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작 1년 전에 마라톤에 데뷔한 황영조는 아직 세계적 수준이 아니었고 올림픽 챔피언 감도 아닌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황영조는 올림픽사에 남을 명승부로 '몬주익의 영웅'이 된다. 초반부터 선두권을 달리던 황영조는 결승선을 3㎞ 정도 남긴 몬주익 언덕에서 모리시타 고이치(일본)와 양자 대결을 벌인 끝에 내리막길에서 폭발적으로 스피드를 끌어올리며 1위로 결승선을 통과했다. 대한민국 제1호이자 유일한 육상 올림픽 금메달이었다. 올림픽 메인스타디움에서 애국가가 울려 퍼진 것도 이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당시 황영조가 "훈련이 너무 힘들어서 달리는 차에 뛰어들어 죽고 싶었다"고 말한 것은 유명한 이야기가 됐다.
- ▲ 황영조(사진 왼쪽), 고 손기정(사진 오른쪽)
황영조는 하늘에서 뚝 떨어진 선수가 아니었다. 그의 탄생 뒤에는 한국 마라톤의 유장(悠長)한 전통이 흐르고 있었다. 한국 마라톤의 영광은 일제 강점기인 1936년 베를린 올림픽 당시 고 손기정 선수의 우승에서 시작됐다. 일장기를 가슴에 달고 출전한 망국(亡國)의 마라토너는 우승 후 조선일보와의 국제전화 인터뷰에서 "네, 손기정이오…" 하는 한마디를 전한 뒤 한참을 흐느껴 울었다고 전해진다. 이것은 전 종목을 통틀어 한국인이 올림픽에서 기록한 첫 우승이었다. 이후 한국 마라톤은 1947년 서윤복, 1950년 함기용이 유서 깊은 보스턴 마라톤을 잇달아 정복하며 세계적 강국의 반열에 올랐다. 해외 언론에서 "한국선수들이 잘 달리는 것은 김치를 먹기 때문"이라는 분석 기사를 내놓던 시절이었다.
황영조로부터 배턴을 이어받은 선수는 동갑내기 이봉주(39)였다. 1996년 애틀랜타올림픽에서 은메달을 따낸 그는 2000년 2시간7분20초의 현 한국 최고기록을 세웠고, 2001년엔 보스턴 마라톤을 정복하며 함기용 이후 51년 만에 다시 월계관을 가져왔다. 육상의 황무지인 한국이지만 마라톤만큼은 세계적인 실력을 갖추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봉주의 보스턴 정복을 끝으로 한국 마라톤도 쇠락의 길을 걸었다. 한국 육상계는 황영조와 이봉주의 후예를 길러내는 데 실패했다. 이봉주의 한국기록은 9년째 그대로이며, 권은주의 여자마라톤 기록(2시간26분12초·1997년 춘천마라톤)도 12년째 깨지지 않고 있다. 2011년 대구세계육상경기선수권대회를 2년 남기고 이렇다 할 기대주 한명도 꼽기 어려운 현실이다. 한국 마라톤의 몰락은 한국 육상의 침몰이기도 하다