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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념처 명상의 세계
< 사념처 명상의 세계는 그간 발표한 대념처경 주석서 1권 2권 3권과, 12연기 1권 2권의 방대한 내용을 새롭게 간추린 글입니다. 대학교 교재로 사용하기 위해 새로운 시각에서 조명한 내용도 있습니다. 수행자들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을 드리고자 연재를 합니다. 감사합니다. 묘원 합장 >
4. 실재란 무엇인가
실재(實在)는 사실로서 존재하는 것을 말합니다. 실재는 가설이 아닌 있는 그대로의 진실입니다. 실재는 관념과 대비되는 뜻입니다. 실재를 빨리어로는 빠라마타(paramattha)라고 합니다. 빠라마타의 뜻은 최고의 의미, 최상의(最上義), 승의(勝義), 실재(實在), 성품(性品) 등의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실재란 실재하는 것, 자연적인 것, 자연적인 것의 성품입니다. 최고의 의미는 인간이 괴로움을 여의고 행복을 얻는 데 가장 필요한 것이라는 뜻입니다. 이것이 최고로 옳은 뜻이라는 의미로 최상의(最上義)라고 합니다. 승의(勝義)는 실재를 통해서만이 승리에 이를 수 있다는 뜻입니다. 실재(實在)는 자연이나 현실에서 사실에 입각한 것을 말합니다. 이 말을 영어로는 리얼리티 (reality)라고 합니다. 성품(性品)은 대상이 가지고 있는 본질인 고유한 특성을 말합니다.
빠라마타에 법(法)을 붙이면 빠라마타 담마(paramattha dhamma)가 되는데 이 말은 근본법(根本法), 최승의법(最勝義法), 궁극적 진리라고 합니다. 이것이 궁극적 실재의 세계입니다. 궁극적 진리라는 말은 일의 이치가 마지막까지 이른 진리라는 의미입니다. 바로 이것이 최고의 진리라는 뜻으로 최승의법이라고 합니다. 빠라마타 담마라는 말이 뜻하는 용어는 실로 최상의 호칭이 모두 망라되어 있습니다. 이것 외에 최고의 진리는 더 이상 없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모든 법의 근원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이 최고의 법은 비밀스러운 것도 아니고 신묘한 것도 아닙니다. 이처럼 최고의 예찬이 주어졌다고 해서 근본법이 결코 특별한 법은 아닙니다. 근본법은 네 가지인데 마음, 마음의 작용, 물질, 열반입니다. 근본법은 인간의 정신과 물질을 의미하며 여기에 열반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진리에 남이 모르는 법은 없습니다. 누구나 가지고 있는 몸과 마음이 바로 진리를 아는 근본 바탕입니다.
근본법은 네 가지인데 이 중에 세 가지인 마음, 마음의 작용, 물질은 오온(五蘊)을 말합니다. 오온은 몸과 마음의 다섯 가지 무더기를 뜻합니다. 세 가지 중에서 마음은 아는 마음으로 오온의 식(識)입니다. 마음의 작용은 마음과 함께 일어나는 오온의 수(受), 상(想), 행(行)입니다. 물질은 몸을 말하는 오온의 색(色)입니 다. 이상 세 가지는 일어나고 사라지는 유위법(有爲法)이란 특성이 있습니다. 그리고 마지만 네 번째가 열반입니다. 열반은 탐욕, 성냄, 어리석음의 번뇌가 불타서 이르게 되는 정신적 상태입니다. 이 열반이 수행자의 마지막 목표입니다. 열반은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이 끝난 무위법(無爲法)이라는 특성이 있습니다.
인간이 지향하는 최상의 길은 오직 인간을 구성하고 있는 정신과 물질을 탐구하는 것입니다. 정신과 물질의 실재를 알아차릴 때 궁극의 열반에 이르러 윤회가 끝나는 해탈의 자유를 얻습니다. 이것이 인간에게 최고의 가치입니다. 그래서 이런 최상의 용어가 붙여졌습니다. 이제 인간이 추구해야 할 진정한 가치가 무엇이며 이 가치의 진실을 알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할지 알았습니다. 인간이 가진 최상의 가치는 바로 정신과 물질이며, 이 정신과 물질의 실재를 알아차리는 위빠사나 수행을 해서 열반에 이르는 것이 최종 목표입니다. 이것이 행복을 원하는 모든 사람들의 한결같은 과제입니다.
이제 더 분명하게 알게 되었습니다. 인간이 추구하는 정신세계의 기본도(基本道)인 12연기가 오직 인간의 정신과 물질에 대한 것이고, 그래서 위빠사나 수행자가 알아차려야 할 대상도 정신과 물질이라는 것이 밝혀졌습니다. 정신과 물질을 가지고 사는 사람이 지혜를 얻고자 한다면 바로 정신과 물질을 통해서 얻어야 합니다. 이러한 정신과 물질의 법은 항상 와서 보라고 실재의 법을 드러내 보이고 있습니다. 이제 누구나 지금 여기에 드러나 있는 실재를 알아차려서 열반을 성취하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이러한 실재는 인류역사가 생긴 이래 겁을 통하여 한 분씩 출현하는 역대의 붓다에 의해 똑같이 밝혀졌습니다. 그리고 세월이 흐르면서 실재의 법이 사라지고 다시 관념의 시대가 흐릅니다. 붓다는 2500년 전에 관념뿐인 세계에서 실재를 통하여 존재하는 것의 본질을 발견하셨습니다. 그리고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붓다의 가르침을 따르지 않는 정신세계에서는 20세기에 이르러서야 이러한 사상이 태동하기 시작했습니다. 이것이 니체, 카뮈, 사르트르 같은 분들에 의해 제기된 실존주의입니다. 그리고 이미 붓다에 의해 밝혀진 마음에 대한 분석이 프로이트에 의해 일부분이 밝혀졌습니다. 진리가 있어도 이토록 시간이 걸리고 또 만나기도 어려운 것입니다. 하지만 선한 인연이 있는 사람은 쉽게 만나서 받아들이고 이를 실천하여 행복을 얻습니다. 인간이 눈으로 볼 때는 물질의 세계가 있습니다. 귀로 들을 때는 소리의 세계가 있습니다. 코로 냄새를 맡을 때는 냄새의 세계가 있습니다. 혀로 맛볼 때는 맛의 세계가 있습니다. 피부로 접촉할 때는 접촉해서 대상을 경험하는 세계가 있습니다. 이때 대상의 모양이나 관념을 보지 않고 대상이 가지고 있는 실재를 보는 것이 근본법의 세계입니다.
여섯 가지 감각기관이 여섯 가지 감각대상과 부딪쳐서 여섯 가지 아는 마음이 있는 것은 모두 실재이지만 이 실재가 계속해서 지속되는 것은 아닙니다. 육근이 육경에 부딪쳐서 육식을 하는 것도 일어난 순간 사라집니다. 눈으로 볼 때 보이는 세계는 일어난 순간 사라지고 새로운 마음이 일어나서 보게 됩니다. 그 리고 그 새로운 마음도 일어난 순간 사라집니다. 이때 보이는 대상이나 보는 마음은 계속되지 않고 순간에 일어나서 순간에 사라지는 현상만 있습니다. 이러한 조건들은 모두 무상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조건들에 자아는 없습니다. 이렇게 실재를 통하여 최종적인 법을 보는 것이 근본법입니다. 이렇게 알 때가 일의 이치가 마지막에 이르러서 얻을 수 있는 실재입니다. 이것을 고귀한 진리라고 하고 궁극적 진리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이러한 진리를 앎으로써 모든 욕망이 사라지고 집착이 끊어져서 다시 태어나는 갈애가 소멸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진리를 아는 것의 마지막 결과입니다. 만약 진리를 바르게 알지 못했다면 갈애가 끊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그래서 진리의 최종적 결과는 갈애가 끊어져 윤회가 끝나는 것입니다. 이것이 괴로움이 되풀이되지 않는 최상의 선택입니다. 대상의 실재를 알아 마지막의 근본법에 이른 수행자는 지혜가 난 성자입니다. 그러나 근본법을 모르면 무지한 범부입니다. 범부는 오랫동안 잘못된 견해로 인해 괴로움을 겪습니다. 바로 무상하다는 것을 모르기 때문에 괴로움을 겪고, 불만족이 있다는 것을 모르기 때문에 괴로움을 겪고, 무아를 모르기 때문에 괴로움을 겪습니다. 그러나 성자는 무상, 고, 무아의 법을 발견하여 괴로움에서 벗어납니다.
우리는 겉으로 드러난 이 세상의 이치를 보고 무상, 고, 무아의 진리를 알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몸과 마음을 통찰해서 무상, 고, 무아의 진리를 알 수도 있습니다. 이렇게 아는 두 가지는 진리를 아는 것에서는 같으나 사물의 참된 성품을 파악하여 깨달음을 얻는 데는 분명하게 다릅니다. 이 세상에 드러난 것을 보고 무상을 알 수도 있겠지만 이때 내가 본다는 자아를 가지고 보기 때문에 대상의 참 성품을 보지 못하고 개념에 머물고 맙니다. 자신의 몸과 마음을 통찰할 때만이 내가 본다는 견해로 보지 않아서 바르게 봅니다. 이렇게 해서 내 몸이 아니고 내 마음이 아니라고 아는 지혜가 나야 비로소 괴로움을 끊을 수 있습니다. 이 수행을 위빠사나라고 합니다.
실재는 위빠사나 수행의 대상입니다. 실재는 몸과 마음으로 경험하는 느낌 입니다. 사마타 수행은 고요함을 얻어 번뇌를 억누르지만 위빠사나 수행은 통찰지혜를 얻어 번뇌를 말립니다. 억누른 번뇌는 잠재해 있지만 말린 번뇌는 다시 일어날 종자가 사라져 소멸됩니다. 사마타 수행과 위빠사나 수행은 모두 알아차림을 하지만 대상에 마음을 집중하는 방법에 따라 나뉩니다. 사마타 수행은 근본집중이지만 위빠사나 수행은 찰나집중을 해서 대상을 분리해서 알아차 립니다. 이렇게 위빠사나 수행으로 알아차릴 때라야 궁극의 열반에 이를 수 있습니다.
위빠사나 수행의 대상은 몸, 느낌, 마음, 법입니다. 위빠사나 수행은 대상의 모양을 알아차리지 않고 실재하는 느낌을 알아차립니다. 그래야 대상과 하나가 되지 않고 분리해서 알아차릴 수 있습니다. 느낌은 매순간 변하기 때문에 변하지 않는 관념과 달라서 대상과 하나가 될 수 없습니다. 바로 이러한 알아차림이 찰나집중을 가져옵니다. 그래서 대상이 가지고 있는 성품을 발견합니다. 호흡을 알아차릴 때도 표상으로 알아차리지 않고 코에서는 들어갈 때의 차가움과 나올 때의 따뜻함을 알아차립니다. 배나 가슴에서 일어나는 호흡은 부풀고 꺼지는 바람의 요소를 알아차립니다. 호흡의 모양을 알아차리거나 명칭을 붙이는 것은 관념입니다. 그러나 부풀고 꺼지는 느낌을 알아차리는 것은 실재입니다. 발의 움직임을 알아차릴 때도 모양을 알아차리지 않고 발을 들려는 의도를 알아차리고 발의 가벼움과 무거움을 알아차립니다. 서 있을 때는 바닥의 단단함이나 부드러움이나 차가움이나 따뜻함을 알아차립니다. 이때 발의 모양은 관념이고 이러한 느낌은 실재입니다. 통증을 알아차릴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통증은 관념입니다. 통증의 실재가 마음에서는 싫어하고 괴로워하는 마음입니다. 통증의 실재가 몸에서는 찌르고, 당기고, 욱신거리고, 화끈거리는 느낌입니다. 이때 이런 현상을 통증이라고 알면 괴롭습니다. 그러나 통증이 가지고 있는 실재하는 성품인 찌르고, 화끈거리는 것을 알아차리면 이런 아픔은 견딜 만합니다. 이처럼 몸과 마음에 있는 실재하는 현상을 통해서만이 무상, 고, 무아의 법을 알 수 있습니다.
위빠사나 수행은 대상에 개입하여 대상을 바꾸려고 알아차리지 않습니다. 대상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려서 대상이 가지고 있는 성품을 알기 위해서 하는 수행입니다. 이렇게 할 때만이 지혜가 나서 괴로움뿐인 고해의 바다를 건너 피안으로 갈 수 있습니다. 개입한다고 해서 해결할 수 있다면 얼마든지 개입해야 하겠지요. 그러나 모든 것은 원인과 결과로 진행되기 때문에 개입을 한다고 해서 결코 해결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대상이 가지고 있는 성품을 아는 지혜만이 문제의 본질을 알아 번뇌를 해결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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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이 글 속에 묘원스승님께서 (혹은 부처님께서) 일러주시려 했던 모든 가르침이 다 들어있네요. 완전 요약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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