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미에 청송심씨가 소장한 정선(鄭敾)의 ‘노백도(老柏圖)’
이택용/한주이진상기념사업회 이사
정선(鄭敾, 1676-1759)은 조선후기 화가로 자는 원백(元伯), 호는 겸재(謙齋) · 겸초(兼艸) · 난곡(蘭谷)이며, 본관은 광산(光山)이다. 어려서부터 그림을 잘 그렸으며 김창집(金昌集)의 도움으로 관직생활을 시작하여 위솔(衛率)을 비롯하여 1729년 한성부주부, 1734년 청하현감(淸河縣監)을 지냈다. 1740년 훈련도감낭청, 양천현령을 거쳐 사도시첨정 · 첨지중추부사를 지내고, 1756년에 가선대부 지중추부사에 제수 되었다. 이것은 화가로서는 최고의 대우였다. 40세 이전의 확실한 생활기록과 작품이 없어 초년기의 작품세계를 조명하기는 어려우나 그는 18세기 무렵 중국에서 들어와 한창 유행하던 남종화법(南宗畵法)이나 오파(吳派)와 같은 새로운 산수화기법에 영향을 받았으며 금강산, 관동지방의 명승, 서울의 사계절 모습, 인왕산 등을 주요 화제로 삼았다.
회화기법은 전통적 수묵화법이나 채색화의 전통을 이어받기도 했지만 독창적인 필묵법을 개발하였다. 예를 들어 둥근 바위나 봉우리의 중량감을 널찍한 붓을 가지고 여러 번 짙은 먹을 칠하였고, 동해안 바위의 경우는 굵직한 수선(垂線)으로 처리하여 채색 · 명암 등의 효과를 무시하면서도 물체의 외형적 특징을 잘 표현하였다. 또한 소나무 묘사에서는 몇 개의 짧은 횡선과 하나의 굵게 내려 긋는 사선(斜線)으로 소나무의 생김새를 간략하게 그렸다.
그가 한국 회화사에 남긴 업적은 겸재파화법이라 할 수 있는 ‘한국진경산수화’의 전형을 확립한 점이다. 그의 화풍은 선비나 직업화가들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으며 주요작품으로 인왕제색도, 통천문암도, 금강전도, 입암도, 만폭동도, 노백도 등이 있다. 특히 노백도(老柏圖, 종이 수묵담채 131.6×55.6)는 18C 전반(前半)의 작품이다. 예로부터 송백(松柏)은 불굴의 지조와 오래된 연륜의 상징으로 여겨져 왔다.
노백(老柏)을 그린 이 작품 역시 그러한 뜻을 모두 담고 있고, 특히 나무 등걸의 휘굽은 모양이 초서체(草書體)로 쓴 목숨 ‘수(壽)’자(字)와 비슷하여 장수(長壽)를 상징하는 측면이 더욱 강하게 부각되었다. 나무줄기는 윤곽선 양옆에 붓질을 중첩시켜 진하게 나타내고, 가운데 부분은 하얗게 남겨 도드라져 보이게 함으로써 둥근 가지의 입체감을 살리는 동시에, 촘촘하게 주름 잡힌 나무껍질의 질감을 표현하고 있다.
당초문(唐草文)같이 꼬불거리는 가지를 따라서 빽빽이 자라난 잎 부분은 먼저 옅은 물감으로 한 겹 칠한 후 그 위에 점점으로 잎 하나하나를 가득 찍어 묘사하였다. 화면 오른쪽 위에 있는 겸재 정선의 관지 외에도 그림의 상 · 하에는 후일에 덧붙여진 찬문(讚文)이 있는데, 상단에는 대래(大來)라는 분이 노승(老僧) 예백(禮伯)에게 줄 때 쓴 글이 있고, 하단에는 심전(心田) 안중식(安中植)이 운양(雲養) 김윤식(金允植)의 장수를 축원하며 선사할 때 쓴 글이 있어서 노백도 그림의 소장 흐름을 알 수 있다.
대래(大來)가 소장을 하다가 예백(禮伯)에게 주고, 그 후에 안중식이 소장하다가 김윤식에게 주는 과정이 노백도 상단과 하단에 찬문으로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상단에 심능태(沈能泰)란 낙관이 있다. 심능태의 자(字)가 대래(大來)이다. 심능태는 청송심씨며 구미출신으로 안효공(安孝公) 온(溫)의 후손이며, 치현(致賢)의 증손(曾孫)이다.
호(號)가 서고(西皐)이며, 영조 34년(1758) 태어나서 정조 16년(1792)에 진사시에 급제하였으며 초서와 예서에 뛰어나 순조 12년(1812) 구미시 옥성면 대둔사(大芚寺)의 성파대사비명(性波大師碑銘)을 지었으며, 관청의 현판 글씨는 많이 쓴 은둔 학자며, 아들 심의순(沈宜純)도 생원시에 급제했다. 18세기 구미의 청송심씨 문중에는 학문과 재력이 겸하여 겸재의 노백도를 소장할 정도의 문인화와 서예의 부흥기를 이루었다. 그 외에도 능(能)자 항열에 능복(能福), 사마시(司馬試)에 능석(能碩), 능격(能格), 능익(能翊), 능원(能源), 능유(能遊)가 문과(文科)에는 능섭(能燮), 능식(能栻)이 급제하였고 그 후손들도 생원 · 진사가 많이 배출되었다.
조선중기에 휴옹(休翁) 심광세(沈光世)가 처음 입향하고, 다시 조선후기 17세기초 공주에서 심장(沈漳)이 환향한 이후 선산지방의 최고 노론(老論)명문가 문중을 이루었다. 학문과 재력은 물론 그리고 문인화와 서예에 부흥을 이룬 문중에서 현재 다시 또 서화가(書畵家)가 많이 나오기를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