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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철스님의 돈오점수설 비판에 대하여 (3)
박성배 (뉴욕주립대학교 스토니브룩 종교학과 불교학교수)
7. 돈오점수파와 돈오돈수파, 무엇이 다른가?
돈오점수설은 해오를 출발점으로하여 깨친 다음에도 부지런히 오래오래 닦는 점수에 묘미가 있다. 이것은 어린이가 탄생하여 계속 자라나는 것에 비길 수 있다. 자라나는 과정에 가지가지 훈련도 다 받고 육도만행을 다 닦는다. 이리하여 마침내 훌륭한 어른이 되는 것이다. 어린이로 태어남이 전미개오요, 어른으로 성장함이 전범성성이다. 이것이 증오(證悟)의 경지이다. 그러나 돈오돈수설은 잡담 제하고 오직 화두에 대한 의심 하나로 밀고 나갈 뿐이다. 중간에 별 신통한 경지가 다 벌어져도 그런 것에 한눈 팔지 말아야 한다. 망상이란 망상, 번뇌라는 번뇌는 추호도 남김없이 모두 다 없어진 오매일여의 경지를 거친 다음의 구경각만이 참다운 깨침이다. 전자는 지해를 길잡이로 썼고 후자는 지해를 설비상이라 했다. 이상을 도표로 그려 비교해보자.
| 돈오점수파 | 해오—점수 | 만행겸수-증오 |
| 돈오돈수파 | ?—간화 | 삼관돌파—구경각 |
양자는 표면상 매우 다름에도 불구하고 위의 도표를 통해서 보면 양자는 구조적으로 매우 흡사하다. 첫째 양자가 다 구경각을 인정하며 구경각을 궁극적인 목표로 삼고 있다는 점이 같다. 그리고 또한 양자가 증오 이전에 어떤 형태로든지 수(修)의 필요성을 인정하고 있다는 것도 같다. 다만 전자가 해오를 출발점으로 삼는데 반하여 후자는 이에 해당하는 것이 없다. 그러나 후자를 잘 관찰해보면 후자 또한 해오라는 말만 안썼을 뿐이지 그 비슷한 것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도대체 해오에 해당하는 자각같은 것이 전혀없이 어떻게 간화에 몰두할 수 있으며 또한 삼관돌파의 용맹정진이 가능할 것인가? 오(悟)자를 쓰기 싫으면 화엄학자들이 쓰는 신해(信解)라는 말을 써도 좋다. 교리적으로 믿건, 스승의 말을 믿건, 그 어떤 신비적인 영감이나 체험을 미건, 무엇인가가 있어야 그로 말미암아 수가 시작되고 수가 계속되고 그리하여 마침내 구경각을 성취할 것 아닌가? 움직이지 않던 놈이 움직이기 시작하려면 움직이지 않는 놈을 움직이게 하는 힘이 어디에서 나와야 한다. 보조스님은 이 힘이 나오는 곳을 ‘해오’라고 불렀다. 성철스님의 경우는 이것을 무엇이라고 밝히지 않았기 때문에 그 칸을 비어 놓아두고 그 속에 ? 표만 찍어 놓았지만, 성철스님이 화두를 주기 전에 ‘삼천배’를 시키거나 또는 ‘백일법문’같은 것을 해주어 화두 받는 사람으로 하여금 다시는 우왕좌왕하지 않도록 생각을 정리해주는 것이 아마 이에 해당할지 모른다. 물론 보조스님은 해오가 결코 단순한 지식이 아니고 부처님의 탄생임을 누누히 강조한다. 그럴 경우엔 해오 이전에 성철스님의 법문에 해당하는 교리학습 시기를 상정하지 않을 수 없고 성철스님의 경우엔 법문 다음에 보조스님의 해오에 해당하는 경험이 뒤따른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러한 과정을 다시 도표로 그려 비교해보자.
| 돈오점수파 | 교리학습-해오—점수 | 만행겸수—증오 |
| 돈오돈수파 | 백일법문-?—간화 | 삼관돌파—구경각 |
위에 그린 두개의 도표를 통하여 우리는 겉보기에 전혀 다른 두개의 수행이론이 ‘구조적으로’ 매우 흡사하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렇다면 양자의 근본적인 차이는 어디에 있는가? 차이는 상대방의 비판을 통해서 드러난다. 후자는 전자를 비판하여 ‘해오에 의지해서는 증오에 이를 수 없다’고 말하고 전자는 후자를 평하여 ‘먼저 해오가 없으면 아무도 구경각에 도달할 수 없다’고 말한다. 여기서 문제는 ‘해오가 무엇이냐’고 좁혀진다. 보조스님은 처음부터 끝까지 해오를 증오로 혼동한 적은 한번도 없었다. 오히려 ‘해오 가지고는 안된다. 지견의 병통을 털어버리기 위해서는 화두를 들고 용맹정진하여야 한다’고 항상 강조하였다. 그렇다면 해오는 증오가 아니라는 점을 논지로 하는 성철스님의 비판논리는 문제의 초점에서 빗나가고 있는 셈이다. 성철스님의 돈오점수설 비판은 결국 지해의 성격을 지닌 깨침을 깨침이라 명명했다는 것을 시비하는 정명론(正名論)밖에는 안된다. 성철스님은 참선하는 사람이 보조스님의 돈오점수설에 영향 받아 해오를 증오를 오해하여 자만심을 일으키고 용맹정진을 안하게 되었다고 비난하지만 과연 그게 모두 보조스님의 돈오점수설 탓이라고 말할 수 있을지 의심스럽다. 그러한 논리는 돈오돈수설의 ‘돈수’라는 개념 때문에 요즈음의 불교인들이 수도를 하지 않게 되었다는 혹자의 논리나 다를 바 없다.
8. 성철스님에게 바라는 것
‘돈오점수설은 화엄교가들에게 영향받은 지해종사들이 하는 소리이고 돈오돈수설은 조계적자이며 본분종사인 마조스님과 그 후예들이 하신 말씀이다’. 이것은 성철스님이 즐겨쓰신 분류법이다. 그러나 보조스님의 돈오점수사상은 결코 그렇게 간단한 학설이 아니다. 아무 신념도 없고 아무 체험도 없이 무책임하고 무성의하게 일시의 재주기운으로 만들어놓은 학설이 아니라는 말이다. 여기서 말하는 성의(誠意)란 말 한마디 한마디에 책임을 지는 태도를 의미한다. 말하기 전에 생각하고 또 생각하고, 그런 다음 실험하고 또 실험하고, 무수히 생각하고 무수히 실험하여 평생의 공을 들이고 그러면서도 여전히 두려운 마음으로 조심스럽게 내놓은 것이 보조스님의 돈오점수사상이다. 생각해보자. 몇 년 걸려 이룩된 사상인가. 가장 초기의 작품에서 가장 말기의 작품까지 줄기차게 주장했고 따라서 여러 고비의 사상적 변천을 거쳐 화엄사상과 조사선 도리까지 껴안으면서 쌓아올린 칠전팔기의 사상탑이 이른바 보조스님의 돈오점수설이다.
여기서 유교집안의 일이지만 퇴계와 고봉에 대한 율곡선생의 인물평가가 생각난다. 그가 두 분의 사단칠정왕복서(四端七情往復書)를 처음 읽고 나서 불평을 털어놓았다. ‘고봉의 글은 대쪽을 쪼개듯 분명한데 퇴계의 글은 앞뒤로 말이 되지않는 곳이 많아 몇 번을 읽어도 잘 모르겠다’고. 그러나 마지막에 가서는 ‘고봉의 당당한 논리는 일시 재주기운으로 그런 것이니 고봉의 학문이 어찌 퇴계의 도학을 당하겠느냐’고 평했다. 율곡선생이 퇴계자손을 기쁘게 하기 이해서 이러는 것도 아니고 고봉을 헐뜯기 위해서 이러는 것도 아님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공부란 원래 이런 것이다. 퇴계의 공부하는 자세는 참으로 본받을만 했었다. 퇴계는 자기 말에 책임을 지는 사람이었다. 매사에 자기의 있는 정성을 다 들이면서 성의로 세상을 사는 실천위주의 도학자이었다. 이 점에서 퇴계선생은 보조스님을 꼭 닮았다. 보조사상과 퇴계사상의 생명이 왜 그리 질긴가? 그 자체가 거짓없는 생명이기 때문이다. 거듭 밝히는 바이지만 두 분 다 재주기운으로 인생을 사신 분이 아니었다. 두 분의 주장은 모두 재주기운으로 만들어놓은 학설이 아니다. 말이야 좀 안되어도 그런 것엔 크게 신경쓰지 않았다. 당신들이 지금 살고있는 삶이 진솔하게 드러나지 않으면 그것이 더욱 괴로운 그러한 사람들이었다. 앞뒤 말이 잘 안되는 것이 당신들의 삶이라면 그것을 솔직하게 그대로 드러내놓아야 더 마음이 편했던 분들이다. 당신의 삶을 떠나서 따로 글을 쓰지 않았던 분들은 이 세상에 많지 않았다. 보조스님은 그런 드문 분 중의 한 사람임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보조스님의 절요는 1486년부터 1701년까지 215년 동안에 23종의 다른 판본이 나왔었다. 이것은 한국역사상 유례가 없는 일이다. 이 사실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고 박종홍교수가 일찍이 보조스님을 다음과 같이 평한 적이 있었다. ‘만일 외국학자들이 너의 나라에도 철학자가 있었느냐고 묻는다면 나는 서슴치 않고 순천 송광사에서 만년을 보내신 보조스님을 들겠다. 나는 평생 지눌이 지은 절요처럼 이슈가 뚜렷하고 논리가 명쾌한 철학서는 동서고금을 통틀어 따로 본적이 없다’. 그런데 성철스님은 해인사 강원에서 절요를 가르치지 못하도록 엄명을 내리셨다고 한다. 만일 이것이 사실이라면 오늘날 우리들이 납득할만한 이유를 제시하여야 할 것이다. 만일 해인사 강원 학인들이 모두 성철스님의 지도하에 참선을 한다면 스님의 지도노선에 위배되는 책을 못읽게 한다 해도 하등의 이의를 제기하지 않겠다. 그러나 지금 학인 가운데 과연 몇사람이나 스님의 참선지도를 받고 있는가? 뿐만 아니라 성철스님은 학인들이 규봉 종밀의 ‘도서’를 공부하는데 대해서는 아무 말씀도 안하신다고 한다. ‘도서’나 ‘절요’나 돈오점수를 주장한다는 점에서는 똑같은데 왜 중국 것은 가르치게 놔두고 한국 것은 못가르치게 하시는지 그 이유를 알고 싶다.
오늘날은 분서갱유의 시대가 아니다. 없앤다고 있는 것이 없어질 것이며, 못보게 한다고 사람들이 그것을 안볼까? 보조스님의 ‘절요’에 정녕 잘못이 있으면 이를 가르치면서 어디가 어째서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닫다록 해주어야 할 것이다. 지금의 해인사 강원은 옛날의 수도원이 아니다. 옛날의 높은 담은 모두 무너지고 말았다. 지금의 조계종은 옛날의 임제종이 아니다. 조계종 종도 가운데 과연 몇사람이나 임제가풍으로 살고 있는가? 도대체 옛날 임제가풍으로 산다는게 현실적으로 가능한가? 법이란 무슨 법이든 사람들이 존중해야만 법노릇을 할 수 있다. 존중하지도 않는 법을 지키는 사람은 업다. 강권 때문에 또는 이해관계 때문에 어찌할 수 없이 지키는 법은 종교인이 마음으로부터 존중하는 법이 아니다. 성철스님의 절요공부 금지령은 보다 많은 사람들이 보조스님의 절요도 공부하고 또한 성철스님의 선문정로도 공부하여 양자의 장단점을 잘 알 때만이 그 의미를 갖게 될 것이다. 사실 선문정로의 출판으로 한국에 새로운 선풍이 일어나는 것 같더니 이제 절요를 못가르치게 한다는 소식을 들으니 독재정권의 언론탄압을 보는 듯 마음이 답답하다.
보조스님과 성철스님, 필자는 개인적으로 이 두 스님으로부터 큰 학문적 은덕을 입었다. 불교를 믿기도 전에 한 의학도로서 생전 처음 읽은 불교책이 ‘보조어록’이었다. 이것이 우연인지 필연인지 알 길은 없지만 지금 생각해도 그것은 퍽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만약 그때 성철스님의 ‘선문정로’를 먼저 읽었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 십중팔구는 큰 스님의 뜻을 이해할 수 없었을 것이고 따라서 아무런 영향도 받지 못하고 말았을 것만 같다. ‘누가 옳으냐’는 그 다음 문제다. ‘보조어록’이야말로 그 당시의 나에게 꼭 필요한 책이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 정말 어리석은 사람에게 갈 길을 가르켜 준다는 것은 목마른 사람에게 감로수를 주는 것처럼 중요한 일이다.
‘보조어록’은 지금 읽어보아도 여전히 감로수를 마시는 것처럼 좋다. 왜 그럴까? 보조스님의 인품이라 할까, 인격이라 할까, 그 비슷한 어떤 것이 지금도 살아있어 스님의 책을 펼치고 읽어 내려가노라면 꽃의 향기처럼 나의 온몸에 스며드는 것만 같다. 보조스님의 그 간절하고 정성스러운 것은 스님이 쓰신 글의 한 글자 한 글자에 듬뿍 배어있어 이것이 독자를 감동시키는 것 같다. 나의 개인적인 경험으로 보아서 보조스님의 돈오점수설이 설사 이론적인 결함이 있다 할지라도 그것 때문에 내가 거만해지거나 나태해졌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내속에 항상 도사리고 있는 교만과 나태는 온전히 나 자신 때문에 생긴 것이지 결코 보조스님 때문에 생긴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필자는 지금도 성철스님의 은혜를 잊지 못한다. 1967년 동안거때 해인사에서 하신 성철스님의 백일법문을 필자가 직접 듣지 않았더라면 돈오돈수의 세계를 영영 이해하지 못하고 말았을지도 모른다. 보조스님의 책임은 아니었지만 성철스님을 만나기 전의 나는 돈오점수의 틀에 갇혀있었다. 다시 말하면 성철스님이 지적하신 것처럼 돈오점수의 돈오와 돈오돈수의 돈오에 대한 명확한 구별을 할 줄 몰랐고 해오에 대한 병리학적인 진단을 내릴 줄 몰랐다. 그렇기 때문에 돈오에 대한 갈증이 없었다. 돈오에 대해서 ‘꿈에도 모른다’는 캄캄함이라 할까, 답답함이라 할까, 그런 것이 없었기 때문에 점수를 한다고 매우 유유자적한 것 같으나 사실은 나태한 생활을 되풀이하는 것이었다. 번뇌와 망상이 여전한 것을 조금도 개의치 않았고 매일 매일이 똑같은 잘못의 되풀이였다. 돈오에 대해서 무엇인가 아는 것 같았기 때문에 견성에 대해서도, 화두공안에 대해서도 캄캄함과 답답함의 농도가 짙지 못했었다. 성철스님은 내 병을 여지없이 지적해주셨고 움직이지 않던 차를 다시 움직이게 해주셨다.
그러나 지금은 단도직입적으로 성철스님께 여쭈어 보지 않을 수 없다. 돈오돈수를 주장하시는 스님은 돈오돈수하셨습니까? 그리고 스님의 지도를 받은 사람들 가운데 그러한 경험을 가진 사람이 과연 몇이나 나왔습니까? 좀 더 구체적으로 말씀드려서 스님께서는 언제 어디에서 오매일여의 경지에 들어가셨으며 또한 거기서 얼마동안 계시다가 나오셨습니까? 이젠 제8 아라야의 미세망념까지 다 없어지셨습니까? 믿지 못하는게 박복한 탓이라 하지만 아무런 증거도 없고 아무런 설명도 없이 믿으라는 것도 딱한 노릇이다. 마조 제자 80여명 중에 정안은 수삼인이라는 황벽의 증언이 사실이라면 오늘날 지구상에 무수히 많은 길잃은 사람들을 성철스님은 무슨 수고 다 제도하시겠습니까? 사홍서원(四弘誓願)을 조석으로 외우면 된다고 하시겠습니까? 무자화두(無字話頭)로 용맹스럽게 정진하면 된다고 하시겠습니까? 사홍서원을 외우던 사람들이 사홍서원을 외우지 않고 화두를 들던 사람이 화두를 들지 않는 우리의 기막힌 현실을 조계종 종정이신 성철스님께서는 보시고 계십니까? 한번 여쭈어 보지 않을 수 없다.
9. 맺는 말
왜 우리는 지금 돈오점수를 문제 삼는가? 성철스님이 선문정로를 출판하여 돈오점수설을 비판했기 때문인가?
아니면, 그 보다 먼저 보조스님이 돈오점수설을 주장했기 때문인가 ? 성철스님이 돈오점수설을 비판하기 전에, 보조 스님이 제기한 것은 성철스님이나 보조스님의 문제이기 전에 먼저 수행 에 관심있는 불교인이면 아무도 피할 수 없고 또한 피해서 도 안 되는 중요한 문제이다. 우리들은 오늘 그 문제를 다루어야 한다. 그 문제란 다름아닌 '깨침과 닦음의 문제이다. 깨침이 왜 문제되는가? 깨치지 못했기 때문이다. 왜 닦음이 문제되는가? 닦지 않기 때문이다. 누가 감히 '나는 깨쳤노라. 나는 닦았노라'고 뽐낼 수 있으랴. 있다면, 그는 십중팔구 자기가 깨치지 못했다는 것도 아직 깨닫지 못하고 있는 사람이기 쉽다.
깨침이란 무엇이며 닦음이란 무엇인가? 그리고 양자의 관계는 어떤 것이어야 하는가? 돈오점수라야 하는가? 돈오돈수라야 하는가? 이러한 문제들을 속 시원하게 풀어 줄 수 있는 열쇠는 역시 '깨침' 이라는 독특한 경험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보조스님의 깨침, 성철스님의 깨침, 그리고 이에 대한 질문자 자신의 깨달음이 분명해지지 않는 한, 우리들의 모든 논의는 허공에다 논문 쓰는 것처럼 헛되고 말 것이다.
우리들의 대화에서 "깨침이란 말은 두 가지의 서로 다른 역할을 할 때가 있다. 첫째는 깨침이란 말이 하나의 구체적인 사건을 밝히기 위해서 쓰여지는 경우이고, 둘째는 그것이 깨침의 궁극적인 내용을 밝히기 위해서 쓰여지는 경우이다. 깨침이란 말이 누군가의 각체험 (覺體驗) 이라는 구체적인 사건을 가리킬 때, 우리는 어느 누가 언제 어디서 어떤 깨침을 얻었느냐는 식으로 현상계에 나타난 누군가의 구체적인 특수 경험을 문제삼게 된다. 그러나 그 말이 각체험의 본질적인 내용을 가리킬 때는 특수한 것은 모두 배제되고, 대신 깨침의 보편적인 본질같은 것이 크게 문제된다. 이러한 구별을 명확하게 하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깨침은 원래 둘로 분할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화의 편의상 학자들은 옛날부터 꾸준히 이러한 해석학적 이론을 발전시켜 왔다. 화엄철학에 익숙한 사람들은 전자를 깨침의 사적 (事的) 인 면이라 말하고, 후자를 깨침의 리적 (理的) 인 면이라 말했으며, 서양적 표현을 즐기는 사람들은 전자를 깨침의 인식론적(認識論的)인 측면이라 말하고, 후자를 깨침의 존재론적(存在論的)인 측면이라 불렀다.
모든 인간의 체험이 다 그렇듯이 불교인들의 깨침이라는 체험도 하나의 생명현상이기 때문에 이를 체와 용, 리와 사, 보편과 특수, 또는 서양의 인식론과 존재론등의 상대개념으로 분석해 버리면, 분석하는 그 순간 깨침만이 갖는 고유한 생명은 죽고 만다. 따라서 어폐는 생기기 마련이고 그래서 자신의 직접 체험을 가장 소중히 여기는 선가에서는 옛부터 이러한 접근방법을 철저히 금지해 왔다. ‘지해는 선가의 최대 금기’ 운운하는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지금 보조스님의 돈오점수설이 독수생정이냐 아니냐를 따지는 중요한 사명을 지니고 이 자리에 모였다. 진정, 그것이 독수생정이면 성철스님이 주장하는 것처럼 베어내야 할 것이요. 그렇지 않다면 왜 그렇지 않는가를 철저히 밝혀 내야할 것이다. 이러한 작업을 성공적으로 수행하기 위해서 우리는 설사 어폐가 있더라도 도움될 만한 모든 해석학적 도구들을 원용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므로 이 자리에 모인 우리들은 선승의 선적 발언 (禪的 發言)과 학자의 학적 작업(學的 作業)을 흔동해서는 안 될 것이다.
깨침을 사(事)로 다룰 때 가지가지의 질문이 속출한다. 여기서는 "깨치기 이전" 과 "깨친 다음" 의 구별을 엄격 하게 해야 하고, "이미 깨친 상태"와 아직 깨치지 못한 상태"의 구별을 분명히 하여 "진짜 깨침"과 "가짜 깨침" 의 구별을 철저히 해야 한다. 그러나 우리들이 일단 깨침을 리(理[MT1] )로 다루면, 일체의 인위적인 것들은 일시에 자취를 감추어 버린다. 여기서는 시간도 부정되고 공간도 부정되고 부처님도 역대조사도 일체경전도 모두 빛을 잃는 다. 물론 깨치기 이전"과 "깨친 다음" 이라는 구별조차 문제되지 않는다. 깨침이라는 말은 똑같은데 이를 사(事)로 다루느냐 아니면 리(理)로 다루느냐에 따라 대화의 내용이며 분위기는 판이하게 달라진다.
'보조스님의 돈오점수설이 과연 진실로 깨친 사람의 소리냐 아니냐?' 하는 질문이나 '성철스님이 정말 돈오돈수했 을까?' 하는 질문이 모두 깨침을 사로 다루는 데서 나온 질문들이다. 그러나 우리들이 일단 깨침을 리로 다루면 그 땐 이러한 질문들이 붙을 자리가 없어지고 만다. 해오건 돈오건 따질 것 없이 '일체 중생이 있는 그대로 모두 완전 한 부처님' 이라는 말 밖에는 할 말이 없어지고 만다. 일체 중생이, 너나 할 것 없이, 누구나 있는 그대로, 바로 이 자리에서, 들어마신 숨 내쉬기 전에, 낸 숨 들어 마시기 전에, 하나도 더 보탤 것 없고 하나도 더 빼낼 것 없이, 문자 그대로 완전한 부처님이라면, 깨침을 사로 다룬다는 것 자체가 우스운 일이다. 동시에 깨침을 닦음과 결부시켜 점수(漸修)니 돈수(頓修) 니 말하는 것 또한 우스운 일이 되고 만다. 다시 말하면 깨침을 논하는 마당에 닦음을 끌어 들이는 것 자체가 우스운 일이라는 말이다.
점수건 돈수건 물을 것 없이, 일체의 수 (修)가 붙을 자리가 없는 것이 깨침이라면, 왜 보조스님은 깨친 다음의 만행겸수를 역설했으며 성철스님은 왜 깨치기 이전의 오매일여를 강조하는가? 이는 모두 깨침을 사로 다루기 때문 이다. 깨침을 사로 다루지 않을 수 없는 이유는 두 가지로 요약될 수 있다. 첫째는 모든 사람이 현실적으로 구체적인 사적 존재로 살고 있기 때문이며, 둘째는 사람들이 아직 깨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미(迷) 한 사람들은 '일체중생이 있는 그대로 모두 완전한 부처님' 이라는 사실을 모르고 있기 때문에 이들로 하여금 이 사실을 깨닫게끔 해주어야 한다. 그리고 이런 일은 단적으로 사에 속한다. 깨침의 내용은 리이지만 이것이 개개의 미한 사람 들과 관련될 때는 이를 사로 다루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렇지만 사로서의 깨침은 리로서의 깨침을 배반해서는 안 된다. 이런 경우, 사는 필연적으로 수 (修)의 문제와 관련 되게 된다. 이것이 '닦음'의 문제가 가지고 있는 독특한 구조이다. 다시 말하면 '닦음’이야말로 리 (理)적인 깨침이 사(事)로 다루어질 때 맨 먼저 부딪치는 일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의 과제는 우리의 선배들이 깨침을 사(事)로 다루면서 리 (理)적인 깨침에 얼마만큼 충실하 고 있는가를 검토하는 일이라 말할 수 있다.
우리는 위에서 말한 구별법을 가지고 돈오점수의 돈오 와 돈오돈수의 돈오와의 차이를 따질 수 있다. 보조스님의 돈오점수적 돈오는 보편적인 본질로서의 깨침이다. 그리고 스님이 여기서 추구하는 문제는 깨침과 닦음과의 관계를 밝히는 것이다. 그러나 성철스님의 돈오돈수적 돈오는 하나의 사건으로서의 깨침이다. 그리고 여기서 겨냥하는 것은 어떤 수행자의 깨침이 진짜냐 가짜냐를 밝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양설의 추구하는 바가 서로 다름을 알아야 하겠다. 우리는 돈오돈수의 돈수를 돈오점수의 점수처럼 '닦음 을 이야기하는 것으로 오해해서는 안된다. 사실 돈오돈수라는 말 자체는 수 (修)에 대해서 전혀 언급을 회피하고 있다. '돈수'란 보통 우리들이 말하는 수를 부정하는 말이다. 불교에서 보통 수라 하면 사에 속하는 일인 데 돈수라는 말은 수가 사에 속하는 것을 거부하고 반대로 리에 속함을 선언하는 말이다. 그대로 수의 표현으로 삼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돈오할 때 돈수는 그 속에 포함되는 것이다. 정말로 '일체중생이 있는 그대로 모두 완전한 부처님이라면 이를 돈오할 때 곧 돈수이어야 마땅하다. 돈오면 돈수라는 말이 그 말이다. 돈수라야 돈오라는 말도 똑 같은 맥락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돈오돈수라는 말과 돈오점수라는 말을 똑 같은 문제에 대한 두 가지의 서로 다른 해답으로 오해해서는 안 된다. 돈오돈수는 한마디로 오(悟)의 성격을 이야기하고 있을 뿐 아직 우리들이 문제삼고 있는 일반적인 의미의 수 (修)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도 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된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돈오돈수라는 말 속의 수 (修) 라는 글자에 현혹 되어서는 안된다. 그들이 말하는 돈수는 수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고 사실은 돈오의 성격을 더욱 분명히 하기 위해서 돈오를 가장 잘 드러낼 수 있는 최적의 한정사인 돈수 (頓修)라는 말을 돈오라는 말뒤에 갖다 불여 놓았을 뿐이다. 그러므로 돈오돈수라고 말함으로써 밝혀진 것은 수 (修)가 밝혀진 것이 아니다. 밝혀진 것은 오(悟) 뿐임을 알아야 한다. 하나는 오만 밝혀지면 되었지 나머지는 더 말할 필요 없다는 식이고, 또 하나는 그래서는 안되고 수를 이야기 해야 한다는 식이다. 여기서 우리는 모든 이타적인 수행을 불문에 붙이고 오직 공안참구만을 생명으로 삼는 임제계통의 화두선하는 사람들이 왜 돈오든 수라는 말을 자기들의 구호로 삼고 있는지 납득이 간다. 자기들의 사는 모습과 구호가 잘 맞아 떨어지기 때문이라 하겠다.
그러므로 성철스님은 보조스님의 돈오점수설을 독수생정으로 몰기 전에 당신의 수 (修)에 대한 이론을 내놓아야 할 것이다. 사람의 삶이란, 그것이 누구의 것이건, 일종의 수 (修)의 성격을 지니고 있다. 그리고 수는 여러가지의 다른 사람과 부딪치고 여러가지의 다른 상황과 부딪친다는 것을 전제한다. 그러므로 만일 성철스님께서 보조스님이 문제삼는 의미의 수 (修)에 대해서 아무런 언급도 하지 않는다면 성철 스님은 화두선 근본주의자 (話頭禪 根本主義者)라는 비난을 면할 길이 없을 것이다. 여기서 화두선 근본주의자라는 말은 화두선 이외의 것은 그것이 무엇임을 막론하고 일체 생각하는 것 조차 거부하면서도 화두선과 다른 것은 무조건 다 틀렸다고 단정하는 사람들을 말한다.
이들은 잘된 것을 보면 모두 화두선에 영광을 돌리고 잘못된 것을 보면 모두 화두선 아닌 것에 그 책임을 돌린다.
근본주의자들은 세계의 도처에 있다. 회교 근본주의나 기독교 근본주의같은 종교적인 것에서 시작하여 정치적인 또는 문화적인 것에 이르기까지 세계는 지금 가지가지 의 근본주의 공해 (公害) 때문에 신음하고 있다.
한 마디로 이것은 아집과 아만의 산물이며 지금 세계를 위협하는 평화의 적들이다. 성철스님은 선사이다. 선사가 근 본주의자일 수는 없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지금 수도원 밖에서 날이면 날마다 화두선 이외의 것들과 상종하면서 살고 있는 절대 다수의 일반 불교인들을 위해서, 보조스님 의 만행경수 (萬行兼修)에 필적하는, 수행의 이론을 제시 해 주십사고 성철스님게 간청하는 것이다.
성철스님은 '깨침이라는 사건'을 중요시 했다. 이 세상엔 자기 자신에게 '깨침이라는 사건' 이 없었음에도 불구하 고 마치 '깨침이라는 사건'이 있었던 것처럼 꾸미는 사람들이 많다. 이런 일은 어떻게 해서든지 막아야 한다고 자임하고 나선 분이 성철스님이다. 그래서 스님은 '깨침'을 사 (事)로 다루면서 그 사속에 깨침의 내용을 확인하려 들었다. 그것이 다름아닌 돈오돈수다. 일체중생이 있는 그대로 모두 완전한 부처님이라는 깨침의 내용을 어느 개인의 깨침이라는 사건속에서 확인하는 것이다. 사실은 깨침이라는 사건을 아직 가지지 못했으면서도 마치 깨침의 사건을 가진 것처럼 깨침의 내용을 말하는 경우는 대개 재주 기운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재주의 작난이다. 이런 경우, 재주는 오 (悟)의 생명을 끓는 독약이나 다를 바 없다. 독약으로서의 재주에 일대 경각심을 일으켜 재주기운으로 하는 짓 은 깨침이 아님을 분명히 했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다. 비록 그것이 새로운 약은 아니라 할지라도 묵은 병이 여전히 유행하는 한, 묵은 약도 새 약이나 다름없이 소중 한 것이다.
보조스님은 돈오돈수를 거의 언급하지 않았다. 어쩌다 가 이를 언급하는 경우는 돈오점수설의 도식 속에서 언급했다. 예를 들면 돈오돈수는 상근기나 할 일이라고 말한다든가, 전생부터 이야기하면 돈오돈수도 돈오점수 밖의 딴 경우가 아니라고 말하는 경우이다. 이 때의 돈오돈수는 성철스님의 돈오돈수하고는 완전히 딴 뜻으로 사용하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이는 보조스님의 돈오점수설 체계속에서 돈오돈수를 해석한 것이라고 말할수 있다. 돈오돈수설은 깨침과 닦음을 하나로 보려는데 반하여, 돈오점수설은 깨침과 닦음을 분명히 둘로 나누어 이야기하고 있다. 그리고 돈오점수설이 증오로 가는 길임을 의식하고서 이를 변증하는 노력의 일환으로 돈오돈수설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리 (理)로서의 깨침과 사(事)로서의 음을 대비시켜 양자의 관계를 하나의 체계 속에서 다룰 때의 닦음은 돈오돈수의 닦음과 같을 수 없다. 돈오수의 닦음과 돈오점수의 닦음 은 혼동해서는 안 될 두 개의 서로 다른 닦음이다. 전자는 돈오의 내용을 설명하는 다음이기 때문에 보통의 닦음이 아니다. 후자는 돈오돈수적인 돈오를 인정하고 난 다음에 거기로 가는 인생의 길로서 점수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보조스님은 증오를 궁극의 이상으로 내세웠을 뿐, 증오를 구체적으로 이야기한 것은 없다. 증오는 영원한 미래라 는 성격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성철스님은 증오를 돈오돈수의 내용으로 내세운다. 그는 깨침을 사 (事)로 보면서 그 속에 리 (理)를 확인하려 든다. 이것은 매우 강력하고 탁월한 논리가 아닐 수 없다. 문제는 이러한 논리로 밀고 나갈 때 발생하는 여러가지의 현실적인 어려움들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수도지상주의자 ( 修道至上主義者)나 또는 깨침이외에는 이 세상 어떤 것에도 아무런 가치를 부여하지 않는 돈오근본주의자( 頓悟根本主義者)로 전락하지 않는 데 있다. 소위 지상주의자나 근본주의자는 그것이 어떤 형태의 것이건 항상 광신자로 변질할 위험이 있으므로 이 렇게 되면 이들은 결국 불교를 더 갈 곳 없는 막다른 골목으로 몰아 넣고 말 것이며 마침내는 불교를 현실로부터 고립시키는 결과를 가져오고 말 것이다. 물론 수도원제도가옛날처럼 잘 되어 있어서 한 사람의 눈 밝은 스승이 온 산중의 몇 천명 대중을 자기 손바닥 드려다 보듯 꿰뚫어 보면서 개개인에 대한 지도를 순간순간 철저히 할 수 있다면 그런 위험성이 없을런지 모른다. 그러나 오늘날 그것이 가능할지는 매우 의심스럽다.
여기서 우리는 돈오점수설과 돈오돈수설의 논쟁을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을 줄 안다. 돈오점수설이 '깨침의 본질'을 한 인간으로서 인간사회속에서 매일 매일 어떻게 살아야 하느냐 하는 '닦음의 문제와의 관계 속에서 이야기하는 매우 넓은 의미의 종합적인 수행이론이라면, 돈오돈수설은 이타적 보살행에 대한 관심표시나 구체적인 언급을 일체 거부하고 오직 깨침 하나만을 위해서 사는 깊은 산속 수도자들의 용맹정진반 경책 (警策) 과도 같은 매우 좁은 의미의 특수한 수도이론이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좁다는 말은 결코 나쁜 뜻이 아니다. 너무 특수하여 거기에 해당되는 사람이 극히 제한되어 있다는 말일 뿐이다.
성철스님은 용맹정진반 선승에게 필요한 좁은 의미의 특수한 수도이론을 만천하의 모든 사람에게 그대로
적용하려했다. 그러니 이상할 것도 없고 놀랄 것도 없다. 그러나 성철스님이 만천하의 모든 사람에게 적용될 수 있는 넓은 의미의 일반적인 수도이론을 제시하려고 애쓰는 보조스님 을 마치 이단처럼 몰아 붙인 것은 아무래도 좀 지나친 것 같다. 과거의 종교사를 살펴보면 이런 일이 도처에서 일어 났었다. 막힌 세상, 닫혀진 사회에서는 이런 일이 합리적으로 정당화되기도 했었다. 그러나 오늘날은 다르다. 수도원 에서 흘러나오는 시원한 소식도 사회의 다원성과 중생의 다양성, 그리고 현대의 민주성에 발 맞추어 전달되어야 한다.
성철스님의 돈오돈수설은 우리들의 깨침에 대한 자세를 바로 잡아 주었고 보조스님의 돈오점수설은 불교인들의 삶의 폭을 넓혀 주었다. 그래서 필자는 보조스님의 돈오점수 설을 '돈오돈수적 점수설'로 발전시키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한다. 돈오돈수적 차원이 없는 깨침은 선문의 깨침이 아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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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보조스님의 돈오돈수는 성철스님의 돈오돈수와 전적으로 같을 수는 없을 것이다. 그 다음 성철스님의 돈오돈수설도 보조스님의 점수적 차원을 가지고 있어야 할 줄 안다. 깨친 다음에 보살행 하겠다'는종래의 태도는 근본적으로 시정되어야 할 것이다. 지금은·돈오돈수만 외치고 앉아 있을 때가 아니라는 투철한 현실인식이 아쉽다. 이와 같이 말하면 혹자는 일종의 혼합설이라고 배척할지 모른다. 심한 사람은 도시 말이 안 된다고 비난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는 지금 말을 그럴듯하게 꾸미려고 애쓰기보다는 사실을 사실대로 여실히 드러내는데 더 힘을 써야 할 것이다. 누구의 학설이 옳으냐 또는누구의 말이 더 그럴 듯하냐도 중요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더 중요한 것은 우리의 현실을 바르게 보는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현실에 입각해서 이야기하고 그러한 현실을 위해서 이야기해야 한다. 이것은 약의 입장도 아니고 병의 입장도 아니고 오로지 않고 있는 중생의 입장에 서자는 말과 똑같은 말이다. 그러므로 우리들이 만일 보조설의 장점과 성철설의 장점을 모두 섭취하여 오늘의 현실을 재검토 하면 보다 폭넓고 깊이 있는 현실비판을 할 수 있을 것이며, 동시에 많은 사람들이 갈망하는 오늘의 수행이론을 제시할 수 있을 것이다. (끝)
* 주
*부록 : 보조스님의 돈오점수사상 해명에 필요한 연구과제
I. 돈오에 대하여
1. 돈오를 해오라 할때 그것과 증오와의 관계는?
2. 해오는 앎인가 깨침인가?
3. 해오를 지해라 할때 지해의 정체는 무엇인가?
4. 지해의 긍정적인 면과 부정적인 면.
3. 돈오돈수의 돈와와 돈오점수의 돈오는 어떻게 다른가?
6. 돈오한 다음에도 번뇌와 습기가 여전하다는 데에 대한 성스님의 평.
7. 해오는 곧 지해니까 교이고, 돈오는 증오니까 선이라는 분류법은 타당한가.
II. 점수에 대하여
1. 점수를 증오로 가는 길로 볼때 거기에 간화경문이 들어가는가?
2. 점수를 이타만행으로 볼때 이때의 의식은 간화적인가 또는 지적인가?
3. 그럴 때 간화적인 의식상태와 지적인 의식상태의 관계는 어 떠한가?
4. 점수를 전범성성의 과정으로 볼때 이것은 어린이가 어른되는 것 같은 성자의 의미인가 아니면 아직도 더 깰 것이 남아 있어서 여전히 전미개오의 과정의 연속인가?
5. 점수는 돈오의 정의를 배신하는 것인가?
6. 배신행위로 볼때 그때 비로소 참 인간으로 되살아난다는 말 은?
7. 밖에서 논리적 공식으로 볼때 배신행위로 보이나 실천자 자신은 보편자가 개별자로 다시 태어나 일하는 순간이 된다는말은 ?
8. 의오이수 (依悟而修)라 하는데 이때 어떻게 의(依)하는가?
점수시의 의오의 성격과 구조 및 오의 역할과 기능 등을 밝힐것.
9. 돈오돈수의 수와 돈오점수의 수는 어떻게 다른가?
10. 돈오점수의 수가 깨치기 위한 수라면 성철스님의 평이 옳지않은가 ?
11. 오전수는 가수요 진수가 아니라는 말의 뜻과 보조스님의 오를 지식으로 보려는 오류.
12. 수의 본질을 불오염과 만행겸수의 둘로 보고 이들 둘을 다 갖추어야 자타겸제라고 보는 보조스님의 의도는?
III. 돈오와 점수의 관계에 대해서
1. 돈오를 했는데 왜 또 점수가 필요하나?
2. 점수가 필요하다는 말은 꼭 그 돈오가 해오적이어서 아직 불완전하다는 말인가 아니면 인간은 원래 그렇게 되어 있는 것인가?
3. 돈오는 전미개오요 점수는 전범성성이란 말은?
4. 돈오점수를 이론과 실천으로 볼때 무엇이 풀리고 무엇이 안 풀리나? 이때 돈오를 완전히 지식으로 만들어 버린다는 많은?
5. 전미개오와 전성성은 따로 논해야하는 이론적인 측면과 양자를 함께 논해야 하는 실천적인 측면을 다 갖추어야 지눌의 돈오점수설이다.
6. 전미개오가 자타경제적인 전범성성으로 이어지지 않는 것을 오히려 이상하게 보는 보조스님의 참뜻은?
7. 돈오점수설이 하나의 학설로서 불교사회를 혁신하는데 쓰일 때는 양자의 관계를 이론과 실천의 관계로 볼 수 있으나 돈오점수설 속의 오와 점수의 관계는 이론과 실천의 관계가 아니라는 말의 뜻은?
8. 돈오점수설을 대사회적인 이론으로 볼때는 그 속의 돈오와 점수의 관계도 논리적인 관계로 다루어야 하지만 돈오점수설을 대내적으로 개개인의 내적인 수도 진행과정으로 볼 때는 그 속의 돈오와 점수의 관계도 체험중심의 실존적인 성격을 띄면서 역설적으로 돈오했기 때문에 오히려 점수한다는 구조를 가진다는 말은?
9. 돈오점수설의 특징은 그것이 수를 문제삼았다는 데에 있다. 이 말은 인간의 현실적인 일상생활을 문제삼았다는 말이다.이 점이 돈오돈수파와 갈라지는 대목이다.
10. 이론적으로 성스님의 돈오돈수설은 불이론 (不二論)같고 보조스님의 돈오점수설은 이원론 (二元論)같은데, 현실적으로 돈오돈수설은 돈오돈수주의자들을 사회로부터 격리시켜 놓았고 반대로 돈오점수설은 사람들을 사회속으로 들어가게 하였다.
11. 돈오돈수와 돈오점수는 상극인가?
12. 간화경절문은 돈오돈수설의 전유물인가 아니면 돈오점수설 과도 공존이 가능한가?
13. 보조사상은 회사상인가 아니면 특징없는 혼합일 뿐인가?
1991년 2월호 10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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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 과오속에 사는 이슬람 경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