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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재건중앙교회 원문보기 글쓴이: 사랑꾼
<강해설교를 위한 아이디어> 작성자:
1. 강해 설교는 누가 가르칠 수 있는가?
2. 강해 설교의 필요성과 역할 및 효과
3. 강해자의 요건
4. 강해 설교를 위한 제안
5. Workshop
1. 강해 설교는 누가 가르칠 수 있는가?
“나는 강해 설교라는 대주제를 다루는 일이 매우 주저되고 조심스러웠다. 나는 젊은 목사들이 설교나 목회에 관해서 동료 사역자들에게 주저함이 없이 너무 쉽게 조언을 하는 것을 볼 때마다 놀라움을 금치 못한다. 누가 이런 일에 자격이 있으랴?’
Lloyd Jones. Preaching & Preachers. 서문.
“어떤 설교자라도 설교에 대해서 다른 설교자들에게 설교하는 것은 성급하고 어리석기 짝이 없는 짓이다. 본인 역시 자신이 전문가라고는 주장할 수 없다.”
John Stott, I believe in preaching 서문
첫째, 설교의 차원은 깊고 높다.
둘째, 설교에는 자격이 있거나 전문가가 있을 수 없다.
셋째, 설교를 가르칠 수 있는 사람은 드물지만 누군가 가르쳐야 한다.
[우리들의 문제는 무엇인가?]
강해 설교는 쉽게 배워지지 않는다.
[해결책은 무엇인가?]
수준을 낮추는 것이다.
[누가 감당할 수 있는가?]
고후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의 향기를 어디에서나 풍기게 하시는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바치는 그리스도의 향기입니다. ….이런 일을 누가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저 많은 사람들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팔아서 먹고 살아가는 장사꾼이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보내신 일꾼답게 진실한 마음으로 일하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보시는 앞에서, 그리스도 안에서 말하는 것입니다.”(표준새번역)
‘Such is the confidence that we have through Christ toward God. Not that we are sufficient in ourselves to claim anything as coming from us, but our sufficiency is from God, who has made us competent to be ministers of a new covenant….”(2Cor. 3:4-6, English Standard Version).
“Such confidence as this is ours through Christ before God. Not that we are competent in ourselves to claim anything for ourselves, but our competence comes from God. He has made us competent as ministers of a new covenant-‘(NIV 2cor. 3:4-6)
‘…who has qualified us to be ministers ….’ (RSV)
One day I may truly preac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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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강해 설교의 필요성과 역할 및 효과
1) 왜 강해 설교가 필요한가?
ㄱ. 세속 사상으로 희석된 설교들
ㄴ. 복음에 대한 사상적 이해와 영적 분별력의 빈곤
2) 강해 설교란 무엇인가?
ㄱ. 용어의 혼란
ㄴ. 강해 설교를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Exposition= position-ex-pose]
행
‘강론하며 뜻을 풀어(exposition)......증언하고(preaching) 이 예수가 곧 그리스도라 하니(적용).
눅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 주실 때에(exposition)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
눅
‘….이에 모세와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쓴 바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시니라(v. 27, exposition)”
3) 강해설교의 역할과 효과
누가복음 24:32
‘그들이 서로 말하되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 주실 때에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
직역: They said to each other, Did not our hearts burn within us while he talked to us on the road, while he opened to us the scriptures?(RSV)
ㄱ. 성경을 열어 주는 것
ㄴ. 마음이 뜨거워지는 것
성경은 계시의 말씀이지만 열기 전에는 닫혀진 말씀이다. 여기서 ‘열다’는 것은 풀이를 해준다는 뜻이다. 이 풀이는 통찰과 관계된 것이다. 단순한 설명이 아니고 통찰에 근거한 풀이가 될 때에 말씀이 살아나고 생명력을 발휘하며 심령이 뜨거워진다.
Ü 강해설교는 사람을 움직이게 한다.
Ü 힘이 솟게 하고 생각을 바꾸게 한다.
Ü 영적 자세가 달라진다.
Ü 예수님에 대한 시각에 큰 변화가 온다.
Ü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게 한다.
p 위대하신 하나님께 감사하기 위해서, 그분을 경배하고 찬양하기 위해서, 회개하며 용서를 구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구원을 기뻐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능력과 크신 사랑을 생각하며 새 삶을 각오하기 위해서 무릎을 꿇게 한다. 이것이 강해 설교의 효능이다.
***
3. 강해자의 요건
[마음의 불꽃]
어떤 전문직에도 qualification이 있다. 인간들이 구원을 받기 위해서는 qualification이 필요하지 않다. 죄인이면 된다. 죄인은 너도 나도 다 포함되기 때문에 누구나 구원을 받을 수 있다. 그러나 구원을 받은 자가 강해 설교자가 되려면 자격이 필요하다. 모든 신자가 다 강해 설교자가 될 수 있는 자격을 갖춘 것이 아니다. 강해자의 심혼 속에는 구원의 말씀을 사모하여 타오르는 신령한 불꽃이 있어야 한다.
[강해자의 자격]
신학교육, 은사와 소명
1) 말씀의 맛을 안다.
2) 말씀을 갈망한다.
3) 말씀으로 고통을 받는다.
[성경 강해와 Depression]
모세, 욥, 엘리야, 예레미야, 요나,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네가 만일 돌아오면 내가 너를 다시 이끌어 내 앞에 세울 것이며 네가 만일 헛된 것을 버리고 귀한 것을 말한다면 너는 나의 입이 될 것이라..”(렘
“나 주가 말한다. 네가 돌아오면 내가 너를 다시 맞아들여 나를 섬기게 하겠다. 또 네가 천박한 것을 말하지 않고 귀한 말을 선포하면 너는 다시 나의 대변자가 될 것이다..”(렘
[잘못된 설교]
☞ 멀리서 헛돌기만 하고 구름과 안개만 자욱한 설교
☞ 추상적인 도덕 설교로 아무런 적실성이 없는 메시지
☞ 회중의 수준이나 형편에 전혀 맞지 않는 일방적인 설교
☞ 무슨 말을 하는지 알 수 없는 횡설수설
☞ 주석 한 번 보지 않고 제 멋대로 해석하는 무책임한 설교
☞ 엔터테인 용 만담, 예화, 간증 중심의 이야기 설교
☞ 지루하고 답답한 메시지
☞ 개인적인 목적 성취를 위한 동기에서 나온
이런 것들이 천박한 설교이고 헛된 설교이다.
[귀한 설교]
☞ 말씀의 맛이 나게 하는 설교가 되어 다음 주일을 기다리게 하는 메시지
☞ 복음의 능력이 드러나서 하나님의 위대하심과 크신 사랑과 능력을 찬양하게 하는 설교
☞ 영적으로 감동을 주는 설교. 그래서 말씀이 이렇게 귀한 것이구나 하고 감탄하게 하는 메시지.
☞ 마음에 와 닿는 진실한 설교. 그래서 정말 복음대로 잘 살아야 하겠다고 결심하게 하는 설교.
☞ 하나님과 구원에 대한 교리를 선명하고 힘 있게 전시하여 성경에 대한 확신을 갖게 하는 설교. 그래서 불신자들에게 전도하려는 마음이 일어나게 하는 설교.
☞ 거짓과 진리를 확연하게 구분해 주는 설교. 그래서 신자들이 그릇된 가르침과 설교에 현혹되지 않게 하는 설교.
☞ 말씀을 듣고 경외심과 회개로 무릎을 꿇게 하는 설교
☞ 설교를 듣고 난 후 성경 본문에 대한 이해가 밝아져서 성경을 더 보게 만드는 설교.
☞ 설교를 듣고 큰 감동을 받아 하나님을 자랑스럽게 여기고 나의 주 나의 하나님이라고 외치며 주를 사랑하게 되는 설교.
“우리가 그를 전파하여 각 사람을 권하고 모든 지혜로 각 사람을 가르침은 각 사람을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자로 세우려 함이니 이를 위하여 나도 내 속에서 능력으로 역사하시는 이의 역사를 따라 힘을 다하여 수고하노라”(골
‘주께서 나의 등불을 켜심이여 여호와 내 하나님이 내 흑암을 밝히시리이다’(시 18:28)
You, O Lord, keep my lamp burning:
My God turns my darkness into light. (NI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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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강해 설교를 위한 제안
1) 강해 설교를 하려면 일단은 체계가 있어야 한다.
ØPigeon hole
Ø강해 설교 대본 작성 요령
[주석 및 강해용 참고 도서]
New Bible Commentary, IVP, 한국 IVP
Tyndale Com.(IVP)
Bible Speaks Today(IVP), 두란노
For Everyone series(N.T Wright, Westminster John Knox Press, SPCK)
The Daily Study Bible(The Saint Andrew Press, The
Welwyn commentary series(Evangelical Press, 목회자료사)
NIV Application Commentary series(성서 유니온)
[강해서]
☞ Expository thoughts on the Gospels.(J.C Ryle)
☞ Preaching the Word series(R. Kent Hughes, Cross Way Books)
[저자]
구약: Alec Motyer, Christopher J. H. Wright, Derek. Kidner, J.G. McConville
신약: W. Hendriksen, F.F Bruce, Lloyd Jones, John Stott,
[사전]
New dictionary of Theology(IVP)
A Dictionary of Christian Theology(SCM)
The new Bible Dictionary(IVP)
[강해용 영어성경]
English Standard Version(ESV)
New American Standard Bible(NASB)
Ø참고 도서 선택 방법
Ø독서 요약과 대본 작성
2) 강해 준비 단계
A. 본문을 처음부터 끝까지 2-3회 정독한다.
B. 미니 주석을 읽고 대체적인 내용 파악을 한다.
C. 본문을 다시 읽으면서 다음 사항을 준비한다.
D. 본문에서 분명하지 않거나 자신이 없는 부분을 연구한다.
[신학적 전망대]
강해자의 신학적 입장과 강해에 미치는 영향
[효과적인 전달을 위한 언어 훈련]
Ø 단어장을 만들라.
Ø 유사어, 동의어 사전을 활용하라.
Ø 번역을 시도하라.
‘원본의 문장적 변신은 나의 자유로운 언어적 구사력이 없으면 유산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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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샘플 1]
예수님은 폐품 수집가
사람들이 멸시하고 버린 인생들을 주님은 수집하신다. 주님은 폐품 이용(recycle)의 매니저다. 주님의 손에서 재생되고 회생되지 못할 폐품 인생은 없다. 당신은 버림을 당한 적이 있는가? 배신을 당하였는가? 쓸모 없는 자로 낙인이 찍혔는가? 주님은 당신을 찾아 나선다. 날마다 주님은 폐품 수집을 위해 나가신다. 하늘 아버지가 세상의 찌꺼기들을 모으라고 아들에게 명령하셨다. 아들은 주님의 뜻을 기쁨으로 행하신다. 아무리 더럽고 무시 받는 폐품이라도 주님의 손에 잡히면 몰라보게 새로워진다. 그래서 먼저 자신의 가치를 재발견한다. 자신이 하나님의 크신 사랑의 대상임을 알게 된다.
십자가는 모든 폐품 인생들을 위한 것이다. 하나님은 십자가의 사랑으로 버려진 인생들을 재창조하신다. 사람들은 날마다 쓰레기를 버린다. 버린 쓰레기를 주우면 사람들의 눈에 귀하게 보이지 않는다. 사람들은 쓰레기를 버리기는 원하지만, 버린 쓰레기를 줍기는 원치 않는다. 그러나 사람들이 버리는 인생 쓰레기들을 하나님은 줍기를 즐거워하신다. 하나님에게는 창피도 수치도 없다. 하나님은 사람들의 눈을 의식하지 않으신다. 하나님은 날마다 인생 폐품들을 수집하러 나가신다. 그것이 하나님의 일이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사람들에 의해 내버려진 폐품 인생들을 새롭게 재창조하는 것이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고후
주님의 손에 의해 시력이 회복된 자를 유대인 지도자들은 쫓아내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를 다시 만나 주셨다(요 9:35). 버린 인생을 주님이 찾으셨다. 사마리아 여인도 버려진 폐품 인생이었다. 지금도 주님은 여기저기 버려진 인생들을 수집하러 다니신다. 사람들이 보기 싫어하는 것, 다시 받아들이지 않는 것, 멸시와 학대를 받는 버려진 삶을 정결한 십자가의 피로써 씻어 새롭게 하시려고 그들을 만나러 다니신다.
◐ 잃어버린 한 마리의 양은 버려진 폐품 인생이다.
◐ 주님을 배반하고 통곡하던 베드로는 폐품이었다.
◐ 선교 여행에서 탈락했던 마가도 폐품이었다.
◐ 밧세바와 동침했던 다윗도 폐품이었다.
◐ 자기 아내를 누이라고 속였던 아브라함도 폐품이었다.
◐ 동생을 죽였던 가인도 폐품이었다.
◐ 뱀의 말을 들었던 하와도 폐품이었다.
◐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했던 아담도 폐품이었다.
그렇다면 폐품이 아닌 자들이 어디 있는가?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롬
우리들의 인격과 성품에는 죄악으로 물든 오염된 자국들이 즐비하다. 내 인생의 여러 곳에서 폐품들이 쌓여 있다. 남의 눈에 보이지 않는 숨겨진 폐품들이 나를 썩히고 나를 부끄럽게 한다. 그러나 주님은 나를 찾아 나선다. 나 자신은 폐품 인생이 아니라고 부인하여도 나를 지으신 주께서 나의 폐부를 꿰뚫어보신다.
나는 얼마 전에 런던에서 존 스토트 목사님의 간증을 듣고 큰 충격을 받았다. 그는 사람들이 자기 속을 들여다본다면 자기 얼굴에 침을 뱉을 것이라고 하였다. 나는 폐품이 아니라고 생각할지 모른다. 남들은 폐품일지라도 나는 그렇지 않다고 여길지 모른다. 이것이 바로 성전에서 세리를 보며 기도하던 바리새인의 고백이었다(눅 18:9-11). 남이 안다면 내 얼굴에 침을 뱉을 악한 생각이나 행위나 부패한 구석이 내게 없단 말일까? 나는 곧 폐품 인생이다. 사람들에게서 버림을 받았건 않았건 나는 하나님 앞에서 폐품 인생이라고 고백해야 한다.
그러나 모든 폐품 인생들에게 복된 소식이 있다. 그것은 하나님이 폐품 수집가라는 사실이다. 주님은 잃어 버린 양들을 찾아 나서는 선한 목자이다. 이 목자는 모든 죄인들을 위해 십자가로 가셨다. 선한 목자는 십자가에서 찢겨진 양 손으로 찌그러지고 녹슨 인생들의 심령을 고치신다. 피 묻은 주님의 손은 치유의 손이다. 십자가에 못박혔던 주님의 손은 사랑과 능력의 손이다. 그 손은 폐품 인생들을 긍휼히 여겨서 십자가로 가셨던 사랑의 손이며, 온 우주를 창조하시고 보존하는 능력의 손이다. 주님의 깊은 사랑과 무한한 능력으로 다시 새롭게 단장될 수 없는 폐품들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작품 전시실에는 어떤 품목들이 전시되어 있을까? 걸작품만 전시되어 있다. 완전한 예술품만 수집되어 있다. 바울은 우리가 하나님의 작품이라고 하였다(엡
그 날 드러날 나의 영광된 모습은 죄로 물든 이 세상에서는 가려져 있다. 그러나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믿는 하나님의 자녀들은 모두 주님의 형상이 지닌 영광을 온 우주 앞에서 드러낼 것이다. 인류의 타락 이래로 상실했던 하나님의 형상의 영광이 그 때 우리들에게 온전히 회복될 것이다.
나는 지금 폐품 인생을 살는지 모른다. 그러나 믿음으로 의롭게 된 자들은 이미 영광된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변화되고 있다. 하늘 조각가의 온전한 손에 의해서 날마다 새롭게 닦여지고 깎여지며 다듬어진다. 내 몸에서 온갖 찌그러진 부분들이 펴지고 있다. 남들이 미워서 내던진 부분들이 주님의 걸작품이 되는 자료가 된다. 녹슨 내 인생의 폐품들이 하늘 조각가의 자비의 눈길을 받고 있다. 나는 비록 폐품일지라도 주님은 폐품을 수집하신다.
주님이 왜 폐품을 수집하실까? 폐품이 무엇이 좋아서 찾아 다니실까?
주님의 시선은 폐품만 보시는 것이 아니다. 앞으로 전시될 완전한 걸작품의 영광을 보신다. 사람들은 나의 일그러진 부분에서 시선을 뗄 줄 모른다. 내가 나 자신을 보는 시선도 이와 같다. 그러나 주님은 나를 온 우주 앞에서 자랑할 존재로 재창조 할 수 있는 하나님 자신의 능력의 손을 보신다. 당신은 그 손을 믿는가? 그렇다면 자신의 폐품 인생을 한탄하지 말라. 자신의 흉한 모습에 절망하지 말라. 사람들의 무정한 말들에 가슴을 앓지 말라. 주님의 놀라운 자비와 능력의 손을 보라. 나를 위해 십자가에 못박힌 주님의 피 묻은 손을 보라.
주님은 나의 폐품들을 수집하신다. 주님은 버려진 나를 보고 나를 안아 올리신다. 그러나 주님의 시선은 폐품 자체에 머물지 않는다. 주님이 정말 보시는 것은 나의 부끄러운 모습이 아니고 주님의 능력의 손이며 주님의 손에서 지어질 그 날의 걸작품이다. 그렇다면 나도 주님의 시선을 따라 그 날의 나를 보아야 한다.
바울은 “우리가 지금까지 세상의 더러운 것과 만물의 찌꺼기 같이 되었도다”(고전
그렇다면 우리들의 미래는 얼마나 밝고 복된 것인가! 새 날이 밝아 온다. 폐품들을 수집하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손 안에서 우리들의 영광된 새 날이 밝아 온다!
[필자의 저서 ‘화가 복이 될 때까지’ 제 1편에서 따옴]
[샘플 2]
공중의 새와 들의 백합화
하나님은 우리들의 의식주에 관심이 있으십니다. 하나님은 들의 꽃들도 입히시고 공중의 새들도 먹이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고난과 시련 속에서도 우리들을 먹이시고 입히시며 잠재우기를 원하시는 분입니다.
예수님은 공중에 나는 새와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라고 교훈하셨습니다(마 6:28; 눅 12:24). 하늘 아버지께서 과연 그들을 “어떻게” 기르십니까? 그들을 어떤 환경 속에서 어떻게 돌보십니까? 새들은 자유의 푸른 창공을 납니다. 그러나 하늘에도 비가 내리고 태풍이 몰아칩니다. 들꽃들은 들판에서 핍니다. 그러나 들판에도 폭우가 내리고 강풍이 붑니다. 청공(晴空) 하늘에도 먹구름이 덮이고 따스한 대지(大地)에도 찬이슬이 내립니다. 그럼에도 하늘에는 여전히 새들이 날고, 들에는 야생화가 핍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한편, 푸른 하늘을 넓게 나는 공중의 참새는 갑자기 두려움과 염려에 싸이기도 합니다. 맑은 하늘이 폭풍우로 가리워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작은 참새는 자유의 창공에서 더 이상 날지 못하고 땅으로 밀려나기도 합니다. 그래도 하나님은 새 날의 광명을 작은 참새 한 마리를 위해 허락하십니다. 하나님은 강풍을 재우시고 폭우를 멈추게 하십니다. 하나님은 작은 참새에게 온 창공을 다 주십니다. 참새는 다시 높고 넓은 하늘을 마음껏 날아다닐 수 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자비입니다.
나도 인생의 창공에서 먹구름을 만나고 큰비를 맞습니다. 내 삶의 터전이 나를 속박하고 나를 밀어내며 내게 두려움을 주기도 합니다. 그래도 하나님은 나를 다시 푸른 하늘을 향해 날게 하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의 날개 치며 올라감 같은 것이요”(사 40:31).
들에 핀 백합꽃은 화려한 옷으로 단장하고 나와도 어느새 옷이 갈기갈기 찢기고 온몸이 상처투성이가 되어 버립니다. 길고 긴 겨울을 참고 고이 접어 둔 현란한 꽃잎을 피워 올렸건만 몹쓸 벌레가 다 쓸어 먹고 맙니다. 그래도 들에는 백합꽃이 여전히 피어납니다. 들판은 벌레들이 득실거려도 계속 아름다운 야생화가 아픔과 상처를 안고 찬란한 모습으로 나타나기를 그치지 않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선한 뜻입니다.
나도 인생의 들판에서 한 송이 들꽃을 피우며 삽니다. 나의 부드러운 살결이 벌레에 물려 찢겨지고 멍듭니다. 그래도 하나님은 내 몸에서 새 잎새와 새 꽃들이 줄곧 피어나게 하십니다. 하나님은 내가 아픔을 딛고 손실을 무릅쓰며 다시금 웃는 얼굴로 인생의 들판 위에 나타나게 하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보람입니다.
한 마리의 참새는 자유의 창공을 날아다닙니다. 하지만 그 넓은 하늘은 고독한 창공일 수 있습니다. 아무리 자유롭게 훨훨 날 수 있는 하늘이라도 바람과 폭우가 완전히 제거된 창공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래도 청공(晴空)의 비상(飛上)을 위한 소망과 의지는 폭풍우로 나의 부드러운 깃털이 다 젖고 나의 고운 날개가 다 꾸겨진 이후에 더욱 새롭게 솟아오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섭리입니다.
한 송이 백합화는 솔로몬의 영광보다 더 나은 모습으로 차려 입고 빈들에서 삽니다. 하지만 그곳은 뼈아픈 고통의 현장일 수 있습니다. 아무리 아름다운 백합화를 피어나게 하는 대지(大地)라도 벌레나 가뭄이 완전히 제거된 땅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래도 다시 피어나고 싶은 염원은 내 몸의 잎새들이 다 뜯겨진 이후에 더욱 강렬해집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격려입니다.
공중의 새와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랍니까?
그들은 폭우와 광풍 속에서, 벌레와 가뭄 속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래도 그들은 여전히 하늘을 날고, 여전히 들에서 꽃을 피웁니다. 하늘 아버지께서 우리들을 “어떻게” 기르십니까? 새 하늘과 새 땅에서의 영원한 삶을 위해서, 하나님은 우리들을 폭풍우의 하늘과 병충들의 땅에서 기르십니다. 태풍 없는 온전한 하늘과 벌레 없는 완전한 대지(大地)는 아직은 우리들의 것이 아닙니다. 하지만 시련과 시험의 날들이 지난 이후에 우리는 폭우도 병충도 없는 신천지에서 영원히 주님과 함께 살 것입니다.
그러나 그때가 오기까지 우리네 인생의 창공과 대지에는 나의 날개가 젖고 나의 꽃잎을 뜯기는 고통과 아픔이 있습니다. 그날이 오기까지는 눈물과 애통이 있고, 질병과 죽음이 있습니다. 넓고 푸른 청천(晴天) 하늘을 마음껏 날던 새들도 마침내 떨어집니다. 눈부신 색채로 피어난 들의 꽃들도 마침내 시들어 버립니다. 그러나 그들이 어디에 떨어지며 어디에서 시듭니까? 이 세상이 아닙니까? 그런데 이 세상이 누구의 것입니까? 하나님의 것입니다! 그렇다면 공중의 새들과 들의 백합화가 누구의 장중에 떨어지고 시든단 말입니까? 전능하신 창조주 하나님의 영원하신 손 안이 아니겠습니까!
우리는 살아도 하나님의 손 안에서 살고, 죽어도 역시 하나님의 손 안에서 죽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기르시고 돌보십니다. 하나님이 우리들을 새 하늘과 새 땅으로 옮기십니다. 비록 시련과 고통의 뒤안길을 지나서라도 하늘 아버지께서 우리들을 사랑과 섭리와 능력과 지혜의 팔로 인도하시고 영원한 구원의 완성을 위해 지금도 일하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시련과 고난 앞에서, 새 하늘과 새 땅의 실현을 위한 주님의 소망이 나의 온갖 인생의 폭우와 병충들에도 불구하고 마침내 이루어지기를 간구해야 할 것입니다.
(필자의 저서 ‘하나님의 돈’ 6장에서 따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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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해서 활용 요령]
è 베끼기 설교
è 짜집기 설교
è 편집 설교
è 모방 설교
* 모방은 창안의 길을 열어 준다.
*Imitation opens a door to innovation.
‘예술은 모방에서 시작하고 쇄신으로 끝난다.’
“Art begins in imitation and ends in innovation.”
ㄱ. 강해서 선택의 유의 사항
ㄴ. 아이디어 수집
ㄷ. 기본 골격을 잡은 후에 살을 채운다.
ㄹ. 메시지를 먼저 자신에게 적용하고 기도하는 시간을 갖는다.
3) 설교 작성 추가 코멘트
4) 작성 이후의 점검
♣ 내가 말하려고 하는 내용이 잘 전개되었는가?
♣ 핵심 내용이 제 자리에 들어가 있는가?
♣ 불요불급한 요소들이 끼여 들지 않았는가?
♣ 논리나 사상 전달에 설득력이 있는가?
♣ 강조점이 살아나며 영적 호소력이 있는가?
♣ 어렵거나 오해의 여지는 없는가?
♣ 복음의 교리와 교훈이 분명하게 제시되었는가?
♣ 나쁜 설교의 요소들이 들어가 있지는 않는가?
♣본문을 잘못 보거나 문맥을 살피지 않은 것이 있는가?
♣ 자기 과시나 자랑이 들어 있지 않는가?
♣ 개인 감정이 노출되지는 않았는가?
♣ 모순된 말은 없는가?
♣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를 나타냈는가?
♣ 표현이나 용어의 선택에 개선할 점은 없는가?
♣ 지루하게 들리는 부분은 없는가?
5) 자기 발전을 위한 제안
z Art begins in imitation and ends in innovation.
z I preach as though Christ died yesterday, rose from the dead today and was coming back tomorrow. (Martin Luther).
[개인 묵상과 기도 생활]
[강해 설교자는 누구인가?]
5. Workshop
*별지 참조
5. Workshop
샘플(1)
자라가는 교회의 모습
데살로니가 후서
[구성 아이디어]
▶ 짧은 한 두 구절로 강해하는 것은 주제나 제목 설교가 아니면 쉽지 않다. 그러나 어떤 현안 문제와 연결된 경우에는 교회와 신자들에게 도움이 되는 교훈을 충분히 이끌어 낼 수 있다.
1. 자라나는 교회는 평강을 누린다.
자라나는 교회의 특성이라는 문맥에서 재조명한다.
착안점:
ㄱ. 데살로니가 교회는 평판이 좋은 모델 교회였다.
ㄴ. 모델 교회의 특징을 관찰한다.
ㄷ. 자기 교회에 구체적인 적용을 할 수 있는 교훈과 방법을 추출해 낸다.
2. 자라나는 교회는 믿음과 사랑과 인내가 풍성하다.
[바울은 무엇을 제일 감사했을까?]
바울의 감사의 소재가 우리들의 감사거리와 어느 정도 일치하는가?
[항상 감사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감사’는 익숙한 말이다. 그래서 무게가 실리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신앙 생활의 중요한 부분이므로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방법을 열거하여 실천하게 한다.
[어떻게 해야 잘 자랄까?]
‘성숙’도 교회에서 늘 사용하는 말이다. 진지하게 묵상한 내용으로 접근한다.
신자의 시련과 노력이 성숙과 밀접한 관계가 있음을 진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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샘플(2)
바울의 기도 부탁
데살로니가후서
[구성 아이디어]
1. 바울은 어린 교회에게 기도 부탁을 하였다.
◑ 바울의 기도는 그의 서신에서 자주 등장한다. 본문은 그의 기도 부탁이다.
◑ 바울이 데살로니가 교회에게 기도를 부탁한 것은 무슨 교훈을 주는가?
◑ 바울은 초신자의 기도를 귀히 여겼다. 데살로니가 교인들에게 기도 부탁을 한 것은 그들이 이미 기도 생활을 정상적으로 하고 있었다는 반증이다.
◑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를 개척할 때부터 기도에 대해서 가르쳤음이 분명하다. 그의 기도 부탁에서 바울이 가르친 기도의 내용을 도출해 보라.
2. 데살로니가 교회는 박해와 환난 중에서 중보 기도의 소명을 받았다.
ㄱ. 데살로니가 교회는 자신들의 문제에 눌려 있었음에도 중보 기도의 요청을 받았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무엇을 가르치는가? 하나님은 고린도에서 바울의 신변 보호를 약속하셨다. 그렇다면 왜 바울이 데살로니가 교회에 기도 부탁을 했을까?
ㄴ. 하나님은 데살로니가 교회가 바울을 위한 기도에 참여하게 하시고 그들의 중보 기도를 응답하심으로써 그들에게 믿음의 승리를 체험하게 하셨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간접적인 방법으로 시련을 겪는 자들을 격려하시는 방법이다. 자기 문제에 파묻혀 있는 자는 다른 사람의 문제를 놓고 기도함으로써 자신으로부터 시선을 뗄 수 있다. 이것은 자신의 문제를 훨씬 더 균형 있게 볼 수 있는 여유를 제공한다.
3. 바울은 두 가지 기도 부탁을 하였다.
첫째. 복음이 널리 전파되는 것
둘째, 자신과 동역자들의 신변 보호
4. 바울은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굳게 믿고 기도하였다.
ㄱ.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가 박해와 거짓 교사들의 악영향에 맞서 온전하게 설 것을 확신하였다. 그 근거는 무엇인가?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믿었기 때문이다.
제안: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드러내는 실례들을 성경에서 찾아 보라.
ㄴ. 바울은 기도의 중요성을 믿었다. 그는 항상 기도하는 사람이었다. 그의 기도는 복음의 깊이를 드러내고 그의 신학의 높은 경지를 펼쳐 보인다. 그의 기도는 하나님과의 밀착된 교제를 반영한다. 기도는 그에게 영혼의 호흡이었다.
적용: 나는 기도하는 사람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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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강해 sample
바울의 기도 부탁
살후
“끝으로 형제들아 너희는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기를 주의 말씀이 너희 가운데서와 같이 퍼져 나가 영광스럽게 되고 또한 우리를 부당하고 악한 사람들에게서 건지시옵소서 하라 믿음은 모든 사람의 것이 아니니라”(
바울은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복음을 통해서 위로와 좋은 소망을 주신다고 언급하였습니다(
1. 바울은 어린 교회에게 기도 부탁을 했습니다.
바울이 데살로니가 교회를 개척하고 두 개의 서신을 쓸 때까지 데살로니가 교회는 불과 1, 2년도 되지 않은 초신자들이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주님으로부터 직접 이방인 선교의 소명을 받고 복음에 대한 거대한 계시를 전하는 사도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를 통해서 풍성한 선교의 열매가 달리게 하셨고 그가 가는 곳마다 함께 하셔서 갇혔던 감옥에서 기적으로 풀려나게도 하시고 혹은 병자들을 고치며 귀신 들린 자를 마귀의 속박에서 구출하기도 하셨습니다. 데살로니가 교인들도 그가 와서 복음을 전할 때에 하나님께서 드러내신 큰 능력과 성령의 확신으로 주 예수를 영접하였습니다(살전
우리들 생각에는 데살로니가 교인들이 바울에게 기도를 부탁해야 마땅할 것 같습니다. 우리는 나 보다 나은 사람들로부터 기도 받기를 좋아합니다. 특별히 기도를 받을 때에 누구에게서 받습니까? 훌륭하다고 인정되는 목사님이나 유명 강사나 혹은 중보 기도를 많이 하는 분으로 소문난 분들이 아닙니까? 만일 바울이 우리 나라에 왔다면 너도 나도 그로부터 안수 기도를 받으려고 전국의 교인들이 난리가 날 것입니다. 물론 훌륭한 하나님의 종들로부터 기도를 받는 것이 잘못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바울의 기도 부탁에서 우리들이 배울 점은 보다 다른 측면에서 조명되어야 합니다.
바울은 데살로니가전서에서도 기도 부탁을 했는데 그 당시 데살로니가 교회는 개척된 지 1년도 되지 않은 때였습니다(살전
그리스도를 믿으면 그 날부터 복음 나누기의 대열에 들어선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된 것은 혼자 구원받고 사후에 천국 들어가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구원받은 신자들의 손발을 통해서 다른 잃어버린 영혼들에게 십자가의 복음을 전하도록 계획하셨습니다. 신자는 누구나 하나님의 이러한 구원 계획의 뜻에 순종할 책임이 있습니다. 복음이 교회 공동체의 각 성도를 통해서 온 세상에 확산되는 것이라는 개념이 처음부터 들어가야 합니다. 예수 믿고 구원받았다는 것을 자기 위주로만 생각하고 안심하는 것은 다른 사람들은 다 지옥에 가더라도 자기만 천국에 가면 된다고 여기는 것과 별로 다르지 않습니다. 바울이 데살로니가 교인들에게 부탁한 기도는 하나님께서 그들의 기도를 기꺼이 들으신다는 것을 전제한 요청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차별주의를 싫어하십니다. 하나님은 교회의 명성이나 크기나 성도들의 수준에 따라 교회를 차별하시지 않습니다. 데살로니가 교회처럼 작고 어린 교회의 교인들이 대 사도인 바울의 신변 보호를 위해서 주께 간구해 달라는 부탁을 받았을 때 얼마나 가슴이 뿌듯했겠습니까! 그런데 주께서 그들의 기도를 들어주셔서 바울을 많은 위험에서 보호하셨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얼마나 큰 사역입니까!
교회가 크든지 작든지, 예수님을 믿은 기간이 길든지 짧든지, 신자라면 누구나 복음의 진보를 위해 주께 기도 드릴 수 있습니다. 그런 기도를 주께서 친히 들으시고 응답하신다는 것을 데살로니가 교회가 실증합니다. 이것은 우리들의 형편을 차별하시지 않는 주님께 복음의 발전을 위해 기도하게 하는 동기부여입니다. 초신자라도 대 사도의 안전과 복음 전파를 위해서 기도할 수 있다면 교회를 늘 다니는 오래 된 성도들이 복음의 진보를 위해서 기도하지 않는 것은 반성할 일입니다.
2. 데살로니가 교회는 박해와 환난 중에서 중보 기도의 소명을 받았습니다.
바울은 “부당하고 악한 사람들”(2절)이 그의 복음 사역을 막는다고 했습니다. 아마 그는 고린도에서 현재 행하는 그의 선교 사역을 극구 방해하는 유태인들을 염두에 두었을지 모릅니다(행
“내가 너와 함께 있으매 어떤 사람도 너를 대적하여 해롭게 할 자가 없을 것이니 이는
주님께서 이미 바울의 신변 보호와 복음의 성과가 클 것을 약속하셨는데 왜 바울이 데살로니가 교회에 별도로 기도 부탁을 했을까요? 우리는 여기서 기도에 대한 매우 중요한 진리 하나를 배울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들은 가만히 앉아 있게 하시고 하나님 편에서 혼자 다 맡아서 모든 일을 이루시지 않습니다.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께서 처음부터 계획하시고 성자와 성령을 통해 성취하십니다(
데살로니가 교회는 비록 작은 무리들이 모인 곳이었고 더구나 박해를 받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사도 바울과 그의 동역자들이 전하는 ‘주의 말씀’이 빛을 발휘하고 그들의 신변도 대적자들로부터 건짐을 받는 승리가 있도록 기도하라는 높은 비전을 주셨습니다. 대체로 우리는 자신이 힘들면 우선 내 문제에 급급하여 다른 생각을 하지 못합니다. 그저 하나님께서 내 문제를 도와 주시고 해결해 달라고만 간구합니다.
그러나 데살로니가 교회는 그들의 어려움을 해결 받지 못한 상태에서 바울로부터 기도 부탁을 받았습니다. 그들은 ‘박해와 환난 중에서’(살전
데살로니가 교회는 자신들의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바울의 기도 부탁을 받았고 하나님의 응답을 체험하였습니다. 이것은 그들에게 큰 힘이 되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때때로 내 문제를 직접적으로 해결해 주시기 보다는 간접적인 방법으로 내 문제를 감당할 수 있는 힘을 얻게 하십니다. 데살로니가 교인들은 바울과 그의 동역자들이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받는 것을 보고 자기들도 능히 주의 보호를 받을 것으로 기대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을 그리스도 안에서 지켜 주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약속은 우리들의 기도를 통해서 성취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의 힘든 문제들을 다 알고 계시지만 때로는 보다 큰 문제를 위한 기도의 비전을 주심으로써 우리 자신들의 문제에 매몰되지 않고 하나님의 응답을 받을 수 있는 길을 여십니다. 데살로니가 교인들은 박해와 환난 가운데서 하나님의 일을 위해 기도하라는 소명을 받았을 때 자신들의 어려운 문제들을 제쳐 놓고 주께 엎드렸습니다. 이것이 그들의 영성의 크기였습니다. 내가 겪는 박해와 환난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다른 사람을 위해서 기도할 수 있는 영성이야말로 예수님의 모습을 닮는 경건입니다(참조. 사 53:12).
3. 바울은 두 가지 기도 부탁을 했습니다.
우리는 기도로써 자신의 영성의 높낮이를 드러냅니다. 기도의 내용을 보면 그 사람의 관심과 마음과 목표가 어디에 있는지를 가늠할 수 있습니다. 예로써 예수님의 주기도문을 생각해 보십시오. 주님의 기도는 산상설교의 삶을 반영합니다. 주기도문은 주님 자신이 하나님의 뜻을 가장 온전하게 행하시면서 올린 기도입니다. 주기도는 주님이 시작하신 하나님의 나라가 어떤 것인지를 보여 주면서 제자들이 따를 것을 가르친 기도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이 땅에서 이루어지기 위해 십자가의 삶을 사셨고 그를 따라 새로운 출애굽의 장도에 오른 주의 백성들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어떤 자세로 살아야 하는지를 보여 주셨습니다. 바울의 기도는 그의 서신에서 자주 나옵니다. 그의 기도를 보면 그가 머물고 있는 영적 현주소를 쉽게 찾을 수 있습니다.
바울의 첫 번째 기도 요청은 복음이 널리 전파되는 것이었습니다.
바울의 최대 관심은 복음 전파였습니다. 그는 자신이 유명해지거나 편안하게 살기를 기도한 것이 아니고 복음의 성공을 소원했습니다. 바울은 자신의 이름이 널리 전파되기를 바란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말씀인 복음이 확산되기를 원했습니다. 바울은 복음의 진보에 전적인 관심을 두었습니다. 우리들이 하나님의 일을 위해서 가장 열망해야 하는 일이 있다면 무엇일까요? 교회에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생각해 보십시오. 복음입니까? 경영입니까? 우리 나라 교회는 기도를 많이 하는 편입니다. 그런데 무엇을 위해서 기도합니까? 복음의 말씀이 제일 우선입니까? 아니면 말씀은 하나의 순번에 불과한 형식적인 치장입니까? 교회가 교회다워지려면 복음의 말씀 자체가 굳건하게 자리를 확보해야 하고 모든 것이 복음을 중심으로 돌아가야 합니까?
그런데 실제로 목회자들을 비롯하여 일반 성도에 이르기까지 어느 정도의 시간과 에너지를 복음을 위해 사용하고 있을까요? 1년 내내 성경을 제대로 읽지 않는 성도들도 많고 기도 한 번 간절하게 올리지 않는 신자들도 적지 않습니다. 목회자 자신이 성경을 제대로 공부하지 않고 강단에 올라가서 내용 없는 메시지를 전하는 일도 허다합니다. 일반적으로 말해서 일반 성도들이 성경의 기본적인 가르침마저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경우가 놀랄 정도로 많습니다. 교회마다 성경 공부 시간이 있음에도 이런 현상이 일어나는 것은 이해하기 힘든 일입니다.
그러나 데살로니가 교회는 정말 달랐습니다.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의 선교를 성공적인 것으로 평가하였습니다. 물론 그가 말하는 성공의 잣대는 현대 교회의 표준과 거리가 먼 것이었습니다. 우리들은 데살로니가 교회처럼 교인수가 적고 사회적으로 천시를 받으며 재정이 약하고 목회자가 없는 교회가 성공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바울은“주의 말씀이 너희 가운데서와 같이 퍼져 나가 영광스럽게”(1절) 되도록 기도해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를 다른 지역의 선교를 위한 성공 모델로 삼았습니다. 이것은 우리들이 명심하고 잘 새겨 보아야 할 점입니다. 교회를 볼 때에 우리 눈에 제일 먼저 들어오는 것이 무엇입니까? 건물이고 교인수고 헌금 액수고 목회자의 경력 등이 아닙니까? 왜 그런 것들이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올까요? 관심이 거기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교회의 참 생명은 그런 외형적 가치관의 안경으로는 볼 수 없습니다.
그럼 바울이 데살로니가 교회에서 본 것이 무엇이었습니까? 그는 ‘주의 말씀’이 그들 안에서 어떻게 받아들여졌고 또 어떤 열매를 맺고 있는지를 보았습니다. 그는 데살로니가 교인들이 성령의 확신으로 복음을 받았고 주변으로 복음을 전파했으며 주님과 바울을 본받는 자가 된 것을 지적하였습니다(살전
데살로니가 교회가 바울의 선교 모델이 된 것은 환난 가운데 있는 그들에게는 큰 격려가 되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바울의 기도 요청을 통해 그들을 인정해 주시고 칭찬하신 것이었습니다. 주님께서 우리들이 속한 교회와 우리 자신을 보시고“너희 가운데서와 같이”(1절) 복음이 전해지기를 원하신다고 하신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교회는 크든지 작든지 하나님께서 다른 지역의 선교를 위해 모델로 제시될 수 있어야 자랑스런 교회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사용하시는 선교의 모델 교회란 우리들의 눈에는 보잘것없는 교회였다는 것이 우리가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할 점입니다.
바울의 두 번째 기도 요청은 자신과 동역자들의 신변 보호였습니다.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에게 자기와 동역 선교사들을 위한 기도 부탁을 하면서 구체적인 기도 제목을 주었습니다. 그의 기도 제목은 복음의 진보를 적극적으로 방해하는 어둠의 세력이 있음을 드러냅니다. 그는 “부당하고 악한 사람들에게서”(2절) 건짐을 받게 해 달라는 기도 부탁을 했습니다. 이것은 그냥 지나칠 수 없는 말입니다. 우리는 종교의 자유가 보장된 사회에서 살기 때문에 공적인 박해를 받지 않습니다. 예수를 믿기 때문에 경찰서에 붙잡혀 가거나 재산을 빼앗기지 않습니다. 그러나 복음을 증오하고 방해하는 적대 세력이 있음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바울은 이러한 반대 세력을 ‘부당하고 악한 사람들’이라고 하였고 그들 뒤에는 “악한 자”(3절)가 있다고 했습니다. ‘악한 자’는 사탄을 가리킵니다(마
사탄은 어떤 형태로든지 복음의 진보가 성공하지 못하도록 갖은 수법을 다 동원합니다. 그는 복음을 믿지 않는 악인들을 사용하여 때로는 물리적인 박해를 가하고 때로는 거짓 교사들을 통해 사이비 복음을 전파하며 혹은 사람들의 마음을 혼미하게 하여 복음의 진리를 못 보게 합니다(고전
복음은 현실적입니다. 바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주님으로부터 선교의 소명을 받았습니다(행 26:16-18). 주님은 그를 통해서 많은 사람들을 사탄의 권세에서 해방시켜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실 것이라는 계획을 알리셨습니다. 바울은 본 서신을 고린도에서 보냈습니다. 그 때에도 하나님께서 환상 가운데 나타나셔서 신변 보호를 약속하셨습니다(행
바울은 하나님께서 신자들의 기도를 통해 사탄의 방해를 막게 하신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그는 악한 사람들 뒤에 악한 자가 있듯이, 복음을 전하는 자들 뒤에는 전능하시고 신실하신 하나님이 계신다는 것도 믿었습니다(3절). 복음이 전해지는 곳에 거짓이 침투하고 복음 사역자가 활동하는 곳에 악한 자들의 방해가 있습니다. 사탄은 부당하게 주의 일꾼들을 괴롭히며 끌어내리려고 공작합니다. 그러나 우리들이 알아야 할 것은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의 기도를 사용하신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의 기도로써 복음의 진리가 악한 자들의 방해로부터 보호를 받게 하십니다. 우리는 사탄이 악한 자들을 이용하여 주의 자녀들을 감옥에 넣기도 하고 복음 자체를 희석시키기도 하며 복음을 부인하도록 유혹한다는 것을 압니다. 그러나 복음은 지옥의 권세도 이기지 못합니다. 바울은 평생을 복음 전파에 쏟았지만 결국 사슬에 묶인 채 로마로 끌려 갔습니다. 그럼에도 사도행전은 바울이 로마에서 복음을 “거침없이”(행 28:31) 가르쳤다고 했습니다. 사탄은 복음 전파를 방해하지만 복음은 끝까지 방해를 극복하고 자신의 할 일을 성취합니다. 복음 뒤에는 십자가로써 세상을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주권적인 계획이 진행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들이 스스로 던져야 할 질문이 있습니다. 나는 복음의 진보와 복음 사역자들의 보호를 위해서 간곡한 기도를 올리고 있습니까? 복음 사역은 모든 신자가 함께 참여하는 일입니다. 실제로 나가서 복음 전도를 하는 것이든 아니든 신자들은 다 같이 하나님 나라를 세우기 위해 부름을 받은 역군들입니다. 따라서 우리의 기도는 하나님의 이름과 나라와 뜻이 우선이라야 합니다. 바울은 먼저 복음의 확산을 위해 기도 부탁을 하였습니다. 우리 마음을 지배하는 것은 언제나 주님의 복음이어야 합니다. 구원을 받았다고 하면서 복음을 최우선으로 여기지 않고 항상 나 잘되게 해달라는 신상 축복에만 관심을 둔다면 언제 주님을 위해서 살 수 있단 말입니까? 우리들의 영적 관심과 하나님 나라에 대한 눈높이를 올려야 합니다.
바울은 먼저 복음의 발전을 위해서 기도 부탁을 하였고 그 다음 자신의 신상을 위한 기도 요청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개인 신상에 대한 바울의 기도 요청도 복음의 발전을 위한 것과 직결된 것이었습니다. 악한 자들로부터 보호를 받으려는 것은 무엇보다도 복음 사역에 장애를 받지 않지 위한 것이었습니다. 바울은 복음을 위해서라면 자신의 권리도 포기하였고 복음에 손해가 되지 않도록 모든 것을 참았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 권리를 쓰지 아니하고 범사에 참는 것은 그리스도의 복음에 아무 장애가 없게 하려 함이로다”(고전
우리들이 복음에 따라 살려고 하면 여러 가지 불편한 일을 겪습니다. 때로는 오해도 받고 무시도 당합니다. 수입이 떨어지는 것도 각오해야 하고 나의 권리도 포기해야 할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 우리는 바울의 정신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복음을 위해서 화가 나도 참고 손해를 당해도 견뎌야 합니다. 바울이 ‘범사에 참는 것’은 오직 복음의 진보를 위한 것이었습니다. 이런 자세가 복음에 헌신된 모습입니다. 우리들은 복음에 대해서 너무 소극적이지 않습니까? 교회 행사 때에만 헌신하고 교회 안에서만 적극적이다가 교회 밖으로 나가면 너그럽지 못하고 인색하며 욕심을 부리지 않습니까? 조금이라도 손해를 볼까 봐 양보하지 못하고 작은 손실에 화를 내며 자기가 잘 되어야 하나님의 일도 잘 된다고 착각하지는 않습니까? 혹시라도 거짓으로 돈을 벌고 불의에 참여하면서 하나님을 잘 섬기기 위한 것이라고 정당화하지는 않습니까?
16세기 스페인이 미개척지를 다니면서 내건 슬로건은 하나님의 영광이었습니다. 콜럼버스를 비롯하여 많은 개척자들이 새로 발견한 땅에 가서 원주민들을 대량으로 학살하고 엄청난 금을 수탈하였습니다. 그들은 원주민들을 강제로 개종시키고 복음을 받지 않는 자들을 무자비하게 처형하였습니다. 그들은 빼앗은 금으로 본국에 가서 성당을 장식하고 왕궁의 사치에 소비하였습니다. 이러한 목적을 위해 콜럼버스는 자기가 금을 더 찾을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인도해 달라고 기도하였습니다. 복음을 잘못 배우면 큰 죄를 짓습니다. 슬픈 것은 착취와 부정과 불의의 소득으로 하나님께 바치고 이것을 잘한 일로 여기는 것입니다. 바울은 정반대로 살았습니다. 자기 것을 내어주고 받을 수 있는 것까지 양보하였습니다. 그는 사랑과 진실로 하나님을 섬겼습니다. 크리스천은 이 세상에서 손해를 보면서 사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당하면서 인내하는 것도 배워야 하고 역경 속에서 복음의 진리가 반드시 성공할 것을 확신하며 굳건하게 서 있는 법도 익혀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오직 복음의 유익을 위해서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기는 투철한 복음 정신이 배어 있어야 합니다. 그렇게 사는 삶이 승리의 삶이며 주님의 발자취를 따르는 선한 일생입니다.
4. 바울은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굳게 믿고 기도하였습니다.
“주는 미쁘사 너희를 굳건하게 하시고 악한 자에게서 지키시리라 너희에 대하여는 우리가 명한 것을 너희가 행하고 또 행할 줄을 우리가 주 안에서 확신하노니”(
바울은 앞에서도 데살로니가 교인들의 굳건한 신앙 생활을 위해 기도했습니다(
바울이 데살로니가 교회가 어려움을 헤치고 굳건하게 믿음 생활을 할 것을 어떻게 알고 기대했겠습니까? 자신의 믿음이나 주관적인 확신에 근거한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성경 말씀의 증거와 데살로니가 교회가 보인 여러 가지 열매들에서 넉넉히 확인할 수 있었기 때문에 그들에 대해서 낙관하였습니다. 우리들이 능력 있는 기도를 하려면 먼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에게 신실하시다는 사실을 믿어야 합니다. 내가 느낌으로 갖는 확신이 아니고 성경에 근거한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신뢰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이 강한 마음으로 기도할 수 있도록 과거에 보이셨던 신실하심을 기억나게 하십니다. 바울은 자신의 삶 속에서도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수 없이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신실하신 품성은 이스라엘의 역사에서도 줄기차게 증명되었습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께 신실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끝까지 그들에게 신실하셨습니다. 가장 큰 증거는 이스라엘이 배도와 우상 숭배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약속하신 메시아를 보내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세상에 오셨을 때 이스라엘은 로마의 속박 아래 있었고 다윗의 왕위는 사라진 지 오래되었습니다. 그럼에도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다윗의 후손으로 세상에 태어나게 하셨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신실하시다는 말을 예사로 들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의 신실하심은 전적으로 신뢰할 수 있습니다. 우리들은 자신의 삶이 힘들어지면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대한 기대를 했다가도 금방 놓쳐 버립니다. 그래서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인들에게 “주께서 너희 마음을 인도하여 하나님의 사랑과 그리스도의 인내에 들어가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그런데 주님께서 그들을 어떻게 대하셨습니까? 주님은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요
바울은 하나님께서 신실하시기 때문에 데살로니가 교인들이 외부의 고난과 거짓 가르침의 유혹에도 불구하고 굳건히 설 수 있다고 확신했습니다. 이것은 자신의 믿음을 믿는 것이 아니고 주님의 신실하심에 소망을 거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이 이처럼 “주 안에서 확신”(4절) 하는 것을 기뻐하시고 악한 자로부터 기꺼이 보호해 주십니다. 이런 체험이 늘어갈 때에 우리들의 신앙도 자라고 그리스도 안에서 굳건해져서 흔들리지 않습니다.
끝으로 한 가지 자문해 볼 것이 있습니다.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인들에게 자기와 동역자들을 위해서 기도 부탁을 했습니다. 그러나 자기도 데살로니가 교회를 위해서 꾸준히 기도했습니다. 비교적 짧은 서신인데도 바울은 얼마나 자주 그들을 위해 기도했는지 모릅니다. 다음 구절들을 살펴 보십시오. 데살로니가전서
바울은 대 사도였지만 자신의 능력이나 권위에 의존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현대 교회와 매우 다른 점입니다. 대체로 현대 교회는 목회자의 카리스마와 각종 교회 성장 프로그램과 헌금에 의존합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런 식으로 교회를 부흥시킨 적이 없습니다. 그는 모든 인간적인 방법론을 내려놓고 오로지 하나님께 의존하였습니다. 이것이 그가 그처럼 많은 기도를 드린 원인입니다. 우리들은 대체로 기도의 중요성을 인정합니다. 그러나 모든 성도가 실제로 하나님만 의존하는 자세로 기도하지는 않습니다.
일반적으로 기도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기도에 사용하는 시간은 솔직히 짧은 편입니다. 또 기도에 의존해야 한다는 것을 아는 신자들 가운데 기도 부탁을 하기를 좋아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그런데 다른 사람에게 기도 부탁은 잘 하면서 나는 그 사람을 위해서 기도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성도들 사이의 기도는 상호적인 나눔이어야 합니다. 나는 다른 성도들을 위해서 기도하지 않으면서 그들의 기도만 받기를 좋아하는 것은 믿음의 공동체를 굳건하게 세우는 일이 아닙니다.
바울과 데살로니가 교회는 박해를 받고 있었습니다. 자기 발등에 떨어진 불똥을 끄기도 바쁜데 다른 사람 문제를 위해서 어떻게 기도할 여유가 있겠느냐고 물을지 모릅니다. 우리들이 복음을 바르게 배운다면 그런 그릇된 생각을 떨쳐 버려야 합니다. 바울과 데살로니가 교회는 자신들의 문제에 파묻혀 다른 사람들은 전혀 안중에도 없는 황막한 상태가 아니었습니다. 우리는 자신이 어려움에 처해 있으면 다른 사람을 격려하거나 위로하는 것은 엄두도 못 냅니다. 그러나 바울과 데살로니가 교인들은 달랐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어려움이 해결되지도 않은 상태에서 서로를 위해 기도해 주었습니다.
그 비결이 무엇일까요?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믿은 것입니다. 주님의 신실하심을 믿는 자들에게는 주께서 “마음을 인도”(5절) 하여 하나님의 사랑과 그리스도의 인내로 들어가게 하십니다. 바울은 이미 사랑과 믿음과 소망이 풍성한 데살로니가 교회가 하나님의 사랑과 그리스도의 인내를 더욱 체험하도록 기도하였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주님이 주시는 구원의 체험은 우리들이 사는 이 죄 많은 세상에서도 더욱더 자라고 더욱더 풍성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주 예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영생의 삶입니다. 데살로니가 교인들은 박해 속에서도 하나님의 사랑을 더 충만하게 체험할 수 있었고 주님의 재림을 인내하며 기다릴 수 있었습니다. 그들은 시련 속에서 살았지만 복음이 주는 참 생명의 복을 누렸습니다.
우리들은 자신의 어려움에 사로잡히면 마음이 가려지기 때문에 보다 큰 하나님의 일을 생각할 겨를이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랑과 예수님의 인내가 무엇인지를 모른 채 이 땅에서 누려야 할 구원의 축복들을 놓치고 삽니다. 그렇게 되면 예수를 믿어도 기쁨이 없고 나날을 탄식과 무기력 속에서 지냅니다. 만약 우리들에게서 데살로니가 교회가 누린 축복이 없다면 어떻게 기도해야 하겠습니까? 바울의 기도를 나 자신에게 적용하고 아멘으로 응답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나의 마음을 인도하시는 분임을 신뢰하고 그분께 복음을 위한 나의 필요를 간절히 구해야 할 것입니다.
“주께서 너희 마음을 인도하여 하나님의 사랑과 그리스도의 인내에 들어가게 하시기를 원하노라”(살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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