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르수 우잘라(Dersu Uzala)'라고 하면 알 사람이 많아 보이지 않는다.
러시아 영화의 제목인데 그 주인공 또한 '데르수 우잘라' 였다.
그런데 그 영화가 잊을래야 잊혀지지 않는다.
20세기 초, 그러니까 100년 전 극동의 우수리 강을 중심으로 한
그 일대의 황무지 대자연을 무대로 펼쳐지는 이 영화가 사실을 바탕으로 한 것인지,
따라서 주인공이 실제 인물이었는지 알 수 없다.
그러나 그것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영화 속의 대자연이 현실이고 거기 등장하는 인물들
특히 주인공 우잘라의 움직임이 너무 강렬하고 실감나니 그것으로 족하다.
데르수 우잘라는 일찍 가족을 잃고 여생을 혼자 우수리 강변 밀림 속에서 사냥으로 살아가는 노 사냥꾼으로,
그러한 오랜 생활에서 의식과 감각과 행동이 한마디로 순수하면서도 철저한 자연인이 되어 있었다.
그는 인적 없는 숲속을 헤매며 방향을 찾고 눈에 띄는 동물들의 작은 흔적 하나로 주위를 살피며,
또한 갑작스런 기상 변화에 예민하고 그때그때 적절히 대응했다.
그러한 그의 모습은 마치 선사시대의 원시인을 보는 느낌이었다.
데르수 우잘라는 어느날,
그 지방 일대를 측량하여 지도를 만들려고 파견된 러시아 군인들과 만나면서
그들의 간청으로 길잡이가 되어 같이 지내는 동안 인간적으로 가까워졌다.
그때 군인들에게 비친 우잘라의 인상은 흔히 있는 사냥꾼이 아니었다.
그것은 우잘라가 사냥보다는 자연을 사랑하고 들짐승을 소중히 여기며 무엇보다 밀렵을 증오하는데도 있었겠지만,
우잘라가 산중에서 호랑이를 만나면 잡으려 하지 않고
오히려 달아나게 하는 그의 남다른 의식과 행위가 불가사의하게 느껴졌다.
우수리 강을 중심으로 한 일대의 자연의 모습은 우리들 산악인들에게도 너무나 생소하고 경이적이다.
그 장대함과 계절에 따른 무쌍한 변화는 그저 수려하거나 현묘하다고 하기보다 장엄하고 처절하기까지 하다.
그리하여 이곳 자연은 인간의 생존을 거부하고 위협하며,
그러한 자연 조건 하에서 살아가는 데는 남다른 지혜와 투지와 용기가 필요했을 것이다.
데르수 우잘라는 등산가도 탐험가도 아니면서 그런 비정의 땅과 싸우고 한편 잘 적응하며 살아왔다.
거기 우잘라의 우잘라다운 점이 있었다.
그의 생존 조건은 일반 등산가나 탐험가에게 예상되고
그들이 전제로 하는 수준과 양상을 훨씬 넘어선 그야말로 극한적 상황이며 우잘라는 언제나 그 속에서 살았다.
그런데 그러한 구체적 상황이 어느 날 그 앞에 노출됐는데,
그것은 영화를 위한 픽션이 아니라 처절한 현실 그대로였다.
우수리 강 하구는 광대한 갈대밭을 이루었는데,
우잘라는 측지대장과 둘이서 주변 상황을 살피러 나섰다가 날이 저물어 돌아가게 됐다.
그런데 설원에 남았던 그들의 발자국이 마침내 엄습해 온 눈보라에 덮여
온 길을 찾지 못하게 된데다 눈보라가 더욱 거세졌다.
이때의 상황은 표고 수천 미터 고산에서의 조난 위기보다 더하면 더했지 못하지 않았다.
때는 20세기 초 원시적 처녀지의 양상이 아니다.
1978년 우리가 북극권 그린란드 북단의 대설원 지대를 개썰매로 가다
느닷없이 닥친 블리자드에 휘말렸던 경우와 어쩌면 그렇게 같았는지 모른다.
그런데 그들과 다른 게 있다면 그들의 장비가 원시적이었다는 점인데,
그것으로 그 무서운 기나긴 밤을 이겨냈다는 것이 놀랍기만 하다.
데르수 우잘라는 측지대장에게 눈앞의 갈대밭을 빨리 베도록 말하고 자기도 필사적으로 갈대를 베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그들은 어둠과 눈보라 속에서 사람 키만한 갈대밭을 칼을 휘둘러 쳐서 한 곳에 쌓아올리고,
바람에 날리지 않도록 무거운 측량기구로 그 위를 누르고 밧줄로 덮었다.
삽시간에 갈대 더미로 피신처를 만든 셈이다.
우리는 등산가로서 '비박' 이 어떤 것인지 잘 알고 있으며, 이에 대한 장비와 기술에 있어 부족한 것이 없다.
그러한 오늘의 등산가들 눈에 100년 전 데르수 우잘라의 비박이 어떻게 비칠 것인가?
지난날 북극에서의 나의 시련에는 에스키모와 개썰매와 충분한 식량과 연료
그리고 무엇보다 뛰어난 현대적 방한구가 있었다.
거기에 우리의 경우는 자기가 좋아 택한 시련이었다.
그러나 데르수 우잘라로서는 생활의 연장이요, 운명적인 순간이었다.
데르수 우잘라와 우리 사이에는 1세기라는 시차가 있다.
이것은 바로 원시와 현대만큼의 역사적 거리라고도 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옛날 우수리 강 일대의 대자연은 그 시간의 흐름 속에서도 크게 달라진 것이 없으며,
그때 엄습했던 기상 변화는 오늘날도 여전할 것은 분명하다.
여기 '데르수 우잘라' 의 현대적 의미가 있지 않을까 싶다.
다시 말해서 오늘의 등산가 탐험가는 그 상황에서 어떻게 행동했을까 궁금하다.
문명이란 무엇이며 현대인은 그 속에서 어떻게 살고 있는가?
데르수 우잘라가 던지는 문제의 핵심을 이것일 것이다.
현대인에게 문명은 소중하고 편리하며 이제 그것을 떠나서는 살 수 없을 정도로 오늘의 우리 생활을 규제하고 있다.
현대인은 문명인이라는 증거다.
데르수 우잘라가 살았던 20세기 초는 인류 역사로 볼 때 분명 현대에 속한다.
그러나 그는 우수리 지방에서 탈 문명적으로 살았다.
그에게는 이른바 문명의 이기가 없었고, 그가 가지고 있는 것은 오직 야성 뿐이었다.
그의 야성이 곧 그의 생존을 위한 무기였다.
영화 '데르수 우잘라' 의 결말은 주인공 우잘라가 그의 유일한 무기를 버리고
대신 최신형 엽총을 손에 들었을 때 내려졌으니 너무나도 역설적이다.
우잘라는 러시아 측지대장의 두터운 우정과 호의로 오랫동안 살아온 터전인 우수리 강변 대자연을 버리고 도시로 들어갔다.
측지대장이 특별히 배려해서 주어진 안락한 노후 생활이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며 우잘라는 매일의 생활이 무료하고 무의미하게 느껴졌다.
결국 그는 견디다 못해 본래의 생활을 찾아 오래 살아온 산으로 돌아가기로 마음을 굳혔다.
이때 측지대장은 생각 끝에 우잘라에게 최신형 엽총 한 자루를 주었다.
이것은 분명 문명인의 상식이고 조금도 탓할 게 아니다.
그러나 여기 문명적 사고의 한계가 있다.
우잘라가 산으로 돌아간 지 얼마 안 되어 그의 운명은 엽총이 탐난 세속적인 사냥꾼의 손에 끝났다.
신이 인간을 만들고 인간이 기계를 만들었다는 이야기가 있지만
오늘의 과학기술 문명은 그 의도와는 달리 인간을 노예로 만들었다.
한마디로 주객이 전도된 것이다.
이것은 우리 등산의 세계에서도 엿볼 수 있다.
물론 그 관계가 노예로까지 전락한 것은 아니나,
순수하고 고고했던 알피니즘의 세계가 현대문명에 젖어들며 자기의 터전을 여지없이 침범 당하고 또한 그것에 무관심해졌다.
영화 '데르수 우잘라' 에서 눈 있는 사람은 우잘라의 삶의 터전과 그의 삶의 방법을 볼 것이다.
어디까지나 문명의 영역을 벗어난 세계의 모습을 볼 것이다.
자연은 원래 유구한 것이니 그렇다 치더라도 우잘라가 가진 것과 사고하고 행동하는 삶 전체에서
등산가를 자처하는 자라면 감회가 깊지 않을 수 없다.
데르수 우잘라는 문명사회가 싫어 본래의 터전인 산으로 돌아갔다.
등산가인 우리도 생의 새로운 전기를 위해 탈 문명적인 사고와 행위에 골몰한다.
여기까지는 좋다.
그런데 그것에 선행 조건이 있다.
바로 날로 기능화하고 고급화하는 장비에 대한 재평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