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 금동대향로
▲백제 금동대향로, 백제 6~7세기, 높이 64.0cm, 국립부여박물관, 위: 전체, 아래:뚜껑부분
1993년 부여 능산리 고분 곁 능사(陵寺)터에서 발견된
백제 금동대향로는 1971년 무령왕령 발굴 이후
백제 미술사와 고고학의 최대 성과였다.
향로는 높이 64cm. 무게 11.8kg이나 되는 대작으로
탐스러운 꽃봉오리를 용이 입에 물어 올리는데
그 꼭대기에서 봉황이 날갯짓하는 모습이다.
이 향로는 중국의 박산(搏山)향로를 기본으로 하고 있다.
박산이란 동쪽 바다 한가운데 불로장생의 신선이
살고 있다는 봉래산, 영주산, 방장산 등 삼신산을 말한다.
중국의 박산향로는 대개 바다를 상징하는 승반 위에
물새 한 마리가 중첩된 산봉우리를 머리에 이고 있는 모습이다.
백제인들은 이런 도교적 상징성을 연꽃봉오리라는
불교적 이미지와 절묘하게 결합시켜 이런 명작을 낳았다.
미술사가들은 이것을 6세기말,
위덕왕 때 유물로 추정하고 있다.
향로는 세부 묘사가 아주 다양하고 아름답다.
뚜껑에는 신선세계를 나타내는 무수한 그림이 새겨져 있다.
불사조, 물고기, 학 등 26마리가 있고
다섯 겹으로 첩첩산중을 이루는 25개의
산봉우리에는 산길, 계곡, 호수가 있다.
말 타는 무인등 인물상이 16명, 피리, 비파,
북 등을 연주하는 악사가 5명, 상상의 날짐승,
호랑이, 사슴 등이 39마리가 들어있다.
여기에 나오는 도상은 약100가지나 된다.
공예는 용(用)과 미(美)로 이루어진다.
향로 뚜껑 산봉우리 뒤에는 10개의 구멍이
숨겨진 듯 뚫려 있고, 봉황 가슴에도 2개의 구멍이 있어
향 줄기가 구멍을 통하여 피어오르게 되어 있다.
결국 백제 금동대향로의 최종 형태는 삼신산에서 연기가
아련히 피어오르는데 다섯 악사가 음악을 연주하고
봉황은 가슴에서 신비로운 향 줄기를 뿜어내는 형상이다.
향로는 크기가 크고, 기법이 너무도 완벽하여
발굴 당시엔 중국 수입설이 제기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중국에서 이런 예는 5세기 남북조시대에
비슷한 유물이 있지만 이처럼 용봉을 곁들인 구성은
아직 알려진 것이 없다.
사실 그때만 하더라도 백제 금속공예품으로
이와 겨룰 만한 명품이 없었다.
그러나 2007년 왕흥사 사리함,
2009년 미륵사 서탑 출토 순금사리함이 발굴되면서
이제는 그런 의심을 갖는 미술사가는 없다.
검이불루 화이불치
우리나라 미술이 지향했던 구체적인 미적 목표가
무엇이었냐는 물음에 내가 가장 먼저 제시하는 대답은
"검이불루 화이불치"(儉而不陋 華而不侈)여덟글자다.
김부식의<삼국사기>백제 온조왕 15년(기원전 4세기)조에
다음과 같은 기사가 나온다.
"새로 궁궐을 지었는데(新作宮室)
검소하지만 누추해 보이지 안았고(儉而不陋)
화려하지만 사치스러워 보이지 않았다.(華而不侈)"
위례겅에 새로 궁궐을 지었다는 역사적 사실을
기록하면서 궁궐의 자태를 말한 이 여덟 글자의 평문은
백제의 아름다움뿐만 아니라 우리 민족의 미감을 대표할 만한 명구이다.
이런 시각에서 보면 왕흥사 사리함,
불국사의 석가탑은 "검이불루" 하고
미륵사 서탑 사리호와 불국사 다보탑은
"화이불치" 하다는 평이 너무도 잘 들어맞는다.
"검이불루 화이불치"의 미학은 오랫동안 이어져왔다.
특히 궁궐 건축의 상량문에 계속 등장한다.
고종이 경복궁 북쪽 끝에 건청궁(乾淸宮)을 짓고
그 곁에 당시로서는 현대풍을 가미한 화려한 서재로
집옥재(集玉齋)를 지었다.
<집옥재 상량문>을 보면 예의 여덞 글자를 약간 바꾸어
"검부지루 화부지사"(儉不至陋 華不至奢)라고 했다.
조선 헌종은 21살(1847년)때 후궁 경빈 김씨를
맞이하면서 새 생활공간으로 지금의 낙선재를 지으며
자신이 직접 쓴<낙선재 상량문>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곱고 붉은 흙을 바르지 않은 것은 과도한
규모가 되지 않게 하기 위함이고,
채색한 서까래를 놓지 않은 것은
소박함을 앞세우는 뜻이라네."
그래서 낙선재는 궁궐의 전각이지만 단청을 입히지 않았다.
그렇다고 누구도 낙선재가 누추해 보인다고 말하지 않는다.
확실히 "검이불루 화이불치"는 백제의 미학이자
우리 민족의 미학으로 삼을 만하다.
(유홍준의 국보순례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