립의 말도 듣고 행하는 표적도 보고 일심으로 그의 말하는 것을 좇더라. 많은 사람에게 붙었던 더러운 귀신들이 크게 소리를 지르며 나가고 또 많은 중풍병자와 앉은뱅이가 나으니. 그 성에 큰 기쁨이 있더라. 그 성에 시몬이라 하는 사람이 전부터 있어 마술을 행하여 사마리아 백성을 놀라게 하며 자칭 큰 자라 하니. 낮은 사람부터 높은 사람까지 다 청종하여 가로되 이 사람은 크다 일컫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하더라. 오래 동안 그 마술에 놀랐으므로 저희가 청종하더니. 빌립이 하나님 나라와 및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에 관하여 전도함을 저희가 믿고 남녀가 다 세례를 받으니. 시몬도 믿고 세례를 받은 후에 전심으로 빌립을 따라 다니며 그 나타나는 표적과 큰 능력을 보고 놀라니라.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들이 사마리아도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다 함을 듣고 베드로와 요한을 보내매. 그들이 내려가서 저희를 위하여 성령 받기를 기도하니. 이는 아직 한 사람에게도 성령 내리신 일이 없고 오직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만 받을 뿐이러라. 이에 두 사도가 저희에게 안수하매 성령을 받는지라. 시몬이 사도들의 안수함으로 성령 받는 것을 보고 돈을 드려 가로되 이 권능을 내게도 주어 누구든지 내가 안수하는 사람은 성령을 받게 하여 주소서 하니 베드로가 가로되 네가 하나님의 선물을 돈 주고 살 줄로 생각하였으니 네 은과 네가 함께 망할찌어다. 하나님 앞에서 네 마음이 바르지 못하니 이 도에는 네가 관계도 없고 분깃 될 것도 없느니라. 그러므로 너의 이 악함을 회개하고 주께 기도하라 혹 마음에 품은 것을 사하여 주시리라. 내가 보니 너는 악독이 가득하며 불의에 매인바 되었도다. 시몬이 대답하여 가로되 나를 위하여 주께 기도하여 말한 것이 하나도 내게 임하지 말게 하소서 하니라. 두 사도가 주의 말씀을 증거하여 말한 후 예루살렘으로 돌아갈세. 사마리아인의 여러 촌에서 복음을 전하니라 .
플로렌스에 있는 상타 마리아 델 피오레 성당에 그려진 그림으로 황제 클라우스 앞에서 바울과 베드로가 마구스와 논쟁하는 그림
“‘시몬’이라는 말은 후에 ‘simony’를 만듭니다. 이 말은 중세시대에 들어서서 ‘성직매매’라는 말로 사용됩니다. ‘성직매매’라는 용어는 중세 교회사를 배우면서 자주 듣게 될 것입니다. 이 말은 성직을 권력으로 여겨 재물을 가지고 구입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를 들면, 큰 교구를 맡거나 큰 교회에 가서 부교역자 역할을 하면 생활비를 넉넉하게 받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뇌물을 주거나 인맥을 통해 직책을 차지하게 되면, 누구든 이런 유혹에서 벗어나기가 쉽지 않겠지만, 이러한 것도 ‘성직매매’의 일종으로 봐도 과언이 아니라 여깁니다. 아무튼 귀한 교역의 일을 물질적 조건으로 여긴다면 바로 현대판 ‘성직매매’라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이러한 시몬 마구스는 변증가인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 작품에 등장하는데 그가 후에 ‘사마리아인들’이라는 단체를 세웠다고 합니다. 시몬 마구스는 로마제국 황제 클라우스 시대(41~54)에 스스로 인간 형태를 가진 신이라고 억지 주장했습니다. 요즘에 나타나는 사교들의 교주들의 말과 같죠? ‘작은 예수’ 뭐~ ‘큰 예수’ 등등으로 자칭하면서 말이죠. . . 신으로서 유대인의 메시아라고 자청했다고 합니다. 자신이 죽은 후 3일 만에 부활할 것이라고 호언장담했다고 합니다. 말도 안되는 말이지만 당시에는 말로 통했답니다. 성경에 나오는 해변가 도시인 두로에 가서 ‘헬렌’이라는 매춘녀를 만나 즐기면서 그녀를 길 잃은 양과 비유하면서 그녀를 구출할 것이라고 했답니다. 자신을 인류의 구원자로 자칭했지요. 그래서 『이단과 정통』을 쓴 브라운 교수도 하는 말이 “시몬 자신이 실제로 하나님이고 외형으로만 사람인 것처럼, 자신의 십자가에 못 박힘과 죽음도 단순히 외형으로 나타났을 뿐이라고 시몬은 가르쳤다. 그래서 그노시스주의가 그리스도가 단순히 인간인 것처럼 보인다고 말하는 교리인 ‘가현설’(docetism[도케티즘], 헬라어 doketio[도케티오], ‘나타나다,’ ‘. . . 처럼 보인다’)의 서론이 시작된 셈이라고 했습니다.” “강의를 듣다보니 요즘 한국에서 내로라하는 이단들을 보면, 대체적으로 시몬 마구스와 유사성을 지니고 있음을 알 수 있네요. 자신이 뭐 예수라고 자칭하면서 사기를 치고 자신이 세상을 구원할 자라고 하는 것 등 말입니다.” 장이권씨가 질문을 한다.
1.2.3.3. 케린투스
“사도요한이 쓴 서신서들을 읽다보면, 특별히 요한 1서 4:2, 즉 ‘하나님의 영은 이것으로 알찌니 곧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시인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요’에서 보면, 그리스도의 육체로 오신 것을 부인하는 자들이 당시에 있었다는 말이잖아요. 즉 가현설을 주장하는 자들에 반대하여 경고하는 말씀임을 알 것입니다. 이렇게 성경은 이미 영지주의자들이 영적 진리를 혼란스럽게 하고 있음을 엄히 경고하고 있습니다.”“영지주의에 속한 자들은 또한 천년왕국설, 즉 종말에만 관심을 갖는 자들이기도 합니다. 1세기 말에 나타난 ‘케린투스’라는 자가 있었는데 변증가 이레니우스에 의하면, 그는 최상의 존재가 세상일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고 최상의 하나님에 대해 무시하려는 능력이 세상을 창조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 능력이, 즉 7명의 천사들이 세상을 창조했다고 합니다. 마지막으로 창조된 인간은 신의 형상을 가졌다고 합니다. 최상의 하나님으로부터 나오는 능력은, 즉 덕은 세례 시에 요셉과 마리아의 아들인 예수님에게 부어졌다고 합니다. 이러한 억지 주장은 결국 영지주의자들이 말하는 ‘이온들’에 관한 정보를 제공하게 되기도 합니다. 그리고 이런 자들은 결혼과 자녀들을 낳는 것은 사탄의 일이고 사악한 일이라고 합니다. 결혼을 사악한 일이라고 보는 것은 육적인 것을 생산하기 때문이죠.” “그럼 교수님! 영지주의가 종말론과 관련을 맺고 있군요? 그렇다면 제가 듣기로는 최초의 종말론자들이 ‘몬타누스파’라고 들었거든요? 그렇습니까?” “예, 그렇습니다. 제가 4.2.5.1.1.에서 터툴리안을 설명하면서 간략히 설명한 것으로 여깁니다. 터툴리안이 후에 몬타누스파로 개종한다고 하면서 말이죠.”“아! 예~ 기억납니다. 감사합니다.”
1.2.3.4. 사투르니누스
“바실리데스와 동시대 인물인 사투르니누스(Saturninus 또는 Saturnilus, 117~138)에 대해서는 히폴리투스가 쓴 『이단논박』의 16장에 자세하게 설명되어 있습니다. 그렇다고 순교자 ‘사투르니누스’와 혼동하시면 안됩니다.” “교수님! 순교자 사투르니누스는 처음 듣는 이름인데 누구인가요?” 이상영씨가 질문한다. “아~ 예~ 제가 말씀드리지 않았나요? 제 실수입니다.
순교자 사투르니누스는 245년 로마감독 파비안의 파송을 받아 프랑스 고올 지방에서 복음을 전파했습니다. 그래서 그 지역에 최초의 감독이 되었죠. 그곳에 많지 않은 기독교인들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가 온 이후 날로 성도의 수는 늘어만 갔습니다. 대부분이 이교도인 그곳의 주민들은 그의 활동을 가만히 보고만 있지 않았습니다. 어느 날 그들의 신전 앞을 지나가는데 무리들이 그를 보고선 자신들의 신들에게 희생제물을 드리라고 위협했습니다. 그러자 사투르니누스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황소에게 매여 끌려가는 순교자 사투르니누스저는 오직 한 분 하나님 외에는 경배를 드리지 않습니다. 당신들이 말하는 신들을 저는 두렵지 않습니다. 제가 왜 두려워해야합니까?“이 말을 들은 군중들은 그를 황소에 매어 신전 앞으로 끌고 갔습니다. 황소에게서 그의 온 몸은 찢어지고 만신창이가 되었습니다. 그런 후 그의 시신은 거리에 내팽겨졌습니다. 그러자 경건한 두 여인이 그 시신을 한적한 곳에 고이 묻었다고 합니다. 그는 그야말로 위대한 순교자입니다. 하지만 이런 고귀하신 분과 지금 우리가 다루는 인물과 혼동해서는 결코 안된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그럼 다시 영지주의자 사투르니누스로 돌아갈까요?”“영지주의자 사투르니누스는 시리아의 안디옥 출신인데 그에 의하면, 모든 사람들에게 알려지지 않은 한 아버지는 천사들, 본질들, 또는 능력들을 창조했습니다. 7명의 천사들에 의해 세상과 사람이 창조되었습니다. 그래서 창세기 1장에 나오는 우리들의 형상과 모양은 천사들의 것이라고 합니다. 사람들의 모습이 지렁이에 지나지 않지만 위로부터의 ‘생명의 광채’(scintillation)로 인해 인간은 활력을 갖게 되었답니다. 천사들에 의해 두 종류의 인간이 창조되었습니다. 하나는 선한 영적 인류이고, 다른 하나는 악한 지상적인 인간입니다. 이렇게 인간에 대해서 두 종류의 인간임을 말한 자는 사투르니누스가 처음입니다.”
“또 그는 하나님께서 태어나지 않고, 형상을 가지지 않은 구세주를 사람인 것처럼 하여 보내셨다고 하면서 가현설을 주장했습니다. 그에 의하면, 구세주는 사악한 유대인의 하나님에게서 떠나도록 하기 위해 와서 자신을 믿는 자에게 구원을, 즉 생명의 광채를 되찾아 주었다는 것입니다. 그의 사상을 다시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1) 성부와 세상 간에 다소간 타락하기 쉬운 중개자의 하강하는 사슬의 개념; 이러한 것을 “시대”라 번역되는 헬라어의 어원을 가진 “이온들(aeons)”은 신과 같은 영적 실재라는 특별한 의미를 가진다. 유대인들의 하나님과 천사들은 타락하고 기본적 이온들이고 그 가운데서 선한 이언이 그리스도이다.
(2) 영적 세계와 물질적 세계간의 이원론이 이런 사슬에 포개진다. 영적인 실재인 이온들은 선하거나 악할 수 있지만 물질세계는 악한 이온들의 산출이고 그 자체는 악하다.
(3) 특별히 구원에 대한 이러한 영지주의적 개념은 육체적 감옥으로부터 구현된 인간 영혼들의 자유와 성부에로의 귀환을 의미한다. 하지만 신약성경과 너무나 다른 이 개념은 육체의 부활만 아니라 영혼의 생존을 필요로 한다.
1.2.3.5. 바실리데스
바실리데스“영지주의 창시자이며 최초의 영지주의 조직신학자인 바실리데스(Basilides, 140년 사망)는 알렉산드리아출신입니다. 개인 생애에 대해서 전혀 알 수 없으나 그의 아들 이시도레가 있었다는 것을 사료들을 통해 알 수 있을 뿐입니다. 그의 아들은 바실리데스의 교리를 발전시켜 제자들을 이끌어나갔습니다. 바실리데스는 베드로의 해설자로 알려진 글라우키아스의 제자라고 자청하면서 자신의 가르침들은 그에게서 배웠다고 했습니다. 또 다른 곳에서는 바실리데스가 바르카바스와 바르코프라 불리는 선지자들을 세우고 사도 맛디아의 구두적 가르침을 받았다고 합니다. 모두 거짓이지만 말입니다. 사투르니누스와 함께 안디옥의 메난더의 제자로서 알렉산드리아에서 로마제국 황제 하드리안(Hadrian, 117~138)과 황제 피우스(Antonius Pius, 138~161) 시대에 가르쳤습니다.”
“바실리데스의 저서들이 현존하지 않지만 복음서에 관해 24권을 썼다고 합니다. 하지만 남아있는 사료를 통해서만 그의 사상을 우리는 알 수 있을 뿐입니다. 그의 사상의 핵심은 모든 것이 순수한 무의 상태 또는 ‘무존재’(nonentity)라는 것입니다. 바실리데스는 태어나지 않은 아버지로부터 ‘이성’(nous)이 처음 나오고, ‘이성’으로부터 ‘로고스’가, 로고스로부터 ‘신중’(phronesis)이, ‘신중’으로부터 ‘지혜’(sophia)와 ‘힘’(dynamis)이, ‘지혜’와 ‘힘’으로부터 능력들, 본질들, 그리고 천사들이 나왔다고 합니다.”
아브라삭스“이런 천사적 존재들로 인해 가장 높은 하늘, 즉 첫 번째 하늘이 만들어졌고, 이들의 발산으로 인해 형성된 다른 능력들은 첫 번째 하늘과 유사한 또 다른 하늘을 창조했습니다. 첫 번째와 거의 유사한 모양입니다. 또 다시 세 번째 하늘, 네 번째 하늘, 등등으로 만들어져서 마침내 365개의 하늘까지 만들어졌다고 합니다. 제일 마지막 하늘을 붙잡고 있는 천사들은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을 만들었다고 합니다. 모든 것의 주인은 유대인의 하나님이라고 합니다. 이제 천사들 중 가장 높은 아버지는 유대인들이 자신의 뜻에 순종하기를 원했으나 모든 군주들이 그에게 항거하고 반대했습니다. 그래서 태어나지 않는 아버지는 이러한 불운을 보시고 처음 태어난 이성, 즉 그리스도를 세상으로 보내어 세상을 지었던 천사적 존재들의 능력을 받아 자신을 믿게 하셨죠. 사람들에게 그리스도는 사람으로 보이고, 이적을 행했지만 고통을 당한 것이 아니고 구레네 시몬이 대신 십자가에 못 박혔으며 예수님은 단순히 하늘로 되돌아갔다고 합니다. 시몬은 예수님의 형상을 가진 자입니다. 그리스도의 ‘영지’를 통해 사람들의 영들은 구원을 받지만 육체는 멸망을 당한다고 합니다.”
“또 가장 높으신 하나님, 즉 태어나지 않은 아버지는 신비한 존재인 ‘아브라삭스’(Abrasax)를 가졌다고 합니다. 아브라삭스는 365개의 하늘을 낳았는데 일 년 365일의 수와 같은 것입니다. 또 십자가에 못 박힌 자를 고백하고 순교하는 것은 소용없는 일이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구레네 시몬이 대신하여 죽은 것이기 때문에 그를 위한 것이지 그리스도를 위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바실리데스는 이렇게 가현설을 주장합니다.”
“히폴리투스가 바실리데스의 원리에 관하여 말했던 곳은 『모든 이단들에 대한 반박들』(Refutation of all heresies)입니다. 히폴리투스에 따르면, 그의 체제는 범신론적 일원론이며, 모든 것은 태어나지 않은 하나님으로부터 나온다고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시공을 초월하는 모든 것의 순수한 형태이며, 그는 존재하는 것과 존재하지 않는 범주를 뛰어 넘어 있다고 합니다. 게다가 하나님은 비존재이시라고 하며 모든 것의 태아로부터 낳으시는데 그 태아에는 3중아들이 있다고 합니다.”첫째는 하나님 안에 있는 우주적 ‘영’(pneuma)으로서 비존재의 근원입니다. 둘째는 하나님 아래에 있는 우주적 아들로서 비존재의 기반이 됩니다. 영과는 구분되지만 능력 자체를 소유하고 있지 않습니다. 셋째는 세상의 혼란에 떨어져 있습니다. 왜냐하면 물질과 영혼의 혼합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에 퍼져있는 영혼의 분자들은 부분적으로만 되돌아올 수 있습니다. 이런 귀환은 영이 물질의 짐을 잊어버리는 개인적 정결의 과정입니다. 신적인 우주적 씨앗, 영혼, 빛의 혼란, 물질, 그리고 어두움으로 결합하게 되면 빗과 어두움의 전쟁이 일어나며, 이 전쟁으로 영혼의 분자들을 물질의 혼란으로부터 석방시키고 영혼을 기원적 근원으로 귀환하게 된다고 합니다.”
1.2.3.6. 카르포크라테스
카르포크라테스“바실리데스와 동시대 인물인 카르포크라테스(Carpocrates)는 영지주의에 분명히 속하는 자입니다. 그는 시몬 마구스의 후계자들인 바실리데스와 사투리누스와 같은 자이며 영지주의자들의 아버지라 불리기도 합니다. 카르포크라테스는 세상과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은 태어나지 않은 아버지보다 못한 천사들에 의해 만들어졌고, 예수님은 요셉의 아들로서 다른 사람들과 동일하다고 합니다. 강하고 순수한 영을 가지고 있었기에 다른 사람들보다 우수하게 보인다고 합니다. 또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는 그가 모든 사람들과 동등하다고 주장했다고 합니다. 빈부나 귀천, 어리석은 자나 총명한 자, 남자나 여자, 주인이나 종, 그리고 백성들이나 통치자 간에 아무런 구별이 없다고 했습니다. 그는 자유방임하는 운명주의를 지향합니다. 율법의 신비들을 이해한다고 하면서 율법을 업신여기고 있는 어떤 자들은 기원전 40년에 이르러 자유사상(libertinism)이 알렉산드리아 유대주의 내에서 지성적으로 존경받기 시작하다가 일세기 후 그 사상은 카르포크라테스 운동을 통해 알렉산드리아에서 영지주의의 원리들 중 하나가 되었다고 합니다.”“카르포크라테스에게는 에피파니우스라는 아들이 있었는데 그가 17세에 죽고 맙니다. 그러자 사모사라는 섬에 그의 제자들이 그를 기리기 위해 전을 지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최근에 발견된 ‘마가의 비밀복음서’(Secret Gospel of Mark)에 대한 클레멘트의 서신에서는 카르포크라테스가 알렉산드리아 교회의 어느 장로로부터 비밀복음서의 복사본을 받았는데 그것을 그는 참람하고 육욕적인 교리에 따라 해석할 뿐만 아니라 흠도 없고 거룩한 말씀들을 오염시키고 혼합시켰다고 되어있습니다.”
1.2.3.7. 마르키온
마르키온(왼쪽)과 사도요한(오른쪽)“2세기의 다른 어떤 이단보다 기독교에 위협을 주었던 것은 마르키온(Marcion, 160년 사망)과 그의 추종자들이었습니다. 마르키온은 성경을 제한적으로 인정하는 자로 명성이 나 있습니다. 구약성경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거죠. 아무튼 그가 쓴 작품들도 현존하지 않지만 그를 비판한 자료들을 통해 그에 대한 사상들을 만들어낼 수 있으며 특별히 터툴리안의 작품에서 잘 엿볼 수 있습니다.”
“마르키온은 약 85년에 폰투스의 시노페(흑해 근교)에서 부유한 선박주인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그는 감독의 아들이었고 그 자신도 력시 감독이었습니다. 성스러운 처녀를 미혹했다는 혐의로 부친은 그를 교회로부터 추방시켰습니다. 그는 135~140년에 로마를 방문하여 그 곳에 있는 교회에 200,000 세스테르세스(sesterces)를 헌납합니다. 자신의 신학을 발전시키면서 영지주의 교사 케르도의 사상을 구체화시켰습니다. 그에게서 그는 이사야 39~66장의 말씀 해석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자신을 추종하는 자들, 즉 마르키온들을 거느렸습니다. 그 결과 그는 장로들에게 의심을 받아 144년 출교를 받습니다. 하지만 계속하여 자신의 가르침을 널리 확산시켜 나갔습니다. 대체로 이단자들이 될 가능성이 있는 사람들은 단체가 벌을 내릴 때 분파하는 성격을 갖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분파하는 자들을 모두 이단자로 보아서는 결코 안됩니다.”
“그들이 가르치는 것도 봐야죠.~ 마르키온은 하나님께서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것을 창조하신 분이 아니라고 가르쳤고, 선지자들에 의해 예언된 그리스도가 그의 아들이 아니라고 가르쳤습니다. 존경받는 서머나 감독이며 순교자인 폴리캅은 어느 날 마르키온을 만났습니다. 그 때 그를 가리켜 ‘사탄의 맏아들’이라고 했습니다. 마르키온은 약 160년경에 죽었지만 그를 추종하는 자들은 3세기까지 지속했고, 4세기에 이르러서는 마니교에 연합되었습니다. 마니교에 관해서는 ‘이단들’ 주제를 다룰 때 6.3.5.2.1.1.에서 보다 자세하게 설명해 드릴게요. 어거스틴도 마니교에 한 동안 심취한 적이 있습니다. 그만큼 마니교는 우리가 자칫하면 빠질 수 있는 거짓사실들이라 하겠습니다. 간략히 말씀드릴 수 있는 것은 ‘이원론’이라는 것입니다. 이원론이라는 말이 더욱 혼선을 주었다면 죄송합니다.”
“마르키온의 사상은 ‘영지주의’에 속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의 사상을 몇 가지로 살펴보면,
첫째, 그는 구약성경 자체를 포기했습니다. 왜냐하면 구약성경은 유대인들의 역사이고 조물주의 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 바울만이 진실한 사도이기에 그가 쓴 디모데 전후서와 디도서를 제외한 서신들만 성경으로 봐야한다고 했습니다. 또 그는 누가복음만이 유일한 복음서라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구약성경의 인용이 생략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둘째, 이 세상을 창조한 조물주는 하나님이지만 높으신 하나님과는 구별되며 그리스도 안에서 계시된 것 외에는 그 높으신 하나님에 대해 전혀 알 수 없다고 합니다. 조물주는 공의의 하나님이지만 매우 엄격하고 힘들게 하는 신이라 합니다. 이에 반해 그리스도 안에 계시된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십니다. 그 하나님은 새로운 왕국을 선포하셨습니다. 그리스도는 사람들에게 자비를 베풀며 조물주가 행했던 것과는 정 반대의 일들을 수행했습니다. 그는 계속하여 말하기를 조물주를 믿는 자들이 그분을 십자가에 못 박았다고 합니다. 이것은 그리스도가 의도한 것이었으며, 그렇게 해야만 조물주로부터 사람들을 속량할 수 있었기 때문이고, 그들을 구원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그는 그리스도께서 참으로 성육신하셨다는 사실을 부인했기 때문에 가현설주의자임을 자천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사랑의 하나님과 조물주, 복음과 율법을 대치시키는 그의 이원성을 엿볼 수 있습니다.”
셋째, 육체의 부활은 없고 최후의 심판도 없다고 합니다. 하나님은 선하시기 때문에 사람들은 반드시 엄격한 금욕적 삶을 살아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물론 결혼을 해서는 안됩니다. 심지어 결혼했던 자가 있으면 헤어져야만 한다고 합니다. 먹고 마시는 것에도 절제를 강조했으며 순교 당하기를 즐겼습니다.
1.2.3.8. 정경성
“이단자 마르키온은 구약성경을 ‘정경’canon)으로 부인했습니다. 그 이유는 물질세계가 악할 뿐만 아니라 그 물질세계를 창조한 조물주가 구약성경에 등장하는 하나님이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더욱이 그는 신약성경 가운데서 바울 서신과 누가복음만을 정경으로 인정합니다.”
참 오래된 성경
“교수님! 성경의 정경은 언제 그리고 어떻게 완성되었습니까?”“‘정경’(canon)이란 용어는 성경에 신적으로 영감 받은 책들을 묘사하는데 말입니다. 성경 정경을 결정하는 어려운 측면은 성경이 성경에 속한 책들의 목록을 정하는 것입니다. 정경을 결정하는 것은 먼저 유대인들의 랍비들과 학자들, 그리고 초기 기독교인들의 도움이 있었습니다. 랍비들의 도움은 구약성경이었고, 초기 기독교인들의 도움은 신약성경과 관련을 맺고 있습니다. 구약성경의 정경화는 어렵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신약성경은 조금 힘들었습니다.”
“신약성경 정경화를 보면, 바울이 누가의 작품들을 구약성경과 같은 권위로 여겼음을 알 수 있습니다(디모데전서 5:18, 신명기 25:4, 그리고 누가복음 10:7). 베드로도 바울의 서신들을 성경으로 인정했습니다(베드로후서 3:15~16). 신약성경 일부 책들은 교회들 가운데 회람으로 돌고 있었습니다(골로새서 4:16; 데살로니가전서 5:27). 로마의 클레멘트(95년)는 적어도 8개의 신약성경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안디옥의 이그나티우스는 7개책을 인준했습니다(115년). 사도요한의 제자 폴리캅(108년)은 15권을 인준했습니다. 이레니우스(185년)는 21권을 인준했습니다. 히폴리나리스(170~235)는 22권을 인준했습니다.”
“그런데 논쟁이 된 것은 히브리서, 야고보서, 요한 3서 등입니다. 하지만 363년 라오디게아 종교회의에서 구약성경 39권과 신약성경 27권을 인준했습니다. 그런 후 393년 히포의 종교회의에서와 397년 카르타고 종교회의에서 지금의 27권을 정경으로 인준했습니다.” “그러면, 교수님! 신약성경 27권을 정경으로 인준할 때 무슨 기준이 있었나요?”“그럼요. 1) 사도적 권위가 있어야 합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사도와 연관을 맺어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2) 영감성이 있어 도덕적으로나 영적인 가치에 대한 증거가 있어야만 합니다. 3) 정통교리와 가르침이 포함되어있어야만 합니다. 하지만 잊지 말아야 하는 것은 교회는 정경을 결정할 자격이 없습니다. 어느 종교회의에서도 정경을 결정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 만이 정경을 결정하실 수 있습니다. 그분이 영감주신 정경을 교회가 단순히 인준하는 것, 또는 받아들이는 것에 불과 합니다.”
1.2.3.9. 발렌티누스
1.2.3.9.1. 조직신학자
“영지주의자 시몬 마구스, 바실리데스, 그리고 마르키온 이후 영지주의 신학자들 가운데 가장 유명한 자는 이집트 델타에서 태어난 발렌티누스(Valentinus, 약 100~175)입니다. 지금까지 여러 영지주의자들을 소개했지만 이 네 명의 영지주의자들을 기억할 것을 권합니다.”“발렌티누스는 이집트 종교 철학가이며, 영지주의 로마 학파와 알렉산드리아 학파의 창시자이고, ‘영지’(gnōsis) 또는 ‘신비한 지식’으로 구원받는다는 교리를 가진 종교적 이원론의 체제를 만든 자입니다. 그래서 그를 가리켜 ‘영지주의 조직신학자’라고 부르죠. 영지주의를 가장 잘 체계화 시켰다는 의미겠지요. 그의 제자들에 의해 설립된 발렌티니안 공동체는 2~3세기 기독교 신학에 큰 도전을 안겨다 주었습니다. 발렌티누스는 헬라 문화의 중심지인 알렉산드리아 근교에서 철학을 배우면서 영지주의자 바실리데스를 만났습니다. 당시 바실리데스는 그 곳에서 가르치고 있었습니다. 아마 그에게 영향을 받으면서 신플라톤주의에 매력을 느꼈고, 성경에 대한 헬라적 유대 해석을 가미하였습니다. 그 후 교사로서 알렉산드리아에서 활동하면서 아마도 책을 출판했을 것입니다. 그의 제자들은 그가 사도바울의 제자인 테우다스에게서 교육을 받았고, 기독교인으로 세례를 받았다고 주장했습니다. 어처구니없는 주장이죠?”
“2~3세기 파편으로 된 신학자들의 문서들에 의하면, 발렌티누스는 약 136년 로마로 이주하여 그곳에서 로마감독 히기우스(Hygius, 약 136~140) 지도아래 가르쳤고, 로마감독 피우스(Pius, 약 150~155) 아래서 눈부시게 활약했고, 그리고 로마감독 아니케투스(Anicetus, 약 155~160) 때까지 활동했다고 합니다. 기독교 영지주의 가르침과 동방 영지주의 가르침의 종합을 상술하면서 25년 동안 그곳에서 영향을 끼쳤습니다. 로마감독이 되려는 열망을 품은 그는 약 140년 감독직을 넘겨받았으나 자신의 가르침으로 인해 정죄를 받고 기독교 공동체를 떠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약 160년 키프로스를 위해 로마를 포기한 발렌티누스는 지속적으로 신비적으로 유래된 종교 철학에 대한 자신의 체제를 발전시켜 나갔습니다. 그의 모든 사상들은 플라톤과 피타고라스에게서 가져왔다고 볼 수 있습니다.”
“발렌티누스는 『진리 복음서』의 저자였습니다. 그 책은 영지주의 원리들이 담긴 기독교 바울신학과 혼동될 수도 있습니다. 또 그는 설교집, 서신들, 찬송, 『세 가지 자연에 관한 글』과 『계시록』 또는 『환상』을 썼다고 합니다. 더욱이 4세기 이집트 파피루스인 『융 법문서』(Jung Codex, 1946년 발견된 법문서)는 발렌티누스의 본문의 콥트어 역본으로서 자신의 교리에 대한 것입니다. 정말 ‘조직신학자’로 불릴 만하죠?”
1.2.3.9.2. 신론
“발렌티누스와 그의 추종자들은 자제력도 없고, 이해될 수도 없고, 볼 수도 없고, 그리고 들을 수도 없는 최상의 아버지인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그분은 무한하고, 시작도 끝도 없고, 그리고 모든 것들의 궁극적인 기원입니다. 그에게 속하지 않는 것은 이 세상에 아무 것도 없습니다. 세상의 있는 것은 모두 다 그분의 한 부분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단일성을 유지하시면서 존재의 복수성으로 자신을 계시하신다고 하죠. 하나님은 혼합된 남성과 여성을 모두 지니고 있는 남녀성의 ‘이원 일위’(dyad)라는 것입니다. 아버지가 본질을 우주에 제공하시는 측면은 여성으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이런 측면에서 그분은 침묵, 은혜, 그리고 사상으로 불립니다. 침묵은 평정과 자기 인식에 대한 하나님의 원시적 상태입니다. 침묵은 창조적입니다. 사상은 본질적인 이온의 모든 연속적인 상태를 말합니다. 우주에 형태를 주는 하나님의 남성적 측면은 형용할 수 없는 ‘심연’과 최초의 아버지라는 이름으로 불립니다. 심연은 너무 깊어 불가해적 존재며, 신성의 모든 것을 포함하는 것입니다. 심연은 본질적으로 수동적입니다. 그분의 여성격인 사상에 의해 행동되어질 때에만 그분은 우주에 형태를 준다고 합니다.”
“신의 단일성을 강조하면서 신성의 이와 같은 두 가지 측면은 결코 분리될 수 없다고 합니다. 그것들은 신격 안에 있는 존재로서 동시에 존재하고, 물과 축축함과 같거나 동전의 두 면과 같은 것이라고 합니다. 그것들은 분리될 수도 없으며 둘 중에 하나가 없을 수도 없는 것이죠.”
1.2.3.9.3. 창조론
“우주의 기원은 신격에서 나온 존재의 연속적인 상태의 발산과정으로 묘사합니다. 태초에 아무 것도 없었으며 아버지는 비활성적 존재로 계셨기 때문에 우주는 잠재적으로만 존재한다고 합니다. 창조의 과정은 신격 편에서의 자기 제한이 필요하다고 합니다. 이온들의 연속적인 상태가 그분으로부터 분리되기 위해 아버지는 제한이나 한정이 요구됩니다. 모든 것을 견고케 하고 형용할 수 없는 위대함으로 모든 것을 지키는 것은 제한의 능력이라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제한은 두 가지 기능을 행합니다. 아버지로부터 ‘영적 세계’ (충만, Fullness)를 분리시켜 힘을 제공합니다. 그 이후 아버지는 발산의 과정을 통해 가해적인 형태로 자신을 명시하십니다. 아버지는 자신을 알 수 있는 자신의 사상을 통해 지식의 영을 낳았습니다. 그 영은 지식 안에 있는 ‘독생자’(Only-Begotten)입니다. 그 독생자도 하나님처럼 남녀성의 ‘이원 일위’로서 일반적으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독생자의 이온 또는 독생자의 남성적 측면은 마음입니다. 그분의 여성적 측면은 진리와 모든 것의 모친입니다. 그것들은 어떻게 진리가 진실한 의식으로 이해될 수 있는지를 의미합니다.”“구속자를 의미하는 독생자는 모든 것의 시작입니다. 아버지와 독생자는 이따금 기원적인 넷으로, 즉 심연, 침묵, 마음, 또는 진리로 언급되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아버지와 독생자는 ‘이원 일위’이기 때문입니다. 독생자 (예를 들면, 마음과 진리)는 하나님의 불가해적 측면들의 가해적인 형상입니다. 우리가 최상의 신을 알 수 있는 것도 독생자의 중재로 말미암습니다. 독생자와 아버지의 관계는 인간의 마음과 무의식의 관계와 비교될 수 있습니다. 독생자는 아버지께 안겨 있으며 그분 안에 있습니다.”
터툴리안 전집에 그려진 ‘플레로마’“아버지에 의해 영감 받은 남ㆍ녀성을 가진 독생자는 자신의 인격 내에 내재하는 에너지를 명시하는 과정을 시작하며 4개의 이온들을 발산합니다. 첫 번째 짝은 말씀(남성)과 생명(여성)으로 그것들은 심연과 침묵의 모양으로 창조되었습니다. 두 번째 짝은 인류(남성)와 교회 (여성)로 그것들은 마음과 진리의 모양으로 창조되었습니다. 또 교회에 결합된 인류의 자연적 상태를 나타냅니다. 본래의 기원적 4개의 이온들과 그것들에서 나온 4개의 이온들은 모든 것들의 근원이며 본질입니다. 이러한 ‘8인조’(ogdoad)의 이온들에 미치지 못하는 이온들이 탄생하게 됩니다. 말씀과 생명에서 10개의 이온들, 인류와 교회에서 12개의 이온들입니다. 이리하여 모두 30개의 이온들 또는 신적 속성이 완성됩니다. 이것을 가리켜 ‘플레로마’(pleroma)라 부릅니다. . . .”
“교수님 방금 ‘플레로마’를 말씀하시면서 10개의 이온들, 12개의 이온들 등등을 말씀하셨잖아요? 그 이온들이 무엇인지 말씀해주실 수 있나요?” “그래요~ 가만있자 . . .” 교수님은 강의안 원고를 뒤적이면서 찾으신다. “아! 예~ 여기 있습니다. 10개 이온들은 말이죠. . . 깊음과 섞음, 늙지 않음과 연합, 자기 탄생과 희락, 확고함과 혼합, 독생자와 단일성이고요, 그리고 12개의 이온들은요 . . . 위로와 믿음, 부성과 희망, 영원한 요동과 이해, 교회와 축복, 수임과 지혜 등입니다. 우리말로 번역한 말이라 익숙하지 않죠? 하지만 그 의미는 그렇게 중요하지 않습니다. 모두 영지주의자들이 말하는 이론이나 가설에 불과하니까요. 그것에 대해 의미를 찾는 것은 우리 머리를 복잡하게 할 뿐입니다. 허허허.”“방금 언급한 이온들은 모두 독생자의 본성의 다른 측면들을 명시합니다. 신적 충만의 자기 계시과정은 씨앗에서 나무로 자라나는 것으로 비교될 수 있습니다. 또 태양에서 나오는 빛의 관성과 같은 것입니다. 독생자가 아버지 안에 포함되어 있는 것처럼 이온들의 충만도 독생자 안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온들의 다수성 안에 신격의 단일성은 유지됩니다. 발렌티누스가 쓴 『진리의 복음서』안에서 독생자는 하나님의 이름으로 묘사됩니다. 개인적으로는 완전한 것이 아니지만 전체적으로는 완전한 이름을 구성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온들은 함께 신격의 완전한 충만을 구성합니다. 30개의 이온들은 나름대로 수많은 이온들을 가질 수 있습니다. 마치 글자와 같아서 글자들이 합쳐 또 다른 단어들을 만드는 것과 같습니다.”
1.2.3.9.4. 구원론
“독생자만이 최상의 아버지에 대한 완전한 지식을 갖고 있습니다. 그분은 다른 모든 이온들에게 여전히 불가시적이고 불가해적입니다. 이온들은 독생자를 통해 하나님을 알 수 있을 뿐입니다. 모든 이온들은 자신들의 원천인 분을 알기를 갈망했습니다. 그래서 발렌티누스는 지혜의 신화를 만들어 냅니다. 아버지를 알고자 하는 바람이 지혜에 넘쳐납니다. 지혜는 12개의 이온들 중 제일 어린 이온입니다.”
“완전한 충만을 위해 지혜는 최상의 부모를 알려고 노력합니다. 그녀는 독생자의 중재가 없이 하나님을 알려고 시도하지만 불가능함을 알게 되죠. 그 결과 그녀는 자신의 관계에서 벗어나게 되어 오류와 고통의 상태로 처하게 됩니다. 이는 마치 창세기의 이브의 타락과 흡사합니다. 그 결과 지혜는 아버지와 같이 되고자 하는 욕망으로 빚어진 낙태를 가리켜 지혜의 결핍된 생각이라고 합니다. 이러한 부족 속에 지혜는 슬퍼하고 두려워하고 혼란 속에 빠지게 됩니다. 이런 슬픔 속에 그녀는 회개하고 도움을 청합니다. 다른 이온들도 역시 슬퍼하며 그녀의 청원에 관심을 갖게 됩니다.”
“제한 또는 두 번째 한계의 도움을 받아 지혜는 더 높고 더 낮은 수준으로 나눠집니다. 더 낮은 수준 또는 낙태는 고통을 가지면서 ‘충만’에서 배제됩니다. 더 높은 지혜는 강하게 되어 하나님께서 알 수 없는 분이심을 확신하고 되돌아옵니다. 지혜의 이런 행위는 ‘충만’에 있는 결핍을 분리시켰고, 밖으로 향하게 합니다. 이런 위기가 다시 일어나지 않기 위해 독생자는 자신을 그리스도(남성)와 성령(여성)이라는 형태로 다른 이온들에게 자신을 명시합니다. 그리스도가 된 독생자는 다른 이온들에게 아버지가 불가해적이고 자신을 통해서만 진리를 이해할 수 있음을 계시합니다.”
“성령은 그들에게 감사를 가르쳤고, 모두 것을 동등하게 창조합니다. 이것이 소위 말하는 세례인데 직접 다음의 글을 읽어보도록 합시다.” 아버지는 자신의 사랑을 보이셨습니다. 이제 그의 사랑은 성령으로 나타납니다. 그는 자신에게 감추어져 있는 것을 계시하십니다. 그것은 바로 자신의 독생자입니다. 그래서 아버지의 자비로 인해 이온들은 그를 알게 되고 아버지를 찾는 수고를 그만두게 되었고, 그 안에서 쉼을 얻게 되었고, 그리고 안식을 취하게 됩니다. “모든 이온들은 구세주라 불리는 독생자와 더불어 연합하게 됩니다. 모든 이온들에게서 나온 완전한 이름을 구세주만이 가질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기도할 때에 ‘아멘’이라고 말하게 되죠. 구세주는 역시 제한 밖에 있는 타락한 지혜의 동반자가 되기로 되어있습니다.”
“타락한 더 낮은 지혜는 또는 낙태 당한 생각은 고통이 있는 더 낮은 영역에 갇히게 됩니다. ‘부족’ 또는 더 낮은 영역은 물질적 우주를 말합니다. ‘충만’이 독생자의 산물이고 그 안에 있는 것처럼 ‘부족’의 영역은 ‘충만’의 산물로서 그 안에 있습니다. ‘부족’은 지식에 관해서 ‘충만’ 밖에 있습니다. ‘부족’은 무지의 결과입니다. 그리스도를 알지 않고서는 하나님을 알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부단히 헛수고를 계속하는 지혜는 제한으로 인해 ‘충만’에 상승하지 못합니다. 무지의 결과로 인해 그녀는 슬픔, 두려움, 그리고 혼돈을 경험합니다. 세상이 환각임을 경험하면서 무엇이 실재인지 무엇이 환각인지 구별하지 못하게 됩니다. 이런 상태는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이 이 세상에서 경험하는 것과 같은 것이죠. 이제 지혜는 회개하게 되고 자신에게 생명을 주신 분을 생각하게 됩니다. 그래서 그녀는 기쁨을 다시 회복합니다.”
“이로 인해 구세주는 자신을 비워서 ‘충만’ 밖으로 나와 천사들의 수행원과 함께 ‘부족’으로 하강합니다. 그분과 지혜는 함께 이온들의 짝처럼 결합합니다. 영원한 영역을 알게 되므로 지혜는 환각과 고통에서 자유하게 됩니다. 지혜는 구세주와 천사들의 수행원을 보고 기뻐하고 자신의 형상으로 영적 씨앗들을 낳습니다. 이런 씨앗들은 모든 기독교인들 안에 있는 영적 요소가 됩니다. 이런 이유로 씨앗들은 교회에 맡겨집니다. 씨앗들은 충만한 가운데 있는 선재한 교회의 형상으로 여겨집니다. 이리하여 지혜에서 나온 세 가지 존재 상태가 만들어지는 셈이죠. 하나는 무지와 고통에서 나온 세속적인 존재를 특징짓는 환각, 다른 하나는 무지와 지식 간에 있는 중간 상태를 말하는 회개와 기쁨, 그리고 마지막은 영적인 씨앗이 지혜의 지식에서 나오는 것 등입니다.”
“영적 씨앗이 아직도 성숙하고 훈련을 받기 위해 물질세계가 필요합니다. 지혜가 이 세상을 직접 창조할 수 없기 때문에 물질세계를 형성할 수 있는 장인에게 영향을 끼칩니다. 장인을 통해 지혜는 하늘과 땅을 창조했습니다. 장인은 자신의 모친을 모르고 자신 혼자 행했다고 생각합니다. 장인은 7개의 천사적 존재 또는 하늘들을 창조하여 그것들 위에 군림합니다. 이런 이유로 그는 일곱 번째 존재라 불립니다. 장인의 7개의 천사들은 창세기에 나오는 7일을 의미합니다. 장인의 모친인 지혜와 구세주는 8번째 하늘에 있어 그보다 위에 군림합니다. 이런 8가지 하늘들은 충만 가운데 있는 8개 이온들의 형상입니다.”“지혜와 구세주는 비밀적으로 장인에게 영향을 끼쳐 물질우주를 완전의 형상으로 만들도록 합니다. 그래서 진리는 자신을 찾는 자들에게 현현합니다. 사람들은 장인에 의해 선재하는 ‘인류’의 형상으로 창조됩니다. 사람들은 귀신적 요소, 물질적 몸, 이성적 영과 영적 씨앗으로 구성됩니다. 영적 씨앗은 예수님의 중보를 통해 하나님의 지식 (영지)을 얻을 수 있다고 합니다. 지식을 받은 각 사람은 부족의 부분을 제하여 버리고 신격으로 한 걸음 더 나아가게 됩니다. 세상의 종말은 영적인 모든 것이 지식으로 채워질 때 오게 됩니다. 영혼들은 동물의 영들을 버리고 자신들의 모친인 지혜와 더불어 ‘충만’으로 들어갑니다. 지혜는 새 예루살렘이 되고 신랑, 즉 구세주를 맞이할 준비를 합니다. 영혼들은 천사들에 가입하게 되고, 세상에 감추어진 불은 모든 물질을 활활 태워버리고 무로 나타납니다. 육체적 세상은 사라지고, 부족도 사라져서 회복의 과정은 완성될 것이라고 합니다.”
“정말 복잡하고 혼란스럽죠. 발렌티누스가 말하는 구원을 간략하게 말하면, 먼저 이원론적이라는 것입니다. 세상이나 물질세계를 악하다고 규정해 놓고 시작합니다. 그리고 세상의 기원이나 참된 본질에 대한 신비한 지식을 소유하는 것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위와 같은 복잡한 지식, 즉 영지를 알게 되고 악한 육체의 간섭을 받지 않기 위해 금욕을 일삼으면 구원을 받는다는 것이죠.
그래서 역사신학자인 윌리엄 커닝함은 영지주의에 관해 말하기를,”1~2세기 이런 이단자와 다른 이단자가 고수했던 정확한 교리들이 무엇이었고, 상당한 의심이나 불확실한 것과 관련을 갖고 있기에 그 자체들로서는 그렇게 중요하지 않는 것이 무엇인지에 관련된 역사적 질문들을 통하여 영지주의 체제가 초기 교회의 견해들과 조건에 대해 상당한 영향을 끼쳤다는 것을 나는 의심하지 않는다. 특히 두 가지 점에 관해 상당한 영향을 끼쳤다는 것을 나는 의심하지 않는다. 두 가지 점이란 하나는 삼위일체와 그리스도의 인격이고, 다른 하나는 독신주의와 수도원제도를 포함하여 금욕적 제도나 기강이라 불리는 것으로 이것은 곧 유해한 영향으로 교회에 넓게 확산되고 있었다는 것이다.
“커닝함은 계속하여 영지주의와 같은 이단들이 교회사에서 얼마나 미묘하게 영향을 끼치고 있는지를 잘 지적하고 있습니다. 직접 읽어보도록 합시다.”하나님의 말씀의 지배적 권위를 포기하고, 자신들의 이론들과 사색들을 즐기는 것, 즉 모든 주제들, 심지어 가장 높고 가장 높은 모든 주제들을 자신들의 이해, 감정, 또는 환상과 성향의 기준으로 삼는 세 가지 모형들 가운데 각자는 다른 시대에, 다른 국가들에 다양한 환경들과 영향에 따라 널리 유행되었다. 성경의 어떤 부분들을 독자적으로 거절하고 나머지를 잘 석명하고 곡해하는 것을 본질적으로 구성하고 있는 두 번째 모형은 교회의 초기 시대에 일반적으로 널리 유행했다. 그것은 2~3세기의 영지주의자들에 의해서 일반적으로 채택되었고 3~4세기의 마니교도들에 의해서 채택되었다. 교회와 연관을 맺고 있었지만 오리겐은 그것에 매우 근접해 있었다. 대륙에서는 현대 이성주의자들과 신해석자들(neologians)이 그 뒤를 따랐다.
1.2.4. 영지주의 발전과 영향
“지금까지 살펴본 영지주의는 철저하게 반대하는 기독교 변증가들에 의해 역사 속에 사라지는 듯했습니다. 하지만 후에 마니교나 뉴 에이지 운동과 같은 사상에 영향을 주어 끊임없이 우리에게 스며들고 있습니다.”
1.2.4.1. 마니교
“3세기에 등장한 ‘마니교’(Manichaenism)는 불교, 기독교, 유대교, 그리고 이슬람을 혼합하여 만들어진 것입니다. 지금은 사라진 것이지만 초대교회 때에 그 종교를 추종하는 자들은 시리아, 북 아라비아, 메소포타미아, 그리고 페르시아 등지로 퍼져나갔습니다. 마니교에 관해 우리가 관심을 갖게 되는 것은 북아프리카에서 그것에 영향을 받은 어거스틴 때문입니다. 이점에 관해서는 6.3.5.2.1.1.에서 은혜론을 설명할 때, 보다 자세하게 설명하겠습니다만 여기서는 영지주의와 관련된 것만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마니교는 그것을 만든 ‘마니’(약 216~276)라는 사람의 이름에서 비롯됩니다. 마니교는 정경의 종교입니다. 그가 쓴 파편적인 작품만이 현존합니다. 마니교는 선ㆍ악 간에 그리고 빛의 세상과 어두움의 세상 간에 전쟁터가 있다는 강력한 이원론적 종교입니다. 선이 궁극적으로 확산되면 결국 전쟁은 종결된다는 막연한 기대를 갖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마니교에서의 인간성에 대한 개념도 이원론적입니다. 우주에 있는 빛에 속한 영과 빛의 다른 실체들은 선한 세상에 속합니다. 하지만 물질에 갇혀있습니다. 자신이 지닌 빛에 속한 영을 깨닫는 것은 곧 그 영이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어떻습니까? 영지주의 구원과 너무나 흡사하지 않습니까?”“마니교도들은 선택자들과 평신도들로 구분합니다. 선택자들은 엄격한 독신주의, 엄격한 채식주의, 청빈, 그리고 복음 전도와 같은 종교적 규율들을 보다 잘 준수하는 자들입니다. 이에 반해 평신도들은 선택자들을 섬기는 자들입니다. 만일 이러한 모습이 우리 교회에 있다면 그것을 가리켜 ‘교권제도’라 부릅니다. 이러한 교권제도가 한국교회, 아니 우리 교회에 없는지 살펴보았으면 합니다. 그리고 성경에 비추어 잘못된 것이 있으면 언제든 그만둬야할 것이며 잘된 것이 있으면 항상 본받아 준행해야할 것입니다.”
1.2.4.2. 뉴 에이지 운동
“영지주의 생각은 많은 현대 사상가, 철학자, 저자, 예술가, 그리고 학자들에게 팽배해 있습니다. 그 예로서 프란체스코 파트리치(Francesco Patrizi), 윌리엄 브랙(William Blake), 20세기 독일 작곡가 칼하인 스톡하우젠(Karlheinz Stockhausen), 그리고 심리학자 칼 융(C. F. Jung)을 들 수 있습니다. 영지주의와 칼 융에 관한 관계를 알기 위해 『조직신학 연구』에 발표된 ‘한국교회 영성신학 비판: 관상신학을 중심으로’를 잠시 인용하도록 하겠습니다. 이 논문에서는 한국에서 인기리에 행해지는 ‘관상신학’이 영지주의 영향을 받았으며 심지어 영성신학자로 잘 알려진 헨리 나우웬 등도 영지주의 범주에 들어간다고 설명합니다. 길게 인용합니다.”두 말할 필요 없이 융은 신 영지주의와 뉴 에이지 운동의 아버지이다. 그 이유에 대하여 그는 말하기를, “교회 내부나 외부에서 영지주의의 가장 능력 있는 현대 형식들 중 하나는 융의 심리학이라고 쉽게 말할 수 있다.” 융에 의하면, “자신이 악의 문제를 가장 효과적으로 다룰 수 있다고 주장하는 면에서 사도적 전통을 잇는 후예로서 심오한 심리학을 밝혔다”고 하며 “고대에 영지주의자들의 주장들은 심리학적 경험에 의해 많은 영향을 받았고, 교회교부들보다 폭넓은 기초 위에서 악의 문제와 맞붙어 싸웠다”고 주장했다. . . .
. . . 1929년 융은 Secret of the Golden Flower에 대한 주석을 쓰면서 “중국 요가와 관련 있는 도교 본문만 아니라 연단술 소논문을” 썼다고 했다. 또 “Golden Flower의 본문은 나에게 올바른 길을 걷도록 했다. 중세 연금술에서 우리는 영지(영지주의)와 현대인들을 조명할 수 있는 종합적 무의식 과정 간의 기나 긴 관계성을 가지게 된다”고 했다. . . .
. . . 영성운동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뉴 에이지 운동은 영지주의를 기반하고 있다. 영지주의에서는 물질에 묻혀있는 영혼의 구원을 위해 신비한 영적 진리가 필요하며, 창조는 신격으로부터 발산되거나 이온들(aeons)로부터 발산된 것이라고 가르쳤다. 이러한 모습을 뉴 에이지 운동에서도 볼 수 있다. 또 뉴 에이지 운동은 펠라기안과 흡사하다. 펠라기안들은 인류가 본질적으로 선하며, 인간에게 요구되는 것은 거룩함이고 그것을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한다. 로마 카톨릭 신학은 겉으로는 펠라기안을 반대한다고 표명하지만 실제상으로는 펠라기안이다. 이 문제는 기독교 영성의 근본적인 문제이며 로마 카톨릭 영성신학과 프로테스탄트 영성운동을 분리시키는 크나 큰 문제가 되기도 한다. 죄에 대한 인식은 영성신학을 좌우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중세시대 로마 카톨릭은 죄가 의지에서 발견되고 죄는 행동 자체에서 발견된다고 한다. 현재에 와서도 그들의 죄관이 조금 변했다고 하지만 여전히 ‘근본적인 선택’(fundamental option)이라는 기본 입장은 변하지 않고 있다. 그래서 수덕신학이 가능한 것이다. . . .
. . . 더욱이 이것은 뉴 에이지 영성에서 가르치는 것과 동일하다. 더욱이 뉴 에이지 운동과 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한 기독교적 답변의 본질적인 것은 영과 물질, 영혼과 몸, 정신과 본체 간의 존재론적 관계를 인식하는 전통적인 우주관을 회복하는 것, 즉 헬라 교부들과 동방 정교 신학에서 볼 수 있는 고대적 기독교 정신에서 답변을 찾는 것이다. 이 답변을 위해 켈틱 기독교로 되돌아가는 것이었다. 그 이유는 켈틱 기독교인들은 보다 명상적이었고, 타인들, 자신들, 자연, 그리고 환경으로부터 듣는 훈련에 익숙했고 그리하여 하나님에 대한 것과 하나님에 반대하는 것이 무엇임을 발견하고자 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켈틱 영성신학은 펠라기안적이다. 만일 이러한 명상적 영성운동이 성경적 인간관을 가지고 있지 못하면, 즉 펠라기안 죄관을 갖고 있으면서 하나님의 은혜보다 자신의 선택이나 자신의 능력을 우선순위 한다면 곧 영지주의적 경향이 있는 것이다. 사막의 교부들의 대표자들로 불리는 안토니(St. Anthony)와 파코미안들(Pachomians) 간에는 매우 밀접한 관계가 있는데 특별히 영지주의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주장은 많이 일어나고 있다. 현대에 등장한 영성신학, 즉 수도원 운동에 영향을 받고 있는 영성신학은 영지주의적 경향이 있다고 할 수 있다. 이 점에 관해 신비주의자 칼 융과 동양철학이 그 바탕을 깔고 있고 그 위에 진행되고 있는 것이 이 관상신학인 것이다. 작금에 유행하고 있는 현대 한국교회에서의 영성신학, 특별히 관상신학에 잘 반영되고 있다. “고대 영지주의가 실제로 사라졌다고 믿기 어려울 정도로 현재에 영지주의 영향은 우리도 알지 못하는 사이에 우리로 하여금 행하게 하고 있습니다. 마치 7가지 비유에서 밤에 원수가 가라지를 심고 간 것처럼 말입니다.”
“위의 인용에서도 설명하듯이 뉴 에이지 운동과 영지주의 간의 관계는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밀접하며 최근 1945년 이집트 나일강 상류에서 ‘나그 함마디’ 문서가 발견되면서 영지주의 영향은 해를 거듭할수록 우리 삶에 영향을 끼치고 있다. 더욱이 ‘다빈치 코드’라는 소설과 영화가 만들어지면서 우리 사상 속에 반기독교적인 마음을 갖게 하고 있다.”1945년에 나그 함마디에서 발견된 영지주의 문서들지난주에 배운 ‘영지주의’가 지금 현재에도 활동하고 있다는 소식을 접한 성민은 마음이 매우 착잡했다. 영지주의적으로 살아가는 우리 현대인들을 바라보면서 마음이 매우 부담스러웠던 것이다. 초대교회 신앙의 선배들, 즉 교부들이 그렇게 한 마음으로 반대했던 영지주의가 홍길동처럼 변모하여 우리 가운데 활동하고 있는데 우리는 그것을 자각하고 있지 못합니다. 아니 성도들은 그것도 알지 못한 채로 신앙생활을 행하고 있습니다. 그릇행하고 있으면서도 어느 누구도 확실하게 지적해주지 못하고 복음을 제대로 알려주지 않는 것을 알게 되면서 성민은 교회에 대한 불만을 가지게 되었다. 그래서 전도사님을 찾아갔다.
“전도사님! 전도사님께서 소개해주신 ‘교회사 학교’에서 여러 가지를 배우도록 기회를 추천해주시니 정말 감사합니다. 그곳에서 정말 많은 것을 배웁니다. 특별히 요즈음 ‘영지주의’가 뉴에이지 운동이나 포스트모더니즘으로 형태를 바꾸어 한국교회사 수도원적 삶으로 되돌아가고 있다는 것을 지난 주간에 배웠습니다. 매우 도전적이었습니다. 그런데 왜 현 교회들이 이렇게 중요한 사실을 모르고 있는 것일까요?”“성민씨, 지적해 주신 것 감사합니다. 그리고 우리 자신의 현주소를 아신 것에 관해 축하드립니다. 초대교회 당시에도 모든 성도들이 대체적으로 영지주의적으로 생활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하지만 그들이 그 사실을 깨닫지 못했지요. 수도사들도 자연스럽게 그러한 영지주의 문서들을 즐겨 읽었다는 것입니다. 특별히 파코미안 수도사들이 말입니다. 그것처럼 지금도 영지주의적으로 신앙생활하면서도 깨닫고 있지 못하고 있을 뿐이지요. 가르치는 지도자들도 그러하고 배움을 받는 성도들도 세속에 철저하게 물들어 있기 때문에 영지주의적으로 생활하고 있습니다. 영지주의적인 신앙을 가지고 있다고 지적하는 것이 시대에 뒤떨어지는 자라고 여기고 있는 현실이니 답답하기만 합니다. 교회사를 배우면서 느끼겠지만 역사관이 희미해져 있다는 것이죠. 기독교 교회사관을 갖고 있지 못하기 때문에 현실에만 만족하려는 신앙생활을 하고 있죠. 그래서 교회사 학교의 임무가 매우 중요하다는 것이죠. 현실의 그릇된 문제들이 저 생각에는 교회사를 제대로 알지 못하는 경우에서 비롯된다고 여깁니다. 역사관을 갖게 되면 자연스럽게 스스로 문제들을 파악하고 해결해갈 수 있는 능력들이 생긴다고 확신합니다.”
두 사람은 녹차를 마시면서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