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순절 5주_십자가는 세상에 대한 심판
요한복음 12:23-33
23. 그러자 예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사람의 아들이 큰 영광을 받을 때가 왔다.
24. 정말 잘 들어두어라.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아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
25. 누구든지 자기 목숨을 아끼는 사람은 잃을 것이며 이 세상에서 자기 목숨을 미워하는 사람은 목숨을 보존하며 영원히 살게 될 것이다.
26. 섬기려면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있는 곳에는 나를 섬기는 사람도 같이 있게 될 것이다. 누구든지 나를 섬기면 내 아버지께서 그를 높이실 것이다."
27. "내가 지금 이렇게 마음을 걷잡을 수 없으니 무슨 말을 할까? '아버지, 이 시간을 면하게 하여주소서.' 하고 기원할까? 아니다. 나는 바로 이 고난의 시간을 겪으러 온 것이다.
28. 아버지, 아버지의 영광을 드러내소서." 그때에 하늘에서 "내가 이미 내 영광을 드러냈고 앞으로도 드러내리라." 하는 음성이 들려왔다.
29. 거기에 서서 그 소리를 들은 군중 가운데는 천둥이 울렸다고 하는 사람들도 있었고 천사가 예수께 말하였다고 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30. 그러나 예수께서는 "이것은 나를 위해서가 아니라 너희를 위해서 들려온 음성이다.
31. 지금은 이 세상이 심판을 받을 때이다. 이제는 이 세상의 통치자가 쫓겨나게 되었다.
32. 내가 이 세상을 떠나 높이 들리게 될 때에는 모든 사람을 이끌어 나에게 오게 할 것이다." 하고 말씀하셨다.
33. 이것은 예수께서 당신이 어떻게 돌아가시리라는 것을 암시하신 말씀이었다.
우리가 살고있는 세계는 신자유주의가 절정에 달했다가 급격히 무너져가는 사회입니다. 신자유주의란 국가권력의 시장개입을 비판하고 시장의 기능과 민간의 자유로운 활동을 중시하는 이론입니다. 1970년대부터 케인스 이론을 도입한 수정자본주의의 실패를 지적하고, 경제적 자유방임주의를 주장하면서 본격적으로 대두되었죠. 신자유주의는 개방화, 자유화, 민영화, 탈규제, 탈복지 등을 내세우죠. 국가나 정부 차원의 모든 인위적인 개입을 공격하면서 ‘자본의 자유시장’을 확보하는데 성공합니다.
신자유주의는 크게 보면 다시 과거의 자유방임형 경제 체제로의 복귀를 의미합니다. 시장에서 정부의 개입을 최소화해 자본가들의 이익을 극대화하는 것이 궁극의 목적이었기 때문이죠. 그러나 2008년 가을, 미국에서 리먼 브라더스(Lehman Brothers) 사태가 터지면서 1929년 대공황 때와 같이 시장의 자율 조정 기능이 없다는 것이 또다시 증명되었습니다. 세계 4위의 투자은행이 서브프라임 모기지 부실과 파생상품 손실로 660조 규모의 부채를 안고 파산한 것입니다. 각국은 막대한 통화량을 시장에 풀어 가까스로 경제 붕괴 국면은 피했지만, 그 피해는 고스란히 개인이나 기업 투자자들에게 돌아갔습니다. 당시 시장에 살포된 돈은 소비로 이어지지 않은 채 다시 금융권의 이익으로 돌아갔습니다. 파산 하루동안 세계의 증시는 2~4% 폭락했으며 이어진 글로벌 금융위기는 10여 년에 걸쳐 세계 경제를 침체시켰죠.
결국 신자유주의는 자유방임 경제를 바탕으로 비능률을 해소하고 시장의 효율성을 극대화시켰지만, 불황과 실업은 해결하지 못했고 빈부 격차를 극대화시켰습니다. 또한 국제사회에서 무제한 시장 개방 압력은 선진국과 후진국 간 갈등을 심화시켰죠.
지난해 우리나라에 번역되어 나온 <좌파의 길(식인자본주의에 반대한다)>는 책이 있습니다. 미국의 정치철학자이자 사회이론가인 낸시 프레이저 교수의 역작입니다. 이 책은 막스주의 노학자가 생애 말년에 뜨거운 마음으로 써 내려간, ‘좌파의 길’에 대한 절절한 모색이기도 합니다.
낸시는 오늘날 교착 상태에 빠진 정치 위기와 숱한 사회운동의 혼돈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자본주의를 단순한 ‘경제 질서’가 아닌 ‘제도화된 사회 질서’로 볼 것을 주문하고 있습니다. 자본주의가 단지 인간의 노동만을 빨아먹는 착취 시스템이 아니라 여성의 돌봄, 자연 생태계, 제3세계 빈민, 공적 정치영역 등 광범위한 사회적 관계들을 착취, 수탈하는 시스템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를 ‘식인자본주의’라고 명명합니다.
낸시 교수는 착취 이면의 ‘또 다른 감춰진 장소들’에 주목하라고 말합니다. 착취를 가능케 하는 네 가지 배경조건이 있다는 것이죠. 즉 ▲전 지구적인 제국주의적-인종적 수탈 ▲돌봄 등 ‘사회적 재생산’의 위기 ▲지구 환경과 자연에 대한 수탈 ▲정치의 기능 장애로 인한 민주주의의 위기 등이 그것입니다. 그리고 이는 모든 것을 먹어 치우는 ‘자본’의 파괴적인 속성 즉 ‘식인자본주의’가 근본 원인이라는 것입니다.
‘식인자본주의’는 직접적 생산과정에 돌입한 인간 노동력만이 아니라 그 노동력을 낳고 기르며 돌보는 돌봄노동(주로 여성이 수행), 물이나 공기, 흙, 천연자원 등 모든 삶의 토대인 자연 생태계, 나아가 ‘야만인’ 내지 ‘미개인’이라 불리며 노예 취급되던 제3세계 사람들, 그리고 국민의 혈세(피땀, 눈물의 결실)로 나라 살림을 운영하는 공공 정치(좁게는 노동법과 노동행정, 넓게는 모든 제도와 정책) 등 다양한 측면에 의존하며 그 진액을 빨아들이며 자란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자본 탐식에 종지부를 찍기 위해서는 확장된 자본주의관으로 무장한 새로운 사회주의 운동이 필요하다고 역설하는 것이죠. 그러니 이 책은 신자유주의 시대의 자본주의의 정체를 적나라하게 파헤쳐 새 세상을 꿈꾸는 이들에게 행동의 길을 제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성경 말씀은 수난절 제5주 복음서의 말씀입니다. 이 이야기의 배경은 예수님께서 마지막 유월절을 보내려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후의 일로 보입니다. 오늘 본문 앞에 배치되어있는 사건들이 예루살렘 입성과 관련된 이야기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이 들어 있는 12장에는 나사로가 살던 베다니에서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유월절을 앞두고 나사로의 집을 방문했을 때 나사로의 누이인 마리아가 벌인 나드 향유 사건에 관한 것입니다.
두 번째 이야기는 예수께서 새끼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의 광경입니다. 명절을 지키려 왔던 많은 군중들이 종려나무 가지를 들고 "호산나!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이스라엘의 왕 찬미 받으소서!" 하고 외쳤다(12-15절)는 종려주일 이야기죠.
오늘 본문을 재구성해 보면 이렇습니다.
예수께서 마지막 사명을 다하시려고 유월절에 예루살렘에 오르십니다. 유월절 엿새 전 예수님은 예루살렘에서 2-3km 떨어진 곳에 베나니 나사로의 집을 방문하죠. 나사로는 자신의 생명을 살려준 은인을 환대합니다. 환영 만찬 도중 나사로의 누이동생인 마리아가 매우 값진 향유를 들고나옵니다. 그리곤 예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털로 그 발을 닦아드립니다. 그런데 그 모습을 보고 있던 가리옷 유다가 불평을 합니다. "이 향유를 팔았더라면 삼백 데나리온은 받았을 것이고 그 돈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줄 수 있었을 터인데 이게 무슨 짓인가(5절)"하고 말이죠. 그런 제자를 향해 예수께서는 이것은 내 장례일을 위하여 하는 일이니 이 여자 일에 참견하지 마라(7절)”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곤 “가난한 사람들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지만 나는 언제나 함께 있지는 않을 것"이라고 부연하시죠. 자신의 죽음을 암시한 겁니다.
요한은 ”예수가 베다니아에 계시다는 말을 듣고 많은 유다인들이 떼를 지어 몰려들었다. 그들은 예수뿐만 아니라 예수께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살리신 라자로도 보고 싶었던 것이다. 이것을 본 대사제들은 라자로도 죽이기로 작정하였다. 라자로 때문에 수많은 유다인들이 자기들을 버리고 예수를 믿게 되었기 때문(9-11절)“이라고 예수의 수난을 예고합니다.
그 일 후 예수께서는 새끼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시고, 이 소식을 들은 많은 군중들이 종려 나뭇가지를 들고 예수님을 환영합니다. 그들은 "호산나!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이스라엘의 왕 찬미 받으소서!(13절)"하고 외쳤습니다. 이 모습에 대해 요한은 ”예수께서는 새끼 나귀를 보시고 거기에 올라앉으셨다. 이것은 성서에 “시온의 딸아, 두려워하지 마라. 네 임금이 너에게로 오신다. 새끼 나귀를 타고 오신다”고 하신 말씀 그대로였다고 증언합니다.
예루살렘성에 들어 온 예수님께 빌립과 안드레가 그리스에서 온 사람들이 만나고 싶어한다는 말을 전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대답이 엉뚱합니다. "사람의 아들이 큰 영광을 받을 때가 왔다. 정말 잘 들어두어라.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아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 누구든지 자기 목숨을 아끼는 사람은 잃을 것이며 이 세상에서 자기 목숨을 미워하는 사람은 목숨을 보존하며 영원히 살게 될 것이다. 누구든지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있는 곳에는 나를 섬기는 사람도 같이 있게 될 것이다. 누구든지 나를 섬기면 내 아버지께서 그를 높이실 것이다(23-26)“라고 말이죠.
그리스 사람들이 찾아와 만나 뵙고 싶다는 전갈에 대한 대답은 아닌 것 같습니다. 그러면 동문서답과 같은 이 말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그리스 사람들이 등장하는 배경에는 예수의 소문이 유대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이방 세계에도 파다했음을 보여줍니다. 여기에 등장하는 그리스사람들은 디아스포라 유대인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주석학자들은 그리스 사람으로 보는 경향성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는 당시 종교철학사상의 중심인 그리스에까지 예수의 소문이 퍼졌음을 말하고 있다는 것이죠. 즉 예수현상이 유대를 넘어 지구적인 현상이 되고 있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를 빌립-안드레의 2단계를 통해서 만날 수 있었다는 얘기는 이미 예고된 십자가 체포와 핍박이 있고, 예수 진영에도 이에 대한 보안과 대비가 있음을 보여줍니다.
이런 상황을 이해해야만 예수께서 ‘인자가 영광을 받을 때가 왔다’고 말한 의미를 짐작할수 있습니다. 먼저 이방인들조차도 예수가 행한 이적에 대한 소문을 들으면서 예수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고 그를 만나고 싶어했다는 것입니다. 이방인들 역시 유대인들과 마찬가지로 현세적인 구원과 출세를 염두에 두었다는 것이죠. 세속적인 영광을 위해 찾아 왔음을 암시합니다. 그런 그들을 향해 예수님은 자신이 ‘큰 영광을 받을 때가 왔다’고 밝힙니다. 그리고는 땅에 떨어져 죽은 밀알을 통해 많은 열매가 맺는다는 것과 목숨을 버리는 사람이 영원히 살게 될 것이며, 나를 섬기려는 사람은 나와 함께 가야 할 것을 말해 주시죠. 여기서 예수님이 말한 ‘영광’은 ‘십자가 죽음’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을 하는 예수님의 심정은 매우 비장합니다. 하지만 공관복음서가 할 수만 있거든 이잔을 옮겨달라 한 것과 대조적으로 요한복음은 ”나는 바로 이 고난의 시간을 겪으러 온 것이다. 아버지, 아버지의 영광을 드러내소서. 그때에 하늘에서 "내가 이미 내 영광을 드러냈고 앞으로도 드러내리라 하는 음성이 들려왔다(27-28절)“고 말합니다. 예수의 십자가 죽음의 결단이 하나님의 영광이라는 것을 거듭 확인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중대한 선언을 하십니다. 자신이 당하게 될 십자가의 죽음은 ‘이 세상에 대한 심판’이며, 이 심판으로 ‘통치자들은 쫓겨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은 지배하는 권력이 틀어쥔 세상입니다. 귀족 가문이며, 돈 많고, 권세 있는 자들이 지배하는 세상이죠. 그들이 마음껏 약자와 자연을 착취하고 파괴하는 세상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꿈꾸었고 가지고 온 세상은 지배하는 권력이 아닌, 봉사하고 희생하는 권력이 통치하는 세상입니다. 그 세상의 지도자는 가장 많이 봉사하고 희생하는 자들이며 예수님은 자신의 목숨을 드려 그것을 몸소 실천하신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사는 세상을 낸시 프레이저 교수는 <식인자본주의>라 규정했습니다. 자본의 자유를 위해 다른 모든 것을 희생시키는 세상이란 것이죠. 탐욕스런 1%의 인간이 하나님을 대신하는 세상이 된 것입니다. 이들이 소유하고 있는 자본은 하나님이 창조한 세계를 아래로부터 무너뜨리고 있습니다. 개인의 욕망 충족을 위한 소비주의, 빈익빈 부익부를 극단화시키는 시장주의, 집단과 집단, 나라와 나라를 전쟁으로 몰아가는 패권주의, 자연파괴를 불러오는 인간중심주의 등으로 오염시켜 멸망으로 끌고 가고 있는 것입니다.
제22대 국회의원을 뽑는 선거가 24일 앞으로 다가왔습니다. 이번 총선의 결과로 우리 사회는 그 운명이 매우 달라질 것입니다. 검찰 독재를 극복하고, 민족정기를 바로 세워 새 시대를 향해 나아가느냐 아니면 미국과 일본의 속국이 되어 후진국의 나락으로 떨어지느냐는 갈림길입니다. ‘식인자본주의’의 틀에 갇혀 노예와 같은 굴종의 삶을 살 것인지 아니면 노동자, 농민, 민중이 주인 되어 자주와 통일을 꿈꾸는 평등과 평화의 세상을 만들 것인지 말입니다.
노자 77장에 보면 ”천지도(天之道)는 손유여이보부족(損有餘而補不足)이나 인지도(人之道)는 즉불연(則不然)하여, 손부족이봉유여(損不足以奉有餘)라“는 말이 나옵니다. 하늘의 도는 남는 것을 덜어 모자라는 것을 채워 주나 사람의 도는 그렇지 않아 부족한 것을 덜어 넉넉한 것에 보태준다는 말이죠. 여기서 댓구가 되는 두 구절을 들여다보면 재미있는 차이를 발견합니다. 손유여(損有)와 손부족(損不足)은 같은 덜다, 줄이다의 뜻을 가진 손(損)이라는 한자를 쓰지만 뒷 단어인 유여(有餘)와 부족(不足)을 붙인다면 그 의미가 매우 달라집니다. 앞은 손(損)은 스스로 내어준다는 의미로 쓰고, 뒤는 강제로 빼앗는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문장의 뒷부분인 보부족(補不足)이나 봉유여(奉有餘)도 같음 맥락으로 읽습니다. 스스로 내어주어 부족한 것을 채운다는 뜻과 강제로 빼앗아 넉넉한 것을 받든다는 뜻의 차이입니다. 부족한 사람의 것을 착취해 자신들의 영달을 위해 쓰거나 더 큰 이득을 얻기 위해 더 큰 권력에 아부하려고 바친다는 뜻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하늘의 도는 우주 삼라만상의 균형(均衡)을 잡아주지만 인간들은 그 균형을 깨뜨려 원망이 가득한 세상을 만들어 놓았습니다. 지금 우리 사회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도 이와 같습니다. 이런 일들이 벌어지는 것은 인간의 사사로움에 기인합니다. 인간들은 자신들의 욕심 때문에 서로 빼앗고 뺏기는 일을 서슴없이 자행합니다. 과학과 기술을 숭상하는 인간의 이기심이 자신들의 삶의 터전인 지구마저도 마구 파헤쳐 기후위기와 생명의 위기를 초래한 것도 마찬가지 이유입니다.
공자(孔子)의 논어(論語) 계씨(季氏)편에 보면 “불환과이환불균(不患寡而患不均)이요, 불환빈이환불안(不患貧而患不安)”이란 말이 나옵니다. 적은 것을 걱정하지 않고 고르지 못함(불공평)을 근심하며, 가난함을 근심하지 않고 안전하지 않은 것을 걱정한다는 말입니다.
한나라의 지도자들이 이런 생각을 가지고 정치를 한다면 그 백성은 태평성세를 누릴 것입니다. 하지만 이와 반대로 사사로움만 쫓는다면 백성들은 도탄에 빠질 수밖에 없죠. 모자란다거나 가난하다고 하는 것은 누군가가 더 많이 가져 부유하기 때문입니다. 부익부(富益富) 빈익빈(貧益貧)은 사람들의 사사로움에서 시작되는 것입니다.
지난 금요일(15일) 세월호참사 10주기를 맞아 전국시민행진단이 광명을 찾아왔습니다. 시민행진단은 2월 25일 제주도를 출발하여 전남 경남 경북 전북 충청 강원을 거쳐 수도권을 행진하고 있습니다. 어제(16일) 다시 광명시청에서 출발하여 서울시의회 앞 세월호 기억공간에서 행진을 마무리하였습니다. 세월호의 아픔과 기억이 우리 사회를 치유하는 원동력이 될 것으로 믿습니다.
저는 지난 대선이 우리 민족의 운명을 가를 거라는 절박한 심정으로 15개월간 활동을 하며 도도한 민심의 흐름을 목격하였습니다. 하지만 결과는 0.73%의 패배였습니다. 2년의 세월이 른 지금 4월 총선이 이 무도한 세태의 종지부가 되어야 한다는 절박한 민중적 바램을 확인하게 됩니다. 그리고 광명을 선거구에서는 20년 가면 정치의 성벽을 부수는 쾌거가 있었습니다. 감산이나 가점 없이 권리당원에서 54%, 시민경선에서 51%를 얻어 전략후보로 내려온 지 9일 만에 경선에서 승리한 것입니다. 이 또한 우리 민중들의 위대한 선택이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저는 이번 총선이 우리 인간 도처와 내면에까지 숨어 있는 ‘식인자본주의’의 뿌리를 캐내는 계기가 되길 기도합니다. 그리고 이 일을 위해 애쓰는 모든 이들에게 십자가의 영광이 이를 거부하는 자들에게는 십자가의 심판이 임하시기를 간절함으로 축원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