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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들은 서로 다르게 흔들리지만 하종오
나무들은 서로 다르게 흔들리지만
날이 흐린다.
나무들은 햇빛을 받아들여 뿜던 초록빛을 멈추고
가만히 서 있다.
바람이 분다. 잎새가 흔들린다.
다시 바람이 분다. 가지가 흔들린다.
드디어 나무들이 흔들리고 세상 크기대로 흔들리면서
제 목숨을 뿌리에서 밑동으로 밀어올리고
제 생김 생김을 밑동에서 우듬지까지 드러내어 모든 잎맥으로 저를 키운다.
바람이 분다. 분다. 잎새들이 흔들린다. 흔들린다.
나무들은 홀로 흔들리면서도 숲으로 흔들리는 가운데
서로 다른 모습을 하고,
바람에게 저를 맡기지 않고 다만 저의 일생을 가다듬는다.
벌레한테 싱싱한 부분을 내주고도 더 넓은 전체를 가지고 울울하다.
비가 온다. 비 온 뒤에
나무들은 일시에 맑아져 자연으로 푸르러져 간다.
이 동류!
꽃들은 우리를 봐서 핀다, 푸른숲, 1989
노동시장 하종오
노동시장
안지랭이* 개천가에 새벽 안개 깔릴 때
발자욱 터벅터벅 어둠을 밟고
낯선 사내들이 모여드는데
누구냐 하면 미장공 목공 노가다들
하루품 팔려가기를 기다린다 이거라.
길가에 핀 풀포기를 잊고 말이야
고운 처녀 얻어 호박넝쿨 올리면서
나이를 몇 해 앞당겨 살고프던 집을 버리고
두렁마다 햇살과 바람을 득실거리며
트여오던 파종기와 추수기도 잃고 말이야.
흘러 흘러, 서서 혹은 앉아서, 흘러 흘러
아스팔트 건너 골목 꺾어 다다를 공사판에서
한 삽 퍼다 버릴 흙을 생각하고
시장바닥 생선 궤짝 메다주며
흘러 흘러, 살아갈 나날 앞으로, 흘러 흘러
아침이면 텅비는 안지랭이 개천가에
무거운 발자욱만 어지럽게 남아서
낯선 사내들이 간 길을 훤히 보여주지만
아무도 모른다 이거라, 마른 땅바닥에
박혀 있다 새벽에 뽑힌 차돌 몇 개는,
차돌 몇 개 뽑은 사람들은.
* 안지랭이: 대구시 대명동의 한 구역.
사월에서 오월로, 창작과비평사, 1984
들 하종오
들&
한평생 쟁기 끌고 고랑 갈다 죽은 아버진
여름엔 보리 먹고
겨울엔 쌀 먹으라고
나에게 북 좋은 논밭 주셨다
쑥국새 와서 쑥국쑥국 산에서 울면
보릿잎 안고 누워 맑은 물빛 보고
기러기떼 끼룩끼룩 강에서 울면
볏잎 잡고 서서 밝은 햇빛 보라면서
아버지는 나에게 땅에 대해 말했다
들길을 버리며 가버리겠느냐는 마지막 물음에
남아서 대지를 얻겠다고 처음 대답했다
흙으로 다시 태어날 죽음 앞에서 난
비 오면 벼 푸른 무논 떠올리고
눈 오면 넓디넓은 보리밭 생각하라고
아버지 허옇게 뜬 아버지 눈 감겨주었다
한평생 쟁기 끌고 고랑 갈다 죽은 아버진
낮엔 바람소리 듣지 말고
밤엔 별 보지 말라고
나에게 뼈와 힘 주고 눈물 가져갔다
사월에서 오월로, 창작과비평사, 1984
들소리 하종오
들소리
사람이여
두렁에 앉아 쉬던 오늘 낮에
들이 뭐라고 뭐라고 하는 말 들었는가 못 들었는가
살아가는 평생이 흙으로 섬겨져서
일하는 나날이 농사로 이어져서
언제나 아침놀 저녁놀 머무는 땅,
허리 굽혀 온 힘 쏟은 논밭에서
날마다 자라나는 나물과 곡식은
병든 이와 노인들에게 먼저 돌아가서
깊은 안식과 음식이 되도록 해야 한다고
들판이 스스로 북돋우지 않던가
사람이여
들녘을 지키는 일 외에
살아 있는 동안 볼 일이 따로 있는가
그늘진 수풀도 마음받아 푸르러져
세상 한 모서리에 산줄기 뻗었으니
지금부터 대지는 펼쳐질 대로 펼쳐져
어린 자식과 어미아비 사이에
놓이지 않으면 안된다고
들판이 스스로 지평 확 트며 굽이치지 않던가
묻힌 씨앗이 곧 하나의 삶이기에
알곡 거두는 일이 생명을 살리는 일이기에
햇볕도 물도 모여들어 이룬 땅덩어리,
사람이여
일손 놓고 청산 보던 오늘 낮에
들이 뭐라고 뭐라고 하는 말 들었는가 못 들었는가
사월에서 오월로, 창작과비평사, 1984
만남 하종오
만남&
잎새 진 땅에서 인간으로 우리 만나
풀꽃 한 포기 바라보지 못하고 일하다가
드넓은 대지를 꿈꾸는 날
홀연히 가랑비 되어 우리 만나
낮은 곳으로 내리며 더 낮은 곳으로 흘러 가다가,
온몸 섞어 목마른 세상을 적시면
따뜻한 사랑은 차가운 사랑을 조용히 불러
입김 호호 불며 피곤한 삶에 입술 대리.
혹은 대지를 가진 행복을 꿈꾸는 날
우연히 벽 틈에서 풀벌레 되어 우리 만나
가을이 사슬을 거두는 때가 온다고
꿇어앉아 눈감은 이들이 벌떡 일어나
하늘 우러러 눈뜨도록 울지 않으면,
길바닥에 떨어진 돈 되어 우리 만나
산과 강을 누리는 자를 비웃을지라도
병든 노인과 어린아이에게 쓰여지지 않으면,
흩어져 사는 모든 사랑들은
밤에 그리워도 서로 부르지 않는다.
아 아 오늘은 꽃술에 얼굴 묻지 못해도
들녘에 썩은 거름으로 우리 만나
오늘은 풀뿌리에 닿기만 해도 좋아라.
잎새 진 땅에서 근로자로 우리 만나
풀꽃 한 포기 키우는 인간이 되기 위해 일하다가
잠들기 전 그윽이 꿈꾸어 보는 마음.
사월에서 오월로, 창작과비평사, 1984
바람 부는 저녁 하종오
바람 부는 저녁
잎사귀의 푸른 힘을 바람에게 노놔주며
나무는 나뭇가지 흔들며 자기의 생명을 느낍니다
달빛의 희맑은 깊이를 허공에 내리며
달은 밤하늘에서 자기의 생명을 느낍니다
나무에 앉았다가 달 비껴 날으는 새 몇 마리는
바람 속 비상과 낙하로 자기의 생명을 느낍니다
이런 모든 것을 우리가 느끼게 되면
사람이 사람을 죽이지 않는 시절이 왔겠지요
꽃들은 우리를 봐서 핀다, 푸른숲, 1989
벼는 벼끼리 피는 피끼리 하종오
벼는 벼끼리 피는 피끼리
우리야 우리끼리 하는 말로
태어나면서도 넓디넓은
평야 이루기 위해 태어났제
아무데서나 푸릇푸릇 하늘로 잎 돋아내고
아무데서나 버려져도 흙에 뿌리박았는기라
먼 곳으로 흐르던 물줄기도 찾아보고
날뛰던 송장메뚜기 잠재우기도 하고
농부들이 흘린 땀을 거름 삼기도 하면서
우리야 살기는 함께 살았제
오뉴월 하루볕이 무섭게 익어서
처음으로 서로 안고 부끄러워 고개 숙였는기라
우리야 우리 마음대로 할 것 같으면
총알받이 땅 지뢰밭에 알알이 씨앗으로 묻혔다가
터지면 흩어져 이쪽 저쪽 움돋아
우리나라 평야 이루며 살고 싶었제
우리야 참말로 참말로 참말로
갈라설 수 없어 이 땅에서 흔들리고 있는기라
사월에서 오월로, 창작과비평사, 1984
사월생을 위하여 하종오
사월생(四月生)을 위하여
어미 아비들 떨리는 가슴 합하여
우릴 낳은 사월이다 후레자식은 무릎 꿇라
지금 꽃샘바람 돌쑥 키우는 봄은
땅속에서 솟아난 몇 대(代)의 한(恨)이어서
푸른 하늘에 서리서리 이른다
산그늘에 누워 꽃노래만 하는 후레자식은 무릎 꿇라
백두나 한라 기슭 나무들은 움이 터
철원평야 이쪽 저쪽 형제는 목이 말라
원한풀이 쏟아지는 비를 기다리므로
이제 사람으로서 할 일은
물줄기 찾아서 산천을 적시고
우리 나누어진 핏줄 한 핏줄로 이어
핏물 서로 흘려보내어 뜨거워질 일이다
가문 들에 뒷짐지고 서서 청산 보는 후레자식은 무릎 꿇라
우릴 낳아 모진 삶 바쳐 죽은 어미아비들
이 생월(生月)에 그 뜻 받아 살지 못하면
한반도 땅덩어리 또 몇 대(代)의 한(恨)이 된다
이 나라 봄으로 태어난 자자손손 우리여
첩첩봉봉에 펄펄 살아 허허벌판에 펄펄 살아
오늘 어미아비들 혼 맞이해야 한다
어미아비들 가쁜 숨소리 섞어서
우릴 낳은 사월이다 후레자식은 무릎 꿇라
사월에서 오월로, 창작과비평사, 1984
사월에서 오월로 하종오
사월에서 오월로
봄의 번성을 위해 싹틔운 너는
나에게 개화하는 일을 물려주었다
아는 사람은 안다
이 세상 떠도는 마음들이
한 마리 나비 되어 앉을 곳 찾는데
인적만 남은 텅빈 한길에서 내가
왜 부르르 부르르 낙화하여 몸 떨었는가
남도에서 꽃샘바람에 흔들리던 잎새에
보이지 않는 신음소리가 날 때마다
피같이 새붉은 꽃송이가 벙글어
우리는 인간의 크고 곧은 목소리를 들었다
갖가지 꽃들 함께 꽃가루 나눠 살려고
향기 내어 나비떼 부르기도 했지만
너와 나는 씨앗을 맺지 못했다
이 봄을 아는 사람은 이 암유도 안다
여름의 눈부신 녹음을 위해
우리는 못다 핀 꽃술로 남아 있다
사월에서 오월로, 창작과비평사, 1984
산에 들에 초록 잎새 하종오
산에 들에 초록 잎새
우리들이 보지 못하는 길섶에
먼저 움튼 잎새가 나중 움트는 잎새에게
초록빛을 건네주어 풀꽃은 파릇해집니다
이리 먼저 피어난 풀꽃 한 송이는 그 옆에
갓 돋아난 풀꽃들에게 초록빛을 뿜어 주어
풀꽃 무더기를 이룹니다
이리 이뤄진 풀꽃 무더기가 퍼져서
산으로 들로 초록빛을 펼치며 신록을 만들어
바라보기만 하면 우리들도 초록빛으로 아름다와지는
누리 누리 온누리 꿈꾸는 자연이 됩니다
이리 우리들이 마음 탁 놓고 맑아지는 사이에
풀꽃들은 우리들을 봐서 어여쁜 꽃을 피우겠지요
꽃들은 우리를 봐서 핀다, 푸른숲, 1989
야행 하종오
야행(夜行)
밤에는
모든 것이 낮아지고
모든 것이 삐뚤어지는구나.
바로 걷지만 길이 비틀거리고
바로 서 있지만 길이 내려앉는구나.
눈을 감고도 갈 수 있었던 땅에
눈을 뜨고도 갈 수 없고
알몸으로 설 수 있었던 땅에
옷을 입고도 설 수 없구나.
이상하여라. 밤에는
한 사람의 눈빛조차 밝히지 못하는
어둠뿐이어라.
사월에서 오월로, 창작과비평사, 1984
오월에 1 하종오
오월에 1
이 땅 다스려 갈 아이를 낳지 못하고
오월에 비로소 처녀 된 애인아,
두고 간 산천이 그리워
송이송이 꽃피어 오는가.
인간의 삶을 찾아 여자로 몸부림쳤었겠지만,
쓰러져 처음으로 입술 맞췄던 땅바닥에
부리가 고운 새들이 앉아 울고
내던져져 처음으로 젖가슴 댔던 길섶에
노여운 사내들은 엎드려 말이 없다.
이제 돌아와 피투성이로 껴안을 수 없더라도
해마다 꽃잎 떨구어 물어봐야 하리,
언제 사랑하는 사람 찾아가겠느냐고.
이 나라 다스려 갈 아이를 낳기 위해
오월에 순결한 몸을 던진 애인아.
사월에서 오월로, 창작과비평사, 1984
우듬지를 보며 한 철 하종오
우듬지를 보며 한 철
봄 내내 나는 시국에 우두망찰하여 나무들을 쳐다보았습니다
하루 이틀 거리 두고 재야 소식은 바뀌어 들려오는데
나뭇가지 끝엔 한 잎씩 더 새움이 돋아났습니다
바람에 흔들리며 커가는 잎사귀들 아래서 지내는 동안
나는 도량이 웅숭깊어져 험한 국면에 생각 다잡았습니다
봄 내내 나무들은 울울창창해져 나를 지켜봐 주었습니다
꽃들은 우리를 봐서 핀다, 푸른숲, 1989
유복자 하종오
유복자
너의 생일은 풀꽃이 풀꽃에게 향기를 보내는데
사람이 사람을 부르지 못하고
길바닥에 무참히 쓰러진 오월 어느 날이란다
아침이면 꼬장꼬장하게 일터로 가던 아버지는
한잔 술에 비틀거리며 돌아오던 저녁마다
노래 부르지 않고 널 기다렸는데
네가 태어나던 날 나가선 돌아오지 않고
아픈 배를 부여안고 널 낳을 적엔
이 땅이 찢기는 비명을 들으면서
피에 젖어 우는 얼굴을 보았지만
이젠 눈곱 낀 네 두 눈에 젖방울을 짜 넣으며
해를 향해 부릅뜨고 굳게 선 인간을 생각하고
배고파 우는 네게 젖꼭지를 물리면서
산천을 뛰는 튼튼한 인간을 생각하니
아버지를 그리워만 말고 네가 아버지가 되거라
누가 보기로는
아버지가 죽음들에 엉켜 산으로 가더라고
또 누가 보기로는 달밤에 귀신 형용으로
기슭에서 따비를 일구며 널 부르더라고
하지만 너의 생일은 나비가 나비 따라
풀꽃에게 가는 이 길바닥에서
사람이 사람을 잃은 오월 어느 날이란다
사월에서 오월로, 창작과비평사, 1984
참나무가 대나무에게 하종오
참나무가 대나무에게
네가 꼿꼿이 서서 흔들리는 땅에
나는 바람 잠재우며 버틴다.
너는 휘어지지 않고 휘어지지 않고 꺾여서 바치고
나는 쪼개져 쪼개져 불로 타서 바치는
우리 목숨 더 깊은 목숨 어느 나무가 바치겠는가.
숯이 되지 않는 너에게 숯이 되는 내가
불이여 불이여 노여워 소리칠 수 있다면
칼이 되지 못하는 나에게 죽창이 되는 네가
죽음이여 죽음이여 노여워 소리칠 수 있다면
죽어서 불타는 숲은 누구인가.
너는 분노하여 곧은 몸을 세우고 있지만
그러나 나는 슬픔 밑으로 뿌리를 내린다.
다만 한라산에서 백두산까지
서로가 서로에게 엉키며 뿌리 뻗어서
아름다운 우리나라 산맥을 이루고 싶다.
사월에서 오월로, 창작과비평사, 1984
추석 빈 집 대추나무 하종오
추석 빈 집 대추나무
□1
세 살박이 빈영이도 아홉 살박이 문영이도
저희 엄마 따라 외가 가고
빈 집 화단 가을 가는 꽃들 틈에
서 있는 대추나무 보다
□ 2
오늘 추석 햇빛 들다 비 오다
빗소리에 미국 가신 칠순 부모님 생각나다
고향 앞마당 대추나무 흔들어 떨구시던
노부모님 모습 떠올라 못견디다
한국 가서 살고프니 목돈 마련해 놓으라시던 편지에
그럴 여유 없다는 답장 보내었더니
한 해 내내 편지 끊으시다
비오다 비오다 오는 비에 문득 눈물 돌다
□ 3
초침소리 똑딱 똑딱 빈 집
수돗물소리 똑 똑 똑 빈 집
빗소리는 어떻게 표현해 빈 집
의성어 생각 안 나 빈 집
□ 4
해마다 추석날
망우리 묘지 성묘 왔다가 들르는
판화쟁이 친구 이철수
올해는 이사한 집 몰라 안 오나
나중에 만나면
빈 집 대추나무 그려보라 말하려고 맘먹다
대추나무 가지에 집 친 거미가
시인 같다
□ 5
시인에게는 대추나무 가지에 집 친 거미도 슬픈데
자본에 얽혀 사는 이들은 더욱 슬프다
자본주의 잘 길들여진 시인은
시 그만 써야 한다는 생각에
시는 자본이 안 된다는 생각에 시달리다
그것에 시가 필요하다 생각도 하다
이제 서서히 끝장나나 보다
□ 6
시 쓰다 졸다 졸다 시 쓰다
힘이 없다
세 살박이 빈영이도 아홉 살박이 문영이도
저의 엄마 따라 어서 집에 왔으면
비 맞는 대추나무 보며 어둠에 잠겨
빈 집 적막에 몸 움츠려 졸다 시 쓰다
꽃들은 우리를 봐서 핀다, 푸른숲, 1989
파지 하종오
파지(破紙)
구겨지면 구겨지는 대로 뒹굽니다.
사람들이 하지 않는 말과
쓰지 못하는 낱말의 뜻으로
이 세상 모든 비어 있는 종이들이 침묵해도
밟히면 밟히는 대로 부스럭거립니다.
힘줄도 없이 몸비비며 엎드리고
다시 부석부석 메말라 찢어져도
쪼가리 각각 나동그라지는 자유
불타면 불타는 대로 뜨겁습니다.
뒤틀리던 활자와 잉크의 목마름이
맑은 공기 속에 연기로 스며갈 때
비로소 양심처럼 재를 남깁니다.
몸부림을 버리며 다 부서져 흩어지고
밤마다 잠 못 이루는 사람들의 눈빛과 함께
떠돌다가 마침내 떨어집니다. 어디에서든지
노여워 썩고 썩는 흙이 되고 싶습니다.
사월에서 오월로, 창작과비평사, 1984
풍매화 하종오
풍매화
떠돈들 어떠리 떨어진들 어떠리
언제든지 떨어지면 움 돋겠지.
진달래가 골백송이 흐득흐득 울어도
풍매화는 바람 따라 날아 다닌다.
골짝에 죽어 있는 메아리를 살려 내고
벌목꾼이 버리고 간 도끼소리 찾아내고
땅꾼이 잃어버린 휘바람도 찾아내어
그 덧없는 소리들 데불고 무얼 하는지
풍매화는 이곳저곳 기웃거린다.
혼자서 싹틀 힘도 없으면서
어디든지 뿌리 내리면 숲이 이뤄지겠지
풍매화는 득의양양 산맥을 날아 다니지만
대포알 묻힌 땅 버릴 수 없고
녹슨 철조망 무심히 바라볼 수만 없어
머뭇거리니 마침내 바람도 잠잠해진다.
이제는 묻혀야지, 몸 바쳐야 할 자리는 여기
사월에서 오월로, 창작과비평사, 1984
풍장 하종오
풍장(風葬)&
물 따라 가지 못하는 눈물을 불태워
산 따라 가지 못하는 몸뚱어릴 불태워
바람 따라 보낸다. 벌건 대낮에
해를 향해 눈 휩뜨고 재를 뿌리니
바람 부는 쪽이 다 저승이더냐,
모진 언덕에 돌개바람 부는구나.
가거라 잘 가거라, 푸른 하늘에
올라가다가 굶주린 새떼도
앉을 곳 없는 허공에
홀연히 먹구름 되어 떠돈다면
어디에선가 천둥이 숨어 울 것이다.
통곡도 침묵도 없는 땅에는
염 못하고 새끼줄 묶지 못한 주검뿐이니
불태워 불태워 재를 뿌린다.
술 마시지 않고는 바로 걷지 못하고
싸우지 않고는 바로 눕지 못하는 여기,
다시 오고 싶거든 비 되어 와서
물따라 가거라 산 따라 가거라.
사월에서 오월로, 창작과비평사, 1984
호남평야와 김해평야의 덕담 하종오
호남평야와 김해평야의 덕담(德談)
우리들 넉넉하고 넉넉한 보루는
쌀 보리 씨앗이 움트며 다진 흙이제잉
아침에 이슬 밟고 나온 사람들이
살아갈 날들을 춘하추동 논에 바치고
들길을 걸어 돌아가는 저녁까지
몇 마지기에 마음 넓히는 걸 보면야
우리들은 곡식만 키워야 쓰겄지 않은?
무시로 불어닥치는 바람에도 쓰러지지 않는
평평한 흙으로 있어야 한단 말이여
우리들은 한철이 아닌데
눈비는 끝없이 내려서 젖어들고
이삭 먹으려 철새떼는 머문당께
벌레떼 버글버글 모여들어도
물꼬 트고 막으며 잡초 뽑다가
가난한 두 손으로 추수하는 사람들이
몇 톨 알곡 잃어버리고 서러워하면야
흙의 넉넉한 모습을 보여준단 말이시?
좋다아 우리들 지키는 보루로
살 보리 종자 알차게 여물게 해보자이
우리들 아무렇게나 펼쳐져 있는 것 같애도
함부로 흔들리지 않는 지평선인기라
맥고모자 쓴 사람들이 황소 앞세우고
쟁기 메고 와서 살다 가는 논밭 아이가
생전 처음으로 하는 말마따나
고랑을 일구면서 나아가지 않고는
가문 날이 갈수록 우릴 볼 수가 없고
객토를 찾아서 헤매지 않고는
평생 동안 걸어서도 우리에겐 닿을 수가 없제
혹 이 시대의 식량으로 곡식이 자라면
우리들이 무너져서나마 들판을 더 넓혀야 하는기라
오늘도 노을 속에 머물러 풀벌레는 더 울고
마른 풀은 뿌리를 내려뻗는갑다
김매던 사람들은 이랑을 고루더니
다시 또 어두운 마을로 돌아갈락칸다
우리들도 이 밤엔 한데 얼려
멀리멀리 가서 굽이치며 깊어지제이
사월에서 오월로, 창작과비평사, 198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