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란 쿤데라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나는 아주 힘들게 읽었다. 아마 그 한 권의 소설을 읽는데 한달 쯤 걸렸던 것 같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단숨에 재미있게 읽었다는 사람을 만나면 나는 괜히 주눅이 들었다. 내가 지진아가 아닐까, 하는 의심이 들었던 것이다. 내가 그 소설을 힘들게 읽은 것은 이야기의 선조적 진행에서 자꾸 곁길로 빠져나가 밑도끝도 없이 형이상학적 진술을 풀어내는 밀란 쿤데라의 서사 전략이 낯설었던 탓이다. 손에 잡으면 끝까지 읽고 마는 내 책읽기의 관습으로 보자면, 몇 번씩 읽기를 멈출 수밖에 없었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은 대단히 힘들게 읽은 책의 하나로 기억된다. 소설인지 에세이인지 분간할 수 없을 정도로 장르의 경계를 넘나드는 파스칼 키냐르의 『은밀한 생』을 읽을 때도 다시 그 어려움은 되풀이되었다. 끼냐르의 소설은 어렴풋하고 모호하다. 하지만 겁먹을 필요는 없다. 시간이 좀더 필요할 뿐이다. 나는 단상의 포식자가 되어 키냐르의 소설들을 천천히 씹어 삼킨다. 어렵게 읽었다고 해서 두 소설의 매혹을 과소평가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 두 소설을 읽을 때 나는 여담의 서사적 전략에 대해, 아니 그것의 "범람 효과"에 대해 무지했었다는 사실을 고백할 수 있다.
여담은 담론이 핵심에서 벗어난 횡설수설, 혹은 곁가지 이야기이다. 담론의 중심에서 벗어날 때 종종 우리는 담론을 제대로 통제하지 못한 저의 부주의함을 부끄러워하고 미안해한다. 여담의 운명이란 "자가당착·변덕·경박한 자의성·허술함·혹·주변부·깜짝쇼·길 잃은 방황"이다. 그 곁가지 이야기가 텍스트에서 수행하는 전략에 대한 두터운 연구서가 나왔다. 란다 사브리가 쓴 『담화의 놀이들』이 그것이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며 놀란다. 우선 지금까지 "여담을 공인된 문학적 기법으로 간주하"는 책을 한번도 읽은 적이 없다. 지금까지 여담에 부여된 주변적 지위는 그것을 건너뛰어 읽어도 괜찮은 것으로 당연시되었다. 란다 사브리는 텍스트의 미적 통일성에 균열을 일으키며, 담론의 진로를 바꾸고 탈선을 조장하는 비이성적 객설에 작가 자신도 미처 인지하지 못한 이토록 깊은 서사의 전략이 숨어 있음을 밝혀낸다.
앙리 모리에의 사전은 여담을 이렇게 정의한다 ; "여담 : 작가가 주제에서 멀어져서 어떤 일화나 추억을 서술하고 풍경이나 예술 작품 등을 묘사하여 거기에 의외의 전개부를 제공하는 담화의 전략. 여담은 다양한 의도에 부응할 수 있다. 그것은 이야기의 여백에 있는 이야기이다. 1)여담은 너무 메마른 주제로 피로해진 독자가 기분을 전환할 수 있는 시간을 제공한다. 2)작가는 행복이나 불행을 예고한 후 초조하게 그것을 기다리고 있는 독자를 애태우기 위해 여담을 일종의 정지법으로 사용할 수 있다. 여담을 조심하라. 여담은 사건들의 끈을 놓치게 하고 줄거리의 통일성 깨뜨리며, 때로는 독자를 지루하게 만든다. 하지만 여담은 다뤄진 주제에 격렬하거나 침착하게 도달하기 전에 기분 전환, 긴장 완화를 창출하고자 하는 변론가나 변호사에게 유용할 수 있다."
문학 담론들에는 어느 정도 주제나 형식의 측면에서 꼭 그것과 들어맞지 않은 다소의 일탈이 있기 마련인데, 그것은 담론의 미학적 규범을 해치는 것으로 규정된다. 플롯에서 임의적으로 일탈해서 "샛길로 빠지고 담장을 넘는" 이야기는 서사의 여러 요소들이 하나의 핵심을 향하여 정렬하는 응집력을 가져야 한다는 서사의 규범을 정면으로 위반한다. 비평가들은 텍스트를 분석할 때 직선으로 진행하는 주제의 운동만을 따라갈 뿐 주제의 응집력을 풀어헤쳐 놓고 직선에서 일탈하는 여담적 현상은 무시해버린다. 비평가들은 주제를 벗어나는 요소들에 대해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인다. 여담의 거부는 그것이 주제에서 비켜 서 있는 뜻없는 행위의 결과물이며, 그것을 지우는 것이 텍스트 이해에 도움이 된다는 논리로 정당화되었다. 아리스토텔레스 이래 현대까지 수사학과 문학 이론가들은 주제에서 벗어나는 여담을 해석적 독서에 방해물이 된다는 이유에서 단죄하고 추방해버렸다. 그러나, 여담은 텍스트의 다성성(多聲性)과 비결정성을 높이 평가하는 현대 비평가들에 의해 그 가치가 비로소 발견되었다.
여담은 담론이 나타난 태초에서부터 담론의 내부에 존재하는 요소이다. 담론의 미학적 규범들로 분류되는 "질서·목적성·필연성·일관성" 들은 텍스트의 완성도에 기여하는 "이성 중심적 가치들"이다. 이성 중심적 가치들에 반기를 드는 여담·수다·잡담들은 텍스트의 통제되지 않은 무정부적인 요소들, 즉 언제나 불필요한 잉여, 혹은 무질서의 과잉으로 여겨진다. 여담의 존재론적 표상과 형태들은 "황당한 연상, 기억의 공백과 장애, 다소간 유용한 삽입구들의 미친듯한 증가, 불쑥 떠오른 훌륭한 생각들, 방향 상실, 갑작스런 단절로 귀착되는 표류, 어쩔 줄 몰라 내뱉는 '내가 어디까지 했지 ?'라는 말" 등등이다. 한마디로 담론 내부에서 여담이란 하위 범주에 위치한 샛길로 빠지는 이야기, 쓸데없는 군더더기이다. 그런데, 란다 사브리는 그 무가치한 것으로 평가절하되는 여담이 텍스트의 내부에서 담화의 전략으로 기능하는 것을 논리적으로 밝히고, 여담을 서사의 한 전략으로 복권해낸다. 란다 사브리가 여담을 주목하는 것은 "한 텍스트 안에서 어떤 것도 무의미하지 않고 어떤 것도 우연적으로 그냥 존재하지 않는"다는 믿음에서 비롯된다.
여담은 주제를 향한 직선적 지향성에 대해 딴지를 걸고, 작품의 선조적(線條的) 진행에 대해 훼방을 놓으며, 결말을 끊임없이 유예한다. 텍스트 안에 기생하는 작은 텍스트들을 보여줌으로써 독자의 긴장을 누그러뜨린다. 결과적으로 주제에서 벗어나 느슨하고 풀어헤쳐진 일탈의 순간을 향유하게 한다. 여담은 중심에 대한 주변부의 깐죽거리기이고, 이성에 대한 비이성의 조롱하기, 질서에 대한 무질서의 도발이다. 그것은 미숙한 글쓰기의 결과물이 아니라 서사의 과잉, 단절, 불연속의 전략의 산물이다. 여담은 텍스트와 곁텍스트, 안과 밖, 현실과 픽션의 경계를 옮기며 궁극적으로 서사의 배열법의 엄격한 위계의 질서를 흩트러 놓는 것을 목표한다. 몽테뉴에서 밀란 쿤데라, 아니 『은밀한 생』을 쓴 파스칼 키냐르에 이르기까지 텍스트가 여담으로 뒤죽박죽 헝클어지는 것의 즐거움과 이점을 잘 알고, 그걸 활용한 작가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