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시작》 신인상 당선작]
붉은 방
차성환
트럭에 실린 토마토가 가파른 비탈을 오른다
개들은 혓바닥을 토해 내며 뒤를 쫓고
트로트에 맞춰 들썩이는 토마토
토마토가 왔어요 맛 좋고 싱싱한 토마토
확성기에 들어간 토마토가 온 동네를 구르며 깨우다
부서진 담벼락 앞에 멈춘다
포클레인이 커다란 아가리를 쳐들고 있다
집과 집이 바짝 맞닿은 크레바스의 깊은 골목에서
아이들은 곰팡이 핀 얼굴로 기어 나오고
아줌마들이 넝쿨 같은 손가락을 뻗는다
한 손 한 손 건네받은 토마토를
가슴팍에 묻어 조금씩 베어 문다
아이들은 토마토 힘줄을 물고 빨고
개들은 바닥에 터진 토마토를 할짝거린다
이곳에는 누구나 다 기울어져 산다
쓰러지지 않게 어깨를 기댄 판자촌
깨진 유리창 너머,
아직 철거되지 않은 생이 붉은 방을 켜고
채 익지 않은 밤을 기다린다
한없이 부풀어 오르는 토마토
그림자를 널어놓은 빨랫줄 위로
발갛게 무른 달이 떠오르고 있다
모래 여자
오지 않는다 모레 온다고 했던 모래 여자, 새끼손가락 걸고 약속했건만 떠나자마자 사채업자가 들이닥쳐 잘라 버렸다 모래밥을 안쳐 놓고 오지에 가서 오지 않는 여자 오늘 밤도 내일 밤도 아닌 모레 온다고 한 여자 잘린 손가락에 대마초가 피고 냄새를 맡은 경찰이 철문을 두들긴다 방구석에 놓인 관 뚜껑이 열리고 삼베옷을 입은 아버지가 튀어나온다 아버지는 대마 잎을 염소처럼 뜯어 먹고 나는 염소젖을 쓰다듬으며 음마음마 소리내 운다 모레에 오지 않을 것 같고 와도 안 될 것 같은 여자 귓가엔 사이렌 소리가 울리고 도시는 황사로 가득한데 치맛자락을 붙잡은 내게 모레에 올게 모래를 흩뿌리며 사라진 여자 뻑뻑한 눈알을 긁어 대는 나를 두고 모레 온다며 떠난 여자 모래를 씹으며 모레를 세면 손가락들이 모래로 떨어지고 방 안에 나 대신 모래 한 푸대 부려 놓고 달아난 여자 대마 꽃처럼 푸슬푸슬한 붉은 입술로 도망간 모래, 모레, 모래 여자
검은 구두
발을 집어넣다가 물컹한 쥐를 밟은 후로는 팬티도 뒤집어서 털어 입는다 가끔씩 바퀴벌레가 기어 나오고 여자의 긴 머리카락이 뽑혀 나오는 검은 구두, 뒤꿈치가 까지고 새끼발톱이 뭉개져 피 칠갑을 하며 내 발을 길들인 검은 구두 봄날의 잔디를 깔창에 깔고 뽀송한 구름을 구겨 넣고 습기 제거 해충 박멸의 구호를 외치던 그해 여름 아스팔트 위로 천 개의 구두가 달려오는 장마가 지나가고 가을이 와도 구두 속에는 계속 비가 내린다 어디선가 시체 썩는 냄새가 나고 나는 비를 피해 숨어 다닌다 내 발은 불어 터져 구두를 벗을 수 없는데 미칠 듯이 가려운 발등을 뒷굽으로 찍어 댄다 점액질을 흘리며 나를 끌고 다니는 검은 구두, 간신히 구둣방을 찾아 발을 내밀자 이 구두는 당신 발이라니까 의사의 멱살을 잡고 바닥에 주저앉아 밑창을 뜯어 보지만 우라지게 튼튼한 겨울 아무도 찾지 않는 숲의 제철소를 찾아가 용접가위로 검은 구두를 뜯는다 울컥울컥 검붉은 핏물이 터져 나오는 검은 구두 손바닥만 한 날개를 편 바퀴벌레 떼가 날아오르고 머리카락이 수챗구멍을 꽉 막아 죽은 쥐가 물 위로 떠오른다 나는 소스라치게 검은 구두를 집어 던지고,
다시 까맣게 때가 타기 시작한 새 구두를 신은 맨발이 흰 눈밭을 걸어가고 있었다
Ah! Monde
이빨 사이에서 와그작 부서진다 툭 툭 터진다 사방으로 파편이 튀고 사람들이 숨는다 아몬드 4년 전 떠나간 애인한테서 전화가 온다 수화기가 없이 벨만 울린다 아몬드 오래전 죽은 아버지가 입술을 움직이지 않고 말을 한다 안방으로 들고 간 밥상을 물끄러미 보고만 있으신다 아몬드 햇빛이 아이스크림 위에 아몬드처럼 부서진다 나는 놀이공원에 혼자 눅눅해진 콘에 담겨 흘러내린다 아몬드 육개장에 얼굴을 파묻고 퍼먹는다 떨어지는 눈물에 국물이 줄지 않는다 아몬드 어머니의 주름치마를 잡은 손 안에 계속 주름이 접혀 들어온다 나사 하나가 손에 들려 있다 아몬드 석가모니 그림자 서린 수자타 마을의 강을 건넌다 발목이 물에 흘려 떠내려간다 아몬드 숨을 참고 물속으로 들어간다 나는 항상 이불 속에서 질식사 직전에 빠져나온다 아몬드 가슴 위에 포개 놓은 손이 박쥐가 돼서 파닥거린다 방 안을 날아다닌다 아몬드 머리가 달아난 검은 지네가 입속에서 기어 나온다 와그작 와그작 아몬드 사이에서 이빨이 부서진다
모시모시
흰 벽지에 검은 못이 박혀 있다 콘크리트 벽을 뚫고 들어간 못의 뿌리가 자란다 검은 실 줄기가 밤새 퍼져 나가 베개 위에 긴 머리카락을 펼쳐 놓는다 못에 걸어 둔 시계가 시간을 잃고 초침이 경련한다 아기 울음소리가 들린다 못의 뿌리가 기어간다 장롱에서 그물에 감긴 아기가 끌려 나온다 벽의 모서리에서 시멘트 가루가 조금씩 떨어진다 바짝 마른 동공을 등 뒤에서 뻗어 나온 모세혈관이 움켜쥐고 있다 몸에 있는 점들이 천장에 달려가 별자리처럼 박힌다 슬금슬금 다가오는 검은 못의 촉수, 살갗이 곤두선다 점이 있던 자리에 핏물이 맺힌다 서랍 속 장도리를 꺼내 구석에서 울고 있는 아기를 내려친다 시계를 부순다 이놈의 못이 이놈의 못이 장도리의 쇠발톱에 못을 걸어 뽑는다 끌려 나오는 검은 뿌리 헐떡거리는 못을 뿌리째 씹어 먹는다 못이 빠진 구멍에 터진 수도 배관이 검붉은 피를 쏟아 낸다 방 안에 핏물이 고인다 나는 축축한 웅덩이 한가운데서 깨어난다
차성환
1978년 서울 출생.
서울예술대 문예창작과 졸업.
한양대학교 국어국문학과 박사 과정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