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양원의 추모비을 보며
임병식rbs1144@hanmail.net
여수는 세계사적으로도 보기 드물게 거룩한 발자취를 남긴 인물의 유적이 있다. 신풍에 있는 애양원(愛養院)으로 그 주인공은 손양원(孫養園 1921- 1950)목사님이다. 성함은 나환자을 사랑으로 돌본다는 뜻으로 지었다고 한다. 애양원을 들어서면 .중심부에 세워진 비석하나를 만나게 된다. 처음 방문한 사람들은 그것을 보고 '무슨 비석일까' 궁금해 하다가 비문을 읽고나면 저절로 옷깃을 여미게 된다.
손양원 목사는 바로 이곳 경내에 잠들어 있다. 목사님은 처참한 상태로 돌아가셨다. 6.25가 터져고 적이 남침 했을 때 북한군은 기독교인들을 가만두지 않았다. 닥치는데로 붙잡아 살해했다. 목사님도 그 광란의 살륙현장을 피해가지 못하였다. 아니, 피할 수가 있었지만 보살피던 나환자들을 두고 떠날 수는 없었다. 애양원을 지키고 있다가 대책없이 붙잡히게 되었다.
그런다면 만행에 희생당한 손양원 목사님은 어떤 분인가. 일찍이 목사님은 기독교 교리대로 참사랑을 펼쳤다. 기피하고 외면한 나환자를 품아 안아 진정한 기독교 정신인 사랑과 봉사를 몸소 실천하였다. 열악한 환경에서 이 세상 사람 누구도 감히 흉내 낼 수 없는 삶을 살다가 갔다.
목사님에게 비극은 6.25전쟁이 나기 이태전 여순 사건때 찾아왔다. 좌익세력이 준동하던 시기에 학교를 다니던 큰아들 동인과 작은 아들 동신을 한꺼번에 잃은 것이다. 범인은 좌익 학생 안재선이었다. 그런데도 목사님은 애간장이 끊어지는 아픔이 있는 가운데서도 그 살인자를 양자로 삼았다. 성인이 아니고서 도저히 상상하기 어려운 사랑의 실천이었다.
목사님은 경남 함안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손영준. 널리 알려진 손양원이란 이름은 나중에 개명한 것이다. 목사님의 시련은 일제 강점기를 고향에서 보내면서부터 시작되었다. 신사참배를 거부하는 목사님을 일제는 가만 두지 않았다. 그런 시련가운데서도 평양신학교에 들어가 신학공부를 했다. 그리고 나서 여수 율촌에 내려와 애양원 교회에 부임했다.
부임한 목사님은 나환자를 돌보기 시작했다. 당시는 누구나 나환자를 접촉하면 병이 옮는다고해서 기피하고, 일그러진 외모와 심한 냄새 때문에 가까이 다가서질 않았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목사님은 조금도 개의치 않고 가장 낮은 자리에서부터 목회 일을 시작한 것이었다.
당신의 진정성 있는 실천은 금방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였다. 결속이 강화된 것은 물론 교세도 날로 확장되었다. 그런데 예기치 못한 비극과 시련이 몰아닥친 것이다. 그것도 두번, 여순사건과 비극의 6.25전쟁이었다.
이 두 사건으로 목사님 가정과 교회는 풍비박산이 되고 종국에는 목숨을 잃게 되었다. 손 목사님은 여순사건으로 두 아들이 죽이을 당하자 심각한 갈등에 빠져들었다. 아들을 죽인 범인을 용서할 것인가, 증오할 것인가. 기도하던 중에 용서하는 길을 탰했다. 용서하지 않으면 어찌 참다운 목회자라 할수 있는가 하는 회의감 일었다 . 고민 끝에 목사님은 범인을 용서함과 함께 양자로 들이기로 결심했다. 그야말로 참사랑의 위대한 결정이었다.
그런 삶을 살았기에 목사님 사후에 뭇사람의 기억 속에는 위대한 인물로 기억되는 것은 당연하다고 할 것이다. 그럼으로 애양원을 방문하여 마주하는 비석은 위대한 신앙의 힘이 얼마나 인간의 아름다움을 보여주는가를 증명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비가 세워진 뒤편에는 이런 저런 행적을 모아 기리는 기념관이 세워져 있다. 이곳을 모든 기독교 교인은 물론 많은 일반 사람들이 방문한다. 진정한 참사랑 실천을 느끼도 돌아보기 위해서이다. 둘러본 사람들은 당연히 뜨거운 감동을 받는다.
수년 전이었다. 하루는 직장에서 일을 보는데 한 젊은이가 찾아 왔다. 자기가 바로 손양원 목사의 아들인데 확인할 게 있어서 왔다고 했다. 나는 깜짝 놀랐다. 그렇다면 혹시 양자로 삼았다는 바로 그 사람인가? 그런데 그건 아니었다. "제가 그분의 아들입니다. 유복자입니다."라고 말했던 것이다.
찾아온 목적은 선친의 독립운동을 입증하는 자료를 보강을 위해서라고 했다. 그때 나는 보안부서에 근무하고 있어서 그 일에 조금이나마 도와준 것을 보람된 일로 생각한다. 나중에 증명해준 서류를 갖추어서 신청을 하여 마침내 1991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 받게 되었던 것이다.
그런만큼 애양원을 한번씩 방문하면 친근감이 느껴지면서 마음이 포근하다. 그렇지만 서있는 비를 바라보면 마음 한 켠이 서늘해지는 건 어쩔 수 없다. 이 비석은 그러한 목사님의 이력을 안다면 누구나 가슴에 궁클한 감동을 새기게 될 것이다.
. 나는 이 비석을 볼 때마다 다짐하는 것이 있다. 그것은 다른 것이 아니고 다시는 이 땅에서 여순사건이나 6.25같은 안타까운 비극이 일어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 일념으로 맡은바 임무를 다하고 있는 것에 자긍심을 느낀다. (1991)
첫댓글 1992 창작수필 봄호 발표.
사랑의 원자탄이라 불리우는 손양원목사의 일대기는 저에게도 지대한 영향을 주었지요. 영화로도 제작되서 본 적이 있는데, 말이 쉽지 자기 아들을 죽인 자를 양자로 삼는다는 것이 아무나 가능한 일이겠습니까. 죄인을 양자삼은 하나님의 사랑을 그대로 재현한 성인이라 할 수 있지요. 여수에 손양원 목사님의 기념비가 있었군요.
여수에는 손양원목사님의 기념비뿐 아니라 애양원에 기념관도 세워져 있습니다. 그분의 유복자를 만난적이 있는데 만나던 그때 생각이 많이 납니다.
손양원목사가 유복자가 있었다고 하니 처음 듣는 얘기 같습니다.
그의 딸이 권사로 여수제일교회 와서 아버지와 두 오빠 얘기는 해서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
유복자 동생 얘기는 전혀 말하지 않아 없는 줄 알았는데 그런 일이 있었군요.
청석님께서 도움을 주워 애족장을 받았으니 뿌듯합니다.
건국훈장은 1.대한민국국장 2.대통령장 3.독립장. 4.애국장. 5. 애족장이 있습니다.
그는 기독교 신자로 공산주의자들에 의해서 죽었으니 건국훈장 중 다섯 번째인 5등급을
나라에서 준것 같습니다.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묻혀있는 글을 다시 퇴고 했습니다.
애족장은 건국훈장중 5등급이군요.
손양원목사님의 유복자가 찾아와 서훈을 신청하는데 자료가 없다고 하기에
도우을 좀 드린적이 있습니다.
나중에 애족장을 탔다기에 기분이 좋았습니다.
읽어주시고 댓글 주셔서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