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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본군의 만주 점령 기간 동안 간도특설대는 잔악한 악명을 얻었으며, 그들이 관할하는 광범위한 지역을 황폐화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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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0여명 이상의 조선인이 간도특설대에서 근무한 것이 조사되었다.
광복이후
한국에서 반민특위 등 친일청산작업이 실패한 가운데,
구 일본군/만주군 소속 군인들이 그대로 국군지도부가 되었다.
특히 간도특설대 출신들은
대 게릴라전 경험을 바탕으로
‘제주 4·3 사건’ 등에서 토벌부대 지휘관으로 참여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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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백선엽은,
만주군관학교를 나왔어도 그의 친일정도가 극악하지 않았다면
그의 군인으로 공적을 인정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같은 민족에게 씻을 수 없는 죄를 저질렀습니다.
바로 간도특설대 장교인 중위였습니다.
인정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같은 민족에게 씻을 수 없는 죄를 저질렀습니다.
일본위키
백선엽이 1942년 가을 간도특설대에 발탁되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백선엽의 회고록에는 1943년 2월에 전입되었다고 서술되어 있습니다.
부대장은 일본군이고
소대장을 비롯한 장교와 사병은 대부분 한국인으로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간도특설대의 주요 임무는,
(백선엽은 게릴라로 표현한) 항일무장독립군을 토벌하는
임무를 수행하던 특수부대였습니다.
설립당시 명칭은
조선인 특설부대였고 후에 간도특설부대로 바뀌었다.
특설대는
해방되는 순간까지 모두 108번,
한 달에 한 번꼴로 항일부대와 전투를 싸워 170명의 항일부대원을 사살하고
139명을 체포했다.
이러한 전과로 조선인 특설부대원 167명이 훈장을 받았다는 기록이 있다.
그들이 즐겨 불렀을 ‘특설부대가’를 보면
그들의 당시 내면을 짐작할 수 있을 법하다.
시대의 자랑, 만주의 번영 위한 /
징병제의 선구자 조선의 건아들아 /
선구자의 사명을 안고 / 우리는 나섰다 나도 나섰다 /
건군은 짧아도 / 전투에서 용맹 떨쳐 / 대화혼은 우리를 고무한다 /
천황의 뜻을 받든 특설부대 / 천황은 특설부대를 사랑한다
‘천황의 뜻을 받든 특설부대’는
해방 후인 1945년 8월 29일까지도 팔로군과의 전투를 계속벌이다가
뒤늦게야 일본의 패망 소식을 듣고 투항한다.
백선엽은 소련군에 의해 무장해제 당한 후
소련군을 따라온 한인 통역에게서 “조선은 곧 독립된다.
당신은 여기 있으면 붙잡혀 시베리아로 유배된다.
빨리 고향으로 가라”는 말을 듣고
9월 말 고향인 평양에 숨어 있다가 12월 말 38선을 넘어 월남한다.
간신히 목숨을 건진
간도특설대원 백선엽에게 38선 이남은 기회의 땅이었다.
백선엽 자신이 기록한 자서전 일부
백선엽 기록 가운데 以夷制夷(이이제이)가 있다. 그 뜻은 '오랑캐는 오랑캐로 잡는다'이다.
비록 빗댄 말이지만 우리 독립군을 오랑캐로 보고 토벌작전을 수행했다는 것은 경악할 일이다.
1952년 10월 육군정보국 시절의 백선엽 대령(오른쪽 두 번째)과 박정희를 수사했던 김창룡 특무대장(오른쪽 첫 번째), 훗날 중앙정보부장을 지낸 이후락(왼쪽 두 번째)도 있다. |
백선엽을 비롯해
특설대원 대부분은 한국군의 전신인 국방경비대에 들어가
일본군 경력을 인정받아 단번에 군의 요직을 차지했으며 후에
5ㆍ16쿠데타의 주역이 되었다.
대표적인 사람들 꼽자면
정일권(국무총리), 김일환(내부장관), 이한림(육사교장, 건설부장관),
원용덕(헌병사령관), 이주일(감사원장), 김석범(해병대사령관) 등이다.
이들 중에서 박정희와 정일권을 제외하면
백선엽의 승승장구가 가장 눈에 띈다.
어쩌면 부하의 손에 비명횡사한 박정희나
정인숙 스캔들로 불명예를 안은 정일권에 비하면
백선엽은 조용한 가운데 실리와 명예를 동시에 챙겼다고도 볼 수 있다.
일본 관동군 만주군관,
정일권, 백선엽, 박정희는 해방 후 어떻게 살아남을 수 있었나
▲일본 관동군 간도특설대 출신 백선엽(사진 왼쪽) 대장이 관동군 출신 박정희(왼쪽에서 세번째) 5사단장등 예하 부대장들의 보직신고를 받고 있다. 그러나 서기1961.05.16. 반란으로 정권을 잡고
서기1969.10. 교통부장관으로 임명한다. |
일본 관동군 만주군관 정일권은 대위었고
조선인으로는 당시 최고 높은 장교는 군의관 원용덕 중령이었다.
백선엽은 한중항일 연합군 유격대 토벌에 앞장섰다.
다카키 마사오(박정희)는
일본 관동군 작전지휘부 참모처에서 근무했다.
그들은 해방 이후 독립군으로 위장해
해방 조국에 돌아온다.
백선엽은 재빠르게 고당 조만식의 비서로 위장했고
박정희는 광복군 지청천,
김원봉 밑으로 숨는다.
이들에게 구세주가 나타났다.
과거를 묻지않는 ‘멋진 분’, 이승만이었다.
친일 부역자 처단위해 설치된
‘반민특위’도 막아주고
김창룡, 노덕술 친일 악질 경찰들을
다시 경찰로 복귀시켜주니
이들은 그야말로 물고기가 물 만난 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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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주군관 출신들이
미국 정부 지원을 받으며 육, 해, 공군을 만들고
사관학교도 창설하고 정일권은 총참모총장이 된다.
또 자신들 친일 부역 과거를 아는 여운형 등
‘껄끄러운’독립투사들 제거에 나선다.
6.25동란과 휴전,
그리고 4.19 혁명을 거쳐
5.16군사반란을 일으킨
박정희 군부 독재 정권이 탄생한다.
만주군관 출신들이 군권을 완전 장악한다.
그리고 박정희는 이에 보답했다.
정계, 재계, 종교계 등 모든 영역이
이 자들의 손아귀에 들어갔다.
이제 남은 건 명예뿐이었다.
이들은 서기1920년 청산리전투 이후
자신들이 활동한 시대의 모든 독립투쟁사 조사 금지령을 선포한다.
그러나 이들의 이 위장술과 신분세탁은
한국과 중국이 수교를 하면서 발각되기 시작한다.
한.중 수교가 되자,
만주에 생존해 있던 당시 활동했던 사람들의
증언과 책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한다.
연변작가 류연산씨가 ‘일송정 푸른 솔에 선구자는 없다’ 에 쓴
간도특설대의 만행.
○ 야간 토벌 작정 중 산나물을 뜯는 사람들을 잡아다가 불태워 죽임
○ 충혼비에 제사를 지내기 위해 전사한 항일부대원의 배를 갈라 내장을 꺼냄
○ 포로로 잡힌 항일부대원의 머리를 일본도로 자르고 잘린 머리를 들고 기념촬영
○ 항일부대원 중 여성을 포로로 생포하고 강간 시도 후 실패하자 모두 살해
○ 항일부대원을 숨겨준 마을 원로를 살해 후 그의 머리를 삶은 후 두개골을 장식품으로 만듬
이명박" 백선엽" 청와대 초청 2010.4월
이명박에게 ‘전작권 연기" 강력히 요청
첫댓글 작년 말 백선엽의 생일잔치에 국방부장관, 현역 장성들이 머리 조아리며 축하하는 행사가 뉴스에 나왔습니다.
미군이 차려준 행사에 초대받았겠지만, 문재인 대통령께서 2017년 광복절 앞두고 "독립운동하면 3대가 망하고 친일하면 3대가 흥한다는 말이 사라지게 하겠습니다"는 말을 상기해 볼때, 역시 군 출신은 어쩔 수 없나보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박근혜 대통령의 면전에서 '건국절 논란'에 예의바르면서도 신랄하게 비판하던 김영관 옹의 모습을 보면서 속이 다 후련했던 사람으로서, 그 노병의 모습을 지금의 현역들에게는 기대할 수가 없다는 것이 안타까웠습니다.
이권남 군사평론가의 좋은 자료 고밉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