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 4. 23. 주일예배 설교(사도행전 강해 40)
사도행전 22장 30절-23장 35절
정말 몰라쓰까?
■ 오늘 본문 초반에 대제사장 아나니아와 사도 바울이 한 판 붙는 장면이 나옵니다. 23장 1~5절을 다시 읽어보겠습니다. “바울이 공회를 주목하여 이르되, ‘여러분 형제들아, 오늘까지 나는 범사에 양심을 따라 하나님을 섬겼노라.’ 하거늘 대제사장 아나니아가 바울 곁에 서 있는 사람들에게 ‘그 입을 치라!’ 명하니 바울이 이르되, ‘회칠한 담이여, 하나님이 너를 치시리로다. 네가 나를 율법대로 심판한다고 앉아서 율법을 어기고 나를 치라 하느냐?’ 하니 곁에 선 사람들이 말하되, ‘하나님의 대제사장을 네가 욕하느냐?’ 바울이 이르되, ‘형제들아, 나는 그가 대제사장인 줄 알지 못하였노라. 기록하였으되 너의 백성의 관리를 비방하지 말라 하였느니라.’ 하더라.”
바울의 입에서 나오는 말에 비위가 상한 아나니아가 바울의 입을 치라고 하자, 바울이 회칠한 담이라며 아나니아를 비방했습니다. 이것을 두고 곁에 있던 사람들이 바울에게 시비를 걸었고, 바울은 변명을 했습니다. ‘나는 그가 대제사장인지 몰랐다.’
우리는 여기서 궁금한 것이 생깁니다. ‘바울은 정말 몰랐을까?’ 글자그대로 보면 몰랐던 것 같은데, 상상을 해보면 몰랐던 것 같지 않기 때문입니다. 상상해 보면, 대제사장을 모른다는 것은 이해가 어렵습니다. 당시 종교국가인 이스라엘에 있어 대제사장의 위치는 최고의 권력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바울이 예루살렘에 오래 머물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변호는 있습니다. 안질(眼疾)를 깊게 앓고 있었기 때문이라는 변호도 있습니다. 의상과 위치 때문에 못 알아 봤을 수도 있다는 변호도 있습니다. 대제사장은 그런 품위 없는 말을 쓰지 않는 전통이 있기 때문이라는 변호도 있습니다.
그런데 느낌적 느낌은 바울의 의도성이 의심되는 겁니다. 5~10절을 읽으면 이 의심의 확신이 강해집니다. “바울이 이르되, ‘형제들아 나는 그가 대제사장인 줄 알지 못하였노라. 기록하였으되 너의 백성의 관리를 비방하지 말라 하였느니라.’ 하더라. 바울이 그 중 일부는 사두개인이요 다른 일부는 바리새인인 줄 알고 공회에서 외쳐 이르되, ‘여러분 형제들아, 나는 바리새인이요 또 바리새인의 아들이라. 죽은 자의 소망 곧 부활로 말미암아 내가 심문을 받노라.’ 그 말을 한즉 바리새인과 사두개인 사이에 다툼이 생겨 무리가 나누어지니 이는 사두개인은 부활도 없고 천사도 없고 영도 없다 하고 바리새인은 다 있다 함이라. 크게 떠들새 바리새인 편에서 몇 서기관이 일어나 다투어 이르되, ‘우리가 이 사람을 보니 악한 것이 없도다. 혹 영이나 혹 천사가 그에게 말하였으면 어찌 하겠느냐?’ 하여 큰 분쟁이 생기니 천부장은 바울이 그들에게 찢겨질까 하여 군인을 명하여 내려가 무리 가운데서 빼앗아 가지고 ‘영내로 들어가라.’ 하니라.”
아나니아 건으로 수세에 몰린 분위기를 반전시킬 궁리를 내놓은 것입니다. “바울이 그 중 일부는 사두개인이요 다른 일부는 바리새인인 줄 알고 공회에서 외쳐 이르되, ‘여러분 형제들아, 나는 바리새인이요 또 바리새인의 아들이라. 죽은 자의 소망 곧 부활로 말미암아 내가 심문을 받노라.’”(6절) 예상 대로 대반전이 일어났습니다. “그 말을 한즉 바리새인과 사두개인 사이에 다툼이 생겨 무리가 나누어지니”(7절)
■ 우리는 이 사건의 전모(全貌)를 두 가지로 접근해 볼 수 있습니다. 하나는, 아니니아를 정말 몰라서 욕설을 했는데, 이것이 바울에게 불리해지자 이를 반전시키기 위해 모인 군중들을 내분(內紛)시키는 궁리를 했다는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아나니아가 대제사장이라는 것을 알았지만 제대로 혼내주기 위해 욕설을 퍼부었고, 덤벼드는 군중들을 피하기 위해 내분을 일으킬 궁리를 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둘 중 어느 것 같습니까?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바울이 아니니아를 알았다고 해도 혹은 몰랐다고 해도 달라질 것은 전혀 없습니다. 바울이 예루살렘에 온 목적이 달라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11절입니다. “그 날 밤에 주께서 바울 곁에 서서 이르시되, ‘담대하라. 네가 예루살렘에서 나의 일을 증언한 것 같이 로마에서도 증언하여야 하리라.’ 하시니라.” “그 날 밤에 주님께서 바울 곁에 서서 말씀하셨다. ‘용기를 내어라. 네가 예루살렘에서 나의 일을 증언한 것과 같이, 로마에서도 증언하여야 한다.’”(새번역)
바울이 예루살렘에 온 목적, 아니 주님께 불려온 목적은 ‘로마 선교’였습니다. 당시 세계정치의 일번지에서 주의 복음을 증거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로마로 가는 일이 좌절될 상황은 생길 수 없습니다. 주님의 부르심이기 때문입니다. 단지 좌절 될 것 같은 상황만 수도 없이 만들어질 뿐입니다. 마치 광야에서 40일 금식기도 마치신 예수께 마귀가 세 차례나 유혹했던 것과 같습니다. 유혹은 있었지만 예수의 길을 좌절시키지는 못했던 것과 같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의 인생이 이러합니다. 우리의 인생이 분명한 사명의 길에 들어서 있다면, 좌절을 시킬만한 상황은 수도 없이 만들어질 수는 있을지라도, 결코 우리를 향한 주의 목적을 막아내지는 못합니다. 사명은 주님의 영역이기 때문입니다.
■ 우리는 또 다시 바울의 로마행을 막아서는 사건을 당장 볼 수 있습니다. 12~15절입니다. “날이 새매 유대인들이 당을 지어 맹세하되, ‘바울을 죽이기 전에는 먹지도 아니하고 마시지도 아니하겠다.’ 하고 이같이 동맹한 자가 사십여 명이더라.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가서 말하되, ‘우리가 바울을 죽이기 전에는 아무 것도 먹지 않기로 굳게 맹세하였으니, 이제 너희는 그의 사실을 더 자세히 물어보려는 척하면서 공회와 함께 천부장에게 청하여, 바울을 너희에게로 데리고 내려오게 하라. 우리는 그가 가까이 오기 전에 죽이기로 준비하였노라.’ 하더니”
바울을 향한 엄청난 음모가 계획되었습니다. 살해(殺害). 그러나 이 음모는 성공할 수 없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바울의 사명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목적 때문이었습니다. 자, 이 살해 음모가 어떻게 제거 되는지 볼까요? 좀 길게 읽어야겠습니다. 16~35절입니다. “바울의 생질이 그들이 매복하여 있다 함을 듣고 와서 영내에 들어가 바울에게 알린지라. 바울이 한 백부장을 청하여 이르되, ‘이 청년을 천부장에게로 인도하라. 그에게 무슨 할 말이 있다.’ 하니 천부장에게로 데리고 가서 이르되, ‘죄수 바울이 나를 불러 이 청년이 당신께 할 말이 있다 하여 데리고 가기를 청하더이다.’ 하매 천부장이 그의 손을 잡고 물러가서 조용히 묻되, ‘내게 할 말이 무엇이냐?’ 대답하되, ‘유대인들이 공모하기를 그들이 바울에 대하여 더 자세한 것을 묻기 위함이라.’ 하고 ‘내일 그를 데리고 공회로 내려오기를 당신께 청하자 하였으니 당신은 그들의 청함을 따르지 마옵소서. 그들 중에서 바울을 죽이기 전에는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않기로 맹세한 자 사십여 명이 그를 죽이려고 숨어서 지금 다 준비하고 당신의 허락만 기다리나이다.’ 하니 이에 천부장이 청년을 보내며 경계하되, ‘이 일을 내게 알렸다고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 하고 백부장 둘을 불러 이르되, ‘밤 제 삼 시에 가이사랴까지 갈 보병 이백 명과 기병 칠십 명과 창병 이백 명을 준비하라.’ 하고 또 바울을 태워 총독 벨릭스에게로 무사히 보내기 위하여 ‘짐승을 준비하라.’ 명하며 또 이 아래와 같이 편지하니 일렀으되, ‘글라우디오 루시아는 총독 벨릭스 각하께 문안하나이다. 이 사람이 유대인들에게 잡혀 죽게 된 것을 내가 로마 사람인 줄 들어 알고 군대를 거느리고 가서 구원하여다가 유대인들이 무슨 일로 그를 고발하는지 알고자 하여 그들의 공회로 데리고 내려갔더니 고발하는 것이 그들의 율법 문제에 관한 것뿐이요 한 가지도 죽이거나 결박할 사유가 없음을 발견하였나이다. 그러나 이 사람을 해하려는 간계가 있다고 누가 내게 알려 주기로 곧 당신께로 보내며 또 고발하는 사람들도 당신 앞에서 그에 대하여 말하라 하였나이다.’ 하였더라. 보병이 명을 받은 대로 밤에 바울을 데리고 안디바드리에 이르러 이튿날 기병으로 바울을 호송하게 하고 영내로 돌아가니라. 그들이 가이사랴에 들어가서 편지를 총독에게 드리고 바울을 그 앞에 세우니 총독이 읽고 바울더러 ‘어느 영지 사람이냐?’ 물어 길리기아 사람인 줄 알고 이르되 너를 고발하는 사람들이 오거든 네 말을 들으리라 하고 헤롯 궁에 그를 지키라 명하니라.”
유대인들의 살해 음모가 천부장의 방어 음모에 좌절되고 말았습니다. 유대인들의 음모는 사생결단(死生決斷)식이었기에 끔찍한 음모였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엄청난 음모도 하나님의 길을 막을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은 바울의 생질, 즉 조카를 준비시켜 놓으셨고, 바울이 태생부터 로마시민권자임을 알아 바울에게 매우 호의적이었던 천부장을 준비시켜 놓으심으로 이 거대한 음모를 일거(一擧)에 파쇄(破碎)하셨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의 길, 우리의 사명은 결코 어떤 음모로도 막을 수 없습니다. 물론 방해를 받을 수도 있고, 생명의 위협이 눈앞에까지 올 수도 있지만, 주님의 사명이 끝날 때까지 어떤 음모도 소용없습니다. 끝날 때까지 끝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 바울의 로마행은 결코 순탄하지 않았습니다. 이제 로마로 가는 시작점임에도 불구하고 이 엄청난 사건들이 일어나지 않습니까? 갈수록 이런 방해 작업은 극심해집니다. 죽음이 바로 턱밑까지 추격해오고, 다 그만두고 싶다는 생각이 하루에도 몇 번씩 들었을 상황이 전개됩니다.
그러나 바울에게는 11절이 숙명이었습니다. “담대하라. 네가 예루살렘에서 나의 일을 증언한 것 같이 로마에서도 증언하여야 하리라.” ‘로마에서의 증언’, 이것이 바울의 숙명이었습니다. 바울의 사명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바울을 죽이려는 것들도 바울을 죽일 수 없었고, 바울 자신이 포기하고 싶었어도 포기될 수 없었습니다.
사명은 내 개인의 것이 아니라 주님의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이 내게 맡기신 사명과 비전은 결코 물릴 수도 없고, 이것으로부터 도망할 수도 없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지금 우리에게 ‘요나’를 보라고 하십니다. 요나는 결국 니느웨로 갔습니다. 그래서 니느웨는 회개의 도시가 되었습니다. 오늘 다시 우리의 사명인 ‘니느웨’를, ‘로마’를 기억합시다. 그리고 사즉생(死卽生), 죽기로 각오하면 삽니다. 이것이 부활 신앙입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