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조각의 사랑이야기
『풋내기들』중 <풋내기들>, 레이먼드 카버, 2015.
무라카미 하루키는 “나는 레이먼드 카버 소설에서 많은 것을 배웠다. 그는 나의 스승이자 동행자이다.”라는 말을 남겼다. 미국에서 카버가 유명해지지 않을 때부터 하루키는 그의 소설을 번역했다고 한다. 하루키가 카버를 존경하는 이유는 짧은 문장때문이다. 한 줄의 짧은 문장을 온 몸으로 집중해서 쓴 것에 찬사를 보낸다.
레이먼드 카버는 시골에서 가난한 제재소의 아들로 태어났다. 고교시절에 16세 여자친구와 결혼해 첫 아이를 낳았을 때 카버는 열아홉이었다. 다음 해 둘째를 낳았다. “우리는 청춘이라고 할 게 전혀 없었다. 어떻게 해내야 할지 모르는 역할을 하고 있었던 거지요. 하지만 최선을 다했답니다.”(작가란 무엇인가p319)고 말하는 카버의 고단함이 전해진다. 첫 단편 <목가>를 쓰고 문단에 등장한 한 카버는 생활고 때문에 단편과 시를 썼다고 인터뷰에서 밝혔다. 2-3년 걸리는 장편소설을 쓸 방법은 없었기 때문이다. 너무 빨리 아빠가 되어 버린 청춘이 아쉬운 부분이다.
카버는 알콜중독자였다. 알코올의존증 재활센테에 두 번 들어갔고, 술을 마신 결과는 경찰서, 응급실, 법정을 들락거리게 만들었다. 알코올의존증은 필름이 끊기는 지경이었다. 일정 기간 동안 말하고 행동한 것을 전혀 기억하지 못하는 지점까지 갔다고 <작가란 무엇인가>(p325)인터뷰에서 고백한다. 두 번의 파산, 이혼, 암투병으로 그는 50의 짧은 생을 마감한다. 호텔 세탁물 청소, 잔디 깎는 일과 글을 쓰면서 “나는 미국의 일반적인 서민 일뿐이다.”라고 말한다. 어니스트 헤밍웨이와 체호프를 존경하고 톨스토이 <안나 카레니라>를 좋아했다.
<풋내기들>은 레이먼드 카버가 쓴 단편 열일곱 편의 원본으로, 1981년 4월에 앨프리드 A. 크노프 사에서 <사랑을 말할 때 우리가 이야기하는 것>이라는 제목으로 편집되고 변형된 상태로 출간된 바 있다.(p5) <사랑을 말할 때 우리가 이야기하는 것>의 원제는 <What We Talk About When We Talk About Love>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로 따라 하기도 했다.
책의 표제작인 『풋내기들 Beginners』은 리얼리티를 다룬 인생의 한 장면을 담고 있다. 이 소설로 카버는 인생의 전환점을 맞게 되며 다른 작품도 유명해지기 시작한다. <풋내기들>은 한 컷의 사진처럼 찍어냈다는 평을 받고 있다.
심장전문의 허브 맥기니스(45세)는 진정한 사랑, 영적인 사랑을 추구한다. 두 번째 아내 테레사(30세)와는 결혼 4년차다. 주인공 닉(38세)과 아내 로라(35세)는 결혼생활 1년 반이니 신혼부부다. 토요일 오후 넷은 진토닉을 마신다. 그들은 대화중이다. 허브는 ‘사랑’에 대한 이야기하고 싶어 한다. 테레사의 옛 남편 칼에 대해 말하며 “사랑이다”, “사랑이 아니다”를 가지고 설전을 벌인다. 테레사는 칼이 자기를 너무 사랑한 나머지 죽이려고 했다며 닉과 로라에게 말한다. “어느 밤, 우리가 같이 살던 마지막 밤에 그 사람은 나를 두드려 팼어요. 내 발목을 붙잡고 거실 여기저기로 나를 끌고 다니면서 줄곧 이렇게 말했죠. ‘사랑해, 모르겠어? 사랑한다고, 이년아.”(p374) 칼은 쥐약을 먹고, 권총자살을 하며 결국 죽게 된다. 허브는 이것은 사랑이 아니라고 말한다. 테레사는 허브에게 “그래도 날 사랑하기는 했다구요. 허브, 그건 인정해줘요. 내가 바라는 건 그것뿐이에요.”(p378) 허브는 인정하지 못한다. 이것은 사랑이 아니라고.
테레사와 허브는 계속 칼의 행동을 두고 사랑이다, 아니다를 이야기하며 불안해한다. 테레사는 닉과 로라의 애정어린 눈빛을 보며 신혼부부라서 사랑이 지속될 거 같지만 좀 더 두고 보자는 말을 남긴다. 허브는 “내가 진짜 사랑이 뭔지 말해줄게.”(p383) 하며 병원에서 수술한 노부부의 이야기를 꺼낸다.
어느 날 교통사고를 당한 노인부부가 실려 온다. 헨리와 애나는 수술을 받고 머리부터 발끝까지 붕대를 감았다. 헨리는 자기가 결혼한 해가 1927년인데 그 후로 떨어져 지낸 적이 딱 두 번 뿐이었다고 회상하며 한 번은 애나의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애나의 언니가 죽어서 장례식에 갔을 때라고 한다. 헨리가 회복중이면서도 우울한 건 아내를 볼 수 없다는 것인데 헨리는 아내가 보고 싶어 애를 태운다. 아내는 다른 병실에서 회복중이다. 목장 일을 했던 부부는 밤마다 레코드판을 틀어 놓고 거실에서 춤을 추고 불을 지피고, 밤에 눈이 내리는 소리를 들으며 잠을 잤다. 헨리가 먼저 회복되어 부인 병실을 방문한 날. 애나와 헨리는 손을 꼭 잡고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보고 싶었어’ 두 사람은 점심과 저녁을 부인 병실에서 같이 먹고 나머지 시간에 그냥 앉아서 손을 잡고 끝도 없이 이야기를 했다는 얘기를 한다.
진짜 사랑이 있을까? 허브의 관심사는 온통 ‘진정한 사랑’이다. 허브는 정말 누굴 사랑해 본 적이 없는 인물 같다. 사랑을 말할 때 우리가 아는 것이 얼마나 있겠냐는 투다. “여하간 내가 보기에 우리 사랑에 순전히 풋내기들이야. 우린 서로 사랑한다고 말하고 실제로도 사랑하지. (384)” 일반적으로 우리가 아는 사랑은 성적사랑, 끌림, 일상적이고 평범한 사랑, 존재를 사랑하는 마음, 함께 있고 싶은 마음 등 이런 사랑은 풋내기들의 사랑이라는 것이다. 노부부의 사랑이 진짜 사랑이라고 허브는 인식한다.
술병은 비워지고 허브는 전처가 벌통에 쏘여 죽어버리면 속이 시원하겠다는 말을 남기며 샤워를 하러 간다. 우리가 사랑에 대해서 말하고 있지만 허브는 진정한 사랑은 따로 있다는 것이다. 인간도 다양하듯 사랑도 다양하다고 생각한다. 사랑에 ‘진정’을 찾고자 했던 허브의 말이 인상적이다. “내가 말하는 사랑은 사람을 죽이려고 하지 않는 거야.” 어쩜 카버는 허브라는 인물을 통해 사랑을 말하는 것일지 모른다. 과연 ‘풋내기들’이 누구인가. 우리는 사랑 앞에 모두 ‘풋내기들’이다. 허브가 말한 노부부의 사랑도 풋내기일지 모르고 칼이 테레사를 향해 목숨을 걸었던 것이 허브가 찾던 사랑일지도 모른다. 허브와 칼을 동시에 사랑한다며 울음을 터트리는 테레사의 사랑도 사랑이 아니라고 말할 수는 없는 것이다.
『풋내기들 Beginners』에 나오는 여러 커플을 보면서 독자는 각자만의 사랑에 대해 말하게 된다. 허브가 그토록 궁금했던 사랑에 대해, 자기파괴적인 사랑을 하고 떠난 칼에 대해, 과거의 사랑을 인정받고 싶은 테레사에 대해, 평생을 상대만 바라 본 노부부에 대해, 아직 신혼이 아름다운 커플에 대해... 해가 져도 이야기는 계속 될 예감이 든다.
<서평-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