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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역한글과 개역개정 비교
-정체성(Identity定體性), 정체성(Identity正體性), 동일성(Identity同-性)개념을 중심으로-
1. 시작하는 글.
2007년 7월 현 교황님은 ‘가톨릭만이 교회이고 종교개혁이후 생겨난 교회는 교회가 아니라’2)고 말하셨습니다. 이런 말씀 배경에는 많은 사람들이 과학과 기술과 수학이 결합된 현시대를 중세와 유사하다고 말하면서 중세와 관련시켜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2008년 6월 잭슨(Maggie Jackson)님-〔이하에서는 권위자체(authority)까지도 부정하는 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한 대안으로서 “님”자를 사용하고자 합니다〕-은 디지털 정보로 인한 혼란으로 “新중세 암흑기”3)가 올 수도 말했습니다. 과학철학자인 찰머스(Alan Chalmers)님은 ‘과학이 과거 기독교를 대행하고 있다’4)고 말하는데, 이것은 ‘과학과 인문학이 최전선에서 만난’5) 상황에 대한 우회적 표현입니다.
번역에서도 과학을 중심으로 학문을“「統攝Consilience」”6)하자고 말하는데 이 말을 칼빈은 “하나님께 속한 경륜aetero Dei consilio”7)이라고 이미 언급했습니다. 이제 이러한 내용들은 “역사적 기본개념(Geschichtliche Grundbegriff)”8)으로 보면 중세시대에는 신학이 모든 학문과 문화를 주도했던 것처럼 현 시대 기술․수학․과학이 하나로 결합되어, 모든 학문과 문화를 지배하고 있다고 생각하기에 중세와 거의 같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연신학(theologia natulalis)9)을 기반으로 하는 가톨릭은 ‘일종의 과학’10)이기에 화해라는 이름으로 이미 과학과 손을 잡았습니다.11) 중세에서 <바늘위에 천사가 몇 명이나 앉아 있을까?>에 대한 논쟁은 중세를 비판하는 전형적인 문구인데, 현대에 와서 양자적 시공간에서는 ‘전자입자 스핀 각도를 이용하면 한 점 위에 올라앉을 수 있는 천사 숫자를 헤아리는 행위가 무의미하지 않다’12)고 말합니다.
“영화적 가톨릭주의”라는 용어도 생겨났고13), 풀러 신학교 로버트 존 스톤님은 ‘영화를 통한 건전한 이미지 신학을 통한 아퀴나스적 신학을 시도해야한다’14)고 말합니다.
이러한 상황을 종합해서 에코(Umberto Eco)님은 ‘토마스 아퀴나스 저서를 오랫동안 연구하고 중세문명과 TV 인터넷 등에 오랜 관심을 갖고 연구’15)해온 결과, 우리 시대에 대해서 “포스트모던인가 새로운 중세인가”16)라고 질문합니다.
에코님이 ‘새로운’이라는 단서를 붙이면서 새로운 중세라고 묻는 이유는
첫째, 포스트모더니즘으로 인해서 모든 것이 상대화 되면서 이제 종교까지도 ‘인간 스스로 알아서 하는 종교’17)가 되면서 “종교융합”18)으로 나아감으로 말미암아 절대성 자체까지도 혼란스럽다는 것입니다.
둘째 ‘ “중세문명은 시각문명이다”고 규정하면서 성당을 돌로 된 책이나, 선전 플랑카드 TV 스크린 기능’19)으로 평가한 에코님이 이렇게 말한 것은 이제 절대성을 추구를 하기는 해야 하는데, 과학․기술․수학에 대한 여파로 “포스트휴먼(posthuman)”20)이라는 용어도 생겨나면서 ‘공통적인 인간성에 대한 근본 문제’21)까지도 제기 되는 이 시대는 위험하다는 것입니다.
버트하임(Margaret Wertheim)님은 아예 ‘시각적 이미지를 현저하게 강조하는 사이버 공간을 중세 연옥(Purgatory) 공간으로 평가’22)합니다. 이러한 문화 상황에서 오직 하나님 말씀을 듣고 그것이 은혜라고 여기면서 교회를 하나님 말씀으로 새롭게 하고자 했던 개혁교회 정신을 바로 살려서 ‘오직 성경’을 말하면서 성경 번역을 했던 그 정신을 살리면서, 개역한글과 개역개정 성경을 비교해 보는 것은 아주 중요한 일이라고 여겨집니다.
2. 문제제기.
2011년 3월 12일 오후 2시 ○○신학원에서 현재 101세이신 방 지일님이 설교를 하셨습니다. 중국어로 설교를 하시는 중에, 통역자가 통역을 이상하게 하면 “통역이 이상하다”고 말씀하시고 다시 통역을 하면서 설교가 진행되었습니다.
이 내용에서처럼 현장에서 구어로 통역․번역을 하는 과정에서는 실수를 하거나 이상하면 서로 대화를 해서 수정이 가능합니다.
그리고 통역․번역자가 서로 이중 언어를 할 수 있으면 별 문제가 없습니다. 그러나 문자로 번역을 하는 과정에서는 이러한 협의 과정이 생략되고, 오직 번역자에게만 의존해야 하고, 번역자가 가진 가치관과 사상에만 의존해야 하는 어려움이 있습니다.
그래서 이러한 번역에 대한 어려움에 대해서 로빈슨(Douglas Robinson)님은 ‘성경 말씀 바벨탑 사건(창11:1-9) 을 언급하면서, 아이러니(irony)하게도 이 바벨탑 사건이 미국에서는 영어전용운동에 대한 입장을 지지하거나 언어에 대한 다양성을 공격하는 무기가 되기도 한다는 소식을 전하면서 “번역은 반역(traduttore traditire)”’23)이라는 말을 인용합니다.
그리고 ‘번역 하는 상황이 식민지 시대이거나 전쟁 상황일 경우에는 단순한 중재 차원을 넘어 심각한 책임성 문제와 더불어 종교텍스트를 번역하는 경우도 문제는 마찬가지라는 것’24)
도 거론하는 것은 번역자에게 “윤리적 의무”25)와 그 책임성은 대단히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2.1. 교회현장에서 들려온 번역문제와 하나님 그리고 믿음.
00교회 2000년 1월 30일 제 4호 주일학교 주보 겉표지에 한글로 크게 “자연은 하나님의 지혜”라고 쓰고 그 밑에 영어로 “Nature is God’s Wisdom”이라고 번역을 했습니다. 여기서 “Nature is God’s Wisdom” 이라는 문장을 사용했을 때,26) 자연보호를 강조하기 위한 것 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논리를 확대하다보면, 요한일서 4장8절과 4장 16절에서 “하나님은 사랑이시라”(God is Love)라는 말씀을 “사랑은 하나님이시라”(Love is God)로 바꾸어도 문제가 없다는 논리가 성립이 되고 이는 범신론으로 가는 지름길입니다. 종교개혁자들이 개혁을 할 때, ‘초대교회로 돌아가자’라고 했을 때 인문학에서는 ‘그리스(철학)로 돌아가자’라고 했습니다.
거스리(W.K.C. Guthrie)님에 의하면 그리스인들에게 신(θεός/god)은 주로 서술적 기능으로 말합니다. 그리스인들은 이 데오스(θεός/god)에 대해서 자연이나 어떤 것으로부터 자기들, 인간자신들이 감화를 받거나 큰 힘을 경험했을 때, ‘능력은 신이다(Power is god)’ 혹은 ‘혹은 ‘사랑은 신이다(Love is god)’라고 표현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과 히브리인들은 그 반대로 ‘하나님께서는 사랑이십니다(God is love)’ 혹은 ‘하나님께서는 능력이십니다(God is power)’로 표현합니다.27)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행동하시는 주체이시기에 동사로 표현되고 다른 모든 신들은 대상으로 표현됩니다.28) 즉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으로부터 시작하지만, 그리스 전통에서는 프로타고라스님이 말한 “인간이 모든 만문에서 척도 πάντων χρημάτων μἐτρον ἄνθρωπον εἶναι”29)가 되어 인간이 신god을 규정합니다.
중세는 ‘사랑이 중심이었지만 종교개혁은 믿음’30)을 말했습니다. 현시대 역시 사랑을 강조합니다.
신약성경에서 믿음31)이라는 용어가 사용될 때는 구약과 연결되어 하나님 말씀에 아멘하는 사람, 항상 하나님과 그리스도께 속한 안에 믿음을 믿는 것과 관련이 있습니다.
2.2. 용어에 대한 정의:정체성(Identity定體性), 정체성(Identity正體性), 동일성(Identity)32).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롬3:25].”
밑줄친33) 부분을 두 성경은 똑같이 번역 했습니다. 이 본분에서 번역자는 철학적인 관념론적 정체성(定體性) 개념을 가지고 번역자 자신이 자기 마음대로 하나님 호칭을 정(定)했습니다. 타락전(前) 창세기 2장 19에서 하나님께서는 창조한 모든 것을 아담에게 이끌어 오시고 아담은 하나님 명령을 따라 그 대상에 이름과 의미를 규정하고 가치를 부여합니다. 그러나 타락후(後)에 철학적 관념론은 하나님 명령을 잊어버리고 프로타고라스가 말한 것처럼, 피조물임에도 불구하고 인간자신이 기준이 되어, ‘나는 긍정적이다. 나는 할 수 있다’는 자기긍정적 자존감을 통해서 자기 마음대로 하나님을God을 신god으로 규정합니다. 타락후 이러한 관념론적 정체성(定體性)은 계몽주의에서 극단으로 나타납니다. 이것은 평전청명(平田淸明)님이 시인 하이네님과 칸트님을 로베스피에르님과 비교한 말을 재인용해서
“후자는 국왕의 목을 자른에 불과하지만, 칸트는 초월신(超越神)의 목을 잘랐다.「순수이성」이야말로 그 칼이다」”34)
는 말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타락후 죄인이라는 것을 철저하게 수용하면서 인식하는 관념론적 정체성에는 동의합니다.
그러나 무한 한 이성을 사용해서 인간이 주체가 되어, 하나님 이름까지도 인간이 정(定)하고, 가치를 부여하는 이러한 정체성을 가진 번역행위는 재고해야 합니다. 이러한 번역 행위는 신학과 윤리적 바른 행위라는 측면에서 말하는 정체성(正體性)도 아니고, 또한 지속적이고 일관된 형이상학적 동일성(Identity)도 아닙니다. 즉 같은 본문 내에서 ‘하나님이’ 혹은 ‘하나님께서’라고 번역하는 행위는 신앙적 정체성에 문제가 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성령감동으로 바울 사도께서 수동․능동으로 고백한 ‘제가 저 된 것은 하나님 은혜입니다(고전15:10)’는 것이 바른 정체성입니다. 이것은 하나님 말씀․듣는 어거스틴적 “기억하는 힘(Vis memoriae)”35)을 통해서 바울․어거스틴․칼빈으로 이어지는 통합적인 정체성〔(Identity 定體性)․정체성(Identity正體性)․동일성(Identity)〕입니다.
이 개념을 통해서, 개역한글과 개역개정을 비교하고자 합니다.
3. 개역한글과 개역개정에 대한 통계 비교.36)
3.1. 전체적인 통계37)
구약은 창세기부터 말라기까지 총 23,144절에서 개역한글을 개역개정이 번역할 절수는 20,040절로서 86.59%를 번역했고, 번역을 하지 않고 개역한글과 개역개정이 똑같은 절수는 3,104절로서 13.41%입니다. 신약은 마태복음부터 요한계시록까지 총 7,957인데, 개역한글을 개역개정이 번역한 절수는 6,080절로서 76.4%를 번역했고, 번역을 하지 않고 개역한글과 개역개정이 똑같은 절수는 1,877절로서 23.6%입니다. 신구약 전체를 합하면 총 31,101절로서 개역개정이 번역을 한 절수는 26,120으로서 83.98%를 번역을 했고, 번역을 하지 않고 개역 한글과 개역개정이 똑같은 절수는 4,981절로서 16.02%입니다. 이제 비교하는 과정에서 나타난 몇 가지 특징들을 살펴보기로 합니다.
3.2. 존칭어에 관한 번역비교.
우리말에서 존칭어에 대한 사용은 자기와 타인에 대한 정체성을 잘 표현하는 말인데 이 용어가 삼위일체 하나님과 관련된 호칭에서 어떻게 번역되었는지 알아보겠습니다.
3.2.1. ‘하나님’과 ‘여호와’에 관한 호칭문제38)
존 로스(J. Ross)선교사님은 번역할 때, 존칭 개념을 염두에 두고 번역을 했습니다. 그 당시에는 띄어쓰기가 없었으나 “하나님”, “예수님”이라는 이름 앞에서는 한칸씩 띄어서 존경을 표했습니다. 예를 들면 마태복음 1장 1절에서 “압라함의자손빗의후예 ○예수키스토의족보라압라함이이아삭”라는 식으로 띄어쓰기 없이 글을 쓰다가 <예수님>이라는 이름 앞에서는 ‘한 칸을 띄고 번역’39)을 했습니다. 로스 선교사님이 행한 번역행위를 언급하지 않더라도 ‘하나님․ 여호와’와 관련된 호칭이 얼마나 중요한지 우리는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 여호와’와 호칭이 나올 때는 무릎을 꿇고 기도하고 붓을 빨고, 읽을 때는 ‘아도나이로 읽어야한다’40)는 것을 배울 때 신학하는 자부심과 감격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우리성경 번역본에서는 하나님 호칭 문제에서 ‘하나님’ 혹은 ‘하나님께서’가 혼용되어 번역이 되었습니다. 개역한글 개역개정 모두 ‘하나님이’라는 칭호가 훨씬 많은데, 개역한글에서는 ‘하나님께서’라는 호칭은 51회, 개역개정에서 ‘하나님께서’ 라는 호칭은 130회를 사용하고 있습니다.41) 예를 들면 창세기 41장 16절에 요셉이 바로에게 말하는 장면에서
개역한글은 “하나님이”라고 번역하고, 개역개정은 “하나님께서”라고 번역합니다.
이런 경우는 ‘여호와’에 대한 호칭문제에서도 ‘하나님’이라는 호칭 문제와 동일하게, 정체성(定體性․ Identity)도, 정체성(正體性․Identity), 동일성(Identity)도 없습니다. 두 성경에서 ‘여호와’라는 호칭이 자주 언급되는데, 우리말 격조사 사용에 따라서 개역한글에서는 ‘여호와께서’는 2023회, ‘여호와가’는 419회, ‘여호와는’은 147회입니다. 개역개정에서 ‘여호와께서’는 2287회, ‘여호와가’는 200회, ‘여호와는’은 144회입니다.
여기에서 “여호와께서”라는 존칭에 대해서 개역개정이 조금 더 신중을 기해서 264회를 더 사용하고 있는데, 이 차이는 대부분 이사야부터 말라기에서 나타납니다. 개역한글은 489회, 개역개정은 655로 차이는 166회가 언급됩니다.
3.1.2. 〔가라사대〕와 〔이르시되〕에 대한 번역비교.
앤스컴(G. E. M. Anscombe)은 비트겐슈타인(Ludwig Wittgenstein)이 쓴「철학적 탐구」를 맨 처음 영어로 번역했는데, 이 번역행위가 중요한 것은 핵심적인 단어들을 오래된 옛날 말로 번역을 했다는 사실입니다.
그는 비트겐슈타인이 자기 책 도입부분에서 논리학에서 중요한 용어 개념을 성 어거스틴이 쓴 「고백록 Confessions」한 부분에서 빌려온 것을 깨닫고 이렇게 한 것인데, 입니다. 이러한 번역행위는 세속주의가 지배하는 영미철학계에 경종을 울린 번역행위’42)였습니다.
이러한 번역 관점은 변화무쌍한 이 시대에도 쉽게 간과할 문제가 아닙니다. 그 이유는 우리 성경 번역 개역한글과 개역개정을 한번 비교해 보면 신앙적 전통성-〔이 말은 가톨릭이 말한 성경과 동일시하려는 전통이라는 의미가 아닙니다〕-과 정체성을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개역한글성경은 창세기부터 계시록까지 〔가라사대〕와〔이르시되〕를 혼용해서 번역하지만, 개역개정에서는 창세기부터 계시록까지 〔가라사대〕라는 어휘는 한 번도 언급하지 않고, 모두 〔이르시되〕라는 어휘로만 번역을 했습니다.
차이가 나는 부분은 개역개정에서 ‘말씀하시되’라고도 번역을 한 것 때문입니다. 이 번역 행위에서 〔가라사대〕라는 옛 용어가 완전히 없어졌다는 것은 중요한 문제지만, 개역개정이〔이르시되〕와 ‘이르되’를 구별해서 번역한 것은 고무적인 일입니다. 즉 “하나님․여호와”께서는 〔이르시되〕로, 여호수아나 다윗 등이 말한 경우는 ‘이르되’를 구별해서 번역했습니다.
․ 삼상23:2 : 이에 다윗이 여호와께 묻자와 이르되 ……
여호와께서 다윗에게 이르시되 가서 블레셋 사람들을……
․ 행22:10: 내가 이르되 주님 무엇을 하리이까 주께서 이르시되 일어나 다메섹으로…
개역한글 삿 20:18 | 개역개정 삿 20:18 |
이스라엘 자손이…하나님께 묻자와 가로되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유다가… | 이스라엘 …하나님께 여쭈어 이르되…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
여기서 두 성경은 ‘묻자와 가로되’로, ‘여쭈어 이르되’라고 번역을 합니다. 그 다음에 ‘여호와께서 가라사대’와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로 번역합니다. 우리성경에서 〔가라사대〕라는어휘는 히브리어 아마르 (예: 창1:3, 6:3, 암 5:3 등)와 다바르 (예: 창8:15, 사7:10등)를 주로 번역한 말입니다.
이 부분에서 ‘말씀하시되’라는 부분은 아마르 인데, 여기서는 ‘이르시되’라고 하지 않고 ‘말씀하시되’라고 번역했습니다. 이제 맨 처음 범죄 후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와 대화하는 부분을 보십시다.
개역한글 창 3:12-13 | 개역개정 창 3:12-13 |
아담이 이르되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 있게 하신 여자 그가 그 나무 열매를 내게 주므로 내가 먹었나이다 여호와 하나님이 여자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찌하여 이렇게 하였느냐 여자가 이르되 뱀이 나를 꾀므로 내가 먹었나이다 | 아담이 이르되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 있게 하신 여자 그가 그 나무 열매를 내게 주므로 내가 먹었나이다 여호와 하나님이 여자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찌하여 이렇게 하였느냐 여자가 이르되 뱀이 나를 꾀므로 내가 먹었나 |
앞에 사사기 에서는 ‘묻자와 가로되’로, ‘여쭈어 이르되’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본문에서는 두 성경 모두 ‘이르되’로 번역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라고 하지 않고 ‘하나님’이 라고 반(半․semi)존칭어로 말합니다.
그리고 ‘나와 함께 있게 하신’에서 ‘나’라는 말은 우리말에서 반말도 되고, 평범한 말도 됩니다. 지금 아담과 하와가 죄 지은 후 하나님께 대답하는 장면입니다. 또 한 ‘나’라고 했으면 일관되게 ‘나와 함께 있게 한 여자’라고 해야 되는데, 앞에서는 ‘나’라고 말하고 뒤에서는 존칭어미 〔시〕를 사용해서 “있게 하신”으로 번역했다면 앞에서도 “제가”라고 말해야 합니다.
3.2. 조사 〔의〕를 통한 비교.
한국어 조사에서 〔의〕는 너무나 문제가 심각해서 “폭탄(의) 뇌관”43)이라고 말합니다.44) 이 만큼 심각한 이유는 ‘일반적으로 조사〔의〕는 속격조사, 혹은 소유격, 그리고 관형격 조사’45)로 이해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에서 〔의〕를 소유격 조사로 이해하면 ‘하나님께 속한 나라’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주체가 되기에 문제가 없습니다. 그러나 〔의〕를 관형격으로 이해하면 핵심어는 뒤에 있는 ‘나라’가 주체가 되어 ‘하나님’이 나라를 꾸며주는 보조역할을 하게 되기 때문에 ‘나라;가 중요하기에 신학적으로 심각한 문제가 발생합니다.
3.2.1. 〔의〕에 대한 번역에 관해서 신학계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들.
김문기님은 루터가 로마서 1:17절에서 ‘하나님의’에 대한 속격을 “목적에 대한 속격(genitive objectivus)”으로 이해하고 이 의(義)는 인간이 주체적으로 얻는 ‘의(義)’가 아니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수동적인 것’46)이라고 평가합니다.
이필찬님도 ‘예수 그리스도의’라는 해석을 ‘목적격적 소유격’으로 해석해서 요한계시록 1장 1절을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해석’으로 번역할 것인지, 주격적 속격으로 해석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신 말씀’으로 번역할 것인지를 말합니다.47)
이러한 목소리와 함께 본 연구자는 이미 「기독교강요」(1559) I. II. III. IV. 권 전체에 표현된, ‘주격Deus’ 1002회, ‘속격Dei ’ 2846회를 분석 비교하여 ‘속격Dei ’가 약 3배 정도 많기 때문에 이 부분에 대한 번역에 신중해야 할 것을 제안한바 있습니다.48)
칼빈은 우리에게는 본래 죄성(罪性)이 있다는 것을 말하면서 속격에 대해서 ‘우리는 우리가 행위를 하지만 우리에게 속한(nostra)49)이라는 소유대명사는 원래 우리 것이 아니지만, 하나님께서 주셔서 우리 것이 된다’50)고 말합니다.
이제 뇌관이 장착된 폭탄 같은이〔의〕를 어떻게 번역했는지 개역한글과 개역개정을 비교해 보면 더 잘 알 수 있습니다.
3.2.2.〔의〕에 대한 번역을 통해서 본 정체성 문제.
〔의〕에 대한 번역문제는 창세기부터 계속된 갈등입니다.
3.2.2.1. 하나님과 관련된 〔의〕에 대한 번역.
개역한글에서는 창1:4을 “그 빛이 하나님의 보시기에”고, 개역한글에서는 1:4에서는
〔의〕를 주격으로 번역해서 “그 빛이 하나님이 보시기에”로, 창세기 1장 10, 12, 18, 21, 25도 같은 경우입니다. 에스겔 10장 5절 “하나님의 말씀하시는 음성”을 개역개정은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음성”으로 주격으로 번역했습니다. 계속 더 살펴봅시다.
개역한글 출애굽기 | 개역개정 출애굽기 |
5:1 그 후에 모세와 아론이 가서 바로에게 이르되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에 내 백성을 보내라…… 32:27 모세가 그들에게 이르되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 5:1 그 후에 모세와 아론이 바로에게 가서 이르되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렇게 말씀하시기를 내 백성을 보내라…… 32:27 모세가 그들에게 이르되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렇게 말씀하시기를 |
문제는 이 두 본문에서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라는 원문이 “코 아마르 예흐와 엘로헤 이스라엘 laer;c]yI yhel> hw:h rm'a; AhKo”로 똑같습니다. 그런데〔의〕혹은 존칭어 “께서”가 붙으면서 달라집니다. 신약성경에서 ‘하나님’과 관련된〔의〕는 주격 “데오스θεός”로 총 323이고, 속격 “데우qeou'”는 총 711회입니다.51) 몇 본문에서 원문은 속격인데, 〔의〕로 번역도 하고 주격으로도 번역한 경우를 알아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개역한글: 행2:23 그가 하나님의 정하신 → 개역개정: 그가 하나님께서 정하신 :혼용
․개역한글: 요10:36 나는 하나님 아들이 →개역개정: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혼용
․개역한글: 요19:7 하나님 아들이라 →개역개정: 하나님 아들이라 : 주격.
․개역한글: 히10:29 하나님 아들을 밟고 → 개역개정: 하나님 아들을 밟고: 주격.
․〔의〕에 대한 번역 때문에 삼위일체론에서 문제가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개역한글 요한복음 1:14절 | 개역개정 요한복음 1:14 |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 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 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
여기서는 모두 〔의〕를 사용해서 번역을 했는데, ‘아버지’ ‘독생자’는 모두 속격입니다. 문제는 ‘ 아버지의 독생자의’라는 사이에 전치사 파라para;가 있어서 ‘모노게누스 파라 파트로스monogenou'" para; patrov"’인데, 이것이 살며시〔의〕속에 묻혀버린 경우입니다. 그런데 같은 전치사 파라para; 가 있는 본문인 요한복음 1:6절에서 ‘파라 데우para; qeou’를 개역한글은 “하나님께로서”로 개역개정은 “하나님께로부터”라고 번역을 했습니다.52)
같은 요한복음 안에서 이런 번역 행위가 있었다는 것은 정체성(定體性․正體性)뿐만 아니라 일관된 동일 정체성에서 문제입니다. 또한 신약에서 “그리스도”라는 칭호는 총 578회 사용됩니다. 주격(Χριστὀς)으로 118회, 속격(Χριστου)으로 278회가 언급됩니다.
여기서도 속격이 주격보다 많기에 우리는 이 속격에 대한 번역에 함부로 〔의〕를 붙여서 이것이 뇌관이 있는 관형격인지, 속격인지 오해를 불러일으키는 번역을 하면 문제가 있다고 판단됩니다.
마태복음 1장 1절에서, ‘그리스도’께서는 속격(Χριστου)인데, 두 성경 모두 ‘그리스도의’로 번역을 했습니다. 이 본문에서 ‘다윗’도 ‘아브라함’도 속격이고 ‘자손’도 속격입니다. 그러므로 이 본문에서 ‘같은(=)’53)속격이 사용되고 있지만, 그리스도께 사용된 속격과, 다윗, 아브라함에 사용된 속격은 그 의미와 범주(category)가 다르다는 것을 인식하고 번역행위를 해야합니다.
같은 마태복음 11장 2절을 보면 그 이유가 확실해 집니다. 이 본문 역시 ‘그리스도’께서는 속격(Χριστου)인데, 개역한글에서는 ‘그리스도의’로 번역을 하고, 개역개정에서는 ‘그리스도께서’라고 번역을 했고, 22장 42절에서도 속격(Χριστου)인데, 여기서는 두 성경 모두 ‘그리스도에 대하여’54)라고 번역을 했고, 요한복음 1장 17절에서도 역시 속격(Χριστου)인데, 두 성경 모두 ‘그리스도로 말미암아’라고 번역을 했습니다.55)
그런데 이 문제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라는 본문으로 확대해 보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kurivou hJmw'n !Ihsou' Cristou는 모두 속격’56)입니다. 그런데 번역은 모두 주격으로 했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속격을 어떻게 번역해야 할 지 좋은 단서를 제공해 주기도 하지만, 이 문구가 나올 때는 하나님 아버지와 관계 속에서, 사용된 경우가 많기에 삼위일체와 연관을 두고 번역을 해야 합니다
개역한글 예레미야 16:14 | 개역개정 예레미야16:14 |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 여호와 의 사심으로 맹세하지 아니하고 |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 여호와께서 살 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지 아니하고 |
이 본문도 같은 장절 내에서 일어난 문제입니다. 개역한글에서는 ‘ 여호와께서’를 개역개정에서는 ‘ 여호와의’로 번역하고, 후반부에서는 개역개정에서 ‘여호와의’로 번역한 부분을 개정개정은 ‘여호와께서’로 번역했습니다.
3.2.3. 일반적인 〔의〕에 대한 번역을 통해서 본 정체성
․개역한글:스2:61; “바르실래의 딸 중에 ”→ 개역개정“바르실래의 딸 중의 ”
․개역한글:겔1:2; “여호야긴 왕의 사로잡힌 지”→개역개정은 “ 여호야긴 왕이 사로잡힌 지”
두 성경은 〔의〕를 동일하게 번역하거나, 주격으로 번역하기도 했습니다.
․《‘유다 땅’과 ‘유다의 땅’ 과 》: 두 성경 모두 ‘유다 땅’으로 24회57) 번역을 하고, 단 한
곳 이사야 19:17절에서만 두 성경 모두 ‘유다의 땅’으로 번역을 합니다.
․《‘유다 왕’과 ‘유다의 왕과》: 개역한글성경은 ‘유다 왕’으로만 180회, 개역개정은 ‘유다
왕’으로 103회, ‘유다의 왕’으로 50회58)로 혼용해서 번역을 했습니다.
․《‘이스라엘 왕’과 ‘이스라엘의 왕’과 》: 개역한글은 ‘이스라엘 왕’으로 192회, 개역개정은
145회, ‘이스라엘의 왕’으로 개역한글은 14회, 개역개정은 61회 언급됩니다.
위 본문들은 형식은 같은데, 이렇게 차이가 납니다. 이러한 차이가 있는 혼용도 문제지만 동일한 절 내에서 ‘유다 왕’ 혹은 ‘유다의 왕’으로 번역한 경우도 있다는 것입니다.
개역한글 왕상 12:27 | 개역개정 왕상 12:27 : 혼용한 경우59) |
이 백성의 마음이 유다 왕 된…… 나를 죽이고 유다 왕 르호보암에게로 …… | 이 백성의 마음이 유다 왕 된…… 나를 죽이고 유다의 왕…… |
그런데〔의〕를 사용하지 않고도, 두 번역본 모두가 같이 번역한 경우가 있습니다.
․ 왕하15:13 : 유다 왕 웃시야 삼십구년에 : 개역한글 개역개정 모두 〔의〕가 없습니다.
3.2.4. ‘너’와 관련된〔의〕에 대한 정체성문제.
개역한글/여호수아 | 개역개정 |
1:5 ……너의 평생에 1:11 /13……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 1:5 ……네 평생에 1:11/13……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
개역한글에서 창세기부터-계시록까지 ‘너의’는 326회, ‘네’는 3342, ‘너희의’는 328회인데, 개역개정에서 창세기부터-계시록까지 ‘너의’는 124회, ‘네’는 3478, ‘너희의’ 458회입니다.
개역한글 렘13:21 | 개역개정 렘13:21 |
13:21 너의 친구 삼았던 자를 그가 네 위 에 수령으로 세우실 때에 네가 무슨 말을 하겠느냐 【너의】 고통에 잡힘이 구로하 는 여인 같지 않겠느냐 | 13:21 너의 친구 삼았던 자를 그가 네 위 에 우두머리로 세우실 때에 네가 무슨 말 을 하겠느냐 【네가】 고통에 사로잡힘이 산고를 겪는 여인 같지 않겠느냐 |
같은 본문 안에서 언급된 문제입니다. 그런데, 한 본문에 ‘너의’, ‘네’, ‘네가’, ‘너의’라는 용
어가 모두 함께 등장합니다. 이러한 갈등은 성경 번역 전체에 확산되어 있습니다. 개역한글
창세기부터 계시록까지 ‘너의 하나님’은 32회, ‘네 하나님’은 237회, ‘너희의 하나님’ 15회, 개역개정에서 창세기부터-계시록까지 ‘너의 하나님’은 13회, ‘네 하나님’은 261회 , ‘너희의 하나님’ 107회입니다.
3.2.5. ‘나’와 관련된〔의〕에 대한 정체성문제.60)
30여년 이상을 영문학자로 살아오신 이재오님은 왜 ‘우리 영한사전에는 “I”라는 번역에 “저(의)”, “제(가)”라는 존칭어가 없는 것에 문제 제기’61)를 합니다. 우리 말 사전에는 ‘나’라는 어휘만 있고, ‘나의’라는 어휘는 없습니다. 그리고 한영사전에도 마찬가지입니다.62)
그런데 어떤 영한사전에는 ‘my’라는 항목에 “《I 의 소유격》나의” 라고 설명 한 후에 빨간 색★를 하고 “다음과 같은 용법에 주의할 것”이라고 경고를 하고 나서 영어 예문을 쓰고 다음과 같이 번역을 하고 있습니다.
“My train 내(가 타고 있는〔있던〕) 열차”라고 설명을 했습니다.63) 그런데 우리말에서는 “내”는 1인칭입니다. 개역한글 창세기부터-계시록까지 ‘나의 하나님’은 76회, ‘내 하나님’은 56회입니다.
개역개정에서 창세기부터-계시록까지 ‘나의 하나님’은 69회, ‘내 하나님’은 61회로, ‘제 하나님’은 없습니다. 다음을 봅시다.
개역한글 아가서 5장 1절 | 개역개정 아가서 5장 1절 |
나의 누이, 나의 신부야 내가 내 동산에 들어와서 나의 몰약과 향 재료를 거두고 나의 꿀송이와 꿀을 먹고 내 포도주와 내 젖을 마셨으니 나의 친구들아 먹으라 나의 사랑하는 사람들아 마시고 많이 마시라 | 내 누이, 내 신부야 내가 내 동산에 들어와서 나의 몰약과 향 재료를 거두고 나의 꿀송이와 꿀을 먹고 내 포도주와 내 우유를 마셨으니 나의 친구들아 먹으라 나의 사랑하는 사람 들아 많이 마시라 |
이러한 혼란은 아가서 5장 내내 계속됩니다. 5장 4절에서는 ‘나의 사랑하는 자가 문틈으로’를 개역개정은 ‘내 사랑하는 자가 문틈으로’번역을 했고, 5장 5절에서도 ‘나의 사랑하는 자 위하여’를 ‘내 사랑하는 자를 위하여’로 번역을 했습니다. 일관성이 없습니다.
3.2.6. 명사 복수(pl.)에 나타난 번역 동일성과 일관성을 통한 정체성 문제.
우리말에는 복수에 대한 개념이 뚜렷하지 않기 때문에 생긴 문제인데, 복수로 번역을 하기
도 하고 안하기도 합니다.
개역한글 전도서 12장 | 개역개정 전도서 12장 |
12:2 …해와 빛과 달과 별들이 …… 12:4 …음악하는 여자들은 …… 12:11 지혜자의 말씀은 … 스승의 말씀은 …목자의 주신… 12:12 내 아들아… 여러 책을 … 12:13 …이것이 사람의 본분이니라 | 12:2 …해와 빛과 달과 별들이 …… 12:4 …음악하는 여자들은… 12:11 지혜자들의 말씀들은 … 스승들의 말씀들은 …목자가 주신… 12:12 내 아들아… 많은 책들을 … 12:13 …이것이 모든 사람의 본분이니라 |
그런데 복수((pl.) 문제가 신학적으로 문제가 되는 본문은 요한복음 6장 28, 29절입니다.
개역한글 요한복음 6:28, 29절 | 개역개정 요한복음 6:28, 29 |
6:28 저희가 묻되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하나님의 일을 하오리이까 6:29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하나 님의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 하시니 | 6:28 그들이 묻되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하나님의 일을 하오리이까 6:29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하나 님께서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 하시니 |
이 본문에서 두 성경 모두 ‘일’이라고 단수로 번역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원문에 보면 6장 28절에 저들이 묻는 말은 ‘일들(에르가ἔργα/works)’ 이라고 복수로 질문을 하고, 29절에 예수님께서 답을 하실 때는 ‘일(에르곤ἔργον /work)’로서 단수로 대답을 하십니다. 즉 ‘하나님께 속한 일(속격)’을 예수님께서 단수로 말씀하신 것은 여러 가지 행위들로 구원 받는 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려주는 본문이기에 단 복수 구별이 중요한 본문입니다.
3.2.7. 3인칭 번역에서 ‘그’와 그의’ 그리고 ‘자기’에 대한 번역을 통한 정체성.
두 성경 모두 ‘그’와 ‘그의’에 대한 번역에서 일치 혹은 불일치가 많습니다. ‘그의’로 일치하는 부분은 마: 1:2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고 …유다와 그의 형제를 낳고”입니다.64) 그러나 개역한글이 ‘그’로 번역한 부분을 개역개정이 ‘그의’로 번역한 부분도 많습니다. 마 1:18“예수 그리스도의 나심은 이러하니라 그 모친 마리아가”라는 부분을 개역개정은 “그의 어머니 마리아가”라고 번역했습니다.
그런데 우리에게 아주 익숙한 창 1장 27 “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라고 번역을 했습니다. 마태복음에서는 ‘그 모친’ 혹은 ‘그의 모친’이지 ‘자기 모친’으로 번역하지 않았습니다. 계시록에도 혼란이 있습니다.
개역한글 요한계시록 | 개역개정 요한계시록 |
14:8 …큰 성 바벨론이여 모든 나라를 그 음행으로 인하여 진노의 …… | 14:8 …큰 성 바벨론이여 모든 나라에게 그의 음행으로 말미암아 진노의…… |
이 본문에서 ‘그’, ‘그의’는 정확하게 ‘그 여자her’입니다. 그런데 구분하지 않았습니다. 17장 4절과 5절은 조금만 신경을 썼으면 바로 알 수 있는 문제인데, 이렇게 번역을 한 것은 우리에게 3인칭에 대한 의식․개념이 없다고 볼 수도 있고 번역자 오류일 수도 있습니다.
개역한글 | 개역개정 |
17:4 그 여자는 자주 빛과… 가증한 물건 과 그의 음행의 더러운 것들이 가득하더라 17:5 그 이마에 이름이 기록되었으니…큰 바벨론이라, 땅의 음녀들과 가증한 것들의 어미라 하였더라 | 17:4 그 여자는 자주 빛과… 가증한 물건 과 그의 음행의 더러운 것들이 가득하더라 17:5 그의 이마에 이름이 기록되었으니… 큰 바벨론이라, 땅의 음녀들과 가증한 것들 의 어미라 하였더라 |
4. 결론.
이상에서 두 성경을 비교 분석한 결과, 번역에 대한 일관성과 정체성이 부족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하나님․ 호칭과 관련해서 존칭어 부분과 그 다음에 사용된 동사어휘 존칭어 부분을 언급한 이유는 우리 민족이 지니고 있는 감성(感性) ․ 감성(感性) ․ 감정(憾情)구조65) 때문입니다.66)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마지막 용어인 감정(憾情) 때문입니다.
이‘감憾’자는 ‘한限’과 직결됩니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어떤 주제로 대화나 토론을 할 때, 서로가 좋은 감성(感性)이나 감성(感性)이 있을 때는 문제가 없습니다. 그러나 감성(感性)이나 감성(感性)이 상해서 감정(憾情)적이 될 때는 문제가 심각해집니다. 지금까지 했던 관계, 만남, 주제나 핵심은 어디로 가 버리고 “왜 당신 소리질러”라고 하는 감정(憾情)부분에만 집중을 하다가 보면 이제까지 좋은 감성(感性)과 감정(感情)은 어디로 다 가버리고 악한 감정(憾情)을 통한 감정(憾情)만 남는 경우가 대 부분입니다. 우리나라에서 이혼이 심각한 이유는, 이혼하고 나면, 이혼 당사 자 뿐만 아니라 가문(家門)끼리도 감정(憾情)이 상해서 만나지도 않기 때문입니다.
미국에서는 법에서 자녀를 위해서 한 달에 한 번씩 만나라고 해도 만나지만 우리는 ‘이 곳이 미국이냐’라고 하면서 법도 무시하고 한(恨)맺힌 자기 감정(憾情)에만 충실한 것이 문제입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존칭어에 대한 번역 부분과 마찬가지로 언제든지 속격, 혹은 관형격으로 번역되는 〔의〕에 대한 번역 문제 역시 감성(感性) ․ 감성(感性) ․ 감정(憾情)구조와 연결되어 번역행위에서 중요합니다. 좀 더 부연 설명하면 그 이유는 자기 감성(感性)과 자기 감정(感情)이 좋으면 ‘하나님께서’이고, 자기 기분이 나쁘고 감정(憾情)이 상하면 하나님도 반(半:1/2)만 존경하는 경우가 생깁니다.67)
우리 일상어 미덕(美德)이라는 어휘에 이 개념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여기서 미(美)는 감성이고, 덕(德)은 윤리,도덕 행위입니다. 그러므로 좋을 때는 미덕인(美德人)으로 좋은 사람이 되지만, 감정(憾情)이 상하면 바로 악덕인(惡德人)이 되기 때문에 감성적 잘못된 번역을 통한 설교나 가르침은 언제든지 우리 상황에서는 문제가 될 뇌관같은 가능성이 있기에 이러한 번역비교를 통해서 우리 신앙적 정체성을 점검해 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자라나는 세대가 “호감(好感)․비호감(非好感)”이라는 말은 단순한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명심하면서 이제 바른 번역을 통한 신앙적 정체성을 확립해야 합니다.
각 주
1) 윤천석은 현재 평택대학교 대학원, 칼빈대학교와 대학원, 호서대학교, 한민대학교에서 강의중입니다.
2) “교황 : 가톨릭 교회가 유일한 교회,” 「동아일보」2007년 7월 12일, A2면. 여기에 대한 자세한 평가는 다음을 참조바람. 김은홍, “로마 가톨릭 <교회론 문답> 분석” 「소리」2007년 7-8월호, 58-63.
3) Maggie Jackson, Distracted: The Erosion of Attention and The Coming Dark Age (New York: Prometheus Books, 2008), 14, 213.
4) Alan Chalmers, What is this thing called science? 「과학이란 무엇인가?」신중섭이상원 옮김 (서울:서광사, 2003),23.
5) John Brockman, The New Humanists-Science at the Edge「과학의 최전선에서 인문학을 만나다」안 인희 옮김(파주: 동녘사이언스, 2007). 저자는 서문을 “과학적 사고로 무장한 새로운 인문주의자들”(9-21)이라고 쓰고 있습니다.
6) 최 재천님은 이 어휘를 번역하는데, 5년여 시간이 걸렸고, 많은 불교학자들 성리학자들 인문학자들과 토론한 내용을 언급하면서 ‘consilience’라는 말을 ‘consiliere’에서 왔다고 말합니다. Edward O. Wilson, CONSILIENCE: The Unity of Knowledge「통섭」최재천․장대익 옮김 (서울: 사이언스 북스, 2005),8-25.
7) Calvini Opera Database 1.0, Vol. II. Institutio (Apeldoorn : Instituut voor Reformatieonderzoek, 2005). Inst.(1559), Vol. II. xii. 4. 342. 이하에서는 CO. Inst. 로 표기합니다.
8) Otto Bruner, Werner Conze, Reinhart Kosellk, Historisches Lexicon zur politisch-soziahen Sprache in Deutschland「코젤렉의 개념사 사전 1-문명과 문화」안 삼환 옮김 (서울: 푸른역사, 2010), 5.
9) Diogenes Allen, Philosophy for understanding Theology「신학을 이해하기 위한 철학」정재현 옮김 (서울: 대한 기독교서회, 1996) 23-7, 179, 221, 228, 232-9,
10) Diogenes Allen, 「신학을 이해하기 위한 철학」, 228, 232.
11) 다음 책을 보면 아주 잘 알 수 있는 제목을 굉장히 자극적으로 번역했습니다. Ronald L. Numbers ed., Galileo Goes to Jail and Other Myths about Science and religion 「과학과 종교는 적인가 동지인가」김정은 옮김(서울:뜨인돌, 2010),49-69. 실제로 제목을 이렇게 견고딕체로 굵게 했습니다.
12) Brian Greene, The Fabric of The Cosmos「우주의 구조-시간과 공간, 그 근원을 찾아서」박 병철 옮김(서울:승산, 2006), 176-8. 161-86.
13) Gregory Flaxman, ed. The Barain is the Screen「뇌는 스크린이다」박성수 옮김, (서울:이소, 2002), 34, 35, 529, 531.
14) Robert K. Johnston, Reel Spirituality: Theology and Film in Dialogue 「영화와 영성」 전의우 옮김, (서울: IVP, 2003), 111-3, 125, 89-147.
15) Jean Claude Carrière, Jean Delumeau, Umberto Eco, Stephen Jay Gould, Entretiens Sur La Fib Des Temps「시간의 종말-새로운 밀레니엄에 대한 네가지 종말」문지영 ․ 박지영 옮김(서울: 끌리오, 1999), 252.
16) Umberto Eco, Über Gott und die Welt 「포스트모던인가 새로운 중세인가」 조형준 옮김 (서울: 새물결, 1997), 3.
17) Jean Claude Carrière, Jean Delumeau, Umberto Eco, Stephen Jay Gould,「시간의 종말-새로운 밀레니엄에 대한 네가지 종말」, 260.
18) Umberto Eco,「포스트모던인가 새로운 중세인가」, 42.
19) Umberto Eco,「포스트모던인가 새로운 중세인가」, 22.
20) 김선희,「사이버시대의 인격과 몸」(서울:아카넷,2004),6.
21)Roger Trig, The Shaping of Man「인간 본성과 사회생물학-사회생물학의 철학적 측면을 논하다」김 성한옮김, (서울:궁리, 2007), 56.
22) Margaret Wertheim, The Pearly Gates of Cyberspace-A History of Space from Dante to the Internet, (New York: Norton Company, 1999), 68-69.
23) Mona, Baker ed., Routledge Encyclopedia of Translation Studies「라우트리지 번역학 사전」한국번역학회 옮김 (파주: 한신문화사, 2009), 50-2.
24) Mona Baker ed., 「라우트리지 번역학 사전」, 14-7.
25) Lawrence Venuti, The Scandals of Translation「번역의 윤리-차이의 미학을 위하여」임 호경 옮김(파주: 열린 책들, 2006), 203.
26) 이 주보를 보고 일주일간 금식한 후에, 주일학교 담당 목사님께 전화를 걸어서 이것은 신학적으로 문제가 있다고 지적했더니 수용을 하고 2주 후에 주보에서 이 제목을 삭제했던 기억을 가지고 있습니다. 참조: 전 진성,「역사가 기억을 말하다」(서울:Humanist, 2005),43-7.
27) W.K.C. Guthrie, The Greek Philosophers- From Thales to Aristotle (New York: Harper & Row Publishers, 1975), 10.
28) 자세한 것은 다음을 참조 바람. Walter Brueggemann, Theology of The Old Testament(Testimony, Dispute, Advocacy)「구약신학」류호준․류호열 공역(서울:CLC기독교문서선교회 ,2003), 237, 248-351.
29) E. A. Duke, et al., Platonis Opera Vol. I. ΘΕΑΙΤΗΤΟΣ (New York: Oxford University Press, 1995), 293152a.
30) 정기철,「시간의 문제와 종말론-시간의 철학과 시간의 신학」, (서울: 한들출판사, 2000), 210
31) 요한복음에서 믿음이 모두 동사 피스테우오πιστεύω로 100회가 언급되는데, 명사는 한 번도 사용되지 않았고, 신약성경에서 믿음이라는 용어가 동사로 248회, 명사로는 244회, 형용사로도 68회가 언급되는 중에 요한복음에 100회가 동사로 언급된 것은 이 시대에 많은 것을 시사해 줍니다. The complete Biblical Library, Vol. 15. “πιστεύω” 항목.
32) 이렇게 정체성 개념을 정리한 것은 이러한 배움 과정과 질문을 통해서입니다. 본인 스승이신 신약성경을 독일어로 100번 읽으신 정 명오님이, ‘독일관념론’에서는 정체성(Identity定體性)으로, ‘서양윤리사상사’에서는 정체성(Identity正體性)으로, ‘존재론’에서는 동일성(Identity同一性)으로 구분해서 가르쳐주셨습니다. 김영진님도 분석철학과 언어철학을 가르치실 때 이렇게 구분을 하셨습니다. 그리고 김 영한님이 현상학을 관념론으로 이해하신 것도 큰 깨달음이었습니다. 참조: 김 영한,「하이데거에서 리꾀르까지-현대 철학적 해석학과 신학적해석학」(서울:박영사, 1989), i, 531, 551. : 하병학, “거짓말의 현상학,”「현상학과 정신분석」(서울: 철학과 현실사, 2000), 244-90.
33) 로마서 내에서는 ‘하나님이’와 ‘하나님께서’를 계속 교차 번역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1:32은 속격인데 개역한 글은 ‘하나님의’로, 개역개정은 ‘하나님께서’로 번역합니다. 각주 52도 참조바람.
34) 平田淸明 엮음, 「사회사상사」장하진 옮김 (서울:한울총서,1984), 179.
35) Friedrich Kümmel, Über den Begriff der Zeit 「시간의 개념과 구조」권의무 역 (대구: 계명대학교출판부,1986), 37, 35-43.
36) 통계를 하는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지금까지 과학은 귀납법으로 실험 관찰하여 증명하는 것은 정당하다고 여겼습니다. 그러나 귀납법으로 실험을 할 때에 이미 그 자체속에 이렇게 실험하겠다는 보이지 않는 연역적 사고가 있기에 이것은 자기모순이라는 것에 대한 철학적 문제 제기에 따라서 이제는 귀납적 추리하는 말 자체도 별로 쓰지 않으려고 하면서, 과학은 이제 통계적 추리를 통한 자기 정당화를 시도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 하나님 주신 일반 은총을 통한 활용과 이 활용을 통해서 하나님 앞에서 말씀을 통한 자기반성을 위함입니다. 그리고 정보라는 이름으로 하나님께서 주신 생사를 넘는 은혜때문입니다. 참조. Nicholas Rescher, Introduction: An Essay on the Justification of Inductive Reasoning 「귀납:과학방법론에 대한 정당화」우정규 옮김(서울:서광사, 1992), 2, 193-208. : Rudolf Carnap, An Introduction to the Philosophy of Science 「과학철학입문」윤 용택 옮김(서울:서광사, 1993), 40, 50, 51-64. 이 초식 외, 「귀납논리와 과학철학」(서울: 철학과 현실사, 2000). 162-182.
37) 이 통계 작업은 연구자 본인이 2000년 1월 11일부터 2011년 1월 13일 오전 11시까지 개역한글과 개역개정을 대조하여 일일이 수작업 한 것입니다. 이 과정에서 본인 아내인 조 경희와 딸 윤 이슬, 영은이도 함께 참여했습니다. 그리고 2007년 4월 23일-5월21일까지 강의한 복음주의 신학교(대표: 윤 태호님)에서 김광래 학생 외 25명이 역대하 28장부터 계시록까지 서로 나누어서 비교하면서 성경 읽기를 한 후에 낸 레포트(2007년 7월 31일까지)는 도움도 되고 어려움이 되기도 했습니다.
38) ‘하나님’과 ‘여호와’ 호칭에 대한 더 자세한 것은 다음 글을 참조바랍니다. 윤 천석, “해석학적 입장에서 바라본 우리 성경비교,” 「조직신학연구」제 7호(2006년 봄․여름호), 289-310. :윤 천석, “개역한글성경과 개역개정에 대한 비교연구-‘하나님’호칭을 중심으로,”「조직신학연구」제 13호(2010호 봄․여름호), 350-369.
39) 김창주, “한글성서의 번역․ 보급과 그 문화 ․ 사회사적인 의미” 「신학사상-2004년 봄호」(서울:한국신학연구소,2004), 226-32.
40) 이 상호, 「이브리어 원전분해 및 강해설교-창세기」(청주: 동해출판사, 1999), 11.
41) 이런 통계 과정은 본인이 두 성경을 비교하는 과정에서 본인이 직접 확인하고 엑셀에 입력한 것을 가지고 확인도 하고, “내 사랑하는 책”이라는 성경 싸이트를 이용하기도 했습니다.
42) Lawrence Venuti, 「번역의 윤리-차이의 미학을 위하여」, 188-200.
43) 목 정수, 「한국어, 문법 그리고 사유 (파주: 태학사, 2009), 15. 15-45. 이 책은 2010년 대한민국학술원 기초학문 육성 “우수도서 선정”마크가 붙은 책이고, 이 책 맨 처음 장 제목이 “한국어 조사〔의〕의 문법적 지위와 의 기능”이라는 것만 보아도 〔의〕에 문제가 얼마나 심각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44) 연구자인 제가 ‘의’자에 ( )표시를 를 한 것은 ‘의’에 대한 갈등을 알리기 위한 것입니다. 더 좋은 표현은 “폭탄이 있는 뇌관”이라고 여겨지지만, 연구자에 대한 예의와 사실(事實) 때문에 그대로 사용합니다.
45) 목 정수, 「한국어, 문법 그리고 사유」, 15. : 이 문제에 대한 더 자세한 사항은 다음 논문도 참조바람. 윤천석, “해석학적 입장에서 바라본 우리 성경 비교연구,” 「조직신학연구 7호」(서울: 이컴비지니스, 2000), 289-310.
46) 김 문기, “루터의 신앙과 칭의에 대한 이해와 루터교와 가톨릭의 칭의에 대한 공동선언” 「南濟 柳政佑 敎授停年紀念論文集」(서울: 도서출판 근화, 2007), 280.
47) 이 필찬, 「내가 속히 오리라-요한계시록」(서울: 이레서원, 2007), 25.
48) 윤 천석, “속격(2격)을 통해서 본 칼빈 신학이해-「기독교강요」속격 Dei에 대한 번역을 중심으로,” 「조직신학연구」제 10호(2008년 봄․여름호), 98-132.
49) 일반적으로 소유격에 대해서는 ‘의’를 붙여서 “우리<의>”라고 번역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번역에는 해석학적 문제가 있기 때문에 속격(소유격)이 지니고 있는 본래 의미대로 풀어서 번역한 것입니다.
50) CO. Inst. Vol. II. v. 15, 242.
51) 주격(qeov")은 사복음서 60회, 행 65회, 롬34, 고전 32회, 고후 20, 갈 - 계시록까지는 112회입니다. 속격(qeou')은 사복음서 184회, 행 65회, 롬 78회, 고전 56회, 고후 40회, 갈-계시록까지는 288회입니다. 위 통계는 다음 책을 근거로 본인이 일일이 통계 작업을 한 것입니다. The Comple Biblical Library, Vol. 13. The New Testament Greek-English Dictionary(Springfield : The Comple Biblical Library 1991), “qeov"”항목.
52) 참고로 영어 번역본을 보면 요한복음 1:6은 KJV와 NIV 모두 “from God”으로 1:14절 KJV는 “of the Father”로 NIV는 “from the Father”로 번역했습니다.
53) 이 “=” 개념은 이렇습니다. ‘2=2’에 ‘=’은 똑같다는 의미입니다. ‘2=8/4’에서 ‘=’은 우측에서 분수(b/a)인 경우에 분모가 “0”이 아니라는 경우에만 ‘=’이 성립됩니다.
54) KJV는 여기서 ‘of Christ’로, NIV는 ‘about Christ’로 번역을 했습니다.
55) 속격이 사용된 로마서(31회 언급) 본문들은 다음과 같습니다. 롬1:1, 1:4, 1:6, 1:7, 1:8, 1:16, 2:16, 3:22, 5:1, 5:11, 5:15, 5:17, 5:21, 7:4, 7:25, 8:9, 8:17, 8:35, 9:3, 10:17, 14:10, 15:6, 15:16, 15:19, 15:29, 15:30, 16:16, 16:20, 16:24, 16:25, 16:27. 고린도전서 34회, 후서에서는 29회가 속격입니다. 다음 책을 근거로 본인이 통계 작업을 한 것입니다. The Comple Biblical Library, Vol. 16., “Χριστος”항목.
56)롬1:14 ‘ !Ihsou' Cristou' tou' kurivou hJmw'n ’ 라는 관용구도 나오지만 역시 속격입니다. 유의해야 할 본문은 [행15:25]에 우리 두 성경에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라는 말씀이 있지만, 원문에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가 없는데 의역을 한 것입니다. 그리고 [행20:21]은 ‘ kuvrion’이 목적격입니다. [엡6:24]와 [유1:4]는 ‘우리’만 소유격이고 주, 예수, 그리스도는 목적격입니다. [살후2:16]와 [벧후1:14]은 ‘우리’만 소유격이고 주, 예수, 그리스도는 주격입니다. 우리 성경 두 번역본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라는 관용구가 있는 성경구절은 다음과 같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가 모두 속격인 본문들(롬 1:14같은 관형구 포함): [롬1:4, 5:1, 11, 21, 7: 25, 15:6, 30], [고전1:7,8,10, 15:57], [고후1:3, 8:9], [갈6:14, 18],[엡1:3,17, 5:20,], [골1:3], [살1:3, 5:9, 23, 28], [살후3:6, 18], [딤전6:3, 14], [몬1:25], [약2:1], [벧전1:3], [벧후1:8,6], [유1:17,21].
57) [룻1:7], [삼상22:5], [삼상30:16], [왕하23:24], [왕하25:22], [대상6:55], [대하9:11], [대하11:5], [대하 17:2], [느2:5], [느5:14], [사26:1], [렘31:23], [렘37:1], [렘39:10], [렘40:12], [렘43:4], [렘43:5], [렘 44:9], [렘44:14], [렘44:21], [렘44:28], [암7:12], [슥1:21],
58) 몇 본문을 예를 들어보면 [왕상22:41], [왕하3:7], [왕하3:14], [왕하8:16], [대하20:31] 등입니다.
59) [왕하12:18].
60) ‘나’에 대한 의식과 한국인에 관한 종교적 관념에 대해서는 다음을 참조바람. 윤 이흠 외,「한국인의 종교관-한국정신의 맥락과 내용 」(서울: 서울대학교출판부, 2001), 53, 43-56. ; 조 긍호,「한국인 이해의 개념틀」 (서울:나남출판, 2003), 482, 475-492.
61) 이 재오,「영한사전비판」, (서울: 궁리, 2005), 6.
62)「밀레니엄 새로나온 국어사전」국어사전 편찬위원회 편 (용인: 민중서림, 2007). ;「엣센스한영사전-3판」민중서림 편집국 편 (서울: 민중서림, 1999).
63)「민중영한사전」 7th ed., 민중서림 편찬국 편, (서울; 민중서림, 1999), “my”항목 : 다음도 참조바람. 이오덕,「우리말 바로쓰기 1권」(서울: 한길사, 2003), 132. “나의 살던 고향은 꽃피는 산골”을 작곡하신 이 원수님도 “내가 설던 고향은 꽃피는 산골”이라는 표현이 맞는데, 이제 많은 사람이 사용하고 있는데 어떻게 하느냐고 통탄하셨다는 이야기는 유명합니다.
64) 마태복음에서 ‘그의’가 일치하는 예는 1:11, 2:2 4:21, 6;33,8:3, 8:14 등입니다.
65) 이 개념에 대한 자세한 분석은 다음 연구를 참조 바람. 윤천석, “박형룡님에 대한 평가-감성적(感性的)인가? 감정적(感情的)인가? 감정적(憾情的)?-,”「칼빈신학과 한국신학」 안 명준 외저 (서울: 기쁜날, 2009),409-499. ; 다음도 참조. 조긍호,「한국인 이해의 개념틀」, 496-7. ; 최 상진은 이 한(恨)에 대해서 “Han Trait, Han Sentiment, Han Emotion”으로 구분할 것을 제안한다. 최 상진,「한국인 심리학」(서울:중앙대학 교 출판부, 2003), 57, 49-75. 85.
66) 이〔憾〕자는 ‘한(恨)할 감(憾)’자이기에, 〔한․恨〕이라는 어휘와 통하는 말입니다. 「東亞 百年玉篇」, 두산동아 편찬실(서울:서울, 2000), “憾”과 “恨”항목.
67) 이런 경우는 타락한 인간들이 사는 어디에도 있지만 우리가 더 심하다는 것입니다. 가장 치밀하고 논리적인 수학자인 버트란트 럿셀이 케임브리지 대학에 입학해서 장학생 시험을 치를 때, 시험관은 노스 화이트헤드였는데, 럿셀은 2등이고, 부셀이라는 학생이 더 좋은 점수를 받자, 화이트헤드는 럿셀이 우수하다고 믿고 모든 시험지를 붙태우고 감정(感情․憾情)적으로 럿셀을 추천합니다. Peter Watson, A Terrible Beauty「생각의 역사II : 20세기 지성사」이광일 옮김(파주: 들녘, 2009), 162-3.
참고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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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 천석. “해석학적 입장에서 바라본 우리 성경비교.” 「조직신학연구」제 7호. 2006년 봄․여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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_______. “개역한글성경과 개역개정에 대한 비교연구-‘하나님’호칭을 중심으로.”「조직신학연구」제 13호. 2010호 봄․여름호.
6. 신문.
“교황 : 가톨릭 교회가 유일한 교회,” 「동아일보」2007년 7월 12일, A2면.
7.사전류.
「東亞百年玉篇」, 두산동아 편찬실(서울:서울, 2000), “憾”과 “恨”항목.
개역한글과 개역개정 비교"에 대한 논찬
논찬자: 조 봉 근 박사 (광신대학교 조직신학 교수)
A. 발표자의 논문의 본문만을 요약하면,
윤천석 박사님은 '개역한글'과 '개역개정'에 나타난 한글번역을 통계적으로 상호비교하면서, 존칭어에 관한 번역상의 일관되지 못한 문제를 주도면밀하게 논평하였고, 또 '하나님'과 '여호와'에 관한 그 호칭문제도 신중하게 다루었다. 그리고 '가라사대'와 '이르시되'에 대한 번역을 상호비교하면서, 우리 말 번역 성경들이 대체로 일관된 번역을 하지 못하고 우왕좌왕한 점을 예리하게 지적하였다. 그리고 조사사용에 있어서 '의'에 대한 적용을 비교하였고, '의'에 대한 번역에 관해서 신학계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들을 참고하여 비교하면서, '의'에 대한 번역을 통해서 본 정체성 문제를 예리하게 다루었다. 특히, 하나님과 관련된 '의'에 대한 번역뿐만 아니라 일반적인 '의'에 대한 번역문제에 있어서도 그 정체성을 심각하게 논하였다.
'너'와 관련된 '의'에 대한 정체성문제, '나'와 관련된 '의'에 대한 정체성문제, 명사의 복수에
나타난 번역 동일성과 일관성을 통한 정체성 문제 등을 여러 측면에서 다루고, 남달리 각 번역 성경에 나타난 유형들의 통계수치를 세밀하게 취급한 점 등을 높이 평가하고 싶다.
결론에서 윤 천석 박사님은 "두 성경"을 비교 분석한 결과, 번역에 대한 "일관성과 정체성"이 부족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고 그 소감을 피력하였다. 즉, 하나님과 그 호칭과 관련해서 존칭어 부분과 그 다음에 사용된 동사어휘 존칭어 부분을 언급한 이유는 우리 민족이 지니고 있는 감성과 감정구조 때문이라고 말한다.
B. 논찬자도 역시 논문의 요지에 대하여 깊이 동감하고 찬성한다.
오늘날 외국에서 유학하고 귀국한 탁월한 신학자들이 때로는 유감스럽게도 한국어의 정서와 우리말에 대한 의미(뉴앙스)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경우가 없지 않아 많다.
윤천석 박사님께서는 이러한 측면에서 아주 예리하게 지적하여 주셨고, 번역이나 통역을 할 때, 흔히 범하기 쉬운 한국말의 문법(조사) 및 그 용례와 존칭어 사용에 있어서, 그 오류를 아주 심각하게 다루어 주신 것을 매우 기쁘게 생각한다. 사실 구어체이든지 문어체이든지 일관성이 결여된 어법은 진지하게 학문을 하는 자세에서도 반드시 수정(교정)해야 된다고 생각한다.
C. 논찬자로서 한 가지 조언(助言)을 덧붙인다면
"교의신학자로서의 근본적인 관심은 무엇인가? "이다.
본 논문을 칭찬을 하는 사람으로서, 발표자의 논문의 요지를 잘 이해하고 격찬하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석학자로서가 아니라 개혁신학적인 교의(조직)신학자로서의 관심과 사역은 진정 무엇인가를 다시 한 번 더 깊이 생각해 주시기를 바란다.
진정한 의미에서의 교의신학자의 사명은 오늘날 현대사조에 따라서 유행하는 "철학적 접근", "사회학적 접근", "심리학적 접근" 혹은 "언어분석적인 접근" 등에 더 관심을 집중할 것이 아니라, 명확한 성경교리(교의)를 연구하고 보급하는 전문가로서 사명의식을 가지고, 구약이나 신약 안에서 다루고 있는 주석상의 차이점들과 일관성이 결여된 제이론들을 서로 비교분석하고 그 비판한 결과로 인하여 일관되게 정립된 올바른 교리를 제시하여, 교의신학자들이 연구하여 발표한 내용들을 성도들이 그대로 배우고 믿을 수 있도록, 언제나 성경 전체를 바르게 해석하려는 사명의 식을 가져야 되리라고 믿는다.
윤 천석
첫댓글 회원님께 주님의 크신 은혜가 충만하시길 기도합니다...
먹을 양식도 사야하는데 후원으로 도와주시길 간곡히 부탁드립니다
카페지기는 너무 힘든 시간을 보냅니다 늘 어렵게 살아가는데
코로나 사태로 후원이 거의 없어지니 하루하루 사는게 말이 아니네요,,
통신료 공과금 30만원과 치료비를 마련해야합니다
쌀과 김치라도 마련하도록 오늘은 후원이 있기를 기도합니다
카페지기는 생활고를 겪고 있습니다 작은 나눔의 손길이 되어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도와주신 분을 위해서 집사람 박경옥 전도사가 매일
기도해 드리고 있습니다.....
지병으로 투병하며 카페일로 소일하며 지냅니다 수입이 전혀 없이 살고 있습니다
예수 코리아 카페를 도와주실분을 기다리고 작정기도합니다 매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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