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학의 발달로 관학이 더욱 쇠퇴하자, 숙종, 예종 등은 여러 가지 관학 진흥책을 시도하였다.
<서적포>
숙종 6년(1101) 국학(국자감)을 진흥시키기 위하여 국자감 안에 설치한 서적 출판소. 관학을 부흥시키기 위한 방책이었으며, 이 곳에서 많은 서적을 간행하였다.
<7 재>
예종이 국학의 진흥을 위해 국학 안에 설치한 전문 강좌로서, 최충의 9 재를 본 뜬 것이었다. 여기에는 여진과의 전쟁의 영향과 왕권을 강화하고자 한 예종의 개인적 의지가 작용하였다고 한다. 즉, 7 재 가운데는 무학재(武學齋)가 있는데, 이것은 예종이 윤관의 9 성 개척이 결과적으로 실패한 후 국방을 위한 무관 양성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설치한 것이었다. 다시 말하면, 예종은 국학을 통해 새로운 문무의 인재를 양성하여, 이들을 기반으로 문벌 귀족 세력을 누르고 왕권 강화를 이룩하려고 하였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