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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광주대교구 꾸르실리스따 원문보기 글쓴이: 이선정스테파노
2024년 10월 3일 목요일
[(녹) 연중 제26주간 목요일]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말씀의 초대
욥은 그의 구원자가 살아 계심을 알고 있다며, 기어이 뵙고자 하는 그분을 보리라고 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일흔두 제자를 지명하시어, 몸소 가시려는 모든 고을과 고장으로 당신에 앞서 둘씩 보내시며,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선포하게 하신다(복음).
제1독서
<나는 알고 있다네, 나의 구원자께서 살아 계심을.>
▥ 욥기의 말씀입니다. 19,21-27
욥이 말하였다.
21 “여보게, 나의 벗들이여,
날 불쌍히 여기게나, 불쌍히 여기게나. 하느님의 손이 나를 치셨다네.
22 자네들은 어찌하여 하느님처럼 나를 몰아붙이는가?
내 살덩이만으로는 배가 부르지 않단 말인가?
23 아, 제발 누가 나의 이야기를 적어 두었으면!
제발 누가 비석에다 기록해 주었으면!
24 철필과 납으로 바위에다 영원히 새겨 주었으면!
25 그러나 나는 알고 있다네, 나의 구원자께서 살아 계심을.
그분께서는 마침내 먼지 위에서 일어서시리라.
26 내 살갗이 이토록 벗겨진 뒤에라도 이 내 몸으로 나는 하느님을 보리라.
27 내가 기어이 뵙고자 하는 분, 내 눈은 다른 이가 아니라 바로 그분을 보리라.
속에서 내 간장이 녹아내리는구나.”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 음
<너희의 평화가 그 사람 위에 머무를 것이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0,1-12
그때에 1 주님께서는 다른 제자 일흔두 명을 지명하시어,
몸소 가시려는 모든 고을과 고장으로 당신에 앞서 둘씩 보내시며,
2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
그러니 수확할 밭의 주인님께 일꾼들을 보내 주십사고 청하여라.
3 가거라. 나는 이제 양들을 이리 떼 가운데로 보내는 것처럼 너희를 보낸다.
4 돈주머니도 여행 보따리도 신발도 지니지 말고,
길에서 아무에게도 인사하지 마라.
5 어떤 집에 들어가거든 먼저 ‘이 집에 평화를 빕니다.’ 하고 말하여라.
6 그 집에 평화를 받을 사람이 있으면 너희의 평화가 그 사람 위에 머무르고,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되돌아올 것이다.
7 같은 집에 머무르면서 주는 것을 먹고 마셔라.
일꾼이 품삯을 받는 것은 당연하다. 이 집 저 집으로 옮겨 다니지 마라.
8 어떤 고을에 들어가든지 너희를 받아들이면 차려 주는 음식을 먹어라.
9 그곳 병자들을 고쳐 주며,
‘하느님의 나라가 여러분에게 가까이 왔습니다.’ 하고 말하여라.
10 어떤 고을에 들어가든지 너희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한길에 나가 말하여라.
11 ‘여러분의 고을에서 우리 발에 묻은 먼지까지
여러분에게 털어 버리고 갑니다.
그러나 이것만은 알아 두십시오.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습니다.’
12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그날에는 소돔이 그 고을보다 견디기 쉬울 것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오늘의 묵상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이 적은 상황을 생각하여 보았습니다. 오늘 복음의 장면은, 예수님께서 복음을 전하실 곳이 아직 많고 복음을 듣지 못한 이들도 많은 상황입니다. 파견할 제자가 일흔두 명이나 있어도 부족합니다. 어림잡아 비교한다면 비신자들이 많은 지역에 선교를 시작하는 상황과 비슷할까요?
그러나 신자들이 많아도 일꾼은 많이 필요합니다. 신자들이 많다고 해서 복음 선포가 필요하지 않은 것도 아니고, 교회가 없는 지역에 처음 교회를 세우는 것과는 다르지만 그 상황에서는 또 그 나름대로 할 일이 있습니다. 결국 언제나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은 모양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수확할 것은 많고 일꾼은 적을 때, 일꾼은 할 일이 많다고 하여 불평할 것이 아닙니다. 밭의 주인이라면 그 밭을 어떤 마음으로 바라볼까요? 아직 복음을 듣지 못한 이들이 많다면, 그들을 염려하는 안타까운 마음으로 애써 그 밭을 돌볼 것입니다.
복음을 받아들인 이들이 많아 밭에 할 일이 많다면, 풍성한 수확을 거두어들이고자 마찬가지로 열심히 일할 것입니다. 밭의 주인이라면 일이 많은 것을 싫어하지 않을 것입니다. 복음 선포에서 지금의 처지가 좋을 수도 있고 나쁠 수도 있지만, 언제나 우리 밭에는 일꾼이 부족하고 할 일이 많을 것입니다 . 밭 주인의 마음으로 그 밭을 바라봅시다. ‘밭 주인’은 일꾼들을 보내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우리도 ‘밭 주인’에게서 파견되었음을 생각하며, 게으른 종이 되지 말고 주인의 마음을 함께 나누는 충실한 종이 됩시다.(안소근 실비아 수녀)
욥은 만신창이가 된 상태에서도 결코 하느님을 저주하지 않았습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마땅히 이유도 모르겠는 극심한 고통을 겪은 경험이 있는지요? 내가 잘못한게 무엇인지 아무리 따지고 따져봐도 모르겠는데, 난데없이 다가온 불행 앞에 망연자실 바닥에 주저앉아 흐느껴 본 적이 있습니까?
너나 할 것 없이 우리 모두 한없이 나약한 결핍투성이의 존재로서, 한계를 지니고 살아가기에 어쩔 수 없습니다. 이 땅 위에 두발을 딛고 있는 이상, 욥처럼 극도로 비참한 상황 까지는 아니지만, 우리 모두 이 한 세상 살아가며 이런저런 다양한 고통과 시련에 노출됩니다.
잠시 왔다가 사라지는 고통이 아니라 욥처럼 뼛속 깊이 사무치는 고통일 경우, 우리는 하느님도 원망하고, 이웃도 원망하고, 나 자신도 원망하며 크게 울부짖습니다.
그런데 욥의 절규 같은 경우 우리와 살짝 다른 양상을 보입니다. 극한의 고통 앞에 울부짖지만, 그 울부짖음이 결국 주님 안의 울부짖음이요, 주님께 대한 신뢰 안에서의 울부짖음입니다.
“내 살갗이 이토록 벗겨진 뒤에라도 이 내 몸으로 나는 하느님을 보리라. 내가 기어이 뵙고자 하는 분, 내 눈은 다른 이가 아니라 바로 그분을 보리라.”(욥 19, 26-27)
보십시오. 참으로 놀랍습니다. 욥은 극심한 피부병으로 만신창이가 된 상태에서도 하느님을 저주하지 않습니다. 하느님께 마지막 희망을 둡니다.
이런 욥이었기에 결국 하느님께서 그의 절규, 그의 몸부림, 그의 울부짖음을 귀여겨들으십니다. 그를 지옥같은 병고에서 해방시켜 주시고 새로운 피부, 새 인생을 회복시켜 주십니다.
이 한 세상 살아가면서 때로 삶이 너무나 고달프고 가혹한 나머지, 하느님을 원망할 수도 있겠습니다. 사랑이며 자비하신 하느님께서 어떻게 제게 이러실 수 있냐며 따질 수도 있겠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 대한 희망까지 포기해서는 절대 안 되겠습니다. 그분께서 이 혹독한 고통 너머에서 주시려고 마련하신 구원과 영원한 생명에 한 희망까지 포기해서는 안 되겠습니다.
우리는 어떻게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왔음을 보여줄 수 있을까?
전삼용 요셉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당신 제자들을 세상에 보내시며 하느님 나라가 왔음을 선포하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그들이 하느님 나라를 받아들이지 않을 때도 역시 그렇게 하라고 하십니다.
“어떤 고을에 들어가든지 너희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한길에 나가 말하여라. ‘여러분의 고을에서 우리 발에 묻은 먼지까지 여러분에게 털어 버리고 갑니다. 그러나 이것만은 알아 두십시오.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그날에는 소돔이 그 고을보다 견디기 쉬울 것이다.” 이 말 안에는 하느님 나라를 전하는 이들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 곧 ‘심판’이라는 뜻이 들어있습니다.
어떤 이들은 ‘불가지론’을 말합니다. 신이 있는지, 없는지 증명할 수도 없고 알 수도 없다는 뜻입니다. 그러니 신을 찾는 행위는 의미가 없다는 주장입니다. 이것은 믿는 이들에게는 마치 아기가 태어났는데 부모가 있는지, 없는지 알 수가 없으니 부모를 찾을 필요가 없다는 말과 같이 들립니다. 하지만 오늘 복음에서 ‘하느님 나라’를 위해 목숨을 거는 이들 자체가 하느님이 계심을 증명한다고 말하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불가지론자들이 사용하는 예는 이러한 것들이 있습니다. 원래 영국 철학자 John Wisdom이 제시하고 나중에 Antony Flew가 대중화한 이 사고 실험에서는 두 사람이 눈에 보이지 않는 정원사가 정원을 가꾸는지 아닌지를 토론합니다.
아름답고 잘 관리된 정원을 걷고 있는 두 사람을 상상해 보십시오. 한 사람은 정원사가 정원을 관리한다고 믿고 다른 사람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들은 이론을 테스트하는 데 동의합니다.
첫 번째 사람은 정원사가 잘 관리된 정원 상태에 책임이 있다고 주장하는 반면, 두 번째 사람은 회의적이며 정원의 아름다움을 자연의 산물이라고 봅니다.
정원사가 존재하는지 테스트하기 위해 그들은 정원사의 존재를 감지하는 카메라, 센서, 심지어 경비견까지 다양한 도구를 설정합니다. 그러나 정원사의 증거는 발견되지 않습니다. 발자국도 남지 않고, 방해도 전혀 보이지 않으며, 정원은 눈에 띄는 어떠한 간섭도 없이 계속해서 번창하고 있습니다. 증거가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신자는 정원사가 분명히 있다고 계속 주장하지만 이제는 정원사가 눈에 보이지도 않고, 만질 수도 없고, 어떤 알려진 수단으로도 탐지할 수 없다고 주장합니다.
그런 다음 회의론자는 “눈에 보이지 않고 감지할 수 없는 정원사가 있는 것과 정원사가 존재하지 않는 것의 차이점이 무엇입니까?”라고 묻습니다. 즉, 정원사의 존재를 어떤 관찰 가능한 방식으로도 확인할 수 없다면 어떻게 정원사가 존재한다고 주장할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까?
버트런드 러셀(Bertrand Russell)은 지구와 화성 사이 어딘가에서 태양 주위를 공전하는 찻주전자를 상상하는 유명한 비유를 제안했습니다. 이 찻주전자는 너무 작아서 어떤 망원경이나 과학 장비로도 감지할 수 없습니다. 그는 누구도 찻주전자의 존재를 부정할 수는 없지만, 그 존재 입증의 책임은 그것이 존재한다고 주장하는 사람에게 있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이들은 믿지 않는 정당화를 하는 것이지, 믿음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전혀 알려고 하지 않는다고 볼 수 있습니다. 내가 만약 부모가 나의 부모임을 믿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누군가 부모를 보여주어야만 할까요? 또 누군가 DNA 검사를 해서 그 부모가 확실함을 입증한다면? 그런데 그 DNA 검사도 믿을 수 있는 것일까요? 중간에 속임수가 들어갈 수도 있습니다. 이렇게 믿지 않으려고 한다면 어떤 증거를 대도 믿을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믿음은 무엇입니까? 눈에 보인다고 믿어지는 게 아닙니다. 믿지 않으려면 태양 주위를 도는 주전자를 보더라도 홀로그램이라 주장할 것이고, 정원사를 보더라도 그 정도 실력으로 저 좋은 정원을 다 가꿨을 리가 없다고 말할 것입니다. 그들이 주장하는 증거들은 이렇게 외적이고 외적인 것은 속임수가 가능하므로 믿지 않으려는 이들에게 어떤 믿음도 줄 수 없습니다.
어떤 여인이 나에게 키스해 주었다면 그것을 사랑으로 확신할 수 있을까요? 그런 외적인 것은 속임수일 수도 있어서 쉽게 믿지 못합니다. 사랑은 그런 증거들이 쌓여 마음에서 일어나는 인간 이성으로 감당할 수 없는 무엇입니다.
믿음은 마음 차원의 문제인데 부모의 사랑이 그 사람 마음 안에 들어가 ‘평화’를 줄 때 생깁니다. 제가 어머니를 의심했을 때 어머니께서 저에게 해 주시는 사랑에 결국은 믿기로 결단을 내리게 된 것과 같습니다. 이 ‘평화’를 하느님 나라라 합니다.
바오로 사도는 하느님 나라는 먹고 마시는 일이 아니라 성령을 통해 이루어지는 의로움과 기쁨과 평화라고 하였습니다. 부모의 사랑을 받고 나의 창조자를 만났을 때 누구나 그 평화를 체험합니다. 그런데 만약 그 평화까지 거부한다면 어떻게 될까요? 만약 그 사람이 아이라면 온전한 인간이 되지 못하고 온전한 인간 사회에 적응할 수 없게 됩니다.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하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전하는 이들은 이 평화를 주는 일을 하는 이들입니다. 그것을 거부할 때 더는 희망이 없습니다. 그러니 하느님 나라가 다가왔음이 곧 심판이 되는 것입니다. 엘리자베스 르쇠르와 펠릭스 르쇠르의 이야기입니다. 엘리자베스는 저명한 프랑스 의사이자 지식인인 무신론자 펠릭스와 결혼한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습니다. 펠릭스는 무신론자였을 뿐만 아니라 아내의 신앙에 적극적으로 적대적이었고 종종 아내의 종교적 신념을 조롱했습니다.
엘리자베스는 결혼 생활 내내 사랑과 인내, 충실함을 유지하면서 펠릭스의 개종을 위해 고통과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녀가 죽은 후, 펠릭스는 자신의 영혼을 위한 기도와 희생을 기록한 영적 일기를 발견했습니다. 그녀의 사랑과 헌신에 깊은 감동을 받은 펠릭스는 깊은 회개를 경험하고 도미니키회 가톨릭 신부가 되었습니다.
펠릭스는 후기 저작물과 공개 강연에서 엘리자베스가 자신의 삶에 미친 영향에 대해 자주 언급했습니다. 그는 자신을 하느님께로 인도한 것이 그녀의 사랑과 흔들리지 않는 믿음이었다는 것을 인정했습니다. 그의 적대감에도 불구하고 그녀가 결혼 생활 내내 보여준 사랑은 궁극적으로 그가 한때 거부했던 바로 그 믿음을 받아들이도록 이끌었습니다.
교회는 엘리자베스와 같습니다. 교회가 전하는 복음은 바로 엘리자베스가 쓴 영적 일기입니다. 이것마저 거부한다면 다른 증거는 펠릭스에게 믿음을 가져다줄 수 없었을 것입니다. 오직 사랑으로 흘린 피만이 상대의 심장까지 흘러 믿음의 열매를 맺게 할 수 있습니다. 교회는 그렇게 하도록 파견되었고 그래서 교회의 사랑과 증언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희망이 없습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주변을 보면 제복을 입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의사는 가운을 입고 있습니다. 의사는 아픈 사람을 치료하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그런 의사에게 신뢰와 존경을 드리고 있습니다. 경찰도 제복을 입고 있습니다. 경찰은 민중의 지팡이라고 합니다. 우리는 경찰의 안내와 지시를 따라야 합니다. 그것이 질서를 유지하고, 우리의 안전을 지켜주기 때문입니다. 군인은 군복을 입고 있습니다. 군인은 국가를 위해서 목숨을 바쳐 싸우는 사람입니다. 군인들에게 혜택을 주는 것은 그들의 수고와 헌신을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소방대원도 제복을 입고 있습니다. 우리는 소방대원의 차가 지나갈 때면 자리를 비켜 주어야 합니다. 소방대원들이 위급한 상황에 있는 사람을 구하기 때문입니다. 제복을 입고 있는 동안, 그 제복이 가지는 권위와 가치에 어긋나는 행동을 하지 않습니다. 만일 제복을 입고 있는 사람이 사회의 질서와 규율에 어긋나는 행동을 한다면 더 많은 비난과 비판을 받을 것입니다. 의사가 사람의 생명을 가지고 사기를 친다면, 경찰이 모여서 도박을 한다면, 군인이 사람을 다치게 한다면 더 큰 비난과 처벌을 받을 것입니다.
며칠 전입니다. 한 아이가 제게 이런 질문을 했습니다. ‘신부님은 왜 사제복을 입으세요?’ 아이는 사제복에 있는 하얀 칼라가 궁금했던 것 같았습니다. 저는 별 뜻 없이 ‘그것이 법이야.’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옆에 있던 신부님이 아이에게 영어로 사제복의 의미를 자세히 설명해 주었습니다. 클러지 칼라(clerical collar)라고 불리는 하얀 색 칼라는 이런 의미가 있습니다. “헌신과 순결: 하얀 색은 사제가 그리스도와 교회를 위해 자신의 삶을 봉헌하고 순결하게 살아가겠다는 서약을 상징합니다. 사제는 이 칼라를 통해 자신이 세속적인 생활과 구별된다는 것을 드러냅니다. 사제의 정체성: 사제복의 하얀 칼라는 사제가 신앙 공동체 안에서 성직자로서의 역할을 맡고 있다는 표시입니다. 그들은 사람들 속에서 하느님의 종으로서 특별한 사명을 수행하는 이로 구별됩니다. 하느님의 빛: 하얀 색은 성서적으로 하느님의 빛과 진리를 상징합니다. 사제는 이 칼라를 통해 하느님의 말씀과 진리를 세상에 전하는 역할을 상징적으로 표현합니다.” 저도 신부님의 설명을 들으면서 사제복이 가지는 의미를 다시 한 번 생각할 수 있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그리스도와 하나 되는 세례를 받은 여러분은 다 그리스도를 입었습니다. 그래서 유다인도 그리스인도 없고, 종도 자유인도 없으며, 남자도 여자도 없습니다. 여러분은 모두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하나입니다.(갈라 3 27 -28)" 세례를 받은 신앙인은 모두 그리스도를 입었다고 명확하게 이야기합니다. 신앙인이라고 말하면서 하느님의 뜻을 따르지 않는다면, 신앙인이라고 하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따르지 않는다면 우리는 세상 사람보다 더 큰 비난과 고난을 받을 것입니다. 인도의 간디는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나는 예수 그리스도는 존경한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존경하지 않는다.” 간디의 눈에 그리스도를 입었다는 신앙인들이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따르지 않는 것으로 보였기 때문입니다. 교회의 권위가 실추되고, 세례 받는 신앙인이 줄어드는 이유는 박해가 심하기 때문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이 빛을 잃어서도 아닙니다. 그리스도를 입어야 하는 신앙인들이 세상의 질서와 세상의 뜻을 따르기 때문입니다. 사제복을 입은 사제들이 그리스도의 희생과 헌신을 따르지 않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파견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두 가지를 요청하셨습니다. 첫째는 열정입니다. 작은 물방울이 커다란 바위에 구멍을 냅니다. 불가능한 것 같지만 열정에 시간이 더해지면 이루어집니다. 돈도, 지팡이도, 조직도 열정이 없으면 소용이 없기 때문입니다. 조선에 도착한 프랑스 외방 전교회 사제들은 돈도, 지팡이도, 조직도 없이 머나먼 길을 떠나 조선에 도착했습니다. 오직 하느님의 뜻을 전하고, 복음을 전하려는 열정이 있었습니다. 박해와 순교가 있었지만, 한국교회는 순교자들의 피와 땀 위에서 성장하였습니다. 둘째는 믿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언제나 믿음을 강조하셨습니다. 눈이 먼 소경을 치유하실 때도 믿음을 말씀하셨습니다. 백인대장의 믿음과 시로페니키아 여인의 믿음을 칭찬하셨습니다. 이 세대가 믿음이 약하다고 한탄하셨습니다. 조건을 따지는 믿음은 계약입니다.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믿음은 아무런 조건이 없는 믿음입니다. 믿음이 있다면 산을 옮길 수 있다고 했습니다. 믿음이 있으면 죽은 사람도 살릴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물 위를 걷던 베드로가 물속으로 빠진 건 풍랑이 거세었기 때문이 아닙니다. 믿음이 사라지고 두려움이 커졌기 때문입니다. 토마 사도에게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나를 보고야 믿느냐? 보지 않고 믿는 사람은 참으로 복되다.”
주님께서는 제게도 열정과 믿음을 요구하십니다. 삶이 지치고 힘들다면, 무기력하고 의욕이 사라진다면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를 지시고 골고타 언덕을 오르신 예수님께 열정과 믿음을 청하면 좋겠습니다.
오늘의 성인
성녀 마리아 요세파 로셀로 (Mary Josepha Rossello)
활동년도 : 1811-1880년
신분 : 설립자
지역 :
같은 이름 : 메리, 미리암, 요세빠, 요셉파
이탈리아 북서부 리구리아(Liguria)의 사보나(Savona)에서 가까운 알비솔라 마리나(Albisola Marina)에서 짐꾼의 아홉 자녀 가운데 하나로 태어난 성녀 마리아 요세파 로셀로(Maria Josepha Rossello)는 어려운 가정 형편 때문에 어려서부터 집안 살림을 돕기 위해 여러 가지 일을 하였다. 어려서부터 신심이 깊었던 그녀는 일찍이 수도생활을 원했으나 건강 등의 문제로 뜻을 이루지 못하였고, 16세 때에 작은 형제회의 3회원이 되었다.
1837년 그녀의 재능을 알아 본 사보나 교구의 주교가 그녀에게 집을 한 채 주고 소녀와 처녀들을 가르치는 일을 하도록 하였다. 이렇게 소규모로 출발한 이 단체는 나중에 병원과 학교 등을 거느린 ‘자비의 모후 수녀회’로 크게 발전하였다. 성녀 마리아 요세파 로셀로는 40년 이상 이 수녀회를 운영하는데 헌신하였다. 그녀가 설립한 수녀회는 이미 그녀의 생전에 이탈리아와 라틴 아메리카 등으로 활발히 퍼져 나갔다. 1880년 12월 7일 선종한 그녀는 1938년 11월 6일 교황 비오 11세(Pius XI)에 의해 시복되었고, 1949년 교황 비오 12세에 의해 시성되었다
성 제라르도 (Gerard)
활동년도 : 880?-959년
신분 : 신부, 수도원장
지역 : 브로뉴(Brogne)
같은 이름 : 게라르도, 게라르두스, 제라드, 제라르두스, 제라르드
성 게라르두스(Gerardus, 또는 제라르도)는 880년경 벨기에 나무르(Namur) 교구의 포스(Fosse) 근교인 스타브(Stave)의 귀족 집안에서 상티오(Santio)의 아들로 출생하였다. 어머니 플렉트루드(Plectrud)는 리에주(Liege)의 주교인 스테파누스(Stephanus)의 조카였다. 당시 귀족 신분의 자제들처럼 성 게라르두스 역시 기사 교육을 받았는데, 군대 안에서도 그의 경건함은 모든 이들의 눈길을 끌었다. 그는 자신의 영지인 브로뉴에 있는 한 경당을 크게 재건하고 성 에우게니우스(Eugenius)의 유해를 안치했다.
917년경 나무르 공작은 성 게라르두스에게 프랑스 사절의 임무를 맡겼다. 파리에 도착한 그는 수행원들을 파리에 머물게 하고 자신은 생드니(Saint-Denis) 수도원에서 머물렀다. 그곳에서 수도승들의 삶에 깊은 감명을 받은 그는 사절의 임무를 마친 후 나무르 공작과 스테파누스 주교의 허락을 얻어 다시 생드니 수도원으로 돌아갔다. 그곳에서 수도자가 되어 생활하였고 사제품을 받았다. 그 뒤 브로뉴로 돌아온 그는 수도원 근처의 작은 골방에 칩거하면서 엄격한 금욕생활을 하였다. 919년 그는 성 베드로와 성 에우게니우스에게 재봉헌된 브로뉴의 성당에 토지를 기증하였다.
923년 새 수도원의 아빠스가 된 그는 수도원이 자리를 잡고 평화롭게 성장하던 934년, 로렌(Lorraine)의 지슬베르(Gislebert) 공작으로부터 에노(Hainaut)에 있는 수도원을 베네딕토회의 규칙을 준수하도록 개혁해 달라는 임무를 받았다. 이러한 그의 개혁 운동은 플랑드르(Flandre) 지방에서만 일곱 개의 수도원에서 행해졌는데, 그 후 이 운동은 노르망디(Normandie) 지방으로까지 확산되었다. 그러나 그의 모든 개혁이 성공을 거둔 것은 아니었다.
953년 일선에서 물러난 그는 브로뉴로 돌아가 몽 블랑델(Mont-Blandel) 수도원의 아빠스가 되었다. 그는 로마로 교황을 방문하고 돌아오는 길에 자신이 개혁한 공동체들을 방문하였다. 그 후 브로뉴에서 머물다가 959년 10월 3일 세상을 떠났다. 그의 유해는 브로뉴에 안치되었고, 1131년 리에주의 주교인 알렉산데르(Alexander)는 교황 인노켄티우스 2세(Innocentius II)의 대리로 성인의 시신을 기리는 예식을 거행하였다. 이 예식은 사실상 시성과 동등한 효과를 지닌 것이었다. 17세기 이후 게르마누스는 성인으로 불리기 시작하였다.
성녀 테오도라 게랭 (Theodore Guerin)
활동년도 : 1798–1856년
신분 : 수녀원장, 설립자
지역 :
같은 이름 : 게렝, 구에린, 데오도라, 데오도로, 데오도루스, 떼오도라, 떼오도로, 떼오도루스, 테오도로, 테오도루스
성녀 테오도라 게랭(Theodora Guerin)은 1798년 10월 2일 프랑스 서쪽 브르타뉴(Bretagne) 반도의 이타블리 쉬르 메르(Etables-sur-Mer)라는 마을에서 안느-테레즈 게랭(Anne-Therese Guerin)이란 이름으로 태어났다. 그녀의 부모는 나폴레옹 보나파르트(Napoleon Bonaparte) 휘하에서 해군 장교로 근무한 로랑 게랭(Laurent Guerin)과 르페브르(Lefevre) 가문 출신의 이자벨 게랭(Isabelle Guerin)이었다. 안느-테레즈가 태어난 때는 프랑스 혁명(1789-1794년)이 끝난 지 얼마 되지 않은 시기였다. 혁명의 여파로 프랑스는 갈가리 찢어졌고, 학교와 성당들이 강제로 문을 닫고 사제들이 추방되거나 단두대에서 희생됨으로써 가톨릭 교회 또한 위기에 봉착한 시대였다.
로랑과 이자벨은 네 명의 자녀를 두었는데 안느-테레즈와 마리-잔느(Marie-Jeanne)만이 어른이 될 때까지 살아남았다. 안느-테레즈는 어릴 때부터 하느님과 가톨릭 교회에 대한 애정을 갖고 있었다. 그녀는 10살 때 첫영성체를 허락받았는데, 당시 본당신부는 그녀가 언젠가는 수녀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어린 안느-테레즈는 종종 집 근처의 해안가 바위에서 홀로 오랜 시간 동안 묵상과 반성 그리고 기도에 열중하는 모습으로 발견되곤 하였다. 아버지 로랑이 나폴레옹의 해군에 복무하며 몇 년 동안 집을 떠나 있었기 때문에 자녀들의 교육은 주로 어머니 이자벨에 의해 집에서 이루어졌다. 이자벨은 신앙과 성경을 중심으로 자녀들을 하느님의 사랑으로 양육하였다. 안느-테레즈가 15살 때 아버지가 가족을 방문하기 위해 집으로 오다가 강도에게 살해당하는 불행한 일이 발생했다. 남편을 잃고 큰 충격을 받은 어머니를 위해 안느-테레즈는 여러 해 동안 어머니와 어린 여동생을 돌보는 책임뿐만 아니라 가사와 정원일까지도 감당해야 했다. 이런 고난과 희생을 겪으면서도 그녀의 신앙은 흔들리지 않았고, 하느님께서 항상 함께 하신다는 사실을 굳게 믿었다.
25살 무렵에 안느-테레즈는 루이에 쉬르 루아르(Ruille-sur-Loir)의 천주 섭리의 수녀회에 입회하여 테오도라라는 수도명을 받았다. 이 수녀회는 어린이들에게 교육의 기회를 제공하고 가난하고 병들고 죽어가는 이들을 돌봄으로써 하느님을 섬기는 젊은 수녀 공동체였다. 그녀는 1825년 9월 8일 첫 서원을 하고 이어서 1831년 9월 5일에 종신서원을 발했다. 수련기 중에 테오도라 수녀는 프랑스 중부의 프레이이 쉬르 클레즈(Preuilly-sur-Claise)로 파견되었는데, 그곳에서 천연두로 추정되는 병에 걸려 거의 죽을 뻔하였다. 다행히 병은 나았지만 소화 계통에 심각한 손상을 입어 평생을 부드러운 음식과 액체만을 소화할 수 있었다. 그 후 테오도라 수녀는 렌(Rennes)의 생토뱅(Saint-Aubin) 본당 학교와 앙제(Angers) 교구의 술렌느(Soulaines)에서 병자와 가난한 이들을 방문하고 교육하였다. 이 기간 중에 그녀는 앙제 학술원의 장학사로부터 교육적 공로에 대한 훈장을 받기도 했다.
프랑스에서의 활동에 이어 테오도라 수녀는 일단의 수녀들과 함께 미국으로 건너가 인디아나(Indiana) 주(洲)의 빈세네스(Vincennes) 교구에서 학교를 설립하고 개척자들과 함께 하느님을 사랑을 나누기 위해 수녀원의 미국 모원을 설치할 책임자로 사명을 부여받았다. 겸손하며 자신의 능력을 한없이 부족하게 느꼈던 테오도라 수녀는 자신이 수행하기에는 너무 벅찬 사명으로 생각했다. 또한 자신의 허약한 육체적 조건 역시 수녀원의 요청을 수락하기 어렵게 만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테오도라 수녀는 오랜 기도와 원장수녀와의 대화를 통해 결국 새로운 소명을 받아들였다. 만약 자신이 하지 않는다면 하느님의 사랑을 나누기 위해 황무지로 떠나는 모험을 할 사람이 아무도 없을 것 같은 마음에서 두려움을 안고 수용한 것이다.
하느님을 섬기기 위해 어려운 결정을 한 테오도라 원장수녀와 다섯 명의 동료 수녀들은 프랑스를 떠나 1840년 10월 22일 저녁 미국 인디아나 주의 세인트 메리 오브 더 우즈(Saint Mary-of-the-Woods)에 도착했다. 새로운 사명의 땅에 도착한 그들은 즉시 진흙탕과 좁은 길을 따라 성당으로 사용할 작은 통나무 오두막집으로 발걸음을 재촉했다. 그곳에 무사히 도착하여 안전한 여행에 감사하며 새로운 사명을 위해 하느님의 축복을 청하는 미사를 봉헌하기에 앞서 무릎 꿇고 기도를 바쳤다. 깊은 숲속 산골짜기 협곡에 위치한 구릉지에 테오도라 원장은 모원과 학교를 설립하였고, 그들이 남긴 사랑과 자비와 정의의 유산이 오늘날까지 계속되고 있다. 슬픔과 평화의 시간을 보내면서 테오도라 원장은 하느님의 섭리에 굳게 의지하며 현명하게 수녀들을 이끌었다. 그녀는 수녀들에게 “하느님의 손길에 부드럽게 자신을 맡기라”고 강조하였고, 프랑스로 보내는 편지에서도 “우리의 희망은 하느님의 섭리 안에 있고, 하느님의 섭리는 지금까지 우리를 지켜주었고, 우리의 미래에 필요한 것을 어떻게든 마련해 줄 것”이라고 언급하였다.
테오도라 수녀 일행이 도착한 1840년 가을, 세인트 메리 오브 더 우즈의 현실은 작은 통나무 오두막집 성당과 사제를 위한 숙소 그리고 작은 규모의 농장이 전부였다. 이곳에서 테오도라 원장 수녀는 프랑스에서 함께 온 수녀들과 다른 몇 명의 지원자들과 함께 살았다. 처음 맞이한 겨울 내내 북쪽에서 불어오는 매서운 바람이 작은 농장을 뒤흔들었고, 수녀들은 종종 추위와 굶주림을 겪어야 했다. 하지만 그들은 성당 입구를 변경해 보잘것없는 모원이지만 성체성사의 현존 안에서 위로를 받을 수 있게 하였다. 그녀는 “예수님과 함께라면 무엇이 우리를 두렵게 하리오?”라고 말했다. 사실 사도직 초기에 수많은 시련들이 몰려왔었다. 가톨릭을 반대하는 편견, 특히 여성 수도자들에 대한 편견, 배신과 오해, 프랑스 본원과의 분리 작업, 참담한 화재로 모든 수확물을 잃고 곤궁함과 굶주림에 시달리며 때때로 생명의 위협을 느끼는 질병 속에서 살아야 했다. 이런 상황에서도 테오도라 원장은 “모든 것 안에서 그리고 모든 곳에서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질 것”이라는 희망을 안고 견디어냈다.
세인트 메리 오브 더 우즈에 도착한 지 일 년이 못 되어 테오도라 원장은 수녀회의 첫 번째 학교를 개교하였고, 1842년 인디아나 주의 재스퍼(Jasper)와 일리노이(Illinois) 주의 세인트 프랜시스빌(St. Francisville)에도 학교를 열었다. 1856년 5월 14일 선종할 때까지 테오도라 원장은 인디아나 주 전역에 학교를 설립했고, 천주 섭리의 수녀회 또한 더 강한 생명력을 갖고 발전하며 높은 평가를 받았다. 테오도라 원장은 수녀회의 성장과 성공에 대해 항상 하느님과 예수님의 어머니인 성모 마리아의 공으로 돌렸다. 테오도라 원장의 성덕(聖德)은 그녀를 아는 사람들 안에서 명백히 드러났고, 많은 사람들이 그녀를 ‘성인 같은 사람’으로 생각했다. 그녀는 사람들 안에서 그들이 생각할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얻도록 가장 좋은 것을 끌어내는 탁월한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사랑은 테오도라 원장수녀가 지닌 가장 큰 특징 중 하나였다. 그녀는 하느님과 그분의 백성, 천주 섭리의 수녀회 수녀들과 가톨릭 교회 그리고 그녀가 섬겼던 모든 사람들을 사랑했다. 또한 자신의 사도직과 기도로부터 누구도 배제하지 않고, 사람들이 하느님을 알아 더 나은 삶을 살도록 돕는데 일생을 바쳤다. 테오도라 원장은 그녀 혼자 할 수 있는 것은 없지만 하느님 안에서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녀는 시련과 고난 그리고 부당한 대우마저도 기회로 받아들였고, 괴로움의 한가운데서 진실하고 충실한 하느님의 여인으로 남았다. 테오도라 수녀는 세인트 메리 오브 더 우즈에 도착한 후 16년 만에 세상을 떠났지만 그 기간 동안 수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였다. 그녀가 다음 세대에 물려준 선물은 성덕과 덕행, 사랑과 신앙의 모범으로서 그녀의 삶 자체였다. 테오도라 원장수녀는 1998년 10월 25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시복되었고, 2006년 10월 15일 교황 베네딕투스 16세(Benedictus XVI)에 의해 바티칸의 성 베드로 광장에서 다른 세 명의 복자들과 함께 그를 시성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