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이 그날이다
서연 김태실
나보고 ‘오십 대’라고 한다. 몸이 보내는 적신호는 그렇다 치더라도 어디를 가나 자리가 서툴다. 60대처럼 어른으로 대접받기도 뭐하고 40대처럼 아직은 젊다고 말하기도 그렇다. 최신 IT기기나 디지털 가전제품을 새로 들이기만 해도 머리가 아프다. 20대에게 눈치를 받으며 배워야 한다.
그러나 아직은 아니지 않는가. 애써 부인하는 나에게 쐐기를 박은 꼬맹이가 있다. 세 돌이나 지났을까. 작은 등에 맨 어린이집 가방과 얼굴을 반쯤 가린 마스크가 안쓰럽다. 좁은 승강기 안, 어색한 짧은 만남 속에서 그 아이의 60대 중반 할아버지가 인사를 하라고 한다. 아니, 뭐 아직 애기인데 인사까지나.
“할머니, 안녕하세요?”
나보다 더 당황한 녀석의 할아버지가 ‘할머니’가 아니고 ‘아줌마!’라고 했지만 이미 늦었다. 들키지 않으려고 애를 쓰지만 눈꼬리는 위로 올라가고 입술은 마녀처럼 씰룩거리는 것을 어쩔 수 없었다. 할머니라니.
‘할머니’소리를 처음 들은 나도, 아직은 ‘괜찮은 여인’이 될 때가 있다. 공공 스포츠센터 샤워실 안 욕탕에 앉아 있을 때다. 엘이디 전구가 훤히 밝혀주는 불빛 아래 벗은 여인들이 둥근 탕 테두리를 따라 반신욕을 하며 앉아 있다. 탕 속에 몸을 푹 담그며 다리를 펴고 있는 이들의 발그스레한 뺨은 소녀 같다. 벌거벗은 몸에는 세월의 순서가 그대로 들어난다. 60대 이후의 여인들이 많은 평일 오전, 그녀들은 더 젊은 여인의 몸을 노골적으로 쳐다보며 부러워한다.
“아직 살아있네!”
찐한 농담을 한다. 질색을 하지 않는 것도 그곳에서 살아남는 길이다. 그냥 웃으면 된다. 싫지 않다. 처진 가슴과 늘어진 배를 들어내며 앉아 있는데 ‘고상함’이란 필요 없다. 솔직하게 시간을 견디는 몸뚱이들만 있을 뿐이다.
나를 시샘하는 그녀들도 빛날 때가 있다. 바로 물빛에 비친 ‘희미한’ 불빛 아래, 수영장 물속에서다. 일단, 그녀들이 그곳에 들어서면 나이를 가늠할 수 없다. 귀여운 귀를 내놓고 모자 색깔에 맞춘 화려한 색색의 수영복을 입은 그녀들의 몸매는 괜찮다. 동그란 얼굴과 하얀 피부, 통통한 다리, 탐스런 엉덩이들은 아름답다. 한 줄로 서서 발차기를 신나게 하며 헤엄치는 모습은 멋지다. 고기 떼들이 생명력을 자랑하며 줄지어 달리는 모습과 비교해도 뒤지지 않는다. 활기차다. 살면서 세상으로 부터 당한 발차기에 대갚음하듯이 힘차게 찬다. 그녀들은 늙지 않았다.
시간이 달려간다고 했다. ‘할머니’라며 인사했던 그 꼬맹이가 아니더라도 나는 안다. 지금 어디로 향해 가고 있는지. 빨리 어른이 되고 싶어 했던 10대가 드디어 성인인 20대가 되었다고 좋아하는 사이, 30대가 되었다. 「서른 잔치는 끝났다(최영미)」를 참담하게 읊조리며 아이들을 키우는 사이, 어느새 「마흔(최승자)」를 필사하고 있었다. 아이들은 매일 커가고 할 일이 더 많아졌다. 내 나이도 아이들이 자라는 속도만큼이나 커져만 가더니 50이라는 숫자와 맞닥뜨렸다.
『우리는 언젠가 죽는다.』를 쓴 데이비드 실즈는 우리 몸이 노화하면서 겪게 되는 육체적, 심리적 변화들에 대해 자세하게 설명해 준다. 특히 50대부터 시작된 자신의 노화현상에 대해 알려주며 죽음을 삶의 일부로 받아들이는 법에 대해 생각하게 해 준다. 작가는 갓 쉰을 넘긴 나이다. 머리칼이 듬성듬성하고 격심한 요통에 시달린다. 아흔이 될 때까지 병원신세 한번 져본 적 없고, 만능 스포츠맨에다 여전히 성생활을 즐기는 아버지에게 질투를 느낀다. 매일 피어나는 젊음으로 넘치는 생명력을 지닌 딸에게도 부러움을 느낀다. ‘40세에는 청춘의 노년기이다. 50세는 노년의 청춘기이다.’라고 한 빅토르 위고의 말이나 ‘50세에서 57세사이가 가장 혹독하다.’라고 한 T. S. 엘리엇의 말을 빌려 쓴다.
나는 지금, 노년의 청춘기이다. 뒤에 붙은 ‘청춘’이라는 단어가 조금은 위로가 되지만 ‘노년’이라는 말은 쉽게 받아들이기 쉽지 않다. 노년이라니.
청춘! 얼마나 설레고 짧은 단어인가? 노년! 얼마나 당황스럽고 긴 이름인가?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오스카 와일드)』에 나오는 주인공은 영원한 젊음의 대가로 자신의 영혼을 파는 인간이다. 작가는 헨리 경을 통해 젊음을 되찾을 수 있다면 무슨 일이든 할 것이며 청춘만 한 것이 없다고 말한다. 그러나 노년의 비극이란 사람이 늙어서 생기는 것이 아니라, 여전히 젊어서 생기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청춘에 대한 미련을 버리고 남은 생을 흔쾌히 받아들여야 하지 않을까. 더해지는 내 나이의 숫자에 당황하지 않는다. 삐걱거리는 무릎과 늘어가는 흰머리를 탓하지 않는다. 그동안 애쓴 내 몸을 돌아보고 감사한다. 오늘 할 수 있는 일을 한다.
누구나 꼬맹이였고 젊은이였다. 하루하루 견디며 일상적인 일을 하고 살면서 어떻게 매번 알겠는가? 시간이 달려가고 있다는 것을. 세월은 날아간다. 어쩔 수 없다. 젊고 싱싱한 날은 짧다. 그러니 오늘이 그날이다. 가장 젊은 나를 만날 수 있다.
* 코로나 바이러스가 빨리 물러나고 공공체육시설에서 그녀들을 다시 만나기를 희망합니다.
서연 김태실 약력
약력: 독서치유강사
『강원문학』신인상으로 수필 등단(2018)
강원문인협회, 한국수필가협회, 야탑문학회 회원
수필집『마음이 있어요(2019)』
blog.naver.com>ktsl5678 종로3가 풀빛나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