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옛날 이야기 -96-
(1988년에 중국땅을 밟고.. -12-)
쟈무스(佳木斯)역에 갔더니 역시 기차는 좌석표가 없단다. 전에 태원(太原)을 갔다 올 때의
경험을 살려 무조건 기차를 탔다. 어찌나 사람이 많던지 침대칸으로 가는데 사람 틈을 헤치
고 가느라 무척 힘이 들었다. 침대칸 차장을 만나 침대칸 하나를 부탁 하였더니 역시 차장이
침대칸 하나 비워주어 편안히 갈수가 있었다.
다음날 오전 10시쯤 티에리(鐵力)역에 도착하였다. 미리 알아둔 전화로 연락하여 역전에 살
고 있는 林業局에 근무하는 넷째 아들네 집으로 갔다. 넷째는 출근하고 없었으며 그의 안식
구가 어찌나 깔끔하던지 집 안팎이 반질반질 하도록 깨끗이 하고 울안에는 채소도 심고 아주
알뜰하게 살고 있었다.
이른 점심을 얻어먹고 高中에 다니고 있다는 그의 아들과 같이 당고모가 살고 계시는 집으로
가기 위해 택시를 잡았다.5월 중순인데 눈이 녹아 길이 엉망이라 시 외곽에서 농촌으로 들어
가는 길목에서 차바퀴가 빠져 도저히 가지 못하였다.
걸어서는 갈수 없는 상당한 거리라 하여 첫 동네에 들어가서 동네 사람에게 부탁하여 경운
기를 얻어 타기로 하였으나 경운기 주인이 한 두 시간이 지나야 온다기에 마침 돈네의 잔치
집에에 들려서 술과 떡을 얻어먹으며 기다렸다. 이 잔치집의 신랑은 한국에 가서 돈을 벌어
와 온 동동네가 초가집인데도 이집만 기와집으로 새로 지었다.
그래서 그런지 모든 사람들이 한국이라는 나라를 동경하고 있었으며 내가 한국인이니까 모
두 몰려와서 나와 함께 술을 마시며 여러 가지 대회를 나누며 즐거운 시간을 가졌는데 나는
이곳에서 우리나라의 옛날 그대로인 농촌의 인정 많고 순박함을 느낄 수가 있었다.
드디어 경운기 주인이 와서 아쉬운 작별을 하고 경운기를 타고 출발을 하였다. 질퍽한 진흙
길인 농로길은 빨리 달릴 수가 없어 느릿느릿 달렸다. 들녘에는 아직도 음지에 눈이 남아 있
었으며 농한기라 그런지 들녘에는 사람의 그림자를 볼 수가 없었다.동네를 지나면 들판이고
또 동네를 지나면 들판이고.............
우리 민족이 이곳까지 들어와 논을 개간하였다니 참으로 감탄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거리가
얼마인지 모르겠으나 거의 한 시간을 달려 드디어 고모님 집이 보이기 시작하고 고모님이 우
리를 보고 뛰어나오시며 나를 반겼다.
고모님이 살고 계시는 이곳은 티에리(鐵力)역에서 북쪽으로 상당히 들어간 곳이었는데 동네
북 쪽으로 그래도 멀리 산이 보였다. 그러나 남쪽으로는 한없이 뻗어 있는 지평선 너머로 멀
리 부락이 보일락 말락 할뿐 정말 아무것도 없는 들판의 논 한가운데에 몇 가구가 집을 짓고
살고 있었다. 논토를 따라 주거지를 마련 하였으리라.
그래도 집 뒤 습지에 자그마한 연못이 있었고 여기에는 고기가 많아서 심심하면 고기를 잡아
먹는다며 가을에 잡아서 말린 미꾸라지를 싸주셨는데 집에 가지고 와서 기름에 튀겨서 먹었
더니 아주 맛이 있었다. 고모님은 셋째 아들과 같이 살고 계셨으며 그간 보고 싶었던 고모부
는 몇 년 전에 돌아가셨고 고모의 시동생도 작년에 저세상으로 갔다한다.
나와 동갑내기인 고모의 시동생은 해방 후 내가 17살에 의용군으로 차출되어 아성(阿城)에
서 총대를 메고 근무할 때 내가 항상 데리고 있었으나 내가 떠나올 때 무정하게도 아무 말도
못해주고 떼어놓고 왔기에 항상 미안하여 만나면 그때 이야기를 나누며 사과하고 싶었는데......
내가 왔다 하니까 근처에 살고 있는 둘째, 넷째네 식구들이 모두 찾아 왔다. 그리하여 대식
구가 모여 함께 나를 위하여 정성들여 장만한 음식과 맥주를 마시며 아주 즐거운 시간을 가
졌다.
당고모부는 해방 전 만주에서 독립운동을 하셨지만 일곱이나 되는 자식들이 모두 농촌에서
고생하고 있는 모습을 보고 무척 안쓰러웠다.
이틀 밤을 이곳에서 묵은 뒤 아쉬운 이별을 하고 다시 티에리(鐵力) 역에 도착하였다. 이번
에는 기차가 아니라 버스를 이용하여 할빈까지 가기로 하여 시외버스 정거장에 갔더니 할
빈까지 가는 것이 없고 마침 쑤이화(绥化)시까지 가는 버스가 있기에 이 버스를 탔다.
쑤이화(绥化)시에서 다시 할빈까지 가는 버스를 갈아 탈 예정이었다. 쑤이화(绥化)시는 생
각보다 깨끗했으며 거리도 넓고 잘 정돈 되어 있었다. 버스터미널 옆에 있는 식당에서 점심
을 때우고 할빈가는 버스를 탔다.
그 무렵 천진의 버스는 냉난방장치가 없었다. 그런데 이곳은 겨울이 워낙 추운 곳이라 그런
지 난방장치가 있었다. 이 난방장치는 라디에이터의 열을 굵은 철관을 통하여 의자 밑으로
그리고 운전수 뒤를 돌아 반대편으로 ‘ㄷ’자로 돌아가게 만들었으며 나는 맨 앞좌석에 앉았
었기에 그 철관위에 발을 올려놓았다가 너무나 뜨거워서 큰일 날 뻔하였다.
위험은 했지만 버스 안이 그런대로 따뜻하여 窮之通이라는 말이 떠올라 혼자 웃었다.
송화강(松花江) 북쪽의 鐵力(티애리)는 끝이 보이지않는 평야 였다
이런 먼곳까지 우리민족들이 와서 논을 개간하여 살고 있었다
멀리 부락이 보일락말락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