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징 여행6 - 명나라 성벽 중화문을 보며 도시의 유래와 주원장의 통일을 회상하다!
10월 20일, 난징시 남쪽에 梁武帝(양무제) 때 운광법사가 경전을 講(강) 할때 천신이 감동해
하늘에서 꽃이 비처럼 내린 곳이라고 하여 雨花臺(우화대) 라고 불리는 언덕이 있으니
20세기 현대사 에서는 국민당 정부때 공산당원 10만명이 처형된 사형장으로 지금은
우화대열사릉원 (雨花臺烈士陵園) 이라고 불리는데....... 혁명열사의 기념관이 자리합니다.
위화타이레스링위엔 공원을 나와 택시를 타고 중화문 에 내리니 거대한 성벽과 육중한 성문이
보는 사람을 압도하니 중화먼 中华门 (중화문)은 명나라 초기 만들어진 난징성 13개의
성문중에서 가장 크고 보존 상태가 좋으니 폭이 120m 에 깊이가 130m 인 4중의 성문입니다.
4개의 문 사이 27개 藏兵洞(장병동) 에 숨은 3천 병사가 적을 유인해 千斤閘(천근갑)
이라는 문짝을 떨어뜨려 퇴로를 차단하고 전멸시킨데서 옹성 이라
불린다는데 그러니 어떤 군대가 이 견고하기 그지없는 성문을 공격할수 있을까요?
난징 南京(남경) 은 손권이 오나라 수도(건업) 로 삼은 이래 동진, 송, 제, 양, 진, 남당을 거쳐
주원장의 명나라 수도 로 번창했으니 칭장 長江(장강) 남쪽에 길이 33km, 높이 12m
남짓한 명대 초기 성벽 으로 둘러 쌓여 있는데 아직도 일부 성벽은 이처럼 남아있는 것이네요?
중화먼 中华门(중화문) 을 보면서 도시의 유래를 생각하니 난징 은 전국시대에 초(楚) 나라의
금릉읍 이었으며 삼국시대 229년 오나라의 손권이 건업 이라고 개칭하여 도읍을 정한
뒤 부터 강남의 중심지로 발전하였으며..... 318년에는 동진(東晋)의 원제 가 도읍하였습니다.
송(宋)· 제(齊)· 양(梁)· 진(陳) 의 4대에 걸쳐 남조 왕조의 국도 가 되어 문화의 중심지로 번영
하다가 589년 수(隋) 나라에 의해 멸망되면서 파괴됐고 당나라 때에는 금릉(金陵) 으로
불리다 오대십국(五代十國) 때 강녕부로 개칭한후 남당(南唐) 20여 년의 도읍지가 되었습니다.
남송(南宋) 때에 건강부, 원나라 때는 집경로, 1368∼1421년 명(明)나라 도읍지가 되어 응천부
(應天府) 라고 하다가 뒤에 남경(南京) 으로 불렸는데 34km 의 성벽도 축조되니 1441년
에 도읍지가 베이징(北京) 으로 옮겨진 뒤 청(淸) 나라 때에는 강녕부(江寧府) 로 불리었습니다.
난징을 수도로 정하고 중화문을 세운 이는 명나라 태조 주원장 인데 그가 태어난 1328년은
원나라 황실에서 아리바가가 천순제로 즉위하자 토그 티무르 가 폐위시키고 황제가 됩니다.
이후 황족끼리의 골육상잔으로 옥좌의 향방이 엎치락 뒤치락하며 원제국의 두 수도인 대도와
상도 그리고 카라코룸 사이에 피바람이 불자 억눌려 있던 한족들의 반란 이 일어납니다.
원나라 재정의 80퍼센트를 충당하면서도 “남인” 이라고 낮은 대우를 받던 강남 지역의 한족들
의 불만 이 하늘을 찔러 양자강 해적들이 강북으로 가던 세금 운반선들을 차단합니다.
원왕조의 재정이 급속도로 악화되자 진압하려고 토벌대 를 보냈으나 문란해진 군 기강과
물싸움에는 약한 몽골군의 특성 때문에 성과가 없자 지방은 무법천지로 변하게 됩니다.
소작농의 아들 주원장 은 참담한 유년 시대를 보내던중 17세가 되던 1344년에는 기근까지
휩쓸어 부모와 형이 영양실조 전염병 에 걸려 세상을 떠나고 형제들은 뿔뿔이 흩어집니다.
주원장 은 살기위해 황각사 절 에 들어갔지만 끼니가 충분할리 없으니...
바로 탁발승 이 되어 떠도는 비렁뱅이 생활을 4년간 하게 됩니다.
1351년에 백련교도 를 주축으로 한 “홍건적”이 봉기하고 양자강 일대가 세력권이 되면서
“망할 놈의 세상을 한 번 뒤집어 보자”는 민중의 목소리가 결실을 보는 듯 싶었습니다.
주원장 도 시류에 동참해 안휘성 홍건적 곽자흥의 수하 로 들어가 재능은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해 곽자흥의 양녀인 마씨 처녀와 혼인도 치렀는데 그녀는 후일 마황후 입니다.
주원장 은 곽자흥이 죽은후 대장이 되었고 송나라 황실의 후예를 자처하며 봉기했던 홍건적
두령 한산동의 아들인 한림아 가 송(宋) 을 세우자 인정하여 부원수의 직함을 받습니다.
더욱 세력을 키운 주원장 은 1356년에 집경(남경) 을 점령하고는 “응천부”로 개명하고
본거지로 삼으니... 홍건적 3대 세력 (장사성, 진우량, 주원장) 의 하나로 발돋움 합니다.
3명의 반란 세력 가운데“장사성은 재정이 풍부하고 진우량은 병력이 강했으나...
주원장은 특별히 내세울 장점이 없었다.”
그래서 누구나 강남을 제패할 세력은 장사성 아니면 진우량 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주원장에게도 장점이 있었으니 원나라에서 천대받으며 묵묵히 학문에만
정진해온 강남의 선비 들이 주원장의 응천부 로 찾아와 힘을 보탰던 것입니다.
장사성이나 진우량은 무력만 중시하며 선비들의 "말과 글" 이 갖는 힘을 돌아보지 못했지만
주원장은 그 잠재력을 제대로 읽었으니 천하쟁패의 싸움에서 최종 승리자가 될수 있었습니다.
송렴, 유기, 장일, 섭침 등 “4대 선생”을 비롯한 선비 들은 주원장에게
“명분을 뚜렷이 내세우고 민심을 잡으라”는 조언을 했습니다.
주원장 은 이를 받아들여 송나라의 후예라는 한림아 를 떠받드는 한편, “절대로 백성들을
괴롭히지 마라. 백성을 괴롭히는 자는 지위가 높아도 처단하겠다”는 엄명을 내립니다.
“북방 오랑캐의 압제를 물리치고 중화를 회복한다”는 구호를 내세웠으며 우선 강남을
평정하기 위해 다른 홍건적의 북벌에는 동참하지 않고 강남에서 세력을 늘리는데 힘씁니다.
이 홍건적들의 봉기가 남의 나라 먼산의 불이 아니라 우리나라에도 영향을 미쳤으니
강소성과 산동성 및 화북지방의 홍건적은 북상하여 원나라 수도인 대도 를 위협하기도 했으나
원나라군에 격파되어 남쪽으로 퇴로가 막히자 엉뚱하게도 만주를 지나 고려를 침공 합니다.
1,359년 모거경의 홍건적 4만으로 압록강을 넘어 평양을 함락 했으나 격퇴당하자 1,361년
다시 20만의 무리가 강을 넘어와 평양에 이어 수도 개성 을 점령하니 공민왕은
안동으로 피신하는데 다음해 고려군의 사력을 다한 반격에 패하고 도주해 소멸해 버립니다.
이처럼 홍건적 북벌군 은 원나라군에게 격파되고 그러느라 원나라도 지칠대로
지쳐서 막상 주원장이 본격적으로 북벌 에 나서자....
막을 힘이 없었습니다. 한마디로 주원장은 어부지리를 취하게 된 것이지요?
그러므로 주원장이 “말로만 중화 회복을 내세우면서 철저히 기회주의적으로 행동했다”는
비판도 있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다면 천하통일은 커녕 목숨 보전도 힘들었을지 모릅니다.
당시 강남은 가장 동쪽에 장사성, 가장 서쪽 무창 지역의 서수휘, 그리고 북으로 한림아,
남으로 진우량 의 세력권이 있고 그 가운데 주원장의 영역 이 자리잡은 형태였습니다.
그런데 진우량 이 서쪽의 서수휘를 무찌르고 그 땅을 차지하고는....
장사성 에게 “힘을 합쳐서 주원장을 해치우자”고 제의합니다.
주원장과 친했던 북쪽의 송왕 한림아 는 원나라의 공격 으로 눈코 뜰 새 없는
상황이라 사면초가가 된 주원장은 서둘러 남쪽으로
전력을 집중시켜서는 오히려 먼저 진우량에게 선제공격 을 가하게 됩니다.
허를 찔린 진우량은 패배했으나 전열을 정비하고 역습해 대함대가 파양호에서 세기의
결전 을 벌이니 적벽대전을 능가하는 전투에서 주원장은 가까스로 승리를 거둡니다.
이후 장사성 에게로 창 끝을 돌려 1년 동안의 공방전을 거듭한 끝에 승리하니 1367년으로
얼마후 소명왕 한림아를 암살(?) 하고 황제에 즉위하니 국호는 대명(大明) 입니다.
다음 순서는 북벌 이니 서달 을 총사령관으로 하는 20만 대군이 북상하자 1368년 원순제
토곤 티무르 는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한채 북경을 버리고 몽고 본토로 달아납니다.
중화문 藏兵洞(장병동) 과 千斤閘(천근갑) 을 구경하고 성벽을 걸어보고 싶지만
시간이 없는데다가 입장료도 터무니 없이 비싸니 포기하고는 고풍스러운
골목길을 10여분을 걸어며 물어서 공자의 사당인 夫子廟(부자묘) 를 찾아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