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서 매국노 하면 이구동성으로 이완용이라고 한다. 군주 시대에 서슬 퍼런 임금 지시 없이 총리대신이 매국을 할 수가 없다. 이완용은 하수인이고 일본 천황과 이토로부터 뇌물을 받고 병합을 지시한 고종이 매국노이다. 미국 9.11테러를 일으킨 하수인 모하메드 아타보다 지휘자 빈 라딘 죄가 무겁듯이 매국을 지시한 고종의 죄가 중하다. 국가 멸망은 국가간 합병이나 침략을 받아 멸망하는 것이 보통이다. 참새는 짹소리라도 하고 죽는데 조선은 총 한 발 쏘지 못하고 일본에 갖다 바쳤다. 언론에서 궁중 상황을 몰랐거나, 병합이 임금 지시라는 것을 감히 주장하지 못해 매국노는 이완용이라고 했다고 본다. 망국의 지도자는 전쟁에서 죽거나 평민으로 살아가는데, 고종은 호의호식하며 여생을 마쳤다.
고종은 무능하고 우유부단하여 국제 정세 판단도 못 하고 국가, 국민을 팽개치고 왕가만 챙겼다. 미국, 영국, 프랑스, 영국 공사관에 11년간 7번이나 피신 요청을 하고, 패권국 영국에 대항하는 러시아 공사관(아관파천)에 피신했다. 일본은 서양 문물과 화승총을 들여와 부국강병을 이루었는데, 조선에서는 활용하지 못하고 재정이 바닥나 군대 양성도 못 했다. 1907년 당시 중앙군 4,215명, 지방군 4,305명, 헌병대 265명 등 총 8,785명의 빈약한 군대에 비해 러일전쟁 당시 일본은 120만의 대군과 강력한 해군을 보유하고 있었다. 힘이 약한 조선은 러시아, 청, 일본 세 나라의 먹잇감이었고, 승전한 일본이 지배자가 되었다. 국제관계에 국익은 있지만 자비도 없고 힘이 정의다. 영양을 사냥하는 것이 사자에겐 정의이다.
고종은 철종이 승하하자 12세의 나이로 즉위(1863년)해서 부친 대원군이 섭정하다가 10년 후 친정을 선언했다. 민비(명성황후)와 결혼한 고종은 대원군의 개혁정책을 폐지하고 노론과 민비 외척 여흥 민씨들을 기용했다. 동학란(1894년)을 진압하기 위해 청나라에 도움을 요청하자 일본군도 파병하여 청일 전쟁으로 일본군이 승리했다. 청일 전쟁에서 패배한 청은 조선 종주권을 포기하고 일본의 조선에 대한 영향력은 확대되었다. 민비는 일본을 견제하기 위하여 친러파를 기용하자 일본군은 민비를 살해(1895년 을미사변)하고 친일파를 동원하여 내각을 장악하자 고종 임금은 러시아 대사관으로 피신(1896년 아관파천)하였다.
고종은 조선을 대한제국(1897년)으로 선포하고 국호를 대조선국에서 대한제국으로 변경하였다. 외부대신 이지용(1904년)은 고종을 회유하는 활동비 1만 원을 일본 하야시에게서 받아, 궁내부 특진관 이근택, 군부대신 민영철과 황제를 설득하여 조선을 일본 군사부지로 사용하는 한일의정서(1904년)를 체결하였다. 이토 히로부미(1904년)는 고종에게 천황 선물 30만 엔(현시가 375억 원)을 헌납하고 경부선철도, 경의선 철도 지분 보장과 궁중 참석자들에게 50만 엔과 귀중품을 전달했다. 고종은 일본 공사관 전 직원 훈장 수여, 이토에게 최고 훈장인 금척대수장을 수여하고 수행원 전원과 일본 해군 2명에게 훈장을 수여했다. (엔 = 원)
하야시 공사는 조선에 대해 재정 고문과 외교 고문의 초빙을 강요하면서 제1차 한일협약(1904년)의 체결을 강압했다. 이에 조선 정부에서는 일본인 재정 고문 1명과 일본이 추천하는 외교 고문 1명을 초빙하며, 외교 관계의 처리는 미리 일본 정부와 협의를 거친다는 내용의 제1차 한일협약을 조인했다. 그 결과, 재정 고문에 메가다가, 외교 고문에 스티븐스, 군사고문에 노즈, 경무 고문에 마루야마 등이 취임하여 조선은 사실상 일본의 속국이 되었다. 러일전쟁(1904년)에서 승리한 일본은 가쓰라 태프트 협약, 영일동맹과 포츠머스 조약을 체결해 미, 영, 일, 러시아로부터 한반도 지배를 인정받았다.
이토(1905년)는 일본 왕 친서를 들고 조약을 체결하기 위하여 궁궐 안팎에 무장 군인을 배치하고 어전 회의에 참석하여 조약 체결을 강권했다. 어전 회의에서 결론이 나지 않자 고종은 조약 체결은 외부대신 소관이니 “짐의 뜻대로 잘 조처하라”고 조약 서명을 허락하고 자기가 지시하지 않았다고 말하라고도 지시했다. 참정대신 한규설, 탁지부대신 민영기, 법부대신 이하영은 조약에 반대하고 나머지 학부대신 이완용, 군부대신 이근택, 내부대신 이지용, 외부대신 박제순, 농상공부대신 권중현은 강압에 일부 수정을 조건으로 찬성했다.
이또는 황제 명령을 근거로 대신들을 압박하여 을사늑약(1905년. 외부대신 박제순:일본 공사 하야시 곤스케)을 체결했다. 고종은 조약을 주도한 박제순을 의정 대신(총리) 서리에 임명하고 반대한 한규설을 파면했다. 을사늑약을 체결하여 외교권을 강탈하고 통감정치가 실시되기 전인 하야시 공사(1905년)가 기밀비 10만 원으로 황실 자금(내탕금)에 2만 원(현재 가치 25억 원), 황제 시종에게 3천 원, 법부대신 이하영에게 3천 원을 제공했다. 조약 조인 후 이완용, 이근택, 이지용에게 2만 원, 기타 대신에게 15,000원을 주고 잔액 39,000원은 반납한다는 하야시의 보고가 있다. 이토가 조선 정부에 300만 원을 뇌물로 나눠줬다는 기록도 있다.
고종은 일본 사절단에 훈장을 수여하고, 군의관 등 65명을 표창했다. 일본은 한일합방 기념 은사금으로 3천만 엔(현재 가치 5천억 원)을 조선에 기부했다. 조정은 이 돈으로 고위관료, 유생, 효자, 빈곤자, 과부, 고아 등에 뿌려 의병 운동 없이 합병은 지나갔다. 헤이그 밀사 사건(1907년)으로 고종이 퇴위하고 순종이 즉위했다. 대한제국 국권을 장악하는 정미7조약(1907년)이 체결되어 통감정치가 실시되었다. 한일합방조약(1910년. 내각총리대신 이완용:총감인 데라우치 마사타케)이 체결되어 대한제국의 통치권은 일본에 넘겨졌다. 일제는 총독부를 세워 초대총독으로 데라우치를 임명하였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