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이 시간 고창 선운사 근처 아담한 펜션에서 머물고 있습니다. 어제 목요일 아침이 밝자 태균이 달력을 들고 옵니다. 이번 한 주 학교방학이라 집에 있을 것이라고 설명하며 방학이니까 준이도 없고 여행도 할꺼라고 한글로 써놓았는데 여행이라고 쓴 글이 하필 목요일에 걸쳐 있었던 것입니다. 어찌 이것을 이리 잘 인식할까요?
태균이의 기대와 출발재촉에는 다 이유가 있었던 것입니다. 할 일이 아직 좀 있어서 여행에 시간쓰기도 그렇고, 영흥도에 이사온 후 매일이 여행하는 기분이라 굳이 여행에의 욕구도 느껴지지 않기에 집에 있으면 딱이겠는데 태균이의 압박이 여러가지로 다양하게 표현됩니다.
제일 웃긴 건 책목록에서 여행책을 골라서 자꾸 눈 앞에 들이미는 것. 여행의 즐거움을 잘 아는터라 얼굴은 싱글벙글 여행에의 흥분을 표정으로 보여줍니다. 이렇게 적극적으로 나오는데 어찌 외면만 할 수 있으랴, 기특해서라도 나서야겠습니다. 그래가자! 했더니 바로 보충제와 약 챙기고 본격 준비에 나섭니다.
어디를 가야할까? 하며 목적지없이 나선 여행길... 우선 안면도에서 보령으로 바로 연결시켜준 해저터널길을 한번 달려보고 싶어 서해안고속도로를 타보았는데, 뿌려대는 눈발이 장난아닙니다. 미친듯이 퍼부어지는 눈발이 장관입니다. 태안으로 빠져서 안면도까지 가는 길은 거의 살금살금 기어가야하는 수준이었습니다. 몇 시간 퍼부은 눈발은 온 주변을 순식간에 새 세상으로 만들어버리고 눈을 뒤집어 쓴 안면도 소나무숲은 이 순간이 아니면 만나기 쉽지않은 풍경입니다.
가까이 있어도 바다로 막혀있어 꽤 먼 길을 돌아야했던 안면도는 이제 보령과 바로 연결되는 원산안면대교 건설과 해저터널길 개통으로 인해 10km 정도면 바로 닿을 수 있습니다.
태균이의 여행목적지는 제주도입니다. 달리는 내내 제주도를 가야한다며 제주 관련해서 자신이 동원할 수 있는 단어는 다 동원합니다. 제주항공 제주도 제주공항 제주xx렌트카 등등, 태균이가 제주도를 주장하는 것에의 근거는 며칠 전 엄마친구가 방문해서 나눈 담소 중에 함께했던 제주도여행 추억담이 들어있었고 또다시 제주도 한라산 여행계획을 이야기했었던 것이 이유일 것입니다.
달리는 내내 제주도행을 강요하더니 대천해수욕장에 닿아 너른 바다를 보자 태균이의 제주도 주장은 사그러 들었습니다. 대천해수욕장 거의 30년 만에 온 듯 합니다. 태균이 아기 때 와보고 처음왔는데 참 많이 정돈되고 깔끔해진 것 같습니다. 확실히 대천해수욕장이 인기가 있는 것은 서해에 있음에도 너른 해변이 동해 못지 않기 때문일 것입니다.
대천해수욕장의 짚라인처럼 내년에도 영흥도에 같은 시설이 들어선다하니 서로 비슷한 방식으로 관광객 유치에 열을 올리는 듯 합니다. 대천해수욕장에서 하룻밤 묵을까 잠시 흔들리기도 했지만 간만에 선운사 한번 걸어보고 싶어 고창까지 내려가보기로 했습니다.
다시 서해안고속도로를 달리는데 눈발이 장난아닙니다. 간만에 맛보게 되는 폭설 속 운전입니다. 작년 학교방학을 이용해 하루 여행했을 때의 상황과 너무 비슷합니다. 그 때도 눈발이 너무 심해서 서해안고속도로를 달리다 군산 근방에서 포기해야 되었었는데요, 이번에는 그래도 선운사까지 왔습니다.
선운사 근방에는 그 유래를 알 수 없게 풍천장어집이 즐비합니다. 간만에 고창 풍천장어맛도 여행의 큰 즐거움입니다. 장어를 기다리고 먹는 동안 눈발은 더 굵어지고 창밖으로 휘날리는 눈송이들이 바람까지 휘몰아쳐 거세기 그지없습니다.
식사를 마치고 근처 펜션에 들어가니 태균이덕에 무작정 나선 여행의 하루가 저물어갑니다. 미국이나 캐나다에서 여행하면서 지나는 길에 들르게 되는 작은 모텔처럼 선운사 근처 작은 펜션은 납작한 1층 구조의 모텔같은 곳입니다. 요즘은 이런 숙박시설을 이용하면 꽤 세심하게 보게되는데 가격대비 참으로 괜찮은 곳입니다. 비록 비수기이긴 하지만 이 가격에 이런 시설들을 운영해야하니 펜션운영도 결코 쉬운 일이 아닌듯 합니다.
이왕 나선 길, 오늘은 선운사를 탐방하며 마음의 독들을 벗겨내야 되겠습니다. 묵혀두었던 마음의 짐들을 풀어낼 수 있는 방법이란 스스로 털어내야 함을 다시 확인하고 갈 뿐이겠지만 어서 사색도 자유롭게, 욕망도 자유롭게, 그리고 부담도 자유롭게 그렇게 되어가고 싶습니다..,
첫댓글 모자분의 여행을 천천히 음미하며 읽으면서 여러 생각을 합니다. 제 손녀도 행복하게 자라길 바라면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