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인한 4월
이 용 우
“타이타닉호가 침몰한 날이 언제인지 아느냐. 가지 않았으면 좋겠구나…” 여객선을 타고 제주도로 수학여행을 떠난다는 딸에게 어머니는 타이타닉호의 비극을 이야기 하며 출발을 만류했다. 하지만 한창 꿈 많고 발랄한 사춘기 소녀는 “친구들과 꼭 가고 싶다”며 설렘을 감추지 못했다. 어머니의 불길한 예감이 맞아 떨어졌는지, 결국 딸은 돌아오지 않았다.
1912년 4월 10일, 승객과 승무원 등 2200여 명을 태우고 영국 사우스햄프턴을 출항해 미국 뉴욕으로 항해하던 호화여객선 타이타닉호. ‘신도 침몰시킬 수 없는 배'로 불리던 이 배는그러나 15일 오후 11시 40분 북대서양 뉴펀들랜드 남서쪽 바다에서 짙은 안개 속에 유빙과 충돌하면서 침몰했다. 이 사고로 770여 명이 구조됐지만 1513명이 숨졌다.
1985년 한 해양탐험가에 의해 처음 발견된 타이타닉은 심해 4000m 아래에 선체가 두 동강 난 상태였다. 타이타닉의 정확한 침몰 원인과 과정은 아직도 미스터리로 남아 있다. 후대 사람들은 4월15일을 타이타닉 기념일로 삼고, 자연에 대한 인간의 오만과 소홀에 대한 경계를 늦추지 않고 있다.
2014년 4월15일은 바로 타이타닉 침몰 102주년이 되는 날이었다. 그 의미를 간과한 탓인가. 하루가 지난 4월16일 우리나라 진도 해상에서 대형 여객선 세월호가 침몰하는 참사가 벌어졌다.
세월호 침몰사고는 국내 사상 최악의 해운참사 가운데 하나로 기록됐다. 그동안 한국의 선박사고 중 가장 많은 인명피해가 난 사고는 1970년 12월 14일 발생한 남영호 침몰사고. 당시 남영호는 승객 338명과 감귤 등을 싣고 제주 서귀포항을 출항해 부산으로 항해하던 중 침몰했으며 326명이 사망했다. 적재량을 넘어선 과적과 항해 부주의, 대응 미숙 등이 원인이었다.
1993년 10월 10일 발생한 서해페리호 침몰사고는 모두 292명의 사망자를 냈다. 정원이 221명이었지만 사고 당시 선원 등 총 362명이 승선한데다 기상 악화를 무시한채 출항하는 등 대표적인 인재(人災)로 기록됐다. 1987년 6월에는 경남 거제군 남부면 다포리 해상에서 관광객 86명을 태우고 가던 24t급 목조선 급동호가 화재로 침몰해 관광객 27명이 숨지고 8명이 실종됐다.
해외에서도 선박사고로 최대 수천 명이 사망하는 사건이 많이 발생했다. 타이타닉 침몰사고는 영화로 만들어져 유명하지만 인명피해 면에서 역대 최악의 여객선 참사는 1987년 12월 20일 필리핀 앞바다에서 유조선과 충돌한 여객선 도나파즈호 침몰사고다. 유조선에서 발생한 화재가 여객선으로 옮겨 붙으면서 2시간 만에 배가 가라앉았다. 이 사고로 무려 4341명이 사망했다. 생존자는 26명뿐.
다음으로 인명 피해가 컸던 사고는 1948년 12월 중국 키앙야호 사고. 상하이 남쪽 해상에서 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군이 설치해놓은 기뢰에 부딪히며 침몰해 3920명의 희생자를 냈다. 이밖에도 2002년 9월 세네갈 줄라호 전복사고로 1863명이 희생됐고, 1954년 9월 일본 도야마루 페리 사고로 1172명의 탑승객과 승무원들이 사망하는 등, 1천 명이 넘는 인명피해 사고가 꽤 많다.
세월호 침몰은 사고 자체도 그렇지만 수습과정에서 전형적인 인재(人災)로 나타나고 있다. 특히 선장과 승무원들이 사고가 발생하자 승객들보다 먼저 대피한 것으로 알려져 비난이 빗발쳤다. 선장(69)은 가장 먼저 탈출 행렬에 합류했는데, 그는 최초로 선박 좌초 신고가 접수된 지 40여분 뒤 배 밖으로 나왔다.
한국 나이로 70세인 이 선장은 휴가를 떠난 원래 선장(47)을 대신해 사고 선박을 몰았으며, 사고 당시 항해를 신참 항해사에게 맡기고 자신은 침실에서 쉬고 있었던 것으로 밝혀졌다. 이에 따라 그가 '대리 선장'이어서 무책임하게 가장 먼저 배를 버리고 나온 것 아니냐는 비난이 일고 있다.
이와 대비되는 해외 사례는 참으로 본받을만하다.
1912년 4월 타이타닉호 침몰 당시 선장이었던 에드워드 스미스는 마지막까지 승객 탈출의 임무를 책임졌다. 그의 고향인 영국 리치필드에서는 배와 운명을 함께한 스미스 선장의 동상을 세우고 동판에 "영국인답게 행동하라(Be British)"는 그의 마지막 말을 새겼다. 또한 얼마 되지 않은 2009년 1월15일 미국 뉴욕 허드슨강에 불시착해 승객 150명과 승무원 5명을 구한 US에어웨이 여객기의 기장 체슬리 설렌버거(63) 사례도 유명하다.
이런 예는 승객의 생명을 책임 진 선장이나 승무원들이 긴급상황에서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지 보여주는 좋은 예다. 승객을 제쳐두고 탈출에 앞장 선다는 것은 상식 밖의 일이다.
세월호 선장과 같은 행동을 보여준 사례도 있다. 2년 전인 2012년 1월 이탈리아 해안에서 호화유람선 코스타콩코르디아호가 승객 4229명을 태우고 가다 암초에 부딪히면서 승객 32명이 사망했다. 이때 사고가 터지자마자 탈출한 선장 셰티노는 경찰에 체포됐고 과실치사 등의 혐의로 구속됐다. 검찰은 배에 남은 승객 300여 명을 버리고 도망친 직무유기죄를 적용해 승객 1인당 약 8년형씩 도합 2697년형을 구형했다.
세월호 사고 수습과정을 보면서 많은 생각을 해본다. 달나라를 가고 전 세계에서 실시간으로 채팅을 주고 받는 이 첨단과학시대에 참사현장을 바로 눈앞에 두고도 속수무책, 발만 굴러야 하는 우리 인간은 얼마나 허약한 존재인가. 아무리 과학이 발달하고 인간의 수명이 연장된들 사람이 마음을 잘못 먹으면 그 모든 것이 아무 의미가 없어지는 것이다.
이번 사고로 희생된 어린 영혼들의 명복을 빈다. 못 다 펼친 꿈과 희망을 저 세상에서 활짝 펼치길 기원한다. 찬란해야 할 4월이 왜 이리 잔인한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