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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와 혁신의 대경인 .8] 하기락 철학자 | |||||||||||||||
이론·실천 겸비한 한국 지성사 큰별
◇약력 △1912년 1월 경남 함양군 안의면 출생 △경성 중앙고보, 일본 와세다대학 철학과 졸업 △45년 한국농민조합 조합장 피선 △46년 부산자유민보 창간 및 주필 △47년 대구대학(현 영남대) 철학과 주임교수 △53년 경북대 철학과 주임교수 △61년 대구시 대학교육회 회장 △63년 한국칸트학회(현 대한철학회) 창립 및 초대 회장 취임 △65년 한국철학연구회 회장 △79년 계명대 대우교수 △89년 국제아나키스트연맹 한국대표 △90년 국제평화협회 이사장 △97년 2월 타계 ▶저술활동 △'학문과 인생'(71년), '조선철학사'(92년) 등 25권의 저서 △'하르트만' 등 19권의 번역서 △'우리는 서양철학을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철학연구 제28집) 등 29편의 논문 '한 손에 실존적 자유의 깃발을/ 다른 손에 인간적 해방의 깃발을/ 높이 쳐들고/ 일생을 통한 뜨거운 열정으로/ 이론과 실천을 하나로 어울러/ 이 나라 현대철학의 제1세대 학자로서/ 최고봉을 이루셨던 분….' 경남 함양군 안의공원에 세워진 허유(虛有) 하기락 박사(1912~97)의 학덕비에 새겨진 비문 내용의 일부다. '창조와 혁신의 대경인'으로 10명의 인물을 추려내는 데에는 '창조적' 및 '혁신적'이라는 기준과 함께 분야도 고려됐다. 이 시리즈를 공동기획한 대구경북연구원 연구팀은 하 박사가 우리나라 현대 지성사의 첫 장을 연 대표인물이라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 그의 고향은 경남이지만 그의 지성의 활동무대는 대구였으니, 학덕비가 대구가 아닌 경남에 세워진 것을 안타까워해야 할 정도로 그는 뿌리 깊이 대경인이었다. # 東과 西를 아우른 한국철학의 선구자 저서 25권, 역서 19권, 논문 29편. 출판연도를 쭉 훑어보았다. 93년(그의 나이 만 81세였다)에만 '자연철학' 등 저서를 4권 냈고, '하르트만' 등 번역서 3권을 냈다. 왕성한 저술활동은 나이 여든이 넘어서도 전혀 시들지 않았다. 제목만 대충 읽어도 그의 저술 활동이 전공(하이데거와 하르트만)에만 국한되지 않고, 서양철학 전반과 아니키즘 운동 그리고 우리나라 철학에 이르기까지 폭넓었음을 알 수 있다. 고향에서 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서울에서 고등학교를 다닐 때 광주학생의거(29년)에 가담했다가 퇴학을 당한 적이 있을 만큼 어릴 때부터 현실 참여적 성향이 강했다. 47년 대구대학(영남대의 전신)에서 철학과 주임교수를 맡으며 본격적인 학자로서의 삶을 살게 됐고, 경북대에서 정년을 맞은 후에도 계명대 등에서 대우교수로 말년까지 학생을 가르치고 연구했다. 일본에서 하이데거로 학위를 받았고 귀국 후 하르트만에 심취했으니, 그는 독일 철학을 중심으로 서양철학 전체를 존재론적으로 정리한 인물이다. 그러나 그의 연구는 서양철학에 한정되지 않았다. 학문으로 현실을 변화시키고자 하는 그의 실천적 현실참여의식은 한국철학으로 그 지평을 넓혔다. 만년에는 800여쪽에 달하는 '조선철학사'를 저술할 정도였다. 철학계에서는 동양철학이 체계성과 논리성이 다소 떨어지는 경향이 있지만 하 박사가 조선철학, 특히 기(氣)철학 분야에서 보여준 뛰어난 논리성을 한국철학의 큰 성과로 꼽는다. 97년, 그의 장례는 대한철학회 장으로 치러졌다. 그만큼 그는 한국 철학계의 선구자였다. 63년 그가 창립해 초대회장을 지낸 한강 이남 최초의 철학자 모임인 한국칸트학회가 지금의 대한철학회로 발전했다. 오늘날 대부분의 학회가 창립된 지역에서만 활동하지만, 대한철학회는 전국 학자들을 아우르며 서울 기반의 한국철학회와 함께 우리나라 철학계의 양대 산맥을 이루고 있다. # 아나키즘의 대표 이론가이자 활동가 그는 상아탑에 갇힌 학자가 아니었다. 학문(이론)과 운동(실천), 양 날개를 확연하게 구분하면서도 서로가 보완해 나란히 질주해 나간, 그런 학자였다. 그에게 있어 현실 개혁의 도구는 아나키즘 운동이었다. 아나키즘 운동은 무정부주의 운동이 아니라 자율적인 정부를 지향하며 정치에 참여한 '자주' 운동이었다. 단재 신채호, 우당 이회영의 맥을 이은 하 박사는 한국 아나키즘의 대표적인 이론가이자 활동가로 '한국아나키즘 운동사'라는 명저(1981)를 남겼고, 냉전과 군부 서슬이 여전히 시퍼렀던
88년 '세계아나키스트대회'를 서울에서 열어 새로운 정치 체제를 모색했다. 최근 유럽에서 새롭게 논의되고 있는 '제3의 길'의 정치 성격을 잘 드러내는 '공동체적 사회주의'를 끊임없이 주장해 온 인물이기도 했다. 정치에도 참여해 90년 사회당 창립준비위원장을 지냈고, 국제평화협회 이사장을 맡아 기관지 '평협'의 편집인으로서 97년 2월13일 '평협'을 배포하기 위해 집을 나서다 쓰러질 만큼 끝까지 실천의지를 놓지 않았다. 한평생 그는 청백(淸白)한 학자이면서 이상을 현실화하려는 꿈을 놓지 않은 '영원한 청년'으로 살았다. 18평형 국민주택, 두 평도 안 되는 서재에서 학생용 책상 하나에 의지해 그 많은 옥고를 썼다고 한다. "반골기질에 순정적이셨던 분 6월항쟁 때는 선두에서 참가" 6남 영우씨와 제자 김주완 교수의 회고 살아계실 때 한번도 뵌 적이 없는 분에 대해 쓰기란 여간 난감한 일이 아니었다. 기자의 SOS에 하기락 박사의 6남 하영우 녹색자연마을 대표(54·하기락 박사는 최재전 여사와의 사이에서 8남1녀를 낳았고, 영우씨는 이 중 6번째 아들이다. 부인과 사별후 하 박사는 재혼해 세 딸을 더 낳았다)는 엄청나게 많은 자료를 기자에게 빌려주었다. 헌칠한 키와 양복에 배낭을 둘러멘 격의없는 복장이 하 박사를 꼭 닮은 듯했다. "지금은 대구가 굉장히 보수적인 도시가 됐지만 하 박사(그는 기자를 위해 '아버지' 대신 '하 박사'라는 호칭을 썼다)가 활동하던 때는 그렇지 않았다고 해요. 경북고 학생들이 2·28(60년)을 일으킬 수 있을 정도로 진보적인 분위기였단 말입니다. 그러나 한동안 군부의 영향으로 아주 수구적인 도시가 되었죠. 그걸 안타까워하면서 하기락은 아나키즘을 학문적으로 끈기있게 맥을 이어갔어요. 문서로 이어갔다는 게 중요하죠. 대구경북아나키즘협회를 만들었고 그것이 현 한국아나키즘의 주류가 됐어요. 88년 하 박사가 연 세계아나키즘대회는 아나키즘을 양지로 끌어낸 그런 행사였죠. 소련과학기술아카데미 부소장도 왔으니 대단한 행사였죠." 하 박사의 말년 제자인 김주완 교수(60·대구한의대 교양학부)도 도움을 주기 위해 나왔다. 계명대 철학과에서 당시 대우교수였던 하 박사로부터 박사 학위 지도를 받은 김 교수는 자신을 시인의 길로 인도한 구상씨와 하 박사가 친한 사이여서 더욱더 하 박사와 가깝게 지낸 인연이 있다. "선생님은 타고난 반골기질이면서 동시에 순정적인 분이셨어요. 한번 옳다고 생각한 것은 끝까지 지켜가려고 했지요. 87년 6월항쟁 때 많은 시민이 반월당에 집결했지 않습니까. 그 때 선생님 제자들도 상당수 거리에 나왔지만 쭈빗쭈빗 눈치만 보고 있었어요. 그런데 선생님은 선두에서 참가하셨죠. 한번은 전경과 부딪쳐 안경이 깨져 급히 안경을 맞추러 간 적도 있어요. 자기 돈 들여 남산동 인쇄골목에서 '평협' 소식지를 혼자 편집·교정까지 봐 만들어서, 울산공단, 창원공단, 구로공단 같은데 배낭 메고 가서 나눠주곤 하셨습니다." 두 사람은 생전의 하 박사에 대한 에피소드를 나누느라 시간 가는 줄 몰랐다. ▶하 박사의 아나키즘…자율적 합의의 사회 지향 한국에서 아나키즘은 무정부주의로 잘못 번역돼 정부전복이나 질서에 대한 거부로 오해돼 왔다. 그러나 아나키즘은 일제시대 항일무장투쟁의 이념이자 민족적 저항으로 그 싹이 텄다. 아나키즘이 주창하는 '제3의 길'을 남과 북 양쪽에서 외면하면서 일반인들에게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다고 한다. 하기락 박사가 평생 추구한 아나키즘 운동은 권위나 권력에 의해 다른 사람을 구속하는 제도를 마련하는 사회가 아니라 자율적인 합의를 바탕으로 한 자치(自治) 사회를 지향하는 것이었다. 경제적으로는 산업의 자주화, 정치적으로는 지방분권과 맞닿아 있다. 최근에는 교육, 문화, 여성, 생태운동 등 다양한 분야에서 아나키즘의 정신을 이어가고 있다. 하 박사의 영향을 직접적으로 받은 구승회 동국대 교수는 에코-아나키즘을 하고 있고, 대안학교인 간디청소년학교의 양희규 교장은 교육 분야에서 그 정신을 실천하고 있다. 지역 화폐운동, 판교~분당 통행료 거부운동, 공동체운동 등도 아나키즘의 영향을 받았다. ▨공동기획=경북도, 대구경북연구원 |
http://www.yeongnam.com/yeongnam/html/yeongnamdaily/plan/article.shtml?id=20061121.010220818020001
[창조와 혁신의 대경인 .8] 하기락 철학자
이론·실천 겸비한 한국 지성사 큰별
/정혜진기자 junghj@yeongnam.com
◇약력
△1912년 1월 경남 함양군 안의면 출생 △경성 중앙고보, 일본 와세다대학 철학과 졸업 △45년 한국농민조합 조합장 피선 △46년 부산자유민보 창간 및 주필 △47년 대구대학(현 영남대) 철학과 주임교수 △53년 경북대 철학과 주임교수 △61년 대구시 대학교육회 회장 △63년 한국칸트학회(현 대한철학회) 창립 및 초대 회장 취임 △65년 한국철학연구회 회장 △79년 계명대 대우교수 △89년 국제아나키스트연맹 한국대표 △90년 국제평화협회 이사장 △97년 2월 타계
▶저술활동 △'학문과 인생'(71년), '조선철학사'(92년) 등 25권의 저서 △'하르트만' 등 19권의 번역서 △'우리는 서양철학을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철학연구 제28집) 등 29편의 논문
'한 손에 실존적 자유의 깃발을/ 다른 손에 인간적 해방의 깃발을/ 높이 쳐들고/ 일생을 통한 뜨거운 열정으로/ 이론과 실천을 하나로 어울러/ 이 나라 현대철학의 제1세대 학자로서/ 최고봉을 이루셨던 분….'
경남 함양군 안의공원에 세워진 허유(虛有) 하기락 박사(1912~97)의 학덕비에 새겨진 비문 내용의 일부다. '창조와 혁신의 대경인'으로 10명의 인물을 추려내는 데에는 '창조적' 및 '혁신적'이라는 기준과 함께 분야도 고려됐다.
이 시리즈를 공동기획한 대구경북연구원 연구팀은 하 박사가 우리나라 현대 지성사의 첫 장을 연 대표인물이라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 그의 고향은 경남이지만 그의 지성의 활동무대는 대구였으니, 학덕비가 대구가 아닌 경남에 세워진 것을 안타까워해야 할 정도로 그는 뿌리 깊이 대경인이었다.
# 東과 西를 아우른 한국철학의 선구자
저서 25권, 역서 19권, 논문 29편. 출판연도를 쭉 훑어보았다. 93년(그의 나이 만 81세였다)에만 '자연철학' 등 저서를 4권 냈고, '하르트만' 등 번역서 3권을 냈다. 왕성한 저술활동은 나이 여든이 넘어서도 전혀 시들지 않았다. 제목만 대충 읽어도 그의 저술 활동이 전공(하이데거와 하르트만)에만 국한되지 않고, 서양철학 전반과 아니키즘 운동 그리고 우리나라 철학에 이르기까지 폭넓었음을 알 수 있다.
고향에서 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서울에서 고등학교를 다닐 때 광주학생의거(29년)에 가담했다가 퇴학을 당한 적이 있을 만큼 어릴 때부터 현실 참여적 성향이 강했다. 47년 대구대학(영남대의 전신)에서 철학과 주임교수를 맡으며 본격적인 학자로서의 삶을 살게 됐고, 경북대에서 정년을 맞은 후에도 계명대 등에서 대우교수로 말년까지 학생을 가르치고 연구했다.
일본에서 하이데거로 학위를 받았고 귀국 후 하르트만에 심취했으니, 그는 독일 철학을 중심으로 서양철학 전체를 존재론적으로 정리한 인물이다. 그러나 그의 연구는 서양철학에 한정되지 않았다. 학문으로 현실을 변화시키고자 하는 그의 실천적 현실참여의식은 한국철학으로 그 지평을 넓혔다. 만년에는 800여쪽에 달하는 '조선철학사'를 저술할 정도였다. 철학계에서는 동양철학이 체계성과 논리성이 다소 떨어지는 경향이 있지만 하 박사가 조선철학, 특히 기(氣)철학 분야에서 보여준 뛰어난 논리성을 한국철학의 큰 성과로 꼽는다.
97년, 그의 장례는 대한철학회 장으로 치러졌다. 그만큼 그는 한국 철학계의 선구자였다. 63년 그가 창립해 초대회장을 지낸 한강 이남 최초의 철학자 모임인 한국칸트학회가 지금의 대한철학회로 발전했다. 오늘날 대부분의 학회가 창립된 지역에서만 활동하지만, 대한철학회는 전국 학자들을 아우르며 서울 기반의 한국철학회와 함께 우리나라 철학계의 양대 산맥을 이루고 있다.
# 아나키즘의 대표 이론가이자 활동가
그는 상아탑에 갇힌 학자가 아니었다. 학문(이론)과 운동(실천), 양 날개를 확연하게 구분하면서도 서로가 보완해 나란히 질주해 나간, 그런 학자였다. 그에게 있어 현실 개혁의 도구는 아나키즘 운동이었다. 아나키즘 운동은 무정부주의 운동이 아니라 자율적인 정부를 지향하며 정치에 참여한 '자주' 운동이었다.
단재 신채호, 우당 이회영의 맥을 이은 하 박사는 한국 아나키즘의 대표적인 이론가이자 활동가로 '한국아나키즘 운동사'라는 명저(1981)를 남겼고, 냉전과 군부 서슬이 여전히 시퍼렀던
하기락 박사의 6남 영우씨(왼쪽)와 하 박사의 제자 김주완 교수가 지난 9일 대구시 수성구 중동에서 만나 이야기꽃을 피웠다.2
하기락 박사의 6남 영우씨(왼쪽)와 하 박사의 제자 김주완 교수가 지난 9일 대구시 수성구 중동에서 만나 이야기꽃을 피웠다.
2002년 6월 열린 하기락 박사 학덕비 제막식. 왼쪽부터 채수한 영남대 명예교수(학덕비건립위원장), 최승호 경북대 명예교수, 민동근 충남대 명예교수(대한철학회 창립멤버), 박정옥 대구대 명예교수.(민 교수를 제외한 세 사람은 하 박사 1대 제자다)3
2002년 6월 열린 하기락 박사 학덕비 제막식. 왼쪽부터 채수한 영남대 명예교수(학덕비건립위원장), 최승호 경북대 명예교수, 민동근 충남대 명예교수(대한철학회 창립멤버), 박정옥 대구대 명예교수.(민 교수를 제외한 세 사람은 하 박사 1대 제자다)
88년 '세계아나키스트대회'를 서울에서 열어 새로운 정치 체제를 모색했다. 최근 유럽에서 새롭게 논의되고 있는 '제3의 길'의 정치 성격을 잘 드러내는 '공동체적 사회주의'를 끊임없이 주장해 온 인물이기도 했다. 정치에도 참여해 90년 사회당 창립준비위원장을 지냈고, 국제평화협회 이사장을 맡아 기관지 '평협'의 편집인으로서 97년 2월13일 '평협'을 배포하기 위해 집을 나서다 쓰러질 만큼 끝까지 실천의지를 놓지 않았다.
한평생 그는 청백(淸白)한 학자이면서 이상을 현실화하려는 꿈을 놓지 않은 '영원한 청년'으로 살았다. 18평형 국민주택, 두 평도 안 되는 서재에서 학생용 책상 하나에 의지해 그 많은 옥고를 썼다고 한다.
"반골기질에 순정적이셨던 분 6월항쟁 때는 선두에서 참가" 6남 영우씨와 제자 김주완 교수의 회고
살아계실 때 한번도 뵌 적이 없는 분에 대해 쓰기란 여간 난감한 일이 아니었다. 기자의 SOS에 하기락 박사의 6남 하영우 녹색자연마을 대표(54·하기락 박사는 최재전 여사와의 사이에서 8남1녀를 낳았고, 영우씨는 이 중 6번째 아들이다. 부인과 사별후 하 박사는 재혼해 세 딸을 더 낳았다)는 엄청나게 많은 자료를 기자에게 빌려주었다. 헌칠한 키와 양복에 배낭을 둘러멘 격의없는 복장이 하 박사를 꼭 닮은 듯했다.
"지금은 대구가 굉장히 보수적인 도시가 됐지만 하 박사(그는 기자를 위해 '아버지' 대신 '하 박사'라는 호칭을 썼다)가 활동하던 때는 그렇지 않았다고 해요. 경북고 학생들이 2·28(60년)을 일으킬 수 있을 정도로 진보적인 분위기였단 말입니다. 그러나 한동안 군부의 영향으로 아주 수구적인 도시가 되었죠. 그걸 안타까워하면서 하기락은 아나키즘을 학문적으로 끈기있게 맥을 이어갔어요. 문서로 이어갔다는 게 중요하죠. 대구경북아나키즘협회를 만들었고 그것이 현 한국아나키즘의 주류가 됐어요. 88년 하 박사가 연 세계아나키즘대회는 아나키즘을 양지로 끌어낸 그런 행사였죠. 소련과학기술아카데미 부소장도 왔으니 대단한 행사였죠."
하 박사의 말년 제자인 김주완 교수(60·대구한의대 교양학부)도 도움을 주기 위해 나왔다. 계명대 철학과에서 당시 대우교수였던 하 박사로부터 박사 학위 지도를 받은 김 교수는 자신을 시인의 길로 인도한 구상씨와 하 박사가 친한 사이여서 더욱더 하 박사와 가깝게 지낸 인연이 있다.
"선생님은 타고난 반골기질이면서 동시에 순정적인 분이셨어요. 한번 옳다고 생각한 것은 끝까지 지켜가려고 했지요. 87년 6월항쟁 때 많은 시민이 반월당에 집결했지 않습니까. 그 때 선생님 제자들도 상당수 거리에 나왔지만 쭈빗쭈빗 눈치만 보고 있었어요. 그런데 선생님은 선두에서 참가하셨죠. 한번은 전경과 부딪쳐 안경이 깨져 급히 안경을 맞추러 간 적도 있어요. 자기 돈 들여 남산동 인쇄골목에서 '평협' 소식지를 혼자 편집·교정까지 봐 만들어서, 울산공단, 창원공단, 구로공단 같은데 배낭 메고 가서 나눠주곤 하셨습니다."
두 사람은 생전의 하 박사에 대한 에피소드를 나누느라 시간 가는 줄 몰랐다.
▶하 박사의 아나키즘…자율적 합의의 사회 지향
한국에서 아나키즘은 무정부주의로 잘못 번역돼 정부전복이나 질서에 대한 거부로 오해돼 왔다. 그러나 아나키즘은 일제시대 항일무장투쟁의 이념이자 민족적 저항으로 그 싹이 텄다. 아나키즘이 주창하는 '제3의 길'을 남과 북 양쪽에서 외면하면서 일반인들에게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다고 한다.
하기락 박사가 평생 추구한 아나키즘 운동은 권위나 권력에 의해 다른 사람을 구속하는 제도를 마련하는 사회가 아니라 자율적인 합의를 바탕으로 한 자치(自治) 사회를 지향하는 것이었다. 경제적으로는 산업의 자주화, 정치적으로는 지방분권과 맞닿아 있다.
최근에는 교육, 문화, 여성, 생태운동 등 다양한 분야에서 아나키즘의 정신을 이어가고 있다. 하 박사의 영향을 직접적으로 받은 구승회 동국대 교수는 에코-아나키즘을 하고 있고, 대안학교인 간디청소년학교의 양희규 교장은 교육 분야에서 그 정신을 실천하고 있다. 지역 화폐운동, 판교~분당 통행료 거부운동, 공동체운동 등도 아나키즘의 영향을 받았다.
▨공동기획=경북도, 대구경북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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