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만 건국사(10)
귀국 첫 강의 “임금이 없어져 시원하다”
• 인보길 기자
입력 2022-12-23
• ▲ 미국유학 6년만에 귀국할때 이승만이 탄 여객선 발틱호. 영문메모는 이승만 친필.ⓒ연세대이승만연구원
5년새 고종 부자가 일본에 내준 나라에 돌아오다
“나의 준비기간은 끝났는데 나는 깊은 슬픔을 느낀다.
내가 가서 일해야 할 한국은 이제 나의 나라가 아닌 것을...”
1910년 6월 프린스턴대학 졸업식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이승만이 남긴 소회다.
이승만이 조지 워싱턴 대학에 입학하던 해, 그토록 경멸 증오했던 황제 고종의 을사조약으로 망해버린 조국은 5년 지나 이승만이 프린스턴대서 박사 받은 두 달 만에 8월 29일 순종이 종지부를 찍는다. “나라를 일본 천황폐하께 이양하니 소란 떨지 말고 복종하라”는 항복 선언, 총 한방 쏘지 않고 자기 스스로 500년 왕국을 지구상에서 지워버린 것이다.
일본의 뇌물 받고 국권을 넘긴 고종 ([매국노 고종] 박종인 지음, 2020), 그 아들 순종의 합방조약 내용은 ’나라와 백성을 일본에 주고 왕실은 일본 천황가의 식객이 되어 일본 돈으로 호사를 누린다‘는 약속이 전부였다.
이제 어떻게 할 것인가. 미국 명문대 박사 이승만에게 취업의 길은 많았다.
미국에서 대학 교수직도 가능하지만 초지일관 조국에 돌아가야 할 이승만이다.
그의 ’알바‘가 독립운동이었듯이 이제 ’준비된 독립운동가‘는 고종이 일본에 내준 나라를 다시 찾으러 나선다.
서울에선 언더우드가 기독교 대학을 설립한다며 교수직을 제의하고, 게일 선교사는 서울 YMCA서 일하자고 했다. 뉴욕 YMCA국제위원회 총무 모트(John R. Mott) 박사를 만난 이승만은 모트의 제의를 받아들였다. 이승만은 그 뜻을 이렇게 말한다.
“서양 문명의 모든 축복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비롯되었음을 한국인에게 가르쳐야 한다. 그래서 내가 전공한 모든 것을 가르치고 싶다. 일본의 전체주의 치하에서 어떤 일이 있어도 전국을 돌아다니며 복음을 전하는 일에 생애를 바치는 것이 나의 의무라고 생각한다” (언더우드에게 보낸 편지 일부).
드디어 이승만은 6년만에 유학 목표를 달성하고 미국을 떠난다.
간단한 짐은 대부분 책과 자료들, 평생 사용할 영문 타이프라이터와 순회강연 때 타던 자전거도 꾸렸다.
윌슨 총장 가족 등 친지들과 작별한 이승만은 한일합병 닷새 뒤 9월3일, 뉴욕 항에서 발틱 호(S.S. Baltic)를 타고 영국 리버풀로 향한다. 언제 다시 해외여행할지 모르므로 유럽을 둘러본다. 런던 파리 베를린 모스크바를 거쳐 시베리아 횡단 열차를 타고 압록강을 건넜다.
일본 경찰의 입국심사를 받으며 “나라를 빼앗긴 설움을 실감”하였고 계속되는 일경의 심문에 응하는 동포들을 보며 적개심을 누르기 힘들었다. ([신화속의 인물] 올리버 지음).
제물포를 떠난 지 5년11개월, 서울 ’남대문역‘에 10월10일 오후 8시쯤 내리자 아버지 이경선 옹이 부등켜 안고 눈물을 흘렸다. 부인은 나오지 않았다.
• ▲ 1910년 서울 종로 YMCA 건물앞 이승만과 성경연구반 학생들.ⓒ연세대이승만연구원
◆ 젊은이들의 ’우상‘...YMCA 교장...Wonderful 연발하는 ’이굉장‘
옥중동지들이 다시 만났다. 특히 평생 멘토이자 YMCA를 이끌던 이상재(李商在)는 학감(學監=교장) 이승만을 ’한국인 총무‘(Chief Korean Secretary)로 기용되도록 적극 밀었다고 한다. 미국인 총무 질레트와 동급이 되어 국제YMCA ’보호망‘ 속에서 독립운동을 하기 위해서이다. 당시 서울 YMCA는 애국청년 지사들의 집결지, 제2의 독립협회처럼 윤치호, 이상재, 김린, 김일선, 김규식 등 옛 멤버들이 대거 참여하였고, 유급직원만 83명이나 되었다.
명성 높은 미국 박사 이승만이 가담한 서울YMCA는 미국, 유럽, 일본 YMCA와 유대를 강화하여 일본 총독부도 쉽게 건드리지 못하는 막강한 국제 기독교 조직으로 재탄생하였다.
일찍이 ’만민공동회의 스타’가 미국 박사로 금의환향하니 이승만의 명성은 전국의 관심 집중 그대로 첫 강연부터 구름 인파가 몰려들었다. 강당을 꽉 메운 첫 날 이승만은 ’폭탄 발언‘으로 귀국 제1성을 터트린다.
“오랜만에 귀국해 보니 시원한 것이 세 가지 있다
임금이 없어져 시원하고, 양반이 없어져 시원하고, 상투가 없어져 시원하다”
나라가 없어진지 두 달도 안되는 상황, 왕당파의 시비가 일었지만 금방 잠잠해졌다.
이처럼 확고한 자유민주주의자가 되어 YMCA 교장을 맡은 이승만은 왕정복고 세력에 분명한 선을 긋고, 꿈에 그리던 기독교적 자유민주 국민 교육에 돌입한 것이다.
이승만은 계획대로 우선 ’연경반‘(硏經班:Bible Class)을 조직하여 성경강의에 집중하고 한국독립운동사와 민주정치사를 강의하며 배재학당시절 학생회 ’협성회‘ 토론회서 그랬듯이 토요일마다 YMCA연합토론회를 빠짐없이 열어 의식화 정신교육을 심화시켜 나갔다.
모임마다 수 백 명씩 몰린 학생들에겐 자신들의 ’우상‘ 이승만의 행동 하나하나가 화제였다.
모든 공부는 기도로 시작하고 기도로 끝냈으며 계단을 오르내리면서도 영어로 혼자 기도하는 ’이승만 박사님‘의 신기한 모습들, 게다가 풍부한 유머에 웃음이 끊이지 않는 강의였다.
학생들이 조금만 잘해도 “원더풀”을 연발하고 중요한 대목마다 “굉장해. 정말 굉장해” 강조하여 ’이굉장‘이란 별명도 생겨났다. 설득력이 강한 연설은 마치 부흥목사와 같이 열기가 뜨거웠다고 제자들이 증언한다. 이때 수강했던 임병직(林炳稷), 허정(許政), 이원순(李元淳), 정구영(鄭求瑛) 등의 회상이다. 이들은 이승만의 망명 독립운동과 건국과 국정의 동지들이 된다.
• ▲ 복당구면(福堂舊面) 기념사진. 복당구면이란 한성감옥서 기독교로 개종한 옥중동지들을 다시 만났다는 뜻. 왼쪽부터 김정식,안국선, 이상재, 이원긍, 김린, 이승만.ⓒ독립기념관
★이승만은 귀국 후 얼마 안 되어 집을 뛰쳐나온다.
당시 집은 동대문밖 창신동 낙산 성벽아래 법륜사(法輪寺) 근처, 부인 박씨는 채소를 가꾸고 복숭아 밭의 복숭아를 따서 근근히 생계를 이어왔다고 했다. 문제는 시아버지와 며느리의 돌이길 수 없는 감정싸움, 밤마다 이승만은 아버지와 아내가 털어놓는 ’6년간의 이야기‘에 시달려야 했다. 특히 아버지는 7대독자 태산이를 며느리가 제멋대로 미국에 보내 죽었으니 대가 끊겼다며 통곡하였다. “네가 저년을 여편네로 여긴다면 너는 내 자식이 아니다”라는 말까지 되풀이하는가 하면, 아내는 아내대로 괄괄한 성격이다.
견디다 못해 가출한 이승만은 YMCA 3층 다락방에서 혼자 기거한다. 미국 자취생활에 단련된지라 생홀아비 같지 않게 항상 옷차림에 신경을 써서 ’핸섬한 고품격 신사‘로 학생들의 선망을 저버리지 않았다고 한다.
• ▲ YMCA성경반 1910년 성탄절 행사.ⓒ연세대이승만연구원
◆기차 타고...배 타고...나귀 타고...걷고 걸어 1천리
초반 6개월쯤 YMCA서 교육에 몰입했던 이승만은 전국 순례 길에 나선다.
당시 뜨겁던 ’백만인 구령(救靈)운동‘의 성공을 위해서다. 이미 미국 유학에서 미국의 구령운동에 참여했던 이승만은 1911년 여름 YMCA협동총무 브로크만(Frank M. Brockman)과 함께 전국을 돌아다니며 설교와 강연을 강행한다.
“기차를 타고 1,418 마일, 배를 타고 550마일, 말 또는 나귀를 타고 265마일, 우마차 타고 50마일, 걸어서 7마일, 인력거 타고 2마일 등 도합 2,300마일...” 3천7백㎞ 약 1천리 길을 누빈 교통수단까지 시시콜콜 적어놓았다. ([이상재 평전] 전택부, 범우사, 1985)
이때 전남에서 평안도까지 33회 집회에 7,535명의 학생이 참여하였고 이승만은 수십개 기독교 학교에 YMCA를 조직, 기독교적 독립운동의 전국 청년조직을 만들어냈다.
평양서 서울로 돌아오는 길, 개성에서 ’제2회 기독학생 하령회‘를 개최한다.
독립협회 때부터 음양으로 이승만을 돕는 윤치호(서울YMCA부회장)의 한영서원(韓英書院:Anglo-Korean Academy)에서 윤치호가 주재한 모임엔 전국 21개 기독학교 대표 93명이 참가, 미국인 부흥목사들의 설교로 부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