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길 위의 인문학 후기
역사적 인물의 재인식
이 윤 자
가을바람이 산들거린다. 오늘은 도서관에서 “길 위의 인문학”이란 강좌가 있는 날이다. “홍성의 인물, 깊게 읽기” 라는 프로그램으로 “홍성에 펼쳐진 충절의 흔적을 찾아가는 특강이 있는 날이다. 지금의 홍성은 조선 시대 홍주 목으로 충남 서북부의 정치, 경제, 행정, 교통의 중심지로 지방행정을 관할했던 곳으로 역사적 인물, 특히 충신들을 많이 배출하여 충절의 고장이기도 하다. 그 역사적 인물들의 대중적으로 알려진 사실도 중요하지만 깊게 읽기는 매우 의미 있는 행사라고 생각한다.
첫째 날은 “단종 복위 운동과 성삼문”의 주제로 김경수(청운대학교 교양학부 교수) 교수는 조선 초기 단종복위를 주장하고 세조 정권에 맛서 싸우다 순절한 성삼문 선생의 절의 정신을 현대적 의미와 연결해 특강을 하였다. 시대적 충신의 의미도 많이 변질한 것 같다. 우리 연령시대의 역사에서는 사육신과 여러 충신을 잔혹이 처형한 눈물을 쏟으며 수양대군에 분노했던 생각이 각인되어 있는데 어떻게 현대적 의미와 연결이 되는가? 궁금하여 진지하게 들었다. 세종대왕의 업적은 뭐니 뭐니 해도 한글을 창제하여 백성들의 문맹을 깨우친 일이다. 국방을 튼튼히 하고 문치에 힘쓰고 백성을 아낀 명군이었다. 그런 임금에게도 근심이 있었으니 큰아들 문종의 병약하여 평소에 안평, 금성, 수양을 불러 간곡히 부탁하였다고 한다. 그때 수양은 통곡하며 아버지의 말씀 명심하겠노라고 다짐을 하여 후에 금성대군이 수양을 준엄하게 꾸짖으니 수양이 형제인 금성을 죽였다고 한다. 세종대왕은 집현전을 설립하고 학자들을 임명하여 한글창제를 연구하게 하고 무척 아끼고 독려를 하였다. 세종이 죽고 병약한 문종의 사후 어린 단종 양위를 받았으나 야심에 가득 찬 숙부의 시선에 항상 공포에 떨었다고 한다. 점점 권력의 마수를 펼칠 때 집현전 학사 성삼문과 뜻있는 충신들은 수양대군의 찬탈을 막기 위해 많은 노력하였으나 동료 김질의 고변으로 2차 복위 운동까지 실패하고 본인은 능지처참을 당하고 남자는 모두 죽이며 여자들은 하인을 만들어 공신들에게 하사하였다. 조선의 건국 이후 유교적 명분의 정착이 요구되는 상황에서 정권의 정당성 명분을 쌓기 위하여 반대파의 지지를 얻으려는 정치적 술수로 수양은 성삼문 등 집현전 출신을 비롯한 학사 11명을 좌익공신에 책봉하여 회유하였으나 성삼문 등 집현전 학사들은 의리와 명분을 고수하였다. 여기까지 대략적 계유정난 과정이다. 김경수 교수는 어떤 관점으로 보고 있나 를 이제 궁금한 간추려 보겠다. 첫째는 가문과 통혼으로 복잡하게 얽혀있는 계유정난과 단종 복위 운동 등 당시 정치 상황의 이해를 어렵게 할 뿐만 아니라 인적인 연관성과 각 개인의 정치성향 역시 파악하기 어렵게 만든다. 간단히 예를 들어 세조의 즉위까지 큰 공을 세워 계유정난 1등 공신에 책봉된 한명회의 동생이 또 한 일등공신 권람의 매제로 복잡하게 얽히고설켜 있다. 단종 복위 운동을 전후한 시기에 활동하였던 정치인들의 가계도에서 확인된 복잡한 통혼권은 김경수 교수의 강의에서 새로운 관점으로 판단하게 되었다. 둘째는 시류를 쫓는 훈구파와 명분을 지키려는 절의파의 분열이다. 야심가에게 중요한 것은 권력이고, 군자에게 중요한 것은 명분이다. 그래서 나는 명분을 지킨 충신 성삼문 선생을 위대한 영원불변의 충신이라고 생각한다.
둘째 날은 화백 이응노 선생의 출생과 이응노 화백의 삶과 예술이 우리나라 화단에서의 위치와 영향과 인생관에 대하여 김학량(전시기획자, 작가: 동덕여자대학교 큐레이터학과 조교수)교수의 강의를 들었다. 이응노 화백은 마흔 고개를 넘으며 풍경화<홍성 월산 하>를 보면 보편적 풍경 자체를 풍기는 분위기가 아니고 구도가 독특하다. 또 다른 그림, “길거리 풍경” 그리고 일하는 사람들은 <양 색시>들의 옷차림, 부잣집 자식들인지 빼입은 양복에 중절모를 얹고 여자들을 보며 히죽거리는 모습이 현장감과 생동감이 넘치고 있다. 이 그림을 화백은 한심스러운 마음으로 표현했다고 한다. 나도 지금의 현실과 다른 것이 하나도 다를 바가 없는 것 같다. 물론 예술가도 시대의 흐름과 연륜에 따라 표현의 세계가 변화하고 있다. 이응노 화백도 본인의 의지이든 시류이든 동백림사건에 연루하여 교도소에서 생활하였다. 교도소에서 300여 정을 그린 그림 중에 옥중 화는 내재하여 있는 자화상의 절대적 고독에 시달리는 자신을 대변한 듯하다. 예술은 양지보다 그늘을 택하는 속성인양 이응노 화백도 그중의 한 예술가이다. 강의를 들은 후 홍성군 홍북면 ‘이응노 집’ [고암 이응노 생가 기념관] 기념관 탐방은 한국 현대 회화의 이정표 마련한 이응노 화백의 예술세계를 더 차원 높은 시각으로 감상할 수 있었다.
셋째 날은 이성우(충남대학교 충청문화연구소 전임연구교수)의 특강으로 항일무장투쟁의 새로운 전기, 백야 김좌진 조국의 독립을 위해 평생을 헌신한 백야 김좌진 장군의 성장 과정과 사상, 항일투쟁에 대해 학습하고 그의 지도력에 대하여 토론을 하였다. 백야 김좌진 장군 하면 청산리 전투와 항일 투쟁을 우리 국민 누구나 알고 있을 것이다. 이 특강도 매우 유익하였다. 김좌진은 1889년 충남 홍주군, 도남하도면 행촌리(현재 충남 홍성군 갈산면 행산리)에서 태어났다. 집안은 많은 재산과 노비를 소유한 부호였다고 한다. 그러나 김좌진이 3세 되던 해 부친상을 당해 편모슬하에서 성장하였고 13세 되던 해에 형이 양자가 되어 서울로 떠나 후 실질적 가장으로서 집안 살림을 떠맡게 되었다. 집안에서는 김좌진에게 거는 기대도 컸다. 특히 할머니는 남달랐다. 남편과 아들이 모두 20대에 죽음을 맞은 비운을 겪었고, 양자가 간 큰아들도 28세에 요절하므로 늘 김좌진의 건강이 제일 큰 걱정이었다. 유년시절 김좌진은 대부분 체력단련 무술연마 병정놀이와 관련된 것들이 많다. 아마 어린 시절부터 힘이 장사였음을 말해준다. 그는 글공부보다는 활쏘기, 말타기, 병정놀이를 즐겼지만, 서당에서 『통감』을 배우며 글도 깨우쳤다 김좌진은 지략을 겸비한 아이였다. 송 상도의 『기려 수필』 고 읽었지만, 『삼국지』 『수호지』 『손오병서』 『육도삼략』 등 군사학에 관련된 책들을 탐독하였다. 김좌진은 유년시절 김광호(金光浩), 김광한(金福漢)으로부터 가르침을 받았다. 김광호 선생과의 만남은 김좌진에게 큰 영향을 미치게 하였다. 그것은 김좌진이 앞으로 계몽운동과 독립운동을 함께 할 김석범을 만나게 되는 계기가 되었기 때문이다. 김석범은 대한제국의 상황을 자세히 알고 있었고 계몽의식을 소유한 인물이며 김복한은 1895년부터 1896년에 걸쳐 홍주 의병의 총수였다. 을사늑약 반대항쟁과 파리 장서 운동에 참여하는 등 전 생애를 항일운동에 바친 애국자였다. 김좌진은 김복한으로부터 의리 정신과 민족수호정신을 배웠으며 그것은 이후 항일투쟁을 전개하는 정신적 기반이 되었다. 김좌진은 노비해방과 호명학교 설립을 하는 등 선각자이다. 15~16세 되던 해였다. 노비제도가 갑오개혁 때 폐지되었지만, 노비는 여전히 존속하고 있었다. 김좌진은 어느 날 집안의 노비들을 불려놓고 잔치를 벌인 후 노비 문서를 불태우고 자신의 토지를 나누어주었다. 10대가 그런 파격적인 일을 할 수 있다는 것은 계몽의식이 있었다고는 하지만 김좌진은 어려서부터 선각자의 기질을 갖고 태어난 것은 분명하다. 또한, 신교육을 통하여 부국강병을 이룩해야 한다는 인식의 전환으로 호명학교를 설립하는데 이 시기를 전후해 홍명 학교(洪明學校), 덕명 학교(德明學校), 화명 학교(華明學校), 광명의숙(光明義塾) 등 사립학교들이 설립되었다. 이 일은 전통학문을 수확했으나 신문학의 주요성을 깨달은 지역의 명망가들이 주도했다. 보수적 성향이 강한 홍성에서 일제에 의해 홍주 의병들이 무참히 탄압을 받은 때에, 개화와 신문학을 가르치는 학교를 설립하는 것이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호명학교가 설립될 수 있었던 것은 김좌진 문중의 재원지원과 참여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더 놀란 것은 신학문은 물론 법률까지 교과목으로 정하여 교육하였다니 참으로 그 선경지명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지금 그 호명학교의 자리를 일부 뜻있는 지역인사들로 복원하고자 터를 확보하고 있으나 더 해결할 문제가 남아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꼭 그분들의 훌륭한 뜻이 성사되었으면 한다. 국내에서뿐만 아니라 북만주지역 한인사회의 안정을 위한 활동도 펼쳐나갔다. 김좌진은 한인들의 사업과 교육을 활성화하고 국권 회복운동을 펼치기 위해 1927년 10월 25일 혜림에서 6년제의 신창학교를 설립하고 지역 분교를 두어 한인 자제들을 교육했다. 이에 대한 실천으로 주하 현, 목릉 현, 밀산 현, 돈화 현 등에 세웠다. 그 후에도 물론 독립운동에 헌신하였다. 자금조달과 거점 확보, 군자금 모집, 그의 독립운동에 대한 열정은 식을 줄 몰랐다. 1910년 광복회에 가입해 만주에 부 사령을 상주시켜 국내조직과 연계를 통해 독립군을 양성하는 책임을 지기도 하였다. 김좌진이 독립운동은 청산리전투를 승리로 이끄는 등 대한군정서 군의 주축은 물론이지만, 그는 훌륭한 교육자요, 훈련가요, 군사조직 무장투쟁 등 업적은 손꼽아 헤아릴 수 없이 많다. 김좌진은 1930년 1월 24일 오후 2시경 자신이 운영하던 정미소에서 암살당하였다. 범인은 정미소에서 일하던 공산주의자 박 상실(朴尙實) 이었다. 김좌진은 혜림의 산시에서 정미소를 운영하고 있었다. 북만주 한인들은 농사를 지으며 생활하고 있었지만 생산된 볐을 찧어야 하는데 정미소가 부족했다. 더욱이 정미소들은 모두가 중국인들이 운영하며 비싼 요금을 받고 있어 한인들이 값싸게 찧을 수 있도록 정미소를 설치하였다. 이곳에서 직원으로 위장해 일하던 박 상실의 흉탄에 맞아 목숨을 잃었다. 물론 일본의 간계에 넘어간 어리석은 동족의 짓이었다. 독립운동과 그 밖의 활동은 많이 알러져 있지만, 교육사업도 독립운동 못지않은 큰 활동을 하였음을 강조하고 싶다. 생각하면 지금도 통탄을 금할 수 없다. 한족연합회 주관으로 호상소를 차리고 조문객을 맞고 날씨 관계로 초빈(草殯)을 마련하고 3월 25일 사회장으로 장례를 치르고 인근 자경촌에 안장되었고, 1934년 4월 부인 오숙근 여사에 의해 유해가 홍성으로 옮겨져 김복한의 사우 추양사 뒤편 안동김씨 종산에 말장 되었고 1958년 1월 오숙근 여사가 타개하자 현재 충남 보령시 청소년 재정리 산 50번 이장되었다. 195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더 큰 민족의 이름으로 훈장이 수여되었으면 싶다.
이번 홍성 도서관에서 주최한 사업은 과거와 이르는 동안 축적된 홍성의 역사와 문화를 재확인하고 그것을 현대적 관점에서 재해석하여 애향심과 자긍심을 높이고 새로운 중심도시로 성장해 가는 홍성 지역주민들의 인문정신문화를 강화하게 되었다. 더욱이 초ㆍ중생의 자녀와 손을 잡고 나온 젊은 엄마들이 반갑고 자랑스러웠다. 그리고 우리는 생각한 것보다 장래는 밝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수강생들의 진지한 표정과 질문에 왠지 나도 이번 행사 참석에 보람을 느꼈다. 후속 프로그램으로 최충식(시인, 홍성도서관 문예아카데미 강사)의 진행으로 답사 후기 나누기, 기행문 작성법 듣기, 쓰기 발표하기 등의 행사도 매우 뜻 깊은 행사였다. 이렇게 좋은 행사가 지속하기를 바란다.
|
첫댓글 대단한 논술이군요
언니는 언제 어떻게 이런 모든 것을 숙지 하셨나요
그 바쁜시간 속에서 내공이 큰 덕인지 대단하십니다
읽을 수록 더 깊이가 느껴지는 언니의 글을 보면서 항상 감탄하다 갑니다.
건강 챙기시면서 공부도 글도 쓰시길 빕니다. 그리고 대성하시길 간곡히 빕니다
바쁘신 중에도 이렇게 후기도 쓰시고
대단하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