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론과 논쟁은 학문 발전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 가운데 하나다. 개진된 어떤 학문적 주장에 대해 다른 학자가 자기 주장을 발표하고 서로 논쟁·토론하는 것은, 지극히 상식에 속하지만, 매우 자연스럽고 바람직한 학문적 태도이기 때문이다. 자기 주장의 모순과 미비점을 발견·보완해 보다 완벽한 이론·주장을 도출할 수 있다는 점에서 토론·논쟁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반면 토론과 논쟁이 활발하지 못하다는 것은, 분야가 무엇이든 간에, 그만큼 학문적 발전이 미미하다는 것과 통한다.
어떤 문제에 대해 자기 견해를 솔직히 드러내지 못하고, 또 자기 분야에 나타난 새로운 주장에 대해 자기의 입장을 발표하지 못하는 학자는 이미 ‘죽은 학자’인지도 모른다. 새로움이 학문 세계에 항상 가득할 필요도 없고, 자기 전공분야의 모든 것에 대해 일일이 자기 입장을 명백하게 밝힌다는 것도 힘든 일임에 틀림없지만, 그럼에도 학자라면 기본적으로 자기 분야의 문제에 대해서는 문제의식을 가지고 새롭게 접근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문제의식은 부단한 학문적 연구에 의해서도 생기지만, ‘정태적인 연구’보다는 토론과 논쟁 가운데서 생기는 경우가 더 많다.
토론과 논쟁이, 특히 학자 상호간의 치열한 논쟁이 필요한 까닭이 여기에 있다. 타인이 이미 연구·정리해 놓은 것을 받아들여 그대로 자기 주장인 양 발표하고자 하지 않는 다음에야――만약 이렇게 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학자가 아닌 ‘정보전달자’로 불려져야 한다――학자가 토론과 논쟁을 싫어할 하등의 이유가 없다. ‘그것’을 통해 자기가 보지 못하는 점을 알 수 있고, ‘그것’을 통해 자기의 부족을 채울 수 있는데도 ‘그것’을 회피하거나 싫어한다면 적어도 양식(=실력) 있는, 올바른 학자의 길을 걸어가려는 학자는 아닐 것이라고 생각한다.
열렬히 토론하고 논쟁하는 것이 극히 정상적이고 합리적인 학자의 태도임에도 불교학계에는 논쟁을 ‘회피’하거나 ‘싫어하는’, 아니 ‘거부’하는 ‘학자·불교운동가’들이 더 많은 것이 현실임을 부정할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물론 논쟁회피가 불교학계만의 문제는 결코 아니다. 한국 대부분의 학계가 아마도 그럴 것이다. 몸담고 있는 곳이 불교계이고, 특히 불교학계에 관심을 갖다 보니 ‘논쟁을 회피하는 학계’하면 불교학계가 얼른 떠오른 것인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교학계의 ‘토론·논쟁 부재의 실상’이 어떤지”를 취재하면서 겪은 사례를 통해 알아보고, ‘논쟁 회피 내지 혐오증’ 문제를 본격적으로 분석해 보고자 한다. 금년 6, 7, 8월 불교신문에서 ‘간화선 문제’로 한창 지상논쟁(紙上論爭)이 벌어지기 전이다. 한형조 교수 인터뷰 기사에 대해, 내용적으로 봐선 한국의 간화선 연구자나 수행자에게 상당히 충격적이고 도발적이었음에도 누구 하나 응답이 없었다. 논쟁을 촉발시키려고 인터뷰한 것은 아니었다. 워낙 응답과 말이 없는 ‘집안’이라 기대를 안한 면도 있었지만, 마음 한 구석에는 ‘그래도’ 하는 생각이 있었다. 예상대로였다. 풍문에는 선방에서 이 문제로 상당히 격앙돼 있고 많은 사람들이 말을 한다고 들렸다.
그러나 한편의 글도 신문사로 오지 않았다. 그러다 기사가 나간 지 한참 뒤, 정확히 1개월 보름 뒤 미국에 계신 한 스님이 “반론을 보내도 되냐?”고 물어왔다. 그 스님은 예정대로 글을 보내왔고, 논쟁은 비로소 시작됐다. 이를 좀더 확대시키고자, 모 대학 모 교수를 찾아갔다. 글을 받고자 해서다. 예상치 못한 답이 나왔다. “나보다 나이도 어린 사람들이 하는데 내가 어떻게 글을 써, 위치가 있지.”라는 말이 나온 것이다.
솔직히 충격을 받았다. 어쩌면 그 교수는 너무 솔직하게 말했는지도 모른다. 좀 돌려서 “시간이 없다.”거나 “그 주제에 나는 관심이 없다.” “아직은 참여할 생각이 없다.”고 말할 수도 있었는데도 그렇게 ‘솔직하게’ 말했는지 모른다. 어찌됐든 그 말은 상당히 충격적이었다. 논쟁을 싫어하는 불교학계의 풍토는 익히 알고 있었지만, 직접 확인하기는 그때가 처음이었다. 게다가 이유도 ‘나이’ 때문이라는 점에서 ‘절망’스럽기까지 했다.
학자가 자기 주장을 펴는 데 나이가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세 살 먹은 어린애도 말과 글을 제대로 조리있게 할 수 있다면 그리고 자기가 관심있는 분야가 논제로 떠오른다면 과감하게 자기 주장을 펼칠 수 있는 것 아닌가. 그런데 하물며 연구하는 교수 직책에 있고, 자기 분야가 그곳인데도 ‘단지’ 나이가 맞지 않다는 이유로 논쟁을 거절하다니. 신문에 글을 싣기가 싫어서도 아니고, 남의 논쟁에 말려들고 싶지 않다는 이유도 아니고 말이다. 그러면서 그는 자기가 쓴 논문을 주면서 신문에 소개해 달라고 말했다.
또 하나 있다. 최근에 열린 학술세미나 장에서 있었던 일이다. 여느 세미나처럼 여기서도 발제를 몇 분이 하고 지정토론자도 있었다. 발제자들은 나름대로 준비해온 논문을 열심히 읽고, 청중들에게 소개했다. 한 분, 두 분, 세 분 이렇게 발제자 세 명의 발표가 모두 끝났다. 그때가 마침 점심 시간이었다. 그러자 사회자는 점심 먹고 토론과 질의 응답을 듣겠다며 오전 발표를 마쳤다. 시간이 없었지만 이왕 온 김에 토론과 질의도 들어보고 가자 싶어 시간을 죽이고 기다렸다. 예정대로 오후가 되자 세미나는 다시 열렸다.
그런데 질의 응답은 받는데도 토론은 왠지 하지 않고 있었다. 곧 하겠지 하며 기다리는데, 사회자가 “질문이 없으면 이상으로 세미나를 마치겠다.”고 선언해 버리는 것 아닌가. 순간 황당했다. 상당히 당황스럽기까지 했다. “뭐 이런 곳이 다 있어.”라는 생각이 치밀어 올랐다. 사회자 말이 끝나기 전에 손을 들고 잽싸게 질의했다. “토론자의 말은 듣지 않습니까?” 그러자 사회자는 “오늘은 시간이 없어서 다음에 토론집이 책으로 나올 때 논평자의 글을 싣겠다.”며 세미나를 끝내 버렸다. 세미나 장을 나오면서 주최측의 한 인사를 만나 물었다.
“왜 토론을 생략했습니까?” “…….” “무슨 특별한 이유라도 있었습니까?” “한 발제자가 자기 글에 대해, 자기가 지정하지 않은 사람이 논평하면 나오지 않겠다고 해서…….” 아하 그것이었구나. 다음에 또 여기서 세미나하면 절대로 오지 않겠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그래도 논문 소개는 잘해 주세요.” 하며 주최측의 그 인사가 부탁하는 것 아닌가. 그 순간, 말로 표현 못할 기분이 됐다. 이것은 불교학계의 극히 일부분만의 현상인지 모른다. 아니 내가 보거나 만난 사람과 세미나 장의 일인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내가 가는 곳의 세미나마다, 피튀기며 논쟁하지는 못해도 상당히 격렬히 토론하는 곳은 거의 없었다. 대충대충 끝나 버리는 것이 대다수다. 질의하고 토론하면 대답을 하기는 하는데, “왜 했느냐”는 식으로 핏대를 세우고 눈을 질의자에게 위협하듯이 부라리며 한 번 대답하고는 끝이다. “질문한 사람이 토론자가 무슨 죄가 있다고 그렇게 하지.”라고 생각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그래서 내린 결론은 “불교계 아니 정확히 불교학계는 논쟁과 토론을 그 무엇보다 회피하는 곳이구나.”다. 논쟁을 통해 자기의 학문과 관점을 광정(匡正)하고, 새로운 입장을 받아들여 학문 세계를 넓혀 가야 할 사람들이 가장 그렇지 못했다.
가장 치열해야 할 학계가 이런데 다른 곳은 말해 무엇하겠는가. 왜 자기의 입장을 솔직히 드러내지 못할까. 비판과 질의가 자유로운, 불교정치계에 비해, 학계가 말이다. 이것이 자연스레 불교계 전반의 ‘토론 부재(不在)’ 문화로 이어지지 않았을까. 불교계의 토론 부재가 오히려 불교학계에 영향을 주었을까. 아니면 서로 영향을 미쳐 토론과 논쟁을 하지 말자고 ‘밀약(密約)’했을까. 의사소통이든 토론이든 그것이 부재한 곳은 정체하고 썩게 마련이다.
새로운 기운이 스며들지 못하고, 새로운 학설이 자라나지 못하는 곳이 부패하는 것은 당연한 것 아니겠는가. 그런 곳에서 세상과 시대를 이끌 이론이 어떻게 나오겠는가. 활발한 토론이 없는 집단이 사회를 이끌어 갔다는 소리를 듣지도 못했다. 나온다면 과거를 훈고학적으로, 마치 하이에나가 썩은 고기만 골라먹듯, ‘과거의 영화’만 뒤지는 그런 논문만 양산될 뿐이다. 고기가 썩었다 보니 현재와 현실로부터는 그만큼 더 멀어진 내용, 일반인은 알지도 못하는 단어와 내용으로 가득 찬 논문만 나오는 것 아니겠는가.
사정이 이러해서 한때 우리 삶을 규율했던 불교는 점점 더 ‘현재와 현실’에서 소외돼 가는 것 아닐까. 불교는 지금 ‘지구 저편의 사상과 문화’보다 현재의 한국인들에게 더욱 낯설어지게 되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단지 전통이고 문화유산이 좀 많다는 이유로 그나마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고 지적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서양 언어로 된 불교교리서가 더 잘 이해된다.”고 말하는 학자나 사람들이 한둘이 아니다.
심지어 서양에서 불교를 배워 온 사람들이, 국내 학자들보다 ‘불교요리’를 더 맛깔나게 하고 있는 실정이다. 수행법도 동양에서 서양으로 갔다가 다시 한국에 들어오면 더 잘 팔린다. 왜 그럴까. 한국인의 지나친 서양 콤플렉스 때문인가. 아니면 서구인들이 쉽고 생활에 적합한 수행법과 이론을 잘 계발해서인가. 아니 이보다 더 심한 지적이 있다. 최근에 만난 한 소장학자(그분의 부탁으로 익명 처리함)는 이렇게 말했다.
“불교학계에서 나오는 책 가운데 읽을 만한 게 있나. 전부 그게 그거고. 진부한 내용을 단어만 바꾸어 써 놓은 것 아닌가. 문제의식도 없고, 그러다 보니 내용에 참신하고 도움되는 것이 들어 있지가 않다. 참 한심하다고 생각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불교권 내에 있으면서, 불교적인 마인드가 풍부한 곳에서 공부하면서 불교에 대한 아니 불교학에 대한 문제의식이 그렇게 박약하다니. 한마디로 불교학 권에서 나오는 책은 볼 게 없다.
” 여기서 불교학 권이란 게 무엇이냐고 다시 물었다. 그는 ‘노 코멘트’했다. 그러다 불교 집안에 상대적으로 가까운 학계를 말한다고 내던졌다. 이 ‘황당한 역설’. 서양언어로 된 불교교리서가 더 잘 읽힌다는 이 곤란스런 일을 어떻게 보아야 하나. 불교학계에서 나오는 책은 볼 만한 게 없다는 이 ‘놀라운 지적’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나. 지적한 사람이 불교의 혜택을 받지 못해서 한 말로 치부해 버릴까.
심지어 한국불교를 주제로 한 박사학위를 외국에서 받아오는 것을 어떻게 해석해야 하나. 1·2세대 학자들도 아니고, 소장학자들이 말이다. 무엇 때문에 이렇게 됐을까. 무엇 때문에 한국의 불교학계가 이런 대접을 받을까. 대중들은 점점 더 불교를 낯설은 학문으로 보는 이유가 무엇일까. 위의 예에서 보듯 나는 그것을 논쟁과 토론 부재, 그리고 문제의식 박약에서 찾는다. 그러면 왜 불교학계는 토론·논쟁·문제의식이 적을까.
원인은 여러 가지일 것이다. 얼른 생각나는 것은 ‘말과 언어에 대한 불교적 가치 폄하’이다. 무슨 말인고 하니, 불교는 말과 언어를 통해 진리에 도달할 수 없다고 가르친다. 이 생각이 학계에 스며들어 언어, 혹은 말 더 나아가 토론에 대한 부재를 낳았을 것이란 것이다. 그러나 이것도 이유가 되기에는 어딘지 모르게 부족하다. 원효 스님도 무수한 저서를 남겼고, 당대의 언어로 글을 써 대중들에게 불교를 홍포했기 때문이다. 또 기록에 의하면 원효 스님은 선배 스님들과 토론을 무수히 많이 했다.
원효 스님에 따르면 언어와 말은 진리를 전달할 수 없다. 그러나 진리를 대중들에게 전달하기 위해서는 언어와 말을 통하지 않고는 불가능하다. 때문에 스님은 ‘문어비의(文語非義)’로는 진리를 왜곡할 수 있으나, ‘의어비문(義語非文)’으로는 진리를 부분적으로 드러낼 수 있음을 갈파했다. ‘문어비의’란 일상언어의 속성에 집착해 낱말이나 문맥에 얽매이는 세속의 말이고, ‘의어비문’은 일상적으로 통용되는 의미와 문맥에 얽매이지 않고 세계의 실체를 파악해 이를 왜곡 없이 드러내는 말을 말한다. 이에 따르면 ‘불교의 언어·논쟁 비하’도 학자들이 글쓰기와 토론을 싫어하는 근거가 안 된다. ‘의어비문’으로 대중들에게 불교를 전달하고, 교학을 연구하려면 “어느 것이 진리에 가깝고, 너의 학설이 이 부분은 잘못됐다.”고 지적하는 토론이나 논쟁은 오히려 권장해야만 될 일이다. 결론은 언어폄하도 논쟁부재의 이유가 되지 못한다는 점이다.
다음으로 지적되는 것은 “토론과 논쟁이 필요 없을 만큼 불교는 이미 전통으로 체화돼 있다.” “불교에서 중요한 것은 실천이지 토론이 아니다.”는 식의 주장이다. 이 주장은 상당히 끈질긴 생명력을 자랑한다. ‘수행이 중요하지 이론이 중요하냐’, ‘불교는 직접 해봐야 알지’ 등에 논박할 학자들은 그리 많지 않다. 직접 수행하면서 연구할 여건이 거의 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직접 수행 한’ 그들은 깨달았는지는 모르겠으나 학문적 토론과 논쟁을 막는 대단히 ‘전근대적’인 이 방법은 여전히 불교계 주변이 맹위를 떨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토론이 활발하던 세미나가 이 한마디에 순간 침묵하는 것을 여러 번 목도하기도 했다. 솔직히 고백컨대 이런 주장을 하는 학자에 대한 평가를 긍정적으로 내리지 않는다. ‘수행해 봐야 알지 논쟁은 필요 없다’는 지적은 어떤 근거에서 나온 말일까. 만약 현재의 불교가 토론이 필요 없을 정도로 이론화 돼 있다면 그것은 바로 신라·고려시대 선배 스님들과 불자들의 피나는 노력, 구체적으로 말하면 생활 속에서 불교를 전파하려 했던 그들의 ‘토론과 논쟁’ 때문이다. 불교에 대한 이해가 낮은 시대에 불교를 전파하려면 그만큼 많은 글쓰기와 토론·논쟁을 해야만 한다.
그런데 이제 전통이 될 정도로 이론은 발전했으니, 토론·논쟁은 필요 없다는 것은 말도 안 된다. 이런 사람들은 오늘의 전통이 내일도, 아무 노력을 하지 않아도 ‘그대로 전통’이 되는 줄 착각하는 사람들이다. 전통은 한번 전통이 되면 그대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어떤 사상이 전통이 되기 위해서는 당대를 사는 사람들의 피나는 노력, 보이지 않는 노력이 뒷받침돼야만 한다. 수행법·사상·이론·종교도 마찬가지다.
한번 굳어진 수행법·사상·이론·종교가 천년 만년 이어질 것으로 생각한다면 그것은 대단한 ‘착각’이라고 생각한다. 사상의 맹아기(萌芽期)·착근기(着根期)에만 피나는 노력이 요구되는 것은 결코 아니다. 건국(建國)보다 수성(守城)이 더 어려운 법이다. 이는 세계사상사나 종교사, 한국사상사·종교사를 봐도 명약한 일이다. 정신문화연구원 한형조 교수의 지적처럼 전통은 회고적 환상의 박제가 아니듯이 수행법·사상·이론도 마찬가지다. 그것은 언제나 우리에게 문제를 던지는 한에 있어서, 우리의 관심과 관여하에서만 의미를 지닌다.
사실은 그래서 부단히 해석학적 지평에서 선택되고 의미화되며 그런 한에서만 현실과 소통한다. 현실과의 의미 연관을 떠난 객관적 사실로서의 과거 혹은 전통·수행법·사상·이론 등은 궁극적으로 무의미하다. 죽은 과거로서의 전통, 역사적 흔적으로서의 불교에 대한 회고적·즉물적 연구를 대체 어디에 쓸 것인가. 전통도 끊임없이 현재화되는 살아 있는 ‘그 무엇’인 것이다 그런데 “전통이 돼 논쟁이 적다.” “전통이 된 수행법을 믿고 따르면 된다.”는 이런 식으로 말을 하다니. 분통 터질 노릇이다. 전통을 이어나가기 위해서는 그만큼 더 많은 노력이 요구된다. 따라서 이것도 논쟁 회피 내지 혐오의 이유가 안 된다. 불교는 또 ‘개인의 안심입명(安心立命)’만 구하면 되는 도교와는 다르다. 현실 도피도 아니다. 부단히 현실이 여러 문제와 대결하면서 그곳에서 ‘새로운 인식틀·수행틀’을 만들어내고, 실천과 자기 절제를 통해 그것을 사회에 다시 회향하는 것이 바로 불교적 실천이다.
그렇다면 이유는 도대체 무엇일까. ‘눈치’와 ‘비전적(秘傳的) 글쓰기’가 대단히 중요한 원인 중의 하나라고 생각한다. 눈치란 무엇인가 하면 바로 선배 스승의 눈치를 보는 것을 말한다. 이게 아닌데 하면서도 선배니깐 스승이니깐 말을 못 한다. 좁디좁은 불교학 바닥에 한 번 눈에 어긋나면 큰일이다. 죄 가운데 ‘괘씸죄’가 제일 무서운 법이다. 찍히면 영원히 구제되지 못한다. 스승에게 찍혀 ‘낙원’에서 쫓겨난 ‘아담과 이브’가 어디 한둘이랴. 추방된 그들의 초췌한 형색은 많은 젊은 학도들에게 반면교사로 작용한다.
쫓겨난 ‘아담과 이브’가 많을수록 젊은 학인들 사이에 눈치는 비례하여 늘어난다. 이런 과정을 거쳐 석사·박사학위를 받고 불교학계에 입문한 소장학자들이 비판과 논쟁에 뛰어들지 않는 것은 당연지사다. 그렇다고 그들을 나무랄 수만은 없다. 물적 기반에 대한 고민을 해결해 주지 못하는 내가 그들을 무턱대고 나무란다면 그것은 벼랑 끝에 몰린 사람에게 벼랑 아래로 뛰어내려 죽어 버리란 소리와 같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소장학자들의 의식은 바뀌어야 된다고 본다. 최근 열린 세미나에서 있었던 일이다.
한 소장학자가 질문을 하고 싶기는 한데 겁이 났는지, 질문에 앞서 이런 말을 먼저 했다. “오늘 학술회의장에서 한 말이 나중에 부메랑이 돼 나에게 불이익으로 돌아오지 않기를 바라면서, 질문 하나 하겠습니다.” 순간 회의장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긴장했다.
그리곤 한바탕 웃음으로 그 순간을 넘겼다. 나중에 그이를 만나 물었다. “무슨 불이익이 있습니까?” “불이익은 무슨 우스갯소리로 해 본 건데요.” 집요하게 파고들었다. 그래도 그는 끝내 말하지 않았다. 나중에 밤에 곡차 한잔하면서 둘이 있을 때 다시 물었다. “정말 불이익이 없다면 그런 이야기를 먼저 할 필요가 있습니까?” 한 참 뜸들이다 그는 “강사 자리 하나 떨어질 수도 있지…….” 순간 나는 귀를 의심했다.
생각만 했던, 귀로만 듣는 그 일을 바로 눈앞에서 확인하는 순간이었다. 바로 여기서 논쟁과 토론 부재의 원인을 한 가지는 찾았다. ‘눈치’는 그래서 나온 나의 결론 가운데 하나가 됐다. 논쟁에 한번 참여하는 것보다, 강사 자리가 더 중요하다.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이런 구조, 한번 스승이나 선배의 논문에 대한 단 한번의 역린(逆鱗)이, ‘무서운’ 결과를 불러오는 이런 구조 속에서 어떻게 자유 토론이 가능하겠는가.
이런 닫힌 구조 속에서 도대체 무슨 학설이 나올 수 있겠는가. 구조를 깰 방법은 없을까. 아직 완전한 결론에 도달하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생각해낸 것은 ‘선각자들의 희생’과 ‘언론과 잡지 등을 통한 기나긴 문제제기’ 방식이다. 학문적 기득권 유지에 급급한 상태, 자기가 알지 못하는 후학이 참신한 주장을 하면 받아들이지 않는 이런 ‘닫힌 학문’의 세계를 열려면 소장학자들도 적극적인 행동이 있어야 한다. 다행인 것은 최근 몇몇 학술단체, 고려대장경연구소나 한국종교학회 불교분과 같은 단체가 그나마 열린 학회를 운영하고 있다는 점에서 새로운 희망을 걸어본다. 한국종교학회 불교분과는 특히 동국대 내에서 많은 질시를 받고 있다고 한다.
불교분과에 동국대생들은 들어가지 마라는 무언의 압력도 작용하고 있다고 들었다. 한심하다 못해 참담하기까지 한 소식이었다. 노력 없이 눈치를 극복할 왕도(王道)는 없다. 소장학자들의 적극적인 노력과 젊은 학인들의 용기 있는 소신만이 이를 극복할 수 있다. 한때 삶의 행동을 규제했던 불교와 교학이 왜 쇠퇴하고 있는지를 각성한 사람이 먼저 나설 수밖에 없다. ‘비전적 글쓰기’도 논쟁과 토론 없는 닫힌 구조를 지탱해 주는 한 축이다. 비전적 하니깐 신비롭게 들리는지 모르나 사실은 좋은 뜻으로 사용한 말이 아니다.
여기서 먼저 지적할 것은 글쓰기와 대화·논쟁과의 관련성이다. 흔히 글쓰기와 논쟁은 관련이 없다고들 생각한다. 그러나 그게 아니다. 글쓰기는 논쟁·대화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다. 아니 글쓰기 자체가 바로 논쟁이다. “글쓰기는 본래 대화와 소통의 행위이기 때문이다.”1) 문학과 철학, 역사 기술이 이 점에서 다르지 않고, 인문학과 사회과학 역시 여기서 차이가 없다. 경직된 글쓰기가 바로 대화와 논쟁 부재를 불러온다. 1) 정재서 편저, 《글쓰기에서 담론까지 동아시아 연구》, p. 15, 살림출판사, 1999.
때문에 “그저 자기네끼리만 통하는 난삽한 학문 어투의 글로 논문이나 발표하면 그것으로 학문적 소임을 다했다고 생각하는 경우”2)를 ‘비전적 글쓰기’라 정의한다. 말이 좋아 ‘비전적’이지, 솔직히 이야기하면 자기들끼리만 아는 용어로 글이나 논문을 쓰는 것을 말한다. 매번 같은 단어로 불교학을 농락하는 그런 논문을 말한다. 마치 어려운 단어를 성전(聖典)을 전수받듯, 그대로 옮겨놓은 그런 논문을 이제는 추방해야 한다. 2) 《현대사상》 9호, p. 44, 민음사, 1999.
이런 글이 왜 문제가 될까. 첫째는 그것이 의사소통을 막는다는 점이다. 몇 명만 아는 단어로 쓴 논문을 발표해 놓고 자신의 스칼라십이 대단한 양 자랑하는 것과 다름없다고 생각한다. 논문은 보다 많은 사람들이 읽고 현실에 적용할 수 있어야 한다. 일상의 언어로 풀지 못하는 단어가 불경(佛經)에 어디 있을까. 학자들의 노력과 이해 부족이 일상의 언어로 풀지 못할 뿐이다. 일상의 언어가 되지 못하면 의사소통은 한정되고, 의사소통의 한정은 곧 불교에 대한 관심의 저조로 연결된다. 이것이 논쟁과 토론의 부재로 연결되는 것은 물론이다.
비전적 글쓰기는 또 모든 학문적 노력을 ‘자기만족’에 그치게 한다. 자기와 주변 몇 명만 알면 되지 더 이상 알게 해서 뭐하나 하는 이상한 엘리트주의에 빠지게 한다. 엘리트도 대중들을 보다 많이 이끌 수 있을 때 엘리트가 되지, 자기들만 아는 언어와 용어로 글을 쓴다고 엘리트가 되는 것은 아니다. 대중적 언어로, 딱딱한 논문투의 글쓰기가 아닌 보다 쉬운 문체로 쓴 논문들이 지금까지 학계 내외에서 인정받는 경우가 더 많았다고 본다.
주어와 서술어도 맞지 않는 논문, 현실에 뿌리박지 않아 문제의식이 박약한 논문, 한문투로 써 몇 명만 보게 하는 논문이 어떻게 불교를 홍포하고 논쟁을 불러일으키겠는가. 많은 사람들이 불교를 어렵다고 하는 것도 비전적 글쓰기와 연관이 있다. 특히 “불교는 우리 속에 우리 것으로 체화되어 있으면서도, 우리는 아직 그 정체를 모르고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형식에 얽매인 논문, 특히 박사학위 논문은 대단히 형식적이다. 그 형식을 깨고 보다 자유롭게 쓰지 않는 한, 불교학계가 새로운 글쓰기를 시도하지 않는 한, 불교학의 발전은 쉽사리 오지 않는다.
‘눈치’ ‘비전적 글쓰기’ 다음으로 논쟁이나 토론을 하지 못하게 막는 것은 ‘현실과의 긴장의식 부족’이다. 불교학계가 현실과의 긴장의식이 부족하다는 것은 여러 군데서 확인된다. 먼저 발표되는 논문 대부분이 경전 해석이나, 사료해석에만 매달린다. 이는 곧 훈고적인 논문이라는 얘기다.
물론 훈고적인 논문도 필요하다. 그런데 너무 곰팡이 냄새가 짙다. 훈고적인 논문을 양산해도 다른 학계에서 불교를 비판하는 논문에 제대로 대응도 못한다. 훈고만 했지 해석을 못해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균여의 화엄사상은 “왕권강화의 이데올로기다.”, 의상의 화엄사상은 “왕권강화의 이념기반이었다.”는 식으로 주장해도 불교학계는 꿀먹은 벙어리다. 심지어 삼국시대 불교는 왕권강화의 이념 기반이었다고 해도 그렇다. 그러면서 뒤에서는 “그 사람 논문을 그런 식으로 쓰면 안 되는데.” 하고 수근거린다.
또는 “불교신자도 아닌 사람이 불교를 어떻게 알아.” “동국대 출신도 아닌 사람이 불교를 잘 알겠어.”라고 말한다. 최근에 나온 균여사상의 오해에 대한 비판도 서울대·정신문화연구원 등에서 나온 것이다. 이게 무슨 소용이 있나. 공식적인 학술회의에서는 말도 못하고, 학자의 생명이라는 논문으로는 발표도 못하고 앉아서 백 번 이야기 해봐야 소용없다. 일반 학계에서는 불교계의 정서와는 완전히 동떨어진 것이 통설이 되고, 정설이 되가는데, 불교 집안 내에서 아무리 대가(大家)가 된들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불교 집안의 영역 자체가 줄어들고 있고, 밖에 가면 인정받는 논문도 없는데. 현실과의 긴장의식 부족은 이래서 위험하다. 이것이 곧장 ‘문제의식 박약’으로 연결된다. 문제의식 부족, 심각하다. 불교가 집안 내에서 자족적인 세미나나 열고 있을 때, 자기 단체 홍보성 세미나나 열고 있는 사이 현실은 이미 저 멀리 가 있다. 점점 더 현실과 거리감 있는 논문들만 양산된다. 이는 역으로 더욱 자족적인 세미나만 열게 만들고. 악순환이 계속된다. 그러다 보니 한국 출신으로 전세계에 퍼져 있는 철학자들이 4년마다 한번씩 모여 여는 한민족철학자대회 등 매머드 학술대회에 참석하는 불교학계 사람들은 거의 없어지게 되는 것이다.
현실은 저 멀리 있고, 그 현실을 해석하고자 하는 철학은 이미 발전했는데 불교는 용어부터 현대화가 안 되어 있으니, 그런 자리에 나가서 발표해 봐야 누가 들어 주지도 않는다. 게다가 토론과 논쟁이 거의 없었던 환경에서 갑자기 그런 것만 있는 세미나에 나가려니……. 문제의식 박약은 정말 위험한 요소다. 한국불교를 말아먹는 대표적인 존재다. 문제의식 박약, 그것은 외부의 도전 세력이 아니고 자기 몸 안의 해충에 해당한다. 거대하고 용감한 사자가 몸 속의 벌에 쓰러지듯, 불교도 그렇게 될지도 모른다.
학자들의 문제의식이 현재처럼 계속 빈약하다면. 논문이나 텍스트와 당대 현실과의 긴장은 정말 중요하다. “한 사상이나 철학은 기존의 사유와의 대결과 착종에서 형성되지만 그 바탕에는 실존적 경험이나 사회적 요청이 깔려 있다. 현실적 실용과 미래적 전망을 획득하지 못하는 사유는 언제나 자연도태됐기 때문”3)이다. “한 체계가 어떻게 역사의 시금석을 거쳐 살아 남아 다음 세대를 주도했는지를 역동적으로 살펴보아야 한다. 한 사상은 개인의 머릿속에 구축된 단순한 상상력의 산물이 아닌 것이다. 토대에 대한 연구, 곧 사상에 대한 역사적 접근이 철학에 있어 절실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 작업은 철학과 현실의 ‘연관’과 함께, 그 ‘거리’까지 확인시켜 준다.”(같은 책) 3) 정재서 편저, 앞의 책, p. 30.
논쟁·토론 부재를 배태한 원인은 또 있다. ‘신앙과 학문에 대한 미숙한 구분’이 그것이다. 즉자적으로 보아 학문과 신앙이 일치되면 제일 좋다. 이것이 안 돼도, 학문하는 사람이 다른 종교를 갖지 않고 무종교인으로만 있어도 좋다. 한 발 양보해 다른 종교를 가진 사람이 불교를 연구해도 나는 좋다고 생각한다.
설사 그 사람이 불교를 왜곡해도 좋다. 그 사람에 의한 불교왜곡이 불교인에 의한 광정으로, 불교인의 학문적 분발로 연결되면 그 보다 더 좋은 일이 없겠기 때문이다. 그런데 세미나 장에 가 보면 이상한 분위기가 연출된다. 타종교인은 불교학 세미나에 마치 들어와서는 안 되는 것 같은 분위기다. 한 번은 이런 적이 있었다. 누구에게나 알려진, 개신교 신자인 불교학자가 토론회에 참석했다.
그 사람의 토론 차례가 되자 순간 발표자의 표정이 변했다. 상당히 난감한 순간이었다. 사회자도 발표자의 한참 후배라 감히 말하지 못하고, 청중들도 한참이나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어떻게 그 순간은 지나갔지만, 이것이 과연 진정한 불교학자의 모습일까. 종교가 다르다고 토론을 거절하는 듯한 이런 태도가 정말 불교적인 것인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누구나 토론할 수 있다. 자기 논문에 대해 그 어느 누구도 말할 수 있다. 다만 비평자의 말을 자기가 판단해서 옳다고 생각하면 받아들이고, 그렇지 않으면 받아들이지 않으면 된다. 그걸 종교가 다르다고 저어하는 것은 문제다.
이런 저런 이유를 들어 논쟁 회피의 원인을 짚었으나 그래도 뭔가 부족하다. 논평이나 비판에 대한 발표자의 ‘의도적 무시(無視)’가 빠졌기 때문이다. 한 논문이 발표된다. 그에 대한 비판을 누가 했다 치자. 상당히 많은 사람이 여러 곳에서, 심지어 신문에서조차 비판했다 치자. 이것을 극복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무엇일까. 바로 무시하는 거다. “무시를 통해 극복되지 않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는 말이 있을 정도다.
사실 불교학계의 오랜 병폐 가운데 하나는 이런 무시가 일상화돼 있다는 점이다. 물론 논쟁과 토론이 없는 것도 병이지만, 무시는 정말 악질적이다. 무시의 ‘존재함’이 역으로 토론과 논쟁의 ‘비(非)활발’로 연결된다. 귀찮은 적을 물리치는 데 무시만큼 좋은 방안은 없다. “너나 말해라. 나는야 무시 할란다.” 의자에 몸을 숨긴 채 사방을 살피면서 관망하는 이 무시가 바로 불교학계 논쟁 부재의 최대의 적이다. 그러나 무시를 좋아하는 사람이 잊은 게 하나 있다. 지나친 무시는 자기를 무시하는 데까지 나아간다는 사실이다.
자기가 남을 무시하는 것이 아니라 이제는 많은 남들이 자기를 무시한다는 것이다. 쉽게 말해 ‘학문적으로 왕따’ 당하게 된다. 후배들 제자들로부터 말이다. 자기가 현직 교수고, 힘이 있을 때 그 왕따는 나타나지 않는다. ‘학문적 왕따’는 자기가 어려울 때 나타나는 법이다. 누가 자기 논문을 인용해 주기나 하겠는가.
인문학적 소양 부족도 불교학계의 논쟁 회피에 일조하는 요인이 아닌가 생각한다. 불교는 종교고 철학이고 사상이다. 인문학의 한 부분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지나치게 종교적인 면만 부각해서 연구하는 것이 불교학계의 특징 가운데 하나다. 그러다 보니 아무래도 인문학 전반에 대한 연구나 공부가 미흡한 채 발표되는 논문이 많다. 불교계 내의 어떤 사건도 그 시대의 영향을 받지 않고 성립되는 것은 거의 없다.
당시 사회에 대한 분석은 필수적이고, 이를 통해 불교의 특성과 특질, 사회에 미칠 영향 등을 분석해야 한다. 그런데 현실에서 볼 수 있는 논문들은 불교에 관한 이야기만으로 꽉 차 있다. 그 불교를 성립시킨 사회나 경제는 빠져 있다. 문화도 마찬가지다. 없다. 오로지 불교만 있고, 그 불교는 위대하고 최선(最善)이다. “균여화엄 사상이 왕권강화 이데올로기로 작용했다.”는 한 학자의 지적에 대해 체계적인 반론을 불교학계에서 제대로 펴지 못하는 것도 이와 관련이 있다고 본다. 이런 것을 이제는 지양해야 한다. 학자들 누구나가 호교적(護敎的) 내용의 논문을 발표하는 분위기 속에서, 호교적인 논문을 어떻게 비판할 수 있겠는가. 비판의 부재는 곧 그렇지 않아도 희박한 논쟁의 회피 내지 부재로 이어진다.
불교학계의 논쟁 회피를 어떻게 극복해야 하나. 앞에서도 밝혔듯이 왕도는 없다. 다만 차근차근한 노력만 필요할 뿐이다. 글쓰기가 곧 토론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글쓰기부터 먼저 변화시켜야 한다. 발표자가 변해야 토론자도 변하고, 논쟁도 시작될 수 있다.
때문에 대중이나 사회와 소통할 수 있는 글쓰기가 하루빨리 이뤄져야 한다. 딱딱한 문체보다는 자유로운 수필이나 수상 형식을 채택하는 것도 이제는 고려해 보아야 한다. 많은 학자들은 현재 통용되고 있는 동양 철학은 ‘동양 철학’이 아니라고 지적한다. 우리의 동양 철학은 서양 관념론에 맞추어 재구성한 ‘격의된 동양철학’이라는 것이다.
특히 고려대 철학과 이승환 교수에 따르면 서양 철학은 철학을 서술할 때 인식론, 형이상학, 윤리학, 정치 철학 등으로 구분한다. 서양 철학의 이러한 영역별 구분은 우리 동양 철학계의 글쓰기에도 그대로 적용되고 있다. 이러한 영역 구분은 우리 동양 철학계의 ‘주요한 특성’들을 학문적 논의로부터 배제시키는 우를 범할 수 있다. 최근 스토니부룩 뉴욕주립대 조성택 교수도 한민족철학자대회에서 발표한 글을 통해 김동화·박종홍 등은 여전히 서양철학적 방법론으로 불교를 연구했던 사람이라고 지적했다.
객관주의의 환상에 사로잡힌 이런 연구가 깨달음이나 수행 등 이성 너머 부분에 대한 파악을 힘들게 한다고 경고했다. 인식론, 형이상학, 윤리학 영역으로 나누어서 불교철학을 서술하는 작업은 그래서 재고가 요청되며, 글쓰기에 대한 새로운 반성을 요구하는 것이다. 정말 쉬운 언어로, 자기의 생각을 솔직히 드러내는 논문을 써보자. 실제 논문을 보면 자기 생각을 적은 부분은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자기 생각이 필요한 부분인데도 매번 선학(先學)이나 권위자의 의견을 빌려 자기 생각을 정리하는 형태다. 인용 근거를 각주에 밝히고. 왜 자기 생각을 밝히지 못하나. 자기가 그 분야에 대해 연구한 것을 자연스레 밝히는 것이 논문 아닌가. 상아탑에만 갇혀 있는 사유의 틀도 과감히 깨자.
현실은 항상 이론보다 풍부하다. 불교도 마찬가지다. 오늘날, ‘지금 그리고 여기의’ 중생들의 삶의 고민을 해결해 주려는 고민이 없으면 불교는 쇠퇴할 수밖에 없다. 그렇게 거대한 인도의 나란다 대학이 왜 사라졌을까. 현실에 뿌리를 내리는 것은 그래서 정말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현실과의 긴장 관계 형성은 문제의식을 보강해 주고, 보강된 문제의식은 불교학자를 사상가나 철학자로 만들어 준다.
마지막으로 한형조 교수의 글을, 약간 길지만 인용하면서 마치고자 한다.
“사람들은 텍스트와 텍스트들 사이, 또 텍스트와 당대 현실 사이의 연관과 긴장을 설명 듣는 것에 만족하지 않는다. 독자들뿐만 아니라 해석자 자신의 개인의 취미와 호기심의 영역을 넘어서고 싶어한다. 자신의 탐구와 이해가 주는 현실적 의미를 더듬고 싶은 것이다. 과거와 전통의 유산은 지금 우리에게 무엇인가, 동양 철학은 단순히 골동의 정취인가, 시대착오적 미망인가를 확인하고 싶어한다. 근대 이후 인간의 소외가 만연되고, 물질문명의 폐해가 심화되면서 사람들은 아득한 시절의 향수와 기억을 돌아본다. 동양 철학은 이에 무슨 말을 해줄 수 있을 것인가. 옳다구나 하고 옛적의 영화를 되찾겠다고 나서서는 곤란하다. 유학이나 불교가 현대의 모든 문제를 치유할 수 있는 만병통치약으로 선전되기도 하고, 동양 철학의 이름으로 된 알 수 없는 비기류(秘記類)들이 장안의 지가를 올리기도 한다. 그렇다고 동양적 가능성의 탐색을 전혀 터무니없다고 지레 단정하는 자세 또한 경계해야 한다. 또한 서구나 중국의 내로라 하는 동양 학자들의 말을 여과없이 믿고 추수하는 것 역시 한심한 일이다. 그들의 말을 비판적으로 형량할 수 없다면 우리 동양 철학은 여전히 식민지적 상황을 못 벗어날 것이다.” <끝>
품격있는 글쓰기
<품격 있는 글쓰기>, 입시교육에 밀려 책 읽는 것조차 쉽지 않았던 사람에겐 한숨이 먼저 나올 제목이다. 기껏해야 수험서나 읽고 자란 탓에 '읽기'도 어려운데 '글쓰기'라니 말이다. 그런데 이 책을 쓴 사람은 분명 '꼰대'였을 것이다. '이런! 품격 있는 글쓰기'를 이야기하면서 '선생님'을 꼰대라고 했으니 실례도 이런 실례가 없다. 저자 김세중은 국어연구소 연구원을 시작으로, 1991년 국립국어연구원 개원 때부터 27년간 국립국어원에서 근무했다. 학예연구관, 어문자료연구부장, 국어생활부장, 공공언어지원단장을 지내고 명예 퇴직한 저자는 "신문 기사든 책이든 개인의 글이든 한국어 문장이 좀 더 다듬어지고 명료해지지 않으면 안 된다"고 강조한다.글을 시작하며 저자를 '꼰대'라고 한 건 시비를 걸고자 함이 아니다. 옛 어른들은 글을 잘 쓰려면 "많이 읽고, 많이 생각하고, 많이 쓰라"고 했다. 요즘처럼 사회관계망에서 속사포처럼 외마디 뱉어내는 글에 익숙한 세대에게 '글쓰기'를 이야기하면서 '품격'을 곁들이라고 해서 한 말이었다.김세중 지음, 푸른길 출판" src="http://ojsfile.ohmynews.com/STD_IMG_FILE/2017/0505/IE002156146_STD.jpg"> |
▲ <품격 있는 글쓰기> 김세중 지음, 푸른길 출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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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격 있는 글쓰기>는 제대로 된 '말하기, 듣기, 읽기, 쓰기'를 훈련받지 않은 사람에겐 어쩌면 어렵고 너무 고리타분한 이야기이다. 국어선생님에겐 안타까운 일이긴 하지만 외면받기 딱 좋은 주제다. 그 어려운 이야기를 하겠다고 나섰다니 대단한 용기다. 평생 우리말을 다듬고 연구했던 선생님의 용기에 무조건 박수를 보낸다. 그 열정에 고마움을 표하지 않을 수 없다. 저자는 국립국어원 재직시 보고서로 <신문 문장 분석>을 낸 바 있다. 기자들에겐 자신들의 글쓰기 오류를 그대로 드러냈던 뼈아픈 보고서였을 것이다. 이 책 역시 최근 신문 기사에 나타난 국어 오류를 지적하고 바로잡고 있다. 직업이 글쓰기인 신문기자는 맞춤법은 기본이고, 정확한 단어와 문장으로 사실 관계를 정확하게 전달해야 한다. 그런데 기사에서 발견한 오류를 갖고 500쪽 가까운 책을 냈으니 기자들이 반성을 해도 많이 해야겠다. <iframe id="ttx_area_1078087127_99" height="250" marginheight="0" src='xxjavascript:window["contents"]' frameborder="0" width="250" allowtransparency="allowTransparency" marginwidth="0" scrolling="no"></iframe> 글쓰기를 직업으로 하는 사람이 갖기 쉬운 직업병이 있다. 어떤 간판이나 간단한 문장을 봐도 맞춤법, 띄어쓰기, 표현이 적당한지 등을 따지려 든다는 것이다. 얼마 전 해외에서 초대장을 한 장 받았을 때 나 역시 그런 직업병이 있음을 확인했다. 한국국제협력단 한국해외봉사단원으로 2년 동안 한국어를 가르쳤던 후배가 보내온 초대장은 행사에 참석하라고 보낸 것이 아니었다. 그간의 활동을 돌아보며 나름 성실하게 활동했음을 자랑하고, 인정받고 싶어서 보낸 것이었다. 그런데 받아본 순간, 직업병이 도졌다. 초대장 한 장에 띄어쓰기가 틀린 곳이 왜 그리 많은지, "한국어과에서 만든 초대장치곤 심하다"고 꼬집고 말았다. 외국 가서 고생하는 건 해외봉사단원만이 아니라 한글도 마찬가지였다. '채 운'→'채운', '그 동안'→'그동안', '찾아 뵙니다.'→'찾아뵙니다.' 어디 해외에서만 한글이 고생할까. 국내에서도 마찬가지다. 한글은 고생하지만, 누군가는 행복하기만 한 이주노동자 한국어교실 풍경을 잠깐 들여다보자."지금 뭐하세요?""유리하세요.""요리한다는 거지요?""…네~""하루에 몇 번 식사하세요?""매일마다 삼 번씩 밥 먹어요.""하루에 세 번 식사하는군요.""네~""어디 아파요?""감기 있어요~머리가도 아파요~""감기 때문에 머리 아프구나.""네~""김밥 드세요~""아니요. 식사세요. 맛있게 해요.""아, 밥 먹었구나. 맛있게 들라는 거지요?""네~."개떡같이 말해도 찰떡같이 알아듣는 걸로 봐서 선생님은 통역의 은사를 받았음이 분명하다. 온갖 방언을 접하고 살다보면 통하는 때가 있는 법이다. 5월 연휴가 최장 11일이라는 말이 누군가에겐 그림의 떡인 이야기다. 그나마 떡고물이라도 먹을 수 있다면 감지덕지인 사람도 있다. 긴 연휴 탓에 생산 물량을 맞추려고 일요일에도 근무하는 많은 이주노동자들이 그렇다.비록 조사와 어법이 이상한 경우는 있지만, 발음은 처음부터 제대로 배우려는 노력이 가상하게 보일 때가 많다. 그들은 '닭을', '달글'이라고 제대로 읽고, '여덟이'를 '여덜비'로 정확하게 발음한다. 한국 사람도 '다글, 여덥이'라 틀리기 쉬운 발음인데, 선생님이 잘 가르친 모양이다. 이처럼 시간을 쪼개며 한국어를 공부하는 이주노동자들의 모습은 한국인들이 본받을 부분이다. 비록 한국어, 한글을 고생시키기도 하지만 말이다. 이주노동자들이 한국어교실에서 하는 말실수는 말을 배우는 과정이란 걸 이해한다면 애교 수준이다. 반면, <품격 있는 글쓰기>는 다수의 독자를 대상으로 하는 기자를 비롯한 전문가들의 글쓰기마저 우려할 수준이라고 말한다. 저자는 "맞춤법이 다가 아니다!"고 말한다. 맞춤법은 한눈에 맞고 틀리고가 드러나기 때문에 전문가들은 틀리지 않으려고 조심한다. 하지만 뜻이 명료한가, 문법적으로 반듯한가, 문장과 문장의 연결이 매끄러운지 등은 쉽게 눈에 띄지 않기 때문에 틀리고도 잘 모르고 넘어가는 일이 흔하다고 한다.대충 뜻만 통하면 더는 문제 삼지 않는 풍조마저 자리 잡기도 했다고 저자는 개탄한다. 그 중에는 기본인 맞춤법마저 지키지 않는 사람도 있는데, 주의하지 않아서라고 한다. 글을 쓸 때 '한글맞춤법을 잘 지키는 것은 사회적 약속을 지키는 것으로서 글쓰기의 기본이다'는 저자의 말을 되새길 필요가 있다. "한글맞춤법은 기본적으로 매우 규칙적이어서 쉽다. 다만 주의해야 할 것이 있을 뿐이다. 받침을 잘못 쓰지 않도록 주의해야 하는데 의심스러우면 사전을 찾아서 확인하는 습관을 들일 필요가 있다." -13쪽저자는 서문에서 "글쓰기는 습관이기 때문에 나쁜 습관을 바로잡아 주는 책이 필요하다"고 보았다고 밝힌다. 그래서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실제 쓰인 생생한 예문을 놓고 어떻게 바로잡아야 더 반듯하고 뜻이 또렷이 드러나는 문장이 되는지를 보여 준다. 한 마디로 국어선생님께서 기자들 글을 놓고 빨간 펜으로 밑줄 좍좍 그은 셈이다. 더불어 이 책에서 일관되게 염두에 둔 것은 '글은 독자를 위한 것'이라고 말한다. "독자가 읽고 쉽게 뜻을 파악하지 못한다면 바로잡아야 한다고 보았다. 이 세상의 글 중에서 독자를 염두에 두지 않아도 되는 글은 일기밖에 없을 것이다. 글은 쓰는 사람 개인이 쓰지만 써 놓는 순간 독자를 위한 것이 된다." -7쪽책을 읽다 보면 깐깐한 선생님인 저자가 상당히 조심스럽게 글을 쓴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어쩌면 평생 국어를 다듬으며 '국어사전'만 펼쳐도 시빗거리도 아닌 일로 시비 거는 이들과 치열한 논쟁을 했던 경험이 그를 조심스럽게 했을 수도 있겠다 싶었다. 가령 이런 부분이다. "정부의 수출대책은 PC 시대인 2000년대 초반 수준이다. 기업 규제를 단두대에 올리고, 전통적 제품 생산에 쏠린 인력을 줄이는 대신 글로벌 시장과 소통하는 인력을 늘리는 구조조정이 필요하다." (0223, ㄷ일보) 저자는 위 예문에서 '기업 규제를 단두대에 올리고'의 '단두대'가 지나치게 생경한 단어 선택이라면 이렇게 말한다. "언어는 늘 비유적으로 사용될 수 있기는 하지만 지나쳤다고 생각된다. '단두대'는 사람의 목을 잘랐던 그 옛날의 형벌 도구다. 지금은 없지만 있다 해도 사람을 처형할 때 쓰는 도구이다. 규제 제거를 굳이 단두대에 올렸다고 할 필요가 있겠는가. '과감히 철폐하고'라고 해도 충분하다고 생각된다." -55쪽위 글에서 두 번이나 '생각된다'라고 한 표현이 주는 느낌은 상당히 방어적이라는 것이다. 비록 표준국어대사전에 '생각되다'가 어떤 일에 대한 의견이나 느낌을 갖게 된다고 나와 있다고 하지만, 기자들의 글에 빨간 펜을 그어대던 선생님의 기백이 보이지 않는다. 말이나 글은 행동을 지배할 수 있다. 말이나 글에 '보여진다', '생각된다'는 식의 표현은 능동성을 가로막을 여지가 있다. "~것 같아요"라는 말에서는 자신감이나 확신을 찾아보기 어려운 것과 같은 이치다. <품격 있는 글쓰기>는 워낙 많은 예시가 있어서 잘못된 글쓰기를 이해하고 바로잡는데 유익하다. 한 가지 국어선생님 앞에 감히 아쉬운 부분을 이야기하라면 이런 부분이다. 기사에서 발췌한 오류들을 예문으로 쓰다 보니 너무 많이 알려져서 굳어진 오류들을 어떻게 봐야 할지에 대한 고민을 비켜갔다는 것이다. |
▲ 순댓국은 '순대국'에서 맞춤법으로는 '순댓국'이 맞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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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댓국, 방앗간, 진돗개'를 예로 들어 보자.돼지고기를 삶은 국물에 순대를 넣고 끓인 국을 '순댓국'이라고 쓴 간판을 본 적이 없다. 방아를 두고 곡식을 찧거나 빻는 곳인 '방앗간'도 마찬가지다. 우리 동네 간판은 모두 '순대국'과 '방아간'으로 돼 있다. 전라남도 진도에서 보호 육성하는 천연기념물인 '진돗개' 관련 보도 자료를 낼 때마다 진도군은 '진도개'라고 쓴다. 그 밖에도 감정노동자들의 고단한 삶을 말해주는 "주문하신 커피 나오셨습니다"와 같은 표현을 어떻게 봐야 할 것인가? '고객에게 무례하다'는 말을 피하기 위한 감정 노동자의 고단함이 배어 있는 이런 표현을 무조건 잘못되었다고 해야 할까? 언어는 사회적 약속이다. 그 약속이 변하지 말라는 법이 없다는 점에서 시대상을 반영하는 언어 오류들은 함께 고민해 나가야 할 부분이다. 기자들이 범하는 오류라면 일반인들도 글을 쓸 때 자주 범할 것이다. 그런 점을 떠올린다면 <품격 있는 글쓰기>가 정말 어렵고 골치 아픈 일이라며 지레 손사래를 칠 수도 있다. 하지만 우리말과 글을 다듬는 노력은 전문가에게만 맡겨서 될 일이 아니다. 우리 모두의 노력이 있어야 하는 일이다.
화제의 책|비문과 악문을 고치는 비법이 담긴
‘교열기자의 오답노트’
20년 경력의 일간지 교열기자가 말하는 ‘글을 고치고 다듬는 기법’이 독자들의 눈길을 끈다.
<교열기자의 오답노트>(박재역 지음 / 글로벌콘텐츠)는 한마디로 쉽게 글을 고치고 다듬을 수 있는 ‘문장 클리닉’ 비결을 담은 책이다. 오랫동안 교열기자로 근무한 저자가 처음 교열 일을 시작할 때부터 지금까지의 ‘아팠지만 보람이 컸던 교열 인생’과 그 기간에 애써 배우고 익힌 어문법들을 체계적으로 정리해 놓았다. 교열 일을 직접 하지 않더라도 우리말을 바르고 정확하게 쓰고 싶어 하는 독자들에게 도움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다.
이 책은 3부로 구성돼 있다.
제1부 ‘교열, 그 아픔과 보람’에는 20년 교열생활에서 특별히 기억에 남는 단상을 담았다. 교직에서 신생 신문사로, 동아일보로, 중국해양대 한국학과로, 그리고 현재 한국어문교열연구원을 꾸려 교열과 강의에 전념하기까지를 배경으로 삼았다.
제2부 ‘배우면 누구나 할 수 있는 교열’에는 글을 수정하고 다듬는 교열 과정에서 필요한 팁을 담았다. 교열하는 과정에서 ‘아하, 이렇게 하면 되는구나!’ 하고 깨달았던 몇 가지를 뽑아 담았다. 직접 교열 일을 배우려는 독자들에게 많은 도움이 될 듯하다.
제3부 ‘교열 디딤돌, 어문법’에는 글을 쓰거나 바르게 다듬을 때 필요한 어문법 팁을 담았다. 우리나라에서 글을 쓰는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자주 범하는 어문법 오류들을 추려 실었다. 어문법 정복을 목말라 하는 독자에게 안성맞춤인 ‘꿀팁’이다.
저자는 “이 책이 그리 자랑할 만큼 특별한 책이라 할 수는 없다. 하지만 누구든지 챙겨 활용할 수 있는 자료를 중심으로 나름대로 정성껏 쓰고, 모으고, 정리했다”며 “이 작은 불씨가 바른 말, 바른 글을 지향하는 이 땅의 모든 이에게 한 줄기 빛으로 역할하기를 바란다”고 전했다.
교실밖