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거전은 박ㆍ윤 두 후보로 압축된 가운데 치열한 접전을 벌였다.
그러나 집권당의 이점에다 경제개발 계속이 국민들에게 설득력있게 받아들여져 5월 3일 실시된 선거는 지난 대선과는 달리 손쉽게 결판이 났다. 박 후보가 총유효투표의 51.44%에 해당하는 568만 6,666표를 얻어 452만 6,541표를 차지한 윤 후보를 116만여 표 차이로 누르고 제6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5ㆍ3선거에 나타난 투표성향은 여촌야도의 전통이 무너져 도시의 지식층과 근로계층에서도 집권당 지지도를 나타내 공화당의 4년 치적에 긍정적인 반응을 보인 데 반해, 호남 푸대접론이 생길만큼 호남에서 여당이 패배, 여야의 지지분포가 4년 전의 남북현상에서 동서현상으로 바뀌었다.
공화당의 박 후보는 그의 아성인 영남지방에서 3대 1에 가까운 몰표를 얻어 신민당의 윤 후보를 크게 눌러 대세를 결정지었다. 영남지방에서 나타난 득표의 차이는 박정희 후보가 윤보선 후보를 눌러 이긴 전체의 표수 차이를 앞질렀다. 윤 후보는 영남지방에서 참패한 대신 서울ㆍ경기ㆍ충남북에서 다소 리드하기는 했으나 영남과 강원에서 실세를 만회하지 못했다.
장준하 당시<사상계> 사장
이 선거과정에서 윤 후보의 지원유세에 나선 장준하 <사상계> 사장이 “박정희는 우리나라 청년의 피를 월남에서 팔아먹고 있다”는 등의 발언으로 ‘국가원수모독죄’의 혐의로 구속되는 등 선거 뒤에 야당 인사들에 대한 일대 검거선풍이 불었다.
재집권에 성공한 박정희 정권은 같은 해 6월 8일로 다가온 제7대 국회의원 총선거에 전력투구했다. 공화당은 박정희 대통령이 재선된 여세를 몰아 집권당의 입장에서 행정조직의 측면지원을 받은데다 풍부한 자금을 동원해 유리한 여건 아래 선거운동을 전개했다. 신민당은 자금ㆍ조직에서 열세를 면치 못했다.
5월 15일 후보등록이 마감되어 전국 131개 선거구와 전국구에 등록한 입후보자는 모두 821명으로 평균 5.4대 1의 경쟁률을 보였다. 선거전이 시작되면서 공공연한 관권의 개입과 금품수수, 각종 선심공세와 향응 제공, 유령 유권자의 조작과 폭력행위 등 온갖 부정과 타락이 공화당측에 의해 자행되어 선거분위기가 극도로 흐려졌다.
공화당은 득표를 위해 들놀이ㆍ친목회ㆍ동창회ㆍ화수회ㆍ부인계 등을 벌이게 하고 타월ㆍ비누ㆍ수저ㆍ돈 봉투를 돌리는 등, 3ㆍ15부정선거를 뺨치는 광범위한 부패선거가 거침없이 자행되었다.
여당과 야당은 ‘안전세력 확보’와 ‘공화당독재 견제’를 선거구호로 내세웠다. 하지만 정책이나 선거구호는 이미 관심권 밖이고 선심공세와 각종 탈법ㆍ폭력행위가 공공연하게 난무하는 타락상을 보였다.
6ㆍ8총선이 이렇게 타락선거로 시종하게 된 것은 공화당이 1971년 이후를 내다보고 원내에서 개헌선을 확보하려는 속셈이 있었고, 야당은 결코 개헌선을 허용할 수 없다는 데서 과열경쟁이 나타나게 된 때문이다. 박정희 대통령은 이때 이미 장기집권을 구상하면서 재선의 임기가 끝나기 전에 7대 국회에서 3선개헌을 감행해서라도 계속 집권할 생각으로 6ㆍ8총선을 무리하게 끌고간 것이다.
전국의 선거구 중에서도 목포의 선거는 특히 유별났다.
김대중이 신민당 후보로 출마한 때문에 관권이 집중적으로 동원되었다. 박정희 대통령은 선거 한참 전에 다른 지역에서 20명의 여당후보가 낙선하더라도 김대중 후보 하나만은 꼭 당선되지 않도록 하라고 중앙정보부와 내무부 간부들을 모아놓고 벌인 회식 자리에서 직접 지시했다고 한다. (주석 1) 이런 소문이 정가에 나돌면서 신민당 간부들은 걱정하여 김대중에게 전국의 주목을 받는 서울에서 출마하거나 비례대표를 택하라는 권고를 하였다. 테러가 자행될 지도 모르니 각별히 조심하라는 염려도 해주었다.
박정희 대통령은 사실 원모심려(遠謀心慮)가 대단한 사람이었다. 그 자신을 위하는 일에도 그랬지만 장차 3선개헌을 이룬 뒤 자기와 맞서 싸우게 될 야당 후보가 누구일 것인지 이미 다 파악하고 있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그가 예상하는 상대는 나였다. 결과적으로 그의 예상은 틀림없었다. 그러나 그때까지만 하더라도 우리 야당의 다음 대통령 후보는 유진오 당수로 미리 정해져 있던 때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화살은 여전히 나를 겨누고 있을 만큼 정확한 통찰력을 가지고 있었던 셈이다. (주석 2)
주석
1) 김대중, <나의 삶 나의 길>, 129쪽.
2) 김대중, 앞의 책, 133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