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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기로에 선 미술(5세기~13세기)..
4)오직 신과 함께, 중세 봉건 그래도 미술(11~12세기)
1066년12월25일 섬나라 앵글로색슨족의 적통이 이어지지 못함으로 노르망디 공국의 윌리엄 공작은 영국의 왕에 추대되었다.
유럽의 약탈자였던 바이킹이 프랑스 노르망디를 무력으로 점령후 2세기만에 피몇방울의 인연으로 영국의 통치자가 된거죠!
윌리엄 1세 상상화 (작자 미상, 1597-1618년 추정)
*윌리엄 1세
윌리엄 1세(William I) 또는 정복왕 윌리엄(William the Conqueror)은 노르망디 공국 4대 공작이자 잉글랜드 왕국 노르만 왕조의 초대 국왕이다. 유럽 대륙에서 바다를 건너 잉글랜드를 정복한 최후의 정복자로 잉글랜드의 왕위를 찬탈하여 왕이 된 것으로 유명하다.
프랑스식 이름은 '기욤'으로 노르망디 공작으로는 '기욤 2세'다. 하지만 기욤은 현대 프랑스어 형태이고, 당시 노르만인들이 쓰던 고대 노르만어 기록에는 Williame으로 쓰여있으며, 이는 앵글로색슨족의 고대 영어로는 Willelm이다. 전자의 경우 '윌리아므', 후자의 경우 '윌렐름' 비슷한 발음을 나타낸 것으로 보인다. 보통 '정복왕 윌리엄'으로 알려졌으나 '사생아왕'이라는 별명도 있다.
정복왕 윌리엄으로 영국 역사에 기록 더 궁금하면 보셔야죠!
역사서가 아니라 미술사니 저는 링크만으로 패쉬~~
인터넷 서점에 윌리엄 관련 도서도 많지만 바쁜 세상이니 인터넷 자료를 저는 👍!
단 근거없는 자료도 많으니 취사선택은 그대의 몫~~
https://naver.me/x8GuSbhe
바이킹 출신의 윌리엄은 왕따를 피하기 위하여 측근인 노르만 귀족과 함께 영국으로 가서 제 버릇 개못주고 영국의 주요 영지를 무력으로 장악합니다..
절대왕권이 있던 절대군주의 시절이 성숙되기 전이 되다보니 힘있고 깡다구 센 넘이 영주되는것이 당연한 시절~~
"법보다 주먹 칼이 앞서던 시절"
장악했으니 정통성을 보장받기 위한 행퉁바리가 정해진 수순~~
프랑스의 노르망디를 오래 장악하면서 익힌 프랑스 문화에 바이킹 문화를 혼합한 노르만 문화를 영지에 이식합니다..
당시 유럽에 유행하던 "로마네스크"양식에 영국식이 혼합되고 또 바이킹 문화가 이식되며 영국의 독자적인 "노르만 양식"이 태어납니다.
*로마네스크 양식..
Romanesque
로마네스크는 대략 유럽의 10 ~ 12세기경에 널리 쓰였던 중세의 건축 양식을 말한다. 이 단어는 Roman(로마) + Esque(式)가 합해진 것으로, 여기서 말하는 로마는 로마 제국을 가리키며 로마의 건축과 유사한 느낌을 지닌 건축물이란 의미를 가지고 있다.
로마 제국 콘스탄티누스 1세 시대에 그리스도교가 공인된 이후 성당으로 널리 쓰이던 건물의 양식이 바실리카인데, 로마 제국이 동쪽으로 후퇴 후 게르만족 등의 이민족들이 그리스도교를 받아들이며 바실리카 건축물 받아들여 발전시킨 것이 로마네스크이다.
성당에 주로 쓰인 양식임에도 돌로 만든 성채를 연상시킬 정도로 건물이 육중한 돌로 쌓아진 것이 특징이다. 창이 작으며, 건축물의 높이가 낮고 둥근 아치와 천장, 탑과 같은 요소를 많이 사용하였다.
이 양식은 대략 12세기 이후 고딕 양식으로 발전하게 된다. 대체적으로 고딕은 로마네스크 건축물보다 더 얇은 기둥과 큰 창을 가지고 있으며, 둥근 아치가 아니라 끝이 뾰족한 첨두아치를 주로 썼고, 더 높은 건물의 높이와 더 높고 뾰족한 첨탑을 가지고 있다.
로마네스크와 영국의 "노르만양식"은 사실상 도찐개찐..
영국은 섬나라답게 안에서 치고박고 피터지게 싸우니 외부 침입에 대비하여 높은탑, 좁은 창문등으로 종교시설까지 만든것이 "노르만 양식"의 특징~~
영국식 노르만 양식의 대표적 건물인
더럼 대성당(영어: Durham Cathedral)은 잉글랜드 더럼주 더럼에 있는 대성당이다. 정식명칭은 그리스도, 마리아와 더럼의 성 커스버트의 대성당 교회(The Cathedral Church of Christ, Blessed Mary the Virgin and St Cuthbert of Durham)이다. 성 커스버트의 성지가 위치한 곳이기도 하며, 성공회 더럼 주교의 관할이다. 1093년부터 짓기 시작하여 1133년에 완공되었다.
중세는 목차에서 기술했듯이 기로에서
권력자들이 신의 시대를 택함으로 기독교적 세계관이 전 유럽을 지배하던 시절~~
교회의 권위가 강화되면서 칼자루쥔 성직자끼리 알력이 생기면서 수시로 교리 논쟁..
서로간에 명확한 성경 해석으로 다투면서 "스콜라 철학"이라는
기독교 교리에 입각한 논리적 체계를 탄생시킵니다.
로마시대를 부인하는듯 하면서도 슬그머니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에 신앙을 결합한 스콜라 철학을 장려 금과옥조로 삼으면서 당시 교회 미술에도 관여하게 된다..
그 대표적 작품이 샤르트르 대성당의 <왕의 포탈(현관문)>과 스테인드글라스입니다..
*샤르트르 대성당.
샤르트르 대성당(프랑스어: Cathédrale Notre-Dame de Chartres 카테드랄 노트르담 드 샤르트르)은 프랑스 샤르트르에 있는 고딕 양식의 가톨릭 성당으로 1979년 유네스코 지정 세계유산으로 등록되었다. 1145년 로마네스크 양식으로 지어졌으나 1194년의 화재로 상당 부분이 소실되어 12세기 말부터 13세기 초까지 사이에 재건되었다. 이 재건에는 프랑스 전역에서 수만 명의 자원자가 몰려들었다. 샤르트르 대성당은 성모에게 봉헌된 성당으로, 성모 마리아가 예수를 낳을 당시 입고 있었다는 옷이 보관되어 있으며 내부의 성모상이 200개 가까이 존재한다
샤르트르 대성당은 고딕 성당의 대명사이다. 이 건물을 지을 때 새로 개발한 기술을 도입함으로써 신랑에 여러 개의 커다란 창문을 만들 수 있었다. 총 2000m2가 넘는 스테인드 글라스 창을 통해 밝은 빛이 쏟아져 들어온다. 그와 동시에 스테인드 글라스가 선명하게 빛나면서, 석재의 흰 빛과 대조를 이룬다.
대성당은 안길이가 130.2m, 중앙 신랑의 너비가 16.4m, 높이가 36.5m에 이른다. 멀리서 바라보면 이 성당은 ‘옛 탑’(높이 106m), ‘새 탑’(높이 115m)이라고 불리는 2기의 탑이 있다. 중세 때 샤르트르 대성당은 채색되어 있었고, 많은 부분이 금빛으로 빛난다.
문득 자료를 검토하다 보니 궁금~~
철학이 종교와 접목되어 종교의 영역을 시각적으로 표현하면 어떻게 반영을 할 것이며 장인 수준으로 전락해버린 예술가들은 또 어떻게 표현을 할지?
여러가지 얻어들은 어줍잖은 지식으로 알고 있는 근대의 미술사보다 암흑기로 표현되는 중세을 미술은 심층분석하는 것도 재미있을 것 같아 "파고 파고 또 파보기"로 결정하고 정보의 바다를 항해했다..
결과 중세의 예술은 "오직 신과함께"라는 명제로 먼저 종교시설물인 성당이 왕권과 교권의 권세를 상징하듯 삐까번쩍하게 지어지는데 건축물의 형식등은 권력자의 비호를 받으며 권력자의 요구대로
설계자들이 완성!
허가가 떨어지면 건축 장인으로 전락한 예술가들이 건축을 포함한 내부 장식을 공동체로 작업~~
대표적인 방법이 성경의 내용을 부조 또는 조각으로 새긴 파사드로 교인들이 출입하는 문을 장식하여 종교인들은 글을 모르는 일반인들의 교육목적 또는 권위주의의 전파 목적으로 사용한다..
실내를 들어가면 유럽 성당에서 지겹도록 봐야하는 "스테인드 글라스"가 등장한다..
물론 과거에도 "스테인드 글라스"가 있었지만 12세기 건축에서 고딕양식이 등장하며 비로소 전성기를 맞이한다.
"로마네스크"양식은 아치의 하중을 버티기위해 벽이 크고 두꺼워야하니 필연적으로 창문이 작아야했다.
*고딕 건축 양식(Gothic architecture)
중세 시대 말 유럽에서 번성한 중세 건축 양식의 하나이다. 로마네스크 건축 이후와 르네상스 건축 이전에 있었다.
12세기에 처음으로 프랑스에서 시작하여 16세기로 접어들면서 고딕 건축은 "양식에 있어서 모욕"이라고 무시하던 르네상스의 후반부 전까지 성행하며 "프랑스 양식" 작품으로 알려져 있었다.
특징은 첨두 아치, 리브 볼트, 그리고 플라잉 버트레스를 포함하고 있다.(한마디로 표현하면 천장의 하중이 가볍다.)
고딕 건축은 유럽의 지역 교회들과 대수도원, 그리고 수많은 대성당의 건축에서 쉽게 찾을 수 있다. 많은 성, 궁전, 마을 회관, 협회, 종합대학, 그리고 주택까지 이러한 건축 양식이 쓰인다.
큰 교회와 성당, 그리고 고딕 양식이 가장 강력하게 표현된 수많은 도시 건물들에서 찾을 수 있는데, 압도적인 규모로 인간의 감정에 호소한다는 표현도 등장한다. 수많은 교회 건물들은 이때부터 남아 있으며 건축학적으로 구별되는 구조물들이다. 유네스코 유산들의 선정이 유럽에 집중되어 수도 없는 성당들이 지정되었으며 많은 건축 학도들이 성당과 교회를 돌아보며 지금도 고딕양식을 연구하고 응용하는 중이다!
고딕 건축의 건물들을 학자들은 하늘로 솟구친 첨탑과 ‘스테인드 글라스’, 성서를 옮겨 놓은 듯한 조각과 실내의 성경 필사본, 섬세한 표현의 공예품 등은 모두 중세인들의 신에 가까워지려는 노력을 나타낸 것 이라고 해석한다.
사라졌던 고딕은 복고양식이 영국에서 18세기 말에 등장하여 19세기를 걸쳐 유럽에 퍼져 20세기까지도 교회와 종합대학 구조물로까지 이어졌다.
흔히 아는 것과 달리 건축에서 "고딕(gothic)"이라는 단어는 역사적으로 고트족과 아무 관련이 없다. 이 단어가 1530년대에 조르조 바사리(Giorgio Vasari)에 의해 사용되기 시작할 때에는 "조악하고 야만적이라고 생각되는 문화를 묘사하기 위한 경멸적인 단어"로 르네상스 건축에 빗대어 비하하기 위해 고트족을 차용했을뿐~~
고딕 건축의 특징을 검색하여 하려니 그냥 역사학적인 표현만 등장~~ AI에게 질문해야하나요?ㅎ
이성과 신앙의 조화라는 우아함을 차용하여 건축에도 깊이 관계한 스콜라 철학은 창문을 통한 빛은 장식이 아니라 진리를 상징하며 인간의 이성으로 진리를 이해하는 틀이라는 "간지"나는 표현으로 당시 모든 성당에 사용을 권장합니다..
학문이 미술, 조각뿐 아니라 건축에 인테리어까지 관여를 했군요!
고딕 양식의 성당은 수두룩하고 유럽 여행을 다녀온 사람은 수도 없는 성당을 다니면서 비슷비슷한 분위기와 양식에 지겨웠던 기억도 다 가지고 있을 듯~~
글의 중간에 고딕 양식의 시작 언급했던 샤르트르 성당을 소상하게 소개하면서 그 지겨웠던 기억을 소환해볼까요?
파리에서 남서쪽을 80km 떨어진 장소의 샤르트르시에 있는 광장과 대성당.. 유럽의 자유분망하고 여유로운 광장 문화는 부러움의 엄지척 👍..
생드니에서 시작된 고딕성당은 학자들에 의하면 랑상리스, 누아용, 파리 노틀담에서 완성도를 높인후
샤르트르에서 완성으로 언급합니다.
더구나 그전에는 수난을 겪었지만 13세기에 건립되어 수도 없는 역사적 혼란에도 원형을 유지중입니다..
샤르트르 서쪽 파사드와 첨탑..
고딕 성당의 프로토 타입이라고 하네요!
당시 건립 기록에 의하면 "자식을 갖게하는 처녀를 숭배했으며, 번식의 여신에게 봉헌된성소"..
성모 마리아의 집입니다!
클로비스 1세의 신앙의 진앙장소로 알려져 있으며 "강한 성인들의 우물(초기 기독교인이 순교한 우물)"의 선전이 알려져 메롤링거 왕조부터 순례지가 되기도~~
성 MARTIN이 거지에게 망토를 건네는 스테인드 글라스..
858년 바이킹의 침략으로 전소..
876년 왕의 봉헌으로 재건립..
이때 마리아가 예수 출산시 입었다는 튜닉 "성모의 베일"이 봉헌.. 믿어야 겠죠!
튜닉은 샤를마뉴가 콘스탄티누스 6세에게서 축복으로 받은것으로
샤를 2세가 성당에 기증~~
프랑스의 오툉성당도 같은 물건을 가졌다고 하고, 아헨은 마리아의 수의와 아기예수의 강보를 보관중이라고 합니다..
종교만큼 뻥이 센 집단도 없죠!
샤를마뉴가 비잔틴의 황제에게 베일을 선물로~~
황제가 성물을 교회에 기부~~
재임 당시인 911년 바이킹이 또 침입~~
쪽팔리지만 노르망디를 할양하고 노르망디 공작에 위임(앞서 언급한 정복왕 윌리엄 조상입니다!)
폴베르트 주교..
프랑스왕 로베르 2세(972~1031)의 스승입니다..
성인 추존이 되었는지 광배까지~~
프랑스왕 로베르 2세..
성당에 어두침침하게 있는 초상화들 당시 권력자들 입니다!
12세기 랜스버그의 Herrad가 작성한 "환희의 정원"에 나오는
7리베를 아츠..
마음은 4학과(산수,기하, 천문학,음악)에 의해 빛나고, 세학과(문법, 논리, 수사학)에 의해 제공된다고 주장했으며 그의 논리가 스콜라 학파에 의해 채택되어 수년후 왕의문 포탈에 조각으로 표현됩니다.
솔즈베리의 존은 샤르트르 학파의 철학자로 12세기 중세 르네상스를 선도했다..
그가 정립하고 시행한 "리베럴 아츠 Liveralarts"는 서구학부에서 최고 오래된 과정이다.
우리는 일본의 영향을 자유인문학, 교양교육으로 번역하지만 원뜻은 고대 로마 시대 노예가 아닌 "자유인"으로 시민의 역할을 수행하는 교육을 의미한다.
즉 공개토론에서 의견을 피력하고, 법과 질서에서 자신을 보호하고, 군대에서 필요한 지적능력 즉 군사로서의 능력을 고양하기 위한 고등 교육이었다.
5세기 Martianus Capella는 라틴어문법, 논리학, 수사학, 산술, 기하, 천문, 음악등 7개과정을 "리베랄 아츠"로 정립하였다.
샤르트르 대성당에 조각된 리베럴아츠~~
음악, 문법 교육등이 묘사되어 있는데 추론 가능하시죠!
중세 대학은 경제적 목적과는 무관한 리베럴 아츠를 교육하고, 대학원 과정이 되어야 경제적 목적 강의를 실시하였다고 한다.
르네상스 시대에는 사람들의 욕구와 지적 호기심이 증대하며 철학, 예술, 역사, 경제학,자연과학, 정치학, 지리학으로 확장되지만 여전히 리베럴 아츠로 지칭..
이른바 전인교육 과정입니다!
결국 전공을 위한 모든 기초 과정!
왕의 문에 새겨진 아리스토텔레스..
사고의 유연성과 독창성을 존중한 "리베럴 아츠"이기에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에 경직된 종교관을 결부한 신학 중심의 스콜라학파가 중세이후 정치경제, 과학과 기술 발전의 자양분이될 기반을 만들었다고 보아야한다..
이들은 암흑기로 칭해지는 중간에도 이런 교육을 진행하는 동안 우리 동양은 유교 논리로 인간의 능력을 충효로 가늠했으니
서양의 지배를 겪었으나 다행히 극복중이니 현명하게 판단하여 교육의 나아갈 방향을 정립하는 것이 합리적일 듯~~
여전히 과정은 진행중인데 제가 서구 사대주의에 너무 경도되었나요?ㅠㅠ
962, 1020년 두차례의 화재로 성당은 또 전소되며 무너집니다!
종교가 시대를 주도하던 사회 분위기에 편승 폴베르트 주교는 압력반 호소반으로 왕국의 지도층을 설득하여 로마네스크 양식으로 재건을 시작..
대성당 성모의 기적 판넬의 수레의식
대성당 성모의 기적 판넬의 수레의식
*수레 의식이란 12, 13세기 자의와 타의로 거행된 종교적 열정을 언급하는데 포터에 의해 "Cult of the carts"로 명명되었다.
평신도가 소대신 수레를 끌고 건축에 필요한 자제를 운반하는 것으로 1123년 대수도원장 쉬제가 프랑스 해안가 성당의 공사 현장 분위기를 전한것이 최초기록입니다..
참 평신도인 농노들은 동네북입니다..ㅠㅠ
1145년 수레의식을 언급한 쉬제가 기억을 소환 수레의식을 거행하였으며, 성당의 재건중 폴베르트 주교에 의해 평신도들이
찬송가를 부르며 성직자의 채찍을 맞으면서도 경건하게 수레의식을 거행했다..
적으면서도 종교의 폐악질에 허파가 디비집니다..
제가 옮긴글이 아니라 당시 대수도원장 헤이모가 영국 터트베리 수도원의 수도사에게 보낸 편지에 기록된 사료입니다!
풀베르트 성당 단면~~
1155년 앞서 언급한 "마리아 벨벳"을 이용한 성모 순례 열풍을 조성하여 건축비를 모으고 하늘에 거하는 여신의 땅에서의 보금자리라는 인식도 조장했습니다.
지금도 성모 축일이면 엄청난 교인들이 몰려듭니다!
선택장애 멍충이들~~
신심이 남다른 진정한 교인들..
판단은 각자 몫..
이외에도 질병이 창궐하면 회개의 순례장소로 지정하고 지하 묘지에 병원을 모아서 또 "삥"을 뜯었습니다.
이러니 종교가 지금도 욕을 먹는지..ㅠㅠ
대성당의 라비린스(미로)
1194년 마른하늘에 벼락이 치며
또 화재~~
기적의 베일은 불에 탄것으로 짐작했으나 모두 불탄 보물실에서 멀쩡한 베일을 수도사가 들고 나온다!
르노주교(1182~1217)..
주께서 이런 이적을 보이신 이유는 무성의한 성전에 노하셨으나 한번 미천한 인간에게 더 기회를 주심이라고 침을 튀깁니다!
또 평신도들을 수탈합니다..ㅠㅠ
평화의 댐, 금모으기 운동, 불우이웃돕기, 요즘 방송의 성금 모금이 왜 오버랩되죠?
성당 모금에 관해서 프랑스인들의 자조어린 "Pillar of the Earth"라는 드라마가 방영되고 별 생각없이 종교에 귀의했던 사람들이 치를 떨면서 배교했다는 스토리도 전하네요!
폴베르트의 로마네스크 성당이 전소되자 1194년 평신도를 닥달하고 왕가들에게 어름짱으로 다시 고딕 양식으로 수정 건축합니다..
불굴의 종교인들~~
공사를 하면 할수록 뒷돈이 생기니..ㅠㅠ
자식도 없는 분들 탐욕 대단!
(암암리에 사생아도 수두룩하지만~~)
고딕성당 건축..
벽이 얇아지면서 천장은 볼트 시공..
대성당 평면도~~
1260년 70년만에 성당이 완공됩니다..
또 짧은 시간 준공은 기적이라고 자화자찬..
1323년 2개의 채플 증축이후
큰 변화없이 원형을 유지중입니다!
부르봉의 루이는 1506년 벼락이 떨어져 북쪽 첨탑이 부러지자 지금까지 이름이 전하는 장인 Jehan에게 의뢰 7년만에 완공하고 성가대석 스크린도 완성..
1757년 사제들은 세태에 따른 관습의 변화를 이유로 스크린 철거후 의자를 들여놓고 주제단의 주교가 어둡다는 불평에 "스테인드 글라스"를 철거하고 채광이 잘되는
그리사일레창으로 성당내의 부조화를 만들어낸다!
프랑스 혁명에서 서민들의 고혈의 온상인 성당을 파괴하려고 의도~~
혁명군의 일원이었던 의뢰를 맡은 건축가(신원미상)는 그들에게 파괴하면 수년간 치울 잡석이 생겨 또 서민들의 고충이 야기된다고 주장 성당은 살아났다.
2차대전 당시 전쟁이 발발하자 목회자는 주민의 도움을 호소 스테인드 글라스를 보호했으며, 1944년 연합군은 독일군 본부로 사용되던 성당의 파괴를 그리피스 대령에게 명령~~
그리피스는 상부에 사전 정찰을 요청하고 독일군 몇명이 주둔함을 확인 폭파 중지 요청후 귀환중 전사~~
샤르트르 성당에는 그의 스테인드글라스와 광장에 그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다.
2009년 프랑스 정부는 보수공사를 단행 2017년 준공 기념 미사를 열었다. 마무리 문제로 프랑스내에선 시끌시끌한 모양입니다!
고딕 성당에 대한 이야기를 여러 자료를 취합하여 샤르뜨르 성당으로 풀어 보았습니다..
중세 암흑기 운운하지만 기록과 사료를 중시하는 유럽인답게 많은 스토리가 남아 있습니다..
중세의 미술은 종교의 굴레의 잡혀 철학과 예술등 인문사회과학이 방황하고 정착하지 못한 암흑기로 정의합니다만 다양한 사료를 분석한 결과 "그래도 사람이 살고 있었다."고 언급하여 봅니다!
다만 중세의 미술은 인간중심과 헬레니즘에서 중시된 자연모방이 엄격하게 통제되며 종교와 "오직 신"이라는 주제에 한정하여 제가 지금 출장온 이슬람 사회와 같은 환경을 만들었습니다.
성경을 표현하기 위한 극도로 단순화된 방법을 찾기위해 "상징성"은 부각되고 그것을 어떻게 표현하느냐가 장인으로 전락한 예술가들에게 제공된 이른바 "새로운 자유"였다.
대다수의 신도들이 문맹이었기에
회화는 상징과 사실주의에서 벗어나 고대시절 그림이 문자(상형문자)로 변모한 역순으로 회귀하여 그림을 통해 글을 쓰는 형식으로 변모하였다.
그림으로 변모되면서도 작품이 아닌 책의 삽화나 성당의 장식품으로 공급됨으로 자연의 음영이나 농담을 표현할 필요성이 없다고 생각했기에 형태가 단순화된 이상으로 색채를 자유롭게 선택하여 스테인드 글라스처럼 화려한 색채의 회화를 남겼다.
역설스럽게도 자연을 모방하거나 인체에 집착할 필요가 없었기에 초자연적인 세계의 관념을 많은 제약이라는 굴레에도 표현하는 돌파구를 만들지 않았을까 조심스럽게 생각하기도~~
장황하게 설명을 했는데 아직도 유럽 성당은 답답하고 식상하신가요?
중세 암흑기부터 여러 수난을 겪으면서도 살아남은 중세 건축물과 미술품들~~
우리가 보기에는 고리타분하고 조잡해보여도 있는 위치에서 많은 사연을 속삭이고 있습니다..
무식하게 글이 길었죠!
저도 조금 더 알고 관심을 가지자는 생각에 적어보았습니다..
사실 이번 편으로 중세사회를 마감하려고 하였으나 르네상스의 초석이 될수 있었던 12세기의 십자군 원정을 간과할수 없어 저도 살짝 지겹지만 한편을 더 적는다는 양해를 구하며 총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