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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강론 08
마태복음 4:1-11
그리스도로서의 시험
예수께서 광야에서 시험을 받으신 이 사건은 공관복음서에서 공통적으로 기록하였는데 마가복음은 1:12-13 두절로 간략하게 언급하였고, 누가복음에서는 4:1-13로 마태와 비슷한 분량만큼 기록하였으나 두 번째와 세 번째 시험의 순서를 바꾸어 기록하였다.
“그 때에 예수께서 성령에게 이끌리어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러 광야로 가사”(1절). 예수님은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신 후 광야로 가셨다. 공관복음서가 동일하게 우발적으로 갑자기 일어난 일이 아니라 성령께서 의도적으로 예수님을 광야로 이끄셨다고 밝히고 있다. 특히 마가는 “성령이 곧 예수를 광야로 몰아내신지라”(막 1:12)라고 기록하여 필연적으로 있어야 할 일로 강조하였다. 또한 누가는 “광야에서 사십 일 동안 성령에 이끌리시며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시더라”(눅 4:1b-2a)라고 하여 시험 내내 성령께 이끌리시며 시험을 받으셨다고 나타낸다.
“그 때에”(1절)라고 하여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신 것과 연결시키고 있으므로 예수님이 세례를 받으신 일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두고 이해하여야 한다. 예수님은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심으로 죄인의 운명으로 들어가셔서 마귀의 시험을 받으신 것이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을 알기 위하여 광야로 가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알았기 때문에 광야로 가신 것이다. 광야에 계신 목적은 흔히 말하듯이 사역을 위한 준비로 금식 기도하기 위해서나 하나님에 관해 명상하거나 교제를 하시기 위함이 아니라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시기 위해서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성령께 이끌리어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실 수 있는가? 이런 문제에 대해 우리가 혼란스럽게 느끼는 이유는 시험을 하나님이 주시는 시험과 마귀가 주는 유혹으로 나누어서 생각하기 때문이다. 야고보서에 “하나님은 악에게 시험을 받지도 아니하시고 친히 아무도 시험하지 아니하시느니라”(약 1:13)라고 하니까 하나님은 우리에게 시험을 하시지 않는다고 생각하나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는 시험의 목적은 아들로 만드심이고(히 12:5-8) 그렇지 않은 자들에게는 그저 유혹에 불과한 것이다.
그러므로 성경에서 말씀하는 “시험”(헬, ‘페이라조’)은 ‘검증하다, 증명하다’라는 뜻이다. 예수님께서 성령께 이끌리어 시험을 받으신 것은 “하늘로부터 소리가 있어 말씀하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3:17)라고 하신 말씀에 대한 증명이다. 다시 말해서 과거 출애굽한 이스라엘이 홍해의 세례를 받아 광야 교회가 되었으나 철저히 실패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예수님은 구약 이스라엘의 실패를 극복하는 참 이스라엘로 이 땅에 오셔서 시험을 통해 하나님이 사랑하시고 기뻐하시는 아들이심을 증명하고자 하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예수님의 그리스도로서의 시험은 하나님의 뜻에 따라 마귀를 통해 받으신 시험으로 그 내용과 목적이 분명히 특별한 것이다.
첫 번째로 기록된 시험은 “사십 일을 밤낮으로 금식하신 후에 주리신지라 시험하는 자가 예수께 나아와서 이르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명하여 이 돌들로 떡덩이가 되게 하라”(3절)라는 것이었다. “사십 일을 밤낮으로 금식하신 후에 주리신지라”라고 하였는데 출애굽 때의 상황을 반영한 표현이다.
15 내가 돌이켜 산에서 내려오는데 산에는 불이 붙었고 언약의 두 돌판은 내 두 손에 있었느니라 16 내가 본즉 너희가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 범죄하여 자기를 위하여 송아지를 부어 만들어서 여호와께서 명령하신 도를 빨리 떠났기로 17 내가 그 두 돌판을 내 두 손으로 들어 던져 너희의 목전에서 깨뜨렸노라 18 그리고 내가 전과 같이 사십 주 사십 야를 여호와 앞에 엎드려서 떡도 먹지 아니하고 물도 마시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너희가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여 그를 격노하게 하여 크게 죄를 지었음이라(신 9:15-18)
모세가 하나님께 언약의 말씀을 받는 동안 이스라엘은 금송아지를 여호와 하나님으로 섬기며 악을 행하였다. 이런 점에서 세례자 요한이 출애굽 상황을 보여주었듯이 예수님 역시 모세와 이스라엘의 모습을 제시하는 측면에서 광야에서 금식하셨다. 모세가 떡과 물을 먹지 않았다는 것은 여호와 하나님 안에서 주시는 언약의 말씀이 양식이었다는 뜻이다. 마찬가지로 예수께서 금식하셨다는 것은 말씀 자체가 양식이었다는 의미이다.
“시험하는 자”란 마귀, 곧 사탄의 특성을 나타낸 표현이다. “마귀”(1, 5, 8절)의 헬라어 ‘디아볼로스’는 ‘중상자, (적의를 가진) 비방자’라는 뜻이고, “사탄”(10절, 막 1:13)의 ‘사타나스’는 히브리어 ‘사탄’의 헬라어 음역으로 ‘대적자, 대항자’라는 뜻이다. 즉 적의를 가지고 비방을 하는 대적자가 예수님을 시험하였다.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굶주릴 필요가 없다는 것이었다. 물론 예수님께서도 돌을 떡으로 만드는 기적을 행하시는 것이 잘못된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문제의 핵심은 기적을 행한다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기적을 행한 결과가 하나님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것이냐 하는 문제이다. 결국 마귀가 원한 것은 예수님이 스스로 굶주림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는 것이었다.
예수님의 답변은 “기록되었으되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였느니라”(4절)라는 말씀이었다. 이는 출애굽한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겪었던 신명기의 말씀인데 예수님께서 지금 겪고 있는 굶주림은 하나님께서 과거 이스라엘에게 언약을 주시고 그 말씀을 이루시기 위해 계획하신 것이었다.
2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사십 년 동안에 네게 광야 길을 걷게 하신 것을 기억하라 이는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네 마음이 어떠한지 그 명령을 지키는지 지키지 않는지 알려 하심이라 3 너를 낮추시며 너를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조상들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네가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신 8:2-3)
이 말씀은 흔히 말하듯이 육신은 밥(떡)을 먹지만 영혼은 하나님의 말씀을 먹어야 한다는 궤변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낮추시며”라는 말의 히브리어 ‘아나’는 ‘괴롭히다, 억눌리며 고난을 당하게 하다’라는 뜻이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광야로 이끌어 그들을 낮추고 굶주리도록 시험하여 그들의 수준이 어떤지를 알게 하신 것이다. 광야의 40년 동안 낮추며 주리게 하신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못 지킨다는 것을 증명하신 것이었다.
이스라엘에게 아무것도 주시지 않음으로 그들의 수준을 드러내니 굶주리고 낮추어진 상태를 견디지 못하였기에 하나님께서 만나를 허락하셨다. 즉 하늘에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 안에서 사는 상태가 되게 하셨다. 이때 만나란 단순히 먹어 굶주림을 해결하는 음식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아는 말씀이다. 생존의 문제가 아니라 생명의 상태가 되어야 하는데 그것은 떡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있다. 그것을 위해 주신 것이 만나였다. 예수님은 이러한 하나님의 뜻을 아셨기에 떡 만들기를 거부하시고 말씀으로 대처하심으로 하나님이 사랑하시며 기뻐하시는 아들 됨을 드러내셨다.
두 번째 시험은 “마귀가 예수를 거룩한 성으로 데려다가 성전 꼭대기에 세우고 이르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뛰어내리라”(5-6절)라는 것이었다. “(그) 거룩한 성”이란 예루살렘을 지칭한다. “성전 꼭대기”(헬, ‘호 프테뤼기온 호 히에론’)는 정확하게 표현하면 ‘성소의 가장자리’이다. 성전 건물(헬, ‘나오스’)의 꼭대기가 아니라 ‘성소’(헬, ‘히에론’)의 끝에 예수님을 세웠다는 것은 성전을 근거로 놀라운 이적을 나타내면 그것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이 아니냐 하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마귀는 “기록되었으되 그가 너를 위하여 그의 사자들을 명하시리니 그들이 손으로 너를 받들어 발이 돌에 부딪치지 않게 하리로다”(6절)라고 성경을 인용하였다. 언뜻 보면 마귀가 하나님의 사랑을 확인해 보라는 차원에서 한 말 같지만 실제로는 하나님에 대한 신뢰와 사랑을 의심하여 무너뜨리려는 것이었다. 이 두 번째 시험에 대하여 예수님은 마귀의 의도를 분명히 간파하시고 “또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 하였느니라”(7절)라고 말씀하셨다. 이것도 모세의 신명기 말씀이다.
너희가 맛사에서 시험한 것 같이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를 시험하지 말고(신 6:16)
출애굽한 이스라엘은 르비딤에 장막을 쳤으나 갈증으로 인하여 모세를 원망한 것이 하나님을 시험한 것이었다(출 17:2). 갈증으로 인한 원망은 궁극적으로 하나님이 우리 중에 계시는가 아닌가 하는 시험이었기에 모세는 그곳 이름을 맛사, 곧 “시험의 장소”라고 하였다(출 17:1-7). 이 시험에 이스라엘은 철저히 실패하였다. 그러나 예수님은 성소를 근거로 이적을 베풀어 하나님을 시험하기보다 스스로 말씀이시기에 마귀의 시험을 거부하셨다.
세 번째로 “마귀가 또 그를 데리고 지극히 높은 산으로 가서 천하 만국과 그 영광을 보여 이르되 만일 내게 엎드려 경배하면 이 모든 것을 네게 주리라”(9절)라고 하였다. 누가에 의하면 마귀는 “이것은 내게 넘겨준 것이므로 내가 원하는 자에게 주노라”(눅 4:6)라고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넘겨주신 것이기에 자신이 원하는 자에게 줄 것이라고 제안한다. 마귀의 이 제안은 십자가 없이 쉽게 목적을 이룰 수 있는 길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28:18)라는말씀에 비견하면 땅적인 것에 불과한 것이었다. 그래서 예수님은 “사탄아 물러가라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10절)라고 말씀하셨다. 이 역시 신명기 말씀이다.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를 섬기며 그의 이름으로 맹세할 것이니라(신 6:13)
이 말씀의 문맥은 우상숭배와 연관되어 있으며 이는 출애굽기 32장의 금송아지 사건을 기억나게 한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광야의 시험에 실패하지만 진정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그 동일한 시험에서 승리하심으로 궁극적인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성취하셨다. 마귀가 제공하는 것은 떡과 이적과 세상의 영광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 시험이 세 가지라는 말이 아니다. 시험의 총체를 세 가지로 표현한 것이다. 예수님은 철저히 말씀 안에 계셨고 십자가를 향한 하나님의 뜻과 약속에 자신을 맡기셨다.
첫째 아담은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하나님만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마귀가 주는 다른 영광을 기대했다. 이러한 실패에 반하여 예수님은 둘째(마지막) 아담으로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로 언약을 성취하셨다(고전 15:45, 롬 5:12, 19). 이것은 누가가 예수님의 족보를 아담까지 소급하고 이것을 둘째 아담(예수님)의 시험에 대한 기록과 연결시키고 있음에서 더욱 분명하게 드러난다(눅 3:38-4:1). 예수님은 광야 40일 동안 마귀의 시험을 이긴 새 이스라엘의 대표자로 자신을 드러내셨다. 그러므로 이 모든 일은 단순히 시험이 아니라 예수님의 십자가를 미리 보여주신 구원 사역이다.
결국 예수님의 시험은 그리스도로서 구속 사역의 선취이다. 그래서 예수님의 사역 가운데서 귀신들을 쫓아내심이 이 사건에 근거해 있다. 다시 말해서 귀신들을 쫓아내는 것은 그의 사역이 시작되었을 때, 즉 사십 일의 시험에서 승리하심으로써 이미 성취된 것의 전리품이다(마 12:28, 눅 11:20). 하나님의 나라는 먼저 마귀의 통치와 죄의 세력을 격파하는 일을 통하여 올 수 있도록 시험을 받으셨다(요 12:31-32을 보라/요일 3:8, 요 16:33).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부터 온 것이라(요일 2:16)
예수 그리스도와 한몸된 교회요 성도는 세상의 영광을 추구하는 자가 아니라 십자가의 길을 가는 자이다. 이런 점에서 오늘날 세상에서의 행복과 세상에서의 영광을 추구하는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와 한몸된 교회일 수 없다. 십자가 없이 세상의 문제를 해결해 주는 예수님, 병 고치는 이적을 나타내는 예수님을 섬기는 나 자신이 바로 마귀요 원수이며 그런 존재에게 생명을 주신 것이 십자가 은혜이다(20231217 강론/주성교회 김영대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