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의 이름은 이도(李祹), 자는 원정(元正)이다.
시호는 장헌(莊憲). 능호는 영릉(英陵). 묘호는 세종(世宗).
우리가 태정태세 문단세 예성연중 인명선...으로 외웠던 것은 묘호(廟號)다.
종묘사직이라고 하는 종묘(宗廟)에 모실 때 올리는 호다.
아이, 머리 아파~~~
서오릉에 있는 명릉에는 숙종과 인현왕후, 인원왕후를 아울러서 명릉이라 부르지만
고개 넘어 익릉에는 숙종의 원비 인경왕후 혼자 누워있다.
그러고 보니 서오릉에는 장희빈을 포함하여 숙종이 품었던 여자 4명이 있다.
죽어서도 복도 많어 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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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하나.
본인은 등극하지 못했지만 아들이 등극하여 왕으로 추존된 왕이 있다.
성종의 아버지 의경세자가 묻혀 있는 경릉,
인조의 아버지 정원군이 잠들어 있는 장릉,
정조의 아버지 사도세자가 묻혀 있는 융릉이 그것이다.
왼쪽이 인수대비가 잠들어 있는 곳. 오른쪽은 의경세자가 잠들어 있는 곳
경릉 이야기가 나왔으니까 이야기 하고 넘어갈 것이 있다.
장희빈이 누워있는 대빈묘를 비켜 세우며 양지바른 언덕바지에 우람하게 조성된 묘역이 있다. 경릉이다.
헌데, 능의 주인공 덕종의 능은 빈약한데 그의 비 소혜왕후의 능은 웅장하다.
조선 왕릉 중에서 가장 도드라진 여성 상위가 그대로 표출된 왕릉이다.
왜 그럴까?
역사를 더듬어 보면 알 수 있다.
조카 단종을 폐하고 왕위에 오른 수양대군은
왕권을 안정시키지 위하여 일찍이 도원군을 세자를 책봉했다. 의경세자다.
아버지의 쿠데타를 달갑지 않게 생각하던 의경세자가 시름시름 앓더니만 세상을 떠났다.
왕비를 꿈꾸며 동궁에서 살았던 세자빈(훗날 인수대비)은
두 아들 월산대군과 자을산군을 데리고 명례궁(훗날 덕수궁)으로 나왔다.
세상의 민심은 원한에 사무친 단종의 어머니가 데려갔다는 흉흉한 소문이 횡횡했다.
수양대군은 서둘러 둘째 아들 해양대군을 세자에 앉히고 수양이 세상을 떠났다.
아버지 세조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해양대군(예종)마저 즉위 13개월 만에 죽었다.
왕비자리를 손아래 동서에게 내주고 칼을 갈고 있던 인수대비가 한명회와 손잡고
그의 둘째 아들 자을산군을 왕위에 밀어 올렸다. 성종이다.
이때부터 조선은 청주 한씨 세상이 되었다.
인수대비 친정아버지 한확의 묘역에 세워져 있는 신도비각. 경기도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에 있다.
능내리라는 지명도 왕릉급으로 조성된 한확의 묘에서 유래한다
죽은 자는 말이 없다.
- VJA --*--+
*웅장하게 조영하는 것은 후세 사람들의 몫이다.
권세를 부리던 청주한씨들은 인수대비의 아버지 한확의 묘를 왕릉 못지 않게 웅장하게 조성했으며
권세를 안겨준 인수대비 묘를 조선 최대의 묘역으로 조영한 것이다.
이와 같은 현상은 파평윤씨에게 권세를 안겨준 문정왕후 묘역 태릉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소윤과 대윤으로 갈려 피 터지게 싸웠지만 세도를 누리던 파평 윤씨는
문정왕후 묘역을 조선 최대의 묘역으로 조영했다.
청주 한씨들이 가지고 있던 기록을 갈아치운 것이다.
문정왕후가 잠들어 있는 태릉. 세조 이후 사라졌던 병풍석이 등장했고 문인석과 무인석을 비롯한 석마, 석호, 석양, 혼유석 등 석물이 크고 웅장하다. 왕릉은 시대 사조에도 영향을 받았지만 국장 당시 권문세가의 위세를 자랑하는데 이용되었다.
서오릉 권역에서 가장 드라마틱한 왕릉은 홍릉(弘陵)이다.
조선왕실에는 홍릉이 2기 있다.
영조의 원비를 모신 홍릉(弘陵)과 명성황후를 모신 홍릉(洪陵)이다.
서오릉 권역의 홍릉은 영조의 원비 정성왕후를 모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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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수리의 몸에서 태어난 영조는 장희빈 등쌀에 바람 앞에 촛불 같은 삶을 살았다.
얼마나 가슴 졸이며 살았는지 훗날 영조는 사가에서 살 때 문풍지만 흔들려도 가슴이 떨렸다고 술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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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종제의 딸로 태어난 정성왕후는 12세 때 연잉군과 혼인했다.
이 때 그의 아버지는 진사였다.
정실 몸에서 태어난 세자나 왕자라면 권문세가 집안의 규수를 간택했겠지만
별 볼일 없는 무수리 몸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미천한 집 규수를 맞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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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희빈의 아들 경종이 일찍 승하하자 연잉군이 즉위하고 그녀가 왕비가 되었다.
그녀의 시어머니 숙빈최씨는 조선 최고의 신데렐라였지만
그녀 역시 그에 못지않은 행운녀였다.
하지만 행운도 여기까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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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히 내명부를 지키던 왕후는 65세를 일기로 경희궁에서 승하했다.
어려울 때 같이했던 왕비가 죽자 영조가 직접 자리 찾기에 나섰다.
그가 고른 곳이 지금의 홍릉자리다.
거하게 국장을 치른 영조는 바로 옆자리에 사후지지를 마련하고
‘내가 죽거든 여기에 묻어주라’ 는 말을 남겼다.
아들을 뒤주에 가둬 죽인 영조가 승하하고 정조가 등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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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오릉 권역에 있는 홍릉. 영조가 들어갈 자리가 비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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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사도세자의 아들이다.”
등극 일성을 터뜨린 정조는 할아버지 영조가 원했던 정성왕후 옆자리를 외면하고
동구릉 권역에 있는 자리에 묻어버렸다.
오늘날의 원릉(元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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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조와 정순왕후 김씨가 묻혀있는 원릉 자리는
물이 고인다고 효종을 여주로 천장하고 버려둔 흉지(凶地)였다.
영조의 염원은 희망사항일 뿐 결정권은 정조에게 있었던 것이다.
죽은 자는 선택권이 없다.
묻어주는 데로 묻혀야 한다.
조선 왕릉은 묻힌 자의 위용인 것 같지만 묻은 자의 권력이다.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도 고향 함흥에 묻히기를 원했지만 동구릉에 묻혀 있고
아버지 곁에 묻히기를 소망하며 살아생전 대모산 아래를 의망한 세종도 여주에 묻혀있다 - 펌 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